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터게이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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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슨의 사임 당시 뉴욕 타임스 1면.[1]

나는 사기꾼이 아닙니다! (I'm not a crook!)


I shall resign the presidency effective at noon tomorrow. Vice President Ford, will be sworn in as president, at that hour, in this office.

저는 내일 정오를 기해서 대통령직을 사임합니다. 포드 부통령이 그 시간부로 대통령에 취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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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닉슨의 사임 발표 연설

Watergate scandal

1. 개요
2. 전개
2.1. 시작
2.2. 심화
2.3. 결말
3. 이후
4. 원인
4.1. 심리학적 설명
4.2. 닉슨의 과대망상과 편집증
5. 진실을 파헤친 사람들
6. 후일담
7. 창작물에서
8.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1972~1974년에 미국에서 벌어진 희대의 정치 스캔들. 당시 공화당 출신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재선을 위한 계획의 일환으로 비밀공작단이 워터게이트 빌딩의 민주당 전국위원회 본부에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다 발각되면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이다.

이 사건의 여파로 닉슨은 대통령직을 사임하게 된다. 대통령이 임기를 채우지 못한 채 스스로 물러난 최초의 사례이자 현재까지도 유일한 사례로, 미국 역사에 길이 남을 대사건이다. 또한 음모론이 사실로 밝혀진 사례이기도 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권력형 비리 사건에는 ~게이트라는 말이 일종의 접미사로 쓰이게 되었다. 정치뿐만 아니라 언론, 기업, 과학기술 등 여러 분야에서 조직적인 은폐, 조작 및 비리가 저질러진 경우에도 쓰인다. 게임언론의 게이머게이트, 애플의 배터리게이트, 폭스바겐의 디젤게이트, 인텔의 CPU게이트, 가상화폐와 관련한 코인 게이트 등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이 때문에 오히려 워터게이트 사건을 과 관련된 비리나 사건사고로 착각하기도 하지만, 워터게이트는 단순히 빌딩의 이름에 불과하다.


2. 전개[편집]



2.1. 시작[편집]


1972년 6월 17일 밤 늦은 시각 민주당전국위원회(DNC)[2]가 입주해있던 워싱턴 D.C. 워터게이트 호텔의 경비원은 괴한이 침입한 흔적을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하였다. 호텔에 출동한 경찰은 민주당 사무실에 도청 장치를 설치하려던 괴한 5명을 현행범으로 체포하였다.[3] 체포된 범인들은 끝까지 단순 절도임을 주장하였다. 그런데 어디선가 단순 절도범에 어울리지 않는 거물급 변호사가 나타나서 이들을 변호하고, 일당 중 1명이 가지고 있던 수첩에서 백악관 보좌관인 하워드 헌트의 전화번호가 발견되면서 언론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당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대통령 재선위원회를 만들어서 차기 대선을 준비중이었는데, 하워드 헌트가 바로 재선위원회의 실무자. 게다가 경찰 수사 결과 이들은 3주전에도 민주당 사무실에 침입했으며, 이번 침입은 고장난 도청기를 교체하기 위한 목적이었다는게 드러났다. 이게 단순절도 사건이 아니라는 의혹이 커지자, FBI가 직접 수사에 착수했다.

FBI가 개입할 정도로 일이 커지자 닉슨과 주변 측근 인사들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건을 축소은폐하기 시작한다. 닉슨은 우선 CIA에 FBI의 사건 수사를 방해하고 최대한 은폐하라고 지시했지만, 잘 되지는 않았다. 당시 CIA 국장이 훗날 증언하기론 은폐, 특히 증인 매수 및 입 단속에 필요한 을 CIA 자체 자금으로 처리하라는 것이 닉슨 측의 명령이었다고 하는데, 이는 CIA 자금 이외에는 마땅히 닉슨이 남들 눈에 안 띄게 쓸 수 있는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4] 그러나 CIA로서도 이미 전 국민의 이목이 집중된 상황에서 함부로 돈을 쓸 수 없었고 결국 증인 매수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민주당 대선후보로 조지 맥거번이 선출되고 닉슨과의 대통령 선거전이 본격화되자, 워터게이트 사건은 점점 여론의 관심에서 밀려나게 된다. 게다가 괴한들이 침입했던 민주당 전국위원회 사무실에는 별다른 기밀문서도 없었기 때문에 맥거번 후보나 민주당쪽에서도 실질적인 피해는 없다면서 이 사건을 크게 부각시키지도 않았다. 사실 당시 민주당은 험프리와 맥거번의 대선후보 경선이 너무 치열했던 나머지 당이 쪼개져 있었고, 부통령 후보가 중도에 교체되는 등[5] 난장판이었다. 이때문에 일관된 선거전략을 세우지도 못했다.[6] 결국 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닉슨은 선거인단 538표중 520표를 쓸어가는 압승을 거뒀다. 유권자 득표율에서도 60%를 넘어서는 대승이었다. 사실상 대통령 선거 시점에서 워터게이트 사건은 아무도 신경 안썼단 얘기. 언론들도 일반적인 선거보도에만 열을 올렸지, 워터게이트 사건은 이미 신문지면 구석으로 밀려난지 오래였다. 다만 워싱턴 포스트는 이 사건을 계속 보도했는데, 별다른 여론의 반향은 없었다. 오히려 친 닉슨 성향의 언론들은 워싱턴 포스트를 가짜뉴스라며 공격하기도 했다.

2.2. 심화[편집]



백악관 집무실에 설치된 닉슨의 녹음 장치에 대해 증언하는 알렉산더 포터 버터필드(Alexander Porter Butterfield)
하지만 대선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한 사법절차는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경찰 수사와 검사의 기소를 거쳐서 재판끝에 1973년 1월 도청기를 설치한 범인들은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FBI는 범인들의 배후에 관해서 계속 광범위한 수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닉슨이 두번째 대통령 임기를 시작할 무렵에 상원 청문회가 열려 전국에 텔레비전 생중계가 되었다. 그리고 청문회에 나온 알렉산더 버터필드 前 대통령 부보좌관[7]백악관 대통령 집무실에는 모든 대화가 녹음되는 비밀장치가 있으며, 닉슨 대통령이 사건의 은폐 공작에 관여하는 내용도 녹음되었다는 핵폭탄급 증언을 해버린다. 특별검사와 상원 특별위원회는 녹음 테이프를 증거로 제출하라고 백악관에 요구했지만, 닉슨은 '행정 특권'을 이유로 들어 거절한다.

