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인 그레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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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키 명예의 전당 헌액자(1999)




스탠리컵 우승 반지
1984
1985
1987
1988





NHL 리그 영구결번

파일:그레츠키.jpg

No.99

파일:sportsillustrated_logo.png
1982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선정 올해의 스포츠맨

파일:external/www.collectors-society.com/1227_large.jpg

슈거 레이 레너드

웨인 그레츠키

메리 데커




파일:external/postmediacanadadotcom.files.wordpress.com/gretzky-bday.jpg


National Hockey League No.99

웨인 그레츠키
Wayne Gretzky CC[1]

본명
웨인 더글러스 그레츠키
Wayne Douglas Gretzky
출생
1961년 1월 26일 (63세)
온타리오 주 브랜트퍼드
국적
[[캐나다|

캐나다
display: none; display: 캐나다"
행정구
]]

신체
183cm, 84kg
종목
아이스하키
포지션
센터

왼손
선수 소속
에드먼턴 오일러스 (1978~1988)
로스앤젤레스 킹스 (1988~1996)
세인트루이스 블루스 (1996)
뉴욕 레인저스 (1996~1999)
지도자 소속
피닉스 카이오티스 (2005~2009)
등번호
99번[2]
기록
최다득점 894골
최다 도움 1,963
총 공격포인트 2,857
1. 개요
2. 선수 경력
2.1. NHL 입성 이전
2.2. WHA 입단
2.4. 로스앤젤레스 킹스 시절
2.5. 그 이후
3. 은퇴 이후
4. 플레이 스타일
5. 기록
5.1. 공식 시즌 기록
6. 여담
7. 둘러보기 틀



1. 개요[편집]






1983년 다큐멘터리
1990년 다큐멘터리

캐나다의 前 아이스하키 선수.

NHL에서 올타임 공격포인트 리더이자, 그의 총 어시스트 포인트가 통산 공격포인트(골+어시스트) 2위인 선수보다도 높다. 그리고 웨인 그레츠키의 골 수가 894개로 역대 1위. 단 한명도 올리지 못한 한 시즌 동안 200포인트 기록을 혼자서 네번이나 하였고 경기당 포인트는 1.9로 2위인 마리오 르뮤와 더불어 독보적인 리드를 지키고있다. 그 다음 순위 선수들이 대부분 1.3 정도에 있다. 올타임 공격포인트도 2위와 거의 두배차이. 농구의 PER 과 대치해봤을때, 하키 올타임 리더 3위부터 50위까지 선수들이 PER 25점이라면, 웨인 그레츠키는 40-45 수준에서 놀고있다. 아이스하키에 크게 관심이 없던 미국을 열광시켜 시장가치가 몇백억이 되는 NHL 하키팀을 동계스포츠 불모지인 미국 서부, 남부에 여섯개나 탄생시키는데 기여했다. 즉, 아이스하키의 GOAT로 부를수 있는 선수다.

그레츠키는 본인의 등번호 99번이 NHL 32개 전 구단 영구결번이 되었다.[3][4] 리그 전 구단 영구결번은 이 웨인 그레츠키 외에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재키 로빈슨전미 농구 협회빌 러셀까지 단 세 명 뿐이다. 다만 재키 로빈슨과 빌 러셀은 실력도 실력이지만 인종 차별 완화에 큰 기여를 했다는 점 역시 참작되어서 전 구단 영구 결번 된 것에 비해 그레츠키는 실력과 업적으로만 영구 결번 되었다는 점에서는 다르다. 또한 다른 두 선수는 작고하고 사후 영구결번이 된것과 달리, 그레츠키는 생존중에 영구결번이 되었다.

스탠리컵 우승은 오일러스에서의 4회(1984, 1985, 1987, 1988)이다. 준우승은 2회(1983, 1993)
  • 1983년 스탠리컵 파이널 (오일러스) 준우승 vs 뉴욕 아일랜더스
  • 1984년 스탠리컵 파이널 (오일러스) 우승 vs 뉴욕 아일랜더스
  • 1985년 스탠리컵 파이널 (오일러스) 우승 vs 필라델피아 플라이어스
  • 1987년 스탠리컵 파이널 (오일러스) 우승 vs 필라델피아 플라이어스
  • 1988년 스탠리컵 파이널 (오일러스) 우승 vs 보스턴 브루인스
  • 1993년 스탠리컵 파이널 (킹스) 준우승 vs 레 카나디앵 드 몽레알

플레이오프 MVP 수상은 2회 (1985, 1988)[5] 그리고 정규시즌 MVP 수상은 9회를 했다. 80년-87년까지 8회 연속, 그리고 89년도 다시 1회 수상한건데 88년 마리오 르미외의 대활약이 아니라면 10 시즌 연속 정규시즌 MVP 라는 미친 기록이 나올 뻔 했다. 물론 그레츠키가 거둔 8회 연속 MVP도 북미 스포츠 역사상 유일한 기록이다.


