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버링겐 상공 공중충돌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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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 사건 사고 요약표
발생일
2002년 7월 1일
유형
공중충돌, 관제 실수

발생 위치
독일 위버링겐 상공
탑승인원
V92937: 승객 60명, 승무원 9명
ES611: 승무원 2명
사망자
두 기체 탑승객 71명 전원 사망
기종
Tu-154M
B757-23APF
항공사
바시키르 항공
DHL
기체 등록번호
RA-85816
A9C-DHL
바시키르 항공 2937 (V92937)
출발지
도모데도보 국제공항
도착지
바르셀로나 국제공항
DHL 611 (ES611)
출발지
바레인 국제공항
경유지
오리오 알 세리오 국제공항
도착지
브뤼셀 국제공항

Die Fluzeugkollision von Überlingen (독일어)
Столкновение над Боденским озером (러시아어)
Überlingen mid-air collision (영어)

1. 개요
2. 사고 과정
2.1. 출발
2.2. 충돌
2.3. 충돌 이후
3. 사고 원인
3.1. 과도한 인건비 절감
3.2. 시스템 점검과 관제 실수
3.3. ICAO의 직무유기와 국가별 운항가이드의 차이
4. 여담
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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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cdn-www.airliners.net/0249191.jpg
사고 발생 3개월 전 샤르자 국제공항에서 찍힌 바시키르 항공 2937편의 사진
사고 발생 7일 전 브뤼셀 국제공항에서 촬영된 DHL 611편의 사진

추락 재현 애니메이션(ATC 기록 포함)
추락 재현 영상(ATC 기록 포함)[1]


1. 개요[편집]


2002년 7월 1일 오후 11시 35분 52초(중앙유럽 서머타임 기준) 독일 남부 바덴뷔르템베르크 튀빙겐 현의 위버링겐에서 발생한 공중 충돌 사고.


2. 사고 과정[편집]



2.1. 출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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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일, 러시아 모스크바스페인 바르셀로나행 바시키르 항공(Bashkirian Airlines)[2] 2937편 Tu-154 여객기와 바레인에서 출발해 이탈리아 베르가모를 거쳐 브뤼셀까지 날아가던 DHL 항공 611편 보잉 757 화물기는 각각의 항공로를 따라서 목적지를 향해 비행하고 있었다.

당시 바시키르 항공 2937편 여객기의 조종실은 조종권한 분배가 다소 모호했는데, 조종의 최고 결정권자인 기장이 자신보다 경력이 더 오래된 부기장에게 조종 운항 평가를 받는 수습기장이었기 때문이다. 부기장은 원래 해당 여객기의 베테랑 기장이었으나 평가 감독관으로서 형식상 부기장으로 동반 탑승한 것이었고, 감독관인 그와 원래 비행을 함께해온 부기장도 뒷좌석에 탑승해 수습기장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게다가 구형 여객기였던 탓에 조종 작동을 보조하는 항공기관사와 항법사도 뒷좌석에 타 있었다. 즉 조종실에만 5명이 앉아있었고, 형식상 최고 지휘자인 기장과 실질적 최고 지휘자인 부기장이 같이 의사결정에 개입하는 구조여서 자칫 위기통제 의사결정이 표류할 위험을 내재했던 것. 어쨌든 2937편은 이런 어수선한 조종실 분위기 속에 22시 48분 바르셀로나를 향해 모스크바 도모데도보 국제공항에서 이륙했다.

국제물류운송회사 DHL 소속 보잉 757 화물기인 611편은 중간 기착지인 이탈리아 베르가모에서 휴식 및 재급유를 마친 뒤 벨기에 브뤼셀까지의 비행을 준비했다. 브뤼셀 도착 직후 다른 목적지로 추가 비행이 예정되어 있었다고 한다. 611편은 당일 16시 40분 바레인에서 이륙해 21시 10분 베르가모에 기착하였으며, 23시 6분 브뤼셀을 향해 베르가모 공항에서 이륙했다.

