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주 천전리 암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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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국보 제147호
울주 천전리 각석
蔚州 川前里 刻石


소재지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 산210-2
분류
유물 / 일반조각 / 암벽조각 / 각석
수량/시설
1기
지정연도
1973년 5월 4일
제작시기
청동기시대 이후

1. 개요
2. 명칭
3. 내용
3.1. 선사시대
3.2. 신라시대
4. 관람
5. 기타
6. 2011년 훼손 사건
7. 외부 링크
8. 국보 제147호



1. 개요[편집]




이름 그대로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에 위치한 길이 9.5m, 높이 2.7m의 암각화. 청동기시대부터 신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대에 기록되었고 태화강 상류에 위치한다. 1970년 12월 24일, 황수영 교수와 문명대 교수가 이끄는 '동국대학교 울산지구 불적 조사대'가 반고사 터를 조사하다가 근처에서 우연히 발견했다. 대한민국의 국보 제147호이며,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와도 바로 옆은 아니지만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1]

이 곳은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에서 언양읍양산시를 거쳐 낙동강으로 이어지는 길로, 낙동강을 통해 남해 바다와 경상도 각지, 그리고 낙동강 상류를 통해 한강 유역까지 이어지는 교통로이므로 신라시대에는 중요한 교통로였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암각화는 이 대로에서 살짝 비켜난 서늘한 계곡에 자리잡고 있어서 한여름 피서를 즐기기 좋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 바위는 주변의 흔한 화강암 바위와 달리 셰일(shale) 재질로 단단하지 않고 조각하기 쉬운데다, 칠판처럼 평평하면서도 15도 가량 살짝 기울어져 있어서 윗부분에도 손이 쉽게 닿는다. 그런 점에서 수천년간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쓰고 싶은 것을 새겨넣었다.


2. 명칭[편집]


명칭은 원래는 각석(刻石: 새긴 돌)이라고 이름붙여졌으나, 이후 서석(書石: 글을 쓴 돌)이라고 이름을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서석이라는 명칭도 사용되었다. 당장 신라인이 당시에 이 곳을 서석곡(書石谷)이라고 불렀다고 여기에 씐 만큼 서석이라고 부름이 과거 명칭에도 부합하기도 한다. 다만 학계에서는 엄연히 신라대 이전에 새겨진 것이 많이 있고 글로 새겨진 금석문만이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므로 암각화[2]라고 부르는 것을 권한다.

물론 울산광역시는 각석이라는 명칭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여 각석, 서석, 암각화가 통용되고, 현지 안내표기도 각석이고 현지인들도 각석이라는 명칭에 익숙하다. 이 항목에서는 금석문 외의 가치도 고려하는 역사학계의 주장을 고려하여 암각화로 표기한다.


3. 내용[편집]



3.1. 선사시대[편집]


주로 바위의 위쪽 부분에 신석기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암각화가 대거 새겨져 있다. 여기에는 근처에 있는 반구대 암각화도 그렇고 다른 여러 선사시대 암각화들이 주로 고래 같은 동물이나 일상생활, 기원 등을 묘사한 것과 다르게 천전리 암각화는 마름모 혹은 정사각형, , 꽈배기 모양 등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기 힘든 기하학적인 도형 등이 다양하게 새겨져 있으며, 대부분의 도형을 이중선으로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이것들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는 아직 제대로 알려진 바가 없다.

그리고 그림 중에 을 단 선박, , , 기마행렬도 같은 그림들도 있는데 이건 아래에 설명할 신라시대에 새겨진 그림이다.

천전리 암각화의 선사시대 그림들은 유형에 따라 크게 두가지의 분류로 나누어지며, 이 다른 두 유형의 그림들은 그림을 그린 연대는 물론 그림을 그린 민족의 주체까지 달랐을 것으로 추정된다. 자세한 것은 반구대 암각화문서의 '누가 그렸는가?'부분을 참조.

