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F. 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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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명예 훈장 수훈자
파일:미국 육군 명예훈장.jpg
수훈 년도
1951년
이름
윌리엄 F. 딘

윌리엄 프리시 딘
William Frishe Dean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30px-William_F._Dean.jpg

출생
1899년 8월 1일
미국 일리노이주 칼라일
사망
1981년 8월 24일 (향년 82세)
미국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
복무
미합중국 육군
복무 기간
1921 ~ 1955
최종 계급
소장
주요 참전
제2차 세계 대전
6.25 전쟁
신체
180cm 96kg

1. 개요
2. 생애
3. 국내의 딘 소장 관련 억측과 오해
3.1. 딘 소장 구출 작전은 보급품 후송 작전의 오해 및 와전
3.2. 영웅 대우에 대한 근거없는 폄하
3.2.1. 대전지구전적비 설명문과 동상이 역사 왜곡인가?
3.3. 북한군 최고 계급 포로 리학구 총좌와 맞교환설
4. 가족 관계
5. 기타
6. 참고 자료



1. 개요[편집]


윌리엄 F. 딘 (William Frishe Dean)는 미 육군의 군인으로 제2차 세계 대전, 6.25 전쟁에 참전하였다.

6.25 전쟁에서 공적으로 명예훈장태극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


2. 생애[편집]


1899년, 치과의사인 찰리 와트 딘과 독일계 미국인 여성 엘리자베스 프리시 딘 사이에서 태어났다.

1917년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캠퍼스 법학과에 입학했다. 거기서 ROTC를 했고 1921년 대학 졸업과 동시에 주방위군 소위로 임관했다. 본디 ROTC는 현역으로 복무하는 게 아니었지만 윌리엄 딘은 성적 최우수자 반열에 올랐기 때문에 바로 현역으로 복무했다. 그리고 1923년 중위 진급과 동시에 주방위군에서 연방육군으로 전군했다.#

제2차 세계 대전연대장으로 참전하면서 혁혁한 공훈을 세워 종전 이후에는 사단장에 이르렀다. 특히 2차 대전 당시에는 포로로 잡히는 것을 최고의 치욕으로 생각했기에 자신의 부하들이 포로로 잡히지 않으면서 전투를 하도록 최대한 노력했고 실제로도 그의 부대원이 다른 부대원에 비해 포로로 잡히는 숫자가 현저히 적었다.

1945년 9월 주한미군으로 파견되어 같은 해에 미군정청 장관을 역임하게 되었다. 1948년 다시 미국으로 귀국했으나 6.25 전쟁이 발발하는 바람에 미 제24보병사단장으로 보직되면서 다시 한반도로 들어왔다. 이 때 자신의 미 제24보병사단 직할 수색대대인 찰스 스미스 대대를 먼저 파견하여 오산 전투를 치르면서 북한군을 막으려 했으나 찰스 스미스 대대는 북한군에게 완패했으며 그 때문에 본인이 본대를 이끌고 대전 전투에서 북한군과 직접 싸우게 되었는데 어찌나 상황이 말이 아니었는지 딘 본인이 직접 무반동총을 들고 쏴서 T-34-85를 공격해야 할 정도였다. 사단장임에도 불구하고 대전차화기를 직접 다루면서 계속해서 북한군 전차 T-34-85를 공격하여 파괴하기도 하였지만 문제는 딘 혼자 여러 대의 전차를 상대해야 할 정도로 엄청나게 힘든 싸움이었다.

파일:General_Dean's_Kill.jpg

결국 미 제24보병사단마저 북한군에게 궤멸당했으며 딘 소장은 충북 옥천으로 철수하던 미 제24보병사단은 세천터널에서 매복중인 북한군의 기습으로 차와 장비를 버리고 산기슭으로 뿔뿔이 흩어지는 등 많은 피해를 입었고, 이 과정에서 딘 사단장도 부상병에게 줄 물을 뜨러 가다 길을 잘못들어 실종되고 만다. 그 후 역시 낙오했던 미 제24보병사단 2대대 소속 스탠리 E. 테이버(Stanley Eugene Tabor) 소위를 만나 같이 본대를 찾아가던 중 민가에 숨어있었는데 주민의 밀고로 북한군이 급습하였고 테이버 소위가 주위를 분산시켜 탈출에 성공하였지만[1] 테이버 소위와는 헤어지게 되었다. (스탠리 E. 테이버 소위 역시 결국 포로로 잡혔는데 잡힐 때 이미 중상을 당한 상태였으며 결국 포로수용소에서 사망하였고 은성훈장이 수여되었다.Hall of Valor: The Military Medals Database

