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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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묘청의 난으로 단기간 존속했던 위(爲)라는 국호를 가진 한반도의 나라에 대한 내용은 대위국 문서 참고하십시오.
자세한 내용은 위(춘추전국시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춘추시대에 존재하던 소국으로 지금의 산서성 예성현 일대에 있었다. 기원전 661년에 진(晉)의 공격으로 멸망한다.
자세한 내용은 위(전국시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자세한 내용은 위(삼국시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한 위나라이며 서기 220년 후한 헌제에게 선양 받아 건국했고, 조환이 사마염에게 선양해 265년 멸망했다. 삼국지에 나온 위가 바로 이 나라이다.
350년 후조(後趙)의 인물인 염민(冉閔)이 후조의 황제 석지(石祗)를 살해하고 업(鄴)에서 건국하였다. 국호는 위이며 구분하기 위해 염민의 성을 붙여 염위(冉魏)로 불린다. 그러나 건국 후 2년 만에 전연(前燕)의 공격으로 염민이 살해되고, 나라가 멸망한 후 태자 염지(冉智)는 맞서 싸웠으나 패배하여 완전히 멸망하였다. 역사가 짧아 16국에 포함되지 않는다.
통칭 적위(翟魏)라 불리며 불과 4년 만에 멸망했다. 역사가 짧아 16국에 포함되지 않는다.
통칭 북위. 국성을 따서 탁발위 또는 원위(元魏)라고도 부른다. 위라는 이름을 가진 역대 전근대 중국 왕조들 중 가장 강력한 국력을 갖고 있고 비중도 가장 큰 나라이다.
자세한 것은 북위, 동위, 서위 문서 참조.
수말당초 이밀이 세운 단명국가. 통칭 이위(李魏). 정통왕조에는 들지 않는다.
오대십국시대의 소국 중에 하나.(909 ~ 929) 북평(北平), 혹은 왕위(王魏)라고도 불리며, 십국에는 들지 않는다. 유력 절도사 의무 절도사 세력으로, 의무 절도사 왕처직이 909년 후량의 주전충으로부터 북평왕(北平王)에 책봉되었다. 이후 양자인 왕욱이 921년 왕위를 찬탈하고 위왕(魏王)이라 선포하였다. 929년 후량의 명종이 왕안구를 보내 북평을 쳐 근거지인 정주성을 깨뜨리자, 왕욱은 가솔과 함께 스스로 불을 질러 자살하여 의무 절도사 세력은 소멸하였다.
1. 개요[편집]
2. 衛[편집]
자세한 내용은 위(춘추전국시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 魏[편집]
중국사에 존재했던 여러 나라들.
3.1. 춘추시대의 위나라[편집]
춘추시대에 존재하던 소국으로 지금의 산서성 예성현 일대에 있었다. 기원전 661년에 진(晉)의 공격으로 멸망한다.
3.2. 전국시대의 위나라[편집]
자세한 내용은 위(전국시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3. 삼국시대 조조의 아들 조비가 세운 조위[편집]
자세한 내용은 위(삼국시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한 위나라이며 서기 220년 후한 헌제에게 선양 받아 건국했고, 조환이 사마염에게 선양해 265년 멸망했다. 삼국지에 나온 위가 바로 이 나라이다.
3.4. 오호십육국 시대 염민이 세운 염위[편집]
350년 후조(後趙)의 인물인 염민(冉閔)이 후조의 황제 석지(石祗)를 살해하고 업(鄴)에서 건국하였다. 국호는 위이며 구분하기 위해 염민의 성을 붙여 염위(冉魏)로 불린다. 그러나 건국 후 2년 만에 전연(前燕)의 공격으로 염민이 살해되고, 나라가 멸망한 후 태자 염지(冉智)는 맞서 싸웠으나 패배하여 완전히 멸망하였다. 역사가 짧아 16국에 포함되지 않는다.
3.5. 정령(철륵)족 적료가 세운 적위[편집]
통칭 적위(翟魏)라 불리며 불과 4년 만에 멸망했다. 역사가 짧아 16국에 포함되지 않는다.
3.6. 탁발선비가 세운 북위[편집]
통칭 북위. 국성을 따서 탁발위 또는 원위(元魏)라고도 부른다. 위라는 이름을 가진 역대 전근대 중국 왕조들 중 가장 강력한 국력을 갖고 있고 비중도 가장 큰 나라이다.
자세한 것은 북위, 동위, 서위 문서 참조.
3.7. 수말당초 이밀이 세운 이위[편집]
수말당초 이밀이 세운 단명국가. 통칭 이위(李魏). 정통왕조에는 들지 않는다.
3.8. 오대십국시대 왕처직이 세운 왕위[편집]
오대십국시대의 소국 중에 하나.(909 ~ 929) 북평(北平), 혹은 왕위(王魏)라고도 불리며, 십국에는 들지 않는다. 유력 절도사 의무 절도사 세력으로, 의무 절도사 왕처직이 909년 후량의 주전충으로부터 북평왕(北平王)에 책봉되었다. 이후 양자인 왕욱이 921년 왕위를 찬탈하고 위왕(魏王)이라 선포하였다. 929년 후량의 명종이 왕안구를 보내 북평을 쳐 근거지인 정주성을 깨뜨리자, 왕욱은 가솔과 함께 스스로 불을 질러 자살하여 의무 절도사 세력은 소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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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어 등에서는 일반적으로 성조 부호를 제외한 Wei를 쓴다. 현대 중국어에서 성조까지 같은 위(衛)는 Wey로 써서 위(魏)와 구분하는 경우가 많은데 상세 설명은 衛 단락의 주석을 참고할 것.[2] 염민의 조부. 염민이 추존.[3] 염민의 부친. 염민이 추존.[4] 다른 이름은 염첨(冉瞻).[5] 모용준이 추존.[6] 염민의 후손에 의해서 추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