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경왕후(용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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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작중 행적
3. 캐릭터 평가
4. 기타


1. 개요[편집]


KBS 대하드라마 용의 눈물의 등장인물이자 히로인. 배우는 최명길.[1][2]

태종 이방원의 정비. 시아버지 이성계가 일으킨 위화도 회군 때 온 가족이 동북면으로 피신하자, 일이 잘못되면 비상을 준비해서 자결하려 했을 만큼 담대한 여걸이다. 이 때 시어머니인 신의왕후[3] 한씨와 신덕왕후 강씨는 놀랐으나, 며느리 민씨가 의연하게 "집안의 어른이 목숨을 내놓으시고 일을 도모하시는데, 시아버님이 잘못되면 우리도 살아남지 못한다"며 독려하였다.


2. 작중 행적[편집]


조선 개국 후에도 일찌감치 남편 이방원의 야심에 동조하면서, 스스로는 상궁들과 내시들을 포섭하여[4] 신덕왕후와 세자 이방석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 당연히 이방원이라면 질색하는 신덕왕후는 주도면밀하게 남편을 보좌하는 원경왕후가 눈엣가시라, 첨예한 대립각을 세운다. 오죽하면 원경왕후가 시아버지가 좋아하는 약식을 만들어 가서 중궁전에 바쳤으나, 신덕왕후는 "약식에 독이 들어 있을 것"이라며 보는 앞에서 은수저를 꽂아 볼 정도였다. 당연히 본인은 경악을 금치 못하고 부들부들 떨었고 원한은 깊어진다.[5][6]

1차 왕자의 난 때는 말까지 타고 정도전의 참수를 남편에게 종용하였고 2차 왕자의 난 때에도 남편에게 아낌없는 조언하는 등, 이방원의 가장 큰 참모 중 하나였다. 태종의 말을 대신 타고 싸우던 목인해가 화살에 맞아 말에서 떨어지고 백마가 태종의 집 앞으로 달려오자, 눈물을 흘리면서 나가 싸우다 죽을 것이라 하는 등 괄괄하고 담대한 모습을 보였다.[7]

그러나 왕비가 되고 태종의 여성 편력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후궁들과 알력을 행사하다 자신이 부리던 상궁들이 쫓겨나고 권한이 크게 축소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외척 약화 정책이 시작되자 태종에게 끊임없이 반항한다. 태종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태종과 편전에서 입씨름도 하고, 태종이 민무구민무질을 국문하는 자리에서 형제를 고문하려 하자 "절대로 안 된다! 차라리 나를 먼저 국문하고 죽이라!"고 윽박지르는 등 남편인 태종에게 맹렬히 맞선다.[8] 그러나 그럴 수록 태종의 태도는 냉혹해지기만 했고, 결국 민무구 민무질의 사사에 이르러서는 공식으로 폐비 거론까지 되었으나 세자가 왕이 된 후 따라올 추궁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던 신료들 전원의 반대로 새로운 후궁 2명이 내명부를 대신 관리하는 형태가 되어 말 그대로 중궁전에 유폐된 이름만 중전인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이 시점부터 가슴앓이병이 본격화되고, 그런 와중에도 원한으로 버티며 세자 양녕대군이 뒷날 보위에 올라 이 한을 갚아주는 것이 유일한 희망으로 여겼지만 양녕대군은 세자 자리를 버리기로 작정하며 온갖 비행을 일삼아 더욱 속을 태운다. 그런 가운데 동생들의 죽음은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여겨 1차 왕자의 난 직후 남편 이방원이 형 이방과에게 세자 자리를 양보하자 찾아가서 따지고 들던 것과 달리 "내가 왜 그렇게 궁에 들어오겠다고 아등바등했을까" 한탄하며 대궐 생활에 진저리를 친다. 거기에 남은 두 동생인 민무휼 민무회까지 태종에게 죽음을 당하자 절망하여 몸져눕고, 완전히 체념한 가운데 양녕대군에 대해서도 세자빈의 부탁으로 사실상 포기하고 병약한 막내 성녕대군만 바라보며 살지만 결국 병사하여 모든 걸 잃다시피 한다.