2.2. 충돌[편집]



DHL 611편의 CVR
바시키르 2937편의 CVR[3]
당시 취리히 항공 관제를 맡고 있는 회사는 스카이 가이드라는 스위스 국영회사였다. 당시 그 구역에 배치된 관제사는 단 두 명이었는데, 11시 15분경 한 명이 휴식을 취하러 가자 덴마크 출신 관제사인 페테르 닐센(Peter Nielsen) 혼자서 두 구역을 관리하였다.

그 뒤 레이더 점검을 위해 레이더 반응이 느려졌다. 이후 관제사는 전화마저 쓸 수 없었는데 항공기와 교신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다른 관제 센터와 통신은 불가능해졌다.

이후 바시키르 2937편은 독일에서 스위스로 관제 센터가 바뀌었고 이 순간 DHL 611편도 스위스 영공에 들어섰다. DHL 611편은 연료절감을 이유로 고도상승을 요구했고, 관제사는 36,000ft(약 10.97km)까지 상승을 허가했다.

다만 이때 바시키르 2937편 역시 36,000ft를 비행중이었다.

물론 두 항공기가 설마 공중에서 충돌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충돌 몇 분 전 에어로 로이드(Aero Lloyd)[4] 1135편 에어버스 A320기의 지연 등장으로 관제사는 도착지인 프리드리히스하펜 공항에 이를 알리기 위해 전화를 시도하지만 점검으로 인해 여러 차례 실패했다. 또 이 연락시도가 예상보다 길어진 탓에 그동안 다른 비행기로부터 온 연락을 모두 놓치고 말았다. 에어로 로이드 1135편을 유도하기 위해 옆자리로 옮겼고 관제사는 결국 두 자리에서 항공기 3대를 관제해야 하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이 상황에서 바시키르 2937편을 관제하기는 힘들어졌다.

보통 이런 상황에서는 다른 관제 센터에 타 항공기를 넘기지만 시스템 점검 때문에 타 센터와 연결이 불가능했다.백업 라인 또한 결함이 있는 상태였다. 설상가상인 것은 후술할 TCAS(공중 충돌 경보 시스템)가 각 항공기마다 탑재되어 운용되는 것과는 별개로 평소라면 관제사가 TCAS와는 독립적인 ACAS(항공기 충돌 경보 시스템)으로부터 이른 시기에 직접 시각경고를 받을 수 있어야 했음에도 ACAS 또한 사고를 막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는 ACAS가 지상에 위치한 레이더를 통해 운용되기 때문인데 당시 이 레이더까지도 점검을 위해 보조 시스템으로 운용되면서 ACAS의 시각경보가 작동하지 않으면서 제때 위험을 알리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180km 떨어진 독일의 관제 센터에서는 ACAS를 통해 두 항공기간 충돌 위험을 감지했지만 다른 관제구역의 항공기에 연락함은 엄격하게 금지되었기 때문에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손 놓고 구경만 하지는 않고 스위스 스카이 가이드 측에 연락을 11차례 시도했으나 충돌 1분 전인 34분까지 전화는 먹통이었다.

