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노 소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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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제75대 내각총리대신
우노 소스케
宇野宗佑 | Uno Sōsuke


파일:宇野宗佑.jpg

출생
1922년 8월 27일
시가현 야스군 모리야마정
(現 시가현 모리야마시)
사망
1998년 5월 19일 (향년 75세)
시가현 모리야마시 시가현립 성인병 센터
재임기간
제75대 내각총리대신
1989년 6월 3일 ~ 1989년 8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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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인척
우노 오사무 (사위)
학력
요시신 심상소학교 (졸업)
시가 현립 하치만 상업학교 (졸업)
히코네 고등상업학교 (졸업)
고베상업대학 (중퇴)
정당

지역구
시가 전현구
의원 선수
12 (중)
의원 대수
29, 30,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
약력
시가현의회 의원
시가현의회 부의장 (제45대)
고노 이치로 비서
중의원 의원 (제29-40대)
제5대 자유민주당 청년국장
방위청 장관 (제32대)
과학기술청장관 (제31대)
행정관리청 장관 (제44대)
통상산업대신 (제44대)
외무대신 (제113대)
제75대 내각총리대신
군사 경력
임관
학도출진 (1회)
복무
일본제국 육군
1943년 ~ 1945년
최종 계급
소위
참전
제2차 세계 대전

1. 개요
2. 생애
3. 소속 정당
4. 선거 이력
5. 기타



1. 개요[편집]


일본의 정치인. 75대 일본국 내각총리대신를 지냈다.


2. 생애[편집]


1922년 시가현 야스군 모리야마정 태생. 독특하게도 학도병으로 징병되어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경력이 있다. 이때 그의 보직은 회계 장교. 일제강점기 조선 북부에 배치되었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총 들고 전쟁에 나가지는 않았다. 고베상업대학(현 고베대학) 재학 중이었으나 징병으로 불가피하게 중퇴했다.

1945년 8월 일본 제국항복한 후 소련군이 진주하여 8월 23일, 우노는 소련군에 붙잡혀 무장 해제를 당한뒤 북한내 수용소를 거쳐 2년여간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억류생활을 했다가 1947년 7월 28일 석방되어 일본으로 귀환했다. 이때 자신의 포로 생활에 대해 저술한 책인 "다모이 토쿄"(러시아어로 '도쿄로의 귀환'이란 의미)의 책을 쓰고 이 책은 1952년에 영화화 되기도 했다.

귀환후 고향 모리야마정의 상공회의소 회장을 맡았고 1951년에는 시가현 의원에 당선되었다. 원래는 자유당 소속이었지만 민주당 소속 모리 코타로가 시가현 지사가 되면서 민주당으로 이적했다. 이후 55년에 자유당과 민주당의 보수대연합으로 자유민주당 소속이 된다.

1958년 중의원 선거에서는 낙선했으나 거물 정치인 고노 이치로[1]의 직계로 들어가게 되어 고노 이치로의 비서로서 중앙정치를 배우게 된다. 1960년 중의원 선거에 다시 출마하지만 자민당에서 공천을 받지 못해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된뒤 자민당으로 복당했다.

이후 국회에서 각료로 방위청 장관, 자민당 국회대책위원장을 역임했는데 국회대책 위원회 의장 당시 록히드 사건이 터지면서 야당들의 공세에 대처해야 했다. 이후 후쿠다 다케오 총리 시절에 과학기술청 장관을 지내면서 미국과 핵연료 도입에 대한 협상을 진행한다. 오히라 마사요시 총리 시절에는 행정관리청 장관을 지냈다. 행정관리청 장관 시절에는 각부처 장관들을 직접 호출했고 차관 등을 보내면 일절 만나주지 않았을 정도였다고 한다.

1982년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자민당 총재에 선출되어 총리에 지명되자 간사장 대행을 맡았고 야마나카 사다노리 통상산업대신이 병으로 대신직을 사임하자 후임 통상산업대신에 임명되었다. 다케시타 노보루 내각에서는 외무대신을 역임하는 등 정치인보다는 오히려 행정 관료의 이미지가 강했던 인물이었다.

