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충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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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명나라 말기의 환관으로 명나라를 유린한 간신이다. 위 삽화의 관모부터가 원래 환관은 못 쓰는 고관대작 전용이었다는 점에서 본 문서의 상당부분을 안 보고도 감 잡을 수 있을 것이다.
2. 나라를 가지고 놀다[편집]
위충현은 1568년 2월 27일에 하간부 숙녕현의 한 빈농 가정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위사(魏四). 젊었을 적에 집안이 너무 가난하여 글을 깨우치지 못하고 도박 노릇을 하며 살았다. 그가 어느 정도로 도박에 중독되었냐면 도박빚이 너무 많은 나머지 처를 버리고 딸을 팔면서까지 도박빚을 갚으려 했을 정도였다.
하루는 시정의 불량배와 도박을 하다가 판돈을 잃고 치욕을 당했다. 분풀이를 하고 싶었지만 무식하고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그가 할 수 있는건 없었다. 이렇게 한 평생 남에게 무시를 당하며 비렁뱅이로 살 바에야 차라리 환관이 되어 황궁으로 들어가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환관이 아무나 되는 게 아니었다. 환관이 되려면 고환을 훼손해야 하는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했다.[1] 그는 목숨을 걸고 자기 손으로 고환을 훼손했다. 이후 위충현은 만력 17년(1589년)에 사례병필태감 손섬의 수하로 들어갔는데, 이때 위사는 이름을 진충으로 개명했다.
진충은 무식했지만 머리가 비상하고 잔꾀를 부리며 윗사람의 눈치를 잘 살폈기에, 얼마 후 손섬의 눈에 띄어 황궁의 창고, 갑자고를 관리하는 책임을 맡았다.
진충은 황궁의 창고지기에 만족할 인물이 아니었다. 당시 환관의 우두머리는 왕안이었는데, 그는 천계제 주유교를 황제로 추대하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환관이었다. 왕안은 성품이 강직하고 정의감이 있었던 까닭에, 양심적인 동림당 계열의 대신들은 그가 환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진심으로 존경했다. 이런 신망이 두터운 왕안에게 인정을 받을 수 있다면 황실 내부로 한 걸음 더 내 딛을 수 있었다.
진충은 먼저 왕안의 측근 위조에게 아부하여 결의형제를 맺었다. 그 뒤 위조의 천거로 왕안의 문하로 들어간 진충은 왕안의 눈에 잘 보여서 주유교의 생모, 왕재인의 음식수발을 드는 전선의 직책을 맡았다.
진충은 왕재인에게 모든 인생을 걸었다. 그녀가 신분이 낮은 재인 출신이었지만 어쨌든 신종의 자손, 주유교의 생모가 아닌가? 훗날 주유교가 황위를 계승하는 날에는 왕재인이 태후로 등극할 가능성이 있었으므로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무슨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또한 진충은 주유교의 유모 객씨에게도 접근했다. 본 문서에 인용한 조천항해록 내용의 '객 내저'가 이 객씨이다. 그녀는 일개 유모로, 주유교가 어느 정도 나이가 차면 더는 필요가 없어지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주유교는 객씨에게 유모 이상의 미묘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 성인이 되고 황제가 되어도 객씨를 총애하여 그대로 자금성에 머무르게 했다고 한다.
눈치 빠른 진충이 두 사람의 관계를 감지했다. 객씨는 위조와 대식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이다.[2]
위조는 왕안과 주유교를 섬기느라 객씨를 돌볼 겨를이 없었다. 진충이 그 틈을 노리고 원래 위조의 여자였던 객씨의 몸과 마음을 사로잡아 나중에 가면 무슨 불륜관계로 발전해버려 둘은 천계제 몰래 간통까지 서슴치 않고 벌인다. 천계제는 이것도 모르고 그저 자신을 키워준 유모라고 떠받들고 있었다.
그런데 위충현은 엄연히 고자인데 대체 무슨 수로 객씨와 간통했는지에 대한 의문은 각자의 상상에 맡긴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보통 중국 환관과 달리 생식기가 남아있었다고 한다. 스스로 거세를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
훗날 그는 황제의 어명을 가탁하여 자신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결의형제 위조를 귀양 보내 죽이는 비열함을 드러냈다.
