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균옹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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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역사적으로 악명높은 졸장 원균이 사실 명장이거나 맹장이었다며 옹호하는 주장이다.
2. 상세[편집]
원균은 원래부터 능력이 부족하고 성질이 포악해 그다지 평가가 좋지 않은 편이었으며, 정치논리에 의해 원균을 고평가하던 일부 여론마저도 칠천량 해전의 대패 이후 전부 박살나면서 이후부터 원균은 까야 제맛인 존재로 격하된다. 하지만 현대에는 까가 빠를 만든다는 법칙 때문에 오히려 원균을 옹호하는 주장이 퍼지기 시작했다. 또한 잘 모르는 대중에게 원균 옹호론이 치우지지 않고 믿을 만한 논리로 받아들여지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은 아직도 여기에 낚인다.
원균에 대한 옹호론은 군사정권의 이순신 성역화에 반발하여 제기되었다. 박정희는 대통령 집권 이후, 민족주의와 국가주의같은 집단주의적 이념을 중시하며, 상무정신과 화랑도#, 의병과 국난극복, 삼별초의 항쟁, 충무공 이순신과 같은 애국선열과 호국영웅들을 대대적으로 홍보하였으며,박정희 정권의 '호국 영웅 만들기'. 민족중흥의 기치아래 이순신 장군을 ‘국민멘토’로 삼고 멸사봉공, 선공후사, 살신성인 등 이순신 정신을 ‘국가지도 이념’으로 정하였다.박정희는 1962년 3월 1일 아산 현충사 일대의 성역화를 지시하여, 1967년에 현충사의 대대적인 보수공사가 완료되었으며, 1965년 남해 충렬사 경내 이순신 가묘 옆에 기념식수를 했고, 노량해전 이순신 전사지인 이락사 경내에 친필현판을 걸었다. 1975년에는 통영 한산도 이순신 진영의 제승당 정화사업을 실시하였고, 특히 1968년 4월 27일 서울 광화문에 이순신 동상을 세웠다.#1 #2
이러한 이순신 성역화에 대해서는, 박정희 개인의 존경심이나, 군사정권의 정당화, 이순신의 대리 우상화로 박정희 자신과의 동일시하려는 목적 등을 원인이라 보는데, 이런 박정희정권의 프로파간다에 대한 반발에서 이순신이 지나치게 영웅화되었고, 원균은 폄훼당했다는 수정주의적 시각이 등장한다. 유신정권 말기인 1978년에 이정일이[2] 고려대 석사학위논문 '임란시 원균의 공과에 관한 일고'를 통해 원균의 복권을 최초로 시도했다.# 군사정권에 대한 반감에서 일부 소장파 학자들이, 박정희가 이순신을 대대적으로 띄운다는 이유만으로, 이순신에 대항하여 원균을 옹호하게 된 것이다.# 386운동권 출신을 많이 기용한 노무현 정부때는 심지어 정부에서 운영하는 정책뉴스에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제3공화국의 박정희 대통령이 자신의 통치 기반 강화를 위한 일환으로 많은 부분을 미화하고 과장시켰다' 라며 원균옹호론을 주장하는 글을 등재시키기도 하였다.# 물론 운동권들에 의해 원균옹호론이 시작되었다고 해서, 모든 운동권들이 원균을 옹호한 것은 아니며, 현재 원균 옹호를 하는 사람중 하나인 원유철은 원균의 백부인 원수량의 후손으로 원균과 같은 원주 원씨라서 옹호하는 경우이다. 원균의 직계후손이라고 인터넷에 알려져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그러나 직계냐 방계냐의 문제를 떠나 만약 그가 김씨나 이씨였더라도 그렇게 원균을 옹호했을까?[3]
원균옹호론은 1978년 이정일의 고려대 석사학위논문 '임란시 원균의 공과에 관한 일고'를 시작으로 1980년대 이재범의 《원균정론》[4] 에서 소개되고, 소설가 고정욱의 《원균, 그리고 원균》[5] 소설가 김탁환의 《불멸》, 소설가 김훈의 《칼의 노래》와 이를 2004년에 드라마로 만든 《불멸의 이순신》으로 이어지며 원균 옹호론을 퍼트리는데 앞장섰다. 이덕일 또한 《우리 역사의 수수깨끼》에서 원균 옹호론을 전개한 바 있다. 다만 이건 10년도 더 전의 일이며, 그 이후 다른 책에서 원균을 옹호한 적은 없다. 1970~80년대의 원균 재평가 기류는 단순히 학문 연구가 발달하는 과도기에 나온 서적이며, 이덕일 단독 저서가 아니라 이희근과의 공저이기 때문에 원균옹호론은 이희근이 저술했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이 책에 나온 왜인 한반도 남부 지배설은 이후 출판된 이덕일의 한국 고대사 서적에 다시 나오지만, 이 책에 나온 원균옹호론은 다시 다룬 적이 없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자세히 읽어보면 원균보다는 선조를 재평가했음을 알 수 있는데, 전체적으로 원균을 기용하고 칭찬한 선조가 무능하지 않았다는 서술이 많다.
원균 옹호론자들은 신빙성이 떨어지는 가문 기록인 《원균행장기》를 내세우며,[6] 난중일기와 장계들을 비롯한 이순신의 기록들은 무시한다. 또한, 선조수정실록의 기록들은 이순신의 친척이 원균을 고의적으로 왜곡했다고 주장한다. 논파당하면 "역사는 승자의 역사", "옛날 일을 네가 봤냐? 어떻게 아냐?", "원균도 열심히 싸웠다"라는 소리로 일관한다. 악명 높은 환빠들과 주어, 목적어만 바꾸면 완전히 똑같다. (예 : 강단사학이 진실을 은폐한다. 숨겨진 진실을 찾아야 한다 등등)[7]
이러한 책이나 당시의 오류는 너무나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원균정론》 : 원균 옹호론을 처음으로 묶어서 만든 책이다. 하지만 원균을 옹호하기 위해서 무리한 해석이 많다. 일례로, "이순신이 원균 몰래 장계를 올렸다" 면서 실록 기사를 내놓는데, "이전 한산도 해전(옥포의 오기)의 장계와 같습니다" 라면서, 이순신이 원균을 따돌렸다는 내용이 있다. 그런데 실제로 위의 기사가 적힌 날짜는 한산도 대첩 직후이다. 그 밖에도, 경상 우수영 병력이 1만이면 조선 수군은 10만이고 육군은 50만이다라는 주장이 실려있는데, 이건 일본 학자들의 주장으로서, 당시 조선 병력이 얼마였는지는 경국대전과 실록에 아주 잘 실려있다.
《선조수정실록》에 대한 이해 부족 : 선조수정실록은 선조에게 미움을 받은 장수(이순신, 의병장)들에 대한 평가를 다시 쓴 기록이다. 1970년대 사학계에서는 이순신을 지나칠 정도로 찬양했기 때문에, 선조의 평가가 담긴 선조실록을 다시 연구하려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원균 옹호론은 선조와 이순신을 심층적으로 연구하기 위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1980년대 이전에도 수정실록만을 참조해서 이순신을 찬양했던 학자들은 없었다. 학자들은 처음부터 실록에 버금가는 신뢰도를 가진 임진왜란 기록들을 교차검증하면서 연구했다. 결과적으로, 선조가 이순신과 의병장들처럼 능력자들을 숙청했던 이유는 왕권을 수호하기 위해서였음이 분명해졌다. 애초부터, 선조수정실록은 몇몇 충신들의 명예를 회복시켜준 기록일 뿐이고, 원균의 평가는 선조실록의 원본을 보더라도 별다른 차이가 없다.
원균 칭찬에만 도취하는 이론: 당시의 과도기적인 연구에는 이미 해답이 내려졌다. (원균은 왕권 강화를 위해서 이순신의 제거에 사용된 간신배가 맞다). 하지만 원균 옹호자들은 선조 - 원균 - 이순신을 재평가하려고 했던 1980년대의 연구 중에서,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이론들만 인터넷과 책에다 무작정 퍼나르고 있다. 원균 옹호론을 펼치는 사람들은 그동안 발전한 연구를 무시하거나, 원균에 대한 사학계의 결론마저도 부정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받아들이는 건 오직 원균의 칭찬 뿐이다.
결국, 원균 옹호론은 한국 역사 재해석의 최대 흑역사로 남게 되었다. 그야말로 아폴로 계획 음모론에 필적할 만큼 근거 없는 의견이다.