3.2. 신라시대[편집]


주로 바위의 아래쪽 부분에 있으며, 위쪽의 선사시대 암각화보다 훨씬 이후 시대인 신라시대에 신라인들이 새긴 명문들이 남아있으며, 그림과 함께 한문이라는 문자로 써 있으므로 해독이 가능하다. 여기에 남아있는 여러 인명은 삼국사기 등 기존 기록에 등장하는 인명과 교차검증되는 것도 많아 매우 중요한 사료이다. 신라시대 사람들은 윗부분의 석기시대 그림을 피해서 아래쪽에다 주로 글을 새겼다.

명문은 여러 가지가 새겨져 있는데, 기록 시기를 알 수 있는 것 중 가장 오래된 글은 눌지왕 37년(453) 혹은 지증왕 14년(513)에 작성된 계사명이다. 계사명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癸巳六月卄二日 喙壹奮 王夫 … 奈 夫人輩衆大等 … 部書人小 … 思郞女□作 鄒?呑越?釋? 尒小知大兄加 豆篤知大兄加 宮頭辭 … 老岑邽?婁?

癸巳年(453년, 눌지왕 37년) 6월 22일 닭(부)의 일분 왕부…나(마) 부인배중대등…부서인소…사랑녀□작 추?탄월?석? 일소지 대형가와 두독지 대형가 궁두사…노잠규?루?


해당 내용은 선이 가늘고 글자가 큰 탓에 한눈에 들어오지 않아, 이 명문에 개의치 않고 후대에 새겨진 명문으로 훼손되거나 삭제된 부분이 많으며 내용을 알기 힘들고, 이후에 나올 원명에서 입종갈문왕이 525년 방문했을 때 이름 없고 알려지지 않은 계곡이었다는 내용이 있으므로 그 이전의 계사년인 513년 혹은 453년으로 비정할 뿐이다. 구체적으로는 525년과 시간상 좀 더 떨어져 있는 453년으로 비정하며, 중간에 등장하는 대형가(大兄加)를 고구려 관등 대형大兄으로 받아들인다면 456년 장수왕의 백제 공격때 신라가 백제를 도운 것으로 고-신 사이가 틀어졌으므로[3] 고구려 관등을 가진 사람이 이곳을 방문하려면 453년이어야 한다는 견해도 존재한다. 다만 일반적으로 대형(大兄)으로 알려져 있는 고구려 관등이 대형가(大兄加)로 적힌 것은 이 명문에서만 발견된다는 가치가 있다. [4]

그 이후로 신라 상대부터 통일신라 시기에 새겨진 것까지 여러 글귀가 여기저기 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가운데에서 약간 오른쪽에 있는 원명(을사명)과 추명(기미명)이다. 원명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乙巳… 沙喙部葛… 文王覓遊來始得見谷 十 乙 十二道 之古來?无名谷善石得造書? 記?以下爲名書石谷字作之? 幷遊友妹聖德光妙於史 鄒女郞王之 食?多煞作功?人尒利夫智大奈[5]

… 悉得斯智大舍帝智▨作食… ▨▨智壹?吉干支妻居?知尸奚夫?… 眞?宍智沙干支妻阿丂?牟弘夫人 作書人慕 : 尒智大舍帝智

을사년(乙巳年)에 사탁부(沙喙部)의 갈문왕(葛文王)이 찾아 놀러와 처음으로 골짜기를 보았다. … 오래된 골짜기인데, 이름없는 골짜기이므로, 좋은 돌을 얻어 (글을) 짓고, (이로 말미암아) 서석곡(書石谷)으로 이름을 삼아 명문을 새겼다. 더불어 놀러온 이는 (갈문왕과) 우매(友妹)인 여덕광묘(麗德光妙)한 어사추안랑왕(於史鄒安郞王)[6]

이다. 식다살작공인(食多煞作功人)[7]은 이리부지(尒利夫智) 대나(마)와 실득사지(悉淂斯智) 대사제지이며, 밥을 지은 이는 영지지(榮知智) 일길간지의 아내 거지시해부인(居知尸奚夫人)과 진육지(眞宍智) 사간지의 아내 아혜모홍부인(阿兮牟弘夫人)이고, 글을 적은 이는 모모이지(慕慕尒智) 대사제지이다.