그리고 3남 충녕대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대비로 물러나게 되지만, 태종이 며느리인 소헌왕후의 집안을 박살내면서 자신과 똑같은 불행을 겪는 것을 지켜보며 마음고생을 하게 된다. 아직도 눈치를 채지 못하며 "설마..." 하던 세종대왕소헌왕후에게 "아마 중전의 친정이 나의 친정처럼 파탄날 거다. 마음 단단히 먹으라."고 경고하는 등, 이제는 태종의 움직임도 다 판단할 정도의 통찰력도 가진 상태. 소용 없는 걸 알면서도, 거의 파탄난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직접 태종을 찾아가 따지지만 물론 허사였다.[9]

결국 유람을 떠났다가 오랜만에 돌아온 장남 양녕대군이 거지꼴이 된 걸 보고는 실신하여 쓰러지고,[10] 저승사자어의로부터 그리 오래 가지 못할 것이란 진단이 나온다. 그 후 많은 곳으로 피접을 나간다.[11] 그걸 들은 태종은 자신 때문이라며 오랫동안 드러내지 않았던 죄책감을 보인다. 피접 나가 있는 도중에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이 병문안을 오고 그 후 문병안을 온 태종은 오랫동안 용서를 빌고 싶었던 본심을 밝힌다. 이 때 태종이 "대비는 알아야 한다. 나도 늘 외로웠다."고 말하고 용서를 구하는 모습은, 냉혹하고 빈틈없던 철혈군주도 결국 사랑받기를 원하는 한 사람의 인간임을 보여주는 명장면이다. 그 동안 태종 이방원이 왕권 강화를 위해 원경왕후에게 저지른 온갖 몹쓸 짓들을 생각하면 그저 변명에 가까웠지만, 이미 모든 걸 잃고 체념하며 죽어가던 원경왕후는 더 이상 이방원을 증오할 힘도 없었다. 오히려 언제부턴가 전하께서 딱해보인다는 말을 하고, 체념하듯이 용서한 뒤 눈을 감는다. 태종이 아내의 시신을 끌어안고 서럽게 우는 것으로 158화의 막이 내리는데, 전체 159화 가운데 엔딩 BGM이 나오지 않고 화면이 서서히 어두워지며 끝나는 것은 이 때가 유일.


3. 캐릭터 평가[편집]


그야말로 여걸 그 자체인 캐릭터이다. 냉철한 성격에 두뇌가 비상한 여인으로 초반에 이방원이 계모 신덕왕후정도전의 견제에 시달리던 잠저 시절 남편의 참모 역할을 하며 방원을 죽이려 드는 신덕왕후와 암투를 벌였다. 또한 독자적으로[12] 세자빈 유씨 스캔들을 터뜨려[13] 신덕왕후에게 커다란 정신적 타격을 입혔다. 방원의 가장 큰 후원자이기도 해서 두 아우들을 방원의 최측근으로 끌어들여 고려 말부터 전폭적으로 지원했고, 정도전의 사병혁파에 대응해 사병들을 미리 내보내고 유사시에 불러 모을 수 있도록 조치하고 무기들을 은닉했다. 그리고 무인정사 때까지 숨 가쁜 정쟁 속에 남편인 이방원에게도 여러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하륜이숙번 같은 이방원의 주요 참모들 역시 원경왕후에게 감탄을 했을 정도. 원경왕후가 실제로 이방원 세력에서 참모 역할을 했다는 이야기는 없지만 어릴 때부터 총명했다거나 이방원이 처음 원경왕후를 만났을 때 아름답고 지혜로워 첫눈에 반했다는 기록도 있고, 1차 왕자의 난 당시 태조의 주도하에 정도전 등이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을 숙청하려 들 것을 직감하고 기지를 발휘해 구해내는 등 비상한 모습을 보인만큼 극중에서는 참모 역할도 했다고 각색한 것으로 보인다.

남동생들이 죽고 친정이 몰락하기 전까진 냉혹하기로는 방원보다 한술 더 떴던 사람이다. 계모 신덕왕후의 임종이 다가오자 옛정이 생각난 이방원은 문병을 가려 하였으나 원경왕후가 "굳이 갈 필요는 없지 않느냐"며 차갑게 말하고, 시아주버니 정종정안왕후 내외에게 은근슬쩍 돌려 말하긴 하지만 "왕위에 욕심내지 말라"며 협박하기도 한다.[14]

더하여 남편에 대한 독점욕과 질투심이 굉장히 강해서 남편이 다른 여자를 가까이하는 걸 용납 못한다. 이것 때문에 태종과 끊임없이 언쟁을 벌였고, 여차하면 태종이 가까이한 여인들을 고문하고, 태종의 자식을 죽이는 것도 불사했다. 효빈 김씨는 잠저 시절 수차례 본인과 아들의 목숨을 위협받았고,[15] 선빈 안씨도 고문당할 뻔 했으며, 나인 노씨는 거의 물고를 낸 것을 양녕대군이 말렸다.