처음에는 선조를 재평가했던 이론에서 원균이 포함되자, 원균 옹호자들이 원균의 간신배적인 행보를 부정하고 이순신을 깎아내리는 통에, 반감을 느낀 역사학자들은 원균을 더욱 싫어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원균에 대한 평가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는데, 공식적으로 조선 정부에 보고된 기록에는 이순신과의 연합 작전을 제외하면 아무런 전공이 없기 때문이다. 속된말로 이순신 버스나 얻어탔을 뿐이다.
하지만, 불멸의 이순신 같은 작품에서는 원균을 이순신의 멘토로 만드는 상황이 벌어졌다. 지상파 대하사극에서 이런 짓을 저지르자 분기탱천한 김경진 등은 공저한 소설 《임진왜란》에서 원균 옹호론을 공격했고, 다음 토탈워 카페지기 도현신은 자신의 책인 《원균과 이순신》에서 원균 옹호론을 반박했다. 그럼에도 《원균, 그리고 이순신》, 재미교포 작가 백지원이 쓴 사이비 서적 《왕을 참하라!》, 《조일전쟁》 등 원균 옹호론 저서들은 계속 나오고 있다.[8] OTL. 이우혁은 자신의 홈페이지에 '슬픈 시각으로 본 원균 명장설'이란 글을 올렸으며 이 글은 토론할 때 종종 인용이 된다.보러가기
현대의 원균 옹호론은 자본주의 시장에서 마초적인 지휘관 동료로서 팔아먹기 좋은 캐릭터라서 유행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이우혁에 의하면 마지막에 싸움터로 향했으므로 군인에 대한 보편적인 동정심을 이용하는 사람들, 학문적으로는 박정희 정권이 이순신의 명성에 편승하려한 점에 대한 반발, 가장 최근의 사례로는 조선, 이순신, 한국인을 깎아내리기 위해서 국까 컨셉을 잡으려고 원균을 옹호하는 경우도 있다. 원균 옹호론을 보면 이러한 심리가 꼭 하나씩 섞여있다. 궁예, 광해군 등이 재평가 되는 것과는 질이 다른 것이다.
오해를 고치기 위해서 말하자면, 원균은 절대로 영웅이 아니었다. 그는 전형적인 권력 숭배자이자, 권력층과의 유착이 깊었던 간신배이다. 또한 철저한 이기주의자였기에, 부하와 백성들이 위험에 처하자 방패막이로 써먹고 도망치기만 했다. 당대의 같은 친척들도 원균을 부끄러워했을 정도였다.
근본적으로 따지면 원균 옹호론을 처음으로 만든 사람은 선조였다. 현대의 원균 옹호론은 선조를 재평가하는 이론에서 시작되었으며, 원균 옹호론자들이 내세우는 사료는 원균행장기와 선조의 변명을 짜집기한 것이다. 현대인들에게는 이해가 안 되겠지만, 원균은 이순신보다 권력자들의 이익에 부합되는 것이 많았고,[9] 결정적인 순간에 신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10][11] 당시 조정에서는 이순신처럼 우리 편임이 명확하지 않은 장수에게 미련이 없었다.
정리하자면 나라 말아먹을 뻔한 정치 군인, 권력자에게 이쁨받은 꼴통, 혈연만 끝내줬던 간신. 원균 재해석 운운하는 소리가 나오면 혹시 왜곡된 정보로 억지 주장하는 것인지 잘 살펴보자.
똥별도 별은 별이라고 영어 위키에선 원균을 Korean admirals 카테고리에 등재시키고 있는데, 미국과 영국 해군 교과서를 집필한 이들이 쓴 책인 '해전의 모든 것'(휴먼 앤 북스 펴냄)에서도 이순신을 전설적인 명제독으로 설명하면서 원균은 조선 수군을 매장한 최악의 무능 제독으로 비꼬고 있다. (단, 여기에선 박홍도 동류로 까고 있는데 이 사람은 적어도 원균에 견주면 훨씬 유능한 편이며 억울한 점도 있다.)
심지어는 원균을 '비극적인 영웅'으로 포장하기 위해, 전쟁 후에도 멀쩡히 살아서 천수를 누린 아들 원사웅을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과 함께 장렬히 싸우다 죽었다고 왜곡하기까지 한다. 다만 이 부분은 왜곡이라기보다는 진짜로 몰라서 그렇게 알고 있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조선 시대 역사 문헌들이 한글로 번역되어 대중들한테 인터넷을 통해 무료로 공개된 시점은 아무리 빨라야 1990년대 말엽이고, 그 이전까지는 일반인들이 조선 시대 역사 기록에 대해서는 근거나 출처도 알 수 없는 야사나 민간 전승들을 통해 접근할 수밖에 없었다.
3. 원균 명장설?[편집]
원균을 이순신에 필적하는, 혹은 능가하는 장군이라고 보는 견해가 원균 명장론이다. 이순신의 전공은 모두 우상화한 승자측의 역사왜곡이라는 극단적인 주장.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대개 원균의 후손인 원주 원씨들이며, 근거는 주로 숙종때 대사헌을 지낸 김간의 통제사원균증좌찬성공행장(統制使元均贈左贊成公行狀)이다.
그러나, 행장기의 사료적 가치는 없다고 해도 좋다. 문중에서 조상들의 이름을 높이려고, 한참 후에 지어낸 책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순신의 난중일기는 전쟁 당시 당사자가 쓴 기록이며 다른 공식 기록과 교차검증이 되지만, 원균행장기는 다른 기록과 교차검증되는 게 아무것도 없다. 행장기를 사료로 삼는 원균빠들을 놀리면서 나온 농담이 바로 김억추 명장설. 똑같이, 김억추 행장기를 근거로 하면 김억추는 항우를 한참 능가하는 판타지스러운 장수가 되어버린다. 왜냐하면 검강으로 적선을 파쇄했다고 적혀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 시대의 선비들은 기록광이었다. 유학에서 배척하는 괴력난신(즉 괴담 따위)부터 뜬소문에 야사 할 것 없이 일단 자기가 보고 들은 거면 일단 기록하고 봤고 거기에 대한 의견을 덧붙이곤 했다.(국가 공인 기록인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외에도 개인이 직접 적은 용재총화, 어우야담 등이 있다.). 그리고 이런 기록을 남길만한 지식인들은 하나가이 원균의 탐욕스러움, 권력 숭배주의(간신배), 권력자들의 감투 놀음이 나라를 망쳤다며 한탄했다. 선조만이 "원균을 그런 식으로 헐뜯지 말라"고 했으나 당대 지식인들에게 원균이란 인물은 간신이자 소인배였던 것이다. 원균 명장론은 제대로 사료에 대한 교차검증만 해봐도 불가능한 이론이다.[12]
결론부터, 원균은 명장이 아니다. 아군 학살과 도망의 명수라고 보면 정확하겠지만 말이다. 원균은 싸우다가 패색이 짙어져서 '적의 손에 넘겨줄 바에야 없애버리는게 낫겠다.' 라는 심정도 아니고, 아예 싸우지도 않고 70척의 함대를 불태우고 줄행랑을 쳤다. 이후에도 130척의 대함대를 버리고 자멸로 몰아넣었다. 원균이 불태우고 포기했던 배는 대부분이 판옥선이며 함포를 기본적으로 배치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일본의 전선은 갑판 위에서 활이나 총을 쏘는게 전부인 사실상 수송선이나 다름없는 수준이었으니 지고 싶어도 지기 어려운 정도의 전력차였다. 굳이 충무공 정도의 전략 전술을 쓰지 않더라도 멀리에서 대포만 쏴대면 일방적으로 이길 수 있는 싸움에서[13] 그냥 겁먹고 도망친 것이다. 무엇보다 시작부터 원균은 싸워볼 생각도 안하고 75척 ~ 100척 가량의 경상우수영 함대를 불태우고 줄행랑을 놨다. 정발이 목숨 걸고 시간을 끌면서 침공 사실을 급보로 보냈을 때 그 정보를 받은 자는 바로 원균이며, 성의 군민이 전멸하는 대가를 치룬 피묻은 급보를 받고도 싸우지도 않고 함대를 자기 손으로 불태우고 자취를 감췄는데, 이런 경우는 세계 어느 국가를 찾아봐도 존재하지 않는다. 당시 휘하에 있던 옥포만호 이운룡이 "나라의 중책을 맡은 장수로서 강토를 사수할 것이며 더욱이 이 지역은 남방의 주요 방어선으로서 최대의 관문입니다. 전라수군과 힘을 합쳐 왜적을 쳐부숴야지 도망은 직분과 국가에 대한 배신 행위입니다"라고 항명했으나 원균은 임무를 내팽겨지고 적전도망을 저지르고는, 이순신에게 묻어서 그의 공을 뺏으면서 그를 모함하고, 칠천량 해전에서 막강한 조선 함대를 순식간에 소멸시켰다. 이에 대해서 원균 옹호론자들은 '권율의 부당한 처벌'[14] 탓이라고 하지만 권율이 원균에게 이런 망신을 준 이유는 단순히 싸우러 나가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원균은 권율을 통해서 '이순신이 칠천량으로 싸우러 나가지 않는다'며 임금에게 상소를 올렸고, 그 결과가 바로 이순신의 파직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삼도통제사 자리를 빼앗고 난 원균은 그냥 관사에 틀어박혀서 음주가무로 허송세월을 보내면서 군을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원균을 비판하는 이들은 아예 한 술 더 떠서, 명예 왜군 장수라고 일본식 이름까지 지어서 까기도 한다. 조선 수군에게 박살나기 일쑤였던 일본 수군은 원균이 출정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 규모를 알아본 후, "드디어 우리가 죽는가 보다."라며 하나같이 유서를 쓰고 "어차피 죽을 거 마지막까지 해보자!"였으나, 뚜껑을 열어보니 그 공포의 조선 수군은 순식간에 오합지졸로 전락해있었고 일본측은 그런 조선 수군을 철저히 궤멸시켰다. 굳이 유능한 점을 찾으려 한다면, 혈연을 이용하여 권력층에 아부하는 능력 정도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야말로 군인으로서는 폐급, 간신배로서는 만렙이라고 할 수 있겠다.