그 후 계속 혼자 본대를 찾아 산야를 헤메다가 8월 20일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에서 농부 박종구의 집에서 대략 3일간 머물며 닭죽 등 후한 대접을 받고 대구로 향하였다.# (주한미군이었던 딘 장군의 아들이 1961년 혹은 1963년(기사마다 시점이 다름) 박종구에게 감사인사차 방문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러나 7월 20일 행방불명 된 후 36일 후인 8월 25일에 전라북도 진안군 주민인 한두규와 최종봉은 각각 북한군에 당시 한화로 약 3천원에 해당하는 5달러를 받고 팔아넘겨 포로가 되었다.(위치는 전라도 진안군 상전면 운산리)
그 후 계속 혼자 본대를 찾아 산야를 헤메다가 8월 20일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에서 농부 박종구의 집에서 대략 3일간 머물며 닭죽 등 후한 대접을 받고 대구로 향하였다.# (주한미군이었던 딘 장군의 아들이 1961년 혹은 1963년(기사마다 시점이 다름) 박종구에게 감사인사차 방문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러나 7월 20일 행방불명 된 후 36일 후인 8월 25일에 진안군 주민인 한두규와 최종봉은 각각 북한군에 당시 한화로 약 3천원에 해당하는 5달러를 받고 팔아넘겨 포로가 되었다. 위치는 진안군 상전면 운산리이다.근거기록자료 이 과정에서 딘이 어찌나 고생했는지 키 180cm의 딘은 해방 직후 96kg였던 몸무게가 59kg까지 줄어 있었다.

도피 생활과 포로 생활로 딘 소장은 어찌나 고생했는지 키 180cm의 딘은 96kg였던 몸무게가 59kg까지 줄었고 자신의 신념으로 인해 자살 충동을 여러번 겪었다. 특히 고문을 통해서 인천상륙작전을 비롯한 여러가지 기밀을 노출할 것을 우려해서 실제로도 여러 번 자살을 시도했지만 결국에는 실패했다. 참고로 처음에는 북한군 측에서는 딘 소장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 하여 그가 미 제24보병사단 사단장이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얼마안가 그의 정체가 밝혀졌다.

한편 미군에서는 실종전사한 것으로 추정하였다가 1950년 10월 북진 중 평양 부근에서 딘 소장 심문시 통역을 맡았던 북한군 징집병 이규현이 귀순하여 진술함으로써 미군에서도 이때 딘 소장이 생존하여 북한군에 포로가 된 것을 인지하였다고 한다.'6.25 전쟁사 제4권 금강-소백산맥선 지연작전' (166P)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그렇지만 미군에서는 이규현의 진술 보다는 정황상 전사 가능성이 더 높다고 판단을 하였는지 1951년 1월 9일 명예훈장(Medal of Honor) 수여식을 거행하였으며#(훈장 관련 미국 육군부 일반명령 날짜는 1951년 2월 16일)#, 1955년 10월 31일 전역식에서 전투보병휘장(Combat Infantry Badge) 2등급을 수여받았다.[2]

그 후 생사여부를 계속 조사하던 중 1951년 12월 21일 북한군이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공산계 언론사 소속 월프레드 G. 버체트(Wilfred Graham Burchett) 종군기자를 초청하여 인터뷰를 시켰고, 1951년 12월 24일 딘 소장의 사진과 함께 전세계로 기사가 배포되면서 포로 상태인 딘 소장의 상황이 명확하게 알려지게 되었다.

포로가 된 이후 딘 소장은 포로수용소에서 지내다가 휴전 협정이 체결된 이후, 유엔군과 공산군이 일반 포로들을 교환한 빅 스위치 작전(Operation Big Switch)에 의해 1953년 9월 4일 석방되어 귀환하였다.[3]

딘 소장은 석방된 이후 일본을 거쳐 1953년 9월 24일 드디어 미국으로 귀국하였고, 그후 미 제6야전군사령부 부사령관을 잠깐 역임한 후 1955년 10월 31일 화려한 전역식과 함께 군문을 나섰다..

그 후 여생을 조용히 살다가 1981년 8월 24일 세상을 떠났다.

한편 딘 소장을 북한군에 팔아넘긴 한두규와 최종봉은 체포되어서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는데 딘 소장은 귀환후 1950년 9월 25과 10월 22일 두차례에 걸쳐 이승만 대통령에게 두 한국인에게 관대한 처벌을 부탁하는 탄원서를 보내는 관대함을 보여 주었다.##

한두규와 최종봉은 1954년 5년형을 선고받았으며#, 한두규는 1954년 5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57년 전향 후 석방되었다고 한다.