그러나 그런만큼 오만하고 주제파악을 못할만큼 눈치나 판단력이 없어 그렇게 갈망했던 왕비 자리에 오르면서 그녀 인생의 전성기도 끝나 버린다. 자신이 그렇게 아득바득 애써서 왕으로 만든 남편에 멸문당하는 친정을 구해내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지만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남동생 4명을 모두 남편 손에 잃자 모든 걸 체념하고 아들들인 양녕대군, 효령대군, 충녕대군, 성녕대군 4형제만 바라보고 사는 박복한 여인이 된다. 그마저도 양녕은 엇나가면서 자신의 기대를 그르치고, 효령은 불교에 심취하여 산천을 떠돌고, 막내인 성녕은 병약한 몸으로 요절한데다, 충녕은 임금이 되었지만 외척을 경계한 태종이 며느리인 소헌왕후의 친정을 박살내면서 며느리가 자신과 똑같은 불행을 겪는 것을 지켜봐야 했기에 더욱 말년이 괴로웠다.

궁극적으로 태종의 냉혹한 외척배격에서 비록된 문제이기도 하지만, 드라마 내에서 보면 원경왕후 자신의 실책도 상당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투기야 자꾸 바깥주인이 다른 여자와 놀아나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라지만,[16] 문제는 그게 갓 건국해 왕권을 강화해가는 왕실에서 국왕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는 것. 게다가 태종에게 대고 쏟아내는 막말이나 행동의 수위 역시 어마어마해서, 태종이 "이 여자가 자기 친정을 믿고 이런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게 만들 정도.[17]

또한 태종이 왕위에 오르는데 처가 민씨 가문의 공헌이 크다보니 매사에 대고 "어찌 내게 이럴 수 있는가", "내 친정과 내가 아니었다면 어찌 왕위에 오르셨겠는가", "어찌 나를 이리도 무시하는가"라는 식의 발언을 수도 없이 내뱉는데, 이런 태도 자체가 외척이라면 칼날을 세우고 보는 태종에게는 그야말로 최악의 어그로에 가까웠다. 태조가 승하하여 국상을 치르는 마당에 "주상이 태상왕 국상은 크게 치르면서 와병 중인 장인은 왜 거들떠보지도 않으시는가, 장인도 같은 어버이 아닌가..." 하며 불평한다.[18] 멍청하고 주제 파악 못하기는 제 아우들도 똑같아서 민무구, 민무질 형제도 누구 덕분에 왕이 되었는데 이렇게 우리를 박대하느냐며 대놓고 한탄을 한다. 심지어 자신들이 귀양중임에도 불구하고 집안에 상이 터져서 태종이 특별히 상경을 허락해 준 상황에서 한 행동들이다. 자신들이 지원한 이방원이 무엇(왕권강화)때문에 왕자의 난을 일으켰는지도 구분 못할만큼 한심한 수준이다.

여기에 더해 또 한 가지 실책은, 어머니로써 왕자들을 앉혀놓고 하루가 멀다하고 자신의 신세 한탄에 그치지 않고, 국왕이자 아버지인 태종을 줄기차게 비난했다는 점이다. 심지어 꺼냈다간 불충죄, 역적으로 몰릴 만한 말들도 아무렇지 않게 왕자들에게 쏟아내는데, 이건 정도가 너무 지나치다 싶을 정도. 심지어 아버지 태종과 엄청난 불화를 일으켰고 외가인 민씨 일족과 매우 가까웠던 양녕대군조차, '아버지나 어머니나 똑같이 잘못하고 계신 거 아닌가.'라는 생각을 할 정도.

오죽하면, 외척의 권세가 왕실에 영향을 끼치는 것을 우려하며 늘 중립적이고 신중했던 민제마저 원경왕후의 푸념에 민씨 형제들과 원경왕후를 꾸짖을 정도였다. 공헌이 크고 권력 욕심이 적잖은 자식들이 왕실의 내분을 진정시키는 것보다 부추기는 행보가 적잖이 보이니 답답했기 때문.

용의 눈물의 강렬한 영향력 때문에 한동안 한국 사극에서 태종~세종 세대를 다루는 작품에서 태종과 원경왕후의 감정 묘사는 이렇게 마지막에 둘이 화해하는 식으로 넘어가곤 하는데, 약 20여년이 지난 뒤 동일한 시대를 그린 태종 이방원에서는 그와 정반대로 원경왕후태종이 용의 눈물에서의 태종과 비교도 안 될 만큼 누그러진 태도를 보였음에도 끝끝내 용서하지 않고 외면한 채 떠나가고 만다.