행정 특권이란 미국에서 행정부 인사들에게 보장하는 일종의 비밀 보장 특권을 뜻한다. 삼권분립에 의해 사법부, 의회로부터의 간섭을 받지 않을 권리를 이르고 있다. 참고로 이게 한국에서는 대통령의 '통치행위'로 대응되어 보장을 받고 있으며, 민정수석이나 비서실장에게 관례적으로 보장되어온 권리였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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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치볼드 콕스 특별 검사
엘리엇 리처드슨 법무부 장관
월리엄 러클하우스 법무부 부장관
1973년 10월 19일 닉슨 대통령은 테이프를 제출할 수 없다며 워터게이트 도청을 조사하던 청문위원회를 와해할 목적으로 아치볼드 콕스 2세(Archibald Cox Jr, 1912 ~ 2004)[9] 특별검사를 해임하기로 마음먹고 엘리엇 리 리처드슨(Elliot Lee Richardson, 1920 ~ 1999)[10] 법무부 장관에게 아치볼드 특별검사를 해임할 것을 명령[11]한다. 그러나 다음날인 1973년 10월 20일 토요일 엘리엇 법무부 장관은 명령을 거부하고 사임한다.[12] 장관이 사임하자 닉슨은 이번에는 장관 대행을 하게 된 월리엄 도일 러클하우스(William Doyle Ruckelshaus, 1932 ~ 2019)[13] 부(副)장관(Deputy Attorney General)에게 해임을 명령했지만, 부장관도 명령을 거부하고 사임한다.[14] 결국 장관과 부장관 모두 닉슨의 명령을 거부하고 사임하자 대행의 대행이 된 법무부 서열 3위 로버트 헤론 보크(Robert Heron Bork, 1927 ~ 2012) 송무차관(Solicitor General)[15]까지 해임명령이 내려왔고, 결국 보크 차관이 닉슨의 명령을 따르면서 아치볼드 특별검사는 해임된다.[16] 20일 토요일 단 하루만에 닉슨의 수사방해 때문에 특별검사가 해임당하고 법무부 장관과 부장관이 사퇴한 초유의 사태를 두고 언론은 토요일 밤의 대학살(saturday night massacre)이라고 부르면서 닉슨의 무분별한 권력 행사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닉슨은 결국 자신의 뜻대로 특별검사를 해임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미국인들은 닉슨에게서 등을 돌렸다.

닉슨이 이렇게 무리하게 특별검사를 해임한 것에는 여러가지 설이 제기되는데 가장 유력한 이유는 아치볼드 콕스 검사가 존 F. 케네디의 측근이었다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정치인에 대한 특별검사를 임명할 때 해당 정치인의 소속 정당과 다른 정당의 검사를 임명하거나 아예 정치색이 없는 검사를 임명하는 관례가 있는데[17], 그런 이유로 민주당 소속이었던 아치볼드 콕스가 공화당 소속 닉슨의 특별검사로 임명되었고 하필이면 콕스가 케네디 정권에서 오래 활동했던 것. 아치볼드 콕스는 케네디 밑에서 단순히 일한 것 뿐만 아니라, 마피아 소탕 작전에서 로버트 F. 케네디 법무장관과 함께 산전수전 다 겪은 케네디 가문의 측근 중의 측근이자, 사적인 친구이기도 했다. 닉슨은 케네디 가문에 대해 애증 섞인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고[18], 그런만큼 케네디의 측근이 특별검사로 임명되는 것을 자신에 대한 케네디 가문의 공격이라고 생각해, 온갖 수를 써서 특별검사 직위에서 해임시켰다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설명이다.

1973년 11월 17일 닉슨은 특별검사 해임으로 악화된 여론을 잠재우고자 직접 기자회견에 나서는데, 여기서 "나는 사기꾼이 아니다(I'm not a crook)"라는 유명한 개드립을 날리기도 했다.[19] 허나 이 발언은 오히려 미국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닉슨 대통령을 사기꾼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20] 전면적 부인과는 상관없이 대통령이 말한 "사기꾼"이라는 단어만 뇌리에 남은 탓. 결국 미국 내 여론은 오히려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된다.

똥줄이 탄 닉슨은 기껏 해임한 특검도 다른 사람으로 다시 임명하고 테이프 내용을 기록한 문서를 제출하는 것으로 합의를 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제출하지만 이때 기록을 자체 검열하는 짓을 저질렀다. 이때 다시 들고 나온 주장이 소위 "통치행위론". 대통령이 정무적, 정치적 판단에 따라 기록의 공개를 막을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대통령은 4년 동안은 루이 14세같은 전제적 권한을 누린다. 따라서 미국에서는 탄핵을 제외한 그 어떤 사법절차에도 구애받지 않는다."

(The President wants me to argue that he is as powerful a monarch as Louis XIV, only four years at a time, and is not subject to the processes of any court in the land except the court of impeachment.)

이게 웬 정신나간 논리인가 싶겠지만 실제로 닉슨이 자기 변호사를 통해 주장한 항변이다.

그리고 대통령의 기록을 공개하는 것은 국가안보에 중대한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는 협박성 발언을 계속 이어갔다. '토요일 밤의 대학살' 후 새로 임명된 특별검사 레온 자보르스키(Leon Jaworski, 1905 ~ 1982)[21]는 연방항소법원에 이의를 제기했고, 항소법원은 이를 연방 대법원에 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8명의 대법관은[22] 만장일치로 녹음 테이프를 제출하라고 판결했다. 이 United States vs. Richard Milhous Nixon,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미국 정부 대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 판결은 대통령의 권한과 특권의 한계를 정리한 기념비적 판결로 꼽힌다.

판결요지는 다음과 같다.

"연방대법원은 헌법상의 문제를 결정할 때 최종적인 목소리를 밝히는 곳입니다. 어떠한 사람도, 심지어 미국 대통령이라고 해도 헌법 위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대통령은 '형사 재판에서 명백히 관련이 있는' 증거를 보류하기 위한 구실로 대통령의 특권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The Supreme Court does have the final voice in determining constitutional questions; no person, not even the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is completely above the law; and the president cannot use executive privilege as an excuse to withhold evidence that is "demonstrably relevant in a criminal trial.")

결국은 닉슨이 주장한 통치행위론에 따른 대통령 특권은 연방 대법원에 의해 부인된 셈. 대법관들 중 절반이 닉슨이 임명한 이들로 채워져 있었지만 이 문제에 대한 대법관들의 판단은 일치했었다.

그리고 새로 제출된 테이프에서 닉슨이 거짓말을 한 사실이 들통났다. 닉슨은 계속해서 워터게이트 사건 및 사건은폐 공작과의 관련성을 부인했지만, 테이프에는 CIA 국장에게 직접 FBI의 수사를 방해하라고 지시하는 내용이 녹음돼 있었던 것이다. 그 외에도 주변 측근들과 사건에 관해 논의하는 내용들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2.3. 결말[편집]


미국 사회 전체는 쑤셔진 벌집이 되었고 끝까지 그를 지지하던 보수층마저 닉슨에게 등을 돌리게 된다. 권한 남용과 사법절차 방해로 탄핵 직전까지 몰리게 되자, 결국 하원의 탄핵소추안이 가결되기 전인 1974년 8월 9일 닉슨이 자진 사퇴함으로서 일단락되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닉슨은 처음에는 사퇴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 닉슨은 자신이 어떻게든 위기를 모면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워터게이트를 지나갈 일이라고 여겼다고 한다. 하지만 녹취록이 공개되며 공화당의 중진 의원까지 탄핵 시도에 동참하려 하자 주변인들도 닉슨의 사퇴를 종용했다. 사퇴를 결정하기 전날 밤, 닉슨은 자신의 딸과 아끼던 사위[23]와 식사를 가졌고, 두명이 모두 사퇴를 권유하자 결국 사퇴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일설에 따르면, 사퇴 직전 밤 닉슨은 역대 대통령 초상화와 대화하고, 헨리 키신저 앞에서 아기처럼 우는 등 여러모로 정신적으로 피폐한 상태였다고 한다. 이 때문인지 미군 장성들은 닉슨 사퇴 일주일 전, 닉슨이 자살하지 않도록 경호팀에 신신당부를 했고 닉슨이 홧김에 핵전쟁을 시작하지 못하도록 핵 미사일 발사 통제권도 닉슨 몰래 빼앗았다.