3. 국내의 딘 소장 관련 억측과 오해[편집]


딘 소장이 6.25 전쟁 대전 전투에서 7월 20일 실종되었다가 35일 후인 8월 25일 북한군에 포로가 되었는데 이렇게 미군 장성 신분으로 포로가 되는 특이한 상황이 발생함에 따라 이를 토대로 국내에서 억측과 오해로 딘 소장 구출 작전설 등 여러가지 역사 왜곡이 자행되고 있다.


3.1. 딘 소장 구출 작전은 보급품 후송 작전의 오해 및 와전[편집]


자세한 내용은 딘 소장 구출 작전설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자세한 내용은 김재현 기관사 문서의 잘못 알려졌던 사실들 문단을 참고하십시오.

그 동안 국내에서는 1950년 7월 19일 김재현 기관사 등 한국인 철도공무원들이 운전하는 기관차에 30여명으로 구성된 미군 결사대가 탑승하여 대전 전투에서 실종된 미 제24보병사단 사단장 '윌리엄 F. 딘' 소장을 구출하기 위한 일명 '딘 소장 구출 작전'을 실행하였고 이러한 '딘 소장 구출 작전' 수행 중 김재현 기관사와 미군 결사대원 29명이 전사한 것으로 알려졌었다.(1953년 교통부 발간 한국교통동란기와 1983년 황남호 본무기관조사와 현재영 보조기관조사의 자필 경위서에서 기관차에 탑승했던 미군의 정체를 '미군 결사대'로 명명하고 총원 30명, 전사자 29명이라고 기록하였지만, 후대에 '딘 소장 구출 작전'을 특수 작전처럼 과장하기 위해 '미군 특공대', '미군 특전단'#, '미 해병 특수부대'#[4] 등으로 확대ㆍ 재생산 되었고 병력과 전사자 기록도 총원 33명, 전사자 32명으로 와전되었다.)

한국철도공사철도청 시절부터 호국철도의 상징으로 주도적으로 홍보하여 널리 알려진 이 '딘 소장 구출 작전' 영웅담은 흡사 전쟁 영화시나리오 같은 화제성으로 말미암아 오랜 세월에 걸쳐 국가보훈부와 같은 정부기관과 언론사 등에 의해 '구출 작전'이 허위임을 단번에 판명할 수 있는 기관차의 대전 진입 시점, 미 제24보병사단의 대전 철수 시점, 딘 소장의 실종 시점 등 공식 전사(戰史)에 기록된 대전 전투의 사건 발생별 시간 순서 비교와 미군 결사대원들의 소속과 신원 파악 등 기본적인 팩트체크교차검증이 생략된 채 그대로 인용되고 '세계 전쟁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구출 작전'# 등으로 무분별하게 확대·재생산되면서 정설처럼 굳어졌다.

그러나 '딘 소장 구출 작전'은 절대 팩트가 아니며, 역사적 사실은 대전역 안의 화차 10량에 적재되어 있던 탄약 등 보급품의 후방 이송 작전이었는데 그 동안 이 작전이 국내에서만 '딘 소장 구출 작전'으로 와전되어 한국철도공사를 통해 광범위하게 잘못 알려진 것으로 미 육군 군사(戰史) 연구소(U.S. 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의 6.25 전쟁 공식 전사(戰史) -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pp. 168–169)딘 장군 회고록 - General Dean's Story (p. 37) 등의 과거 자료부터 현재 기밀해제되어 발굴된 미 제24보병사단 정보참모부 (G2) 보고서 등 최신 자료까지 모든 미군 측 대전 전투 공식 전사(戰史) 및 기록에서 '보급품 후송 작전'으로 일관되게 기술하고 있다.

덧붙여 이 '보급품 후송 작전'은 도쿄 미 극동사령부의 7월 21일자(일본 시각) 전황 브리핑에서도 언급되었으며, AP 통신사를 통해 전 세계로 타전되어 'Journal-Every Evening', 'Spokane Daily Chronicle' 등 수많은 미국 신문에 7월 20일자(미국 시각)로 보도되었다.

  • 'Journal-Every Evening' 1950년 7월 20일자 기사 원문 발췌

"A locomotive crew trying to take a late haul of supplies from Taejon was ambushed en route to the station."


또한 대한민국 국군 측 역시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가 1979년 발간한 6.25 전쟁 공식 전사(戰史) - 한국전쟁사 제2권 지연작전기 (p. 536)의 대전 전투 연구 항목에서 국내와 미국 측 자료를 통해 작전 목적을 비교 분석한 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생존 철도공무원들의 증언에서 모두 이 열차작전의 목적이 딘 소장의 구출에 있다고 하였지만,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이렇게 결론을 내리며 '딘 소장 구출 작전'은 와전이라고 못 박았으며,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2008년에 발간한 6.25 전쟁 공식 전사(戰史) - 6.25전쟁사 제4권 금강-소맥산맥선 지연작전 (pp. 161–162, 주석 p. 217)에서는 '대전역 보급품 후송 실패'라는 제목의 단락으로 기술하여 '딘 소장 구출 작전'이 아닌 '보급품 후송 작전'이었음을 명확히 하였다.

