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다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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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1. 개요
2. 용어의 유래
3. 잘 죽는 것은?
4. 잘 죽기 위한 준비
5. 관련 문서
6. 외부 링크


1. 개요[편집]


"저는 사랑했고, 사랑받았습니다. 두려움보다는 오히려 고마움이 나를 가장 사로잡습니다."

- 올리버 색스[1]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 제15조(연명의료중단등결정 이행의 대상) 담당의사는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가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경우에만 연명의료중단등결정을 이행할 수 있다. [시행일: 2018.2.4.] 제15조

1. 제17조에 따라 연명의료계획서,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또는 환자가족의 진술을 통하여 환자의 의사로 보는 의사가 연명의료중단등결정을 원하는 것이고,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의사에도 반하지 아니하는 경우

2. 제18조에 따라 연명의료중단등결정이 있는 것으로 보는 경우


존엄사 / 尊嚴死 / Well-dying

잘 사는 것(웰빙[2])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잘 죽는 것(웰다잉)도 중요하다는 역발상을 통해 나타난 새로운 흐름.


2. 용어의 유래[편집]


파일:external/pds.joinsmsn.com/htm_2012040912345050105011.jpg
(출처)

본디 긍정심리학 분야에서 연구되던 웰빙 개념이 대중적으로 주목받으면서, "의 마지막까지 사람답게 살다가 가고 싶다." 라는 새로운 인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게다가 의료윤리학의 오랜 떡밥인 존엄사나 "안락사" 문제와 함께,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이라는 기존의 관점에서 벗어나서[3] 우리 모두가 노력해야 할 최종적 목표로서의 웰다잉이 제안되기도 했다. 즉, 대중적 죽음교육을 통해 미리부터 죽음에 대비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어차피 죽음이란 것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찾아오니까.[4][5]

학계에서는 죽음수용(death acceptance) 같은 용어들이 웰다잉 운동의 효과성을 측정하는 개념이 된다.


3. 잘 죽는 것은?[편집]


참으로 어감이 미묘하지만 잘 죽는다는 것은 당연히 쉽지 않은 일이다. 우선 하나하나 차근차근 살펴보자. 나무위키의 모든 문서가 그렇듯 주관적인 내용이 있을 수 있다.

  • 물질적 측면
막대한 금전과 재산이 잘 죽는 것을 보장할 수 있을까? 인류 역사를 돌이켜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시황제의 경우 그렇게나 죽기가 싫어서 불로초를 찾겠다고 난리법석을 떨었다. 인생사 공수래 공수거[6]라는 말이 기독교불교건 막론하고 다양한 종교들에서 발견된다는 걸 보면, 옛 사람들도 이 죽음의 질을 보장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아 보인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의 재력은 죽음의 질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긴 병환에 효자 없다는 말처럼, 노년의 투병생활은 제아무리 효심이 깊은 자녀라도 육체적,정신적으로 버티기 힘들다. 특히 사회 안전망의 도움이 시급한 저소득층과 차상위 계층의 경우 금전적인 한계로 인하여 잘 죽는 것이 무척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렇게 치료를 포기하거나 주변인들이 간병을 포기하거나, 심할경우 아예 그전에 없는 사람이 되어버리는 노년기 주변과의 단절로 인해 많은 독거노인들이 고독사 위협에 직면해 있고, 가난한 중환자들은 병상에서 비참한 모습으로 삶을 마감하곤 한다. 돈이 구체적으로 얼마가 있어야 하느냐는 확신할 수 없어도, 어느 정도는 있어야 한다는 점만큼은 분명하다. 애초에 아래의 자기관리, 건강관리, 멘탈관리, 인간관계는 부로 인한 금전적 자유가 있어야 관리가 쉽다.

