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저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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禹州
영어 Yuzhou
허난성 쉬창시의 현급시. 관할 인구는 약 130만명으로, 도시 자체에는 60만여가 거주한다. 쉬창의 서북쪽 20km 지점, 화이허의 지류인 잉허 (颍河) 서안의 평지에 위치한다. 역사가 유구한 고장으로, 중국의 첫 왕조인 하나라의 발원지이자 한나라 (韓)의 수도인 양책이었다. 한 (漢)대에는 삼국지의 곽가, 순욱, 진군, 서서, 종요 등을 배출한 영천군 (颍川君)의 치소였다. 당대에는 명의 손사막이 주로 활약한 곳으로써 약도 (药都)라는 별칭이 더해졌다. 지금도 위저우의 주요 산업은 약초 재배업이다.
송나라 시기에는 4대 명자 중 하나인 균자 (钧瓷)로 유명했고, 특히 시가지 서쪽 15km 지점의 셴후진 (神垕镇)이 그 중심이었다. 금나라 대부터는 균주 (鈞州)로 불렸고, 명나라 대에 만력제의 피휘를 위해 우왕에서 유래한 우주 (禹州)로 명명되었다. 현급시에 맞지 않게 교통 여건이 상당히 좋다. 위저우역에는 정저우 ~ 핑딩산시로 이어지는 정충고속철, 쉬창 및 보저우로 이어지는 위보철도, 덩펑시로 이어지는 위덩철도, 핑딩산으로 이어지는 핑위철도가 지난다. 시가지 동쪽에 공항 건설도 추진 중이다. 서북쪽, 동북쪽 외곽에는 각각 후한 황릉과 명대 주왕릉이 있다.
하나라의 창건자 우왕이 황하 치수 사업의 공으로 일대를 분봉받았고, 그의 아들인 계왕이 균대 (鈞台)를 쌓아 천하의 제후들을 초대한 후 하 왕조의 수도로 선포했다고 전한다. 이로써 하읍 (夏邑)이라 불리게 되었고, 수경주에는 하정성 (夏亭城)으로 언급되었다. 비록 계왕은 후일 도읍을 산서의 안읍 (현 윈청시 샤현)으로 옮겼지만, 6대 군주 소강왕이 재차 현 시가지 서북쪽 10km 지점에 소강성을 쌓아 도읍하였다. (캉청촌, 康城村) 하를 멸하고 상나라를 세운 탕왕은 이왕삼각의 선례로 하 왕실을 하읍에 봉했다. 이후 상을 멸한 주문왕은 동생 강숙 봉 (위강숙)을 강 (康), 즉 소강성 일대에 봉하였다. 다만 강숙 봉은 얼마 후, 삼감의 난으로 상나라 왕실이 송에 봉해지며 비게 된 옛 조가 (현 허비시) 일대에 세운 위나라의 첫 군주로 취임하게 된다.
춘추시대에 일대는 정나라에 속했고, 역읍 (櫟邑)이라 불렸다. 다만 이후 진나라의 영토가 되었다가, 삼가분진 후 한나라의 수도로 정해지며 양책 (陽翟)으로 명명되었다. 기원전 375년 한나라가 정나라를 멸하고 그 수도였던 신정으로 천도했다가, 기원전 370년 재차 양책을 수도로 삼았다. 다만 신정 역시 공동 수도로 여겨졌다. 기원전 230년, 진나라 군대가 양책에 이르자 한왕 안이 투항했고, 이로써 한나라는 멸망했다. 진나라는 양책현 (陽翟縣)을 치소로 하는 영천군 (穎川郡)을 설치했다. 초한쟁패기 시절 한나라가 일시 부활했고, 기원전 202년 전한을 세운 한고제는 한왕 신을 양책에 봉하였다. 하지만 이듬해 한왕 신의 봉국 (한국, 韓國)이 산서의 태원으로 옮겨지며 예주 (豫州) 영천군 양책현에 속하였다.