특히 국방부 소속 전쟁기념관에서는 2020년에 발간했던 학예지 - 호국인물총서 (1): 6·25전쟁 개전의 순간 (pp. 118–123)에서 기밀해제된 미 제24보병사단 정보참모부(G2) 보고서를 국내 최초로 입수하여 '딘 소장 구출 작전'이 아닌 '보급품 후송 작전'이었음을 이론의 여지없이 입증하여 기술하였고, 작전 목적의 오해에 대해 각주를 통해 한번 더 자세히 설명하였다.[5]

* '호국인물총서 (1): 6·25전쟁 개전의 순간' 각주 발췌

"당시 김재현 기관사의 기관차에 부여된 임무를 두고 거듭되는 오해를 별기한다. 당시 승무원인 현재영·황남호의 수기 증언을 비롯해 국내의 각종 문헌과 현양 행사에서는 당시의 철도 수송 임무를 ‘딘 소장 구출 작전’으로 묘사해 왔다. 그러나 대전 철수작전 당시 작성된 미 제24사단 정보처 보고서와 미 육군, 국방부 군사편찬위원회에서 각각 발행된 공간사, 딘 소장의 회고록 등에 따르면 이들의 임무는 대전역에 적재된 보급품을 영동역으로 철수시키는 것으로 딘 소장의 구조와는 무관한 임무였다.[24th Infantry Division G-2 Journal, Vol. 8, For the Period 191700K July to 221550K July 50 ; Appleman, Roy E., South to the Nakdong, North to the Yalu , Center of Military History, United States Army(1992), 169쪽; Dean,William F. and Worden, William L., General Dean’s Story , the Viking Press(1954), 37쪽;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사 4: 금강-소백산맥선 지연작전』, 2008, 161∼162쪽]"


부연하자면 딘 소장이 7월 20일 16시경에 대전역에 있던 탄약 등 보급품이 적재된 화차 10량의 후방 이송 명령을 영동에 위치한 사단 지휘소에 하달하였고 이 명령에 따라 김재현 기관사와 부기관사에 해당하는 황남호 본무기관조사, 현재영 보조기관조사가 운전을 맡고 30명의 미군 특공대원이 아닌 6명의 미 제24보병사단 병참부대 소속 미군 6명이 호송병으로 탑승한 채 7월 20일 16시 20~30분경에 기관차가 이원역을 출발하여 대전역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대전역 도착 전 북한군에 공격을 받아 손상된 탄수차로 인해 화차 10량을 견인할 수 있는 동력이 부족하여 '보급품 후송 작전'에 실패하고 복귀하는 도중 김재현 기관사가 순직하고 현재영 보조기관조사가 부상을 당하였다. 결국 후송에 실패한 대전역보급품 적재 화차들은 7월 21일 08시에 미 공군이 폭격으로 파괴하여 북한군에게 노획되는 것을 막았다.

그 후 딘 소장은 7월 20일 18시부터 대전에 잔류하던 미 제24보병사단 34연대 병력들과 함께 차량 대열로 부대 건제를 유지한 채 대전에서 철수하였다. 그러나 철수 대열이 옥천가도에 들어선 이후 북한군의 매복 공격을 당해 차단선을 돌파하지 못하고 도보로 후퇴하던 중 낙오하여 홀로 본대를 찾아 대구로 남하하다 약 한 달 후인 8월 25일 북한군에 포로가 되었다.


3.2. 영웅 대우에 대한 근거없는 폄하[편집]


논문 (한국전쟁기 대전전투에 대한 전쟁기억 재현 연구 (2020))과 오마이뉴스 기사 (포로가 된 미 사단장이 전쟁 영웅? 대전전적비에서 발견한 사실 왜곡 (2023) 등에서 아래와 같은 요지의 주장이 제기되었다. (오마이뉴스 기사는 논문 저자의 허락을 받고 대부분의 내용을 인용함)

"미국 정부가 대전 전투에서 패배했지만 승리한 전투로 전환시킬려는 정치적 의도로 딘 소장에게 1951년 1월 9월 명예훈장을 수여하였지만, 포로가 된 것이 확인된 이후 머쓱해서 영웅 서사를 조용히 내렸으며, 이렇게 미국 정부가 딘 소장의 영웅 만들기를 중지했으나 대한민국 정부는 뒤늦게 영웅 만들기를 할려고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했다."