4. 원균 맹장설?[편집]
원균 명장설이 너무 말도 안 되고 쪽팔리니까, 명장은 아니었지만 차라리 용맹한 장수였다는 절충안이 나왔다[15] . 1980년대 MBC에서 방영한 조선왕조 500년에서도 원균이 무능한 밥벌레는 아니었고 맹장 타입이었다고 옹호를 해주었다. 불멸의 이순신에서 채택한 '해전에는 능숙하지 못하지만 육전에는 능숙해서 북방의 명장이었다'란 주장도 원균 맹장설에 포함된다. 사실 아예 뜬금없이 나온 주장은 아니고 선조실록 권82 선조 29월 기해(1596년 11월 9일)기사에서 류성룡이 원균을 두고 그는 용맹하긴 하나 병사들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고 선조에게 아뢴 말에 근거를 둔 것인데, 류성룡의 누구의 친구였지를 생각하면 원균에 대해 좋은 말을 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에 꽤 신빙성이 높다는 것이 원균맹장론자들이 드는 근거이다.
그러나, 원균은 육전에서도 활약이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원균이 육군 전문이라는 말은 없다. 조선왕조실록에 신립은 기병을 잘다룬다는 서술이 있으며, 전형적인 맹장에 어울리는 인간 흉기였다는 점이 기록되어 있다. 여진족과 매우 잘 싸운 인물로 기록되어있다. 즉, '일신의 용맹은 우수하나 지휘관으로서 미숙해 잘못된 선택으로 결국 큰 전투에서 대패한 맹장' 이미지로는 신립이 훨씬 적절하다. 하지만 원균은 뭘 잘하는지에 대한 묘사가 없다.[16] 원균이 선조의 빽을 믿고 출세욕 때문에 고위직만 받고 제대로 전투에 임하지 않았다고 보는게 적절할 것이다.
이 경우는 안방준이 지은 은봉전서에서 원균이 안중홍에게 "적? 그까짓 거 무기로 때려잡다보면 이기는 거잖소?"[17] 라는 식으로 말했다는 내용이 근거로 제시된다. 허나 당연하게도 원균이 진심으로 이런 말을 한 건 아니고 그의 행실을 보면 알 수 있듯 당연히 허풍에 가깝다.
또 난중잡록 중 "한 끼에 밥 한 말, 생선 5마리, 닭이나 꿩을 3~4마리 먹는 대식가였다"는 내용도 한 말의 밥을 먹고 열 근의 고기를 먹으며 80넘은 나이에도 건장함을 과시한 염파나 하루에 1만 칼로리 이상을 먹는 마이클 펠프스 같은 여러 운동선수들의 식단과 비교당하며 그의 건장함을 나타내는 내용처럼 꾸며지지만, 원균의 경우는 그 다음 내용이 "평소에 배가 무거워 제대로 걷지 못했다."다. 즉, 앞뒤 잘라먹고 유리한 기록만 취사선택 한다는 것이다.
단 이건 논란이 있을 수 있는데, 원균이 비만이었단 기록이 맹장설과 모순되는 건 아니기 때문. 원균의 실제 무덤으로 추정되는 통영시 '엉규이무덤'에 얽힌 일화 중에, 새마을 운동 때 이 무덤자리에서 도로확장을 하던 중 나온 뼈가 매우 장대했기 때문에 당시 통영 시민들이 '이 뼈는 보통 사람의 것이 아니다. 필시 장군의 것이었을 것이다'라고 수군거렸다고 하는데,[18] 이 일화를 토대로 추정해 보건데 원균은 단순히 살만 뒤룩뒤룩 찐 물렁살은 아니고 상당한 근육질 체형 위에 살이 붙은 스모선수 같은 체형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사실 궁수가 대부분이던 조선시대 무관들은 죄다 어깨가 떡 벌어진 체형이었을 가능성이 큰데, 조선시대 군궁과 장력이 비슷한 영국 장궁을 쓰던 영국 궁수의 유골을 보면 어깨가 비정상적으로 벌어져 있기 때문이다. 위의 엉규이무덤 일화에서 언급되는 '장대한 뼈'도 이걸 말하는 것일 것이다.
사실 원균맹장론과 별개로 원균의 무력이 아예 형편없었는지에 대해선 의구심이 드는 부분이 있는데, 원균은 무과시험을 첫번째에선 부정입학으로 한번에 붙었다가 떨어지고, 그 다음 시험에서도 한번에 붙어서 합격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 첫번째야 당연히 부정입학이니 한번에 붙었다 쳐도 두번째 무과시험은 어떻게 한번에 붙은 것일까? 부정입학으로 떨어진 전적이 있는 응시생은 당연히 요주의 인물이 되어 감독관들이 부정입학 감시를 더 빡쎄게 했을 텐데도 말이다. 이 점에서 볼 때 원균은 의외로 자기 가문의 빽 없이도 충분히 무과를 합격할 수 있는 기량 자체는 갖고 있었던 거 아닐까 싶다.[19] 당시 무과 과목들은 죄다 활을 쏘는 종목들이라 말을 타야 하는 기사를 제외하면 딱히 몸집이 육중하다고 불리한 과목은 없기 때문이다.
난중일기 1957년 5월 8일자에 적힌 바에 따르면 원균이 한 부녀자를 강간하려다 놓친 적이 있어서 이 기록 때문에 원균은 여자와의 격투에서도 못 이기는 ㅂㅅ이라는 인식이 있는데, 위 기록들을 종합해 볼 때 원균은 그냥 비만해서 육탄전은 형편없지만 활솜씨는 무과에 한번에 붙을 급의 실력이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궁수 자체가 육중한 무장을 하고 굼뜨게 움직이는 병과다 보니 원균처럼 몸이 비대하고 둔해도 큰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앞서 비유한 스모 선수의 경우, 의외로 스모 선수들도 분명 근육질인데도 격투기에서의 전적은 형편없다는 것은 생각해 보자. 실제로 엎어지면 일어나는 동안 얼굴에 발차기나 주먹이 날아와서 여러번 KO 당한 기록이 있다.
