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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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3. 악용
4. 어록
5.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위선(僞善 / hypocrisy)은 문자 그대로 '거짓된 선'이며, 일반적으로는 "겉으로만 착한 척한다"는 뜻이다. 반대로 말하면 속은 착하지 않다.

위선을 행하는 사람을 위선자라고 한다. 비슷한 용어로 위군자라는 말도 있다. 말 그대로 속과 달리 군자인 척 하는 사람.


2. 상세[편집]


위선의 정의는 선으로 위장한다는 것으로, 즉 악한 의도를 가리기 위해 고의적으로 선을 이용하는 것을 위선이라고 한다.

때문에 대부분 사람들이 잘못 표현하는게 그럴 의도가 아니였는데 어쩌다보니 나온 결과가 선을 추구하는 경우, 속칭 "위선도 선이다." "행동하는 위선이 낫다"며 칭송하는 경우가 꽤나 많은데, 이 경우는 악의를 숨길 목적으로 선을 이용한 경우가 아니였기 때문에 그냥 선이라고 해야지, 위선이라고 칭하는 건 완전히 틀린 표현이다.


혹자는 사람들은 위선자를 거짓말쟁이보다 더 싫어한다라고 하기도 한다. 위선은 악을 감추기 위해 사회를 속이는 것과 다르지 않으며, 이는 곧 누군가에게 피해를 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누구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확실히는 알 수 없으므로 위선자인지 위악자인지 명백히 가릴 수 없다. 예를 들어 길 잃은 아이를 도와주는 마피아는 위선자로 보일 수 있지만, 사실 증거를 모으던 경찰이라면 위악자였던 셈이 된다. 물론 이 경우는 경찰이 욕 먹을 건 감안하고 행동했을 것이다.

선의의 거짓말과는 다른 개념이지만 중첩될 수 있다.

내로남불과도 다른 개념이지만 중첩될 수 있다. 그 예로 아래 '어록' 문단에서 예수가 남의 티를 찾아 지적하는 자를 위선자라 칭한 경우가 있다.

이슬람 교리에서 위선은 최악의 중죄 중 하나로 취급받는다.

단테신곡 지옥편에서 위선자들은 겉은 금이지만 속은 납으로 된 무거운 옷을 입고 영원히 행진하는 벌을 받는다. 근데 납이 금보다 밀도가 작다.


3. 악용[편집]


(전략) 온유하심이 비길 데 없으니 예수라고만 하면, 사람들이 비둘기와 양을 연상한다. 이것이 예수의 일면인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다른 반면이 있으니 위선을 보실 때의 태도가 그것이다. 저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팔고 사는 사람을 내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의 교의를 둘러엎으시면서, 교통순사가 노방 상매를 정돈하듯이 난폭한 솜씨를 보이신 것은 너무도 유명한 사실이었지만(마태 21:12, 13), 그 밖에 서기관과 바리새교인들을 향하여 '화 있을 진저!'라는 저주를 속사포처럼 연발하신 것도(마태 23장) 전혀 외식하는 자, 곧 위선자를 대하여서다. 비둘기 같이 순하시고, 창기나 세리는 오히려 용납하시던 예수가 위선자를 대할 때만은 마치 동성의 자극이 반발하듯이 격퇴하지 않고는 마지 않으셨다. 가증한 것이 많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장 가증한 것, 아주 견딜 수 없이 가증한 것은 위선이었다. 따라서 성서를 읽는 자도 그리스도와 아울러 생각할 수 없는 것이 위선자인 줄 알게 되었다.

마는 위선자의 표본으로 지적받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언행을 상고하면 저들에게는 차라리 기특한 것이 많았다. 저들은 '말만 하고 행치 않는' 것이 결점이었으나(동 23, 3), 그 하는 말은 옳은 말이었으므로, 예수도 자기 제자에게 '바리새인의 명하는 말은 준행하라'고 가르치셨다(동 23, 2). 저희는 헛된 맹세로써 책임을 회피하려고 하였으나, 맹세란 것이 신성한 것인줄은 알았던 고로 지시할 물건을 고려하였다(동 23:16-22). 저희는 '잔과 소반의 거죽은 깨끗이 하되, 그 안은 토색함과 불의함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동23, 25)라고 책망받았으나 그래도 깨끗이 할 줄은 알았고 규모는 있는 사람들이었다. 저희는 선지자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의 비를 세움으로 책망받았으나(동 23, 29) 저희 스스로는 의인이 못 되면서라도 의인의 공적을 인식하는 안식만은 우리 조선 사람들보다 훨씬 나았다. 저희는 범사를 사람에게 보이려는 허영심으로 하였으나 그래도 선이라는 표준이 있는 백성이었다. 선을 행하지 못할 지라도 선을 행할 것이라는 도는 알았고, 이를 두려워할 줄은 알았었다.