글자가 가장 빽빽히 써 있어 쉽게 찾을 수 있는데, 둘 다 사각형을 치고[8] 그 안에 글자를 써 넣었다. 이 중 1차적으로는 '신라 법흥왕 12년에 사탁부를 다스리던 사부지 갈문왕과 그 누이 및 어사추안랑왕[9]을 비롯한 여럿이서 놀러왔는데 이름도 모르는 이곳에 글 새기기도 좋은 돌이 있어서 이 장소를 서석곡이라 짓고 여기다 방명록 새기고 가염~' 이라는 내용이다. 같이 온 사람들과 사냥을 즐긴 사람, 음식을 한 사람과 명문을 새긴 사람까지 모두 이름이 언급되고 있다. 이상의 내용이 원래 새긴 것이라 하여 원명(原銘)이라고 한다.

그 후 새긴 추명(追銘)은 1차 내용, 즉 원명을 새긴 것이 법흥왕 12년(525) 6월 18일 새벽이었으며 그 후 세월이 흘러 사부지 갈문왕과 당시 같이 놀러왔던 누이와 어사추안랑왕은 죽었고, 법흥왕비 보도부인(保刀夫人), 사부지 갈문왕이 어린 삼맥종[10] 등을 법흥왕 26년(539) 7월 3일에 데리고 왔다. 역시 이번에도 총책임자, 예를 드리러 온 사람, 음식을 한 사람들의 이름을 나열하고 있다. 추명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過去乙巳年六月十八日昧沙喙」部徙夫知葛文王妹於史鄒安郎」三共遊來以後▨年八巳年過去妹王考」妹王過人丁巳年王過去其王妃只沒尸兮妃」愛自思己未年七月三日其王与妹共見書石」叱見來谷此時共三來 另卽知太王妃夫乞」支妃徙夫知王予郎深▨夫知共來 此?時▨」作功臣喙部知礼夫知沙干支▨泊六知」居伐干支礼臣丁乙尒知奈麻作食人眞」宍智波珎干支婦阿兮牟呼夫人尒夫知居伐干支婦」一利等次夫人居礼次▨干支婦沙爻功夫人分共作之

지난 을사년 6월 18일 새벽 사탁부 사부지 갈문왕과 누이와 어사추안랑 셋[11]

이 함께 놀러온 이후 ▨년이 지났다. 팔사년 지난 날 누이의 모습, 왕은 누이를 생각했다. 왕은 회상했다. 왕은 지난 정사년에 있었던 왕비 지몰시혜비를 사랑하여 스스로 생각했다. 기미년 7월 3일에 왕과 누이는 함께 서석을 보러 왔다. 계곡을 보러왔을 때 함께 셋이 왔는데, 모즉지태왕비 부걸지비[12], 사부지왕자랑심맥부지가 함께 왔다. 이 때 ▨작공신(▨作功臣)[13]은 탁부(喙部) 지례부지(知礼夫知) 사간지와 ▨박육지(▨泊六知) 거벌간지이며, 예신(禮臣)[14]은 정을이지(丁乙尒知) 나마이다. 밥을 지은 이는 진육지(眞宍知) 파진간지의 아내인 아혜모호부인(阿兮牟呼夫人)과 이부지(尒夫知) 거벌간지의 아내인 일리등차부인(一利等次夫人)과 거례차(居礼次) ▨간지(▨干支)의 아내인 사효공부인(沙爻功夫人)으로 나누어 함께 지었다.


