우노 마사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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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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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니치 드래곤즈 타격코치 시절

이름
우노 마사루 (宇野 勝)
생년월일
1958년 5월 30일 (65세)
국적
일본
출신지
치바 현 요카이치바 시[1]
포지션
유격수, 3루수, 2루수
투타
우투우타
학력
치바 현립 쵸시 상업 고등학교
프로입단
1976년 드래프트 3위
소속팀
주니치 드래곤즈(1977~1992)
치바 롯데 마린즈(1993~1994)
지도자 경력
주니치 드래곤즈 타격코치(2004~2008, 2012)
주니치 드래곤즈 2군 타격 겸 종합 코치(2013)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1984년 센트럴리그 최다 홈런
1983년
야마모토 코지
(히로시마 도요 카프)
오오시마 야스노리
(주니치 드래곤즈)
36홈런

우노 마사루
(주니치 드래곤즈)
카케후 마사유키
(한신 타이거스)
37홈런

1985년
랜디 바스
(한신 타이거스)
54홈런

1. 개요
2. 선수 생활
3. 은퇴 이후
4. 기타


1. 개요[편집]


일본의 전 야구 선수.


2. 선수 생활[편집]


1976년도 드래프트 3순위로 주니치 드래곤즈에 입단하게 된다. 호타준족으로 주목을 받았으며 동년배의 하라 타츠노리와 비견되는 장타자 유망주였다. 하라가 도카이대학 진학을 결정하면서 고졸 신인으로 프로에 하라보다 먼저 발을 들이게 된다. 실제로 하라가 3유간 같이 보자며 대학입학을 종용했다고 한다.

입단후 1977~78년까지는 간간히 대타로 출장을 하면서 파워있는 타구를 선보여서 기대를 모았고, 1979년부터 주전 자리를 꿰차면서 본격적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1981년부터 포텐이 폭발, 1979년부터 1992년까지 14시즌 연속 두자리수 홈런을 기록했고, 25홈런 이상을 5번, 30홈런 이상을 세 번, 40홈런 시즌을 한 번 가졌다. 그리고 1984 시즌에 37홈런으로 일본프로야구 유격수 출신으로는 최초의 홈런왕[2][3]에 오르고, 다음 해인 1985년에는 41홈런을 치며 일본프로야구 유격수 단일시즌 최다홈런을 기록했다. [4] 이후 은퇴할 때까지 유격수 통산홈런 1위(338홈런)를 기록하는 등,[5] 주니치의 간판타자이자 주전 유격수로 오랫동안 활약했다. 말년은 고향에 새로이 자리잡은 치바 롯데 마린즈에서 보냈다.

우노 마사루의 통산성적

여기까지만 보면 한 시대를 풍미했던 거포 유격수의 화려했던 일대기라 할 만 하다.



그 이면에는 온갖 몸개그변태스탯, 정교함 따윈 개나 줘버리는 야구센스로 유명했다. 특히 수비에 있어서는 일본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관객들에게 큰 즐거움을 선사했던 선수였으며, 그의 역사에 길이 남을 수비는 여러 차례나 자팀 팬들은 뒷목잡고 쓰러지게, 타팀 팬들은 배를 잡고 아프도록 웃게 만들었다. 유형을 정리하자면, 신체조건 좋고 파워 뛰어나고 강견에 포텐 자체는 엄청난데 몸아이큐가 떨어져서 정교함과는 거리가 먼 플레이와 어이상실한 개그성 플레이로 지금까지도 전설로 회자되는 장면을 많이 연출했다. 1979 ~ 1982시즌 4년 연속 실책왕을 차지하였으며, 17년간의 선수생활 통산 실책왕 7회, 통산 270실책의 기록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당연히 선수생활 내내 골든글러브를 탄 적이 없다.[6] 단, 전체 성적으로 평가하는 베스트나인은 3번 수상했다.

보통 유튜브에 돌아다니는 일본야구 선수들의 진기명기를 보면 대부분이 아크로바틱한 플레이[7]가 주를 이루는데 비해 우노 마사루는 죄다 몸개그가 주다.[8] 가장 유명한 몸개그 플레이로는 1981년 8월 26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호시노 센이치 전 주니치 감독이 유도한 플라이볼을 헤딩으로 만들어 실점하게 하고[9]이에 분노한 호시노가 글러브를 패대기치는 장면[10]으로서, 1983년부터 방송중인 유서깊은 프로그램인 '프로야구 진기명기 대상' 이 이 플레이에서 비롯되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이런 유형의 선수들이 가장 키우기 어려운 유형인데도 코치들이 포기 못하는 타입이기도 하다.[11] 다만 유격수를 계속 지킨 건 나름 사연이 있었는데, 코치들이 어떻게든 공격이라도 써먹으려고 수비부담이 상대적으로 적은 3루수외야수 기용을 시도해봤는데 우노는 묘한 루틴을 가지고 있어서 유격수 이외의 포지션에 출장하는 날엔 타격성적이 항상 바닥을 기었고, 그런 탓에 우노가 코치들에게 유격수로 계속 기용해달라고 간청해서 유격수로만 출장하면 수비는 둘째치더라도 장타는 뻥뻥 쳐대니 계속 유격수로 기용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30대부턴 타츠나미 카즈요시 등의 신예 선수들에게 유격수 자리를 내주고 주로 3루수로 출장했다.