평온하게 비행하던 두 항공기의 조종사들은 서로의 TCAS가 충돌위험경고음을 울리자 당황했다. TCAS는 두 비행기가 충돌 위험 궤도에 있다는 사실을 인지할 경우 그 즉시 시스템 자체 통신과 계산을 통해 어느 쪽이 상승하고 어느 쪽이 하강할지를 결정, 양측에 각각 상승과 하강을 지시함으로써 충돌을 피하게 해준다. 당시 위험을 인지한 TCAS는 DHL 611편 측에 하강을 지시했고, 611편은 서둘러 고도를 낮추며 관제소에 자신들의 하강 사실을 알렸다. 동시에 바시키르 2937편의 TCAS는 상승을 지시했으나, 2937편 조종사들은 의사결정 과정에서 혼선을 겪으며 즉시 대처하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관제사 닐센은 611편의 고도 하강 교신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오히려 레이더를 보고 충돌 위험 상황을 직시한 닐센은 611편의 하강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바시키르 2937편에게 충돌 위험에 따른 고도 하강을 지시하는 최악의 실수를 저질렀다. 게다가 그는 2937편에게 충돌 위험 상황임을 전달하면서 611편이 비슷한 고도에서 접근 중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는데, 접근 방향을 2937편 조종석 시야 기준이 아닌 반대 기준으로 알려준 탓에 왼쪽에서 접근해오는 611편을 '오른쪽에서 접근해오고 있다'고 거꾸로 전달하는 실수까지 저지르고 말았다. 그래 놓고 611편에게는 아무런 지시도 하지 않았다. 닐센은 자신의 조치로 두 항공기의 충돌 위험은 해소되었다고 판단했고, 다른 레이더 화면으로 옮겨 가 에어로 로이드 1135편 항공기의 착륙 유도 교신에 몰두하였다.

2937편 조종사들은 TCAS와 관제사의 서로 다른 고도 변경 지시에 당황했다. 당시 대부분의 서방 항공사 여객기들은 조종 의사결정에서 TCAS 시스템의 판단을 우선시했지만, 러시아 항공사 소속이었던 2937편 조종사들은 결국 관제사 닐센의 지시를 따르기로 하고 고도 35,000ft를 향해 하강을 시작했다.[5] 2937편 조종사들은 관제사 닐센이 알려준 방향대로 조종실 오른쪽 창밖을 뚫어져라 주시하며 깜깜한 밤하늘 속 611편의 근접을 살폈지만, 상술했듯 방향이 정반대쪽이었기에 충돌 직전까지 그들은 611편을 발견하지 못했다. 611편의 두 조종사는 TCAS의 지시에 따라 하강을 지속하는데도 계속 충돌위험경고음이 울리자 더욱 당황하여 관제소에 교신을 시도했으나 닐센은 다른 레이더 상황을 지켜보느라 이를 듣지 못했다. 결국 두 항공기는 충돌하기 불과 몇 초 직전에야 육안으로 서로를 발견했다. 611편 조종사들은 기를 쓰고 더 급격히 하강하기 위해 조종간을 밀었고, 왼쪽 창밖을 본 2937편 조종사들은 경악하여 급격히 상승하기 위해 조종간을 당겼으나 이미 시간은 늦어버렸다.

2002년 7월 1일 21시 35분, DHL 611편은 바시키르 2937편의 바로 아래를 아슬아슬하게 지나갔으나 DHL기의 수직꼬리날개가 2937편의 동체를 두 동강 내고 말았다.

충돌 직후 2937편은 완전히 공중분해되었으며, 611편은 수직꼬리날개를 잃고 제어를 상실하여 추락하였다.

2.3. 충돌 이후[편집]


파일:external/worldonline.media.clients.ellingtoncms.com/naAirliner_t440.jpg
35,000ft 이상의 고도에서 비행하던 두 항공기의 속력은 가공할 만한 위력의 충돌을 순식간에 일으켰고, 바시키르 2937편은 손 쓸 새도 없이 공중에서 두 동강 나며 지상에 수직으로 추락했다. 사고 당시 2937편의 승객 대다수는 안전벨트를 매지 않고 있었는데, 611편이 동체를 반으로 가르고 지나간 그 찰나의 순간에 산산조각나며 공중에 흩뿌려지듯 사방으로 날아가고 말았다. 조종실을 포함한 기수 부분은 충돌 직후 완전히 분리되어 수직낙하한 끝에 어마어마한 속도로 지상에 떨어졌고, 날개와 엔진이 붙어있는 후미 부분은 잠시 활공하였으나 급격히 실속하면서 수직 추락했다. 커다란 두 동체와 수십수백 개의 작은 파편들이 지상에 우르르 쏟아지듯 추락하며 연쇄 폭발이 일어났고, 잔해는 넓은 범위에 걸쳐 작디 작게 뿌려졌다. 위버링겐에서는 추락지점 3km 밖에서도 거대한 화염이 이는 현상이 목격되었다고 한다. 탑승자 69명은 전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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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HL 611편은 충돌 직후 방향타 조작의 주요 장치인 수직꼬리날개의 80%가 떨어져나가면서 방향조절능력을 완전히 상실하였다. 두 조종사는 기체의 균형을 잡고 방향을 통제하며 비상착륙이나 비스듬한 추락이라도 시도해보고자 안간힘을 썼지만, 결국 7km 정도를 더 날아간 뒤 균형을 잃고 급격히 실속하면서 약 70도의 각도로 숲 지대에 추락해 폭발하였다. 기체는 지면충돌과 폭발로 완전히 파괴되었고, 양 날개에 달린 엔진은 동체 잔해로부터 수백 미터 떨어진 곳까지 튕겨나갔다. 화물기였기에 탑승자는 조종사 둘뿐이었으나, 두 명 모두 사망했다.