이름을 단순히 나열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어디의 누구, 누구의 부인 누구 라는 식으로 꽤 정확히 적어놓았는데, 다른 사료에 나오는 인명과 겹치는 경우도 있지만 이 중에 누구인지 확인이 안 되는 사람도 있다. 일단 사부지 갈문왕의 누이와 어사추안랑이 누구인지, 동일인물인지조차 알 수 없다.[15] 다만 법흥왕의 왕비, 갈문왕의 왕비인 지소태후가 추명에서 언급되기 때문에 법흥왕과 사부지 갈문왕에게 여자형제가 있었던 것은 맞는 것으로 보인다. 이 원명과 추명은 단순한 내용이지만 상당히 많은 정보를 함축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추명에서 법흥왕을 '무즉지태왕'으로 칭하는데 15년 전인 울진 봉평리 신라비에서는 '모즉지 매금왕'이었던 것이 태왕으로 표기가 바뀐 것이다. 이를 법흥왕대의 왕권 강화책이 상당한 효과를 본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다만, 아래는 2019년 대곡천 암각화군 종합연구보고서에서 밝힌 울산대학교 전호태 교수의 판독 및 해석이다. 내용이 조금 다르다.
아래는 을사명(원명)이다.

乙巳…沙喙部葛…文王覓遊來始得見谷 十 乙 十二道 之古來?无名谷善石得造書? 記?以下爲名書石谷字作之? 幷遊友妹聖德光妙於史 鄒女郞王之 □多煞作功?人尒利夫智奈… 悉得斯智大舍帝智□作食… □□智壹?吉干支妻居?知尸奚夫?… 眞?宍智沙干支妻阿丂?牟弘夫人 作書人慕 : 尒智大舍帝智

乙巳年(525년, 법흥왕 12년)~에 사닭부의 갈(문왕이신 사부지 갈)문왕께서 찾아 놀러 오셔서 처음으로 골짜기를 보시게 되었다. 옛날부터 이름이 없던 골짜기였는데, 좋은 돌을 얻어 쓸[書記] 수 있게 되니 이름 짓기를 書石谷이라 하시고 글자를 적게 하셨다. 함께 놀러온 友妹는 성스런 덕이 빛처럼 오묘하신[聖德光妙:여덕광묘] 於史鄒女郞王(어사추여랑왕)이시다. □多煞作□(功?)人은 尒利夫智奈(이리부지나)(麻와)悉得斯智大舍帝智이며, □作食(人은) □□智 壹?吉干支의 妻인 □(居?)知尸奚 夫(人과) □(眞?)宍智 沙干支의 妻인 阿丂?牟弘 夫人이다. 글을 쓴 사람[作書人]은 慕慕尒智 大舍帝智이다.


아래는 기미명(추명)이다.

過去乙巳年六月十八日昧沙喙 善 部徙夫知葛文王王妹於史鄒女郞 王共遊來以後□□十八□□過□妹王考 妹王過人丁巳年王過去其王妃只沒尸兮妃 天 愛自思己未年七月三日其王与妹共見書石 叱見來谷此時共王來 另卽知太王妃夫乞? 夫 支妃徙夫知王子郞深□夫知共來此?時□ 作□□喙部□礼夫知□干支 □六知 仇良 居伐干支□乙□□知奈麻□食人眞 宍智波珎干支婦何□牟呼夫人□夫知居伐干支婦 □利等□夫人□□□□干支□沙□□夫人分共作之

지나간[過去] 乙巳年(525년) 6월 18일 새벽에 사닭부(사탁부)의 徙夫知 葛文王(사부지 갈문왕)과 王妹(왕의 누이)인 於史鄒 女郞王(어사추 여랑왕)께서 함께 놀러 오신 이후 □□十八□□이 지나갔다 . 妹王(누이)을 생각하니 妹王(누이)는 돌아간 사람이라, 丁巳年(정사년,537, 법흥왕 24년)에는 王께서도 돌아가시니[過去] , 그 왕비인 只沒尸兮妃(지소태후)가 애달프게 그리워하시다가 己未年(기미년,539, 법흥왕 26년) 7월 3일에 그 왕과 누이가 함께 보고 글을 써놓은 돌을 보려고 골짜기에 오시었다. 이때 함께 여러 왕 오시니, 另卽知 太王(모즉지태왕)의 妃(비)인 夫乞?支妃(부걸지비)와 徙夫知王(사부지왕)의 子郞(자낭:아들)이신 深□夫知(심맥부지)께서 함께 오셨다. 이때 □作□□은 닭부의 □礼夫知 □干支와 □六知 居伐干支, □乙□□知 奈麻이며, □食人은 眞宍智 波珎干支의 婦인 何□牟呼 夫人과 □夫知 居伐干支의 婦인 □利等□ 夫人, □□□□干支의 □(婦)인 沙□□ 夫人이 나누어 함께 지었다.


