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디드니 학살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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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노사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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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이후에 벌어진 사건만 기술.
(20세기 이전에 벌어진 대표적인 제노사이드 사례로는, 인디언 전쟁미국아메리카 원주민 학살이 있다.)
※ 국제군사재판에 회부된 사건이라면 ⚖️ 표시.
사건 목록
세부 사항
헤레로족과 나마족 학살
,1904 ~ 1908,
후기 오스만 인종 청소
아시리아인 대학살
,1914 ~ 1924,
발생 위치}}} 파일:오스만 제국 국기.svg 오스만 제국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1915 ~ 1917,
발생 위치}}} 파일:오스만 제국 국기.svg 오스만 제국
관련 인물}}} 이스마일 엔베르
그리스인 대학살
,1914 ~ 1922,
발생 위치}}} 파일:오스만 제국 국기.svg 오스만 제국
홀로도모르 [!]
,1932 ~ 1933,
관련 인물}}} 이오시프 스탈린
롬인 말살 정책
,1935 ~ 1945,
파슬리 학살
,1937,
발생 위치}}} 파일:도미니카 공화국 국기.svg 도미니카 공화국
관련 인물}}} 라파엘 트루히요
제2차 세계 대전
슬라브인 말살 정책
,1939 ~ 1945,
홀로코스트 ⚖️
,1941 ~ 1945,
크로아티아 홀로코스트 및 세르비아인 학살
,1941 ~ 1945,
발생 위치}}} 파일:크로아티아 독립국 국기.svg 크로아티아 독립국
보슈냐크인 및 크로아티아인 학살
,1941 ~ 1945,
발생 위치}}} 추축국 점령하 유고슬라비아
관련 단체}}} 체트니크
크림 타타르족 추방
,1944 ~ 1948,
체첸인 및 인구시인 추방
,1944 ~ 1948,
발생 위치}}} 파일:소련 국기.svg 소련
과테말라 마야인 제노사이드
,1960 ~ 1996,
발생 위치}}} 파일:과테말라 국기.svg 과테말라
방글라데시 제노사이드
,1971,
발생 위치}}} 파일:방글라데시 국기(1971-1972).svg 동파키스탄
이키자
,1972,
발생 위치}}} 파일:부룬디 국기.svg 부룬디
아촐리족과 랑고족 학살
,1972 ~ 1978,
발생 위치}}} 파일:우간다 국기.svg 우간다
관련 인물}}} 이디 아민
동티모르 제노사이드
,1975 ~ 1999,
킬링필드 ⚖️
,1975 ~ 1979,
발생 위치}}} 파일:민주 캄푸치아 국기.svg 민주 캄푸치아
재판}}} ECCC
관련 단체}}} 크메르 루주
수용소}}} 뚜올쓸라엥
구쿠라훈디 학살
,1983 ~ 1987,
발생 위치}}} 파일:짐바브웨 국기.svg 짐바브웨
관련 인물}}} 로버트 무가베
안팔 학살
,1986 ~ 1989,
발생 위치}}} 파일:이라크 국기(1963-1991).svg 이라크 쿠르디스탄
관련 인물}}} 사담 후세인
이사크 학살
,1987 ~ 1989,
발생 위치}}} 파일:소말리아 국기.svg 소말리아 소말릴란드
관련 인물}}} 시아드 바레
보스니아 전쟁
보스니아 제노사이드 ⚖️
,1992 ~ 1995,
스레브레니차 학살
,1995,
발생 위치}}} 파일:스릅스카 공화국 국기.svg 스릅스카 공화국
르완다 제노사이드 ⚖️
,1994,
발생 위치}}} 파일:르완다 국기(1962-2001).svg 르완다
관련 단체}}} 후투족 | 투치족
제1차 콩고 전쟁 중 후투족 학살
,1996 ~ 1997,
발생 위치}}} 파일:자이르 국기.svg 자이르 키부
밤부티인 학살
,2002 ~ 2003,
발생 위치}}} 파일:콩고민주공화국 국기(1997-2003).svg 콩고민주공화국 이투리주
다르푸르 학살
,2003,
발생 위치}}} 파일:수단 공화국 국기.svg 수단 공화국 다르푸르
관련 인물}}} 오마르 알바시르
야지디 학살
,2014 ~ 2019,
발생 위치}}} 파일:이라크 국기.svg 이라크 니나와주 Sinjar
관련 단체}}} ISIL
중국의 위구르인 탄압
,2014 ~ ,
미얀마의 로힝야 탄압
,2016 ~ ,
발생 위치}}} 파일:미얀마 국기.svg 미얀마 라카인주
[!] 논란의 여지가 있음.