지상에서 찍은 장면[6]
바시키르 2937편과 DHL 611편이 충돌하여 화염속에 두동강나는 영상이 지상에서 촬영되기도 했다.

3. 사고 원인[편집]



3.1. 과도한 인건비 절감[편집]


위에서 설명했듯 관제사가 전부 공무원[7]인 한국과는 달리 취리히 ACC는 스카이 가이드라는 국영회사에게 관제권이 있었는데 해당 회사의 문제가 컸다.

우선 당시 스카이 가이드는 관제사를 2명만 배치했는데 한 명이 휴식을 위해 자리를 비운 탓에 관제사 단 한 명이 항로관제와 접근관제를 모두 책임져야 했다. 트래픽을 많이 겪어 단련된 관제사라도 두 콘솔 사이를 오가며 항공기 여러 대를 관제하는 건 바쁜 시간대에는 불가능에 가까우며 한가한 시간대에도 어려운 일이다. 때문에 2명 이상의 관제사가 반드시 상주하도록 규정되어 있는데 여기에 2명만을 배치한 스카이 가이드의 과실이 매우 크다고 볼 수 있다. 애시당초 적절한 인력 배치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3.2. 시스템 점검과 관제 실수[편집]


관제사는 위의 업무 과중에 더해서 시스템 점검으로 인해 관제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전화 시스템 점검과 백업 시스템의 고장으로 인해 에어로 로이드 1135편의 착륙유도를 공항측에 이양하지 못하고 떠맡고 있었으며[8], 백업 시스템의 고장까지는 모른 관제사는 공항에 수차례 전화시도를 하느라 시간과 신경을 뺏기고 있었다. 이에 더해 지상의 충돌 감지 레이더까지 유지보수에 들어가 관제사 측의 단기 충돌 경보(STCA)가 작동하지 않았다.[9] 그리고 이러한 사항은 관제사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그 결과 두 항공기가 접근한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1분 전에야 알아 버렸다. 뒤늦게 바시키르 2937편에게만 고도하강을 지시했고 DHL 화물기에는 별도로 지시하지 않고 바로 에어로 로이드 1135편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때문에 DHL 화물기가 TCAS 경보에 따라 하강한다는 보고를 듣지 못했고 사고가 일어난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에어로 로이드 1135편이 착륙하자 DHL 보잉 757 화물기와 바시키르 2937편에 집중하려고 돌아왔으나 이미 충돌이 일어난 후였고 레이더 모니터에는 바시키르 2937편으로부터 레이더 시그널이 끊어졌다는 빨간 점만이 떠 있을 뿐이었다. 덧붙여 두 번째 지시에선 느려진 레이더로 인해 바시키르 2937편에게 잘못된 정보를 주었다. DHL 기가 "2시 방향으로 고도 36,000 ft"에 위치해있다고 했으나 실제로는 10시 방향이었고 고도 또한 이미 35,600 ft로 내려간 상태였다. #BFU의 조사보고