후한 말엽 영천군에서는 종요, 종회, 진군, 서서, 곽도, 한복, 순우경 및 영천 순씨 명사들 (순욱, 순유, 순심) 등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특히 양책현에서는 곽가, 사마휘, 조엄, 곽혁 및 영천 신씨 명사들 (신비, 신평, 신헌영, 신창)이 출생하였다.[1] 192년 원술이 양책후로 봉해졌고, 이는 197년 그가 칭제에 나서며 삭탈된다. 196년에는 동남쪽의 허현이 수도인 허도가 되며 순식간에 영천군은 화북의 중심지가 되었고, 220년 조위의 건국과 함께 양책현은 사례교위부 (司隸校尉部) 하남군 (河南郡)으로 이관되었다. 서진 시기에는 예주가 사주 (司州)로 바뀌었고, 영천군의 서부가 양성군 (襄城郡)으로 분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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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로 유명한 셴후진 풍경
5호 16국 시기에는 후조-전진-후진의 지배에 이어 417년 동진의 유유가 허창-낙양 일대를 수복한 후 재차 예주로 편성되었다. 뒤이어 그가 건국한 유송에 속했으나, 유유 사후 422년에 북위가 정복하였다. 북위 말엽인 526년에 양책현의 남부가 양성현 (襄城縣)으로 분리되었고, 이는 현재의 샹청현으로 이어진다. 동위 시기인 539년, 양책현을 중심으로 한 양책군 (陽翟郡)이 신설되었다.[2] 다만 현이 하나 뿐이었기에 동북쪽에 황대현 (黃台縣)을 신설하였다. (현 궈롄현) 수나라 시기인 583년, 양책군은 양성군에 흡수되었다. 605년에는 황대현이 영천현 (쉬창시)에 흡수되었다. 이때 양책현은 예주부 (豫州部) 양성군에, 양성현 및 영천현은 영천군에 속했다. 606년 양성군은 여주 (汝州)로 개편되었고, 이듬해 다시 양성군이 되었다. 당나라 시기인 620년에는 서북쪽에 강성현 (康城縣)이 설치되었다가 629년 양책현에 흡수되었고, 양성군은 이주 (伊州)를 거쳐 여주로 흡수되었다.
662년, 양책현은 여주에서 낙주 (洛州)로 이관되어 하남부 (河南府)에 속했다. 843년, 양책현은 영천군의 후신인 허주 (許州)로 이관되었다. 후량 시기 허주에는 절도부인 광국군 (匡國軍)이 설치되었고, 후당~후주 시기에는 서경 (西京) 산하 충무군 (忠武軍)이 있었다. 송나라 들어 허주는 영창부 (颍昌府)로 승격되었고, 경서로 (京畿路)에 속했으나 12세기 초에는 수도권인 경기로 (京畿路)에 속하기도 했다. 금나라 들어 영창부가 폐지되어 허주로 돌아갔고, 양책 일대는 허주에서 분리되어 영순군 (颍顺軍)이 설치되었다가 1182년 영순주 (颍顺州)로 개편되어 남경로 (南京路)에 속했다. 동시에 양책현은 부곽현 (附郭縣)으로 개칭되었다. 1184년에는 하나라 시기 균대의 고사를 들어 영순주가 균주 (鈞州)로 개칭되었다. 원나라 시기인 1265년, 본래 정주 (鄭州)에 속하던 신정과 밀현이 균주 관할에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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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대 주왕릉
명나라 시기에도 개봉부 (開封府) 산하 균주였다가, 1575년 명신종 (만력제) 주익균의 피휘를 위해 우주 (禹州)로 개칭되어 현재에 이른다. 1643년 초엽 틈왕 이자성이 우주를 점령, 균평부 (鈞平府)를 설치하고 부곽현을 균평현 (鈞平縣)으로 개칭하였다. 1645년 청나라의 점령 후 개봉부 우주로 환원되었다. 1724년 우주는 직례주 (直隷州) 관할이 되어 산하에 신정, 밀현을 두었다. 1735년 우주는 허주부 (許州府)로 이관되었다가 1741년 개봉부로 환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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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저우역
1913년 신해혁명 후 우주는 우현 (禹縣)이 되어 예동도 (豫東道)에 속했다가, 이듬해 개봉도 (開封道)로 이관되었다. 1932년에는 하남 제1행정독찰구에 편성되었고 1946년에는 하남 12구 중 제1구에 속했다. 한편 1945년부터 공산당은 인근 농촌 지역을 장악해나갔고,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 위현은 허난성 쉬창전서 (许昌专署)를 거쳐 쉬창시에 속했다. 1988년 위현은 현급시인 위저우시로 승격되었고, 동시에 성직할현이 되었다. 1989년, 위저우는 뤄양 및 카이펑 등을 제치고 허난성의 첫 국가역사문화명성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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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禹州
영어 Yuzhou
허난성 쉬창시의 현급시. 관할 인구는 약 130만명으로, 도시 자체에는 60만여가 거주한다. 쉬창의 서북쪽 20km 지점, 화이허의 지류인 잉허 (颍河) 서안의 평지에 위치한다. 역사가 유구한 고장으로, 중국의 첫 왕조인 하나라의 발원지이자 한나라 (韓)의 수도인 양책이었다. 한 (漢)대에는 삼국지의 곽가, 순욱, 진군, 서서, 종요 등을 배출한 영천군 (颍川君)의 치소였다. 당대에는 명의 손사막이 주로 활약한 곳으로써 약도 (药都)라는 별칭이 더해졌다. 지금도 위저우의 주요 산업은 약초 재배업이다.