운디드니 학살
Wounded Knee Massacre


파일:attachment/운디드니 학살사건/Wounded Knee Massacre.jpg

MASSACRE 부분에 철판이 덧대어진 것을 볼 수 있는데, 과거에는 MASSACRE가 아니라 BATTLE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발생일
1890년 12월 29일
사고일로부터 48665일, 133주기
발생 위치
Čhaŋkpé Ópi Wakpála
(북위 43°08′33″ 서경 102°21′54″)
유형
전쟁범죄(양민학살·인종청소·총기난사), 테러리즘
주동세력
제7기병연대
피해부족
총 2개지파
라코타 지파 Mnikowoju
라코타 지파 Húŋkpapȟa
피해
재산피해

사망자
총합 290여 명
남자: 90 명[1]
여성·아동: 200여 명[2]
부상
경상 44 명, 중상 7 명
1. 개요
2. 배경
3. 전개
4. 평가
4.1. 운디드니 점거 사건
5. 관련 매체
6. 기타
7. 유사 사례
8.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파일:external/selkywolf.com/miniconjou.jpg

인디언 전쟁 말기인 1890년 12월 29일 미 육군 제7기병연대 500여 명이 사우스다코타 주 운디드니[3]와 그 근처 언덕에서 저지른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학살.

이 학살 사건으로 발생한 희생자는
  • 남자 90명 사망
  • 여자 및 아동 200명 사망
  • 44명 경상
  • 7명 치명상

으로 집계되며, 추장 큰발(Big Foot)을 비롯한 수우 군인, 노인, 여자와 어린아이들이 포함된 350명의 수우인들 중 무려 290 명이 사망하는 참극을 맞았다.

운디드니(Wounded Knee)는 라코타어로 '상처입은 무릎'이란 뜻인 창크페 오피 와크팔라(Čhaŋkpé Ópi Wakpála)를 영어로 번역한 이름이다.


2. 배경[편집]


파일:external/1.bp.blogspot.com/GhostDancePainting-400.jpg

1889년 자신들을 보호하고 부족의 죽음과 영토의 강탈, 파괴된 생활방식으로 얼룩진 자신들의 현재의 삶을 애도하고 이는 천국의 삶으로 바뀔 것이라는 믿음을 표현하기 위해 원주민들은 워보카[4], 차는 곰, 큰발 추장 등을 중심으로 유령춤(Ghost Dance)이라는 새로운 영적인 운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유령춤을 백인 개척민을 두렵게 만드는 악마적인 의식이며 국가에 대한 불복종이라는 이유로 금지했다. 이 무렵 훙크파파 부족의 타탕카 이요탕카가 휘말려들어 학살이 일어나기 2주 전에 인디언 경찰에게 살해당했다.