스탯을 참고해보면 알겠지만 볼넷/삼진(BB/K) 비율(통산 605볼넷/1306삼진)도 주목할만한데 나쁜 볼도 '에라 모르겠다' 식으로 풀스윙으로 일관한 덕분에 삼진이 볼넷보다 두 배가 넘은 시즌이 대부분이었다. 즉, 전형적인 영웅스윙어.[12] 그래서인지 3할 타율을 기록한 시즌은 1989년의 .304 딱 1번뿐이었다.[13] 여기에 거포 타자임에도 찬스 상황에 은근 약했어서, 단 한 번도 100타점을 넘기질 못했다.[14][15] 여기에 통산 78도루를 기록했는데 도루실패가 96개나 된다. 이로서 통산 도루성공율 45%[16]라는, 어찌보면 실책 기록만큼이나 대단하다고 볼 수 있는 기록을 달성했다. 당연히 개인의 스탯에나 팀 득점에나 도움이 안 되며, 특히 현대의 세이버매트릭스 기준으로 도루는 70%~80%의 성공률은 가져야 해볼 만하다고 하는데 45%는 불가능한 걸 억지로 한 수준이다.

그래도 이런 류의 거포 유격수가 워낙 드문데다, 화끈한 스타일 덕분에 오히려 우노를 좋아하는 팬도 많았다.


3. 은퇴 이후[편집]


은퇴 후 현장을 오래 떠나 있었는데 그동안 TV나 라디오에서 해설가로 일했다. 그러다가 2004~2008년 시즌까지 친정팀 주니치 드래곤즈의 타격코치를 맡으면서 선수시절때 못해본 일본시리즈 우승을 경험했다.

2009년에 팀을 떠나 4년 간의 야인 생활을 거친 후 2012년 시즌부터 다시 주니치의 타격코치로 복귀하여 이듬해엔 2군 타격 겸 종합 코치로써 시즌 종료 때까지 근무했다.


4. 기타[편집]


