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산 포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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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6.25 전쟁의 전투 및 작전 목록 파일:북한 국기.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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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자 : 공산군의 승리 / 첨자 : 유엔군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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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1]
3. 진행
3.1. 1951년 2월: 원산 앞바다 섬들의 점령[2]
3.2. 3월: 원산'포격', 그리고 소해[3]
3.3. 4월: 야간 포격전[4]
3.4. '구시대적인 전장'
3.5. 포위전의 또 다른 가치
3.5.1. 조종사 구조[5]
3.5.2. 비상활주로 건설[6]
3.6. 1953년: 포위전의 종료
4. 결과



1. 개요[편집]


6.25전쟁 때 원산시에 대해 미군과 한국군, 그리고 유엔군이 시행했던 대규모 포위전.

6.25전쟁 동안에 가장 많이 미국 해군은 북한군에게 함포사격을 가했고 미국 해군은 전쟁의 시작부터 끝까지 한반도 전역을 누빌 수 있어서 원산 포위전이나 흥남 철수가 가능했다.


2. 배경[7][편집]


흥남 철수 당시, 원산은 장기적인 봉쇄의 대상이 아니었다. 미군이 원산 앞바다를 비롯한 한반도의 섬들을 점령할 당시 가장 큰 전략적인 목적은 해군력의 우위를 이용해 한반도의 섬들을 점령해 육지에서의 전황을 안정시키고, 해당 지역들에 적 병력을 묶어둬서 전선에서 아군 육군의 부담을 감소시키며, 또한 나중에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았던) 다시 북진할 시기에 적의 뒤통수를 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전선의 변화가 지지부진해지면서 원래 목적은 점점 희미해져갔고, 원산 포위가 장기화되면서 북한의 주요 항구이자 교통의 요지, 그리고 중요한 산업 중심지였던 원산의 기능을 마비시키는 것으로 전략적 목표가 수정되었다.


3. 진행[편집]



3.1. 1951년 2월: 원산 앞바다 섬들의 점령[8][편집]


원산 앞바다에는 여러 섬들이 있었는데, 이들 중 7개를 유엔군의 지원을 받은 한국 해병대가 점령해서 포위전의 기반으로 삼았다. 섬들 전부가 협소했기 때문에 진먼 포격전처럼 섬 자체를 요새화해서 포격전을 벌이지는 않았고, 가장 넓어서 포위전 사령부가 설치된 여도를 제외한 나머지 섬들은 대부분 관측소로 쓰이게 된다. 관측소들에는 미군 소속 함포사격통제반이 섬 방어를 담당하던 한국 해병대원들과 함께 주둔했는데, 그 중에서도 원산 본토에서 가장 가까운 황토도가 가장 유용한 관측소이자 가장 위험한 곳이기도 했다.

전략도서 확보 작전 참조


3.2. 3월: 원산'포격', 그리고 소해[9][편집]


상술했듯이, 섬들의 협소함 탓에 섬 자체에 포병대가 정식 배치되어 포격전을 담당한 적은 없던 것으로 보인다. 그 대신, 함포사격통제반의 유도를 받는 연합군 함선들이 대규모로 포격을 가했다. 가장 많이 발사되고 가장 주기적으로 피해를 입혔던 것은 다름아닌 구축함들의 5인치 함포들이었다. 3월 중반에 이르자 순양함들과 전함들까지 포격에 참여했다.

유엔군의 이런 무자비한 포격에 북한군이 그나마 대항할 수 있는 수단이 기뢰였기 때문에, 소해함들은 포격전에서 가장 중요한 전력 중 하나로 취급받았다. 구축함들의 주 임무가 소해함을 호위하고, 소해함이 포격을 받을 때 대응사격을 하는 것이었다.


3.3. 4월: 야간 포격전[10][편집]


물론 북한군이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바보는 아니었기에, 유엔군은 좀 더 정밀한 공격을 실시해야만 했다. 북한군이 대부분의 원산을 통한 보급을 밤 시간대로 옮긴 것이다.

때문에 유엔군은 구축함들이 조명탄을 쏘면 항공기들이 폭격하고, 그리고 그 항공기들의 포격유도를 통해 구축함들이 재차 포격하는 좀 더 복잡한 절차를 동원해야만 했다.

이런 전술이 가능했던 근본적인 원인은 당연히 북한의 공군력이 사실상 없어진 상태였다는 것이었다.


3.4. '구시대적인 전장'[편집]


한국전쟁에서 원산만큼 구시대적인 전장은 없었습니다. 우리는 기뢰나 해안포에 대해서만 주의하면 됐고, 항공기나, 수상함이나, 잠수함의 위협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두 위협만으로도 우리를 긴장시키긴 충분했습니다.

- 원산 포위전에 참가했던 플레처급 구축함 DD-468 USS 테일러함의 함장 쉘던 H. 키니 중령의 회고[11]


1951년 4월에 원산의 전투 방식이 사실상 완성된 이후, 전쟁이 끝날 때까지 크게 변한 것이 없었다. 유엔군은 원산만의 섬들을 점령하고 압도적인 해군력과 항공전력을 동원해서 북한군의 보급 물자를 포격하고, 북한군은 그걸 막기 위해 갱도화된 포진지에서 유엔군을 포격하거나 기뢰를 부설하는 것이다. 가끔 황토도를 비롯한 일부 관측소 섬들에 북한군의 상륙시도가 있긴 했지만, 성공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공중전이나 대잠전, 전차전 등이 완전히 배제된 전장이었다는 점에서, 원산 포위전은 2차대전 이후 주요 전투로써는 매우 특이한 케이스라고 할 만 하다.


