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을기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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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창작물에서


1. 개요[편집]


于乙其乃
? ~ 1583
여진족의 인물. 본래 한자이름이 아닌 여진식 이름을 사용하는 만큼 울지내(鬱只乃)라고 불리기도 한다.[1]

1583년 함경북도 경원군 지방을 침략했으며 건원보 권관 이순신의 유인책에 말려들어 참살되고 수급이 한양으로 보내져 동소문 밖에 효수되었다. 이순신은 이 공으로 상찬을 받았지만 북병사 김우서의 시기를 받아 김우서의 모함으로 상이 취소되었다.

선조수정실록에는 이순신이 1587년 녹둔도 전투의 일로 백의종군을 하는 동안 우을기내를 유인해 생포하여 사면받았다고 하는데 이는 위의 기록과 혼동한 실록 편찬자들의 오기로 보인다. 일단 우을기내 생포작전은 선조실록에 1583년으로 나오고 이충무공전서, 난중잡록에도 1583년의 일로 나온다.


2. 창작물에서[편집]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여진족의 추장. 배우는 윤용현. 선조수정실록의 기록에 따라 녹둔도 전투 즈음에 등장을 한다. 선조실록과 이충무공전서의 기록으로 보면 그야말로 좀비

마니응개, 사송아 등을 부하로 거느리고 있으며, 식량 부족으로 곤란을 겪는 상황에서 오형의 여동생 곱단을 납치했는데, 이로 인해 이순신이 포로를 풀어주는 대신 농기구, 농업 기술을 지원하면서 농사에 뛰어난 농군들을 파견하고 조선에 잡힌 여진족의 포로를 풀어주겠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조선 조정에서는 이를 들어주지 않았고 원균여진족 포로를 모두 죽이자 이순신에게 선전포고를 하며, 정해왜변이 일어날 때 이순신이 사람을 보내 여진족을 정찰하는 것을 알았지만 적이 규모를 알고 두려움에 떨게 하도록 하기 위해 일부러 놔준다.

조선군에게 불안감을 심어주기 위해 일부러 공격을 늦추다가 이순신이 원군을 요청하기 위해 녹둔도를 비운 사이에 부하들에게 녹둔도를 공격을 지시해 함락하며, 포로로 잡아온 백성들을 모두 죽이고 시신을 불에 태웠다. 6진을 노렸기에 눅둔도를 점령하지 않았으며, 자신들이 일부러 노략질하는 것만을 목적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면서 자신들의 전체 규모를 은폐하기 위한 것이다.

여진족에 연합한 다른 추장들이 녹둔도를 점령하지 않은 것을 두고 연합에서 빠져나가려고 하자 일부러 점령하지 않은 것이라면서 조선군을 공격하는 시늉을 해서 조선군을 겁먹게 하며, 백의종군을 한 이순신에게 투항을 권유하면서 다음번에는 녹둔도와 함께 이순신의 목숨을 접수하겠다면서 물러난다.

북병영의 병사들이 남쪽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받자 북병영의 병사들이 한동안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 여겼는데, 1588년 1월에 일어난 시전부락 전투가 일어났다. 조선군에게 기습을 받자 맞서 싸우다가 이순신에게 패해 포로로 붙잡히며, 이순신에게 직접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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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몽골과 여진 인명 중에 '울지'라는 이름이 흔한 만큼 울지내가 본래의 발음에 더욱 가깝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