하야 성명 후 닉슨은 퇴임하는 시각에 이르기 전 에어 포스 원[24]을 타고 캘리포니아로 귀향길에 올랐는데, 비행 중 워싱턴 DC에서 제럴드 포드의 대통령 취임식이 열리자 규정에 따라 닉슨의 탑승기의 비행기 기장이었던 랠프 앨버타치 미합중국 공군 대령은 즉석에서 에어 포스 원에서 기체 고유 부호 SAM-27000으로 호출 부호를 변경했다.

물론 사건의 규모도 규모였지만, 사태가 이렇게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진 결정적인 이유는 닉슨이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다. 미국 사법 체계에서 위증은 엄청난 중죄이다. 전국적으로 사퇴하라는 요구가 빗발치고 지지자들마저 등을 돌린 것도 개입을 한 게 사실로 드러나서보다는, 공식 석상에서 개입을 안 했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 이유였다. 나중에 비슷한 연유로 탄핵의 위기를 맞은 빌 클린턴 대통령도 르윈스키 스캔들이 일어났을 때 잘 대처했다면 욕을 먹을지언정 탄핵 위기에 몰리지는 않았겠지만, 클린턴이 법원에서 위증을 했고 르윈스키에게도 위증을 요구한 것이 들통나는 바람에 탄핵 직전까지 몰리게 되었던 것이다.

3. 이후[편집]


일단 선거에서는 닉슨이 맥거번을 압살했기 때문에 민주당에서도 결과에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었고 공화당민주당은 부통령이 대통령 자리를 승계하는 것으로 합의한다. 문제는 부통령이었던 스피로 애그뉴가 워터게이트 사건 당시 뇌물수수 문제로 1973년 10월 사임했고, 공화당 하원 원내대표였던 제럴드 포드가 닉슨에 의해 부통령으로 지명되고 의회의 인준을 받아 취임한것이 73년 12월이었던 것이다. 즉 포드는 부통령이 된지 불과 8개월만에 대통령에 취임하였다.[25]

그리고 포드는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대통령 사면'이라는 특권을 이용해 닉슨이 저질렀거나, 혹은 저질렀을거라고 추정되는 모든 범죄행위에 대해서 사면한다. 제럴드 포드의 사면 선언에는 '닉슨이 재임중 저지른 행위로 인해 기소나 재판의 가능성이 있고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지만 사회적 대화합 차원에서 사면한다'고 명시되었고 닉슨 본인도 사면을 받아들였다. 이로서 미국은 대통령이 재임 중의 사건으로 형사 기소된 적 없는 국가이며 현재에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빌 클린턴때 이 전례가 위협당할 뻔 하긴 했지만 말이다. 결국 포드는 이게 큰 악재가 되어 자신의 재선에 실패하였다.[26]

닉슨 본인은 죽을 때까지 자신이 개입했다는 걸 부정했다. 왜냐하면 닉슨 입장에서는 대놓고 민주당 본부에 침입하여 도청기를 설치하라고 명령을 내린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닉슨은 재선에서 확실히 이기길 원했고, 그러길 위해서 민주당의 대통령 경선 계획에 대해 알고싶어했다. 밑에서도 설명하겠지만 대통령재선위원회 정보 수집 담당자 조지 고든 배틀 리디(George Gordon Battle Liddy, 1930 ~ 2021년 3월)[27]관련 기사 는 닉슨에게 민주당의 계획을 알아낼 방법이 있다고 말했고 닉슨은 허락했다. 그러나 닉슨이 간과한 건 리디가 대놓고 민주당 본부에 침투하여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미국인들도 닉슨이 직접 지시를 내렸다고는 보지 않는다.

4. 원인[편집]


닉슨은 1968년에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1971년부터 재선을 위한 선거운동을 하고 있었다. 대개 이런 도청 시도를 하는 쪽은 불리한 쪽인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당시 닉슨이 불리한 상황이었고 그것을 타개하기 위해 도청을 시도했으리라 짐작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당시 닉슨의 지지율은 이러한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절대 낮지 않았다. 당시 닉슨의 지지율은 충분히 재선이 가능한 정도를 넘어서 압도적인 수준이었다. 닉슨 측이 처음부터 불리한 상황이었다면, 아무리 정치공작이 있었다고 해도 유권자득표율 60.7%에 51개 주[28] 중 전통적인 민주당 텃밭인 워싱턴 D.C.매사추세츠만을 내준 49개 주 승리라는 압도적인 결과가 나왔을리는 없다. 오히려 이 당시까지만 해도 개헌해서 3선까지 노려볼 만하다는 얘기까지 있었다.

게다가 불법 침입과 도청 대상이었던 민주당전국위원회(Democratic National Committee/DNC)와 의장(Chairs)[29] 오브라이언의 워터게이트 사무실은 딱히 닉슨에게 위협이 될 만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으며, 가지고 있을 리도 없었다. 닉슨 측이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 이유가 없다는 이야기. 이러한 상황 때문에, 대체 이 사건이 왜 벌어졌느냐에 대해 의문이 굉장히 많이 제기되었다.

4.1. 심리학적 설명[편집]


워터게이트 사건을 심리학적으로 풀어낸 시도가 나와서 한동안 이슈가 된 바 있다. 한국에서는 이 내용이 미국의 심리학자, 작가, 대학 교수인 로버트 시알디니(Robert Cialdini)의 저서 설득의 심리학을 통해 소개되었다.