2. 선수 경력[편집]



2.1. NHL 입성 이전[편집]


웨인 그레츠키는 1961년 캐나다의 온타리오 주 브랜트포드에서 태어났다. 벌써 두 살 때 부터 기념품 하키스틱을 들고 어머니인 메리를 골키퍼로 하여 골을 넣었다고 전해진다.

웨인의 아버지인 월터는 아들들을 위해 뒷마당에 링크를 만들어 웨인과 다른 아들들을 직접 가르쳤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웨인의 재능은 뛰어나, 마을 부모들의 질투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웨인은 6살 때 첫 하키팀에 입단하게 된다. 캐나다의 하키 교육과정은 상당히 체계화되어 있어, 재능이 있는 아이들은 어린 나이부터 팀에 입단하는 것이 보통이다. 입단한 하키 팀은 10세 이상 아동 팀이었는데, 웨인은 6세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10세 아동들을 훨씬 능가했던 것이다. 그때부터 웨인은 너무 뛰어나서 자기 나이보다 훨씬 높은 레벨에서 플레이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되어 버렸다. 10세 아동들이 입는 하키 상의가 너무 커서 웨인은 하키 상의 오른쪽을 하키 팬츠의 오른쪽에 집어 넣고 플레이 하곤 했다. 이 스타일은 후에 웨인 그레츠키의 트레이드마크가 된다.

10살이 되던 해, 웨인은 벌써 85게임에 378골/120어시스트를 기록한다. 하키 신동이 출현했다는 뉴스는 캐나다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어, 어린 나이에 벌써 미디어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다. 13세가 되던 해에는 기록적인 1000골을 기록한다. 이러한 어린 웨인 그레츠키의 활약은 다른 부모들의 질시의 대상이 되어, 다른 팀 뿐만 아니라 같은 팀의 부모들까지 야유를 퍼붓곤 했다. 결국 그레츠키가 14세가 되던 해, 웨인의 부모는 웨인을 토론토로 보내기로 결심한다. 웨인의 커리어를 발전시키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으나, 고향에서 웨인이 다른 부모들의 질시, 팀메이트들의 질투 등 여러가지의 압박에 시달렸던 것도 큰 이유중 하나였다. 당시에는 캐나다 아마추어 하키협회에서는 14세에는 고향을 떠나 타 지역에서 플레이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었으나, 웨인의 부모들은 협회와 법정 투쟁을 벌여 웨인이 토론토로 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주었다. 토론토의 메트로 쥬니어 B 하키리그에서 활약한 웨인은 첫 해에 신인상을 수상하였으며, 28게임에 60 공격포인트를 기록하였다. 그 다음해에는 32게임에 72 공격포인트를 기록하였을 뿐만 아니라, 상위 리그인 온타리오 하키리그에서 대타로 3게임을 뛰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웨인의 폭발적인 재능에도 불구하고 1977년 온타리오 메이저 주니어 하키리그 (OMJHL) 드래프트때는 체격이 크지 않다는 이유로 전체 3순위로 수 세인트 마리 (Sault Ste. Marie) 그레이하운즈 팀에 지명되었다. 웨인은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OMJHL 첫 해에 OMJHL 득점 기록을 갱신하였으며, OMJHL 신인상, 스포츠맨상 등을 수상하였다.

웨인은 입단 당시 자신이 존경하는 캐나다 하키의 레전드이자 디트로이트 레드윙스의 레전드 고디 하우 (Gordie Howe)의 백넘버인 9번을 달고 싶어했지만 이미 다른 플레이어가 9번을 달고 있었다. 생각 끝에 감독의 의견을 받아들여 9번에 9번을 더한 99번을 등번호로 달게 되었는데, 이 99번이야 말로 하키 역사상 전설적인 백넘버가 된다. 1978년에는 주니어 세계선수권에 캐나다 대표로 선발되어, 최연소 플레이어로써 득점왕, 올스타, 최고 공격수 등의 영예를 안았다.