사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은 신립, 황진, 정기룡, 한명련, 유경천[20] , 정충신, 정운 등 온갖 별의별 희한한 무대포 인간흉기들이 난립하던 시절인데, 원균은 하필 이 시기에 활동하던 장수라서 상대적으로 더더욱 무력이 초라해 보이는 감도 있다. 사실 일본의 잡병 취급인 아시가루조차 일당백의 프로 용병들이었으며 심지어 '명회'라는 이름의 한 조선 농민은 편곤 하나 들고 혼자서 왜군 400명을 쳐죽였다는 괴담같은 얘기도 있고, 단순 지략가로만 알려진 이순신과 문약한 이미지가 강한 김명원은 의외로 둘다 당대의 명궁으로 유명했으며, 하다못해 까이는 이일조차 혼자서 왜군 여러 명을 죽일 수 있는 전투력의 소유자다.[21] 말 그대로 당시 조선의 파워인플레 땜에 원균이 저평가받는 것 뿐이지 실제 원균의 무력은 최소한 1인분 이상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이일은 신립과 여진족을 토벌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문제가 있는데, 원균의 행보는 맹장과는 1억 광년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예로 들면 원균이 임진왜란 발발 당시 판옥선을 자침한 사건의 경우, 이때 원균의 판단은 분명히 옳았지만 맹장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이란 문제가 있다. 애초에 맹장이 무엇인가? 앞뒤 생각 다 집어치우고 일단 돌격!하고 보는 게 맹장이 아닌가?[22] 예로 들어 맹장의 대명사인 신립이나 척준경의 경우, 이들이 원균과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아무 고민없이 판옥선 끌고 왜선들에게 그대로 돌격했을 것이다. 하지만 원균은 신중하게 우선 판옥선을 자침시킨 다음 병력을 데리고 육지로 올라갔다. 즉 원균은 맹장의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서는 신립이나 정기룡이 진짜 맹장이고 원균은 맹장은커녕 제 목숨만 챙기려던 똥별일 뿐이다. 당장 신립은 니탕개의 난에서 얼마나 거대한 용맹을 보여줬는지 선조 임금이 직접 곤룡포를 벗어다가 신립의 몸을 감싸며 치하한 일화까지 있으며 정기룡은 말 그대로 임진왜란의 조운이었다. 다만 신립이 탄금대에서 최후를 맞이한 것은 조총 대 기병의 싸움인지라 안 봐도 비디오스러운 전투결과일 뿐이지 신립의 용맹이 약한 것은 아니다.[23] 되려 녹둔도에서 종군하던 시절 이일의 후퇴명령을 무시하고 남아서 싸워 이긴 이순신과 이경록이 되려 원균보다 더 맹장같다. 적어도 이순신은 도망은 안쳤기 때문이다.
원균이 지상전을 잘하는 장수라는 가설은 헛소리에 가깝다. 조선 시대의 무관 시험에는 수군 무과, 육군 무과가 따로 있지 않았다.[24] 훈련 방법은 크게 차이가 났지만, 지휘관들이 배우는 기초적인 병법은 비슷했다. 물론, 해상에서는 군선이라는 별도의 도구를 써야 했으므로 이순신처럼 유연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 아니라면 적응 기간은 길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원균은 수군을 맡으면 잘 싸울 것 같다면서 가벼운 마음으로 수군을 맡았다.
되려 일각에서는 원균이 승마에 능하지 못해서 어쩔 수 없이 수군으로 배치됐다는 주장까지 나올 지경이고 실제로도 원균이 무과에서 부정을 저질렀다는 것도 승마 관련일 수도 있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칠천량 해전에서 패해 육지로 도망은 갔는데 뭐하러 말 놔두고 뜀박질로 도주했는가도 설명이 된다.
결국, 원균의 행적은 낙하산 인사의 파멸 기록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원균이 '최후에 군인으로서 싸우러갔다' 면서 옹호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원균의 지휘 기록이란 자신의 도주로를 우선하다가 전멸했던 황당한 사례밖에 남아있지 않다. 심지어, 원균은 걸핏하면 백성이나 군인들을 버렸으며, 이렇게 인명을 내팽겨친 만큼 성공한 업적조차 없다. 이런 장수에게 맹장이라는 평가를 붙여주는 것은, 그의 명령을 따르다가 허무하게 산화했던 군인들을 모욕하는 행위에 불과하다.
즉 원균은 맹장이 아니라, 단순히 정치적인 유착과 권력 숭배에 취해서, 백성과 부하들의 목숨을 값싸게 낭비하면서 살았던 인물임이 분명하다.
권력은 맛보고 싶고 그렇지만 그에 상응하는 능력은 안되는 인물이 원균인데 이럴 거면 차라리 글공부나 열심히 해서 문관이 되었어야 했지만 그러기엔 원균의 학식이 높은 것도 아니다.[25] 결국 원균은 관직부터도 가문과 인맥을 이용해 올랐고 그렇게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주제를 모르고 국가의 존망이 걸린 전쟁 상황에서 전투지휘관이 되길 고집했다. 거기에 탐욕이 지나칠 정도라서 부하들이 제대로 따르지 않아 지휘하는 데에 어려움도 많았다.
5. 옹호론이 나오는 이유[편집]
- 높은 인지도가 자본주의 시장에서 가지는 가치: 원균은 재평가를 들먹일 이유가 전혀 없는 간신배지만, 억지 논리와 사료의 취사 선택으로 '재평가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꾸준히 나오는 것은, 높은 인지도 때문에 관련된 뭔가를 살짝 붙여도 '돈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인지도가 높은 화제에 대해서 기존과 전혀 다른 주장을 하는 것 자체가 충분히 화제성이 담보되는 행동이다. 때문에, 역사적 신뢰성과 관계 없이 마구잡이로 자극적인 주장, 기존 학계의 연구를 '강단사학' 운운하면서 마구 비난하는 재야저술가들은 그것만으로도 일정한 수입과 유명세를 얻을 수 있다.[26] 참고로, 환빠들도 기존 학계의 연구를 '강단사학'이라고 비난해댄 걸 생각해보면 의미심장한 부분이다.
- 종친회와 지역 사회의 이기주의: 원주 원씨 종친회와 평택시에서 '지역 위인'을 만들려고 원균을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있다. 평택시의 5선 국회의원이자 새누리당 원내대표까지 지냈던 원유철도 원주 원씨로서 원균 띄우기에 적극적인 인물중 한명 이다. # 이는 원균과 이순신을 동급으로 포장하여, 자신들도 그 후광을 얻어보고자 하는 심사의 발로다. 그러나 원주 원씨는 정작 정말로 자랑스러운 조상인 원연에 대해서는 가문의 서자 또는 서얼로 여겨 취급 조차 하지 않고 외면한다.[27] 원균에게는 알려진 동생이 둘 있었는데, 둘째 동생인 원연은 임진왜란 때 왜적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의병장이다. 이 승전을 계기로 현감 직을 제수하였고, 원연의 아들이자, 원균의 조카인 원사립은 아버지 원연 장군이 전사했던 정유재란 때 서천군수로 있으면서 왜적을 막아낸 전공도 있다. 원균의 막내동생인 원전은 원균의 부관이였는데,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은 튀었지만, 원전은 끝까지 남아 싸우다 전사했다. 단지 직계 자손이 아니라는 이유로 원균의 동생들과 조카들은 완전히 외면 받고 있다.[28] 차라리 원연 장군을 기렸다면, 이순신과 비슷한 급으로 포장할 여지라도 있었을지도. 다행히 원균의 아들 원사웅만큼은 제정신이었다고 한다. 혹은 강직한 무관으로 마지막까지 항전하다 장렬하게 전사해 지역민들은 물론 적들마저 그 기개를 인정했던 원호(무관) 같은 사례도 있지만, 이쪽은 그냥 있는지도 모른다.
- 당대 임금 / 권력층과의 친분: 원균이 이순신을 쳐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권력, 혈연적인 기반이 탄탄했기 때문이다. 물론 실력이 밝혀진 이후에는 원균이 선무공신 1등에 추서될 때 죄다 반대했지만, 이때는 선조 혼자 박박 우겨서 집어넣게 된다. 따라서, '원균이 엄청난 중책도 맡고, 죽고서도 공신이 되었는데, 찌질이로 나오면 이상하지 않겠느냐'하는 논리를 토대로 원균에 대한 선조의 호평을 팔아먹을 수 있게 되었다.[29] 당장에 원균이 저지른 짓은 족보에서 제명당해도 시원찮은 것이었지만, 선조의 두둔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평가가 유보되었다. 선조는 거의 원균빠돌이에 가까웠다. 사관이 원균 비판을 하자, "원균 탓하지 말라"고 사관에게 욕을 날렸던 양반이다.
- 가공 매체에서의 극적 효과: 불멸의 이순신 부류라고 할 수 있다. 가공 매체에서는 원균을 약간 옹호해야 '작품의 재미'에서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아무리 원균옹호론이 논파가 끝난 헛소리라도, '이순신의 라이벌' 운운하기에는 굉장히 좋은 캐릭터인 것은 사실이다. 지장 이순신과 맹장 '이미지'인 원균[30] 을 대비시키면 흥미로운 전개가 만들어진다. 역사 그대로 묘사한다면, 원균은 처음부터 끝까지 찌질거리는 매우 평면적인 캐릭터라서, 현실적이고 재미있는 인물 설정을 위해서 조금은 옹호하는 각본을 짜는 것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실제 이순신은 너무 비현실적으로 평면적인 먼치킨이고 실제 원균은 비현실적으로 평면적인 최악의 빌런이다.[31] 따라서 현실적인 설정을 위하여 현실을 왜곡해야 한다는 흠좀무한 부조리가 발생하는 것이다. 물론, 재미에서는 플러스가 될 수 있어도, 욕은 오지게 먹을 각오를 해야 한다.