1620년인 태창 원년 9월 광종 태창제의 급작스러운 사망으로 졸지에 황위를 계승한 주유교는 객씨를 향한 연모의 감정이 꿈틀거렸다. 이제 더 이상 남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는 황제가 되었다. 내가 결정한 것이면 그것이 곧 국법이 되는 세상이었다. 그는 황제로 등극한 지 한 달도 못 되어 객씨를 봉성부인으로 책봉했다. 객씨 일족은 하루아침에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었다.
객씨의 정부 진충도 출세의 가도를 달렸다. 궁궐의 땔감을 관장하는 석신사에서 사례감의 병필태감으로 승진했다. 이 직책은 각 부 대신들이 올린 각종 공문들을 선별하여 황제에게 아뢰는 일과 어명을 대신들에게 구두로 전달하거나 문서로 작성하여 알리는 일을 도맡았다. 오늘날 대통령 비서실장과 비슷한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원래 진충은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무식쟁이였으므로 궁성에서 살아가는 환관이라는 직책이 요구하는 기본 교양 및 덕목이나 기본지식 따위가 있을 리 만무해 황제의 공문서를 처리하는 병필태감이 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객씨가 막후에서 은밀히 영향력을 행사했던 까닭에 그는 문맹임에도 파격적인 승진을 할 수 있었다.
마침내 진충은 희종의 눈과 귀가 되어 자기에게 불리한 정보는 철저하게 차단하고 오로지 희종이 향락에만 빠져 지낼 수 있게 했다. 천계제는 목수질이나 하게 냅두고[3] 자신이 직접 정치를 하겠다고 설득한다.
천계제: "충현아, 요즘따라 정치고 뭐고 다 하기 싫구나. 짐은 망치질이나 하고 싶어."
위충현: "그렇다면 정치는 소신에게 맡기소서."
그는 천계제의 치세 7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온갖 전횡을 휘둘러 명나라를 급속도로 쇠락시켰다. 학식이라고는 없는 일자무식의 위충현은 그저 황제가 어린 시절부터 가까이 대해온 환관이라는 계기로 벼락출세를 맞은 것이다.
3. 황제 위에 내가 있다.[편집]
천계 원년 희종은 객씨 집안의 제사를 받들게 하고 토지를 하사했으며 진충이 선황제의 황릉을 중수한 공로를 기록에 남기게 했다. 두 사람에 대한 희종의 지나친 총애가 국정혼란을 일으킬 수 있음을 우려한 어사 왕심일이 그 부당함을 지적하여 간언을 올렸지만 희종은 끝내 듣지 않았다.
천계 2년 희종은 진충에게 충현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여 진충은 위충현으로 개명했다. 참으로 충성스럽고 현명한 신하라는 뜻이다. 이때부터 어리석은 군주와 교활한 간신의 불행한 변주곡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황제의 총애를 등에 업은 위충현과 객씨는 자기들에게 위협이 되는 자들을 모조리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먼저 충신 왕안이 도마 위에 오른 물고기 신세였다. 희종은 즉위하자마자 왕안에게 사례감을 계속 관장하게 했다. 하지만 왕안은 자신은 선황제 시절에 사례감을 맡았기 때문에 새 황제의 등극에 따라 마땅히 사직해야 한다고 말하며 고사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충언이었다. 하지만 왕안의 강직한 성품이 오히려 그를 해치고자 한 위충현과 객씨에게 절호의 기회가 되고 말았다. 객씨가 희종에게 왕안의 사직 청원이 법도에 맞는다고 아뢰었다. 희종도 윤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객씨는 위충현에게 왕안을 당장 살해하자고 말했다. 위충현이 망설이자 객씨가 말했다. "당신과 내가 서리와 같은 처지라면, 어찌 후환을 남겨 둘 필요가 있겠어요?" 광종의 후궁, 서리가 주유교를 농락하여 수렴청정을 시도하다가 쫒겨난 일을 객씨가 위충현에게 상기시킨 것이다.