당시 불법 침입 계획은 대통령재선위원회 정보 수집 담당자 G. 고든 리디의 작품이였는데, 그가 본래 계획했던 것에서 민주당사 도청 시도는 매우 사소한 일부분이었다. 그가 처음 제시한 것은 도청 외에도 민주당 정치인과 언론사 기자에 대한 미행, 특수 통신장치를 탑재한 추적기, 공갈협박, 강도 위장 침입, 납치습격, CIAFBI를 이용한 신상 털기, 조작된 정신병력 등의 허위사실 유포, 언론기사 조작, 민주당 정치가들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고급 콜걸을 태운 호화 요트 등을 포함한 100만 달러[30]짜리 계획이었다. 리디는 워낙 괴짜에다 신뢰성이나 판단성이 의심되는 인물이었고, 당연히 이런 말도 안 되는 계획이 통과될 리는 없었다. 그리고 일주일 후, 리디는 이 계획을 대폭 축소한 50만 달러짜리 계획을 제시했고, 여전히 황당한 내용이었기에 당연히 통과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리디는 이 계획들이 모두 거절당하자, 제법 저렴한 25만 달러짜리 계획을 제시했다. 여전히 내용은 황당했으나, 이번에는 통과되었다.

당시 이 계획 통과에 관여하였던 사람은 존 뉴턴 미첼(John Newton Mitchell, 1913 ~ 1988) 법무부 장관 겸 대통령 재선위원회 위원장, 재선위원회 부위원장이자 나중에 사업가이자 장로교 목사가 된 제프 스튜어트 매그루더(Jeb Stuart Magruder, 1934 ~ 2014), 백악관 법률 고문 존 딘, 그리고 프레드 라루였다. 이 중에서 가장 급이 낮았던 라루만이 마지막 의견에 반대 의견을 표출하였는데, 중요한 건 라루는 그 전 2번의 제안 때 참석하지 않았고 이때 처음 참석한 이였다. 이후 제프 매그루더가 내놓은 보고에 따르면 이 사건의 진실이 약간은 보인다.

"우리 중 누구도 리디의 계획에 적극 찬성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100만 달러라는 엄청난 금액에서 시작했기에 25만 달러 정도면 수용 가능한 금액이라고 생각했다" …… "리디를 빈손으로 돌려보내기 곤란했던 것이다." 미첼은 "'좋아, 100만 달러의 1/4만 내주고, 뭘 들고 오나 보자'라는 의미로, 리디에게 뭔가 작은 것을 승인해줘야 한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사건 이후 몇 년이 지난 후, 매그루더는 이 사건을 '거절 후 양보' 전략의 사례로 이야기했다. 거절 후 양보 전략이란 머리부터 들이밀기(Door in the face technique) 전략이라고도 하는데, 먼저 큰 요구를 하고 점차 요구를 줄여가면서 상대가 자신 또한 양보해야 한다는 심리적 압력을 받도록 하는 설득 전략이다. 심리학적으로 상호성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는데, 누군가에게 받은 것이 있으면 사람은 본능적으로 뭔가를 돌려줘야 한다고 느낀다는 것을 말한다. 이 기법은 실제로 상대에게 준 것은 없지만, 이와 같은 방법을 통해 마치 제안자가 양보한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설득 기법으로 꼽힌다.

"만약 리디가 처음부터 우리한테 래리 오브라이언[31]

의 사무실에 불법침입해 도청장치를 설치할 계획입니다'라고 말했다면, 우리는 즉시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리디는 일단 콜걸 투입, 납치, 습격, 파괴, 도청 등의 계획을 한아름 들고 왔다. 절반, 아니 1/4만 받아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면서 먼저 빵 한 덩어리를 전부 요구했던 것이다."

물론 이렇게 쓰면 사건에 대한 미화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으나, 이것은 현재 미국에서도 심리학적인 주요한 사례로 다루고 있는 사건이다.

4.2. 닉슨의 과대망상과 편집증[편집]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닉슨이 결백한 것은 절대 아니다. 애당초 윗선에서 딱 잘라서 비열한 술수를 쓰지 말라고 지시했다면, 위와 같은 구구절절한 설명이 필요할 일도 없었다. 하지만 승리에 대한 지나친 집착 때문에 과욕을 부리다가 되려 스스로 자기 목을 친 꼴이 된 것이다.

닉슨은 1960년 대선에서 총 득표수 0.17%[32] 차이로 케네디에게 석패했고, 처음 당선된 1968년 대선에서도 경쟁자인 민주당 로버트 케네디가 암살당했음에도 겨우 0.7% 앞섰을 뿐이었다.[33] 그 와중에도 소위 "50개주 전략(50 State Strategy)"이라는 선거 전략으로 전국적인 지지를 끌어모으는 것이 닉슨의 계획이었고, 닉슨의 주요 지지층 또한 미국 전역에 흩어져 사는 평범한 중산층 백인들인만큼, 닉슨 스스로도 압도적인 승리로 재선을 따내고 싶은 욕심이 생긴 것이다.

1972년 대선에서 원래 민주당 후보로는 에드먼드 머스키가 유력했다. 아이오와, 뉴햄프셔 경선에서 머스키가 1위를 하는 등 초반 분위기는 머스키한테 유리했던 것. 문제는 머스키가 대선 본선에 올라올 경우 닉슨이 그토록 바라던 압도적인 승리를 하지 못할 것으로 예측되었다. 일부 여론조사에서는 머스키가 닉슨을 앞서기도 했다. 그래서 닉슨은 완벽한 승리를 위해 워터게이트 사건을 통해 민주당의 대선 후보를 호구에 가까운[34] 조지 맥거번으로 바꾸려 했고, 실천했다.

또한 닉슨은 반대파에 대해 과할 정도로 적대감을 느끼는 성격이었다. 따로 자신의 정적 리스트까지 만들어서 관리했다는 게 청문회에서 폭로될 정도로 철두철미했다.[35][36] '침묵하는 다수'라는 표현으로 도덕적 가치를 내세우며 중산층의 지지를 이끌어 낸 닉슨의 대외적인 모습과는 달리, 도청 테이프와 청문 과정에서 공개된 그의 본색은 자신과 생각이 다르면 마구 씹어대고 공권력을 동원해서 사찰하는 전형적인 썩어빠진 정치인이었다.[37] 결국 녹취록으로 폭로된 닉슨의 인간적, 정치적인 추악함이 만천하에 드러남으로서 닉슨은 그토록 애지중지한 지지 기반을 잃게 되었다.

거기다 닉슨은 서민 출신인데다 하버드에 합격하고도 등록금이 없어 입학하지 못했던 유년 시절의 서러운 기억이 있었다. 이로 인해 닉슨은 자신과는 대비되는 엄청난 부자 가문 출신에다가 공부를 못했는데도 아버지 빽으로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한 민주당의 후보 존 F. 케네디에 대한 반감을 갖는 등, 열등감이 심하기로 유명했다. 이런 닉슨의 '인간적인' 면을 집중적으로 다룬 영화가 올리버 스톤 감독의 영화인 '닉슨'이다.