2.2. WHA 입단[편집]


당시 NHL과 경쟁중이던 신생 하키 리그 WHA(World Hockey Association)는 젊은 스타들을 대거 영입하여 NHL에 대항하려 하였다. NHL은 20세 이하 플레이어 계약 금지 조항이 있었으나 WHA에는 그러한 조항이 없었다. 따라서 웨인은 WHA 팀들의 타겟이 되었으며, 인디애나폴리스 레이서즈의 구단주 넬슨 스칼바니아가 웨인에게 7년간 175만불을 제시하여 웨인은 인디애나폴리스에 입단하게 되었다. 이 금액이 상상이 안될텐데, 1978년 메이저리그 신인 드래프트 1순위 밥 호너의 사이닝 보너스는 16만 2천달러였고, 메이저리그 베이스볼 연봉 1위였던 로드 커류,피트 로즈(4년 320만달러)가 80만 달러를 받았고, 1978년까지 현역생활을 했던 보스턴 셀틱스의 레전드 존 하블리첵이 연봉이 가장 높던 때가 20만달러였다. 다른 인기 스포츠에서도 총액 100만달러 계약자가 리그 전체에 10명이 안되던 1970년대 후반 시기에 머리에 피도 안마른 17세의 애송이가 NHL에서 단 1초도 뛰지 않았음에도 라이벌 리그에서 175만달러를 받았을 정도니 얼마나 그레츠키가 초대어 취급을 받았는지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이와 비견될만한 신인은 미국 4대 프로스포츠 전체를 찾아봐도 NBA카림 압둘자바,르브론 제임스, MLB알렉스 로드리게스,브라이스 하퍼, NFL존 엘웨이,페이튼 매닝등 역사에 한두명 있을까말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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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WHA와 레이서즈는 심각한 자금 문제에 직면해 있었으며, 웨인은 레이서즈에서 8경기 출전 후 WHA의 경쟁팀 에드먼턴 오일러스(Edmonton Oilers)에 골키퍼 에디 미오, 포워드 피터 드리스콜과 함께 85만달러에 팔린다. 에드먼턴 오일러스 구단주인 피터 포클링턴은 웨인의 18세 생일날, 웨인과 10년간 캐나다 달러로 3백만불 계약을 성사시키며 오일러스 왕조의 탄생을 예고한다. 웨인은 루키로서 110포인트를 득점하여 리그 스코어링 3위에 화려하게 데뷔하였으며, 신인상을 수상했다.

1979년 자금난에 시달리던 WHA는 드디어 해체된다. WHA팀 중 4개 팀은 NHL에 흡수되었는데, 에드먼턴 오일러스도 그 중 하나였다. 일부 평론가들은 NHL은 WHA보다 재능있는 선수층이 두터우며, 훨씬 더 과격하고 선수들의 체격도 큰 관계로 웨인이 NHL에서 성공하지 못 할 것이라고 내다봤으나, 웨인은 그런 평론가들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2.3. 에드먼턴 오일러스 시절[편집]


NHL 입성 첫해인 1979-80 시즌에 웨인은 MVP로 선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137 공격포인트를 득점하였다. 웨인의 137 포인트는 아직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는 신인 득점 기록이다. 그러나 웨인이 전 해에 WHA에서 플레이 하였으므로 신인상은 받지 못하였다.

1980-81 시즌에는 164포인트를 득점하여 NHL 기록인 보스턴 브루인스의 레전드 필 에스포지토 (Phil Esposito)의 152포인트를 깨기에 이른다. 아울러 바비 오어 (Bobby Orr)의 어시스트 기록인 102개도 깼다.[6] 2번째로 MVP에 선정되게 된다.