두 사람은 급사중 곽유화에게 왕안을 모함하게 하여 그를 황실의 수렵장인 남해자의 정군으로 몰아냈다. 정군이란 명나라에서 환관들로 구성된 군대를 말한다.[4] 그후 위충현은 유조를 남해자의 책임자로 보내 왕안을 살해하게 했고 왕안은 유조한테 살해된다. 명나라 역사상 환관들 가운데 보기 드물게 청렴하며 강직했던 왕안은 한때 자기 수하에 있었던 위충현과 객씨의 음모로 인해 희생된 것이다.
천계 2년 희종은 위충현이 광종의 황릉, 경릉을 완공한 공로를 인정하여 위충현의 조카를 지휘첨사로 임명했다. 당시 명나라에서 지휘첨사는 천자를 호위하고 황궁을 지키는 근위대인 금위군의 책임자로서 천자의 측근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직책이었다. 이때부터 위충현은 금의군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는 대담하게도 희종을 속이고 황궁에서 사병 1만 명을 조련했다. 천자에게 충성하는 금위군의 전력 강화를 위한다는 핑계를 댔지만 사실은 친위대를 조직하여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위협이 될 만한 인사들을 감시하고 제거하는데 활용했다.
천계 3년 겨울 희종은 위충현에게 동창을 관장하게 했다. 그야말로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준 셈이다. 감찰과 정보 기능을 수행하는 동창은 자체적인 수사와 심문도 가능한 터라 명나라에서는 황족과 관리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에게도 공포의 대상이었다. 특히 동창에 끌려가면 모진 고문을 당하고 시신이 되어 나오는 일이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이른바 백색공포가 조정에 엄습했다.
천계 4년 위충현의 만행과 국정농단에 울분을 품은 동림당 인사들이 분연히 일어났다. 어사 이응숭은 위충현이 궁궐에서 사병을 불법으로 조련한 죄를 희종에게 간했다. 급사중 곽수전은 위충현이 희종에게 자기 집안 사당에 편액을 하사해달라고 요청한 죄를 간했다. 또 어사 유정좌는 위충현이 음관을 남발한 죄를 고발했고 급사중 심유병은 위충현이 입가의 형벌을 가한 죄를 고발했다. 입가란 사람을 세운 채로 나무형틀에 가두어 꼼짝달짝 못하게 하는 잔혹한 형벌이다.
그러나 희종은 대신들의 간언에 묵묵부답이었고, 대신들의 반격에 놀란 위충현은 오히려 희종의 조서를 위조해서 그들을 잡아들여 잔혹한 고문을 가했다. 양심적인 대신들이 줄줄이 잡혀가 고문을 당하는 모습을 지켜본 부도어사 양련이 목숨을 걸고 위충현의 24가지 대죄를 상세히 밝힌 상소문을 올렸다.
조정의 분위기가 일시에 위충현을 탄핵하는 분위기로 쏠리자 위충현은 희종에게 달려가 억울함을 호소했다. 객씨도 곁에서 그를 옹호하고 나섰다.[5] 그러나 문제는 희종이 글을 읽을 줄 몰랐다는 것. 어리석은 희종은 위충현에게 상소문을 대신 읽어달라고 요청했는데, 당연히 위충현은 중요한 부분은 전부 배제하고 사소한 죄상만 읊었다. 결국 여기에 속아 넘어간 희종은 오히려 위충현을 두둔하고 비답을 내려 양련을 꾸짖고 파직시켰다.
이에 대신들은 또 들고 일어났다. 급사중 위대중, 진량훈, 허예경, 무녕후, 주국필, 남경의 병부상서 진도형 등 대신 70여 명이 위충현을 탄핵하는 상소문을 연이어 올렸지만 희종은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당시 위충현의 국정농단에 목숨을 걸고 싸운 인사들인 대부분 동림당 계열의 사대부였다. 대체적으로 그들은 대의 명분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고 유가의 위민 사상에 투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기에 일개 환관 따위가 국정을 마음껏 유린하는 악행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하지만 정치란 언제나 반대세력이 있기 마련이다. 동림당 인사들에게 불만을 품은 대신들은 사대부로서의 자존심을 버리고 환관 위충현에게 빌붙어 그들을 타도하고자 했다.