- 능동적이고 마초적인 맹장에 대한 갈망: 보편적으로, 군인 캐릭터가 등장하는 이야기는 멋있고 영웅적이어야만 팔린다. 일회성 삼류악역이면 몰라도 핵심 등장인물이 속된 말로 찌질이라면 발암
균을 유도한다면서 등을 돌리는 고객들이 많다. 당연히, 임진왜란을 다룬 전쟁물에서 어쨌든 주역일 수밖에 없는 원균은 이런 마초적, 자본주의적인 요구 때문에 시간이 흐를수록 막장도가 낮아지고 나름 용맹하기는 한 장수로 미화되는 측면이 생기게 된 것이다. [32] 헌데 정작 임진왜란에는 정운 같은 왜곡 안 하고 맹장 이미지를 넣을 수 있는 장군이 있다.[33]
- 지나친 프로파간다에 대한 반발: 박정희가 이순신을 존경[34] 하면서 프로파간다에 써먹었다는 의혹이 사회에 퍼진 점도 원인이다. 이후 이 프로파간다를 균형 있는 시각으로 분석해야 한다며 원균 옹호론이 사회로 퍼져나갔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은 당시의 프로파간다에서 나온 역반응에 불과하다. 반대로, 이런 흐름에 대한 비판자들도 이순신의 업적을 엿먹이는 경우가 있는데, 이 항목에는 북한에서도 이순신의 활약에 인민의 희생이 있다고 주장한다면서, 이런 여론에 대한 음모론을 써놓을 정도였다.[35]
- 왕권에 절대성을 부여하는 권위주의 혹은 권력자 중심적 시각: 선조실록과 권력자 중심적 시각, 국력지상주의를 견지하는 자들의 역사관이다. 사실 이 케이스는 원균옹호론보다는 선조 옹호론에 더 가깝다. 군사정권 프로파간다에 대한 반발심리로 인한 옹호가 진보 쪽에서 나타난 형태라면, 이쪽은 보수 쪽에서 간혹 나타나는 형태.[36] 이순신이 없어도 선조와 명의 힘으로 승리할 수 있으므로, 확실한 권력 배경을 지닌 원균을 이용해서 이순신처럼 아군임이 확실치 않은 실무자를 제거한 것은 타당한 책략이었다는 관점이다. 전형적인 선조 옹호론이자 강대국에 대한 종속주의를 드러내는 관점이다. 물론 이순신 없이도 승리했을 거라는 관점이 무조건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명나라 병사들에게는 조선 남부를 목숨 바쳐 지킬 이유가 없으며, 혼란기에 조선이 해체되는 입장에 놓였을 것이라는 점에서, 매우 무책임한 권력자 중심 이론이다. 당연히 중국이나 일본, 그리고 조선까들에게 매력적인 학설이기도 하다. 그러나 명군의 역할에 대한 해석과 상관없이 원균 개인의 졸렬한 행적은 바뀌지 않는다.
- 자칭 역잘알들의 지적허영: 남들이 상식처럼 알고 있지만 정작 깊이 있게 연구해 봤을 경우는 드물 경우 아는척하기 좋은 주제였다. 하지만 요즘은 오히려 인터넷에서 원균을 옹호하면 역알못이나 환빠 취급을 받기 때문에 이런 경우는 줄어들었다.
- 권위에 대한 반발: 원균옹호론과 동전의 한 면이라고 할 수 있는 이순신 폄하가 동시에 일어나는 이유는 바로 권위에 대한 반발심리 때문이다. 이순신이라는 영웅의 권위에 대한 반발, 박정희라는 독재자의 권위에 대한 반발, 민족주의라는 이념의 권위에 대한 반발. 이 세 가지 반발심에 기초하여 탄생한 이론이 바로 원균옹호론과 이순신 폄하론이다. 실제로 원균옹호론 및 이순신에 대한 폄하를 줄기차게 내세우는 인사들중에 '권위에 대한 반발'을 핵심 이론으로 삼은 포스트모더니즘과 그 하부 이론인 탈민족주의에 영향을 받은 진보 계열의 인사들이 있었다. 다만, 당시에 이러한 복합적인 반발심리로 연구되기 시작했던 원균 재평가의 큰흐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으니 연구를 하면 할수록 드러나는 원균의 실책은 옹호해줄만한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37] 유념해야 할 부분은 한국에서 민족주의는 보수 진영보다는 오히려 진보 진영에서 상대적으로 더 강하게 나타나는 경향이 있어서, 그 연장선에서 진보 인사들 중에서도 이순신을 나라와 민족의 영웅으로 고평가하는 사람은 매우 많다.[38] 모든 진보 인사들이 이순신을 폄하하고 원균을 옹호한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이야말로 진짜로 진영논리에 함몰된 인식이라 할 수 있다. 오히려 보수 진영에서도 '민족주의로 포장된 영웅'이라는 권위에 대한 반발심리와 '탈민족주의'라는 명분을 걸고 이순신을 폄하하는 인물도 존재한다.[39] 원유철부터가 보수 정치인이거니와, 이순신을 원균과 동급에 놓으려고 미화를 미친듯이 하고 있다. 물론 이쪽은 후손가의 당사자라서 그러는 것이라 정치성향에 관계 없이 어느 당에 몸을 담든 똑같이 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그렇다고 해도 표면적 이유일 따름이다. 생각도 안 한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운동권들이 전두환을 미화한 것이나 다름없고, 극우 및 보수는 희대의 쓰레기를 그토록 비호한 인물을 실드 치느라 운동권들이 보인 위선을 제대로 때려 잡지도 못한다. 그러니, 정치질을 고상하게 위장한 것 그 자체다.
- 무능하긴 했지만 아주 수준이하는 아니었다는 설: 아예 무능했다면 칠천량해전 때까지 원균이 조선의 군대에 붙어있지는 못 했으리라는 설이 원균옹호론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대표적인 반론은 조선은 너무 급속하게 전쟁준비를 하느라 조선 전체적으로 군사적 개념이 취약했고 그때문에 원균같은 존재를 미처 걸러내지 못했다 인데, 그러면 문제가 되는 점이 그런 환경 속에서는 상대적으로 무능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은 변함이 없지 않은가? 이다. 단적으로 말해, 이순신과 원균에게 빨리 부산으로 가서 싸우라고 닦달했던 사람들 중 누군가를 삼도수군통제사로 삼아 출정시켰다면 십중팔구 부산앞바다에서 조선 수군을 전원 수장시켜 아예 조선 수군을 재건조차 불가능한 수준으로 없애버렸을 것이다. 원균은 최소한 부산 앞바다에서의 작전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알았고, 미적미적대다가 곤장을 얻어맞고 강제로 출전한 뒤, 격군의 체력 방전을 감지하고 나서라도 어쨌든 후퇴를 시작해, 절대 좋은 작전이 아니었지만 아무튼 어떻게든 퇴각 작전을 수립한 뒤, 칠천량까지는 도달한 뒤에 섬멸당했다. 별 차이가 없어 보이고 원균이 더 추해보이긴 하더라도, 사소한 운만 개입되어도 전력을 온존한 패퇴 vs 완전한 몰살 까지 차이가 벌어질 수 있는 수준 차이다.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면 무능했던 사람은 맞으나 당시 조선의 군사적 개념이 그만큼 취약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이자 시대의 광풍에 휩쓸린 나약한 개인들 중 하나에 불과하며, 진짜 비극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본인의 능력에 비해 지나치게 어렵고 높은 직책이 주어진 점이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사실 이것도 큰 의미를 부여하기 어려운 것이, 상식적으로 무과에 급제하고 군 고위지휘관이었던 사람이 절대적인 기준에서 완전한 무능력자였을리는 없다. 그러나 원균은 자신의 역량에 비해 너무나 큰 책임을 맡았고, 그 일을 수행해낼 수 있는 능력이 없었으며, 심지어 비인간적이고 비겁하기까지 했다. 원균은 삼군통제사였다. 그렇다면 그가 무능하냐 유능하냐도 당연히 조선 수군 총지휘관 기준으로 평가하는 게 맞다.[40] 게다가 그를 마치 '취약한 조선의 군 체제에 휘말려서 능력에 비해 너무 높은 직책이 주어진 사람'으로 보는 것도 어폐가 있는 것이, 조선의 수군의 체계를 탄탄하게 다져놓아 강군으로 만들어놓은 이순신을 말도 안되는 억지로 모함해 쫓겨나게 한 것이 바로 원균이다. 지위가 주어진게 아니라 본인도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는 부산포로 출전을 호언장담하는 말도 안되는 허풍과 모함으로 빼앗은 것에 가깝다.[41] 원균이 무능한게 아니라 평균적인 능력치를 가졌다고 치자. 평균 밖에 안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자신보다 훨씬 적임자에 훨씬 능력이 뛰어난 자를 시기해 허풍을 통해 모함해 쫓겨나게 하고 그 자리에 앉았다면, 그건 재평가를 받거나 옹호를 받아야 할 게 아니라 더욱 더 욕을 처먹어야 할 일이다.[42]
- 극단적인 음모론 맹신과 정부 기록에 대한 불신: 조선왕조실록을 포함하여 아예 조선 시대 정부에 만들어진 모든 기록들은 다 후대에 와서 날조되었거나 조작된 것이기에 믿을 가치가 전혀 없으며, 그렇기에 원균은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것처럼 무능한 간신이 아닌 아주 유능한 장수인데 이순신 띄우기에 열광하던 후대의 한국 정부에 의해 악당으로 왜곡되었다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주로 극단적인 음모론을 맹신하는 부류인데, 특히 지금은 없어진 다음 아고라에 매우 많았다[43] . 이들이 조선왕조실록 대신 믿을만한 자료라고 들고 나오는 것이 임진록 같이 저자와 작성 연대도 알 수 없는 소설인데, 임진록이야말로 민중들이 만들었으니 믿을만한 문헌이라고 박박 우긴다. 헌데 더욱 황당한 것은 정작 임진록에서 추앙하는 영웅은 원균이 아니라 김응서인데, 이 임진록을 들고 나와 원균옹호론을 외치는 자들은 김응서라는 이름을 전혀 거론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김응서가 누구이고 무슨 일을 했는지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자기들이 자료라고 내미는 문헌조차 제대로 안 읽어 볼만큼 그저 어디서 들은 얕은 지식 몇 개에 자기들의 뇌내망상을 잔뜩 끼워다맞춰서 엉터리 음모론이나 펼치고 있으니 스스로가 얼마나 게으르고 무식한지만 증명하는 꼴이다.