파일:external/www.eyewitnesstohistory.com/knee06.jpg

그래서 원주민들은 1890년 유령춤을 포기한 상태였고 폐렴을 앓고 있던 큰발이 자신을 따르는 미네콘주 라코타(수우) 지파[5]와 함께 미국 백인들과 그나마 가깝게 지내던 마흐피야 루타(붉은 구름, Red Cloud)에게 도움을 받기 위하여 그가 있는 곳으로 피난을 떠났다. 하지만 그들이 영혼의 춤을 포기한 것을 몰랐던 미 육군은 이들을 검거하기 위해 포사이스 육군 대령이 인솔하는 제7기병연대[6]를 보냈고 이들은 항복하였다. 그리고 미 육군은 이들을 보호구역으로 보내기 위한 목적으로 운디드니 냇가에 천막을 친 350명 정도의 수우인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이 때 큰발이 치료를 요청하자 군의관을 부르겠다며 기다리게 했다.


3. 전개[편집]


그런데 수우족의 무기를 수거하려는 미군과 이에 저항하는 수우족 군인들 사이에 다툼이 벌어지던 과정에서 검은 코요테(Black Coyote. 정확히는 그로 추정되는)라는 귀머거리 원주민이 자신의 무기를 백인 전사에게 건내주려고 하지 않고 총을 쏘아 미군에게 부상을 입혔다. 이로 인해 미군은 원주민들이 공격한다며 천막 안에 있던 원주민들에게 무차별적인 사격을 가했고 대포와 기관총까지 쏴 댔다.

결국 미군들은 피신처를 찾아 근처 언덕 너머로 도망간 원주민 대다수를 쫓아가서 죽였고 남은 50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당시 원주민들이 지니고 있던 무기의 대부분은 활과 화살이었다. 총을 미군에게 전부 압수당했기 때문에 원주민들에겐 변변한 무기도 없었다.

미군에게 살해당한 대다수가 여자와 어린아이들이었다. 혼란 속에서 큰발 추장도 미군에게 살해되었다. 이 때 눈발이 흩날렸는데 미군들은 죽은 원주민들의 시신 위에 쌓인 눈을 걷어낸 뒤 시체를 구덩이에 던져 버렸고 일당으로 2달러씩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은 부상을 입은 원주민들도 치료해달라고 했지만 무시하고 일부러 눈보라가 몰아치는 마차에 방치해서 몇 명이 얼어 죽었다. 그나마 나머지는 당시 의사로 있던 수우족 출신 오히예사(Ohíye S’a)[7]와 그의 아내 엘레인 구달(Elaine Goodale)이 병사들의 이러한 잔혹성에 대하여 강력하게 항의하여 살아남은 부상자들을 데리고 와 보호구역 안의 교회에서 치료해서 살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다른 원주민들과 함께 운디드니에 간 백인 병사들은 그곳에서 늙은 장님 여인과 한 여자아기(진트칼라 누니)[8]가 살아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 여자아이는 백인인 육군 장군에게 입양되었다. 그녀는 양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았고[9] 백인으로 자라도록 키워졌으나, 그녀는 대다수의 백인들로부터 차별을 받았고 동포들에게도 받아들여지지 못해 불행한 삶을 살다가 29~30세의 나이로 요절했다.[10]

미군 측 피해자는 대부분 아군 오사에 의한 것이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학살 당시 미군 병사들은 광기에 차 있었다. 활과 화승총과 같은 전근대적인 무기를 사용하여 근대식 장총과 기관총 그리고 대포로 무장한 부대에게 피해를 주려면 대오를 갖추고 왕성한 용력과 철저한 정신력을 갖춘 공격부대를 편성하여 야밤에 기습을 하거나 기동력과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각개전투를 하며 급습하고 급하게 빠지는 전술이 필요하다. 그런데 운디드니의 원주민 희생자들에 대한 기록물을 보면 정황상 미군이 선공을 가했을 가능성이 높다. 즉 전투다운 전투도 없었고, 미군이 이미 항복한 민간인들에게 다짜고짜 기관총을 갈기고 돌격하다가 자기들끼리도 쏘아댄 것이다.