일례로 예부상서 고병겸은 위충현에게 굴종하면 죽을 때까지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 나이가 자기보다 18세나 어린 환관 위충현을 아버지로 모시고야 말았다. 위충현은 고병겸을 앞잡이로 삼아 동림당 인사들을 때려잡을 요량이었다.
특히 고병겸은 엄당으로 들어가 위충현의 비호로 내각의 최고 직위인 내각보수에 올랐다. 당시 동림당 인사들은 위충현을 따르는 환관과 대신들의 정치조직을 엄당이라 했는데 고자들이 만든 정당이라는 뜻이다. 고병겸은 동림당 인사들의 명단을 은밀하게 작성하여 위충현에게 건네주었다. 그리하여 이부상서 조남성, 좌도어사 고반룡, 이부시랑 진우정 등 충신 수십 명이 관직에 쫒겨났으며 공부랑중 만경과 어사 임여저는 붙잡혀가 위충현이 가한 혹독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옥사했다.
이외에도 위충현에게 빌붙거나 아부하여 출세의 가도를 달린 사대부는 고병겸뿐만이 아니었다. 최정수라는 자는 뇌물을 받은 죄로 탄핵을 당할 위기에 처해있을 때 위충현에게 찾아가 머리를 조아리고 눈물을 흘리며 양아들이 되겠다고 구걸한 인물이다. 그는 동림당 인사와 비동림당 인사의 명단을 별도로 작성한 천감록과 동지제록을 만들어 위충현에게 바치고 동림당 인사들을 제거하는데 앞장섰다. 나중에 위충현의 천거로 최정수는 국방의 최고 책임자인 병부상서의 직책을 맡았다.
곽유화는 진사 출신의 관리였음에도 불구하고 비열하게 위충현에게 빌붙어 그의 앞잡이가 되어 양심적인 동림당 인사들의 탄압에 앞장섰다. 출세를 위해서라면 어떤 비굴한 짓도 서슴치 않는 지식인의 전형이였다.
왕소휘란 자도 만력 연간에 탄핵을 받고 쫒겨났으나 천계 4년 위충현의 부름을 받고 예부상서가 되었다. 위충현은 왕소휘가 동림당 인사들과 적대 관계임을 알고 그를 중용했다. 왕소휘는 수호전을 모방하여 동림당인사 108명의 명단을 수록한 점장록을 만들어 위충헌에게 바쳤다.[6] 이 명단에 오른 인물들 가운데 양련, 좌광두, 원화중, 위대중, 주조서, 고대장 등 이른바 동림육군자가 위충현 일당에게 가장 혹독한 박해를 당하고 죽었다.
이후 위충현의 전횡은 이루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다. 동림당과 정적들을 숙청하여 조정 중신들까지 무릎 꿇린 그는 명실상부 독재자로 올라섰다. 실제로 위충현은 문맹이었던 것과는 별개로 타고난 머리는 좋았는데, 위충현은 경이적인 기억력의 소유자로 궁정의 법률이나 전례를 꼼꼼히 암기하고, 적들의 얼굴, 이름, 과거의 행위를 조사해, 약간의 틈을 놓치지 않고 뛰어난 말솜씨를 동원해 형벌을 내렸으며, 원한이 생긴 사람이 있으면 결코 잊지 않고 복수했다. 게다가 위충현은 술집에서 술에 취한 남자가 위충현을 험담하자 그 남자를 친구와 함께 자신의 앞으로 끌고 오고는 그 남자의 친구의 눈앞에서 자신을 험담한 남자의 가죽을 산 채로 벗긴 후 그 친구에게 큰 돈을 주고는 그대로 돌아갔을 정도로 잔혹했다.