돌이켜, 20세기의 문화를 자랑하는 현대인은 어떠한가? 현대인은 언행의 일치를 기하되 행실뿐 아니라 말까지도 선하지 않음을 귀히 여기며, 위선을 꺼려하는 고로 공연하게 불의를 말하고 비례를 행하면 도리어 솔직하고 철저하다는 사회의 찬탄을 받는 세상이다. 현대인은 도의의 기본을 파괴하고 선의 표준을 전복함으로써, 청천백일하에 불의를 감행하여, 위선의 필요성을 없이하였다. 오호라, 이제는 위선도 그리운 세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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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신 '위선도 그리워'(1933년 9월)


위선은 적을수록 좋으며, 따라서 위선에 대한 비판은 왕성하게 하는 게 필요하다. 하지만 사회나 타인의 위선을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하는 이기적 욕망 실현의 면죄부로 삼아선 안 된다. 트럼프는 성찰을 위한 극복의 대상이지, 모방을 위한 긍정의 대상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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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 칼럼 '위선을 위한 변명' 2017년 9월 24일 한겨레


'기레기'와 마찬가지로 현대 사회에서 위선이라는 용어도 남발, 악용되기 쉽다. '언행불일치'의 위선보다는 낫다고 자부하면서 '언행일치'를 말하지만 자신의 행동은 물론 말까지도 뻔뻔스럽게 과장, 거짓으로 부풀리고 치장해 놓고 그걸 '솔직' 내지 '용감함'으로 포장하는 사람들이 으레 자신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위선 떨지 말라"고 비웃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이런 경우 명백하게 그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치환시키는 것이 되며, 위선이라는 비판은 적절하지 못하다. [1]

심지어 도덕이네 뭐네 그런 걸 챙기는 것도 결국 자기 이익 위해서 아니냐고 냉소한다면, 어떤 중요한 문제를 뭔가 틀어졌을 때의 대책도 없이 그저 막연하고 천진하게 믿은 사람이 잘못 아니냐는 냉소도 충분히 가능하다. 사람 일은 결코 사람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 공자는 "온 세상 사람들이 칭송하는 사람이라도 한번쯤은 의심해 봐야 하고, 온 세상 사람들이 비난하는 사람이라도 한번쯤은 되돌아 봐야 한다"라고 말했던 적이 있다. 나는 그 사람을 믿고 있었는데 배신이나 당했다며 호소하는 사람은 말 좀 험하게 보태면 순전히 그 사람을 믿으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았던 '나 세상살이 못하는 얼간이'라고 광고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본 항목에서는 "악한 의도를 가리기 위해 고의적으로 선을 이용하는 것"을 위선이라고 한다고 설명했지만, '악한 의도'라는 말을 하기 전에 사람의 본성은 선인가, 악인가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의 본성이 악이라면 '악한 의도'를 굳이 구분할 필요가 없고 악한 본성을 가진 인간은 애초에 선한 의도로 무언가를 생각하고 행동으로 옮길 수 없으니까. 물론 악행을 저질러 놓고 '대의를 위해서' 혹은 '더 큰 선을 위해서' 이런 식으로 둘러대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어 왔다. 동서고금의 '독재자'라 불리는 이들이 모두 그런 식이었고, 사람을 가스라이팅해서 제 이익 챙기는 인간들도 그런 부류의 인간에 속한다.

중요한 것은 '악한 의도를 가리기 위해서 고의적으로 선을 이용하는' 일체를 위선으로 부르고 부정하려 한 나머지, 그러한 선으로 분류될 만한 행동 전체에 대한 평가를 '위선'으로 낙인찍는 짓거리, 아울러 사람 앞에서 갖추는 표면적인 인상들(보통은 '사회성'이라고 부르는) 자체를 위선이고 가식이라고 냉소하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심지어 일제 시대를 살았던 김교신이 그런 인간들을 지적할 정도니 그 뿌리가 상당히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겉으로만 착한 척하는 것보다는 대놓고 악한 것이 낫다", "나는 가식 떠는 거 싫다", "싫은 것을 싫다고 말도 못 하냐", "혐오할 자유도 없냐" 이렇게 떠드는 인간들이 오히려 멋지다, 솔직하다, 사이다다 이런 식으로 칭송을 받으며, 반대로 그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다가 "위선 떨지 말라"며 역으로 공격당하기도 하는 일이 이미 일제 시대 식민지 조선에도 있었다는 소리다.