1981-82 시즌에는 35년동안 깨지지 않던 기록인 '50게임에 50골' 기록을 깨게 된다. 이 기록은 레 카나디앵 드 몽레알의 전설적인 골잡이 모리스 '로켓' 리샤드 (Maurice 'Rocket' Richard)가 1944-45 시즌에 수립하고 1980년에 뉴욕 아일런더스의 마이크 보시 (Mike Bossy)가 다시 한번 수립한 기록이었는데, 웨인은 50골을 단 39게임만에 득점하였다. 그 후 웨인은 필 에스포지토의 시즌 76골 기록도 깨버리기에 이른다. 웨인은 1981-82 시즌을 92골, 120어시스트, 80게임에 212포인트로 마감한다. 이러한 믿을 수 없는 활약으로 인하여 웨인은 하키선수로는 처음으로 'AP 올해의 남자선수' 상을 수상하였으며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는 웨인을 '1982년 올해의 스포츠맨'으로 선정한다. 웨인은 매년 자신의 기록을 갱신하는 기염을 토했다. 1982-83 시즌에는 125어시스트, 1984-85년에는 135어시스트, 1985-86년에는 163어시스트를 기록하였고, 에드먼턴을 떠날 시점에는 49개의 NHL 기록을 수립하였다.

하키의 최고 영예인 스탠리컵 플레이오프에서도 이러한 웨인의 업적이 성공으로 바로 연결되었다. 당시의 에드먼턴에는 웨인을 비롯하여 센터 마크 메시에 (Mark Messier), 포워드 글렌 앤더슨 (Glenn Anderson), 야리 커리 (Jari Kurri), 수비수 폴 카피 (Paul Coffey), 그리고 골키퍼인 그랜트 퓨어 (Grant Fuhr) 등 올스타 멤버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축구로 치면 거의 메시,샤비,이니에스타,비야가 이끄는 초호화 스타군단 FC 바르셀로나급의 스쿼드에 메시 역할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 웨인의 오일러스는 1984, 85, 87, 88년에 스탠리컵 파이널 우승하여 '왕조 (Dynasty)'의 칭호를 얻었다. 웨인은 그 왕조에서도 독보적인 1인자로 8년 연속 MVP라는 수식어 하나로 정리 끝이다.

하지만 너무 스타가 많아서 연봉이 천정부지로 치솟던 오일러스는 주축선수인 폴 카피를 트레이드해 연봉절감을 했고 그럼에도 감당이 되지 않았고. 1988년, 오일러스의 플레이오프 우승 2시간 후, 웨인은 오일러스 구단주인 피터 포클링턴이 자신을 LA 킹스로 트레이드를 하고자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피터 포클링턴의 다른 사업체들이 경영난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포클링턴은 현금이 필요하였다. 같은해 8월 9일, 포클링턴은 LA 킹즈 구단주인 브루스 맥날 (Bruce McNall)과 트레이드 협약을 맺어, 오일러스는 LA에 웨인 그레츠키와 더불어 마티 맥솔리 (Marty McSorley), 마이크 크루셸니스키 (Mike Krushelnyski)를 트레이드하고, 그 댓가로 오일러스는 LA로부터 지미 카슨 (Jimmy Carson), 마틴 젤리나스 (Martin Gelinas), 현금 1500만불, 1989년, 1991년, 1993년 드래프트 1st round 지명권을 받게 되었다.

오일러스 시절 그레츠키를 든든하게 지켜준 싸움 전문 선수들(엔포서)도 있었다. 웨인 그레츠키가 처음 데뷔했을 때 사람들이 했던 말은 "기술은 너무 출중하나 말라깽이라서 빙판 위에서 금방 죽을 듯"이었다. 오일러스 당시 그레츠키를 다른팀 선수들이 두들겨 패지 못하게 든든하게 지켜준 엔포서로는 데이브 세멘코(1대)와 마티 맥솔리(2대)가 있으며 그레츠키는 로스앤젤레스 킹스로 이적할 때 마티 맥솔리를 데려가야 킹스로 가겠다고 계약조항에 넣은 바 있다.


