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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宇文護
513년 ~ 572년
북주의 종실.
소혜공(邵惠公) 우문호의 막내아들이자,우문호 아들 우문호 북주의 추존 태조인 우문태의 조카였으며 자는 살보(薩保)였다.
마치 서로마 제국 말기의 리키메르처럼[1] 3명의 황제를 시해한 중국사 희대의 권신으로 악명이 높다.
우문태는 생전에
556년 우문태가 죽고, 그의 적자이자 3남인 우문각이 후사를 이었는데, 사촌인 우문호는 서위의 공제를 겁박하여 우문각에게 선양하도록 하고, 557년 북주를 건국했다.
우문호는 이 개국의 공로로 대사마에 임명되고 진공(晉公)에 봉해졌다. 우문각이 천왕이 된 후에도 실권은 여전히 우문호에게 있었는데 그는 점차 권신이 되어 갔다.
무천진 출신 관롱집단의 고위 관료들이었던 조귀(趙貴)와 독고신(獨孤信)[2] 이 권신 우문호를 숙청하려다가 실패하여 제거되었다.
효민제 우문각도 우문호를 죽인 후 실권을 되찾고 싶어했기 때문에 휘하 심복들인 이식(李植), 손항(孫恆), 을불봉(乙弗鳳), 하발제(賀拔提) 등과 모의해 사촌인 우문호를 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장광락(張光洛)이 이를 우문호에게 고발했고, 격노한 우문호는 곧 우문각을 폐위시킨 후 약양공(略陽公)으로 강등하고 시해했다.
우문호는 이후 우문태의 서장남인 우문육을 맞아들여 그를 즉위시키니 이가 바로 북주의 제2대 황제인 세종 명제였다. 명제 우문육은 즉위 후 우문호를 태사로 임명했다. 우문호는 겉으로는 권력을 명제 우문육에게 봉환했지만 여전히 군권을 장악하고 권세를 오로지했다. 명제 우문육은 총명한 인물로 사촌인 우문호를 매우 견제했는데, 이를 눈치챈 우문호는 명제가 현명하고 능력이 있는 명군이라 자신의 권력이 위협당할까봐(?!) 황실 주방장인 이안(李安)을 시켜 결국 우문육을 독살했다.
세종 명제 우문육은 붕어하기 직전 우애가 깊었던 아우인 우문옹을 후계자로 세웠는데 그가 바로 북주의 제3대 황제인 고조 무제였다. 우문호는 평소에 황궁의 어림군보다 더 많은 사병을 거느렸고, 부하들은 그런 우문호의 권세를 믿고 마음대로 전횡을 부렸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권신 그 자체였던 것이다. 무제 우문옹은 두 형이 우문호를 적대하고 유능함을 보여주다가 제거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제위 초기, 조용히 지내며 은밀히 우문호를 제거하기 위한 준비를 했다. 황제가 된 후, 무제는 우문호를 재상과 도독중외제군사라는 높은 벼슬에 임명하며 환심을 샀다. 우문호는 이를 믿고, 권세를 오로지하며 여러 전투에 나섰지만 결과는 영 좋지 않았다. 그러나 무제 우문옹은 우문호에게 계속 권력을 맡겼는데, 이를 통해 우문호를 방심시키는 한편, 우문호의 전단으로 그의 반대 세력이 늘어나 결과적으로는 우문호를 숙청할 정당성을 더 키웠다.
천화(天和) 7년(572년)[3] 우문호가 신하 유계재(庾季才)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커밍아웃 털어놓았다. 그 둘은 곧 자신들의 편으로 우문신거(宇文神舉), 우문효백(宇文孝伯), 왕궤(王軌) 등을 포섭한 뒤, 우문호 모살 작전을 꾸미기 시작했다.
572년 3월 고조 무제는 자신의 생모를 핑계삼아[6] 우문호를 불러들였다. 태후를 알현하러 온 우문호는 무제 우문옹의 기습으로 홀을 뒤통수에 맞아 쓰러졌고 즉시 우문직에게 참수당하여 끔살되었다.
고조 무제는 우문호의 죽음을 천하에 공표하고, 즉시 우문호의 자식들과 심복 측근들을 불러들여 모두 처형했다.(천화정변) 그리고 우문호 제거에 큰 공을 세우거나 능력이 있었지만 우문호 시대에는 중용되지 못했던 우문헌, 이목, 울지형, 두치, 우문직, 육통, 우문효백, 우문초 등으로 새로운 조정을 구성했다. 마침내 실권을 되찾은 고조 무제는 오랜 경쟁자인 고씨의 북제를 멸망시키고 화북 통일을 성취하여 천하통일의 대업으로 향하는 일보를 딛게 되었다.