공리주의에서는 위선이 오히려 칭찬받을 만한 일이며, 적어도 비난받을 일은 아니라고 간주된다. 공리주의에서는 일반적으로 '옳은 행위'를 요구하는 규칙들이 제시되고, 선악의 판단은 의도가 아니라 실제 행위와 그 결과를 대상으로 한다. 그러므로 그 윤리체계에 따른다면 선해지기 위해서는 '규칙'들을 지켜야 하고, 그 결과는 '객관적'으로 관찰이 가능한 것이며(혹은 그래야만 하며), 여기에서는 '하는 척'이라는 개념이 존재할 수가 없다. 타인의 평가를 바라는 마음으로 싫은 것을 감추고 억지로 행동했다 한들 그 사람이 보여준 '행동'이 윤리적 판단의 자료가 되는 것이지 그 마음을 문제삼지는 않으며, 그 윤리체계 안의 선이란 일부러 작정하고 꾸민다고 해서 성공할 성질의 것도 아니다. 공리주의는 어떤 목적을 증진하는 행위를 '선한 행위'로 간주하고, 그 목적에 유용한 행위가 선이다. 이때 윤리적 판단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그 목적에 이바지하는 행위이다. 공리주의 체계에서 선과 위선의 구별은 의미가 없다. 선인이 아무리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한들 그 선인의 선함이 도덕적으로 선하다고 '인증'받을 때는 그가 선한 행위(즉 공공의 이익이라는 목적에 이바지하는 행위)를 실제로 보여주었을 때이고, 오직 '행동'만으로 판단하므로 그 마음에 따라서 달라질 위선자와 선인의 차이는 의미가 없다.

그리고 그러한 '위선'을 지속하는 한, 즉 그 마음이 어떻든 '선한 행위'를 지속하는 한, 철학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그는 의도가 어쨌든 윤리적인 사람으로 간주된다. 순자는 "인간은 악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그것을 예의와 교육으로 끊임없이 교화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애초에 인간이 자기밖에 모르고 자기 이익을 우선시하는 추악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다 한들, 그렇다고 "난 원래 이런 놈이니까"라고 될 대로 되라 식으로 자포자기해서 스스로 무언가 윤리적으로 변화되기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2] 개인적 욕망에 사로잡혔을 망정 그것을 감추고 사회의 공인된 가치를 지키려는 행위가 위선(僞善)이라는 것이 순자의 설명이다. 사이비라는 고사성어의 유래가 된, 바깥으로 보이는 모습은 나무랄 데 없지만 드러내지 않는 속내가 따로 있는 사람 즉 위선자들을 맹자는 '향원(鄕原)'이라 부르며 경멸했지만, 순자처럼 인간들을 이기심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로 보는 관점에서는 향원은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대상이 아닌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고 그러한 자연적 여건 속에서도 공공선을 실천해 나가는 '노력가'라고 할 수 있다. 공리주의나 순자의 윤리설은 인간이 이기심을 갖고 있으되 그 이기심에 마냥 굴복하지 않고 그 이기심의 유혹 속에서도 공공선을 위해 분투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이기심과의 갈등에서 이기심을 이기고 선한 행동을 택할 때 순자나 공리주의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칭찬받을 만한 행위가 되는 것이다.

강준만은 2016년 7월 24일자 한겨레 칼럼 '위선의 종언'에서 "개인적 차원에서 저질러지는 위선일지라도 그 위선은 전체 사회가 지켜야 할 도덕적 규범을 강조하는 의미를 갖기에, 공적인 차원에서의 위선은 필요악과 같다. 우리가 위선자를 비판하는 이유도 언행일치가 안 된다는 것일 뿐, 그 위선의 메시지 자체를 비판하는 건 아니잖은가."라고 지적한다. 강준만은 이 칼럼에서 "문명 사회일 수록 광신(狂信)보다는 위선이 더 발달하게 되어 있고, 공적 영역에선 위선이 필요악인 경우가 많다"고 단언하면서도 위선이 '사회적 매너리즘'이나 '관행'으로 굳어지는 경우를 경계한다. 일단 차별에 반대한다는 원론적인 말을 하면서도 그 차별에 대한 반대를 구체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적어도 그러한 의지를 행동으로 실현해 보이려는 대신 '관행이니까', '남들 다 그러니까' 식으로 넘어가려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을 지적한다. 위선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이른바 언행불일치란 이런 경우를 가리킨다.