  • 신체적 측면
미노년 문서에도 나오지만 노년기에 자기관리, 건강관리, 멘탈관리를 하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일이다. 특히나 75세 이후부터는 건강이 급속도로 무너지기 시작하여,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폭주기관차 신세가 된다. 피부가 잿빛으로 변하고 골격이 움츠러들며 각종 질병들의 이환(morbidity)으로 고통받게 되는 것. 특히나 죽음 3년 전부터는 안색이 눈에 띄게 바뀌고[7] 비로소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모습이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노년기에 최소한의 건강을 유지하고 변화하는 육체에 적응하는 것은 개인의 삶의 질에 매우 중요하다. 이 문제를 두고 고민하던 발달심리학자들, 긍정심리학자들은 마침내 "성공적 노화"(successful aging)라는 개념까지 만들어내게 되었다. 굳이 그 정도까지 가지 않더라도, 노년기에 중환자실에 입원하여 민폐도 민폐거니와 온갖 볼 꼴 못볼 꼴을 가족들에게 다 보여주며 참담한 모습으로 인생의 마지막을 장식하다가 결국 병상 위에서 최후를 고하는 사람들이 현대에는 너무나도 많다.[8][9]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최후가 이런 모습이기를 결코 원하지 않을 것이며, 이는 그만큼 신체적인 질병 문제나 건강 이슈가 웰다잉에 굉장히 중요함을 보여준다.

  • 대인관계적 측면
노년기의 많은 개인들은 동시대를 살아온 가족,친척,친구,동료등의 주변인들을 살아오는 동안 많이 먼저 떠나보내며, 그렇게 하면서 사회적 연결망이 점차 와해되며, 정말 믿을 수 있는 극소수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든 인간관계를 청산하고 정리하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중년기부터 시작되고, 이에 대항하여 많은 중년들이 교회에 등록하거나 산악회에 가입하는 등 사회적 연결망을 유지하고자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긴 한다. 그러나 노년기부터는 저항할 수 없는 거대한 파도가 몰려오게 된다. 친밀한 사람들, 즉 가족이나 친구, 형제자매와 같은 사람들이 하나씩 둘씩 곁을 떠나가게 되는 것이고, 이것은 아직까지는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자연의 이치인 것이다.[10]
어떻게 보면 이는 고독사가 비극적인 이유다. 자신의 죽음의 자리에 아무도 임종을 지키지 않아서 내가 죽건 말건 세상은 무심히 돌아간다면, 이 역시 우리 모두가 원하는 죽음의 모습은 절대 아닐 것이다. 사람들은 친밀하고 소중한 사람들과 마지막 작별의 시간을 함께하기를 원한다. 여건이 된다면, 사람에 따라서는 대중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죽음을 이별하고 자신의 행적을 되새기는 것까지도 바랄지도 모른다. 국장이나 국민장을 치르는 것이 고인에게 예우가 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일지도 모른다.

다만 아동 학대 피해자 중 가족 및 친척간의 연까지 다 끊은 경우에는 고독사의 위험이 있더라도 가족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을 때가 많다. 이미 유년 시절을 망치게 한 원흉인데다 마음 속 상처가 극심하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아동 학대고독사를 늘리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 심리발달적 측면
유명한 발달심리학자 에릭 에릭슨(E.Erikson)은 최초로 전생애에 걸친 발달을 강조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노년기에는 노년기의 발달과제가 있다고 생각했으며, 이는 과거 자신의 삶의 발달과제의 성취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제안한 노년기 발달과제는 통합 대 절망으로, 자신의 삶에 만족한 사람들은 무리없이 이 과제를 달성하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생의 유한성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공허함과 초조함, 죽음에 대한 불안을 느끼게 된다고 한다. 반대로 통합감을 느낀 노인들은 죽음을 선선히 받아들이고 조용히 삶을 정리한다고. 실제로 죽음불안 대 죽음수용의 문제는 그 개인의 발달궤적과 상당한 관계가 있을 수 있다.
긍정심리학의 주요 흐름인 의미추구적 행복은 이 사람이 생의 의미를 발견하고 온전한 자신을 완성했는지의 여부에 관심을 갖는다. 만일 이에 실패했다면 이 사람은 불로불사를 동경하며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살겠다고 발버둥치게 된다는 것. 의미가 존재하지 않는 삶은 죽음이라는 거대한 실존적 위협의 파도가 밀어닥치자 그만 모래성처럼 무너지게 된다는 것이다. 의도하진 않았겠지만, 웹툰 《무한동력》 의 명대사인 "자네는 죽을 때 못 먹은 밥이 기억나겠는가, 못 이룬 꿈이 기억나겠는가?" 역시 바로 이 지점을 정확히 가리키고 있다.

