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창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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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태평천국 운동 이전의 삶
3. 태평천국 운동에 가담하다
5. 형제에게 핍박 당하다
6. 천경사변(天京事變)
8. 평가
9. 기타


韋昌輝
병음: Wei Changhui, 웨이창후이
(1823 또는 1826 ~1856.11.2)


1. 개요[편집]


태평천국의 지도자로 정식 명칭은 후호우부군사북왕(後護又副軍師北王)이다. 북왕(北王)으로 알려져 있다.


2. 태평천국 운동 이전의 삶[편집]


본명은 위정(韋正)이며 위지정(韦志正)이라고도 불렸다. 위창휘(韋昌輝)라는 이름은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난 후 개명한 것이다.

부계는 객가 출신이며 모계는 좡족 출신이다. 객가 출신이지만 정확한 본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광서성 계평(桂平) 금전촌(金田村) 출신인데 위창휘의 아버지인 위원개(韋元玠)는 현지에서 유명한 졸부였다. 매년 60,000석을 수입으로 거둘만큼 거부였는데 장사, 소 판매, 기름 판매, 고리대금업을 하여 부유해졌다고 한다.

다만 위원개와 위창휘는 흉년이 들면 공익사업을 해서 식량을 나눠주고 구휼소를 여는 등 금전촌 내에서는 상당히 명망있고 평판이 좋은 편이었다.

의식주에 부족함이 없었기에 당연히 위창휘는 출세를 바랐고 과거 시험을 몇 차례 치렀는데 모두 불합격했다. 명예에 대한 욕심이 있던 위창휘는 뇌물을 돌려서 감생(監生)[1]의 자리를 얻었는데 당연히 돈으로 얻은 자리라서 과거에 합격한 만큼의 명예는 얻지 못했다.

오히려 졸부인데다가 돈으로 명예를 얻으려한 것 때문에 그를 안좋게 보던 토호들이 위창휘의 집안을 멸시하기 시작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위창휘가 돈을 내고 감생을 산 후에 대문에 '성균진사'(成均進士)라 적힌 편액을 걸어놓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집안과 원한이 있는 사(謝)씨성의 지주는 밤에 편액의 '성균' 두 글자를 지워버리고. 다음 날 사람들 앞에서 이것은 거짓이라고 말하면서 편액을 부숴 버렸다고 한다. 위씨 집안의 부녀들이 물을 길러 나가면 그들은 고의로 '진사부인'이라고 놀리며 웃음감으로 삼았다. 당연히 위창휘와 위씨 집안의 체면은 바닥에 떨어졌는데 이 사건이 위창휘가 후에 보이는 잔혹하고 명예에 집착하는 모습을 빗어낸 것으로 추측된다.


3. 태평천국 운동에 가담하다[편집]


떨어진 체면을 달고 살던 위창휘는 운명적인 만남을 하게 되는데 그 인물은 바로 풍운산이었다. 풍운산은 태평천국 전도 활동을 하다가 구속된 후 고향으로 추방됐었는데 1848년 10월 경에 근거지를 만들어둔 계평의 자형산(紫荊山)으로 돌아 왔었다. 이 때 우연히 위창휘의 집에 묵게 된 풍운산은 자신의 말빨과 설득 능력을 살려서 위창휘를 신도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했다.

풍운산이 위창휘를 설득한 방법은 그가 가진 명예욕을 간파하고 자극하는 것이었는데 위창휘가 배상제회 간부의 큰형 예수의 동생이며 홍수전을 포함한 형제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배상제회 (拜上帝會)라고 불린 태평천국은 자금을 대줄 물주의 역할을 할 사람이 필요했는데 부자인 위창휘는 물주의 역할에 딱 맞는 인물이었고 풍운산의 전도에 힘 입어 위창휘는 열렬한 신도가 됐다.

위창휘는 태평천국에 크게 찬동했고 자신의 동생인 위준을 포함한 가족 모두를 입교시켰고 또한 재산을 모두 공동창고인 성고(聖庫)에 기부하여 조직내에서 비중 높은 위치를 차지했다.