  • 우노의 뒤를 잇는 또다른 거포 유격수였던 야쿠르트 스왈로즈이케야마 타카히로와 스타일 면에서 비슷한 점이 많은데, 이케야마 역시 무지막지한 배트스피드에 의존한 배드볼 히터, 영웅 스윙어였으며 뛰어난 장타력에 비례해 삼진도 무수히 당했던 선수였고, 또 주니치 구단 사상 최다 홈런 기록을 가진 우노와 마찬가지로 야쿠르트 구단 사상 최다 홈런(304개)를 가지고 있는 것 등 우노와 똑같은 점이 참 많다. 이 때문에 방망이를 언제나 붕붕 휘두른다며 붕붕마루(ブンブン丸)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 선수시절 내내 3할 타율은 딱 한 번 기록했다는 점도 똑같다.[17] 단, 이케야마는 우노와 달리 통산 108도루/49도루자, 도루성공률 68.8%로 주루, 도루 실력이 어느 정도 갖춰졌던 데다 1990년대 초반 노무라 켄지로, 카와이 마사히로 등 뛰어난 수비력을 지닌 유격수들 사이에서도 골든글러브를 1차례 수상했을 정도로 유격수 수비도 괜찮았으며 무엇보다도 야쿠르트의 1990년대~2000년대 초반의 황금기를 지탱하며 우노는 단 1번도 경험하지 못한 일본시리즈 우승을 4번이나 맛보고, 이 중 2번이나 우수선수상을 수상할 정도로 큰 경기에도 나름 괜찮은 실력을 발휘하던 선수였다. 대신 우노와는 달리 이쪽은 선수생활 내내 타격 타이틀 수상을 해본 적이 단 1번도 없었다.
  • 노안으로도 유명한 선수다. 그나마 맨 위에 사진은 신인 때라 노안이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아래 사진을 보면 저 호호 할아버지가 아직 50대 초중반이다.
  • 상기에 나왔던 헤딩 사건 이후 호시노에게 얻어맞기까지 하고 곤욕을 치뤘지만 이 장면이 일본 전역에 방송되면서 모든 야구팬들에게 큰 인기를 얻게 되었고, 거기에 평소 친근하고 유쾌한 성격도 겹쳐 헤딩형이라는 친근한 별명까지 생기며 방송프로 섭외가 크게 늘었다고 한다. 헤딩 사건은 현재까지도 꾸준히 단골 소재로 쓰이고 있는데, 우노도 소년 야구교실에서 순회 코치를 할 때 자신을 '야구에서 최초로 플라이볼에 헤딩한 사람'이라고 자학개그를 하기도 하며 초등학생들이 "아저씨! 야구공에 헤딩하는 방법좀 가르쳐주세요!"라고 물어보기도 한다고.
  • 2019년 롯데 자이언츠신본기 선수가 헤딩을 선보인 이후 일본에서도 이 선수와 비교되고 있다. #
  • 등번호 7번은 나중에 한국에서 건너온 이종범이 2년간 사용하며 1999년 센트럴리그 우승을 경험했고, 나중에 7번을 단 한국인 선수인 이병규는 주니치의 53년만의 일본시리즈 우승인 2007년 일본시리즈 제패에 공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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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소사시.[2] 2018년 현재까지도 유일한 기록이다.[3] 다만 카케후 마사유키와 공동 수상한 것으로, 즉 2017년 현재까지 단독 유격수 홈런왕은 단 1번도 안 나왔다.[4] 41개면 웬만한 시즌 홈런왕 수치지만 이 해엔 한신 타이거스랜디 바스가 홈런을 무려 54개나 치는 바람에 홈런왕에는 이르지 못했다.[5] 치바 롯데 시절 친 홈런 4개를 빼면 총 334홈런인데, 이는 주니치 드래곤즈 구단 사상 최다 홈런 기록이기도 하다. 다만 30대 이후로는 거의 유격수로 출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 338홈런 전부가 순수 유격수 포지션으로 기록한 홈런은 아니다.[6] 일본의 골든글러브는 수비 실력으로 평가한다.[7] 이런 플레이를 好プレー라고 칭한다.[8] 주로 이런 플레이를 珍プレー라고 한다.[9] 이후 38년 만에 KBO에서 롯데 자이언츠 소속 유격수인 신본기가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며 이 일이 국내에 알려지게 되었다. 다만 신본기의 경우 머리를 맞고 튀어나간 공이 얼마 날아가지 않아 옆에 있던 외야수인 전준우가 잡아 플라이 아웃으로 처리했다는 점. 공식 기록 또한 유격수맞고 좌익수 플라이로 처리되었다.[10] 당시 요미우리가 지난 시즌부터 이어나가던 연속경기 득점 기록이 걸려있었다. 안티 거인의 화신 호시노로서는 저지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때 주니치 선수들이 호시노가 우노를 폭행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는 뒷이야기가 있었던 건 덤. 아니나다를까 우노는 그날 호시노한테 신나게 아구창 털렸다고 한다. 헌데 반전이 있다면 이날 경기 호시노는 완투승을 거뒀고 그 승리를 이끈 결승타점은 바로 우노의 투런포였다. 나중에 우노가 유튜브에서 그 일화를 풀었는데 본인은 결승타 주인공임에도 그 개그실책때문에 기가 푹 죽어있었는데 호시노가 보자마자 '멍청한 자식, 기운 좀 차리라'라고 주먹으로 아구창 날렸다고 한다. 그러고선 바로 위로를 해줬다고 호시노는 결국 절친 후배인 고마츠와의 요미우리전 무실점 내기에서 졌는데 고마츠 요미우리전 연속득점 저지성공 당시 결승타 주인공도 바로 우노다.[11] 신장 181cm인데, 당시만 해도 일본 출신 유격수 중에서 이 정도 키를 가진 유격수는 거의 없었다. 큰 키에 유격수를 보는 선수로선 드물게 파워까지 겸비했으니 코칭스태프 입장에서는 탐이 날 수밖에 없다.[12] 이 선수가 남긴 진기한 기록들 중에는 10타석 연속 볼넷23경기 연속 삼진도 있다. 10타석 연속 볼넷은 1984년 한신의 카케후 마사유키와 홈런 공동 1위였는데 마침 마지막 2경기가 한신과의 경기여서 나온 기록으로, 카케후 마사유키도 10타석 연속 고의사구성 볼넷을 얻어내며 공동 홈런왕이 되었다. 참고로 이 중에는 만루에서 밀어내기도 있었다.[13] 그런데 이 시즌에도 '40사사구/82삼진으로 삼진이 사사구의 2배가 넘었다.[14] 시즌 최다타점이 위에 나온 유격수 시즌 최다 홈런을 친 41홈런을 친 해인 1985년에 나왔는데, 이때도 타점은 91점에 불과했다.[15] 다만 우노는 전성기에 보통 5-6번 타순에 들어섰다. 타점이 많이 나올 타순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하다고는 하지만 2005년 이마오카 마코토처럼 5번타순에서 147타점이나 벌어들인 사례도 있어 애매하다고 하긴 뭐하다. 굳이 일본 사례를 참고하지 않더라도 2014년에 6번타순에서 100타점을 기록한 이승엽의 사례도 있다. 일본에서 유격수 100타점은 토리타니 타카시가 처음 기록했다.(2009년 104타점)[16] 아카호시 노리히로식으로 계산(도루-도실*2)하면 -114나 된다. 당연히 역대 최악.[17] 1990년 우노와 동일하게 .304로 딱 1번 기록했는데 이해 홈런도 31홈런을 기록해 NPB 최초의 유격수 3할 30홈런 을 달성했다! 참고로 우노가 유일한 3할을 찍은 1989년 친 홈런은 25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