원래 민간인 살상 작전은 유난히 아군 오사가 많다. 군인들도 기계나 로봇 혹은 사이코패스가 아닌 이상 생존본능에 의한 전투활동이 아니라 순수한 제노사이드처럼 일방적인 살인행위를 벌일 때 엄청난 정신적 손상을 입는다.[11] 때문에 민간인 학살은 대부분 마약·술을 이용한 심신미약 상태와 광신에 가까운 이데올로기가 결합되어야 한다. 이런 상태에서 군사 작전처럼 고도의 전술 활동을 실행하게 되면 당연히 집단활동의 정밀성이 떨어지는 것이다.


4. 평가[편집]


파일:external/digitallovechild.files.wordpress.com/wounded-knee.jpg
(해석) 사우스다코타 운디드니 크릭의 무시무시한 살육자 인디언들. 12월 29일.
영웅적인 승리를 거둔 제7기병대의 전상자는 66명, 인디언은 200명 이상이 죽고 다쳤다.[12]
사건 당시 기록화들에서는 평범한 전쟁으로 묘사되었고 위 그림처럼 인디언은 야만인, 미군은 영웅으로 칭송하였다. 이에 공식표기도 운디드니 '전투(Battle)', 즉 양측이 동등하게 무장을 갖추고 싸운 것처럼 표기했지만 현실은 최소한의 저항 능력조차 없는 약자들을 철저하게 훈련된 군인들이 일방적으로 쏴죽인 학살 사건이였고 이에 점점 전투(Battle) 표기를 학살(Massacre)로 바꾸고 있는 추세이다.

한편 상기한 학살 사건의 가해자인 20명의 미 육군 장병들에게는 '전쟁'에서 승리했다며 명예 훈장이 수여되었다. 오늘날에는 원주민과 시민단체들이 이에 대한 정당성 문제를 지적하고 있으나, 서훈 취소는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4.1. 운디드니 점거 사건[편집]


파일:external/www.ya-native.com/woundedkneeriflemen.jpg

1973년 2월 27일, AIM(미국 인디언 운동) 소속의 오글라라 라코타 부족 200여 명이 운디드니 마을[13]을 점거하며 11명을 인질로 잡고 보호구역 내에서의 부정부패 조사 및 처벌, 그리고 원주민들의 열악한 실태에 대한 해결을 호소하였다. 하지만 연방 정부는 이들의 요구를 무시하며 '당장 항복해라. 안 그러면 진압한다'며 경고했다. 결국 71일간의 대치 끝에 연방군 육군이 일방적으로 협상을 깨고 인디언 사무국(BIA) 측의 사병(私兵)들과 함께 무력으로 이들을 소탕하였고 진압 과정에서 원주민 2명이 사망했다. 또한 부정부패의 중심이었던 인디언 사무국 측에서 이에 동조한 원주민들을 살해하는 등 보복이 이어졌다. FBI의 개입 의혹이 무성하지만 연방 정부는 현재까지 이를 부정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이 과정에서 언론에 의해 원주민들의 비참한 실상이 뉴스화되어 일반인들에게 알려지면서 원주민 인권에 대한 관점을 환기시켜주는 계기가 되었다. 평소에 인권운동에 앞장서는 언행으로 유명했던 대배우 말론 브란도는 이 사건을 듣고 충격을 받아 1973년 제45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대부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음에도 시상식장에 직접 나가서 받는 것을 보이콧하고 대신 인디언 협회 대표라는 젊은 원주민 여성을 대리인으로 참석시킨 뒤 수상 소감으로 원주민 인권운동에 대해 말하도록 만드는 식으로 간접적인 항의를 한 바 있다.


5. 관련 매체[편집]


파일:external/cc.pbsstatic.com/9780684195124.jpg
표지 사진 속 사람이 '진트칼라 누니'다.

이와 관련된 책으로는 <운디드니의 잃어버린 새: 라코타의 영혼 Lost Bird of Wounded Knee: Spirit of the Lakota>이나

파일:external/stephenpalmersf.files.wordpress.com/bury-my-hawk.jpg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 Bury My Heart at Wounded Knee> 등이 있으며

파일:external/www.impawards.com/bury_my_heart_at_wounded_knee_ver3.jpg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 #는 2007년 HBO 제작하에 TV 영화화되기도 했다.