송나라 시기에는 4대 명자 중 하나인 균자 (钧瓷)로 유명했고, 특히 시가지 서쪽 15km 지점의 셴후진 (神垕镇)이 그 중심이었다. 금나라 대부터는 균주 (鈞州)로 불렸고, 명나라 대에 만력제의 피휘를 위해 우왕에서 유래한 우주 (禹州)로 명명되었다. 현급시에 맞지 않게 교통 여건이 상당히 좋다. 위저우역에는 정저우 ~ 핑딩산시로 이어지는 정충고속철, 쉬창 및 보저우로 이어지는 위보철도, 덩펑시로 이어지는 위덩철도, 핑딩산으로 이어지는 핑위철도가 지난다. 시가지 동쪽에 공항 건설도 추진 중이다. 서북쪽, 동북쪽 외곽에는 각각 후한 황릉과 명대 주왕릉이 있다.
2. 행정구역[편집]
- 준타이 (钧台) 가도
- 샤두 (夏都) 가도
- 한청 (韩城) 가도
- 추허 (褚河) 가도
3. 역사[편집]
하나라의 창건자 우왕이 황하 치수 사업의 공으로 일대를 분봉받았고, 그의 아들인 계왕이 균대 (鈞台)를 쌓아 천하의 제후들을 초대한 후 하 왕조의 수도로 선포했다고 전한다. 이로써 하읍 (夏邑)이라 불리게 되었고, 수경주에는 하정성 (夏亭城)으로 언급되었다. 비록 계왕은 후일 도읍을 산서의 안읍 (현 윈청시 샤현)으로 옮겼지만, 6대 군주 소강왕이 재차 현 시가지 서북쪽 10km 지점에 소강성을 쌓아 도읍하였다. (캉청촌, 康城村) 하를 멸하고 상나라를 세운 탕왕은 이왕삼각의 선례로 하 왕실을 하읍에 봉했다. 이후 상을 멸한 주문왕은 동생 강숙 봉 (위강숙)을 강 (康), 즉 소강성 일대에 봉하였다. 다만 강숙 봉은 얼마 후, 삼감의 난으로 상나라 왕실이 송에 봉해지며 비게 된 옛 조가 (현 허비시) 일대에 세운 위나라의 첫 군주로 취임하게 된다.
3.1. 고대[편집]
춘추시대에 일대는 정나라에 속했고, 역읍 (櫟邑)이라 불렸다. 다만 이후 진나라의 영토가 되었다가, 삼가분진 후 한나라의 수도로 정해지며 양책 (陽翟)으로 명명되었다. 기원전 375년 한나라가 정나라를 멸하고 그 수도였던 신정으로 천도했다가, 기원전 370년 재차 양책을 수도로 삼았다. 다만 신정 역시 공동 수도로 여겨졌다. 기원전 230년, 진나라 군대가 양책에 이르자 한왕 안이 투항했고, 이로써 한나라는 멸망했다. 진나라는 양책현 (陽翟縣)을 치소로 하는 영천군 (穎川郡)을 설치했다. 초한쟁패기 시절 한나라가 일시 부활했고, 기원전 202년 전한을 세운 한고제는 한왕 신을 양책에 봉하였다. 하지만 이듬해 한왕 신의 봉국 (한국, 韓國)이 산서의 태원으로 옮겨지며 예주 (豫州) 영천군 양책현에 속하였다.
후한 말엽 영천군에서는 종요, 종회, 진군, 서서, 곽도, 한복, 순우경 및 영천 순씨 명사들 (순욱, 순유, 순심) 등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특히 양책현에서는 곽가, 사마휘, 조엄, 곽혁 및 영천 신씨 명사들 (신비, 신평, 신헌영, 신창)이 출생하였다.[1] 192년 원술이 양책후로 봉해졌고, 이는 197년 그가 칭제에 나서며 삭탈된다. 196년에는 동남쪽의 허현이 수도인 허도가 되며 순식간에 영천군은 화북의 중심지가 되었고, 220년 조위의 건국과 함께 양책현은 사례교위부 (司隸校尉部) 하남군 (河南郡)으로 이관되었다. 서진 시기에는 예주가 사주 (司州)로 바뀌었고, 영천군의 서부가 양성군 (襄城郡)으로 분리되었다.
