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종·애노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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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통일신라 시대 말기 진성여왕 3년(889)에 원종과 애노를 필두로 일어난 농민 반란.
2. 배경[편집]
통일신라가 성립한 후 백여년 동안 전성기를 구가했지만, 신라 말기에 접어들면서 진골 귀족들 간의 끝없는 왕위쟁탈전으로 인해 신라 중앙정부의 지방 통제력이 약화되었고 이 상황을 눈치챈 전국의 지방관과 호족들은 반란을 일으킬 야심을 품기 시작하였다.
사실 9세기 후반, 그러니까 이미 원종과 애노가 난을 일으키기 전에도 몇 차례 반란이 일어났었다. 874년에 이찬 근종(近宗)이 일으킨 모반을 시작으로, 879년에는 일길찬 신홍(信弘)이, 정강왕 때인 887년에는 지금의 경기도 지방인 한주에서 김요(金蕘)가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나면 신라의 금군(禁軍)[1] 이 신속히 나서서 단기간에 진압했기 때문에 다른 지방으로까지 반란의 불씨가 퍼지진 않았고 신라 정부의 위신과 질서는 위태롭게나마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다 새로 즉위한 진성여왕 시대에 들어와 지방 통제력 약화로 세금이 걷히지 않아서 서라벌의 창고는 텅 빌 정도가 되었고, 관리를 보내서 농민들에게 세금을 독촉했는데, 오히려 이것에 농민들이 격분하여 전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남에 따라 통일신라는 각지에서 세력이 난립하는 혼란기에 접어들게 된다.
3. 전개[편집]
889년, 사벌주(沙伐州)의 농민이었던 원종과 애노는 그 지역 농민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켰다. 이 소식을 들은 신라 조정은 나마 관등에 있는 장군 영기(令奇)를 토벌대의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반란군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영기가 원종과 애노의 반란군 본진을 보고서 이를 두려워하여 토벌군이 진군하지 못했고, 이 때문에 촌주(村主) 우련(祐連)이 나서서 반란군에 맞서 싸웠으나 끝내 전사했다. 진성여왕은 칙명을 내려서 장군 영기를 참수하였고, 나이가 10여 세에 불과한 우련의 어린 아들을 아버지의 뒤를 잇는 촌주로 임명했다.
이후에 조정의 토벌군과 원종과 애노의 반란군이 어떻게 대치하여 원종과 애노의 난이 어떤 식으로 결판이 났는지는 자세한 기록이 없어서 알기 어렵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원종과 애노의 세력은 이후에 더 이상 기록에 나오지 않고, 결국 후삼국시대의 지방 호족세력 판도는 궁예와 견훤, 양길로 정리되기 때문에 시기가 문제일 뿐 결국 이들도 얼마 못 가 무너지거나 이 세력들에 흡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추정을 한다면 우련과 어린 아들에게 일종의 논공행상을 하는 걸 보아, 우여곡절 끝에 원종과 애노의 농민 반란은 진압되었다고 보는 관측이 일반적이다. 이 반란 얼마 전인 887년까지도 신라 토벌군은 성공적으로 반란을 진압하고 있었고, 1차적으로 파견한 영기는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처형당했지만 후속대가 결국 이들을 토벌했을 수 있다. 역사 속에서 진승·오광의 난이나 황건적의 난도 나중에 난세가 열리는 계기가 되긴 했지만 반란 자체는 결국 정부군이 토벌에 성공한 것과 유사하다.
실제로 당나라 출신 신라인 최승은 이 난을 진압한 공으로 은자광록대부에 올랐다.
혹은 기훤, 양길 등과 같이 신라 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난 군벌세력을 이루었을 가능성이다. 그러나 결국 후삼국시대가 들어서면서 아자개와 양길을 비롯한 다른 주요 호족 세력에 의해서 격파당했거나, 세력이 휘하로 흡수된 것으로 보인다. 기록상 나중에 아자개가 이들과 같은 상주에서 호족으로 자리를 잡기 때문이다.
4. 의의[편집]
후삼국시대를 여는 대호족시대의 첫 번째 타자라는 점에서, 200년 이상을 이어온 통일신라가 붕괴하는 기폭제가 된 의미가 있다. 초한쟁패기의 진승·오광의 난, 중국 삼국시대의 황건적의 난과 비슷한 사건 정도로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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