이때 명나라 천하는 가히 위충현의 천하라고 할 수 있었다. 왕체건, 이조흠, 왕조보 등 위충현을 추종하는 환관 30명이 황제 주변을 완전히 장악하여 인의 장막을 쳤다. 문관 최정수, 전길, 오순부, 이기룡, 예문환 등 오호가 위충현을 위해 온갖 사악한 음모를 꾸미면 무관 전이경, 허현순, 손운학, 양환, 최응원 등 오표가 음모에 걸려든 자들을 잔혹하게 살해했다. 또한 십구, 십해아, 사십손 등 위충현의 앞잡이들이 자행한 악행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잔인했다. 명나라 조정의 내각, 육부에서 전국의 총독, 순무에 이르기까지 위충현 일당의 세력이 뻗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특히 위충현은 황제가 만세 소리를 들으니 자신더러는 구천세 또는 구천구백세라 불러달라고 요구했으며 실제로 그렇게 불렸다. 전근대까지 동아시아에서 누군가를 경축할 때 황제에게만 만세를 불렀고 제후, 황태자, 왕은 천세, 일반인들은 백세를 불렀다. 위충현이 구천세라고 불린 것은 제후, 왕보다 그 위세가 높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형식적으로는 중국의 책봉을 받았다고는 해도 엄연한 한 나라의 군주였던 조선과 일본의 왕은 물론이고 그것도 모자라 명나라의 황태자 보다도 높다고 선언한 셈이 된다. 만약 만세가 황제 이외에도 가능하다면 자신에게 만세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은 인물.
물론 위충현은 권세에 걸맞게 호화로운 생활을 누리며 자신의 호위를 위해 궁정의 3천명의 연관들을 무장시켜 궁중에서 군사훈련을 했으며, 외출할 때에는 앞쪽에서는 위사의 대열이 길을 깨끗이 하고는 뒤쪽에서는 수만 명의 인마가 동행하며 길 사이의 백성들에게는 무릎을 꿇게 하면서 '구천세'를 외치게 했다.
나중에 가면 위충현은 자만심이 넘친 나머지 궁중에서 말을 타면서 황제 앞에서도 하마[7] 도 배례도 하지 않았으며, 자기 자신을 요순임금에 견준다는 의미로 요천순덕지성지신(尭天舜徳至聖至神)이라는 존호을 만들어 사용한 것도 모자라 자기를 모시는 생사당(生祠堂)이란 사당을 세워놓고 세인들로 하여금 참배하도록 했으며, 절하지 않으면 죽였다고 한다. 절강순무로 있는 반여정이라는 사람이 제일 먼저 위충현의 사당을 세웠는데, 이는 살아 있는 사람을 사당에 모신 생사당이었다.
이것이 삽시간에 번져 북경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 위충현의 사당과 상이 세워졌고, 또 어떤 사람은 "공자는 소정묘를 없애고 위충현은 동림당을 없앤다."라고 해서 그를 공자처럼 모셔야 한다고 떠들어 댔다.
4. 구천구백세, 추락하다[편집]
그밖에도 수년밖에 되지 않는 짧은 기간 나라를 얼마나 말아먹었는지 열거하기 밑도 끝도 없지만 결국 천계제의 죽음과 함께 위충현의 명줄도 끝나게 되었다.
황제가 사경을 헤매는 동안 그는 필사적으로 태아 상태인 황제의 아이를 황제에 옹립하려 안간힘을 썼지만[8]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천계제도 그렇게 무뇌는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천계제의 황후인 효애철황후 장언이 위충현을 필사적으로 견제했기 때문. 특히 효애철황후는 위충현이 국정을 농단하는 것을 알고는 그를 매우 싫어했다. 그래서 천계제한테 소인배를 멀리하고 현인을 가까이하라는 충언을 올리기도 했다. 실제로도 숭정제를 즉위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기에 숭정제는 형수한테 고마워하며 효애철황후를 황태후급으로 우대했다. 나중에 효애철황후는 명나라가 멸망할 때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래서 사후 이를 높이 평가한 순치제가 황후의 예로 장례를 치러준다.
게다가 위충현과 객씨가 결탁해 한동안 황제의 아들들을 죄다 제거했기 때문에[9] 이 시점에서 황위 후계자는 숭정제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보면 결국 위충현의 자충수였다.
어쨌든 천계제는 그나마 똑똑해보이는 동생 주유검에게 제위를 넘기고 세상을 떴다. 실제로도 천계제는 자신이 무식한 상태에서 천자가 된 것이 한스러웠는지 동생 공부는 좀 시켰다고 한다.