파일:external/cdn.c.photoshelter.com/19730711-C09-17-Massacre-Wounded-Knee-South-Dakota.jpg

과거의 인식은 이렇게 '전투(battle)'로 보았다. 그 위에 붉은 스프레이로 학살(massacre)이라고 고쳐 놓았다.

미국에서도 20세기 들어서(100여년이 지나서야) 제대로 관심을 받기 시작한 사건이라서 직접 다루는 매체는 적다.

  • 폴아웃 시리즈
폴아웃: 뉴 베가스비터 스프링스 학살은 운디드니에서 일어난 일을 모티브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피해자는 레이더 부족인 위대한 칸, 가해자는 뉴 캘리포니아 공화국이었다. 이 때문에 학살에 참가한 크레이그 부운은 회의감을 품고 제대했고, NCR은 위대한 칸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했으나 모하비 황무지의 여론이 나빠지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러나 모티브가 된 사건과 달리 NCR의 학살 자체는 의도된 것이 아닌 일종의 사고였으며 뒤에 나오지만 이러한 사건의 근본 원인은 위대한 칸의 막장 짓거리 때문이었다. 애초에 NCR이 전쟁 전 미국이나 엔클레이브 같은 놈들이었으면 위대한 칸 전투원만 박살내려는 계획이 아닌 아예 위대한 칸 자체를 학살했을 가능성이 크고, 사과 따윈 할리가 없을 것이다. 전쟁 전 미국 정부가 시민들이 시위를 하면 그냥 쫓아내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다 죽여 버리거나 심지어 마루타로 잡아갔다는 걸 생각하면 NCR의 행동보다 온건하게 행동할 것이라는 보장 따위는 없다. 특히 아직까지도 제대로 된 사과나 보상 없이 버티는 현실의 미국 정부와는 달리 NCR은 공개적으로 사과라도 했다.
그리고 실제 아메리카 원주민과 달리 위대한 칸 자체도 억울한 희생자는 아니다. 맨날 마약을 빨아가며 NCR의 민간인들을 살해하고 약탈하는 등 모하비 황무지에 온갖 범죄를 저지른지라 빡칠대로 빡친 NCR 군대가 위대한 칸을 토벌한 것이다. 비터 룻에게 이것에 대해 물어보면 그의 원래 아버지가 맨날 약을 빨아가며 NCR 시민들을 저격하는데, 어른이고 아이고 가리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런데 뉴 캘리포니아 공화국의 공격이란게 지휘체계의 병크로 인해 학살이 되어 버렸다는 게 문제였지만. 그리고 아메리카 원주민과 달리 위대한 칸은 모하비 황무지의 원주민도 아닌 그냥 황무지에 흘러들어와서 약탈이나 하는 레이더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16세였던 주인공 부커 드윗코넬리우스 슬레이트가 지휘하던 제7기병연대에 있었고, 아메리카 원주민 혈통이 섞였다고 의심받아 부대 내에서 경원시당한 것에 분개해 학살에 동참했으나 이후 심한 PTSD를 앓게 된다. 핵심 악역이라고 볼 수 있는 재커리 헤일 컴스탁 역시 이 사건을 계기로 탄생하게 되었다.[스포일러] 컴스탁은 이 학살을 의화단 운동과 함께 자신의 영웅적 행보를 위한 소재로 포장했는데 야만적인 원주민들이 선량한 백인을 무자비하게 죽였고 컴스탁이 제7기병연대를 지휘해 정의로운 복수를 해냈다는 등 실상과 완전히 정반대로 왜곡되어 있다.

  • 비고 모텐슨이 주연한 영화 '히달고' 초반부에 운디드니 학살이 적나라하게 나타난다.

