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린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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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윌리엄 린튼
William Alderman Linton | 印敦
[1]


파일:윌리엄 린튼.jpg

출생
1891년 2월 8일
미국 조지아주 토머스빌
사망
1960년 8월 13일 (향년 69세)
미국 테네시주 녹스빌
직업
장로교 목사, 독립운동가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가족
장인 유진 벨, 아내 샬롯 벨[2], 아들 휴 린튼[3], 손자 존 린튼
종교
개신교(장로회, 미국 남장로회)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미국 장로교 선교사로 3.1 운동 당시 만세시위를 주도한 독립운동가[4]. 201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2. 생애[편집]



1891년 2월 8일에 미국 조지아주 토머스빌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매우 똑똑했던 그는 조지아 공과대학교를 입학해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어머니가 사망한 후 그는 대학을 나와서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하였고 미국을 떠나 1912년 22살의 나이에 한국으로 가게되었다.[출처] 그는 한국어를 배운 뒤 군산영명학교에서 영어와 성서교리 등을 가르쳤으며 1917년에는 영명학교 교장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시위를 후원하고 한국의 독립을 외국 신문을 통해 주장하였다. 그 후 3.1운동에서 최초의 만세시위였던 군산 만세시위를 배후에서 지도하기도 하였다.

당시 일본제국 경찰은 그가 만세시위를 배후에서 지원하고 지도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의 집과 교회 등을 수색하였다. 일경은 그의 교회에서 독립선언서 등사본 2000매를 발견하였다. 이로 인해 일제 측은 교장이었던 린튼을 비롯한 외국인 선교사들과 교사들이 만세시위를 선동하였다고 의심하였다. 이후 1919년 기독교 평신도회의에 참여하였고 영자신문지에 한국의 독립운동을 생생히 전하며 설파하는 글을 기고하였다.[5]

이후 1922년에 장로교 선배 교사인 유진 벨의 딸 샬럿 벨과 결혼하고 4명의 남자아이를 낳게 되었다. 4남 출생 이후 그는 컬럼비아대 신학대학원에 진학, 신학석사를 취득하고 목사안수를 받은 후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 후 전주신흥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던 중 일제의 강제적인 신사참배를 거부하였고 1940년에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되어 한국을 떠나게 되었다.[출처]

1923년 4월 1일 군산에서 낳은 첫째 아들[6]제1해병사단 정보 장교로 펠렐리우 전투에 참전하였는데, 1944년 10월 10일 끝까지 저항하던 일본군의 위협이 도사리는 깊은 동굴에 직접 들어간다. 태어난 고향이 군산이고 어린시절부터 한국에서 살아서 한국어가 원어민수준이던 그는 동굴에 숨어있는 한국인 강제노동자들을 동굴 밖으로 나오라고 옥쇄하지 말고 나와 함께 가면 고향 한국으로 갈수 있다고 한국어로 설득하여 수많은 생명을 구했다. 그 용맹함과 수 많은 한국인 강제 노동자와 함께 돌아온 공로로 미은성훈장을 받게 된다.출처 그의 셋째 아들[7] 또한 6.25 참전 용사이다.

해방이 된 후 그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한국전쟁 중에도 한국에서 머물렀다. 그는 전라북도 전주에서 성서학교를 운영하였다. 그러던 중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하면서 미국과 일본을 여러차례 다녀오게 되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1956년에 대전기독학관을 설립하고 1959년에는 대전대학 (現 한남대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1960년에 암으로 인해 학장직에서 사임하고 미국 테네시녹스빌로 귀환하였고 결국 1960년 10월 13일에 사망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201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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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명 인돈(印敦).[2] Charlotte Witherspoon Bell Linton[3] Hugh MacIntyre Linton. 한국명 인휴(印休).[4] TV조선 뉴스퍼레이드 230518[출처] A B 사이버외교사절단 반크[5]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6] William Alderman Linton Jr.[7] William MacIntyre Lint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