4. 태평천국 운동[편집]


조직 내에서 위창휘는 소조귀천형하범(天兄下凡)[2]에 의해서 정식으로 예수의 형제이자 하느님의 가족이라 인정 받았다. 이것은 풍운산의 권고에 따른 것이었는데 이로 인해서 위창휘는 핵심 간부가 됐고 또한 당시 태평천국의 정치적 구도로 보자면 소조귀의 파에 들어가게 됐다. 조직의 초창기에는 소조귀의 권위가 양수청보다 높았기에 위창휘의 실제 권위나 위세는 종교를 만든 홍수전, 풍운산을 압도할 정도였다.

1850년 7월부터 태평천국은 총동원령을 내려서 신도를 금전촌에 집결시켰고 무장 반란을 위한 준비를 했는데 위창휘는 자신의 집에 있는 12개의 철로(鐵爐)를 이용해서 철을 제련했다. 당시에 청나라의 관리나 지방 주민들이 태평천국을 수상쩍게 보고 있었기에 위장을 위해 낮에는 농기구를 만들고, 밤에는 무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주조한 칼과 창등을 마을 뒤에 있는 서우담(犀牛潭)에 넣어서 보관했다. 이 무기들은 반란이 시작될 때 우연히 발견 된것처럼 하여 하늘이 태평천국에게 무기를 내렸다고 선동하는데 활용 됐다.

1851년 1월 11일, 태평천국은 약 20,000명의 인원과 함께 태평천국의 난을 일으켰다. 반란이 일어나자 홍수전은 지휘를 위하여 스스로 천왕(天王)의 자리에 오르고 각 간부를 오군 주장(五軍 主將)에 봉하니 위창휘는 우군의 지휘를 맏았다. 반란은 일련의 과정들을 거쳐서 영안(永安)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쫓아온 청나라와의 영안성 남쪽 수두촌(水竇村) 전투에서 소조귀가 큰 부상을 입고 천형하범(天兄下凡)이 끊어지는 사태가 벌어진다. 부상 혹은 양수청의 압력에 의한 것이라 추측되는데 이 일을 계기로 양수청의 권력이 급부상하기 시작했고 소조귀와 가까웠던 위창휘는 양수청에게 밀리게 됐다.

홍수전은 기묘하게도 소조귀의 부상에 대해서는 말 없이 조직 정비에 나서는데 양수청은 동왕(東王)으로 봉해지고 구천세(九千歲)를 받았다. 소조귀는 서왕이자 팔천세를, 풍운산은 남왕이자 칠천세를, 위창휘는 북왕에 봉해지고 육천세를 받았다. 아직 20세 초반에 불과하지만, 전공이 큰 석달개는 익왕(翼王)에 봉해지고 오천세를 받았다. 그리고 홍수전을 제외한 모든 왕들의 지휘는 양수청이 맡게됐다. 이것이 12월 17일의 일이며 영안봉왕(永安封王)으로 불린다.

태평천국군은 1852년 4월 5일 밤에 영안성을 탈출하여 진군을 시작했고 위창휘 역시 중요 지휘관으로서 나섰다. 태평천국군은 계림 공략 실패, 전주(全州)[3] 점령 후 사의도(蓑衣渡)에서 풍운산을 잃고 장사 공략에 실패하고 소조귀를 잃는 등 고전했지만 기어이 호북성의 성도인 무창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정치적 라이벌인 풍운산소조귀가 전사하여 양수청의 입지는 올라가고 위창휘의 권위는 떨어져 갔다.

그 후 태평천국군은 양수청의 건의를 따라서 남경으로 향했고 1853년 2월 10일에 출발해서 3월 20일에 성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남경을 수도로 삼아 천경(天京)이라고 칭했다.

남경을 점령했지만 당시 상황은 좋지 못했는데 청나라는 당연히 태평천국을 제거할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이에 태평천국군은 베이징을 향한 북벌, 장강 일대의 무창, 구강(九江)을 향한 서정을 수행했고 남은 군대는 남경을 방어했는데 이 때 위창휘는 남경성의 수비 및 식량의 공급을 담당했다.

약 3년간 남경은 남경성 근교의 강남대영(江南大營)과 양주(揚州)의 강북대영(江北大營)이 가하는 압박을 견뎌야 했는데 위창휘는 양수청과 함께 방어에 성공했다. 1856년, 태평천국군은 기어이 강남대영과 강북대영을 크게 격파하는데 성공했는데 하지만 위창휘의 활약은 딱히 없었고 오히려 양수청이 총지휘를 하며 맹활약 하니 오히려 위창휘는 양수청의 권위와 위세에 더욱 눌리게 됐다.


