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라이언 매켄지 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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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캐나다의 경우 임기가 중간에 단절되었다가 다시 집권해도 처음 집권했을 당시의 대수를 유지한다.





캐나다 제10대 총리
윌리엄 라이언 매켄지 킹
Rt Hon. William Lyon Mackenzie King

OM CMG PC

파일:William_Lyon_Mackenzie_King,_1941.jpg

출생
1874년 12월 17일
캐나다 자치령 온타리오 주 키치너
사망
1950년 7월 22일 (향년 75세)
캐나다 자치령 퀘벡 주 첼시
국적
파일:캐나다 자치령 국기(1921-1957).svg 캐나다
학력
토론토 대학교
직업
정치가, 변호사, 교수, 공무원, 언론인
종교
장로회
정당



서명
파일:윌리엄 라이언 매켄지 킹 서명.svg

1. 개요
2. 생애
2.1. 총리 이전의 삶
2.2. 집권 1기
2.3. 집권 2기
2.4. 집권 3기
2.5. 사망
3. 여담
4. 선거이력



1. 개요[편집]


캐나다의 전 총리. 자유당 소속으로 총리를 3차례(1921~1926, 1926~1930, 1935~1948) 지냈다. 역대 캐나다 총리 중 재임기간이 가장 길다.


2. 생애[편집]



2.1. 총리 이전의 삶[편집]


온타리오 주 베를린(현재의 키치너)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스코틀랜드계이며, 독실한 장로교 신자들이었다.

1891년 토론토 대학교에 입학하여 학사과정을 마치고 1896년 오스굿홀 로스쿨에서 법학 학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졸업 후 아버지의 법률 사무소에서 일하였다. 1897년에 토론토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시카고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그후 하버드 대학교에서 1898년에 정치경제학 석사과정을 마쳤고 1909년에는 하버드에서 동양인(특히 중국인)들은 서구 사회에 동화될 수 없기 때문에 받아들여선 안된다는 "동양인들의 캐나다 이민"("Oriental Immigration to Canada")을 연구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역대 캐나다 총리 중 아직까진 유일하게 박사 학위를 소유하고 있다.

1908년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어 이듬해인 1909년 7월 2일 노동부 장관이 되었다. 1919년 윌프리드 로리에 당대표가 사망하자 자유당 당수로 뽑혀 1921년 12월에 실시된 총선에서 승리하여 총리가 되었다.


2.2. 집권 1기[편집]


번영 시기의 타락이었던 1921년 12월 29일에 취임하여, 무역을 늘리기 위해 관세의 비율을 낮추었다. 1924년 정부는 1913년 이래 처음으로 그 예산의 균형을 이루었다. 파탄에 이르렀던 캐네디언 내셔널이 이득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집권1기의 성과 중 하나는 캐나다 정부의 국제 관계에서 이룬 향상이었다. 1922년 그는 영국의 터키와의 전쟁을 후원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1923년 캐나다가 처음으로 홀로 다른 나라와 조약을 맺었는데, 태평양에서의 넙치잡이를 단속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해에 열린 대영 제국 회의에서 제국 국가들 사이의 공동 외교를 위한 영국의 노력에 성공적으로 반대하였다.

1925년 총선에서 패배하여 위기에 몰렸지만 캐나다 진보보수당과의 대연정으로 일단 총리에 재임한다. 허나 진보보수당에서 아서 메이건을 총리로 내세우며 내각은 붕괴되었고 1926년 6월에 사임했다.


2.3. 집권 2기[편집]


허나 아서 메이겐은 과반의석을 확보하기 위해 조기총선을 치렀지만 캐나다 총독과의 갈등으로 지지표를 까먹으며 조기총선에서 패배했고, 이에 따라 매켄지 킹의 자유당은 다시 집권한다. 킹은 1926년 9월 25일에 다시 총리에 재임하여, 같은 해에 열린 대영제국 회의에서 캐나다의 자치권을 위한 싸움을 계속 하였다. 그 회의는 영국과 모든 자치령 사이에 동등한 지위를 가졌다는 성명을 채택하였다.

1927년 노인 연금의 실시와 함께 캐나다의 첫 연방 복지 계획이 시작되었다. 킹은 또한 실업 보험에 찬성하였으나, 1940년까지 모든 주들이 후원하는 데 확신하지 못하였다. 게다가 전 세계에 닥친 대공황에 의하여 캐나다에도 실업자들의 수가 늘어났다. 그 대책에 실패했고, 선거운동도 잘 먹히지 않아 1930년 총선에서 패하였고[1], 8월 7일에 다시 사임하였다.


2.4. 집권 3기[편집]


허나 리처드 베드퍼드 베넷 총리도 경제대공황 앞에서 별 다른 뾰족한 수가 없었고, 결국 1935년 총선에서 자유당이 승리하여 1935년 10월 23일 3번째로 다시 총리에 취임하였다. 정부는 취업을 늘리기 위해 더욱 자유로운 무역을 통과시켰고, 영국과 미국을 상대로 하는 무역 협정에 협상하였다. 킹은 여러 주의 재정을 다시 세우기 위하여, 심의회를 임명하였다.