  • 초월적 측면
사후세계가 존재하는지 아닌지는 경험적으로 알 수 없거니와 과학자들의 연구대상도 아니지만, 사후세계를 바라보는 개인의 시각만큼은 과학자들의 연구대상이 될 수 있다. 많은 연구자들은 사후세계에 대한 관념과 높은 종교적 헌신이 개인으로 하여금 죽음에 대한 대비와 수용을 높일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이는 직관적으로도 설득력이 있는데, 테러리스트들이 거리낌 없이 자살 폭탄테러를 저지르는 동기의 상당 부분은 긍정적인 사후세계에 대한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종교성과 죽음수용 간의 관계는 엄밀하게 이해될 필요가 있다.[11] 한편 자살의 특이한 케이스들은 이 측면에 의해 설명되는데, 어린이들의 자살 중 상당수는 사후세계에 대한 막연한 기대로 인해 발생한다. 자살 이론의 권위자 에드윈 슈나이트만(E.S.Schneidman)은 이를 두고 "죽음의 무시자"(death ignorer)라고 불렀다.

어떤 식으로 정리하든 간에, 보다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죽음의 형태는 분명히 존재한다.[12] 웰다잉은 개인마다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그러한 형태를 자신의 삶의 마지막으로 장식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다. 예를 들어, 위에서 설명한 바 있는 "중환자실에서의 비참하고 참혹한 최후" 는 누가 보더라도 자신의 마지막 모습으로서는 반기지 않는다.

중요한 건, 그런 외부 환경적 조건 외에도 심리적 준비와 이해가 결정적이라는 것이다. 아주 유복하고 여유로운 삶을 살지는 못하는 노인들이라도, 뒤늦게나마 적절한 죽음교육을 받았을 때 당신들의 삶이 비록 신산스러운 것이었을지언정 죽음에 대해 훨씬 적응적인 모습을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어떻게 죽는 것이 잘 죽는 것인가?" 로부터 시작된 웰다잉의 질문은, 마침내 "우리는 죽음에 대해 직시하고 이해해야 하며, 미리부터 준비해 놓아야 한다" 의 결론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4. 잘 죽기 위한 준비[편집]


파일:external/www.fngenii.com/20140721_012839.jpg
[13]

위에 적힌 것 외에도, 학교 현장에서 점점 더 많은 어린이들이 죽음 교육을 받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는 묘비명 쓰기, 입관 경험해 보기, 유언장 쓰기, 죽음 토론하기 등이 있다. 가까운 친지나 지인이 사망하는 것을 목격하거나 장례 현장에 가 보지 않은 어린이 및 청소년들은 더 많고 체계적인 교육이 필요한 게 사실이다. 애초에 인간은 중년이 되기까지[14] 자신의 삶이 사실상 무한하다고 암묵적으로 가정하는 인지적 착각을 보인다고 한다. "앞길이 아직 구만 리 같다" 는 표현처럼, 죽음이라는 개념이 잘 와닿지 않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

웰다잉은 불교계에서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이기도 한데, 실제로 불교여성개발원이라는 단체에서는 웰다잉운동본부라는 것을 설립하고 "웰다잉지도자 과정"을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 한때 MBC에서 일명 "웰다잉 페어"(Well-Dying Fair)를 진행하기도 했다.