3.3. ICAO의 직무유기와 국가별 운항가이드의 차이[편집]


이 사고 전에도 이미 TCAS와 관제사의 지시혼선으로 충돌위기 상황이 몇 번 있었다. 미국FAA 규정으로 이런 경우에는 TCAS 경보대로 우선 조치하고 관제사에게는 사후 보고함을 규정으로 정했고, 일본스루가만 상공 니어미스 사고 이후 운수안전위원회의 권고명령에 따라 규정을 즉시 바꿨다. 하지만 유엔 산하 국제민간항공기구인 ICAO는 관제사의 지시와 TCAS 중 어느 것을 우선하는지 규정이 없어서 각자의 판단에 따를 뿐이었다. 일본 정부가 이미 상술한 스루가만 상공 니어미스 사고에 대한 자료를 토대로 TCAS 관련 규정이 허술해서 개정해야 한다는 의견을 계속 냈지만 ICAO는 묵묵부답하다가 결국 일본 정부에 책임을 떠넘겨 버린 이후 아예 무시해 버렸다. 한편 러시아는 구소련 시절부터 전해 내려온 관제사 지시를 우선하라는 운항 가이드에 그동안 큰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규정을 바꾸지 않았다.

따라서 FAA 규정을 표준으로 사용하는 DHL 611편은 규정에 따라 TCAS 경보가 울리자 TCAS의 지시대로 즉시 하강했지만 바시키르 2937편은 기장이 TCAS 경보와 관제사 지시 중에 우선순위를 판단해야 했다. 문제는 서방과는 달리 당시 바시키르 항공사의 표준운항절차 가이드라인이나 투폴레프의 표준운항절차 가이드라인에서는 관제사의 지시를 우선시하게끔 교육하였다.[10] 때문에 조종사들은 이 규정에 따라 TCAS보다 관제사의 지시를 우선했다.[11] 즉, 러시아의 규정에 따르면 이는 올바른 절차였다.

이에 따라 러시아 정부나 바시키르 항공, 투폴레프 셋 다 과실 책임이 있다고 보기는 어려웠고 결국 러시아 정부, 바시키르 항공, 투폴레프는 과실이 없는 것으로 판결되었다. 바시키르 항공사의 다른 조종사들 역시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그들과 같은 행동을 취할 것이라 인터뷰하기도 했다. 결국 바시키르 2937편은 관제사의 지시대로 고도를 하강하다 뒤늦게 DHL 611편을 발견하고, TCAS 경보에 따라 고도를 상승하려고 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그렇게 운항 가이드의 차이가 낳은 참사는 뒤늦게 ICAO가 부랴부랴 TCAS를 관제사보다 우선하도록 확정시키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고, 이후 민항기들은 반드시 TCAS를 먼저 따르도록 하는 세계 공통 규정이 생기게 되었다. 물론 러시아도 새 규정을 채택하여 TCAS를 우선시하도록 바꾸었다. 덕분에 이 사건 이후로 TCAS가 꺼져있었거나, TCAS 장비가 고장난 채 방치된 사례를 제외하면 2023년 현재까지도 민간 여객기가 공중 충돌 사고를 일으키는 일은 더 이상 발생하지 않았다.[12]


4. 여담[편집]


바시키르 2937편에는 승객과 승무원을 포함하여 69명이 탔으며[13] 탑승객 60명 중 4분의 3이 바시코르토스탄 공화국 학생이었다. 이들은 바시코르토스탄 공화국 지역 유지들의 자녀들로,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위치한 유네스코 위원회로 수학여행을 가던 길이었다. 본래 이들은 셰레메티예보 국제공항에서 아에로플로트 비행기를 타기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여행사 측의 실수로 도모데도보 공항으로 잘못 데려다 주면서 원래 비행편을 놓쳤다.[14] 이틀 후에 겨우 여행사 측에서 대체 비행편으로 마련한 것이 바로 바시키르 2937편이었다. 아이들이 한순간에 이 사고로 사망하자 바시키르 사회에는 상당한 충격이 몰아쳤다. 사고 이후 독일의 위버링겐 숲 속, 충돌지점 아래 지상에 피해자들을 위한 추모공원이 생겼다.