3.2. 중세[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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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로 유명한 셴후진 풍경
5호 16국 시기에는 후조-전진-후진의 지배에 이어 417년 동진의 유유가 허창-낙양 일대를 수복한 후 재차 예주로 편성되었다. 뒤이어 그가 건국한 유송에 속했으나, 유유 사후 422년에 북위가 정복하였다. 북위 말엽인 526년에 양책현의 남부가 양성현 (襄城縣)으로 분리되었고, 이는 현재의 샹청현으로 이어진다. 동위 시기인 539년, 양책현을 중심으로 한 양책군 (陽翟郡)이 신설되었다.[2] 다만 현이 하나 뿐이었기에 동북쪽에 황대현 (黃台縣)을 신설하였다. (현 궈롄현) 수나라 시기인 583년, 양책군은 양성군에 흡수되었다. 605년에는 황대현이 영천현 (쉬창시)에 흡수되었다. 이때 양책현은 예주부 (豫州部) 양성군에, 양성현 및 영천현은 영천군에 속했다. 606년 양성군은 여주 (汝州)로 개편되었고, 이듬해 다시 양성군이 되었다. 당나라 시기인 620년에는 서북쪽에 강성현 (康城縣)이 설치되었다가 629년 양책현에 흡수되었고, 양성군은 이주 (伊州)를 거쳐 여주로 흡수되었다.
662년, 양책현은 여주에서 낙주 (洛州)로 이관되어 하남부 (河南府)에 속했다. 843년, 양책현은 영천군의 후신인 허주 (許州)로 이관되었다. 후량 시기 허주에는 절도부인 광국군 (匡國軍)이 설치되었고, 후당~후주 시기에는 서경 (西京) 산하 충무군 (忠武軍)이 있었다. 송나라 들어 허주는 영창부 (颍昌府)로 승격되었고, 경서로 (京畿路)에 속했으나 12세기 초에는 수도권인 경기로 (京畿路)에 속하기도 했다. 금나라 들어 영창부가 폐지되어 허주로 돌아갔고, 양책 일대는 허주에서 분리되어 영순군 (颍顺軍)이 설치되었다가 1182년 영순주 (颍顺州)로 개편되어 남경로 (南京路)에 속했다. 동시에 양책현은 부곽현 (附郭縣)으로 개칭되었다. 1184년에는 하나라 시기 균대의 고사를 들어 영순주가 균주 (鈞州)로 개칭되었다. 원나라 시기인 1265년, 본래 정주 (鄭州)에 속하던 신정과 밀현이 균주 관할에 놓였다.
3.3. 근세[편집]
파일:균주 (1).png
명대 주왕릉
명나라 시기에도 개봉부 (開封府) 산하 균주였다가, 1575년 명신종 (만력제) 주익균의 피휘를 위해 우주 (禹州)로 개칭되어 현재에 이른다. 1643년 초엽 틈왕 이자성이 우주를 점령, 균평부 (鈞平府)를 설치하고 부곽현을 균평현 (鈞平縣)으로 개칭하였다. 1645년 청나라의 점령 후 개봉부 우주로 환원되었다. 1724년 우주는 직례주 (直隷州) 관할이 되어 산하에 신정, 밀현을 두었다. 1735년 우주는 허주부 (許州府)로 이관되었다가 1741년 개봉부로 환원되었다.
3.4. 근현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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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저우역
1913년 신해혁명 후 우주는 우현 (禹縣)이 되어 예동도 (豫東道)에 속했다가, 이듬해 개봉도 (開封道)로 이관되었다. 1932년에는 하남 제1행정독찰구에 편성되었고 1946년에는 하남 12구 중 제1구에 속했다. 한편 1945년부터 공산당은 인근 농촌 지역을 장악해나갔고,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 위현은 허난성 쉬창전서 (许昌专署)를 거쳐 쉬창시에 속했다. 1988년 위현은 현급시인 위저우시로 승격되었고, 동시에 성직할현이 되었다. 1989년, 위저우는 뤄양 및 카이펑 등을 제치고 허난성의 첫 국가역사문화명성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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