5. 진실을 파헤친 사람들[편집]


미국의 일간지 워싱턴 포스트의 두 기자 밥 우드워드(Bob Woodward)와 칼 번스타인(Carl Bernstein)이 이 사건을 지속적으로 파헤쳐 진실이 밝혀지는 데에 큰 공헌을 하였다. 이들에게 중요한 단서를 계속 제공한 정보원이 있었는데 밥 우드워드는 이 사람을 '깊은 목구멍(Deep Throat)'이라고 칭했다. 깊은 목구멍의 정체는 그 이후에도 드러나지 않다가 2005년에야 밝혀지는데, 그 정체는 바로 사건 당시 FBI 부국장이었던 윌리엄 마크 펠트(William Mark Felt, 1913 ~ 2008)였다. 펠트와 연락한 사람은 밥 우드워드였는데 둘의 인연이 기이하다. 우드워드가 해군 장교 재직 중에 백악관에 간 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펠트를 우연히 만났다고 한다. 조지워싱턴 대학교 대학원 동창이었던 둘은 서로 친해졌고 펠트는 이후 우드워드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었다고 한다. 장교 제대 후 듣보잡 신문사에 있던 우드워드에게 중앙지로 가라고 조언해준 사람도 펠트였다고. 펠트가 우드워드에게 정보를 제공해주는 과정은 첩보극을 연상시키게 한다. 우드워드는 펠트와 만나고 싶을 때 자기 집 창문에 빨간 깃발을 꽂은 화분을 놓았고 펠트가 이를 보면 미리 약속한 지하 주차장에서 다음 날 새벽 2시에 만났다고 한다. 만약 펠트가 우드워드를 만나고자 할 때에는 뉴욕 타임즈의 20면에 시계를 그려놓았다고 한다. 우드워드는 이에 대해 펠트가 어떻게 그려놓을 수 있었는지 자신은 알지 못했다고 책에서 언급한 바 있다. 밥 우드워드가 정보를 물어오면 칼 번스타인이 주로 확인 작업을 거쳤다고 한다. 종종 우드워드가 펠트한테 확인을 받기도 했다.

우드워드와 번스타인은 이 워터게이트 사건 폭로의 공로로 무명의 신참 기자에서 일약 전 미국인이 아는 대기자가 되었다. 이 2명은 1971년 워터게이트 건물 침입 사건부터 1974년 닉슨 사임까지 무려 3년 동안 오로지 이 사건에만 매달렸고 결국 대통령 퇴진을 이끌어내었다. 이런 한 가지 문제에 집중한 장기간의 심층 취재와 보도는 매일 마감시간에 쫓기면서 속보 경쟁만 하고 있던 미국 신문, 방송에 일대 경종을 울리면서 탐사보도 저널리즘[38]이 생기기 시작했다. 또한 여기엔 우드워드와 번스타인, 펠트 이외에도 당시 워싱턴 포스트 편집국장이었던 벤저민 크라운실드 브래들리(Benjamin Crowninshield Bradlee, 1921 ~ 2014)[39]와 사주였던 캐서린 마이어 그레이엄(Katharine Meyer Graham, 1917 ~ 2001)[40]도 큰 역할을 했다. 브래들리는 자칫 위험할 수도 있는 사건 기사를 냉철하게 편집해 실어 사건의 전개 과정을 조율해냈으며 그레이엄은 워싱턴 포스트의 붕괴를 각오하고 두 기자를 보호하며 외풍에 맞섰다. 더군다나 이전에 워싱턴 포스트는 닉슨의 가족들을 취재하면서 무단침입(...)을 통해 사진을 찍어가기도 해서 닉슨에게 반감을 사기도 했고, 베트남 전쟁의 추악한 진실을 담은 펜타곤 보고서를 뉴욕 타임즈와 함께 보도하여 닉슨이 워싱턴 포스트 기자는 백악관에 절대 들이지 말라는 지시를 내릴 정도로 닉슨 행정부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41] 실제로 닉슨 행정부에서는 워싱턴 포스트에 대해 강도 높은 세무 조사는 물론 전방위적인 압박을 가해왔던 걸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30년 동안이나 정보제공자를 보호한 워싱턴 포스트는 언론사의 귀감으로 평가 받을 만하다. 그리고 이 사건의 교훈은 내부고발자의 중요성도 다시 느끼게 해준다는 것. 또한 이 사건으로 일개 지방 언론사에 불과했던 워싱턴 포스트는 미국의 주류 언론이 되었다.

6. 후일담[편집]


닉슨 사임 이후 2명이 저술한 책을 바탕으로 워터게이트 사건을 파헤치는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의 모습을 그린 영화가 1976년작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All The President's Men).[42] 로버트 레드포드(밥 우드워드 역)와 더스틴 호프먼(칼 번스타인 역)이 두 주인공을 맡아서 열연했다. 이 영화 자체에서는 대통령이 발리는 장면은 나오지 않지만 사실상의 행정부의 승리와 함께 엿 먹는 것처럼 그리면서 마지막 장면에서 '닉슨의 하야를 이끌어낼 증거가 발견되어서 하야했다'는 식의 자막이 뜬다. 이 영화는 1977년 49회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 후보로 올랐으나, 상은 록키한테 돌아갔다. 비록 4개 부문에서 상을 받으며 그 해 최다수상을 기록하긴 했지만 남우조연상(제이슨 로바드)를 제외하면 각색상, 음향상, 미술상 등 주요 부문과는 거리가 있는 상들이었다. 그리고 이 때 같이 작품상 후보에 올랐다가 쓴 잔을 마신 다른 영화들이 네트워크택시 드라이버다.

하지만 대특종을 낚은 두 사람의 길은 엇갈렸다. 우드워드는 승승장구한 반면 번스타인은 1980년대 초 거짓 편집 사진 사건으로[43] 포스트지에서 물러났다. 물론 강연과 기고 등으로 번스타인도 굶주리지는 않았지만 우드워드의 막강한 영향력에 비하자면 번스타인은 초라하다는 것이 일반적.[44] 이후 한 동안 잠잠했던 번스타인은 이후 2020년에는 자신의 트위터로 트럼프를 대통령이라 생각하지도 않고 무시하면서 정작 트럼프가 잘못된 일을 할 때는 앞장서서 찬성하거나 침묵하는 공화당을 비난하며 해당 발언을 한 공화당 의원들의 명단을 공개하며 다시 세간의 관심을 받기도 했다.#

우드워드는 이후 누구도 그의 인터뷰 요청을 쉽게 거부하지 못하는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고, 이후의 대통령들이 재임 중 한 번씩은 그와 단독 인터뷰를 가지는게 관례가 되는 엄청난 특권을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대통령들을 인터뷰해 낸 책들을 포함, 총 8권 이상의 책을 발간하였다.[45]

한편 테이프에 과연 도청 지시 사항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역사가들의 영원한 논쟁거리이다. 왜냐하면 닉슨이 하야함으로서 테이프에 실린 내용이 전부 공개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46] 다만 여러 정황 증거를 통해서 확실히 도청 관련 이야기가 있다는 건 일반적인 이야기지만 학자에 따라서는 그 이상의 문제, 즉 위에 설명된 여러 더러운 정치 공작에 대한 이야기들이 같이 들어있어서[47] 닉슨에게는 치명적인 문제였다고 한다.[48]

일단 당시 소위 스모킹 건이라고 불린 테이프를 들어본 닉슨 본인은 자신의 결백이 증명됐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하니 아이러니라고 할만 하다. 다만 이 스모킹 건 녹취록은 닉슨이 도청을 지시했거나 사전에 알았다는 증거는 되지 못하지만 사건 발생 직후 인멸을 공모하는 내용이 생생하게 담겨있었다. 이게 공개되고 닉슨은 "믿지 못할 인간", "지지자들에게도 거짓말을 하는 인간"으로 몰러 큰 타격을 입고 사임하게 되었다.