3.5. 포위전의 또 다른 가치[편집]


가장 기본적인 목적이었던 북한의 보급로 차단과 북진시 제 2 전선 형성을 위한 교두보 확보 이외에도, 원산 포위전은 유엔군에게 세 가지 가치가 있었다. 하나는 유엔군과 한국군의 상륙전에 대비해 북한군과 중공군 병력 상당수가 전선으로 가는 대신 원산 근방에 묶여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북한군 입장에서 상대적으로 후방인 지역에서 벌어지는 아군 첩보전의 기지로 원산만의 섬들을 이용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동해에서 작전하다가 격추되거나 불시착한 유엔군 조종사들을 구출하는 구출기지로써도 탁월했다.


3.5.1. 조종사 구조[12][편집]


한국전쟁이 최초로 군용 헬기가 운용된 전쟁이라는 것에서 쉽게 추론 가능하듯, 헬리콥터 모함이 최초로 등장한 전쟁 역시 한국전쟁이었고, 그 최초의 헬리콥터 모함들이 활약한 전장이 바로 원산이었다.

LST-799 '그리어카운티' 함은 원래 2차대전에서 LST-542 전차상륙함으로 운용되었다가, 전쟁이 끝나면서 퇴역했던 함선이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재취역했고, 흥남 철수에 동원된 이후 요코스카로 가서 미군 최초의 헬기모함으로 개수되게 된다.

그리어카운티 함을 비롯한 헬기모함들의 헬기 조종사들은 원산만 앞바다에서 구조헬기로 추락하거나 불시착한 조종사들을 목숨을 걸고 구출해왔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한 해군 헬기조종사가 비극적인 일을 당하기도 했다.


3.5.2. 비상활주로 건설[13][편집]


1952년 여름, 많은 조종사들이 바다에 불시착하는 것을 본 여도 주둔 포위전 사령부 쪽에서는 조종사들의 생존률을 높히기 위해 비상활주로라는 아이디어를 고안하게 된다. 여도는 원산만에서 가장 큰 섬이었을 뿐 절대로 넓은 섬이 아니었기에 정규 활주로 건설은 불가능했으나, 미 해군 공병대의 놀라운 활약 덕분에 쓸만한 비상활주로가 만들어지게 된다. 원래는 비상활주로가 포격받을 위험이나, 원산 지역을 완전히 점령하지 않는 한 언젠가는 한국군과 유엔군이 여도를 떠나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건설 필요성에 논쟁이 있었으나, 결국 조종사들의 생명이 더 소중하다는 판단 때문에 건설된다.


3.6. 1953년: 포위전의 종료[편집]


휴전협정이 진척을 보이자 원산 포위전 또한 끝날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원산은 휴전 당일까지도 치열한 포격이 오가는 곳이었다. 휴전협정이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는 1953년 7월 27일 10시까지도 포격이 이뤄졌다(...).


4. 결과[편집]


파일:20200103_170145.jpg
1950년 7월경에 촬영한 사진, 아직 시가지나 건물들이 비교적 온전한 상태다.
파일:external/www.warmemo.or.kr/0160.jpg
국군이 원산을 수복했던 1950년 11월경, 공장들이 파괴되었지만 그래도 굴뚝과 주변 건물들은 아직 남아있다. 출처
파일:attachment/OSB1952.jpg
1952년의 원산지역 항공사진, 시가지는 흔적도 없고 크레이터만 숭숭 나 있다.[14]

전쟁 이전까지, 원산은 인천, 부산 등과 함께 한반도에서 가장 중요한 항구 중 하나였고, 중국 정복에 중요한 북쪽에 있다는 점까지 한몫해서 일제가 심혈을 기울여 발전시킨 도시기도 했다. 또한 한반도 동쪽의 중요한 교통 요지이자 산업도시였기에, 원산이 이렇게 2년 넘게 포위당하고 쑥대밭이 된 덕분에 북한의 타격은 대단히 컸다. 이미 1951년 초 이후에는 원산에서 숙박하거나 낮잠을 자는 것은 끔살과 동의어가 되었다.[15] 따라서 용무가 있는 사람은 틈을 보아 잽싸게 원산에 들어갔다가 황급히 나와야 목숨을 건질 확률이 높았다고 한다. 결국 정전협정이 가까워질 무렵에는 원산과 그 주변은 크레이터 천지일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현재 존재하는 원산시의 모든 건물들은 다 1953년 이후에 건설된 건물들이다.

전후 조사한 결과 원산은 도시의 80%가 파괴되었다고 한다. 이는 전쟁 당시 공습당한 모든 북한 도시들 중 7위이다.[16] 참고로 이는 평양(도시의 75%가 파괴) 보다도 높은 수치이다.[17] 원산에 소재한 모든 건물 중 미군의 공격으로부터 무사했던 것은 덕원 수도원 정도의 극소수 뿐이었다.

이후 1968년 원산 앞바다에서 미국의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가 나포당하자 보복 타격으로 원산에 대한 재폭격이 검토되기도 했었다. 당시는 냉전이 극도로 치달은 시기였기 때문에 까딱했으면 진짜 실현됐을 가능성도 충분했다. 다만 원산만 섬들이 워낙 협소해서 여기가 장기적으로 미국과 남한의 점령지가 됐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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