그 밖에도 웰다잉을 중시하는 사람의 경우 병원입원하지 않는다. 아무래도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병원 안에서만 지내야 하기 때문에 입원 자체를 지루해하며 지겨워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자신이 말기암 등처럼 치료를 해도 살기 어려운 병에 걸렸다는 진단을 들으면 웬만해서는 병원에 입원하지 않는다. 대신 죽을 때까지 자신에게 남은 시간을 알차게 보내기 위해 을 예전에 비해 많이 읽고 영화, 음악 감상 등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2016년 9월 8일 방송된 JTBC '썰전'에서 유시민이 몸과 정신이 멀쩡하고 건전한 판단력을 가지고 있을 때 유언을 남겨야 한다며 사전연명의료의향서[15]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다.

5. 관련 문서[편집]


  • 버킷 리스트
  • 호상[16]
  • 상조[17]
  • 성공적 노화
  • 안락사
  •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 - 속칭 '웰다잉법'이라고도 한다.
  • 웰빙
  • 죽음

6. 외부 링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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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중들에게 친숙한 신경과학자. 그의 저서 중에 나무위키에 등재된 것으로는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가 있다.[2] 해당 문서의 서두에도 언급했지만 이 단어는 한국에서 원래의 뜻에서 한참 동떨어진 뜻이 되었다.[3] 사실 좁은 의미에서의 웰다잉은 실제로 이런 의미를 갖고 있으며, 이 경우 존엄사라는 단어와도 혼용될 수 있다.[4] 나중에 만약 노화를 멈추는 방법이 개발된다고 해도 죽을 수 있는 방법은 무수히 많다. 게다가 아무리 과학이 발전했어도 뇌가 파괴되면 얄짤없다.[5] 다만 위에서도 말했듯이 죽음 자체는 공평하다. 그런데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겪는 과정은 전혀 공평하지 않다. 즉, 누군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애도를 받으며 장례식자본주의에 따라 웅장하게 치를 수 있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무연고자라는 이유만으로 장례식조차 없이 묻히거나 불태워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6] 인간의 삶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는 말.[7] 대개 이 시기부터 가까운 가족들과 친척들이 눈치를 채고 마음의 준비를 하게 된다.[8] 애초에 이런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논쟁의 결판이 나질 않는 것이다.[9] '갈려나간다'라는 표현에 적합한 곳은 사실 수많은 인간이 죽음을 맞이하는 병원일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원하든 원치않든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죽는 곳이 현대의 종합병원이다.[10] 꼭 사람이자 인류라는 분류를 벗어나지 않더라도 죽음을 질병으로 보아 치료하고자 하는 노력들은 지금도 많이 아우러지고 있다.[11] 종교성이 높을수록 죽음수용도 높아지지만, 종교가 없는 사람들이 반드시 죽음수용을 못 하게 되리라고는 장담할 수는 없다. 종교라는 방법 없이도 (어쩌면 세속적인 제도권 죽음교육을 통하여) 웰다잉에 성공할 가능성이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12] ex.) 여러분은 자신의 생의 목표를 충분히 달성했고, 자신과 타인과 사회를 위해 충분히 공헌했다. 여러분은 가장 편안하고 안락한 곳에서, 사랑하는 소중한 사람들의 작별을 받으며, 될 수 있는 한 존엄하고 고귀한 모습으로 꿈꾸는 듯이 고요히 잠들었다. 여러분을 알고 있던 많은 사람들은 저마다 잠시 시간을 내어 여러분을 추모하고 그 뜻을 되새겼다.[13] 출처[14]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부모님을 사별해 떠나보내기까지.[15] #[16] 이것과 연결된 밈이 관짝밈.[17] 상조회사들이 웰다잉을 가지고 돈벌이를 하는 경우가 간혹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