그러나 언행불일치에 대한 비판을 감안하더라도, 철학 내지 정치학에서는 위선을 마냥 그렇게 배제되어야 될 악덕으로 치부하지는 않는다. 그리스에서는 악인이라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평생 선을 가장하고 살았다면 그것은 선한 사람이라고 보았고, 미국의 신학자이자 정치학자인 라인홀드 니부어는 "국가의 가장 현저한 도덕적 특징은 위선이다"라고 단언한다. "위선은 악에게 선이 바칠 수 있는 최고의 경의"라는 말도 같은 맥락에서 온 것이다.

강준만도 지적한 것이지만 세상에 위선 없는 인간과 위선 없는 사회는 원초적으로 불가능하고, 사람은 결국 누구나 어느 정도는 내로남불을 가지고 살 수밖에 없고 사람들 앞에서 착한 인간이라는 가면을 쓰고 살 수밖에 없다. 인간관계에서는 이런 일이 굉장히 많이 일어난다. 그게 어쩌다 '삑사리'가 나는 상황이 터져서 가면이 드러나고 지금까지 다 위선이었느냐고 매도당하는 상황으로 이어지는 것 뿐이지만, 그 가면이 드러나기 전에는 크든 작든 사람은 다른 사람 앞에서 보이는 모습, 사회에서 활동하기 위한 '영업용 얼굴'을 다 한두 개씩은 가지고 있다. 그리고 내 행동을 좋게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본 항목에서처럼 '위선 떨고 있네', '가식 부리고 있네' 식으로 비아냥거리는 인간들은 널리고 널렸다. 괜히 드라마 검블유에서 민홍주 대표의 대사로 "나도 누군가에게 개새끼였을 수 있다"는 말을 한 게 아니다. 본의와 상관없이 사회에서 어떤 한 가지 행동으로 인해 위선으로, 혹은 위악으로 분류되는 일은 인간관계에서는 흔한 일이다.

마음 속에서는 오만 더러운 감정이 일어도 일단 사회적으로 보이는 기준 내지 본인의 체면이라는 게 있으니까, 그리고 저질러놓고 난 뒤의 뒷감당도 생각해야 하니까 등등의 이유로 악행을 저지르지 않는 것과, 악행을 저질러 놓고 어떻게든 아닌 척 덮으려고 하는 것은 분명히 다른 문제다. 강준만도 지적한 것이지만 세상에 위선 없는 인간과 위선 없는 사회는 원초적으로 불가능하고, 사람은 결국 어느 정도는 가면을 쓰고 살 수밖에 없다. 나한테 욕 하는 사람에게 분노를 느끼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걸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찍어누르면서 분노하지 않은 척 평온하게 사람을 대하는 것도 엄밀하게는 '악한 의도를 가리려 선을 이용하는 것'이므로 위선의 범주에 들 것이다.

본 항목에서 '사람들은 위선을 거짓말쟁이보다 싫어한다'고 하지만, 그럼 자신의 문제에 대놓고 거짓말하는 인간이 차라리 본심은 숨기고 대답하는 위선자보다 더 낫겠냐, 본인 감정이 상하든 말든 있는 그대로 대놓고 뭐라고 말해도 그걸 솔직하다고 넘어갈 수 있느냐는 질문은 그렇게 쉽게 무 자르듯이 대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위선'에는 엄연히 상대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마찬가지로 그게 본인에게 이익이 되기도 하니까) 본인의 감정을 숨기고 자신의 본심을 최대한 돌리고 돌려서 상대에 대한 예의를 차리는 척 포장하는[3] 사례도 존재하며, 상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겉으로는 예의를 갖춰 정중하게 대우한다고 그걸 위선이라고 욕하는 것은 오히려 사회에서 자기 살만 깎아 먹는 짓밖에 되지 않는다. 혹자는 그것도 '교활한 위선'이라고 부를지 모르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자기 생존을 위한 처세술의 어두운 면일 뿐이지 그런 행위 자체가 무작정 부정한 것으로 간주, 매도될 이유는 없다.

위선을 문자 그대로 '선한 척 가장하는 행위' 일체로 정의해서 '본심은 그렇지 않으면서 겉으로는 그런 척 하는' 것 자체를 '위선'이라며 부정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결코 현명하지도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 어떤 사람 앞에서 자기 속내를 숨겼다는 것 자체를 위선으로 봐서는 곤란하다. 행동하는 위선은 선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악은 아니다.[4] 자기 만족이든 자신의 이득이라서 하는 행동이든 그러한 위선으로 인해 누군가는 도움을 받게 된다면 악보다는 나을 수밖에 없게 된다. 그리고 본심이 어떠하든 '위선'이라는 행위 방식을 택하고 있는 한 그에게 무언가 개선을 요구할 타협의 여지가 있다는 점에서 절대 악에 비하면 융통성, 개선의 여지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위선이 권장될 선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마냥 배격되어야 할 악은 아니다. 철학이나 정치학에서 위선을 악으로 분류하면서도 마냥 배척하지만은 못하는 이유다.