관제사 페테르 닐센은 이 사건으로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정확히 말하면 닐센은 스카이 가이드의 매니지먼트 잘못으로 인한 피해자였다. 닐센과 같이 일하고 있어야 했던 관제사는 밤이라고 옆방에서 쉬고 있었다. 물론 규정에 위배되는 행동이었지만 스카이가이드 측은 이에 대한 제재를 취하지 않았다. 즉, 두 명이 해야 될 일을 닐센 혼자서 워크스테이션 두 개를 돌아다니면서 처리해야 했던 것이다. 충돌 사고가 일어나기 몇 분 전에는 다른 항공기가 착륙을 하고 있었는데 하필 전화 시스템이 고장난 상황이어서 공항 측에 연락하는데 시간을 더 많이 소비해야 했다. 또한 다른 곳에서 충돌 경고를 알리는 전화를 받지 못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지상의 충돌 감지 경보마저도 레이더 점검으로 인해 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충돌위험이 있는 상황에서 DHL 611편에는 아무런 경고나 확인을 하지 않고 충돌이 일어난 이후에도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완전히 방치하는 등 관제사로서 명백한 실책을 저지른 것 또한 분명하다. 충돌을 방지하는 조치를 취하기에 1분은 충분한 시간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닐센이 바시키르 기에 하강하라는 지시를 하고는 문제가 해결되었다면서 자리를 뜨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행동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다른 항공기를 관제하고 있다고 해도 충돌위험이 있는 항공기들을 이런 식으로 안이하게 취급해서는 안 되었다.

페테르 닐센은 이 사고 후 다시는 관제사로 돌아오지 못했지만 꾸역꾸역 회사는 다녔다. 닐센은 관제업무가 아닌 다른 백 오피스 업무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인해 우울증에 걸려 취리히 근교의 집에 틀어박혀 지냈다. 그렇게 지내던 중 2004년 2월 이 사고 피해자의 유가족인 비탈리 칼로예프(Виталий Калоев)에게 살해당했다.[15] 칼로예프는 러시아 연방 북오세티야 공화국 사람인데 칼로예프의 부인과 두 자녀는 수학여행단은 아니었지만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일하고 있었던 칼로예프를 만나기 위해 해당 비행기에 탑승하여 그들과 같은 운명을 맞았다. 칼로예프는 수색대가 아직 딸의 시신을 찾지 못한 것을 알고 직접 현장을 헤매다가 결국 자신이 딸아이의 시신을 스스로 안고 돌아와야 했다. 이후 우울증에 빠져 가족들의 묘지를 떠나지 못할 정도로 사실상 폐인이 되었다.[16]

칼로예프의 진술에 의하면 수소문 끝에 찾아간 닐센의 집에서 신경질적인 응대를 당하고 거기다 사망한 자녀의 사진이 바닥에 던져진 것에 격분해 칼을 휘둘렀다고 한다. 칼로예프는 자신이 행한 것은 복수가 아니라 (사고 관련자들이 제대로 처벌받지 않고 있었던 상황에 분개한) 처벌이었다고 주장했으나 엄밀히 말해 이 시점에서는 공식적인 사고조사 보고서가 나오지 않았으므로 법정의 재판 역시 결과가 나오기에는 이른 시점이었다.[17] 페테르 닐센은 살해당할 당시 아내와 어린 세 자녀가 있었다.

이후 칼로예프는 2005년 스위스 법원에 의해 8년형을 선고받았다가 사건 당시 정신상태[18]를 참작하면 판결이 올바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4분의 1인 2년만 복역하고 가석방되었다. 칼로예프는 고향에서 암암리에 영웅 대접을 받았으며 귀국하자마자 얼마 지나지 않아 북오세티야 공화국건설부 차관으로 임명되기까지 했다.[19] 2018년에 칼로예프의 이야기를 담은 "Unforgiven (Непрошенный)"이란 영화가 개봉되었다.