그런 가운데 1989년, 다케시타 노보루는 하토야마 유키오등이 폭로한 정치자금 스캔들인 리크루트 사건에 소비세 문제로 지지율이 급락하자 4월 25일 사임을 발표했다. (섹스 스캔들 때문이란 이야기도 있다.)

사실 우노는 정상적이었다면 총리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자민당내 특정 파벌의 영수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리크루트 사건 때문에 자민당의 유력자들이었던 아베 신타로, 미야자와 기이치, 와타나베 미치오 등은 여론의 뭇매를 우려해서 총리로 나서기 어려운 상황이었고 고모토 토시오는 리크루트 사건과는 관련이 적긴 했지만 통상산업대신 재직 시절 산코기선 경영난 문제때문에 능력에 의구심을 일으켜 당내에서 거부여론이 많았다. 결국 자민당 내에서 총리 임기만료로 물러난 나카소네 야스히로의 파벌인 나카소네파의 2인자이자, 리크루트 사건과 연관성이 가장 적었던 우노를 총리로 옹립하자는 결론이 나게 되었던 것이다.

파일:external/www.westatic.com/souri75.jpg

자민당 역사상 특정 파벌의 영수가 아닌 인물이 총리가 된 일은 우노가 최초였는데[2], 총회에서 이례적으로 만장일치를 받지 못하고 다수결로 총재가 가결된 가운데 6월 2일 총리가 되었고, 정식으로 아키히토 덴노의 인준을 받은 첫 총리가 되었다. 헤이세이 시대 최초의 총리는 당연히 연호를 바꾼 전임자. 단, 전임자는 취임 당시에도 이미 아키히토 황태자가 쇼와 덴노의 대리청정을 하고 있었던 터라 다케시타 총리의 임명장에 부황 서명을 본인 필체로 대리했고 옆에 본인 서명도 병기했었다. 고로 아키히토의 인준을 받은 실질적 첫 총리는 다케시타 총리인 셈이다.

취임 초에는 리크루트 사건과 무관한 인물인 탓에 깨끗한 총리로서 언론에서도 스포트라이트를 다룰만큼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불과 취임한지 1달도 안 되어서 카쿠라자카의 게이샤와의 부적절한 관계가 폭로되면서 치명타가 되고 말았고, 이는 소스케가 3개월 만에 총리 자리에서 내려오고 만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일본 역사상 처음이자 유일하게 총리가 섹스 스캔들로 실각한 사례였는데, 우노의 내연녀였던 게이샤에 따르면 그는 모욕적일 정도로 적은 액수(30만엔)의 돈을 주고 애정 관계를 사려고 했다고 한다.[3]

결국 89년 7월에 열린 참의원 선거에서 리크루트 사건과 소비세 문제에 우노의 여성 스캔들이 도마[4]에 오르며 역으로 일본사회당도이 다카코가 인기를 얻는 소위 도이 붐이 강타해 자민당은 결국 역사상 최저치인 36석밖에[5] 얻지 못하여 과반수에 18석이 미달, 결국 단독과반에(1989년 자민당 의석수는 142석이었는데 109석으로 줄어들었다) 실패했다.[6] 결국 우노는 여기에 책임을 지고 총리 사퇴를 발표, 후임에 가이후 도시키가 총리가 되었다.

이후 1998년 자택에서 폐암으로 사망했다.


3.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1951 - 1955
정계 입문


1955 - 1960
합당[7]

[[무소속|
무소속
]]

1960
탈당


1960 - 1998
복당
정계 은퇴
사망


4.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지역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51
1951년 시가현의회 선거
시가현


? (%)
당선
초선
1955
1955년 시가현의회 선거
? (%)
당선
재선
1958
제2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시가현 전현구


48,319 (12.0%)
낙선 (6위)

1960
제2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무소속|
무소속
]]