워터게이트 호텔은 지금도 호텔로 운영중인데, 워터게이트 바로 옆 건물이 닉슨의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존 F 캐네디를 기념하기 위한 존 F 케네디 센터가 있다. 심지어 완공도 워터게이트 도청 사건 몇달전인 1971년 10월 8일에 완공되었다.

NBC방송이 워터게이트 45주년 특별 보도로 특검팀 메모를 공개하였는데,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이 재임 시절 베트남 전쟁 관련 기밀 문건을 공개한 폭로자와 반전(反戰) 시위대에 폭력을 휘두르려고 했다는 증거가 발견됐다고 한다.#

75세의 밥 우드워드 기자는 2018년에 공포: 백악관의 트럼프(Fear: Trump in the White House)라는 도널드 트럼프를 비판하는 책을 내놓았다.[49] 여기서 그는 트럼프를 한마디로 적대심에 가득찬 닉슨이라고 평가했으며, 러시아 게이트를 워터게이트에 견주는 평가를 하였다. 번스타인 기자는 CNN의 객원 논객으로 틈틈이 출연하면서 역시 트럼프를 닉슨보다 더하다며 거세게 비판하고 있다.

2019년 12월 28일. 방송계 최고 권위 ‘피버디상’을 받았던 변호사 출신 기자 프레드 그레이엄이 사망했다.#

이 사건 이후로 제럴드 포드가 대통령직에 오르면서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도 영향을 받았는데, 미군 장교 2명이 살해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강경했던 닉슨과 다르게 유감성명을 받아들였다.

7. 창작물에서[편집]


위에서 언급한 영화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이 있다.

1995년작 영화 '닉슨'에서 닉슨의 전반적인 생애를 다루긴 했지만 워터게이트 사건이 꽤 비중있게 나온다. 영화의 시작이 1973년 워터게이트 사건이 쟁점화되는 와중에 불꺼진 백악관안에서 닉슨이 혼자 관련 보고서를 읽는 모습으로 시작하여 하야를 결심한 뒤 벽난로 앞에서 흐느껴 울며 기도를 하고 이후 케네디의 초상화를 바라보는 장면으로 끝난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도 이 사건이 유머러스하게 풍자된다. 유명인이 되어 닉슨을 만난 검프가 그의 배려로 워터게이트 호텔에 묵게 되는데, 밤에 자기 방 맞은편의 객실의 창문을 통해 괴한 몇 명이 형광등은 안 켜고 손전등으로 방을 이리저리 뒤지는 걸 발견한다. 검프는 그 방이 정전돼서 그러는 줄 알고, 나름 배려해준답시고 프런트에 전화해서 '제 맞은편 방이 정전된 것 같은데 사람 좀 보내주세요'라고 했다. 그리고 이후 사건은 모두가 아는대로 진행된다.

왓치맨에선 사건이 은폐되었고 닉슨이 20년이나 대통령을 해먹고 있다. 코미디언이 현실에서 워터게이트 도청 사건을 취재하고 폭로했던 기자들인 우드워드와 번스타인을 처리할 때가 재밌었다고 파티장에서 낄낄거리는 장면이 있다.

성룡 주연의 폴리스 스토리 2에서 잠깐 언급된다. 폭파범의 협박전화를 도청하려고 주인공이 반장과 하는 이야기가 '미국 대통령도 도청하다가 물러났잖아요'라고 나온다.

조지 클루니가 이 사건을 바탕으로 넷플릭스 드라마로 계획 중이다.

2017년 내부고발자 "마크 펠트"를 다룬 영화 《마크 펠트:백악관을 무너뜨린 사나이》(Mark Felt: The Man Who Brought Down the White House)가 나왔다. 주연 마크 펠트 역할은 리암 니슨, 부인 오드리 펠트 역은 다이앤 레인이 맡았다.[50]

더 포스트》에서는 펜타곤 페이퍼 보도가 주제이나, 결말에서 캐서린 그레이엄이 "이런 일은 다신 감당 못할 것 같다."고 말한 후 워터게이트 호텔 경비원이 침입 흔적을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하는 장면으로 워터게이트 사건을 암시하며 끝난다.

NBC의 드라마 굿 플레이스 1-9화에서 악마들이 노래방 기기로 부르는 노래 중 하나로 나온다. 곡명은 닉슨 테이프... 다른 라인업으로는 무솔리니 연설, 멜 깁슨의 비하 발언 등 제정신은 아니다.

마블 코믹스캡틴 아메리카 시리즈의 시크릿 엠파이어 에피소드에 영향을 주었다.[51] 여기서 악당 조직인 시크릿 엠파이어의 리더가 캡틴 앞에서 두건을 벗는 장면이 있는데, 이게 정확히 누구인지는 묘사되지 않는다.[52] 단지 캡틴이 그의 정체를 보고 경악을 하고 리더가 자신은 더욱 더 많은 힘을 원했다는 얘기만 하고 자살하는 장면만 나온다. 워터게이트 사건 즈음에 나온 에피소드라 닉슨과 워터게이트를 풍자하기 위해 쓴 에피소드라고 한다.

보드게임 《워터게이트》로도 나왔다. 사건을 은폐하고 임기를 마치려는 닉슨 측과 이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려는 언론인 측으로 플레이하는 2인용 게임이다. 닉슨 측은 각종 카드를 활용해 증인들을 하나하나 제거하고 정보 말이 판에 꼽히면서 진상에 다가가는 것을 중간에 끊고, 언론인들은 반대로 내부고발자와 언론인들을 엮어가며 판에서 정보 말로 트리를 구성해내야 한다. 2020년에 정식 한글판이 출시되었다.

2022년, 미국 starz 채널에서 해당 사건을 다룬 개스터(Gaslit)라는 드라마를 방영했다. 같은 해 대통령들의 영부인을 다룬 드라마인 '퍼스트 레이디'에서 역시 워터 게이트 사건이 다뤄졌다.