한편 스카이 가이드 역시 비난의 대상이었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업무량 분산 등 관제 센터 규정이 변경되었다. 또 ICAO도 세계적으로 비난을 받다가 이 사건 이후로 TCAS와 관제사의 명령이 상반될 경우 조종사는 무조건 TCAS를 따르는 것으로 규정을 변경했다.

항공 사고 수사대 시즌 2에서 죽음의 교차점(Deadly Crossroads)이라는 제목으로 다루었으며 사상 최악의 참사에서도 소개되었고 한국에서는 2015년 5월 10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와 2016년 2월 21일자 EBS 세계의 눈에서 방송되었다.

비탈리 칼로예프의 위 이야기를 토대로 한 영화 《애프터매스》가 2017년 개봉했다. 페테르 닐센에 대응하는 역인 제이크 보네이노스를 스쿠트 맥네어리가, 비탈리 칼로예프에 대응하는 역인 로먼을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연기했다. 하지만 1천만 달러 수준 제작비로 만들어진 저예산 영화였음에도 100만 달러조차 벌지 못하고 2차시장으로 밀려났다.[20]

또한 과실이 전혀 없었음에도 이 사고로 이미지가 나빠진 바쉬키르 항공은 결국 2007년 5월 파산하고 말았다. 그나마 이후 바쉬키르스텐 항공이 뒤를 잇다가 모기업인 VIM 항공이 파산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2007년 9월 스위스 법정은 관제 회사인 스카이 가이드 직원 4명 에게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유죄를 선고 하였다.

먼저, 야간 근무 시 항상 2인 1조로 관제사 2명이 근무 해야 한다는 규정을 무시 하고 관제사 1명만 단독 관제 하도록 사실상 묵인 했던 관리자 3명은 집행유예 1년을 선고 받았다.

사고 당일 보수 작업을 감독 했던 프로젝트 감독도 처벌을 피할 수 없었으며 이 사람은 스위스 화폐로 13500프랑 (한화 약 2천만원) 의 벌금형을 선고 받은 것으로 사건이 종결이 되었다.[21]