57,185 (14.3%)
당선 (2위)
초선
1963
제3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71,585 (18.0%)
당선 (2위)
재선
1967
제3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71,620 (18.0%)
당선 (1위)
3선
1969
제3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70,786 (17.1%)
당선 (2위)
4선
1972
제3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66,914 (13.9%)
당선 (2위)
5선
1976
제3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87,876 (16.2%)
당선 (1위)
6선
1979
제3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97,351 (19.5%)
당선 (2위)
7선
1980
제3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21,141 (21.9%)
당선 (2위)
8선
1983
제3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08,783 (20.8%)
당선 (1위)
9선
1986
제3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90,071 (14.5%)
당선 (3위)
10선
1990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29,526 (19.6%)
당선 (1위)
11선
1993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74,679 (11.5%)
당선 (4위)
12선[8]


5. 기타[편집]


불과 69일동안의 재임기간으로 그다지 특기할만한 사항은 없다고 볼 수 있다. 취임 바로 다음날 중국에서 천안문 사건이 일어났다.

사위인 우노 오사무가 우노 소스케의 고향이 속한 시가현 제3구에 중의원으로 출마했으나, 지역구 당선에는 실패했다.[9]

대한민국의 시사 만화가 굽시니스트가 그리는 본격 시사인 만화에서 일본 총리들의 엽색행각을 다룰 때 한 컷 등장한다.# 이름이 '소스케'로 같다는 점에서[10] 만화 블리치의 등장인물 아이젠 소스케로 패러디됐다. 게이샤 스캔들을 묘사하면서 옆에 나온 여캐는 역시 블리치의 등장인물인 히나모리 모모.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0 23:25:56에 나무위키 우노 소스케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고노 요헤이의 아버지이자, 고노 다로의 할아버지다.[2] 두번째 기록은 아베 내각에서 관방장관을 지낸 스가 요시히데. 그 역시 자민당 내 무파벌로서, 특정 파벌의 영수가 아니었으나, 간사장인 니카이 도시히로를 필두로, 최대 파벌인 호소다파의 실질적 영수인 아베 총리와 지공회(자민당에서 두번째로 큰 파벌)의 영수이자, 부총리 겸 재무상인 아소 타로의 지지를 받아 자민당 총재가 되었다.[3] 일본에서는 일부일처제에 충실한 총리가 있다면 놀랄 만한 일이라고 할 정도인데, 열정적이고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는 으레 성욕 또한 왕성하게 넘쳐나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우노 소스케에게 내연녀가 있었다는 사실 또한 그 자체는 전혀 뉴스거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것이 뉴스가 되었던 것은 우노가 내연녀를 대하는 방식이 너무나 쩨쩨했기 때문이다. 일본 정치권에서는 모니카 르윈스키 스캔들을 둘러싼 미국에서의 소란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만약 같은 일이 일본에서 벌어졌다면, 클린턴이 맹렬히 비난받은 것은 불륜관계 자체가 아니라 집무실에서의 오럴 섹스였을 것이다. 일본에서 정치인이 성욕이 넘치는 것은 관대하게 받아들여진다. 단, 성적인 일탈은 철저히 근무 장소와 시간 외에서만 할 수 있는 자제력이 있어야 한다.[4] 참고로 우노 총리와 스캔들에 휘말렸던 그 게이샤는 결국 출가해서 비구니가 되었다.[5] 이게 얼마나 대단한거냐면 아베 신조도 참의원 통합 의석수에서는 사상최저(83석)를 기록 하였는데도 이 기록만은 경신하지 못했을 정도(37석).[6] 반대로 사회당은 46석을 얻으며 1956년 참의원 선거(이 선거에서 사회당은 49석을 얻고, 자민당의 2/3확보를 저지했으며 2004년 선거에서 민주당이 50석을 얻을때 까지 야당 중에서 사상최고치로 기록되어 있었다) 이후 사상최고치를 기록하며 승리하였다.[7] 일본민주당과의 신설합당[8] 일본의 마지막 중선거구제.[9] 44회 총선 때는 석패율제로 구제되어 당선되었으나, 45회 총선 때는 아예 낙선했다.[10] 다만 발음만 같고 한자는 서로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