그러나 이 주장은 미국이 패배한 대전 전투를 포장하기 위해 딘 소장을 무리하게 영웅 만들기를 했다가 포로가 된 것을 확인 후 도중에 중지했고 대한민국은 뒤늦게 영웅 만들기를 시도했다는 결론부터 정해놓고 여기에 끼워맞추기식 유리한 일부 근거자료를 조합하여 만들어낸 주장으로서 반론을 제기하면 다음과 같다.

(1) 미국 정부가 대전 전투에서 패배했지만 승리한 전투로 전환시킬려는 정치적 의도로 딘 소장에게 명예훈장을 수여했는가?
딘 소장이 명예훈장을 받게된 공적을 표창장(citation)에서 확인해 보면 "최전선에서 병력을 진두지휘하며 북한군 전차를 공격하고, 자신의 안전을 생각해서 철수 선발대와 먼저 대전에서 나올 수 있었는데도 이를 거부하고 철수 중 낙오병들을 규합해서 지휘하고 부상병들을 도왔고 등등" 당시 딘 소장과 함께 대전 전투를 치룬 미군들에 의해 객관적으로 검증된 구체적인 공적으로 명예훈장을 수여받은 것이다.

즉 명예훈장 등 모든 무공훈장은 전투의 승패와 관계없이 객관적인 공적을 검증하여 수여되는 것으로 미국 정부가 대전 전투에서 패배했지만 승리한 전투로 전환시킬려는 정치적 의도로 딘 소장에게 명예훈장을 수여했다는 논리는 억측이다.

왜냐하면 이 논리가 개연성을 가질려면 먼저 미국 정부가 역대 참전한 전쟁에서 무조건 승리한 전투의 군인들에게만 무공훈장을 수여하다가 정말 이례적으로 딘 소장에게 무공훈장을 수여했어야만 하지만 절대 이런 사례가 아니며, 또한 이 논리를 적용하면 역시 대전 전투에서 무공훈장을 받은 미군들[명예훈장: 리비(George D. Libby) 병장[[https://valor.militarytimes.com/hero/1065|#]], [[수훈십자장]]: 짐머맨(Charles T. Zimmerman) 일병, [[https://valor.militarytimes.com/hero/6958|#]]. [[은성훈장]]: 햇필드(Raymond Davidson Hatfield) 대위[[https://valor.militarytimes.com/hero/105681|#]], 테이버(Stanley E. Tabor) 중위[[https://valor.militarytimes.com/hero/61695|#]]] 포함 미군이 패배한 전투에서 무공훈장을 수여받은 미군들은 대부분 패배한 전투를 승리한 전투로 전환시킬려는 정치적 의도로 받았다는 의미와도 일맥상통하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논리적 비약이 너무 크고 타당성이 떨어진다.

(2) 미국이 딘 소장이 포로가 된 것을 확인한 후 머쓱해서 영웅 만들기를 정말로 중지했는가?
미국 정부에서 딘 소장이 포로가 된 것을 확인한 후 머쓱해서 영웅으로 치켜세우는 데서 조용히 뒤로 물러섰다는 주장을 하며 근거자료로 역시 대전 전투에서 명예훈장을 받은 리비(George D. Libby) 병장의 경우 1953년 미군이 임진강에 교량을 건설한 후 리비교라고 명명하고 그 공적을 기념했지만, 딘 소장에게는 이런 기념시설 건립을 안 했다는 사례를 제시했는데 이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이다.

왜냐하면 이 논리가 개연성을 가질려면 6.25 전쟁에서 미군 명예훈장 수훈자 146명 중 딘 소장을 제외한 대부분의 수훈자 관련 기념시설이 존재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정확히는 리비교같은 수훈자 관련 기념시설이 몇개 안 되며, 또한 이 논리를 적용한다면 국내에 기념시설을 가지지 못한 대부분의 미군 명예훈장 수훈자들에 대해서는 미국에서 전부 영웅으로 치켜세우는 데서 조용히 뒤로 물러섰다는 의미가 때문에 역시 결론적으로 논리적 비약이 너무 크고 타당성이 떨어진다.

덧붙여 리비교 명명은 원래는 교량 건설 중 순직한 카투사 김덕호 상병과 오그라디(James E. O'Grady) 일병을 기리기 위해 이들의 이름으로 명명하는 것을 먼저 검토하였다가## 최종적으로 리비교로 명명된 것으로 리비교를 건설한 미 공병대가 리비(George D. Libby) 병장이 미 제24보병사단 3전투공병대대(3d Engineer Combat Battalion) 소속으로 즉 같은 공병 출신의 명예훈장 수훈자인 것을 감안한 것으로 이런 측면에서도 미국 정부가 딘 소장이 포로가 된 후 영웅 만들기를 중지했다는 주장에 리비교 사례는 근거자료로 부적합하다.

