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 언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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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 언셀드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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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파일:명예의 전당 웨스 언셀드.jpg
웨스 언셀드
헌액 연도
1988년



워싱턴 위저즈 No. 41
웨슬리 시셀 언셀드 시니어
Westley Sissel Unseld Sr.

출생
1946년 3월 14일
켄터키주 루이빌
사망
2020년 6월 2일 (향년 74세)
메릴랜드주 캐튼스빌
국적
[[미국|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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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출신학교
루이빌 대학교
신장
201cm (6' 7")
체중
111kg (245 lbs)
포지션
센터
드래프트
1968 NBA 드래프트 1라운드 2순위
볼티모어 불리츠 지명

소속 팀
볼티모어-캐피탈-워싱턴 불리츠 (1968~1981)
지도자
워싱턴 불리츠 코치 (1987~1988)
워싱턴 불리츠 감독 (1988~1994)
프런트
워싱턴 불리츠 (1981~1987 / 부사장)
워싱턴 불리츠-위저즈 (1994~2003 / 부사장)
워싱턴 불리츠-위저즈 (1996~2003 / 단장)
등번호
41번 - 워싱턴
가족
아들 웨스 언셀드 주니어

1. 개요
2. 일생
3. 플레이 스타일
4. 수상 내역
5. 기타
6. 참고 자료



1. 개요[편집]


미국의 농구인으로, 워싱턴 불리츠/위저즈의 70년대대 전성기를 이끈 선수이자 팀의 기둥이었기에 '불릿츠의 수호신'으로도 불렸다. 찰스 바클리와 더불어 유니크한 체형의 강력한 리바운더로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2. 일생[편집]


1946년 켄터키 주 루이빌에서 아버지 찰스 도시 언셀드(1915~1980)와 어머니 코넬리아 시셀(1917~1989) 사이에서 9남매 중 하나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권투선수, 니그로리그 팀 '인디애나폴리스 클라운즈'의 야구선수, 건설 노동자 등으로 생계를 꾸려왔다. 언셀드는 세네카 고등학교 재학 시절 밥 멀카히 감독에게 농구 수업을 받으며 켄터키 주 챔피언쉽을 2번이나 차지하면서 주목을 받은 선수였고(1964년, 1965년), 특히 1964년 결승전에선 버치 비어드[1]가 이끄는 브리킨리지 고교를 꺾은 바 있다. 이후 루이빌 대학교에 진학한 뒤 버나드 힉맨(1911~2000)[2]과 존 드로모(1916~1992) 두 감독에게 지도를 받으며 후배 비어드와 다시 만나 1967 및 1968년에 두 차례 NCAA 전국대회에서 16강을 각각 찍었고, 이 공로로 올 아메리칸까지 2년 연속 선발됐다.

언셀드는 대학 졸업과 함께 ABA의 고향 팀 켄터키 콜로넬즈와 NBA의 볼티모어 불리츠에 동시에 지명을 받았다. 언셀드는 NBA를 선택했고 첫 해부터 신인왕 + 시즌 MVP[3]라는 대활약을 하면서 팀에 활기를 불어넣게 된다. 이후 얼 먼로뉴욕 닉스로 트레이드되면서 언셀드는 앨빈 헤이즈와 함께 팀의 미래를 맡게 되었고, 당대 최고수준의 빅맨 듀오였던 둘의 시너지 효과로 70년대~80년대초 불리츠는 전성기를 맞는다.

그는 총 4번의 파이널 진출, 1번의 파이널 우승을 이뤄냈으며, 1978년 파이널 때 팀의 우승에 기여한 공로로 MVP를 받았다. 1981년에 선수 은퇴 후 팀은 그를 기리기 위해 등번호 41번을 영구 결번시켰다. 불리츠-위저즈 프랜차이즈의 역사는 '언셀드의 시대와 그 이외'로 구분된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프랜차이즈에서 커다란 존재감을 가진 선수였고, 구단 역사상 시즌 MVP와 Finals MVP를 수상한 유일한 선수이기도 하다. 당연하게도 1988년 네이스미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은퇴 이후 그는 친정팀의 부사장으로 일하다가 1987년부터 어시스턴트 코치가 됐고, 1988년 2월에 케빈 로커리 감독이 쫓겨나자 감독으로 복귀하여 기술을 중시하는 심플한 농구를 추구했으나, 당시 팀 플레이 추세와 역행하는 개인 플레이 중심의 옛날식 플레이만 선보인 탓에 임기 6년간 포스트시즌 진출은 1회에 그쳤다. 그 1회마저도 감독대행 때 한 것. 1993-94 시즌을 끝으로 팀에 염증을 느낀 채 감독직에서 물러났다가 1994년 11월에 부사장으로 돌아온 후 하비 그랜트, 로드 스트릭랜드 등을 영입하거나 사들여 1996/97 시즌 포스트시즌 진출에 기여했고, 1996년에 단장을 겸했다가 2002-03 시즌을 끝으로 팀과 인연을 끝냈다.