  • 드라마
미국 드라마 How I Met Your Mother에서 Marshall이 할로윈 다음 날 광란의 밤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 중 포카혼타스 복장을 한 사람에게 "저 포카혼타스는 무릎이 다쳤네"라고 말하고 까인다.

  • RED
가면라이더 스피리츠의 작가인 무라에다 켄이치의 만화로 주인공 레드는 운디드니 학살 사건이 모티브인 학살에서 살아남은 사람으로 작품의 내용이 학살을 일으킨 블루의 기병대를 전멸시키기 위해 여행하는 내용이다.

  • Run To The Hills
영국 록밴드 아이언 메이든의 노래. 서부 '개척민'의 인디언 학살을 그린 노래다. 제목부터가 백인들의 학살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언덕으로 달려 빨리 도망가라(run to the hills, run for your lives)는 뜻.

  • We were all wounded at Wounded Knee
Come and get your love로 유명한 레드본의 노래. 위의 Run to the Hills와 달리 직접적으로 운디드니에 대해 언급한다. 이 때문인지 미국에서는 금지곡으로 지정되었다.


6. 기타[편집]


  • 이 사건을 벌인 제7기병연대는 60년 후 6.25 전쟁 당시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을 일으켰다. 리틀 빅혼 전투 당시 전멸했고, 이후 상술한 것처럼 운디드니 학살사건을 저지른 주범이기도 하다. 그때의 전멸 때문인지 중간에 재창설된 전적이 있다. 현대에 들어서는 베트남전을 다룬 전쟁영화 위워솔저스의 배경이 됐던 이아드랑 전투에 투입됐다. 이 조직에 대해 다룬 소설이 제7기병대인데, 기병대에 대한 미화가 심하므로 본 문서에 서술되어 있는 내용이나 다른 참고자료를 반드시 참조해야 한다.

7. 유사 사례[편집]


  • 샌드 크릭 학살[14]
  • 노근리 학살[15]
  • 미라이 학살[16]
  • 중국의 티베트 침공
  • 문화대혁명[17]


8.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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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20 명 중 75%[2] 290여 명 중 69%[3] 파인 리지 보호구역 옆이다. 파인 리지는 인디언 보호구역이 다 그렇듯이 미국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 중 한 곳이며 자살률도 높다.[4] 아메리카 원주민 밴드 Redbone이 그와 유령춤에 대한 노래 Wovoka를 부른 적 있다.[5] 차는 곰의 출신 부족이다.[6] 커스터가 지휘했다.[7] 찰스 이스트먼(Charles Eastman)으로도 알려져 있다.[8] Zintkala Nuni(라코타어로 잃어버린 새 Lost Bird)[9] 하지만 진짜 애정을 준 사람은 양모였고 양부는 애정을 주지 않았으며 나중엔 양부모가 이혼하게 되었고 양부는 재혼하여 다른 주로 이사갔다.[10] 죽은 원인이 결혼했을 때 남편으로부터 매독이 옮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남편과도 부부관계가 틀어져 몇주 만에 결혼생활을 끝내고 말았다.[11] 죽음의 위협에서 벗어난 상황에 무슨 PTSD인가 생각하겠지만, 마약을 안 하고도 마약한 것과 같은 경험이 뇌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상상하면 짐작할 수는 있을 것이다.[12] 컬러 버전: https://fineartamerica.com/featured/1-wounded-knee-1890-granger.html[13] 오글라라족이 정착한 파인 리지 보호구역 근처에 있다.[스포일러] 세례를 거부한 본편의 부커 드윗과 달리 세례를 받고 극단적 국수주의와 인종차별주의에 빠지며 자신을 정당화한 평행세계의 부커 드윗이 재커리 헤일 컴스탁이다.[14] 미군이 아메리칸 원주민 675명을 학살한 사건이다.[15] 한국전쟁 당시의 미군, 그것도 같은 부대가 저지른 민간인 학살이다.[16] 베트남전에서 미군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이다.[17] 소수민족에 대한 문화파괴공작이 이와 비슷하게 자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