2018년 중국 드라마 <독고천하>에서는 미남배우로 유명한 서정계가 우문호역을 맡았다. 독고신의 딸 독고반야와 연인 관계이다. 우문호는 국정을 좌지우지하는 권신이며 황위에 오를 적당한 시기를 기다리고 있다. 우문호는 자신을 제거하려는 효민제 우문각을 폐위시키고 우문육을 새 황제로 옹립했다.
宇文護
513년 ~ 572년
1. 개요[편집]
북주의 종실.
소혜공(邵惠公) 우문호의 막내아들이자,
마치 서로마 제국 말기의 리키메르처럼[1] 3명의 황제를 시해한 중국사 희대의 권신으로 악명이 높다.
2. 정사를 통한 생애[편집]
2.1. 서위의 공제를 시해하다[편집]
우문태는 생전에
며 어린 자식들을 대신해 집안일을 조카인 우문호에게 맡겼다. 훗날 중종 문제가 된 원보거를 맞아들인 공적으로 수지현백(水池縣伯)에 봉해졌고, 원보거가 서위의 초대 황제가 된 이후에는 통직산기상시(通直散騎常侍), 정로장군(征虜將軍)이 더해졌으며, 작위가 공으로 승작되었다가 이윽고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가 더해지고 중산공(中山公)이 되었다.“우문호의 뜻과 기량은 나와 같다.”
556년 우문태가 죽고, 그의 적자이자 3남인 우문각이 후사를 이었는데, 사촌인 우문호는 서위의 공제를 겁박하여 우문각에게 선양하도록 하고, 557년 북주를 건국했다.
2.2. 북주의 초대 황제인 효민제를 시해하다[편집]
우문호는 이 개국의 공로로 대사마에 임명되고 진공(晉公)에 봉해졌다. 우문각이 천왕이 된 후에도 실권은 여전히 우문호에게 있었는데 그는 점차 권신이 되어 갔다.
무천진 출신 관롱집단의 고위 관료들이었던 조귀(趙貴)와 독고신(獨孤信)[2] 이 권신 우문호를 숙청하려다가 실패하여 제거되었다.
효민제 우문각도 우문호를 죽인 후 실권을 되찾고 싶어했기 때문에 휘하 심복들인 이식(李植), 손항(孫恆), 을불봉(乙弗鳳), 하발제(賀拔提) 등과 모의해 사촌인 우문호를 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장광락(張光洛)이 이를 우문호에게 고발했고, 격노한 우문호는 곧 우문각을 폐위시킨 후 약양공(略陽公)으로 강등하고 시해했다.
2.3. 북주 제2대 세종 명제를 시해하다[편집]
우문호는 이후 우문태의 서장남인 우문육을 맞아들여 그를 즉위시키니 이가 바로 북주의 제2대 황제인 세종 명제였다. 명제 우문육은 즉위 후 우문호를 태사로 임명했다. 우문호는 겉으로는 권력을 명제 우문육에게 봉환했지만 여전히 군권을 장악하고 권세를 오로지했다. 명제 우문육은 총명한 인물로 사촌인 우문호를 매우 견제했는데, 이를 눈치챈 우문호는 명제가 현명하고 능력이 있는 명군이라 자신의 권력이 위협당할까봐(?!) 황실 주방장인 이안(李安)을 시켜 결국 우문육을 독살했다.
2.4. 북주 제3대 고조 무제를 옹립하고 최후를 맞다(천화정변)[편집]
세종 명제 우문육은 붕어하기 직전 우애가 깊었던 아우인 우문옹을 후계자로 세웠는데 그가 바로 북주의 제3대 황제인 고조 무제였다. 우문호는 평소에 황궁의 어림군보다 더 많은 사병을 거느렸고, 부하들은 그런 우문호의 권세를 믿고 마음대로 전횡을 부렸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권신 그 자체였던 것이다. 무제 우문옹은 두 형이 우문호를 적대하고 유능함을 보여주다가 제거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제위 초기, 조용히 지내며 은밀히 우문호를 제거하기 위한 준비를 했다. 황제가 된 후, 무제는 우문호를 재상과 도독중외제군사라는 높은 벼슬에 임명하며 환심을 샀다. 우문호는 이를 믿고, 권세를 오로지하며 여러 전투에 나섰지만 결과는 영 좋지 않았다. 그러나 무제 우문옹은 우문호에게 계속 권력을 맡겼는데, 이를 통해 우문호를 방심시키는 한편, 우문호의 전단으로 그의 반대 세력이 늘어나 결과적으로는 우문호를 숙청할 정당성을 더 키웠다.