2006년에는 미국 대학농구 명예의 전당에도 헌액됐으며, 2020년 6월 2일 화요일에 폐렴으로 인한 건강 악화로 세상을 떠났다.[4]


3. 플레이 스타일[편집]


웨스 언셀드의 사진을 찾아봐도 알 수 있겠지만 그는 매우 두툼한 체격에 비교적 짧은 키, 그리고 긴 팔을 가진 선수였다. 동년대의 다른 슈퍼스타 센터들보다 3~5cm는 작았지만 그럼에도 타고난 강력한 힘과 리바운드 능력으로 골 밑에 벽이 서있는 것 마냥 림 프로텍팅을 수행했고 이렇게 강력한 센터가 있으니 자연히 팀도 숨통이 트일 수 있었다.

아쉽게도 이런 재능을 가지고도 언셀드는 수상 기록은 적은데 같은 시대 NBA에는 빌 러셀, 윌트 체임벌린, 윌리스 리드, 카림 압둘자바, 빌 월튼이 뛰고 있는 그야말로 센터 우주전쟁이 열렸기 때문. 이 기라성 같은 별들 중에 하나가 언셀드였고 그는 그렇게 불리츠의 수호신이 되었다.

루키시즌에 18.2 리바운드를 기록했을 정도로 뛰어난 보드장악력에 훌륭한 수비력을 가졌지만 득점력은 이에 미치지 못했다. 평득 15점을 넘긴 시즌이 한 시즌 뿐이고, 뛰어난 공격수였던 엘빈 헤이즈가 들어온 이후로는 안그래도 많지 않았던 샷시도가 더욱 줄어들어 평균득점이 한자리수 득점으로 내려앉았을 정도. 커리어 통산은 10.8득점으로, 명백하게 득점력이 좋은 파트너들이 필요했던 타입.

물론 하이 스코어러와는 거리가 멀었을 뿐, 그는 스포모어 시즌에 커리어 하이인 16.2점을 당시로썬 상당히 준수한 야투율이었던 50%대의 확률로 넣을 정도로 득점 방면에서 역량 자체는 충분히 있는 선수였다. 그러나 당시 워싱턴에는 헤이즈 비롯해 제하고도 득점을 해줄 선수들이 여럿 있었기에 언셀드는 철저하게 수비, 리바운드, 스크린, 허슬 등에 에너지를 쏟은 것. 그는 또다른 간판이었던 헤이즈보다 멘탈이 훨씬 좋으며 이타성이 강한 선수였고, 팀 사정이 좋다면 자진해서 궂은 일에만 집중할 수 있는 선수였다. 또한 그는 커리어 평균 3.9 어시스트에 한 시즌 5.2 어시스트를 기록한 바가 있는데, 이는 볼소유가 적은 센터치고 훌륭한 수치이다.

80년대 중반 등장한 찰스 바클리, 10년대 후반에 등장한 자이온 윌리엄슨과 함께 두툼한 프레임과 굵직한 팔다리를 가진 유니크한 체형에 속한다. 길쭉길쭉한 인상의 여타 흑인 농구선수들보단 마치 몽골인 장사를 보는 듯 한 체형.

4. 수상 내역[편집]


수상 내역
NBA 파이널 우승 (1978)
NBA 파이널 MVP (1978)
NBA 시즌 MVP (1969)
NBA 올스타전 5회 (1969, 1971-1973, 1975)
ALL NBA 퍼스트팀 (1969)
신인왕 (1969)
NBA ALL 루키 퍼스트팀 (1969)
NBA 리바운드왕 (1975)
J 월터 케네디 시티즌 어워드 (1975)
NBA 역사상 위대한 농구인 50인
워싱턴 위자즈 영구결번 (41번)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2006)



5. 기타[편집]


  • 유족으로는 부인 코니와 1남 1녀가 있는데, 부인 코니는 1979년 볼티모어에 유치원부터 중학교까지의 과정을 지닌 사립학교 '언셀드 스쿨'을 세웠으며, 딸 킴벌리는 이곳의 교사로 재직 중이다. 아들 웨스 주니어(1975년생)는 로욜라 블레이크필드 고등학교 및 존스홉킨스 대학교 재학 시절 농구부에서 뛰었으나 아버지만큼 실력에서 두각을 드러내지 못해 1997년 NBA 드래프트에 신청했으나 탈락했고, 졸업 뒤 워싱턴 위저즈에 스카우터로 입사하여 단장이던 아버지를 돕다가 2005년에 이 팀에서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고, 이후 덴버 너기츠, 올랜도 매직 등을 전전하다가 2021년에 마침내 위저즈 감독까지 승진했다.

  • 위저즈 프랜차이즈의 가장 위대한 선수로 꼽히고, NBA에서 가장 굵직한 족적인 시즌 MVP와 파이널 MVP를 모두 보유한, 한마디로 완성도가 높은 커리어를 보유한 선수이다. 그러나 그 수상 하나하나를 따지고 보면 이견이 꽤 많은 편이기도 하다.