위충현은 황제가 죽자 부고 사실을 숨겨 숭정제의 제위를 막으려는 치졸한 짓까지 벌이고 심지어 정변을 일으킬 궁리도 해봤으나 전자는 장 황후가 이를 주유검에게 미리 알려줬고 후자는 위충현의 부하들이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고 주유검은 무사히 제위에 오르고, 숭정제로서 즉위하게 된다.
새로 제위에 오른 천계제의 동생 숭정제는 당연히 위충현을 적대했지만, 위충현을 바로 제거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왜냐면 신하부터 환관들까지 전부 위충현의 사람들로 가득 차있었기 때문이다. 섣불리 움직이면 자신의 목이 날아갈지도 모르는 터라[10] 숭정제는 위충현의 조카 위량경에게 면사철권을 하사하고, 엄당의 구성원들에게 상을 주는 등 위충현의 눈치를 봐야 했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이 바뀌고 있었음을 감지한 신하들은 발빠르게 위충현과 그 부하들을 탄핵하기 시작했고, 위충현은 결국 등쌀에 못이겨 사직을 선택했다. 숭정제는 처벌하지 않고 사직을 받아들이며 그를 '그동안 고생했다는 의미로' 고향인 봉양으로 보내주기로 했다. 이때 위충현의 짐을 싸는 데만 해도 3일이 걸렸으며 그 결과 무려 수레 40대 분량이 나왔다고 하니 그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위충현의 운명도 여기까지였다. 위충현이 베이징을 뜨자 숭정제는 기다렸다는듯 체포령을 내렸고 오호며 오표며 하는 그의 수하들도 차례차례 낙마하고 말았다.
이 소식을 부성현에서 들은 위충현은 충격을 받고는 도망가지도 맞서 싸우지도 못한 채 목을 매어 자살했다. 이때 그의 짐을 나르던 수많은 하인들은 각자 재물을 챙기고 뿔뿔이 흩어졌다. 그의 곁은 지킨 사람은 유일하게 이조흠밖에 없었고 이조흠도 위충현이 자살하자 따라 자살했다. 한때 황제를 호령하며 구천구백세를 자처하던 사람 치고는 비참한 최후였다.
5. 사후[편집]
위충현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를 죽이려했던 숭정제는 분노하여 위충현의 시신을 가져와 목을 베어 효수하였고, 그 시체는 오체분시도 아니고 천 갈래 만 갈래로 찢기는 천참만륙(天斬萬戮)의 극형을 받게 했으며, 위충현을 찬양하던 사당과 상들 역시 모두 파괴되었다. 재산 또한 전부 몰수되었으며 일족들도 남김없이 처형되었다. 위충현의 영혼의 파트너였던 객씨도 무사하지 못하여 그의 사망 후 바로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되어 고문 끝에 그동안의 악행을 모두 자백했고, 그대로 몽둥이에 맞아 죽었다. 위충현의 아들을 자처했던 최정수는 끝이 다가오는 것을 알았는지 마지막 잔치를 열어 그동안 모은 재산을 전부 탕진하면서 즐길 대로 즐기다가 관병들이 들이닥치자 목을 매어 자살했다. 물론 둘 모두 위충현처럼 부관참시되었다.
위충현은 갔지만 그의 수하들은 여전히 조정 곳곳에 남아있었다. 자신의 윗대가리들의 최후를 본 그들은 바로 태세전환해 상소문을 올리면서 위충현을 손절하려고 시도했고, 나중에 숭정제가 위충현의 수하인 오호 오표들을 정리하려고 하자 아주 가벼운 처벌만 내리는 등 유야무야 넘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숭정제는 이미 이들이 위충현에게 보낸 아부 편지들을 전부 입수한 후였기에 봐주려고 했던 이들마저 전부 색출되어 청산되기에 이른다.
숭정 원년 엄당 구성원 총 261명이 숙청되었는데, 죄목에 따라 1등(위충현이 해당된다.)부터 8등까지 상세하게 분류되어 목이 잘리거나 삭탈관직, 유배 등 죄목에 따른 처벌을 받게 된다. 당시 지방 관리를 제외한 명의 총 관리 수가 800명대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4분의 1이 칼날의 마수를 피해가지 못한 셈이다. 이를 흠정역안이라고 부른다.