2.4. 로스앤젤레스 킹스 시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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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인의 트레이드는 캐나다인들을 분노케 만들었다. 당시 캐나다 신민주당 원내대표였던 넬슨 리이스 (Nelson Riis)는 캐나다 정부가 나서서 웨인의 트레이드를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스타디움 밖에서는 분노한 시민들이 구단주 포클링턴의 인형을 만들어 화형에 처하였다. 일부 캐나다인들은 웨인을 배신자라고 비난하였으며, 웨인의 부인인 자넷 존스(Janet Jones)가 할리우드 여배우였던 점을 의심하여, 웨인이 LA로 가는 이유가 부인의 할리우드에서의 성공을 위한 것이라는 괴소문까지 나돌기도 하였다. [7]

웨인의 트레이드는 하키에 별 관심이 없었던 LA에 하키에 대한 폭발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웨인이 LA 킹스에서 활약을 시작하자, 그 여파로 캘리포니아에 하키팀이 두 개가 더 생겼으며(애너하임 덕스, 산호세 샤크스), 하키의 불모지라 할만한 애리조나피닉스, 텍사스댈러스에도 하키팀이 생겼다. 위니펙 제츠가 피닉스로 이전하여 애리조나 카이오티스가 되었으며 미네소타 노스 스타즈가 댈러스로 이전하여 댈러스 스타스가 되었다.

이전까지 아이스하키는 캐나다와 미국 북동부에서만 인기있는 스포츠였다. 그도 그럴 것이, 캐나다와 미국 북동부는 추운 날씨 덕택에 우리나라 아이들이 축구공 차고 놀듯이 아이들이 어렸을때부터 아이스하키를 즐길 수 있는 여건과 문화가 조성된 지역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웨인의 활약에 힘입어 LA는 단기간에 챔피언십에 도전할 정도의 강력한 팀으로 부상하였다. 1992-93 시즌에는 부상으로 인하여 정규시즌에 활약하지 못하였으나, 고디 하우의 포인트 득점 기록을 갱신하여 새로운 NHL 득점왕이 되었고, 플레이오프가 시작되자 웨인은 금세 자신의 기량을 되찾았다. 서부지구 파이널에서 토론토 상대로 시리즈 최종전인 7차전에 기록한 해트 트릭은 아직까지 많은 팬들의 뇌리에 남아 있다.

그러나 스탠리컵 플레이오프 결승에서 만난 동부지구 챔피언인 레 카나디앵 드 몽레알에 첫 게임 승리 후 아쉽게도 3게임 연속 오버타임 패배를 맛보면서 LA는 그 후 끝없는 추락을 거듭하게 되며, 웨인은 결국 LA에 희망이 없다고 보고 트레이드를 요구한다.


2.5. 그 이후[편집]


파일:external/pica-pica.wcgame.ru/wayne-gretzky-blues.jpg
1996년 2월, 웨인 그레츠키가 세인트루이스 블루스로 트레이드 되었다는 뉴스가 일제히 모든 언론지상을 장식하였다. 그레츠키는 남은 31게임에 37포인트를 득점하였으며, 블루스는 서부지구 준결승에서 아쉽게 3-4로 탈락하였다. 첫 해의 결과치고는 괜찮았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마이크 키난 (Mike Keenan) 감독과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올스타 플레이어인 포워드 브렛 헐 (Brett Hull, NHL 시카고 블랙호크스의 레전드 바비 헐의 아들이다)과도 호흡이 잘 맞지 않았다.

파일:attachment/웨인 그레츠키/그레츠키1.jpg
그리하여 같은 해 7월, 세인트루이스의 3년간 1500만불 오퍼를 거부하고 뉴욕 레인저스와 2년간 8백만불 (플러스 인센티브) 조건으로 계약한다. 뉴욕 레인저스에서 웨인은 옛 동료였던 센터 마크 메시에와 다시 만나게 된다. 하지만 마크 메시에는 이듬해 프리에이전트로 밴쿠버 커넉스와 계약하여 레인저스를 떠나고, 웨인은 그의 마지막 3시즌을 뉴욕에서 보내게 된다. 웨인의 마지막 플레이오프 활약은 1997년 동부지구 결승전으로, 웨인은 플레이오프에서 10골, 10어시스트를 기록하는 활약을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웨인 그레츠키, 마리오 르미외 (Mario Lemieux)를 잇는 차세대 NHL 스타였던 에릭 린드로스 (Eric Lindros)가 이끄는 필라델피아 플라이어스에 패배하게 된다.