6. 원균 옹호론의 사례(선양사업 포함)[편집]
6.1. 지역 사례(평택시)[편집]
- 평택에선 권력층과의 유착을 빼면 무능했던 원균을 지역의 유명인사랍시고 홍보하는 입장이고 지역 유지인 원주 원씨에서 이것을 밀어주는 지라 심심하면 원균 옹호론을 들먹이고 행사를 여는 등, 세금이 아까운 병크를 자주 보여주고 있다. 졸장 이전에 간신배인 인간을 사당과 묫자리를 웬만한 위인 묘보다 깔끔하게 관리해놓었다.[44] 원유철이 주도했다는 설이 있으나 의원직을 그만둔 이후에도 시의 태도가 그대로인 것을 볼때# 원유철 한명만의 문제로 보기는 어려워 보인다.
- '원균장군기념사업회'라는 곳에선 아래 그림에 적힌 발언을 '원균장군어록'이라며 홍보하고 있다. 굉장히 비장미 넘치게 묘사됐으나 일각에선 이순신 장군 몰아내고 당장 전쟁 나갈 거처럼 윽박지르다 정작 삼도수군통제사 되고 나니 무서워서 출정 자체를 하지도 않고 "밖에 적들 많으니까 육군 좀..."이라고 말도 안 되는 주장했다가 빡친 권율한테 곤장 맞은건 왜 빼먹었냐고 일갈하고 있다.
- 2013년에는 평택문화원에서 원균을 미화한 서적인 '원균평전'을 발간하는 데 평택시에서 약 2,500만원 정도를 보조금으로 지급했다. (책 발간은 2014년) 이 책에 대한 평가는 을파소의 역사산책 블로그로 이동하면 좋다.
- 2016년 ~ 2017년 기간 동안 원균 무덤(시체 없는 가무덤) 정비를 위해 평택시에서 약 4억 5천만 원을 집행하였다.
- 2018년부터 원균 제사에 평택시에서 매년 300만 원을 보조금으로 지급 예정이다.
- 매년 원주 원씨 종중 주관으로 진행하는 원균 제사의 모습이다. 이 행사는 2018년부터 평택시로부터 300만 원을 매년 지원받는다.
6.2. 인터넷 사례[편집]
- 위키백과마저도 상당히 오랫 동안 원균행장록을 근거로 원균 문서가 작성되어 있었다. 당연히 지금은 객관적인 비판이 훨씬 많다.
- 네이트 백과사전도 비슷한 내용이었지만 서비스가 중지되면서 사라졌다. 네이트 백과사전은 한국역대인물정보의 내용을 기본으로 작성했는데, 애초에 # 한국역대인물정보의 원균 내용의 집필자가 바로 원균의 재조명을 주장한 논문을 작성한 당사자이므로 이런 내용이 나온 게 당연하다.
- 불멸의 이순신 방영 때 역사를 제대로 모르고 원균 옹호론에 낚인 부녀자들이 실제 원균을 그네들 방식으로 모에화시켰다! 당시 부녀자들은 그들 방식대로 미화시킨 이순신과 원균을 가지고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원균옹호론이 가진 시장성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인기와 영향력이 큰 드라마가 남긴 오점이 현재진행형으로 발휘하고 있는 나비효과라 할 수 있다.
6.3. TV 프로그램 사례[편집]
- MBC의 예능인 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에서는 이순신을 주제로 한 에피소드를 방영하였는데 원균을 당대의 이순신의 라이벌이라고 표현하였다. 덧붙여 자기보다 나이도 어리고 후배뻘인 이순신이 높은 직위에 먼저 오르니 원균이 불쾌했을 법하다란 말같지도 않은 말도 나왔다.[45] [46]
- KBS 1시사 프로 역사저널 그날 2018년 6월 분에서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을 보여준다. 원균의 후손이 방송에 나왔으며 조상 원균의 명예를 회복하겠다고 권율을 모욕하는 짓을 보여준다. 원균이 선무공신이 추대받을 만한 인물이라는 것 당시 선조가 추대할때 신하들 전부 그것도 이순신을 싫어하는 신하마저 반대했다는 역사적 기록 사실은 언급하지 않고 그저 후빨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칠천량 패전의 책임을 권율과 조정탓을 하는 전형적인 옹호론자들의 토론이 펼쳐지는 모습이 보인다.#유튜브1유튜브2
6.4. 대중 역사서 사례[편집]
위의 문단에도 설명되어 있지만, 현대 시장에서 원균이 뜨게 된 이유는 조금 더 복합적이다. 특히, 군인이면 보편적으로 강하고 좋은 존재라고 묘사되어야 팔린다는 자본주의적, 마초적인 측면에서 원균 캐릭터는 재창조되었다. 어찌보면 수동적인 이순신에 대응하는 화끈한 군인을 보고 싶다는 열망이 원균에게 투영되었고, 여기에 자본시장에서의 특정한 이익분야가 결합되자 걷잡을 수 없이 번진 것이다.
6.4.1. 이덕일의 서적[편집]
그의 여타 문제점에 대해서는 이덕일/비판 문서로.
이덕일·이희근,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1999년, 197쪽}}}『선조실록』 37년(1604년) 6월 25일자는 세간의 이런 평가가 정당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해 준다. 임진왜란의 공신들에 대한 포상 기록인데 무신으로는 이순신 · 권율 · 원균이 선무일등공신이었다. 현재의 일반적 통념에 역적인 인물인 원균이 400년 전인 당시에는 당당히 일등공신으로 책봉된 것이다. 그것도 그가 모함했다는 이순신과 같은 반열에 올라 있다. 이 기록은 원균도 조조처럼 한 영웅을 위한 후세의 희생양인지 모른다는 의심을 갖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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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원균이 선무공신 1등에 녹훈된 것이 신하들의 합의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선조의 무한 원균사랑 때문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마저도 원균은 본래 선무공신 2등이었는데,[48] 선조가 길길이 날뛰는 통에 1등으로 올라간 것이다. [* 원균은 당초에 군사가 없는 장수로서 해상의 대전에 참여하였고, 뒤에는 주사(舟師)를 패전시킨 과실이 있었으니 이순신·권율과는 같은 등급으로 할 수 없어서 낮추어 2등에 녹공했던 것인데, 방금 성상의 분부를 받들었으니 올려서 1등에 넣겠습니다. …… 사신은 논한다. …… 원균은 주함(舟艦)을 침몰시키고 군사를 해산시킨 죄가 매우 컸다.
