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성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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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 호
대건(大建) / 취재(翠齋)
본관
단양 우씨[1]
출생
1861년 1월 12일
경상도 대구도호부 월배면 상인동
(현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2]
사망
1920년 9월 10일[3]
묘소
경상북도 고령군 다산면 벌지리
상훈
건국포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5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우성동은 1861년 1월 12일 경상도 대구도호부 월배면(현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에서 아버지 우해욱(禹海旭)과 어머니 밀양 박씨[4] 사이의 1남 3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일찍이 서찬규(徐贊奎)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경술국치 직후 마을에 있는 문중 재실인 열락당(悅樂堂)에 강습소를 개설하여 독립운동에 힘쓸 인재를 양성하기 시작했다. 1915년 비밀결사 조선국권회복단중앙총부(朝鮮國權恢復團中央總部)가 조직되자 이에 가담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모으는 한편 열락당 내 강습소를 비롯하여 윤상태(尹相泰)가 설립한 회보당(會輔堂)·송석정(松石亭) 등에서 시회(詩會)를 가장, 동지를 규합하고 모금을 계속하여 독립운동을 지원했다.[5]

그는 1919년 3월 파리 강화 회의에 한국독립을 호소하기 위하여 김복한을 중심으로 한 충청도 유림과 김창숙 등의 영남유림 137명이 대표가 되어 작성한 독립청원서에 영남유림의 한 사람으로서 같은 문중 사람인 우경동·우승기·우찬기·우하교·우하삼(禹夏三)과 함께 서명하였다. 이들은 '파리장서'를 통해 일제가 자행한 명성황후·고종황제의 시해와 한국 주권의 찬탈과정을 폭로하면서 한국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주장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일은 1919년 4월 12일 경상북도 성주군의 만세운동과 관련하여 당시 독립청원서 서명자의 한 사람이었던 송회근이 붙잡히는 바람에 발각되었다. 이 때문에 우성동도 일경에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다만, 일제는 이들 유림이 한국인의 존경을 받는 인물들이었으므로 민족적 감정이 더욱 번질 것을 우려한 나머지 크게 부각하지 않았다.

우성동은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예심에 회부되었으나, 그해 8월 9일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서 불기소처분을 받고 출옥했다.

그러나 옥고의 여독으로 고통을 겪다가 1920년 9월 10일 별세하였다.

199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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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판서공파-정랑공 홍적(洪迪)파 26세 동(東) 항렬.[2] 단양 우씨 판서공파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우경동·우병기·우승기·우찬기·우하교도 이 마을 출신이다.[3] 음력 7월 28일.[4] 박치목(朴致穆)의 딸이다.[5] 달서구사(達西區史) 하편 52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