그 후에는 뉴욕 레인저스 팀 자체가 94년 스탠리컵 플레이오프 우승 이후 계속 침체 일로를 걷고 있어서 97년을 이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지 못하였으며, 웨인 또한 잦은 부상 등에 시달리며 자신의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였다.[8] 그리하여 1999년에는 웨인의 은퇴설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레인저스의 시즌 마지막 게임 직전에 웨인은 은퇴를 선언하게 된다. 웨인의 마지막 게임은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벌어진 피츠버그 펭귄스와의 1-2 오버타임 패배였다. 게임 후 모든 관중들이 기립박수로 웨인을 맞이하였으며, 스포츠의 한 시대가 막을 내린다는 사실에 아쉬움을 금할 수 없었다. 링크를 돌며 관중들에게 손을 흔드는 웨인의 이미지는 한 시대의 아이콘으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3. 은퇴 이후[편집]


파일:external/assets.sbnation.com/Wayne_Gretzky.jpg
웨인은 1999년 은퇴하자마자 명예의 전당으로 직행했다. 그 정도로 하키계에 거물급인 인물인만큼 본인도 하키계에 계속 남아있으려 했고, 마침 피닉스 카이오티스의 지분을 살 기회가 생기면서 카이오티스의 지분 10%를 매입해 카이오티스의 구단주가 된다.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때 아이스하키팀 단장 역할을 하기도 한 그레츠키는 2005년 이 팀의 헤드코치가 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이스하키 역사상 최고의 슈퍼스타였던 그 역시 명선수는 명감독이 될 수 없다는 속설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재력도 좋지 않고 선수 육성 능력도 그저 그랬던 카이오티스에서 4시즌동안 143승 161패 24OTL 승률 47.3%의 기대이하의 성적을 냈고 소속팀 카이오티스의 지주회사가 파산하면서 그레츠키도 2009년 헤드코치 직에서 물러났고 이후 카이오티스에서 손을 뗐다.

이후에는 자신의 이름을 건 개인 사업등으로 활동중이며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 캐나다 대표팀 단장,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 캐나다 대표팀 특별 고문[9] 등의 역할로 하키계에 얼굴을 비추는 중이다.


4. 플레이 스타일[편집]


아이스하키 선수로서는 크지 않은 체구였지만, 빠른 속도와 정교한 기술로 작은 체구를 극복하며 NHL의 새로운 팀인 에드먼턴 오일러스를 단숨에 상위권으로 올려놓는 데 기여했다. 단연코 역대 최고의 득점력을 보유했는데, 최다 골 기록 뿐만 아니라 각종 득점 관련 기록은 모두 그레츠키가 차지하고 있다. 1981년 NHL 최고 득점 선수에 올랐고, 이후 7연속으로 최고 득점 선수 자리에 올랐다. 1982년에는 최초로 한 시즌에서 200골을 기록했다. 뿐만 아니라 어시스트 능력도 역대 최고였는데, 최다 도움 기록과 플레이오프에서의 도움 기록 등 각종 도움 관련 기록에서도 최고의 스텟을 보유하고 있다.

또한 스틱 핸들링, 스케이팅 스킬, 슬랩샷, 교묘한 페인트 등 아이스하키의 모든 기술의 백과사전이라고 해도 될만큼 뛰어난 기술의 보유자였고, 무엇보다 퍽에 대한 집중력이 뛰어나서 공중에 뜬 퍽을 야구의 배팅처럼 때려서 넣은 골도 한두골이 아니다.

그레츠키를 사기로 만든 기술은 퍽이 다음 순간에 어디로 갈지 예측하는 기술로 이 것은 가르쳐서 되는 것이 아니라 본능같은 것이었다고 한다.


5. 기록[편집]


1위
웨인 그레츠키
2,857
2위
야로미 야거
1,891
3위
마크 메시어
1,887
4위
고디 하우
1,850
5위
론 프랜시스
1,798
NHL에서 수많은 기록을 쌓았고 몇몇 개는 앞으로 깰 선수가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듣기도 한다. 또한 포인트 기록의 역대 순위에서도 1위에 위치하고 있는데 혼자서만 앞자리가 다르다.

그레츠키의 첫번째 골은 에드먼턴 오일러스 소속으로 밴쿠버 커넉스 상대로 1979년 10월 14일에 기록했고, 마지막 골은 뉴욕 레인저스 소속으로 뉴욕 아일런더스 상대로 1999년 3월 29일에 기록했다.