  • 우선 루키시즌(68-69)에 전경기 출장하며 13.8득점 18.2리바운드를 기록했고, MVP 터줏대감인 윌트 체임벌린빌 러셀이 전성기에서 내려오기 시작하던 와중 팀 성적을 전년도보다 드라마틱하게 끌어올린 공로를 인정받아 루키임에도 MVP를 수상하는 쾌거를 이루어냈지만, 기록만 보면 마찬가지로 전경기 출장에 평균 45.1분 28.4득점 17.1리바운드의 괴물같은 활약을 펼친 엘빈 헤이즈가 같은 루키로서 더 파격적이었다. 또한 2위에 그친 윌리스 리드가 MVP로는 더 적합했다는 여론도 적지는 않았고, 그 외에도 활약상 자체만 보면 섣불리 언셀드 아래에 두기 어려운 선수들이 여럿 존재했던 것. 어떤 의미로는 역대 MVP 중에서도 가장 압도적인 느낌이 덜 한 수상자 중 하나라고도 볼 수 있다.

  • 1978 NBA 파이널에서 팀의 또다른 간판인 엘빈 헤이즈가 두 표를, 언셀드가 세 표를 가져가며 최종적으로는 언셀드가 Finals MVP로 선정된 것에 대해 이견이 많다. 기록이 다는 아니라지만 당시 파이널을 비롯한 플레이오프에서 헤이즈는 언셀드의 두배 가량 득점을 올리면서도 리바운드도 언셀드 못지 않게 잡아냈기에 활약면에서 차이가 컸음은 부정하기 어렵기 때문.[5] 이는 헤이즈가 파이널 6경기 도합 133득점을 기록했으나 그 중 4쿼터 득점은 19득점에 그칠 만큼 중요한 순간에 활약하지 못했던 측면이 있고, 그 외에도 이타적이고 희생적이며 팀의 간판이자 성골이었던 언셀드와 달리 멘탈 이슈를 달고다니던 헤이즈가 표심에서 불리한 측면도 있었을 것이라 추측된다.

  • 이러한 측면에서 언셀드는 슈퍼스타임에도 본질은 블루워커에 더 가까운 선수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커리어 전반적으로 눈에 보이는 수상(시엠+파엠) 만큼의 압도적인 선수였는가 하면 애매한 구석이 없잖아 있지만 팀의 성장과 결실에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커다란 지분을 가지고 있고, 특유의 허슬과 열정 및 희생정신으로 팬들과 투표자들의 마음을 가져간 선수인 것이다. 반대로 기량면에서는 명백히 더 뛰어났지만 팀원들을 살피기보단 블랙홀에 가까운 면모를 보였던, 또한 최고의 육체에 걸맞지 앉은 멘탈로 미운 소리를 들었던 헤이즈와의 결정적인 차이가 이것이었던 셈. 어찌보면 빌 러셀윌트 체임벌린의 같은팀Ver.이라 부를 만 했던게 바로 언셀드-헤이즈 듀오였던 것이다.

6. 참고 자료[편집]



[1] 1969년 NBA 드래프트에서 10번으로 애틀랜타 호크스에 지명된 후 1979년 은퇴 시까지 총 5팀을 거쳤고,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시절인 1972년에 올스타로 1번 뽑혔으며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에 몸담던 1974-75 시즌에는 우승을 경험했다. 은퇴 후 1980년대에는 MSG 네트워크 해설위원으로서 뉴욕 닉스의 중계를 담당했고, 1990년에 하워드 대학교 농구부 감독으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해 뉴저지 네츠(1994~1996), 모건 주립대학교(2001~2006) 등을 거쳤으나 지도자로서는 두각을 못 드러냈다.[2] 웨스턴 켄터키 대학교의 명장이던 에드가 디들(1895~1970)의 직계 제자로, 1944년부터 23년간 루이빌 대학교의 체육부장 겸 감독으로서 1956년 NIT 우승, 1958년 NCAA 전국대회 4강 진출을 각각 일궈내며 옆동네 켄터키 대학교의 명장 아돌프 러프(1901~1977)와 쌍벽을 이뤘다. 언셀드와 비어드 외에 찰리 타이라, 웨이드 휴스턴(전 테네시 대학교 감독, 앨런 휴스턴의 부친) 등을 발굴/육성했고, 특히 웨이드 휴스턴은 켄터키 주내 대학들 중에서 처음 영입한 흑인 선수 2명 중 하나였다. 1967년에는 오른팔이던 존 드로모 코치에게 감독직을 맡긴 뒤, 1973년까지 6년 더 체육부장직에 머무르며 훗날 그보다 더한 명장이 될 데니 크럼(1937~2023, 전 UCLA 코치)을 감독으로 발탁했다.[3] 다만 이때 MVP는 윌리스 리드가 받아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스탯에서 크게 차이가 나기 때문. 언셀드가 신인으로 대단한 활약을 했기 때문에 그 임팩트로 수상한 것.[4] AP통신 영문기사[5] 14-15 파이널에서 안드레 이궈달라가 르브론을 상대로 보여준 호수비로 스테판 커리를 제치며 파엠을 수상하기도 했으나, 헤이즈는 디펜팀을 두번이나 수상했을 정도로 수비가 좋은 선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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