오호 오표들은 모두 처형당했는데, 이 과정에서 웃픈 해프닝도 있었다. 명말청초의 유명한 사상가 황종희는 아버지 황존소를 엄당의 옥사에서 잃었는데, 그의 아버지를 고문해 죽인 허현순과 최응원의 심리에 증인으로 불려나갔다. 그런데 증언을 끝내고도 나가지 않더니 불현듯 허현순에게 달려들어 송곳으로 마구 찔러버린 것이다. 관리들은 허현순이 거의 죽기 직전까지 갔을 때 황종희를 떼어놓았으나 그러자 황종희는 최응원에게 달려들어 수염까지 뽑아놓았다.
결과야 어쨌든 위충현의 부하들은 대부분 합당한 처벌을 받았다. 목이 날아가지 않은 이들도 끝이 편치는 않았다. 동림당 인사들을 모함한 핵심인물인 고병겸은 관직에서 쫓겨난 후 집으로 돌아갔으나 성난 군중들이 집을 태워버렸고, 결국 쓸쓸히 죽었다.
마수에서 벗어난 이들이 딱 둘 있었는데, 왕체건과 유약우였다. 유약우는 글을 워낙 잘써서 엄당의 문건을 대부분 담당했기에, 엄당의 죄상을 상세히 기록하는 대가로 면죄부를 얻었다. 왕체건의 경우는 위충현의 심복이었음에도 7등 죄목밖에 받지 않았는데 정황상 일치감치 숭정 쪽으로 붙어 첩자 노릇을 하지 않았나 싶다.
이렇게 명나라를 어지럽힌 엄당과 위충현 세력들은 모두 정리되었다. 하지만 이미 명나라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막장으로 치달아 있었고, 위충현이 죽은 지 불과 17년 만에 청나라의 침공과 이자성의 난을 끝으로 명나라는 멸망하고 만다.
6. 평가[편집]
명 4대 암군 시기의 무수한 간신배들 중에서도 단연 으뜸이라 할 수 있는 존재로, 단 한 사람의 능력만으로도 제국(帝國)이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 산 증인이다.[11] 심지어 진나라의 조고나 당나라의 구사량[12] 조차도 그 앞에서 감히 명함을 내밀기 어려워 보인다. '충성스럽고 현명하다'는 본인의 이름(忠賢)하고 완전히 반대로 놀았다고 보면 된다."천하의 권세를 가진 자는 첫째는 태감 위충현이요, 둘째는 객 내저요, 셋째가 황상이다."
조천항해록 1624년 10월 19일자
7.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편집]
중국드라마 천하에서는 역사상의 사실대로 권력을 쥐고 흔들면서 동창이라는 조직을 이용해 반대파들을 고문하고 죽이는 인물로 묘사된다.[13] 배우는 왕회춘. 그러면서 천계제 앞에선 노비가 어쩌구저쩌구~하면서 오만 아첨을 떠는 건 보너스. 천계제가 죽어가면서 권력을 장악하려다가 함께 짝짜꿍하던 객파파의 배신으로 몰락해 자신의 거세한 생식기가 든 항아리를 들고 조용히 리타이어 하면서 사라진다.
중국 영화 수춘도(繡春刀)는 위충현 제거를 명받은 금의위 삼형제 이야기를 다룬다.
다양한 무협지의 메인 빌런으로 모티브가 되었다. 명나라 배경에 권력을 잡고있는 환관이 메인 빌런이라면 십중팔구 위충현이 모티브다.