또한 딘 소장이 포로가 되었기 때문에 미국 정부나 미국 국민들이 머쓱해서 영웅으로 치켜세우는 데서 조용히 뒤로 물러섰다는 실체적 근거는 솔직히 어디서도 찾아볼 수가 없고 딘 소장은 스스로 항복한 것도 아니고 35일간 본대를 찾아가기 위해 계속 도피 생활을 하였고 포로 생활 중에도 부역 활동을 하지 않고 미군 장군으로서의 본분을 다했기 때문에 포로 교환으로 송환된 이후에 지속적으로 영웅 대우를 받았으며 그 사례는 다음과 같다.

먼저 미국 귀국 후 1953년 10월 26일 뉴욕에서 티커-테이프 퍼레이드(ticker-tape parade)를 가지며 영웅적인 환대를 받았으며1954년 1월 1일 미국의 대표적인 새해 축하 행사인 로즈 퍼레이드에서 해당 시기 화제의 인물 등이 맡는 그랜드 마샬(Grand Marshal로 선정되었다. 또한 1954년에 캘리포니아주 스톡턴(Stockton)시로부터 특별표창장도 수상했는데 아래 첨부된 관련 당시 영상 기록들을 보면 미국 정부나 미국 국민들이 딘 소장이 포로가 된 것이 머쓱해서 영웅으로 치켜세우는 데서 물러났다는 주장은 역사 왜곡임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다.





이뿐만이 아니라 딘 소장이 1955년 10월 31일 전역할 때도 미 육군에서 성대한 전역식을 개최해주었고 당시 미 육군 참모총장 맥스웰 D. 테일러(Maxwell D. Taylor) 장군은 "He is one of America's heores"라고 치하했고 딘 소장의 전역을 "Gen. Dean, Taejon Hero, Ends 32 Years Service 이런 제목으로 'Democrat and Chronicle' 신문 등 수많은 미국 언론에서 상세히 보도하였다.

딘 소장이 1981년 8월 26일 영면했을 때도 미국 뉴욕 타임즈의 "Gen. William Dean Dies at 82; Hero-Prisoner in Korean War"라는 제목의 기사#를 포함하여 수많은 미국 언론이 관련 기사를 내보냈다.

위와같이 딘 소장은 3년간의 포로 생활을 이겨내고 귀환한 미군 군인정신의 표상처럼 추앙받았으며 역설적으로 포로 경력 때문에 미국에서 더욱더 지대한 관심과 영웅 대우를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딘 소장이 오히려 이러한 과도한 영웅 대우에 대해 아래와 같은 말을 하며 부담스러워하며 겸손함을 잃지 않았었다.

  • 딘 장군 회고록 서문 (p. 3)

"There were heroes in Korea, but I was not one of them."
(한국에서는 수많은 영웅들이 있었지만 저는 그런 영웅들 중 한명이 아닙니다.)

"I wounden't have awarded myself a wooden star for what I did as a commander."
(제가 지휘관으로서 했던 행위는 나무로 만든 훈장조차 탈 자격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 1953년 미국 귀환 후 기자회견에서 첫마디

"Get it out of your heads that I'm a hero. I'm not. I'm just a dog-faced[6]

soldier."
(당신들의 머리 속에서 제가 영웅이라는 생각을 버리세요. 저는 영웅이 아니고 일개 육군 보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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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대한민국 정부에서 딘 소장에게 뒤늦게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하여 영웅 만들기를 시도했는가?
대한민국 정부가 영웅 만들기를 할려고 미국에서도 영웅 만들기를 중지한 딘 소장에게 뒤늦게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했다고 주장하는데 당시 미군 포함 유엔군 고급 지휘관들은 실제 전투에서의 공적과 상관없이 예우차원에서 대부분 대한민국 정부의 무공훈장을 수여받았었다.