위의 해석에 따르면 539년 기미년의 계곡에 다시 방문한 것은 사부지 갈문왕이 아닌 그 아내 지소태후이며, 또 어사추안랑은 왕의 친한 여동생이자 약혼녀가 아니라 어사추여랑왕이라는 이름의 그냥 왕의 누이일 뿐이다. 또 위의 해석처럼 입종 갈문왕이 이미 죽었다는 누이 거기에 더해 같이 온 사람이 보도부인, 사부지왕자, 심맥부지(진흥왕)의 별개 세 사람이 아니라, 三을 王으로 읽어 여러 왕들이 함께 왔는데 지소태후와 함께온 왕들이 보도부인과 사부지왕자(=심맥부지=진흥왕) 두 사람인 것이다. [16] 또한 입종갈문왕의 아내 지소태후는 입종갈문왕의 형의 딸, 그러니까 조카인데, 입종갈문왕은 법흥왕의 동생이고 보도부인은 법흥왕의 아내이니 지소태후는 보도부인의 딸이다. 또한 후대의 진흥왕은 사부지왕자로 입종갈문왕의 아들이니, 이는 지소태후의 아들이다. 즉 입종갈문왕이 (누나는 죽었다고 해도) 뜬금없이 자기 아들 그리고 형수랑 같이 오는 것보다는, 입종갈문왕의 아내 지소태후가 자기 남편 옛날에 놀러온 곳 둘러볼 겸 자기 아들 그리고 엄마를 데리고 왔다는 게 더 이치에 맞을 수 것이다.

다만 어느 쪽이던 우매어사추안랑왕지[17] 인지 우매 어사추여랑삼지[18] 인지는 해석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데, 전호태 교수 외에도 강종훈 교수가 전자를 지지하고 이 경우 말이 통하는 부분이 많고 왕과 왕의 누이의 근친 로맨스까지 망상하게 되는(위의 다큐도 그러한 해석을 기반으로 한다) 해석이 있는 데 반해 여전히 사내 랑郞이 어째서 여자인 왕의 누이에게 붙었는지는 해석할 수 없다.

이상 원명과 추명은 사각형의 테두리를 그어놓고 매우 공들여 조각한 내용이고, 그 외 기타명이라고 하여 바위 이곳저곳에 엉망진창으로 새겨놓은 것들이 많은데 이 역시 대부분 화랑, 승려 등이 놀러와서 자기들 이름이나 메시지를 새겨놓고 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를 들면 무오유월이일 영랑성업(戊午六月二日 永郞成業)으로 추정되는 기타명의 경우 무오년[19] 6월 2일 영랑이 업적을 달성하다 라는 의미로 '영랑'이라는 화랑이 어떤 목표를 달성한 것을 기념하여 새긴 것으로 보인다.

당시를 살았던 화랑들이 본인의 이름을 여럿 적어놓고 간 덕분에 필사본 화랑세기가 위작이라는 것의 증거 중 하나가 된다. 삼국사기 등 다른 데서 나오지 않고 오직 화랑세기에만 나오는 화랑들의 명단과 암각화에 적힌 화랑들의 이름 중 일치하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


4. 관람[편집]


울산광역시에서도 상당히 외진 곳에 위치.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면 울산 버스 348을 이용하면 갈 수 있는데 하루에 몇 번 안 다니기 때문에 시간표를 맞춰야 하며, 울산역이나 언양에서 출발하는 게 아니면 환승도 해야 한다. 그리고 버스에서 내린 뒤에도 계곡 안쪽에 있어 자가용을 이용하든 대중교통을 이용하든 어느 정도는 걸어야 한다.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까지 산책로로 이어져 있고 일정이 촉박하지 않다면 이 길을 통해 둘 다 보는 것도 괜찮다. 이 근처 계곡 자체가 석기시대 사람들부터 신라 진흥왕, 고려 정몽주, 조선 정선까지 많은 유명인들이 찾아 흔적을 남길 정도로 기본적으로 경치가 좋은 곳이라서 꼭 암각화가 아니라도 충분히 걸어서 둘러볼 가치가 있다.