8. 둘러보기[편집]
[1] 항생제가 발달하지 않았던 전근대에 이러한 행위는 정말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이었다. 실제로 환관이 되는 과정에서 거세를 한 뒤에 사망하는 사람도 상당수였다. 그 때문인지 중화제국 왕조들이 조공을 받는 품목 중에 궁녀로 채용할 젊은 여성뿐 아니라 환관으로 쓸 화자(고자)도 포함되어 있었을 정도. 오죽했으면 환관을 제조하는 도자장들이 환관이 되길 원하는 사람에게 3번의 질문을 해서 약간이라도 망설일 경우 환관으로 만들지 않았을까?[2] 대식의 유래는 이렇다. 한국과 중국에서 당직을 서는 환관은 궁중에서 밥을 지어 먹을 수 없었기 때문에 본인이 가지고 온 차가운 음식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궁녀는 궁궐에서 불을 지필 수 있었으므로 환관들이 평소에 친한 궁녀에게 음식을 데워달라고 부탁하면서 함께 음식을 먹었다. 이렇게 남녀가 오랫동안 함께 밥을 먹으면 부부처럼 친해지기 마련이다. 환관과 궁녀 간의 이러한 은밀한 부부놀이를 대식이라고 칭한다. 중국의 경우 명초에는 은밀히 행해졌으나 만력 이후부터는 공개적으로 이루어졌다. 또 군주의 성은을 한 번도 받지 못한 궁녀들끼리 일종의 동성애를 즐기는 행위도 대식이라고 했다.[3] 그래서 위충현이 신하들의 상소를 천계제에게 전달할 때는 꼭 천계제가 목공예에 열중일 때만 노려서 보고했다고 한다. 목공예 한참 빠져 있는데 불쑥 처리해야 할 국정 상소를 가져와 폐하께서 처리하셔야 한다고 하니 천계제는 짜증내면서 "아 니가 알아서 해"라고 내뱉었고, 그걸 또 위충현은 '황제께서 내게 맡기셨다'며 자기 멋대로 일을 처리해 버렸다고.[4] 중국에서 환관은 황제의 시중을 들며 경호도 맡았다.[5] 여기엔 단순히 위충현의 부정부패 의혹 뿐만 아니라 희종의 자녀들의 미심쩍은 죽음에 위충현과 객씨가 연루되어있다는 무시무시한 죄상까지 들어있었다.[6] 이 점장록은 송강, 임충, 공손승 등의 인물들에 동림당 인사들을 대입한 책이다. 한마디로 최고의 충신들을 도적떼에 비유해서 모욕하려고 한 것. 위충현은 이 점장록을 보고는 너무 재밌어해서 천계제에게도 보여줬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천계제가 너무 무식해서 수호전이 뭔지 설명부터 해줘야 했고, 설명을 전부 들은 후엔 오히려 주인공들을 의로운 인물들이라고 칭찬하는 바람에 이 책의 배포 계획은 취소했다고 한다.[7] 下馬, 말에서 내리는 것[8] 만약 서아시아나 유럽 같았으면 위충현의 계획이 먹혔을 것이다. 알폰소 13세 및 샤푸르 2세 항목 참조.[9] 천계 3년부터 5년까지 3명의 원자가 태어났지만 모두 요절했다. 앞서 말한 양련이 위충현을 고발한 것에도 황제의 자식을 죽였다는 혐의가 들어가 있었다.[10] 오죽하면 야사에서는 궁에 들어왔을 때 숭정제가 장 황후의 귀띔에 따라 궁에서 제공하는 음식은 일절 먹지 않고 본인이 밖에서 챙겨온 음식을 먹었으며, 스스로 검을 들고 잠도 자지 못하며 경계했다는 기록까지 있다.[11] 다만 이때의 명 제국은 위충현 이전부터 가정제, 만력제라는 걸출한 인물과온갖 해괴한 정치 스캔들, 심각한 부정부패, 잦은 반란, 외침, 기근, 재정 파탄으로 이미 답이 없을 정도로 심각하게 막장 상태였다. 그러나 위충현이 정치가로서 이걸 수습하기는커녕 역사에 이름을 남길 정도로 국정을 농단하고 엄청난 부정축재를 해서 명나라의 몰락을 확정지은 것은 사실이다.[12] 당나라 시기의 대환관으로 환관들의 최전성기를 연 자이다. 후한의 양기와 세트일 정도로 악명이 대단하다.[13] 황제의 측근이 되었음에도 과거 자신이 했었던 궁중의 변기 청소일을 하면서 자기 자신을 되돌아 보는 의외의 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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