5.1. 공식 시즌 기록[편집]


  1. 최다 골: 894골(1,487경기 중)
  2. 플레이오프 포함 최다 골: 1,016골(정규시즌 1,487 + 플레이오프 208경기)
  3. 단일 시즌 최다 골: 92골 (1981-82시즌, 80경기 중)
  4. 플레이오프 포함 단일 시즌 최다 골: 100골 (1983–84시즌, 정규시즌 74경기 중 87골 + 플레이오프 19경기 중 13골)
  5. 시즌 개막 후 첫 50경기 중 최다 골: 61골 (1981–82시즌, 1981년 10월 7일~1982년 1월 22일, 시즌 당 80경기 일정)(1983–84시즌, 1983년 10월 5일~1984년 1월 25일, 시즌 당 80경기 일정)
  6. 단일 피리어드 최다 골: 4골(10명의 플래이어와 타이)(1981년 2월 18일)
  7. 최다 도움: 1,963도움
  8. 플레이오프 포함 최다 도움: 2,223도움
  9. 단일 시즌 최다 도움: 163도움(1985–86시즌, 80경기 일정)
  10. 플레이오프 포함 단일 시즌 최다 도움: 174도움(1985–86시즌, 정규 시즌 80경기 중 163회 + 플레이오프 10경기 중 11회)
  11. 단일 경기 최다 도움: 7도움(빌리 테일러와 타이)(1980년 2월 16일, 1985년 12월 12일, 1986년 2월 15일)
  12. 단일 원경 경기 최다 도움: 7도움(빌리 테일러와 타이)(1985년 12월 11일)
  13. 최다 공격 포인트: 2,857점 (1,487경기 중 894골, 1,963도움)
  14. 플레이오프 포함 최다 공격 포인트: 3,239점 (정규시즌 1,487경기, 플레이오프 208경기 중 1,016골, 2,223도움)
  15. 단일 시즌 최다 공격 포인트: 215점 (1985–86시즌, 80경기 일정 중 52골, 163도움)
  16. 플레이오프 포함 단일 시즌 최다 공격 포인트: 255점 (1984–85시즌, 정규 시즌 80경기 중 208점, 플레이오프 18경기 중 47점)
  17. 통산 최다 오버타임 도움: 15개
  18. 통산 센터 포지션 최다 득점: 894골
  19. 단일 시즌 센터 포지션 최다 득점: 92골(1981–82시즌, 80경기 일정)
  20. 통산 센터 포지션 최다 도움: 1,963번
  21. 단일 시즌 센터 포지션 최다 도움: 163번(1985–86시즌, 80경기 일정)
  22. 통산 센터 포지션 최다 공격 포인트: 2,857점
  23. 단일 시즌 센터 포지션 최다 공격 포인트: 215점 (1985–86시즌, 80경기 일정)
  24. 데뷔 시즌 중 단일 경기 최다 도움: 7개 (1980년 2월 15일)
  25. 단일 시즌 최고 경기당 득점: 1.18 (1983–84시즌, 74경기 중 87골)
  26. 통산[10] 최고 경기당 도움: 1.321 (1,487경기 중 1,963도움)
  27. 단일 시즌 최고 경기당 도움: 2.04 (1985–86시즌, 80경기 중 163도움)
  28. 단일 시즌 최고 경기당 공격포인트: 2.77 (1983–84시즌, 74경기 중 205점)
  29. 최다 40골 이상 득점 시즌: 12시즌 (20시즌 중)
  30. 최다 연속 40골 이상 득점 시즌: 12시즌 연속(1979–80시즌 부터 1990–91시즌 까지)
  31. 최다 50골 이상 득점 시즌: 9시즌 (마이크 보시와 타이)
  32. 최다 60골 이상 득점 시즌: 5시즌 (마이크 보시와 타이)
  33. 최다 연속 60골 이상 득점 시즌: 4시즌 연속 (1981–82시즌 부터 1984–85시즌 까지)
  34. 최다 100 공격 포인트 시즌: 15시즌
  35. 최다 연속 100 공격 포인트 시즌: 13시즌 연속(1979–80시즌 부터 1991–92시즌 까지)
  36. 통산 3골 이상 득점 경기: 50경기 (해트트릭 37번, 4득점 경기 9번, 5득점 경기 4번)
  37. 단일 시즌 최다 해트트릭 경기: 10경기 (2번, 1981-82시즌, 1983-84시즌)
  38. 최장 연속 도움 경기: 23경기 연속(1990-91시즌, 48도움)
  39. 최장 연속 공격 포인트 경기: 51경기 연속 (1983-84시즌 1983년 10월 5일 부터 1984년 1월 28일 까지 61골, 92도움으로 153포인트)
  40. 개막부터 최장 연속 공격 포인트 경기: 51경기 연속(1983-84시즌, 1983년 10월 5일 부터 1984년 1월 28일까지 61골, 92도움으로 153포인트)


6. 여담[편집]


  • 웨인은 디트로이트 레드윙스의 전설 고디 하우를 동경했다고 한다. 10살에 처음으로 정장을 입은 그레츠키가 하우와 찍은 사진도 유명하다.