5. 형제에게 핍박 당하다[편집]


양수청의 권위는 절정에 달해 있었는데 안정이 오자 오히려 홍수전을 포함한 많은 간부들을 압박하고 괴롭히기 시작했다. 이런 양수청의 횡포에 가장 많이 당한 인물 중 하나가 바로 위창휘였다. 이런 행동들은 양수청이 권위를 높이고 홍수전의 힘을 빼기 위해서 홍수전 주변 인물을 괴롭힌 것에서 연유된 것이었는데 그가 당한 것은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다.

  • 양수청은 홍수전에게 궁전내의 이 충분하니 더 이상 만들지 말 것을 권고했다. 위창휘는 홍수전 편을 들면서 반박했지만 오히려 양수청은 절약 정신을 보여야 한다면서 강하게 권고했고 홍수전은 양수청의 편을 들 수 밖에 없었다. 당연히 홍수전의 위신은 떨어졌고 위창휘는 면박만 당했다.

  • 양수청의 여종들이 그가 천부하범에 들어갔음을 알리는 북을 칠 때마다 달려와서 양수청이 하는 말을 들어야 했다. 조금이라도 늦을 경우 양수청의 여종 발 밑에 엎드려서 듣는 굴욕을 겪어야 했다.

  • 양수청이 가마를 탈 때 천부하범에 들어가 있다면 가마를 탈 수 없고 걸어가야 했다. 또한 천부하범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천부하범이 끝났는지 양수청의 시종들에게 물어야 했는데 그들은 위창휘를 무시하며 대답을 잘 하지 않았다.

  • 양수청에게 사적으로 태형도 당했다.

당시 양수청의 권위가 워낙 강했고 위창휘의 동생인 위준무창을 수비하러 나간터라 위창휘는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양수청은 아예 한 술 더 나가서 구천세(九千歲)를 받는 자신의 입지를 더욱 높이고자 했다. 홍수전만이 천왕으로서 만세(萬歲)를 받을 수 있었는데 이것을 바꾸고자 우선 걸림돌이 되는 석달개[4]호북성, 진일강[5]은 단양(丹楊), 위창휘는 서정군을 지휘토록 해서[6] 남창으로 보냈는데 오히려 이것을 기회로 삼아 위창휘는 복수의 때를 얻었다.


6. 천경사변(天京事變)[편집]


종교의 교주홍수전은 그간 참아왔지만 진성용(陳成瑢)[7]의 참소를 계기로 양수청을 드디어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홍수전은 양수청 제거를 위해서 석달개, 진일강, 위창휘에게 밀지를 내려서 불러 들였는데 위창휘는 직속 병사 3,000명과 신속히 회군하여 1856년 9월 1일 밤에 남경에 도착했다. 그리고 반격당할 위험을 줄이고자 9월 2일 새벽을 기점으로 양수청이 머무른 동왕부[8]를 공격했고 양수청을 죽이는데 성공했다. 또한 여기에 그치지 않고 동왕부의 인원들을 전멸시켰다.


7. 형제의 피를 자신의 피로 씻다[편집]


위창휘는 양수청 제거에 성공한 후 아예 후환을 없애기 위하여 미친 개처럼 날뛰는데 홍수전 역시 동조하거나 혹은 위창휘에게 눌려서 묵인한 것으로 보인다. 9월 3일, 홍수전은 소동을 일으킨 진일강, 위창휘공개처형하겠다고 공표하여 양수청의 세력을 한데 모은 후 군사를 시켜서 학살을 저질렀다. 화약까지 동원한 학살이였는데 대다수 희생자는 태평천국의 난 초기부터 따른 광서성 출신의 가난한 자들이었으며 작은 희망을 품고 가담한 자들이었다.

석달개는 9월 26일 밤에 귀환했는데 당연히 그는 위창휘에게 학살이 잘못됐다고 항변했다. 그런데 위창휘는 그간 쌓여온 것이 터졌는지 오히려 석달개를 역적이라 매도했다. 이에 석달개가 반발하자 위창휘는 석달개까지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석달개는 낌새를 채고 당일에 도망갔으나 위창휘는 석달개의 가족이 머무는 익왕부를 공격했고 석달개의 가족 역시 몰살당했다.