바위 위치와 관람객 위치가 너무 멀어서 육안으로 보기 힘든 반구대 암각화와 달리 바위에서 훨씬 가까운 위치에서 볼 수 있다. 반구대가 더 유명하긴 하지만 선사시대 암각화를 실제로 보는 게 목적이라면 여기로 가는 게 낫다.

근처에 울주대곡박물관이 있는데, 천전리 암각화와 직접적 관련은 없고 인근에 대곡을 만들면서 수몰된 지역의 문화재를 주로 전시하는 박물관이다.


5. 기타[편집]


과거 기록에 이후의 사람들이 낙서를 했으나 그 낙서 역시 유물로 인정받는 예시로는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가 있다. 순수비에 낙서한 것은 추사 김정희로, 역시 자신의 방문 기록을 비석에 남겼다.


6. 2011년 훼손 사건[편집]


2011년 8월 30일 ‘이상현’이란 낙서가 발견된다. 문화재해설사가 이미 한 달 전인 7월에 관리인에게 알렸지만 관리인은 큰일이 아니라고 판단했다가 울주군에 뒷북으로 보고하게 된다. 그러다가 뒤늦게 사태파악을 한 군청에선 경찰에 이상현이라는 이름을 새긴 사람을 수사의뢰 한다. 한달 뒤 경찰은 고교 2년생인 A군을 이상현 사건의 범인으로 특정하고 입건하였다. A군은 범행동기에 대해 단지 “친구를 놀려주고 싶었다” 란 이유로 저질렀다고 한다. 바위가 시간을 뛰어넘어 현 시대에도 방명록 역할을 톡톡히 한 것이지만 동시에 한 고등학생의 교양 없는 행동으로 벌어진 국보 훼손 사건이기도 했다.

7. 외부 링크[편집]




8. 국보 제147호[편집]



태화강 물줄기인 대곡천 중류의 기슭에 각종 도형과 글, 그림이 새겨진 암석으로, 아래 · 위 2단으로 나누어 서로 다른 내용이 다른 기법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전체적으로 조각이 가득하다.

윗단에는 쪼아서 새기는 기법으로 기하학적 무늬와 동물, 추상화된 인물 등이 조각되어 있다. 사실성이 떨어지는 단순화된 형태인데 중앙부의 태양을 상징하는 듯한 원을 중심으로, 양 옆에 네 마리의 사슴이 뛰어가는 모습과 맨 왼쪽의 반인반수(半人半獸:머리는 사람, 몸은 동물인 형상)상이 눈에 띈다. 표현이 소박하면서도 상징성을 갖고 있는 듯한 이 그림들은 청동기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여진다.