천화(天和) 7년(572년)[3] 우문호가 신하 유계재(庾季才)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지만 우문호는 이 말을 듣지 않고[5] , 오히려 남진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무제 우문옹의 동생 우문직을 파직시키려고 했다. 이로 인해 우문직이 우문호에게 불만이 쌓이자, 무제 우문옹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우문직을 자신의 편으로 끌여들였다. 우문직이 우문호를 제거해야 한다고 강하게 간언을 올리자, 우문옹도 우문직에게 12년간 숨기고 살았던 생각, 즉 '우문호 제거' 에 대해우문호: 천도(天道)가 과연 어찌될 것 같소?
유계재: 곧 변고가 있을 것 같습니다. 공께서는 마땅히 권력을 천자에게 되돌려 주십시오. 그리고 청컨대 칭병하여 집에 머무르십시오. 그리하면 옛날 주공(周公) 단과 소공(召公) 석의 명성에 견줄 수 있고 자손들은 번성할 것입니다.[4]
572년 3월 고조 무제는 자신의 생모를 핑계삼아[6] 우문호를 불러들였다. 태후를 알현하러 온 우문호는 무제 우문옹의 기습으로 홀을 뒤통수에 맞아 쓰러졌고 즉시 우문직에게 참수당하여 끔살되었다.
고조 무제는 우문호의 죽음을 천하에 공표하고, 즉시 우문호의 자식들과 심복 측근들을 불러들여 모두 처형했다.(천화정변) 그리고 우문호 제거에 큰 공을 세우거나 능력이 있었지만 우문호 시대에는 중용되지 못했던 우문헌, 이목, 울지형, 두치, 우문직, 육통, 우문효백, 우문초 등으로 새로운 조정을 구성했다. 마침내 실권을 되찾은 고조 무제는 오랜 경쟁자인 고씨의 북제를 멸망시키고 화북 통일을 성취하여 천하통일의 대업으로 향하는 일보를 딛게 되었다.
3. 대중매체에서의 우문호[편집]
2018년 중국 드라마 <독고천하>에서는 미남배우로 유명한 서정계가 우문호역을 맡았다. 독고신의 딸 독고반야와 연인 관계이다. 우문호는 국정을 좌지우지하는 권신이며 황위에 오를 적당한 시기를 기다리고 있다. 우문호는 자신을 제거하려는 효민제 우문각을 폐위시키고 우문육을 새 황제로 옹립했다.
[1] 비록 리키메르는 황족은 아니었지만.[2] 수나라 문제 양견의 아내인 문헌황후 독고가라의 부친 겸 당나라 고조 이연의 외조부였다.[3] 이 시기는 우문호가 권력을 잡은 지 16년이 되는 해였다.[4] 주공 희단과 소공 희석은 주나라(서주) 초기의 인물로 주무왕이 붕어하고, 그의 어린 아들인 주성왕이 즉위하자 그가 성장할 때까지 섭정으로 보좌한 숙부들이었다. 주성왕이 어렸기에 자신들이 대신 권력을 잡았고, 그랬기에 그를 쫓아내고 자왕위를 차지할 수도 있었으나 끝까지 초심을 지켜 어린 조카를 잘 보필하고 물러나 유교에서 칭송받는 성인군자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의 후손은 노나라, 소나라, 연나라의 군주를 배출하며 수백년간 이어졌다. 당장에 앞서 말한 노나라와 연나라는 우리가 아는 공자의 고향 노나라와 전국칠웅의 연나라를 말한다.[5] 사실 우문호는 주공 및 소공과는 달리 이미 사촌 겸 황제를 2명이나 죽여버린(...) 희대의 권신이어서 유계재의 충고대로 순순히 은퇴해도 무탈할 가능성은 영 희박했다. 결국 죽을 때까지 집권할 수 밖에 없는 외통수의 형세가 되어버린 것이었다.[6] 태후께서 술을 너무 많이 드시니 좀 간언해주라는 구실로 술을 경계하라는 《주고》(酒誥)라는 책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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