8.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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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사 1면을 대문짝만하게 실어놓은 사례는 뉴욕 타임스로서 매우 이례적인 것이다. 한국 신문은 가장 주요한 뉴스를 1면에 크게 장식하는 게 보편적이지만, NYT의 경우 상당히 절제된 편집을 추구해 어지간해서는 1면을 크게 장식하지 않는다. 이후에도 이 신문은 9.11 테러진주만 공습 같이 국가적인 위기에 처한게 아닌 이상 이런 식의 편집을 하지 않았다.[2] 한국으로 치면 중앙당. 미국 정당들은 각 정치인들이 개별적으로 움직이는 개방적인 구조로 중앙당이 없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실제로는 전혀 아니다. 모든 선거 후보자를 경선으로 선출하기 때문에 한국처럼 공천권을 행사하는 당대표는 없지만, 전국의 당원과 재정을 관리하고 선거때마다 후보경선을 진행하는 중앙당 조직은 당연히 존재한다.(원내에서 자당의 당론을 조율하는 역할은 의장 또는 원내대표가 맡는다) 2016년에도 민주당 전국위원회가 힐러리 클린턴을 대선후보로 만들기 위해서 편파적으로 경선을 관리했다는 위키리크스의 폭로가 나와서 당지도부들이 사퇴하는 등 민주당이 엉망진창이 된 상황이다.[3] 괴한 중 일부는 전직 CIA 요원으로 CIA에서 사용하는 동일 종류의 도청 장비를 소지하고 있었다. 이 문제 때문에 CIA는 사건 초기부터 난처한 입장에 놓였다.[4] 당시 CIA의 자체 예산은 비공개였기 때문. 현재도 CIA를 "포함"한 모든 정보기관의 총 예산이 얼마쯤 들어간다는 것만 밝히고 있다. 대한민국 국정원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예산이 비공개로 처리되어 있다.[5] 처음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부통령 후보로 선출된 토마스 이글턴(Thomas Eagleton)이 우울증 증세로 치료를 받았던 것이 알려지면서 사퇴하고, 그로 인해 전국위원회에서 특별 회의를 통해 존 F. 케네디의 매제인 동시에 프랑스 대사를 지낸 적 있던 사전트 슈라이버(Sargent Shriver)를 새로운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참고로 이 사람의 사위가 아놀드 슈워제네거.[6] 핵심공약으로 기본소득제를 내세울 정도로 진보적이었던 맥거번 후보가 지저분한 네거티브 선거전략을 달가워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깨끗한 정책선거를 원했다고... 지난번 대선이었던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휴버트 험프리가 높은 인기에도 불구하고 무리한 네거티브만 남발하다가 결국 간발의 차로 닉슨에 패한 것 역시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7] Alexander Butterfield, former presidential appointments secretary. Deputy Assistant to the President. 대통령에 가장 가까운 보좌진이었다. 닉슨 사임 이후 연방항공국(FAA) 국장을 역임했다.[8] 가령 국회 청문회에서 답변을 거부해도 의원들이 관례상 넘어가줬다.[9] 당시 하버드 로스쿨 교수였다가 의회의 추천으로 특별검사에 임명된 인물.[10] 2차 닉슨 내각 출범 당시 국방장관으로 재임하던 중 법무장관으로 임명됐다.[11] 미국에서 특검 임명권은 법무장관에게 있다. 한국처럼 특검법안 제정이나 의회 의결은 필요하지 않다. 도널드 트럼프의 러시아게이트 특검도 법무장관이 임명했으며, 이 때는 제프 세션스 법무장관이 스스로를 제척해 로드 로젠스타인 부장관이 장관 대행 자격으로 전직 FBI 국장 로버트 뮬러 3세를 특검으로 임명했다.[12] 잘못된 명령을 거부했기에 비난을 받지 않고 후임 포드 대통령때 영예로운 자리인 영국 대사와 상무장관까지 역임할 수 있었다.[13] 닉슨에 의해 당시 워터게이트 사건을 조사하고 있던 FBI 국장으로 지명되었다가 의회 인준 실패 후 다시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었다.[14] 이 사람도 사임 후 환경보호부 장관까지 역임한다.[15] 연방정부와 관련된 재판 상고와 항소의 최종책임을 가진 직책이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은 미국 법무부 문서 참조.[16] 그 후 이 대가로 로버트 보크는 바로 법무장관으로 임명되지만 당연히 의회 인준은 어려웠기에 서리로 그치고 만다. 닉슨 사임후 결국 법무장관 서리에서 사퇴했다. 그후 로널드 레이건 정부 때 워싱턴의 연방항소법원 판사에 임명되었다. 이후 레이건에 의해 대법관으로도 지명되지만 인준이 부결되면서 무위에 그친다. 그 자리를 대신 채운 사람이 바로 앤서니 케네디.[17] 미국에서는 검사가 정당에 가입해 활동하는 것이 합법적이다.[18] 닉슨은 자신과 달리 엄청난 부자 가문 출신이라 자신이 돈이 없어 입학하지 못한 하버드 대학교도 아버지 빽으로 입학하고, 잘생긴데다 건강하고 지적인 이미지까지 있었던 케네디를 매우 질투했다.[19] 다만, "crook"이라는 단어를 언급한 것 자체는 워터게이트 사건과 함께 제기된 세금 탈루 의혹을 잠재우기 위해 사용한 말이다.[20] 조지 레이코프는 '사기꾼'이라는 말을 입에 담으면서 스스로 사기꾼이라는 프레임을 걸어 버렸다고 분석했다. 적어도 '나는 정직하다'라는 식으로만 말했어도 여파는 덜 했을 거라는 이야기. 당시의 기자회견이 외신을 통해서 전세계적으로 알려져서 1973년 한국 및 외국 신문이나 방송에서 떠들 정도로 미국에게는 큰 나라 망신으로 남게된다.[21] 이 사람은 이후 코리아게이트 사건이 발생했을때 하원 조사위원회의 특별 고문 자격으로 조사에 참여하였다.[22] 원래 미국 연방대법관은 9명이지만, 당시 윌리엄 휴브스 렌퀴스트(William Hubbs Rehnquist, 1924 ~ 2005) 대법관은 닉슨 행정부에서 법무부 송무차관보로 일한 경력이 있었기에 판결에 참여하지 않았다.[23] 바로 캠프 데이비드의 어원이 된 데이비드 아이젠하워였다.[24] 정확히는 대통령 전용 헬리콥터[25] 연방법상 대통령 계승 순위 3위는 하원의장이나 공화당은 소수파여서 하원의장은 민주당이었다. 포드의 정치적 목표는 하원의장이었다. 그래서 대통령 자리를 굉장히 힘들어 했다. 재선에 실패한 것도 인기가 없는 것도 있었지만 포드 자신이 대통령직을 버거워한 것이 가장 큰 이유. 