예를들어 미 제8군 부사령관이었던 존 B. 콜터(John B. Coulter) 중장도 1951년 8월 태극무공훈장을 수상했고,# 주한 영연방군 초대 사령관이었던 오스트레일리아군 호러스 로버트슨(Horace Robertson) 중장도 1951년 11월 태극무공훈장을 수상했으며, 전후 1960년대까지 6.25 전쟁에서의 공적이 없더라도 주한미군으로 근무한 경우도 대한민국 국가 안보에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하여 미군 고급 지휘관들에게는 대한민국을 떠날 때 예우차원에서 각종 무공훈장이 수여되어 이름조차 생소한 수많은 미군 고급지휘관들이 태극무공훈장을 수상했었다.#

결론적으로 6.25 전쟁에서 뚜렷한 공적이 없는데도 유엔군 고급 지휘관들에게 예우차원에서 대한민국 정부에서 무공훈장 수여를 남발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딘 소장에 대한 태극무공훈장 수여는 특별한 영웅 만들기의 근거자료가 될 수 없으며, 오히려 딘 소장은 6.25 전쟁에서 전투 중 실질적인 공적이 있는 군인이었기 때문에 대한민국 정부의 상식적인 무공훈장 수여 사례이자 귀환일인 1953년 9월 4일 수여식을 했기 때문에 대한민국이 보내는 감사와 환영의 의미로 볼 수 있다.

(1)~(3)의 반론들을 정리하자면 딘 소장의 대전 전투 당시 객관적인 공적으로 명예훈장을 수여받았고 그 후 포로 생활 중 부역 활동을 하지 않고 미군 장군으로서의 본분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에서 지속적으로 영웅 대우를 받았으며 대한민국 정부에서 딘 소장보다 공적이 떨어지는 유엔군 고급 지휘관들에게도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하던 시절에 장군 신분으로 솔선수범하며 최전선에서 싸우다 포로까지 되었던 딘 소장에게 태극무공훈장 수여는 영웅 만들기를 위한 특별 대우가 전혀 아니며 결국 논문과 언론 기사의 주장은 억측이다.

3.2.1. 대전지구전적비 설명문과 동상이 역사 왜곡인가?[편집]


  • 대전지구전적비 설명문 원문 발췌

"특히 미 제24사단장인 딘 소장은 부대의 진두에 서서 유엔군을 지휘하다가 북괴군의 전차가 대전시내에 침입해오자 3.5인치 로켓포를 발사하여 북괴군의 전차 1대를 직접 파괴함으로써 떨어졌던 아군의 사기를 드높이기도 하였다."


  • 동상 사진
파일:대전지구전적비-동상.jpg

상기 논문과 오마이뉴스 기사에서는 대전지구전적비 설명문과 동상이 역사 왜곡이라며 지적하였고 이유는 딘 소장이 북한군 전차 격파조를 지휘하였고 이 격파조가 실제로 북한군 전차를 파괴한 것은 맞지만, 딘 소장이 직접 3.5인치 로켓포(M20 Super Bazook)를 휴대하고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으니 역사 왜곡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전차전에서 적 전차를 파괴한 경우 직접 방아쇠를 당긴 사수뿐만 아니라 전차 승무원 공동의 전공으로 인정될 수 있는 것처럼 전차 격파조 공동의 전공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에 대전지구전적비 설명문 원문이 완벽한 역사 왜곡이라고 보기는 어려우며 광의의 개념으로 설명한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

딘 소장이 전차 격파조를 아예 지휘를 안 했다면 설명문의 내용은 명백한 역사 왜곡이 맞지만 현재 설명문은 표현상의 불명확함에 가깝기 때문에 엄청난 역사 왜곡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논문에서 다룰 내용은 전혀 아닌 것처럼 보여진다.

또한 동상의 경우는 딘소장이 전차 격파조를 지휘하여 북한군 전차를 파괴했던 대전 전투에서의 분투를 상징하는 조형물로서 예술적 형상화 과정 중 과장이 허용될 수 있기 때문에 논문에서도 이런 점을 감안하여 역사 왜곡이라고 지적하지는 않았다.

즉 주제는 같지만 오마이뉴스 기자만 역사 왜곡으로 지적을 했는데 이 동상 역시 엄청난 역사 왜곡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언론 기사를 통해 다룰 내용은 전혀 아닌 것처럼 보여진다.


3.3. 북한군 최고 계급 포로 리학구 총좌와 맞교환설[편집]


유엔군과 공산군이 서로 최고 계급 포로였던 딘 소장과 리학구 총좌가 맞교환 형식으로 송환되었다는 설이 한때 있었지만 휴전 협정 과정에서 오랜 진통 끝에 유엔군과 공산군이 원칙적으로 자유 의사에 따라 귀환을 원하는 포로들을 모두 상대방에게 송환하기로 합의했었기 때문에 해당 사항이 없고 결론적으로 근거없이 잘못 알려진 설이다.