  • 1900년대 초 야구선수였던 호너스 와그너 야구 카드를 보유했던 적이 있다. 그것도 가장 보존 상태가 깔끔한 카드로. 이런 종류의 물건 가격은 시간이 지날수록 우상향하기 때문에 그레츠키는 무난히 시세 차익을 보고 카드를 다음 소유자에게 팔았지만 20여년 후 최초 발견자격인 사람이 가치를 높이기 위해 카드를 약간 잘랐다고 인정하면서 그 카드의 가치는 땅에 떨어졌다.

  • 본인도 스포츠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선수였기 때문에 많은 카드가 발매되었다. 루키 시절에 나온 카드는 그 중 수집가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어, 2021년 5월에는 경매에서 375만 달러에 팔리기도 했다. 그 희귀한 호너스 와그너 카드의 절반 정도 가격. 브루스 윌리스 주연의 영화 디텍티브 나이트: 가면의 밤의 감독도 이 사실을 알았는지, 경매 장면에서 이 루키 카드가 매물로 올라온 장면에서 시작부터 100만달러로 시작했음에도 치열한 낙찰 경쟁이 벌어졌고, 220만 달러에 낙찰되는 것으로 그렸다.

  • 병맛 가사로 유명한 론리 아일랜드가 자신들의 곡인 Semicolon에서 jet ski(제트스키) Gretsky(그레츠키)로 라임을 맞췄다. #

7. 둘러보기 틀[편집]


National Hockey League No.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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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캐나다 1등급 훈장[2] 본래 9번으로 하려고 하였으나 이미 가지고 있던 선수가 있어 99번으로 했다. 훗날 이 번호는 전설이 된다.[3] 공식적으로 영구결번은 NHL에서만 되었으나 어느 아이스하키 프로리그나 99번을 다는 선수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나마 고등부 이하는 드물게 사용하는 경우있기는 하다. 현역 타종목에서도 야구의 애런 저지 정도가 유명하며, 류현진이 토론토로 이적하며 토론토 블루 제이스 역사상 첫 99번을 달았다. 굳이 아이스하키가 아니라도 모든 종목의 캐나다 연고 팀들은 99번을 비공식결번으로 두는 편이다.[4] 그레츠키 은퇴 후 창단된 콜럼버스 블루재키츠, 미네소타 와일드, 베가스 골든 나이츠, 시애틀 크라켄에서는 그 팀들이 창단되자마자 영구결번이 되었다.[5] 84년에는 마크 메시어가 수상했고 87년에는 준우승팀 플라이어스에서 수상자가 나왔다. (론 헥스텔)[6] 허나 바비 오어는 디펜스맨이었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NHL에서 수비수의 개념을 완전히 뒤바꾼 선수가 바비 오어다. 보통 NHL 에서 가장 위대한 선수를 꼽을 때 그레츠키에 이어 2위를 차지하고 Howard Bryant 같이 오어를 오히려 그레츠키 위에 올리는 애널리스트 들도 몇 명 있다.[7] 자넷 존스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88년작인 '폴리스 아카데미 5' 이다. 80년대를 보낸 사람이라면 추억의 '폴리스 아카데미' 시리즈를 기억할 것이다. 위대한 남편과 달리 자넷 존스의 배우로서의 커리어는 그리 신통치 않았다.[8] 물론 발휘하지 못했다는게 어디까지나 이 사람 기준인거지 은퇴 시즌을 제외하면 나머지 2시즌에는 82경기 풀출장하면서 포인트 순위에도 5위 안에 들고, 올프로팀에서도 세컨드 팀에 선정되었다.[9] 2010년 밴쿠버 올림픽의 성화 봉송 첫번째 주자를 하기도 하였다.[10] 최소 300경기 출전 선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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