그리고 이건 그의 딸이었던 수잔 엘리자베스 포드(Susan Elizabeth Ford)도 마찬가지여서 백악관의 생활을 "뉴잉글랜드주에 있는 수녀원이 세운 사립여고 생활과 같다"라고 고백한바 있다. 참고로 미국의 사립고교는 대부분 가톨릭 미션스쿨이다. 하지만 수녀원이 세운 사립고등학교는 버몬트주,메인주,뉴햄프셔주,메사추세츠주,코네티컷주,로드아일랜드주 등으로 구성된 뉴잉글랜드주에만 존재한다. 게다가 그 수녀원이 세운 사립고등학교가 가장 굉장히 엄격한 학칙과 분위기로 유명하다. 한국과 같이 학생들은 교복을 입는다.[26] 포드 본인은 여러 악재에도 불구하고 1976년 대선에서 27개 주에서 승리하며 선거인단 240명을 확보하고 전국적으로 48%의 득표율을 올리며 꽤 선전했지만, 상원과 하원 에서도 민주당이 압승을 거두면서 대통령 뿐만 아니라 의회까지 주도권을 민주당이 가져가 버렸다.[27] 리디는 이 사건으로 인생 자체가 작살 났지만 말년에 평온했고 2021년 3월 향년 90세에 사망하게 된다.[28] 총 50개 주이지만, 수도인 워싱턴 D.C.를 특별지역으로 간주해서 따로 3명의 선거인단이 배정된다.[29] 미국 민주당의 전국조직을 대표하는 최고위직이다.[30] 당시 1973년 대한민국에서 미국 1달러 가치는 397.5원이었다. 그러므로 397,500,000원이므로 현재 가치는 6,533,310,000원(65억원)이다.[31] 이 사건 이후 1975년부터 NBA 총재를 9년간 지냈다.[32] 이 때 일부 주에서는 부정선거 의혹까지 제기되었다.[33] 물론 간선제에 가까운 미국 대선 구조상, 선거인단 득표수에서는 큰 차이가 났다.[34] 조지 맥거번은 당 내부 대다수의 지지를 받지 못하던 상태였다. 닉슨의 예상대로 존 코널리, 휴버트 험프리 등 대다수의 민주당 중진 정치인들이 닉슨을 지지하며 맥거번은 최악의 참패를 당했다.[35] 웃기는 것은 이 정보를 처음 입수해서 터뜨린 기자 본인도 그 리스트에 올라 있어서, 생방송 과정에서 자기 이름을 대통령 정적 리스트에서 읊는 촌극이 벌어졌다.[36] 조지 맥거번, 에드먼드 머스키, 월터 먼데일 등 진짜 닉슨과 대적했던 라이벌 정치인들도 있었지만 빙 크로스비, 한스 모겐소, 노엄 촘스키, 제인 폰다 등 워싱턴 정가와 상관이 없던 학자, 언론인, 배우, 셀럽들의 이름이 더 많은 것이 눈에 띈다. 심지어 같은 공화당 정치인인 뉴욕시장 존 린지(John Lindsay) 등의 이름도 올라있다. 여담으로 이 리스트에 적힌 사람들은 닉슨의 정적 리스트에 오른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했다고.[37] 닉슨은 정보기관과 국세청을 동원해 자신에 적대적인 언론인들에게도 탄압을 가했다.[38] 간단히 말해 황우석의 사기극을 까발린 MBC PD수첩이나 삼성 X파일 사건을 폭로했던 MBC의 이상호 기자, 삼성그룹비자금을 폭로했던 시사in 주진우 기자 등을 떠올리면 된다.[39] 2014년 10월 21일 별세, 언론계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2013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민간인에게 수여하는 최고 영예인 '대통령 자유메달'을 주었다. 별세한 날 오바마 대통령은 "브래들리에게 저널리즘은 민주주의에 반드시 필요한 공공재였다"며 "진정한 언론인이었던 브래들리는 WP를 미국에서 가장 훌륭한 신문 가운데 하나로 변신시켰다"고 애도의 마음을 표했다.# 여담이지만, 워터게이트 당시 20대였던 벤자민 브래들리의 아들 또한 언론인의 길을 가게 되고, 이후 영화화 까지 되는 엄청난 특종의 주역 중 한명이 된다. 펜타곤 페이퍼를 다룬 2017년에 개봉한 영화 더 포스트에서는 톰 행크스가 역을 맡았다.[40] 영화 더 포스트에서는 메릴 스트립이 역할을 맡았다.[41] 게다가 사주였던 캐서린 그레이엄은 존 F. 케네디 대통령이나 린든 존슨 대통령과 친밀한 사이기기도 했다.[42] 국내에선 '대통령의 음모'로도 통한다. 제목은 영국 동요 '험프티 덤프티'의 가사인 'All the king's men'에서 따온 것.[43] 닉슨은 죽는 날까지도 번스타인의 이 사건을 예로 들어서 워터게이트 사건도 이런 사이비 기자들의 모략이라고 주장했다.[44] 1990년대 한국 대우 자동차 CF에도 나온 적이 있다. 또 아내였던 영화감독 노라 에프론이 둘째를 임신했을 때 아내 친구와 불륜을 저질렀는데 이혼 후 그 불륜을 담은 소설 '제2의 연인'이 출판되었고 영화로도 만들었다.[45] 다만 부시 행정부의 주요 인사들을 인터뷰하면서 '이라크 침공이 정당하다'는 식의 뉘앙스를 풍기는 내용을 보도해서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부시 행정부가 우드워드의 막강한 영향력을 이용해서 언론 플레이를 하고 있고 우드워드는 다른 기자들은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자신만이 만난다는 특권의식에 취해있다는 비판. 또한 그는 오바마와도 단독 대담을 가진 뒤 책을 출판했는데, 여기서는 오바마가 오판을 하여 이라크, 아프간 전을 확전시켰다며 통렬하게 비판을 하여 논란이 되었다. 한편 이 책을 읽고 자신의 감상을 비디오로 공개하며 우드워드의 분석을 극찬한 사람도 있는데, 바로 이 사람이다.[46] 많은 내용이 공개되긴 했다. 닉슨도 죽었고, 이제 테이프의 저작권이 미국 국가기록원으로 다시 넘어온 마당이라.[47] 올리버 스톤은 노골적으로 그가 케네디 암살에 대한 비밀을 알고 있었고 그 테이프에 들어있다는 설까지 이야기하나 케네디 빠이자 닉슨 까로 유명한 올리버 스톤 개인의 주장일 뿐 실제 녹취된 테이프에서 닉슨이 케네디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은 닉슨 개인의 케네디에 대한 열등감에서 비롯된 언사가 대부분일뿐 케네디 암살에 관해서는 특이한 내용이 없다.[48] 이미 밝혀진 사항으로도 닉슨은 충분히 욕을 먹고 있지만 보수파의 리더로서 재평가되는 걸 보면... 다만 실제 연구를 위해서 닉슨의 여러 테이프를 들어본 학자들에 의하면 닉슨 자체가 지나칠 정도로 세심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앞서 말한 비리 뿐 아니라 그의 인간적인 약점도 공개되는 것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니.[49] 이전까지와 달리 현직 대통령 트럼프를 직접 인터뷰하는 데에는 실패했고 그 대신 백악관 관리들을 인터뷰해서 쓴 책이다.[50] 다만 영화평은 그렇게 좋지 못하고 실제 사건 및 마크 펠트의 개인사에 대한 왜곡도 심한 편이다.[51] 캡틴 하이드라로 유명한 그 에피소드가 아니라 과거에 나온 에피소드다.[52] 얼굴 자체가 안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