5.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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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만 이 영상에 나오는 바시키르 항공의 CVR은 가짜로 밝혀졌으며 아래 영상의 CVR이 진짜이므로 속지 말자.[2]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바시코르토스탄 공화국우파를 허브로 하던 항공이었다. 이 사건 이후로 경영난에 시달리다 2007년 파산.[3] Tu-154 기종은 다른 항공기와 달리 비행기록 블랙박스가 조종실에 내장된 구조여서 비행기가 두 동강 나며 조종실이 추락하기 시작한 이후에도 녹음이 끊기지 않고 계속될 수 있었다. 3분 33초부터 충돌 이후의 조종실 녹음본이다. 기체가 두 동강 나며 공중분해되면서 나는 굉음과 조종실을 포함한 기수가 낙하하면서 들리는 바람소리, 급격한 하강으로 인해 조종사들이 기절하는 소리가 그대로 녹음되어 있다. 상당히 섬뜩하므로 재생에 주의를 요한다.[4] 2003년 10월 16일 운항을 중단한 독일의 차터항공사이다.[5] 후술하겠지만, 당시 러시아 항공업계에서는 관제사의 판단과 지시가 조종사의 판단과 지시보다 우선시되는 경향이 있었다. 사고 원인 분석에 참여한 러시아 측 항공전문가들 전원이 "내가 2937편 조종사였어도 TCAS보다 관제사의 지시에 따랐을 것"이라며 "사고기의 조종사들이 내린 결정을 이해한다"는 반응을 보일 정도였다. 이 사고의 원인이 조종사들의 과실이 아닌 관제사의 과실로 결론이 난 결정적 이유다.[6] 영상에서 보이는 제일 밝은 부분은 충돌 부분이고 두 개로 나뉘어져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바시키르 2937편이다.[7] 대부분은 국토교통부 8급 항공관제직, 군(주로 대한민국 공군)에서 관할하는 일부 시설 종사자는 각군 소속으로 임관한 직업군인이다. 지금은 항공병 T/O가 줄어들어 항공병들은 배속되지 않으며 과거 항공병들이 관제탑에서 근무하는 경우가 일부 있었을 때에도 관제를 맡기지 않았다. 게다가 리얼입대 프로젝트 진짜 사나이가 방영되었을 때에도 공군 편은 촬영되지 않은 가장 큰 이유가 전문성 때문이었다.[8] 보통 항공기가 공항에 가까워지면 관제탑에 관제권을 이양하지만 이때는 시스템 점검과 고장으로 인해 전화망이 단절되면서 계속 관제를 해야 했던 것이다. 접근관제는 항공기의 고도, 속도, 방향을 꾸준히 모니터하면서 지시를 내려 줘야 하기 때문에 항로상을 일정한 속도로 이동하는 항로관제에 비해 신경 쓸 일도 많고 지시할 것도 많다.[9] 주 레이더를 점검하고 백업 레이더가 켜져 있었는데, 백업 시스템에는 해당 기능이 없었던 것. 작동 중이었다면 충돌 2분 전에 알 수 있었다.[10] 공군 출신이 대부분인 러시아 조종사들은 무조건 관제사 지시에 따르곤 한다. 러시아 공군은 기본적으로 강력한 지상관제체제를 따른다. 미 공군의 가상적기(어그레서) 비행대에서도 이런 교리를 재현하기 위해 훈련시 파일럿들은 지상관제에 복종하다시피 움직인다. 이것이 걸프 전쟁이나 이라크 전쟁에서 미군이 토마호크 미사일로 지상시설을 초토화하자 소련식 항공체계와 전술을 갖춘 후세인 치하 구 이라크군이 꼼짝 못하고 제공권을 내 준 원인이기도 했다.[11] 두 지시가 동시에, 그리고 충돌 48초 전에 들어왔기에 순간적인 판단에 따라야 했고 이에 규정대로 대응한 것이다. 더군다나 당시 바시키르 2937편은 회사의 수석기장이 기장을 비행평가하고자 부기장석에 앉아있었다.[12] 다만 정해진 항로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부득이하게 항공기 방향이 자주 교차할 수 있는 군용기들이나, 일부러 위험한 비행 묘기를 선보이는 에어쇼들은 예외.[13] 승객 60명, 조종사 포함 승무원 9명[14] 참고로 세레메티예보는 모스크바의 북쪽 끝에, 도모데도보는 남쪽 끝에 있다. 차가 자주 막히는 모스크바 외곽 도로 상황을 감안한다면 택시로도 3시간은 걸린다.[15] 본업은 건축가며 나름 그 지역에서 명망 있던 건축가였던 것으로 보인다.[16] 게다가 장례식에 참석한 ICAO 관계자들과 스카이 가이드 관계자들은 형식적인 사과만 한 뒤 유가족들을 피해 도망가기만 바빴다.[17] 이후 2010년에 와서야 스카이 가이드의 관련자들이 과실치사죄가 인정되어 벌금형에 처해지게 되었다.[18] 가족을 잃고 심각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19] 칼로예프는 재혼하여 아들과 딸의 아버지가 되었다.[20] 현실과 달리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가석방 되었다가 가족묘를 찾아갔다 피해자 아들이 복수하러 오자 이해 한다고 가족 곁으로 가려 했지만 만감이 교차한 아들이 난 할 수 있지만 하지 않는다 나는 그렇게 배우지 않았다며 복수를 포기한다.[21] 이 사람은 매뉴얼을 무시한 관리자들과 하던 대로 했을 뿐이지만 그 결과 닐센이 가혹한 대가를 치뤄야 했기 때문에 이 사람에게도 책임을 묻긴 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