4. 기타[편집]


훗날 같은 배우인 최명길이 다시 한 번 맡은 대왕 세종의 원경왕후와는 차이가 있는데, 대왕 세종에서의 원경왕후는 세종대왕의 어머니로서의 모습을 강조했고, 왠지 모르게 남동생 민무구, 민무질의 죽음으로 이미 힘을 잃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강단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숨을 죽이고 조용히 지내게 되는 것은 세종이 즉위하고 대비가 된 후부터인데, 용의 눈물 쪽이 제대로 된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용의 눈물 당시 이방원과 거칠게 말다툼을 하던 장면을 찍을 때 최명길은 만삭이었음에도 땅을 기거나 상을 뒤엎는 거친 몸짓 연기까지 소화했다. 이방원을 연기한 유동근은 엄청 무서웠다고 엄살을 부렸을 정도.[19] 결국 용의 눈물 종영 전에 출산을 했기 때문에 촬영의 공백을 막기 위해서 29회 분을 9일 동안 한꺼번에 연기하고 해당 출연료를 한몫에 받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

이후 대왕 세종에서 한 번 더 같은 배역을 맡자 최명길은, 자신이 뭔가 원경왕후와 인연이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고 언급.

2001년 같은 방송사에서 만든 사극 명성황후에서도 유동근과의 악연(?)을 이어 나갔다. 유동근은 흥선대원군으로, 최명길은 명성황후로 출연.[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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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배역에는 애초 전인화가 낙점되었으나, 남편 유동근(극중 태종 역)이 부부가 동일 드라마에서 같이 연기하는 것을 반대하여 최명길이 대타로 들어갔다.[2] 당시 전인화 외에도 강수연, 도지원 등이 물망에 올랐는데, 후일 전인화, 강수연, 도지원은 김재형 PD의 차기작 여인천하에서 각각 문정왕후, 정난정, 경빈 박씨 역을 맡아 연기했다.[3] 태종 이방원의 생모.[4] 이러한 공작의 결과 내시부사 이행이나 제조상궁 등이 모두 방원 편을 들었고 세자의 일거수일투족이 방원의 귀에 들어가게 된다.[5] 1차 왕자의 난과 2차 왕자의 난 사이 시간대에서는 본인이 직접 이성계에게 약밥을 바쳤으나 이미 이방원에 대한 증오가 한창이던 이성계는 약밥을 걷어차 땅에 떨어트리고서는 그대로 가버린다. 예전 신덕왕후에게 당한 수모까지 떠올라서인지 약밥을 주워들고 벽에 던진 뒤 서럽게 울부짖는다.[6] 조사의의 난 직후 이방원이 아버지와 화해를 위해 연회를 열고, 결국 모든 걸 인정하고 체념한 이성계가 원경왕후와 재회했을 때 며느리라고 불러주자 이번엔 서러움이 아닌 기쁨의 눈물을 흘린다.[7] 실제로 말이 주인인 태종이 없이 돌아온 것을 보고 자신도 창을 쥐고 싸우겠다며 무장하고 뛰쳐나가려다 하인들이 뜯어말렸다.[8] 세자가 와서 먼저 말리고 있었고, 본인은 아예 자기가 낳은 대군 3명을 다 끌고 와서 고문을 막았다. 자신과 자식들이 말리는데도 태종이 개의치 않고 고문을 명령하자, 세자와 대군 3명이 보고 있으니 훗날 3족을 멸하고, 9족을 멸할테면 고문을 가해보라고 신하들에게 일갈한다. 그리고 그걸 들은 신하들의 표정은...[9] 이 때 태종이 사돈 심온이 잡혀 오기 전에 먼저 강상인과 그밖의 사건 관련자들의 처형을 직접 지켜보러 가는데, 원경왕후가 태종을 막아서며 "나의 친정을 박살내 놓고 이번에는 아들의 처가마저 박살 내러 가십니까?? 그럴 거면 나부터 죽이고 가세요!!" 라고 하면서 남편을 막아선다. 다만 예전과 같은 기백은 사라진 좀 처량해보이는 애원의 이미지. 이렇게 빈다면서 무릎도 꿇는다. 예전 같았으면 넘어지든 말든 살벌하게 뿌리칠 태종이지만 세월 때문인지, 아니면 아내에 대한 미안함 때문인지 용포를 잡은 손을 조용히 떼어놓는다. 