석달개가 귀환하기 전의 약 3개월간 위창휘와 진일강은 신고를 장려하여 양수청과 관련 있는 자들을 죽이니 약 40,000명이 죽는 등 위창휘는 선을 넘고 있었다.

약 3개월 후 안경으로 도망갔던 석달개는 약 10만의 군대를 이끌고 남경으로 돌아왔는데 그는 홍수전에게 사건의 책임자인 위창휘와 진일강을 죽이라고 요구했다. 위창휘는 반격하기 위해서 진일강을 석달개에게 맞서라고 보내고 자신은 남경에 머물면서 방어를 준비했다. 이 때 남경의 랜드마크였던 대보은사탑(大報恩寺塔)를 폭파시켜는데 이는 석달개가 이곳을 점령하면 성밖에 위치한 탑 꼭대기에서 성안 포격 타깃의 좌표를 따서 대포로 공격할 수 있다고 여긴 위창휘의 결단이 만든 결과였다.

한편 홍수전은 양수청에 이어서 위창휘 역시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위창휘가 날뛰는 것이 워낙 심해서 위협이 됐으며 석달개가 돌아오는걸 알아차린 위창휘가 홍수전을 감금시키려 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군재가 출중한 석달개를 달래는것이 필수였다.

기회를 보던 홍수전은 양수청의 잔여 세력과 자신의 정예 부대를 위창휘에게 보내서 죽여버리니 이것이 1856년 11월 2일의 일이었다. 위창휘는 모든 작위를 박탈당했고 태평천국 내에서는 흑역사 취급을 받았으며 목은 효수 당하여 석달개에게 화해의 제스쳐로 보내졌다.


8. 평가[편집]


위창휘는 배상제회 신도들을 경제적으로 지원하고 보호해 줌으로써 그들이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이후에 난징을 점령하고서도 그는 난징에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존재였다. 난징의 식량 조달을 담당했으며, 수비 역시 담당했으며 3년간의 포위에도 성을 지키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위창휘는 양수청에게 당한 원한과 타고난 명예에 대한 갈증으로 인해 무자비한 학살을 벌이고, 이를 비판한 석달개의 일족까지 멸살하는 등 학살자로 변해 버렸다.


9. 기타[편집]


  • 뜻밖의 기록을 가지고 있는데 석달개와 함께 중국 역사상 최초로 명함 교환을 한 인물로 꼽힌다. 1853년 4월 27일, 영국 군함인 HMS 허미즈(HMS Hermes)가 남경에 도착하였고, 영국 공사 조지 본햄은 남경에 도착했다. 당시 본햄은 태평천국의 실체를 파악하고 무역에 어떤 영향을 줄지 알아보기 위해 온 것인데 이 때 본햄과 위창휘, 석달개는 간단한 대화를 나누고 명함 교환도 했다고 전해진다. 다만, 태평천국군이 본햄과 일행들을 같은 기독교를 믿는다고 생각하여 우호적으로 대한 것과 별개로 양수청의 서한은 태평천국이 만민을 예속한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서 회담은 별 성과 없이 끝났고 4월 28일에 본햄은 떠났다.

  • 같은해 12월 6일, 이번에는 프랑스는 카시니(Cassini)호를 이끌고 역시 접견하러 왔지만 진일강과의 회담은 문화 및 관점 차이로 결렬됐다. 이 때 위창휘는 서한을 보냈는데 내용은 대략 자신을 방문하고 싶거든 내 허락을 받으라는 내용이었고 당연히 프랑스도 돌아갔다.

  • 모계가 좡족이여서 좡족 언어를 할 줄 알았다.

  • 직계는 아니지만 후손은 남아 있는데 동생인 위준이 형인 위창휘가 죽은 후 배신하고 청나라에 항복하여 위준의 자손은 안휘성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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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청나라에서 최고 국립대학의 위치를 가지는 국자감의 학생 자격[2] 예수가 소조귀에게 빙의하여 말씀을 내린다는 것.[3] 현재 취안저우 시[4] 군사적 능력을 두려워 했다[5] 홍수전과 친구 사이라 인연이 깊었다.[6] 증국번이 이끄는 군대는 여전히 장강 상류에서 태평천국군과 대치 중이었다.[7] 진승용(陳承瑢)이라고도 불리며 진옥성의 숙부[8] 당시 태평천국의 왕들은 각자의 부를 설치했는데 홍수전, 석달개, 위창휘, 양수청의 부는 남경성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