이덕일·이희근,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1999년, 200쪽}}}이런 점에서 볼 때 원균이 상대적으로 억울한 것은 사실이다. 그의 경력은 그가 불패의 신화를 지닌 용장은 아니지만 적어도 겁장(怯將)은 아님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이순신 보다 다섯 살이 많았던 그는 무과에 급제하여 조산만호로 있으면서 변방의 오랑캐 토벌에 세운 공으로 부령부사에 특진되었으며, 병사 이일과 시전부락을 격파한 공으로 선조 25년(1592년) 경상우수사가 되었다. 이는 이순신이 자신의 실력이 아닌 유성룡과 정탁의 추천을 받아 종6품 정읍현감에서 정3품 전라좌수사로 파격 승진한 것과는 비교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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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균은 1564년 무과에서 부정 시험 의혹[49] 으로 낙방했다가 15년 뒤인 1579년에 합격한 반면, 이순신은 1572년 무과에서 낙마 사고로 낙방했다가 고작 4년 뒤인 1576년에 합격했다. 따라서 원균 보다도 이순신이 선배다. 종성부사 원균은 인사고과에서 꼴찌를 기록한 반면, 발포만호 이순신은 인사고과에서 으뜸을 받았다. 시전부락 전투에서도 원균은 예비대인 계원장(繼援將)이었지만, 이순신은 포병대인 화열장(火烈將)으로 참전한데다 적장 우을기내까지 사로잡았다. 더군다나 이후 이순신은 부당한 이유로 픔계가 낮아진 적은 있어도 결코 합당한 이유로 떨어지지 않았다. 반면, 원균은 전라 좌수사에서 잘린 이유가 평판이 나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게다가 1591년 원균이 전라좌수사에 임명되자, 사간원은 인사고과를 들어서 그를 경질시켰다. 원균이 딱히 무슨 공적이 있어서 승진했던 게 아니었던 것이었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전라좌수사 원균은 앞서 수령이 되어 고적(考積)이 거하(居下)였는데 겨우 반 년이 지난 오늘 좌수사에 초수(超授)하시니 출척권징(黜陟勸懲)의 뜻이 없으므로 물정이 마땅치 않게 여깁니다. 체차를 명하시고 나이 젊고 무략이 있는 사람을 각별히 선택하여 보내소서"라 하니, 아뢴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 게다가 원균 다음으로 임명된 유극량도 실력은 있지만 성품이 무르다는 이유로 경질되었던 것을 보면 전라좌수사 임명이 어지간히 깐깐했음을 알 수 있는데,[* "유극량(劉克良)은 인물은 쓸만하나 가문이 한미하기 때문에 지나치게 겸손합니다. 그리하여 군관이나 무뢰배들과도 서로 너니내니하는 사이여서 체통이 문란하고 호령이 시행되지 않습니다. 비단 위급한 변을 당했을 때에만 대비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방어하는 군졸을 각 고을에 보낼 때에도 틀림없이 착오가 생길 것이니, 곤외(?外)의 일을 맡기는 것이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체차시키소서."
] 그 다음으로 온 이순신이 단지 승진이 빠르다는 것 만을 지적받았던 것은 오히려 그의 유능함을 보여준다. 이마저도 선조의 절대적인 지지로 유임되었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현감으로서 아직 군수에 부임하지도 않았는데 좌수사에 초수(招授)하시니, 그것이 인재가 모자란 탓이긴 하지만 관작의 남용이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체차시키소서."라 하니, 답하기를 "이순신의 일이 그러한 것은 나도 안다. 다만 지금은 상규에 구애될 수 없다. 인재가 모자라 그렇게 하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사람이면 충분히 감당할 터이니 관작의 고하를 따질 필요가 없다. 다시 논하여 그의 마음을 동요시키지 말라."고 하였다.
]
주변 상황이 이런 마당에 원균은 착실히 전공을 인정받아 경상우수사가 된 인물이고, 이순신은 류성룡과 정탁이 앉힌 낙하산 인사라는 주장이 얼마나 웃긴 평가인지는 자명하다.[50] 실상은 오히려 그와 반대로 원균이 윤두수, 윤근수를 비롯한 조정의 서인 대신들과 교류가 많았다는 점 때문에 이들의 비호로 진급했다는 평가가 많다. 하지만 이들은 인과관계를 역전시켜 원균을 북인으로 만든다!
이덕일·이희근,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1999년, 201쪽 ~ 202쪽}}}『선조수정실록』은 대체로 이순신에 대해서는 칭찬으로 일관하면서도, 원균에 대해서는 폄하를 일삼은 책으로서 '이순신 = 충신', '원균 = 역적'의 전거가 된다. …… 인조반정 직후 남인 이원익이 영상이 된 데서 알 수 있듯이 반정 정권은 형식상으로 서·남인 연합정권이었다. 이순신은 남인 영수 유성룡의 추천을 받았으므로 남인으로 분류된 반면, 북인이 집권했던 왜란 말기 조정에 비호자가 많았던 원균은 북인으로 분류되었으므로 『선조수정실록』이 이순신은 후하게, 원균은 박하게 기술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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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북인이 편찬한 선조실록과 북인 윤계선이 쓴 달천몽유록에서는 원균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선조실록』 31년(1598년) 4월 2일}}}사신은 논한다. 한산의 패배에 대하여 원균은 책형(?刑)을 받아야 하고 다른 장졸들은 모두 죄가 없다. 왜냐하면 원균이라는 사람은 원래 거칠고 사나운 하나의 무지한 위인으로서 당초 이순신과 공로 다툼을 하면서 백방으로 상대를 모함하여, 결국 이순신을 몰아내고 자신이 그 자리에 앉았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일격에 적을 섬멸할 듯 큰소리를 쳤으나, 지혜가 고갈되어 군사가 패하자 배를 버리고 뭍으로 올라와 사졸들이 모두 어육이 되게 만들었으니, 그때 그 죄를 누가 책임져야 할 것인가. 한산에서 한 번 패하자 뒤이어 호남이 함몰되었고, 호남이 함몰되고서는 나랏일이 다시 어찌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시사를 목도하건대 가슴이 찢어지고 뼈가 녹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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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계선, 『달천몽유록』}}}긴 시냇가에서 여러 귀신들이 손뼉을 치며 웃으므로 그 까닭을 물으니 통제사 원균을 기롱하고 있는 것이었다. 배는 불룩하고, 입은 삐뚤어지고, 얼굴빛은 흙빛이 되어 기어왔으나 퇴짜를 맞고 참여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언덕에 의지하여 두 발을 쭉 뻗고 주저앉아 주먹을 불끈 쥐고 길게 탄식할 뿐이다. 파담자 역시 크게 웃고 조롱하다가 기지개를 켜고 깨어나니, 그것은 한바탕 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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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이게 무슨 지거리야! 게다가 선조 생전에 이순신에 대한 모함과 원균에 대한 비호의 선봉에는 서인 영수 윤두수와 북인 영수 이산해가 다투어 나섰고, 정유년에는 남인 영수 류성룡까지 소극적으로 편승했음은 잘 알려져 있다. 그렇다고 해서 윤두수가 북인이었다거나 윤계선이 서인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는 당파적 이해를 뛰어넘는 인식(이 경우에는 '선조에게 밉보이면 안 된다')이 있음을 인정할 필요가 있는 사안이다.[51]
이덕일·이희근,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1999년, 203쪽 ~ 206쪽}}}두사람에 대한 호불호의 감정을 배제하고 원균과 이순신을 정리하면 이렇다.
첫째, 원균은 용감한 무장으로서 이순신만큼은 못하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싸웠다. 둘째, 후배인 이순신이 상관으로 임명되자 반발하였다. 셋째, 이순신이 투옥된 후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삼도수군통제사로서 도원수 권율의 명령을 받아 재침하는 왜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다섯째, 선조의 호의로 선무 일등 공신에 책봉되었다.
종합해 보면 원균은 불패의 신장은 아니지만 공적이 되어야 할 이유도 없는 한 사람의 용감한 장수이자 왜적과 맞서 싸워 목숨을 바친 공신일 뿐이다. …… 이순신을 추앙하기 위해 다수의 문신들이 왜적의 침입에 놀라 달아나기 바쁜 와중에 힘을 다해 싸웠던 원균같은 무장이 희생양이 될 필요는 없다. 하물려 나라를 위해 전사했으니 더 말할 필요가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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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껏 중립적인 척을 하고 있지만 내용물을 뜯어보면 하나도 맞는 게 없이 엉망진창이다. 원균은 불패의 신장은 아니지만 개념 있는 장수는 더더욱 아니고, 아니 어찌 보면 무타구치 렌야와의 비교마저 무타구치 렌야에 대한 실례이자 원균 본인에 대한 미화일 만큼 심각하다. 이런 사람을 전사했다는 사실만으로 추앙하는 건 반자이 어택을 조장하는 것이다. 5개의 주장에 대해 반박을 하면 다음과 같다.