아랫단은 선을 그어 새긴 그림과 글씨가 뒤섞여 있는데, 기마행렬도, 동물, 용, 배를 그린 그림 등 다양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기마행렬도는 세 군데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간략한 점과 선만으로도 그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다. 배그림은 당시 신라인의 해상활동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글자는 800자가 넘는데 왕과 왕비가 이 곳에 다녀간 것을 기념하는 내용으로, 법흥왕대에 두 차례에 걸쳐 새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내용 중에는 관직명이나 6부체제에 관한 언급이 있어 6세기경의 신라사회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여러 사람이 이루어 놓은 작품으로, 선사시대부터 신라시대까지의 생활, 사상 등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어느 특정 시대를 대표한다기보다 여러 시대의 모습을 담고 있어 더욱 의미가 깊은 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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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부분의 관람객들은 둘을 세트로 묶어서 둘러본다. 자가용으로 갈 수도 있고, 대중교통으로 간다면 약간의 산책길 정도를 걸어서 건너갈 수 있다.[2] 다만 엄밀히는 암각화라기보다는 새겨진 게 전부 그림이 아니라 글도 있으므로 암각(돌에 새김)이라는 명칭만으로 충분하지만, 근처에 있는 반구대 암각화 등의 명칭과 통일성을 고려하였다고 한다.[3] 1차 나제동맹은 433년 맺어졌으나, 충주고구려비의 추정건립연도인 449년까지 고구려와 신라가 우호관계이긴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어디까지나 충주고구려비 건립연도가 449년이 맞을 경우의 이야기이다.[4] 당 고종 현경 5년 장초금이 저술한 한원(翰苑)에는 대형(大兄)이 아닌 대형가(大兄加)가 고구려 관등명으로 기록되었다.[5] 각석에서는 '大'와 '奈'가 위아래로 합자된 형태로 새겨져 있다. 이를 그냥 '奈'로 판독하는 학자들도 꽤 있는 편이다.[6] 또는 어사추여랑 셋[7] 갈문왕 일행의 행차를 준비하고 주관했던 직책으로 추정된다.[8] 원명은 사각형의 오른쪽 부분과 아래쪽이 약간 떨어져 나간 상태다.[9] 왕이 꼭 군주를 말하는 게 아니라 고귀한 사람, 혹은 신라 안에서도 한 내부 집단의 수장급 인물에게 붙이는 경칭으로 본다.[10] 훗날의 진흥왕. 여기에는 심맥부(深ㅁ夫, 가운데 글자는 판독불가)로 써 있는데 삼국사기에서 삼맥종 혹은 심맥부라고도 한다고 써 있으니 곧 진흥왕이 맞다.[11] 安을 女로 읽어 '어사추여랑'으로 해독하고 앞서 언급된 누이와 동일인이라고 보는 해석과 서로 다른 인물이라고 보는 해석이 있다. 전자의 경우 뒤의 '셋'은 '왕'이 되어 어사추안랑왕이 된다. 후자의 경우 郎 자체가 "사내"라는 뜻이라서 다른 인물일 가능성을 제시하나,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女라는 글자를 포함해 여성임을 강조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신라는 아니지만 비슷한 시기 옆 나라에서 적계여랑(適稽女郞)이라는 표기를 쓴 사례도 있다.[12] 보도부인(保刀夫人)[13] 원명의 '작공인'과 마찬가지로 행차를 준비한 직책으로 보인다.[14] 행차 이후 일종의 의례를 맡은 직책으로 추정된다.[15] 가령 서울시립대 이우태 교수는 1994년 발간한 논문에서 이를 여덕, 광묘, 어사추안랑의 세 사람으로 보고, 이를 友妹가 각기 수식하는 방법으로 여덕과 광묘를 친구, 어사추안랑을 여동생으로 비정했으나 여덕, 광묘는 당대 신라 이름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으며 본인도 중국에서 들여온 세련된 불교식 이름이 아닌가 추정했으나, 이후 연구가 거듭된 결과 '여덕광묘'가 어사추여랑을 수식하는, '성스런 덕이 빛처럼 오묘하다'라는 뜻의 불교식 찬양용어라고 본 전호태 교수에 의해 부정된다.[16] 다만 문맥상 三을 王으로 읽기보다는 三으로 읽어 지소태후,보도부인,사부지왕자 셋이 함께 왔다고 보는 것 역시 말이 된다. 집권 중인 법흥왕의 남동생,여동생인 입종갈문왕과 어사추여랑왕은 王일 수 있으나, 법흥왕의 아내와 딸이자 제수가 王인 것은 조금 이상하다.[17] 어사추안랑왕은 입종갈문왕의 누이이며, 두 사람의 왕이 왔다.[18] 어사추여랑은 입종갈문왕 누이와 별개인물이며, 세 사람이 왔다.[19] 위 원명 추명이 새겨진 시기(법흥왕~진흥왕 재위기) 비슷한 시기의 무오년은 538년, 598년, 658년, 718년, 838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