4. 어록[편집]


"위선은 악행이 선행에게 바치는 경의이다(Hypocrisy is a homage that vice pays to virtue)"

-프랑수아 드 라로슈푸코


"달콤한 말을 하고 보기 좋게 표정을 짓는 사람들 가운데, 어진 사람은 드물다.(巧言令色, 鮮矣仁.)"

공자[5]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신약성서> 마태복음 6:1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 받지 않는다.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 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형제에게 가만,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

예수[6]

[7]


자기 포기는 위선이다.

로망 롤랑(프랑스의 작가)


뜻대로 될 때에 위선을 부리는 자는 없다.

S. 존슨(영국의 문학자)


5.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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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빅토리아 시대 영국 여왕 빅토리아의 부군이었던 앨버트 공은 그 자신의 행동이나 인품에 있어서 결코 나무랄 데가 없는 사람이었지만, 일찍 일어나고 일찍 일어나는 규칙적인 생활에(당시 영국 상류층은 밤새워 파티하고 놀다 새벽에야 자는 것이 일상이었다) 정부 한 명 두지 않고(당시 상류층이면 본부인 외에 정부 한두 명 두는 것 정도는 그렇게 비난받을 일도 아니었다), 심지어 복도를 지나다 청소하는 하녀에게까지 "방해해서 미안합니다. 저는 신경쓰지 마세요"라고 일일이 모자 벗고 예의를 차렸는데, 그런 앨버트 공을 당시 영국에서는 '차가운 샌님' 또는 '사이비 현학자'로 조롱하기 일쑤였다. 윤치호도 처음에 독립운동에 투신했다가 변절해서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된 주제에 일제 패망이 뻔히 보이는 순간까지도 일본 편을 들며, 해방 이후에는 "조선의 독립은 독립운동가들이 아니라 미국 등 힘 있는 국가들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독립운동가라는 것들은 뭐 하나 한 것도 없으면서 자기들 덕분에 조선이 독립된 것마냥 잘난 척한다"고 독립운동가들을 위선자라고 매도하며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2] 자포자기는 순자뿐 아니라 맹자도 부정적으로 보았다.[3] 고려 시대 이규보수필 가운데는 '이상자대'라고 해서 악한 사람을 향해 "만인을 기쁘게 하실 분"이라고 말하는 관상쟁이 이야기가 나오는데, 왜 그렇게 악인에게 아첨을 떠느냐는 이규보의 물음에 관상쟁이는 그런 악한 사람이 뒈지기라도 하면 만인이 '그놈 참 잘 뒈졌다'며 기뻐 좋아할 테니 '만인을 기쁘게 하실 분'이라고 한 것이라고 대답한다. 이 관상쟁이의 말도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았을 뿐 엄연히 사실 그대로 말하지는 않았으므로 넓게는 거짓말의 범주에 든다.[4] 본 항목에서는 '그럴 의도가 아니였는데 어쩌다보니 나온 결과가 선을 추구하는 경우가 행동하는 위선이라고 오해받는다'고 쓰면서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몰랐을 뿐 악의를 숨길 목적으로 선을 이용한 경우가 아니었다고 두둔하고 있지만, 엄연히 공적인 이익이 나 개인의 이익으로 돌아올 수도 있다는 판단 역시 하나의 '꿍꿍이속'이며 그러한 '꿍꿍이속'을 가지고 선한 행위를 추구하는 것도 행동하는 위선의 범주에 속한다.[5] 하지만 공자는 "모두가 선하다고 칭찬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한 번은 의심해 보고, 모두가 악하다고 비난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한 번은 되돌아봐야 한다"는 말도 했다.[6] 마태오 복음서 7장 1-5절[7] 이 "너희가 남을 심판하는 잣대로 너희도 똑같이 심판받을 것" 운운한 예수의 말이 때로 악인들이 스스로를 포장하고 변명할 때 쓰이는 경우가 있다. 대표적으로 치치시마섬 식인 사건의 주범으로 패전 뒤에 전범재판에 회부되었던 요시이 시즈오(吉井静夫) 대령인데, 성경의 이 구절을 떠들면서 미군 니네들이 우리보다 뭐가 잘났다고 나한테 뭐라고 하냐는 식으로 증언을 거부했고, 그 보답으로 미군 헌병들의 알루미늄 배트 세례를 죽기 직전까지 듬뿍 받으며 뼈가 60개 넘게 부러져 고통 속에 신음하다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