-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싸웠다.
- 후배인 이순신에게 반발했다.
- 이순신이 투옥되자 통제사가 되었다.
- 권율의 명령으로 싸우다 전사했다.
이 짓거리를 해서 권율 휘하에 있던, 진주성 근처 제석산성 주둔 병력 5천을 얻어 놓고도 여전히 부산을 칠 수 없다고 뻗댔는데, 이걸 군율대로 적용하자면 권율이 원균을 참수해도 아무 이상함이 없다. 전시에 탈영했던 배설이 수배령 떨어진 끝에 고향인 경상도 선산에서 체포되어 서울에서 참수형에 처해진 걸 생각해보면...
- 선조의 호의로 일등공신이 되었다.
여담이지만 역대 조선 임금들의 행보에는 정치력을 가미한 행동들이 상당히 많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선조의 원균사랑 역시 자신의 죄를 면피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며 후대에 이르러서 숙종이 장희빈을 간택하고 인현왕후를 버린 것은 송시열을 제거하기 위한 도구로서 장희빈을 선택한 것이고 나중에 그 장희빈을 버린 것 역시 송시열의 포지션에 남인들이 들어갔고 그 남인들을 제거하기 위한 도구로서 숙빈 최씨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조나 숙종이나 자기 제위를 지키기 위해 부린 권모술수로서 각각 원균과 장희빈을 선택했을 뿐 원균이 선조에게 인정받을 정도의 능력자도 아니며 장희빈이 숙종을 바지사장 삼은 것 역시 아니다. 원균이나 장희빈이나 각각 선조와 숙종의 장기말일 뿐이다.
6.4.2. 기타 서적[편집]
- <원균이야기 칠천량의 백파>
- <난세에 간신 춤춘다>
- <교과서와 함께 읽는 만화 한국 역사 32권(임진왜란과 항전), 33권(성웅 이순신과 정유재란)>
아이들에게 소개하는 역사서로서, '조선 장수가 이렇게 무능할 리가 없어'라는 생각으로 만든 만화지만, 기본적으로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원균 옹호가 있는 책이다. 불멸의 이순신과 같은 원균 맹장론이다. 처음 적이 쳐들어 오자 부하를 보내 이순신에게 원군을 요청한다. 그런데 이순신은 "전라도에도 적이 쳐들어 오면 막아야 하니 지원은 불가하오."라며 반대하고 결국 원균의 부하가 설득해서 이순신이 함대를 출동시켜서 적을 격파시킨 것처럼 나온다. 이순신이 원균과 육지에서 처음 만나 "장군", "오~ 이순신 장군"이라고 부르며 해맑게 뛰어오며 서로 포옹할려는 장면도 있다. 기본적으로 이순신이 전과를 세웠다는 설명이 없다. 즉 이순신의 전과는 원균과 함께 싸운 전투만 공로를 인정하고 있다. 때문에, 원균이 꼴랑 배 4척 타고와서 이순신 뒤만 졸졸 따라 다니며 싸움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어린이들은 이 책을 읽고 이순신과 원균이 대등했던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57] 한산도 전투에서는 쌩뚱맞게 중위장 권준이 왜적 함선 수십척을 격파하였다고 써있는게 전부이며, 철저하게 이순신의 전과를 없애놓고 있다. 그나마, 이순신이 누명을 쓰는 장면은 "김응서는 왜국의 첩자 요시라의 말만 듣고 이순신으로 하여금 가토 기요마사를 잡게 하라는 청원을 상부에 올렸다."라는 부분으로 밝히고 있다. 그러나 두페이지 뒤에서 "이순신이 철저한 전략가라면 원균은 용장이였다."라며 원균 용장론을 주장한다. 이어 원균이 충청병사로 떠날 때는 부하들이 다같이 원균이 떠나간다며 운다. 나중에 원균은 삼도수군통제사로 돌아오는데, 원균이 싸우기 싫어서 병영에서 술만 먹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용맹을 자랑하던 원균도 신중을 기해 싸움을 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배도 늘리고 지휘 체제도 바꿔야 해'"라며 아예 왜곡하기 시작한다. 게다가, 원균의 싸움 준비가 졸렬했던 이유는 전부 이순신이 거느리던 부장들과의 불화 때문이라고 하는 등 철저하게 원균의 책임을 면피해준다. 이어 도저히 싸울 수 없는 상황이지만 명령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출전한다는 점을 몇페이지에 걸쳐 설명한 후, 백여척을 이끌고 출전하여 웅천 앞바다에서 십여척의 적을 무찔렀다고 소설을 쓴다.[58] 위의 문장에도 나오듯이 이순신이 구체적으로 적 몇척을 격파하였다는 것은 원균과 합동으로 싸운 단 2건만 표기하고, 원균이 없는 전투를 소설을 써가면서 십여척을 무찔렀다고 표기하는 것을 보면 작가가 쓸데없이 원균을 옹호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후 풍랑이 심하여 군사들이 지쳐 있을 때 적의 함대를 만나 칠천량에서 적의 기습을 받고 결사적으로 싸웠지만 패했다고 나오는데, 역시 왜곡투성이의 거짓말이다. 조선의 대함대는 김완의 <해소실기>에서 나오는 것처럼, 일본군 40여척의 야습에 깜짝 놀란 원균이 명령하여 강제로 육지로 튀어서 도망갔고, 비어있는 배들은 전부 불타버렸다. 전반적으로 이순신의 전과는 축소되고, 원균은 없는 전과를 만들어서 양쪽의 균형을 잡으려고 했다.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애초부터 원균을 이순신의 동료 장수로 설정하고, 원균을 팔아먹는 쪽의 지원을 받은 것이 실수였다고 볼 수 있는 책이다.
- <조선왕조실록 43 임진왜란과 이순신 장군>
교과서 따라잡기 논술 학습만화라는 모토는 위의 책과 비슷하다. "원균은 안골포 앞바다에서 기습을 감행하여 적의 선단 십여 척을 침몰시켰으나 중과부적으로 물러나야 했다."라는 구절부터 확실한 원빠 확정. 43권 제목이 이순신이지만 어지간히 이순신에 대해 쓰기 싫은지 거의 끝나가는 89페이지에서 처음 언급되는데 첫 구절이 "이때, 이순신과 원균 장군의 활약으로 기사회생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원균은 불과 십여 척의 전함을 기습 작전을 펼쳐 적선을 무너뜨렸다."로 원균과 공동 언급했고 그 아까운 페이지에 없는 원균의 전과를 두 번 언급했다. 그림만 보면 누가 이순신이고 원균인지 구분 못하게 비슷한 주인공 포스는 덤. 이어지는 장면도 모두 용감한 원균 사마께서 일본군을 물리치는 장면 뿐. 여기에 "원래 원균은 성미가 급하여 두려움을 모르는 맹장이었다."라는 구절은 덤. 이어서 4페이지에 걸쳐 계속 원균 사마가 싸우기 싫어하는 이순신을 억지로 끌어내어 싸우게 만들고 직접 선봉에 서서 일본군을 물리치는 등, 뒷목잡고 쓰러질만한 내용만 가득하다. 제목만 '이순신과 임진왜란'이지 작가가 이순신을 등장시키는 것이 참을 수 없는 치욕이기라도 한지 신립, 김시민보다도 적고, 그나마 등장할 때도 원균과 이순신은 동격이다. 이후 칠전량의 무너짐 챕터에서도 권율에게 곤장을 맞은 후 "더 이상 말하지 마라. 내가 죽는 것이 소원이라고 하니 죽어 주리라"라면서 주인공 포스 넘치게 읊조린 후 "이렇게 하여 원균은 100척 함대를 이끌고 출진하였으나 500여 척의 왜군 함대에 대패하고 말았다."라며 끝까지 소설 쓴다. 아무리 학습만화 특성상 재미를 위해서 조작을 해야 되기 때문에 따지는 것 자체가 뻘짓이긴 하지만, 위의 두 학습만화 같은 것들을 읽고 자라는 어린이들이 걱정된다.
- <해군> 2017년 5월호
- <원균 그리고 이순신>
- <새로 쓰는 원균 이야기>
- <이순신의 두 얼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