처음에는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대답하던 태종은 원경왕후가 매달리자, 잠잠하더니 또 시작이라면서 뿌리치고 강상인의 처형을 지켜보러 떠났다(이때는 원경왕후에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태종 본인도 "왕권과 나라를 위해서지만, 이를 위해 여럿을 작살내는 일도 진저리난다"고 말했을 정도로 지쳐갔다).[10] 폐세자되었다고는 해도 명색이 대군이니만큼 가세가 기운 것은 아니고, 나돌아다니기 편하려고 일부러 거러지 옷을 걸친 것이었다. 원경왕후가 쓰러지는 것을 앉아서 지켜본 태종은 나중에 혀를 차면서 '그렇게 강단 있던 대비가 아들 때문에 쓰러지다니' 하며 안타까워했다.[11] 실록에서는 이 무렵인 세종 2년 7월 학질(오늘날 말라리아)에 걸려 사망했다고 한다. 이 당시에도 치료법은 존재했지만 56세라는 그 시대에는 고령의 나이었던데다가 친정과 사돈이 박살나고 장남의 거지꼴까지 보는 등 몸이 상하지 않는 게 용하다 싶은 일들을 연속으로 겪었으니 건강이 악화된 와중에 학질까지 걸려 결국은 제대로 치료할 여력 없이 사망으로 이어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얄궂게도 원경왕후 사후 225년이 지난 1645년에도 소현세자가 말라리아로 요절했다.[12] 이방원은 강력한 왕실을 무엇보다 중시하는지라 그게 정적을 쳐내는 수단이라 할지라도 왕실의 위엄을 실추시키는 일은 지양했다. 나중에 유씨의 스캔들을 알고 나서도 기뻐하기는커녕 "왕실의 위엄이 뭐가 되냐"며 탐탁찮아 했다.[13] 내관을 포섭해 이만과 세자빈 유씨의 간통사실을 알아낸 다음 조영무를 움직여 현장을 적발, 궁을 뒤집어 놓은 다음 그 내관은 정만쇠를 시켜 제거해버린다.[14] 나중에 중전이 되고 나서 남편 태종의 여자 문제에 시달리고 자신의 친정이 태종에 의해 무너지는 등 마음고생을 잔즉 하고 나서인지, 윗동서 정안왕후가 병으로 사망한 이후 정안왕후의 인품을 회고하면서, 자신의 과거 행동이 너무했던 것 같다고 한탄하였다.[15] 친정에서 원경왕후를 따라온 시녀 출신으로, 순종적이고 권력욕이 없어서 궁궐에 들어간 이후론 오히려 사이가 좋아졌다. 원경왕후에게 목숨을 위협받은 효빈 김씨의 아들이 태종의 서장자인 경녕군 이비(敬寧君 李裶,1398~1458)이다. 후에 태종은 원경왕후의 막내동생들인 민무휼, 민무회를 고문할 때 이 사건을 언급하며 그들의 처형 이유에 대한 명분을 적절하게 가져다 붙인다.[16] 사실 이 투기라는 행동 조차도 당대 사회관념으로서 용납될 수 없는 행위다. 오히려 내쫒지 않은 태종이 엄청나게 관대했던 것이다.[17] 결국 이런 투기심도 나중엔 부질없다고 여겼는지 새로 들어온 후궁들이 찾아왔을 때 '궁에 들어온 여인들의 삶은 참 고통스럽고 부질없으니 마음의 각오를 하시오.'라는 체념섞인 충고를 하게 된다.[18] 물론 이건 대놓고 한 건 아니고 자신을 모시는 상궁 앞에서만 한 거다. 세자(양녕) 역시 이에 대한 감상은 동일했는지 "생전에 권력 놓고 그렇게 싸우시더니 죽어서는 저렇게 으리으리하게 잘 챙기시네?"라고 냉소할 정도.[19] 만삭이라는 점을 숨기기 위해 사극 복장을 최대한 이용하긴 했지만, 당시 사극을 봤던 중년 여성들 중에는 최명길이 만삭임을 알아채고 저런 연기를 해도 괜찮은 거냐며 조마조마해 하기도 했다. 현장에서 같이 연기한 유동근은 물론 촬영 제작진도 만삭 임산부가 저렇게 몸을 아끼지 않고 열연하다가 무리가 가는 거 아닐까 걱정스러웠을 것이다. 실제로 극 끝 부분으로 갈수록 배우가 힘들어하는 모습이 역력한데 극중 상황자체가 그렇다보니 연기인지 실제인지 애매할 정도. 이쯤되면 최명길도 대단한 연기자이고, 배우의 사정에 맞춰 극본을 쓴 작가와 제작진, 함께 연기한 동료 배우들도 대단한 사람들이다.[20] 다만 이 때는 원래 명성황후 역을 맡은 이미연이 제작사와 소속사의 계약 문제로 80회만에 하차하게 되면서 바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