유럽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영국이 전쟁에 관련되느냐에 의하여 영국계와 프랑스계 주민들 사이에 참전에 관한 찬성, 반대 시위가 일어났다. 결국 캐나다는 연합국 측에 가담하여, 독일, 이탈리아, 일본에 차례대로 선전포고를 하였다. 그러나 많은 프랑스계 주민들이 징병을 거부하자, 킹은 양 계통 사이의 조화를 이루기 위하여 장기간 내로 회피하였다. 1942년 정부는 징병을 인정하고, 1944년에 많은 군사들을 모집하였다. 1943년 영국의 윈스턴 처칠 총리와 미국의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과 함께 퀘벡에서 회담을 가지기도 하였다.

전쟁이 끝난 1945년 총선에서 자유당이 다시 압승하자, 킹은 전쟁 처리, 산업 증강, 군사 보존의 성공에 공헌하였다. 1948년 1월에 건강이 악화되자 사임을 선언, 11월 15일에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2.5. 사망[편집]


말년을 오타와 근교의 가티노 힐(Gatineau Hill)에 있는 시골집에서 보내다가, 1950년 7월 20일에 사망하였다.


3. 여담[편집]


현재 통용되고 있는 캐나다 달러 50달러 지폐에는 그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이처럼 캐나다에서 업적을 인정받고 있는 총리지만, 한편으론 비판도 받는 굉장히 복합적인 인물이다. 일단 그는 현대 캐나다의 자주외교와 독립의 기틀을 만들었고, 2차세계대전 기간 캐나다를 미국과 함께 연합군의 전시경제를 돌리는 공업국가로 탈바꿈시켰다. 물론 이는 그만의 업적이라기보단 당시 자유당에 뛰어난 인물이 쏟아져 나온 시기와도 맞물리긴 했다. 그들 중 상당수를 발굴한게 킹이긴 하다만. 1920년대부터 40년대 초반까지 캐나다 자주외교노선을 설계한 O.D 스켈턴, 캐나다의 전시경제와 원자력, 석유산업을 구축한 C.D 하우, 전후 캐나다 외교노선을 추구한 12대 총리이자 변호사인 루이 생로랑, 평화유지군으로 노벨평화상을 받은 레스터 피어슨과 60년대까지 캐나다 외무성을 진두지휘한 노먼 알렉산더르 로버트슨(Norman Alexander Robertson, 1904 ~ 1968) 등이 대표적.

허나 킹 자신의 몇몇 개인적인 성향은 오늘날 비판도 받는데, 일단 박사학위 논문부터가 아시아인, 특히 중국인 이민을 겨냥한 것이었고 총리 기간 중엔 대놓고 아시아인의 이민을 봉쇄했다. 오죽하면 스팀 창작모드에 역사적 모드로 아시아인 혐오주의자(...)라고 설명하는 모드가 올라올 정도. 유대인에 대해서도 편견이 있어서 홀로코스트를 피해 망명을 신청한 일부 유대인 난민들을 거부하기도 했다. 히틀러에 대해서도 초기엔 일종의 친근감을 표하며 면담도 했으나, 면담 이후 자기보다 더 미친 놈이라는걸 알고 비밀리에 전쟁 대비를 했다고 한다.

개인적인 취향도 상당히 특이해서, 귀신에 심취하거나[2] 유흥업소에 종사하는 여자들을 자신의 집에 데려오는 등 황당한 일을 많이 감행했던 총리였다. 참고로 평생 독신으로 산 인물이다. 이러다보니 현대 캐나다에선 정신나간 이미지(...), 미국과의 경제, 군사적인 결합과 캐나다의 국력신장 등이 동시에 부각되어 굉장히 복합적인 인물평을 받는 사람 중 하나이다. 그러다 보니 당시 각료들은 매켄지 킹의 기행을 국민들이 알지 못하게 하기 위해 진땀을 빼야 했다고.


4. 선거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08
캐나다 연방 하원의원 선거
워털루 노스



3,469 (51.58%)
당선(1위)
초선
1909
무투표 당선
재선
1911
3,459 (47.82%)
낙선(2위)

1917
요크 노스
2,870 (42.09%)
1919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
무투표 당선
당선(1위)
3선
1921
요크 노스
5,167 (42.67%)
4선
1922
무투표 당선
5선
1925
9,534 (48.74%)
낙선(2위)

1926
프린스 앨버트
7,920 (77.50%)
당선(1위)
6선
1926
8,933 (64.87%)
7선
1926
무투표 당선
8선
1930
9,283 (53.43%)
9선
1935
9,087 (54.67%)
10선
1940
8,310 (45.96%)
11선
1945
7,799 (40.32%)
낙선(2위)

1945
글렌가리
4,552 (93.33%)
당선(1위)
12선

[1] 사실 득표율은 소폭 상승하기는 했다. 그러나 진보보수당에게 많이 밀렸다.[2] 사망 후 유품을 정리하는 와중에 알려졌는데, 죽은 어머니나 개와 대화하면서(...) 일을 꾸려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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