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3년 울산 대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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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2016년 울산 지진, 1681년 양양 대지진, 호에이 대지진
1. 개요[편집]
1643년(인조 21년) 7월 24일(음력 6월 9일) 울산 앞바다서 일어난 지진이다.
2. 지진 이전[편집]
17세기에는 유달리 역사에 지진이 많이 기록되었는데, 1643년은 총 4번의 지진이 기록되어 있다. 이 중 서울에서 진도를 느끼는 수준의 기록이 있는 지진은 5월 30일 동래 지진과 7월 24일 울산 대지진이다.
2.1. 1643년 5월 30일 동래 지진[편집]
울산 지진이 일어나기 전인 5월 말, 동래에서 추정규모 M 6.4, 추정 최대진도 VIII 정도의 지진이 발생했다. 발생 당일 실록에는 짤막한 기사가 실렸지만 이후의 내용을 보면 큰 피해를 가져 온 매우 강한 지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지진이 있었다.
4월 13일 1번째 기사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이때 부산뿐만 아니라 경기, 충청, 경상도 등 여러 지방에서 장계가 올라왔는데 그 중 몇 개를 보자면 아래와 같다.
경상감사 장계의 내용이다. 이번 달 13일 오시(오전 11시-오후 1시)에 대구부에 지진이 크게 있었다.
4월 16일
경상감사 서목의 내용이다. 이번 달 13일에 지진이 일어나는 변괴가 있었다. 산곡과 해변이 모두 그러하였다. 처음 동래로부터 큰 지진이 있었으며, 연변(해안가) 지방이 더욱 심하였는데, 마른우물에 물이 다시 솟아나고 오래된 담장이 무너졌다. 청도와 밀양 사이에서는 암석이 무너져 내렸다. 초계 지역에서는 진동하던 때에 건천(마른 하천)에서 역시 탁한 물이 나왔다. 변괴하고 비상한 일이다.
4월 20일 근황
2.2. 1643년 6월 9일 합천 지진[편집]
앞서 추정 최대진도 VIII의 동래 지진이 발생한 지 채 열흘도 되지 않았을 때 이번에는 경상남도 합천군에서 규모 6.4~6.7, 최대진도 VIII~IX[2] 로 추정되는 지진이 일어났다. 경상감사 서목의 내용을 보면 합천군서 바위가 무너져 2명이 사망했고 마른 샘에 흙탕물이 넘쳤으며 관문의 앞길 땅이 10장이나 갈라졌으며 소나무 5~60그루가 쓰러졌다고 한다. 즉, 확정할 수 있는 인명피해는 사망자 2명인 셈.
3. 1643년 7월 24일 울산 대지진[편집]
남해안과 경상도, 전라도에서 지진이 연속적으로 일어나던 중 마침내 1643년 7월 24일(음력 6월 9일) 울산 근해에서 진도 VIII~X[3] 로 추산되는 지진이 일어났다. 이 지진은 울산, 경상도 지역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진동이 기록되어 있다. 서울대학교 이기화 교수와 기상청은 이 지진의 규모를 M6.7로 추정한다. 한편, 부산대학교 지질환경과학과 손문 교수는 M7.0~M7.4(!)로 추정한다. 한국지질자원연구원(KIGAM) 지헌철 박사의 경우 이 지진에서 일어났던 여러 현상들은 적어도 진도 VIII 정도는 되어야 일어나는 것들이라고 밝히고 있다.[4]
경상감사 장계의 내용이다. 좌도가 안동에서부터 동해 · 영덕 이하를 경유해 돌아서 김천 각 읍에 이르기까지, 이번 달 초 9일(辛未) 신시(오후 3시-5시), 초 10일 진시(오전 7시-9시)에 두 번 지진이 있었다. 성벽이 무너짐이 많았다. 울산 역시 같은 날 같은 시각에 마찬가지로 지진이 있었다. 울산부의 동쪽 13리 밀물과 썰물이 출입하는 곳에서 물이 끓어올랐는데, 마치 바다 가운데 큰 파도가 육지로 1,2보 나왔다가 되돌아 들어가는 것 같았다. 건답 6곳이 무너졌고, 물이 샘처럼 솟았으며, 물이 넘자 구멍이 다시 합쳐졌다. 물이 솟아난 곳에 각각 흰 모래 1,2두가 나와 쌓였다.
《승정원일기》 6월 21일
쓰나미, 토양 액상화, 건물 붕괴, 모래 화산 등등의 지진으로 인한 각종 재난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유례가 없는 엄청난 지진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본진 이후에도 서울서 느낄 정도의 강한 여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인명피해는 알 수 없으나, 기록으로 보아 매우 심각한 인명피해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한양에 지진이 있었다. 경상도의 대구·안동·김해·영덕 등 지역의 고을에도 지진이 있어 연대(烟臺)와 성첩(城堞)이 많이 무너졌다. 울산부에서는 땅이 갈라지고 물이 솟구쳐 나왔다. 전라도에도 지진이 있었다. 화순현에서는 부자(父子)가 벼락을 맞아 죽었고, 영광군에서는 형제가 말을 타고 들에 나갔다가 말과 함께 일시에 벼락맞아 죽었다.
《조선왕조실록》 1643년 6월 9일 1번째 기사
동해 미지의 단층에서 발생했다기엔 진도가 굉장히 크기 때문에 울산단층의 연장선 근해에서 일어난 지진으로 추정된다.
4. 조선 조정의 대응[편집]
6월 9일(음력 4월 23일) 조당에서 지진을 두고 해괴제를 해야 한다는 간언이 있었지만, 인조는 현안이 더 시급하다고 하며 윤허하지 않았다.
6월 28일(음력 5월 14일) 대사헌의 상소에서도 대규모 지진이 언급된다.
대사헌 이식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전략) 지금과 같은 지진과 물이 솟구쳐 나온 재변은 과거의 기록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바이고 보면 앞으로 그 대응으로 일어날 재난이 어느 정도로 심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는 진정 성명께서 가슴을 조이며 몸을 닦으실 때로서 신들이 끝내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하략)" 비국이 회계하기를, "이 차자의 주된 뜻은 성상으로 하여금 근본을 바르게 하고 발원지를 맑게 하며 억울한 사정을 펴주고 민생을 보전하기를 바라는 것이니, 다시 더 유념하여 깊이 성찰하소서."하니, 상이 그렇게 하겠다고 하였다.
5. 이후의 타임라인[편집]
6. 참고문헌[편집]
- 조선왕조실록
- 승정원일기
- 한국 기상기록집 2. 한반도 역사지진 기록 (2012)
- 국가지진종합정보시스템
- NOAA National Centers for Environmental Information 데이터베이스
- 김소구, 한반도와 인접지역의 지진 (1982)
- Lee&Yang, Historical Seismicity of Korea : Appendix I (2006)
- 경재복, 남한 남동부 양산단층대와 울산단층대의 고지진 연구와 최대 지진 규모 평가 (2010)
7. 오늘날[편집]
오늘날까지도 울산 앞바다에서는 규모 1~2의 지진들이 많이 일어나며, 가끔씩 중규모의 지진이 일어나기도 한다. 특히 1643년 울산 대지진급의 지진이 오늘날 발생한다면 인구가 많은 대도시인 울산, 부산 등에서 피해가 클 것이다. 또한 진앙지와 가까이 있는 고리 원전 등은 최고 규모 6.5까지 견딜 수 있게 설계되었는데 지진의 최대 규모가 6.5를 초과하기 때문에 더욱 위험하다.[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