즉 양 측이 포로 인원수 및 계급 등 조건에 따라 포로 교환을 진행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유엔군에서 포로로 붙잡고 있던 리학구 총좌 그리고 공산군에서 포로로 붙잡고 있던 딘 소장 이렇게 상대방의 고위급 포로를 수용하고 있지 않았더라도 둘다 귀환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덧붙여 미군 측 기록에도 리학구 총좌와 맞교환에 의해 귀환하였다는 근거자료는 전혀 없으며 국내에서도 2000년대까지 딘 소장이 리학구 총좌와 맞교환에 의해 귀환했다는 기사 등이 전혀 없었고 2010년대 이후 이런 설이 생겨났다.


4. 가족 관계[편집]


그는 치과의사 아버지 찰리 와트 딘(Charles Watts Dean)과 어머니 엘리자베스 프리시 딘(Elizabeth Frishe Dean)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형제자매로는 남자 형제 데이비드 딘과 여자 형제 레오나르드 딘이 있었다.

그는 마일드리드 던 (Mildred Dern)과 결혼하여 아들 윌리엄 딘 2세 (William Dean Jr)와 딸 매로리 준 딘 (Majorie June Dean)을 낳았다. 아들 윌리엄 딘 2세는 주한 미공군으로 군산 공군 기지에서 근무한 적이 있으며 이때 1961년 혹은 1963년(기사마다 시점이 다름), 대전 전투 이후 낙오하여 도피 중이었던 딘 소장에게 닭고기 등 후한 대접을 하며 2박 3일간 은신처를 제공했던 농부 박종구의 집에 찾아가 감사함을 전했다.딘少将(소장) 숨겨줬던 德裕山幕(덕유산막)에 「報恩(보은)의 별나무」한국전 교환포로 1호 美딘소장 일화 冊 펴내장군 면모 지금도 생생..." 박종구옹 회고미군 '딘' 소장


5. 기타[편집]


국방홍보원에서 딘 소장의 대전 전투 당시 행적을 그린 딘스루트(Dean's Route)라는 제목의 세미 다큐멘터리 형식의 단편 영화를 2000년에 제작하였으며# 현재 국방홍보원 홈페이지의 영상자료실에서 제목검색을 통해 영상을 찾아 시청할 수 있다.

위에서 자세히 설명한 대전역에 적재된 '보급품 후송 작전'이 진실이었는데 미군 특공대가 김재현 기관사를 비롯한 한국인 철도공무원들이 운전하는 기관차를 타고 '딘 소장 구출 작전'을 수행한 것으로 잘못 알려졌던 사실이 내레이션으로 삽입된 것 이외에는 딘 소장의 회고록을 바탕으로 역사적 사실들을 충실히 반영하였다.

6. 참고 자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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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리어 딘 소장이 "제발 나를 버리고 빨리 도망가라!"라며 엄명했지만 테이버 소위는 이를 무시하고 자기 목숨을 바쳐 딘 소장이 도망칠 시간을 벌어준다.[2] 딘 소장은 명예훈장 수훈은 과분하게 생각하였지만 전투보병휘장 수훈은 자랑스럽게 생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3] 딘 소장이 유엔군이 붙잡은 공산군 측 최고 계급의 포로인 리학구 총좌와 맞교환으로 귀환했다는 설이 있지만 휴전 협정 과정에서 오랜 진통 끝에 유엔군과 공산군이 원칙적으로 자유 의사에 따라 귀환을 원하는 포로들을 모두 상대방에게 송환하기로 합의를 했었다. 즉 양 측이 포로 인원수 및 계급 등 조건에 따라 포로 교환을 진행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유엔군에서 리학구라는 고위급 장교 포로를 수용하고 있지 않았더라도 딘 소장은 귀환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덧붙여 미군 측 기록에도 리학구 총좌와 맞교환에 의해 귀환하였다는 근거자료는 찾기 힘들며 국내에서도 2000년대까지 딘 소장이 리학구 총좌와 맞교환에 의해 귀환했다는 기사 등이 전혀 없었고 2010년대 이후 이런 설이 생겨났다.[4] 6.25 전쟁에서 미 해병대의 한국 전개는 제1임시해병여단이 8월 2일에 부산에 도착하면서부터이다.[5] '6.25전쟁사 제4권 금강-소맥산맥선 지연작전'과 '호국인물총서 (1): 6·25전쟁 개전의 순간'에서 작전 목적을 '딘 소장 구출'이 아닌 '보급품 후송' 그리고 기관차에 탑승한 미군을 '결사대원'이 아닌 '호송병'으로 정확히 기술하였지만, 철도공무원들의 증언에서 작전 목적과 호송병을 '결사대원'으로 오해한 점 이외에는 진실로 추정하여 호송병 30명이 탑승하여 29명이 전사했다고 기술한 부분은 향후 개정판에서 총원 6명에 전사자 없음으로 정정해야 할 팩트 오류이다.[6] 땅개와 일맥상통하는 미 육군 속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