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월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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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M[1]
윌리엄 월튼
Sir William Wal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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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윌리엄 터너 월튼
William Turner Walton
출생
1902년 3월 29일
영국 잉글랜드 랭커셔 주 올덤
사망
1983년 3월 8일 (향년 80세)
이탈리아 이스키아 섬
국적
[[영국|

영국
display: none; display: 영국"
행정구
]]

직업
작곡가

1. 개요
2. 생애
2.1. 사생활
3. 창작 성향
4. 주요 작품



1. 개요[편집]


20세기 초중반에 활약한 영국 클래식 작곡가이다.


2. 생애[편집]


영국 중부의 올덤에서 태어났다. 월튼의 아버지도 음악가로 음악을 가르치는 집안이었으며, 집이 부유하진 않았으나 음악에 대한 재능 때문에 옥스퍼드에서 음악을 배웠다. 젊었을 때 영국 상류층의 유명한 음악 후원자였던 싯웰 (sitwell) 남매와 친해져 그때부터 그들의 후원을 받으면서 작곡을 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싯웰 남매의 영향을 받아서 상당히 전위적인 성향을 추구했었다. 20살 즈음에 작곡한 파사드(Façade) 모음곡이 대표적인데, 이 작품은 소규모 앙상블과 낭송을 위한 음악으로 에디트 싯웰이 작사한 시를 낭송한다. 이 작품은 처음에는 이상하고 조잡하다는 비난을 받았으나 후에 재평가를 받아서 유명해졌으며, 발레 음악으로도 많이 사용된다.

윌리엄 월튼, 파사드 중에서

이처럼 그의 초기의 작품들은 나름의 독창성과 실험적인 경향을 갖고 있었지만 점차 영국 낭만주의 음악가인 엘가나 휴버트 패리의 영향을 많이 받아 전위적인 측면이 쇠퇴하고 낭만주의로 회귀하려는 경향이 강해지게 된다.

제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대에는 애국적인 작품이나 영화 음악을 많이 작곡하였으며 그 뒤 7년 간 '트로일러스와 크레시다'(Troilus and Cressida)라는 고전주의적인 오페라의 작곡에 착수하여 1954년 초연된다. 자세한 것은 후술하는 작품 항목 참고. 월튼은 당시 한창 인기를 구가하면서 자신을 명성을 능가하기 시작하던 벤저민 브리튼의 오페라를 의식하고서 이 오페라를 썼다고 하며, 이 트로일러스와 크레시다가 브리튼의 '피터 그라임스'처럼 인기 있는 작품이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 오페라는 결과적으로 흥행에 실패하였으며, 이로 인해 월튼은 여러모로 자신감을 많이 잃었다.[2]

한편 월튼은 영화 음악도 많이 제작하였는데, 음악 경력 초기에는 헝가리 출신의 영화 제작자이자 프로듀서인 폴 치너(Paul Czinner)와 많이 작업하였고 2차 대전 종전 시기부터는 명배우이자 영화 제작자였던 로런스 올리비에셰익스피어 영화의 음악을 많이 담당하였다. 또한 셰익스피어 연극에 사용할 부수음악도 많이 작곡하였다.

월튼은 1956년이탈리아 나폴리 부근의 섬 이스키아(Ischia)로 이주하여 죽을 때까지 여기서 살았다. 이주한 후에도 종종 작품을 썼는데, 1970년대 이후에는 창작력이 쇠퇴하여 많은 작품을 쓰지 못하고 주로 과거의 작품을 개작하거나 몇몇 소품을 작곡하였다. 죽기 몇 년 전에 지휘자 앙드레 프레빈을 위해 교향곡 3번의 작곡에 착수했으나 곧 포기하기도 했다. 월튼은 1983년에 81세로 사망하여 이스키아 섬에 화장되었으며,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는 그를 기념하기 위한 기념비가 세워졌다.


2.1. 사생활[편집]


젊었을 때의 사진을 보면 상당한 미남이었으며, 얼굴값을 했는지 연상 킬러로 유명했다고 한다. 싯웰 남매와 친하게 지내면서 영국 귀족 사회에서 놀면서 유부녀들과 가깝게 지냈으며, 교향곡 1번을 작곡할 때에는 미모의 귀족 미망인과 사귀고 있었다.[3] 결국 4악장은 20살 이상 연상유부녀인 앨리스 윈봄이라는 여성을 사귈때 작곡했다.[4] 그러나 앨리스 윈봄은 암으로 죽게 되고, 그 이후 수재너 길이라는 아르헨티나 여자와 결혼, 1956년 이탈리아로 거처를 옮기면서 작곡에 매진한다.[5] 또한 항목 위의 프로필 사진에서도 보다시피 상당한 골초였는데, 1966년폐암 수술을 받은 후 담배를 끊었다.


3. 창작 성향[편집]


월튼이 초기에 쓴 작품들은 그 분야에서 당대 최고라고 칭송받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그의 교향곡 1번은 1차 세계 대전 이후 최고의 교향곡이라는 평을 받았고, 카라얀이 경의를 표했던 '벨샤자르의 향연' 또한 20세기 최고의 성악 작품이라는 평을 받았다. 금관과 합창을 시의적절하게 사용하는 능력이 뛰어났고, 편곡 실력도 훌륭해서 카라얀의 미국 투어에 사용한 The Star-Spangled Banner의 편곡판은 청중들을 놀라게 할 정도였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은 이처럼 이미 젊은 나이에 교향곡, 협주곡, 오라토리오 등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을 남긴 월튼이 교향악 측면에서 그의 선배였던 장 시벨리우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또는 동시대의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처럼 음악사에 이름을 남길 대작곡가로 성장할 것으로 기대하였다. 하지만 40세가 넘어가면서 초기 작품을 뛰어넘을 만한 작품이 별로 나오지 않고 낭만주의를 답습한 보수적인 음악 성향을 고수하자 그와 그의 작품에 대한 인기와 찬사는 점점 식어갔다.[6] 영국 한정으로 보면 선배였던 에드워드 엘가나 랠프 본 윌리엄스를 뛰어넘지 못했다는 평을 받고 있으며 동시대에 활약했던 11년 후배 벤저민 브리튼에게도 완전히 밀린 상황.

다만 1960년에 쓴 '교향곡 2번'을 기점으로 소싯적의 번뜩이는 독창성을 어느 정도 회복하여 늘그막에 다시 주목할 만한 작품을 남겼는데, 1967년에는 그에게 처절한 실패를 안겨주었던 오페라에 다시 도전하여 1막짜리 희극 오페라 '곰(The Bear)'을 작곡하여 호평을 받아 과거의 상처를 어느 정도 회복하기도 했다.

월튼은 자신의 보수적인 음악 성향과 별개로 새로운 음악에 대해 호의적이고 열린 시각을 갖고 있었는데, 이스키아 섬에서 독일 작곡가 한스 베르너 헨체와 망년지교를 나눈 것이 그 예이다. 당시의 전위적 작곡가 중 가장 주가가 높은 인물 중 하나이면서도 아웃사이더를 자처했던 헨체를 월튼은 크게 아껴주었으며, 젊은 세대 중 가장 비상한 재능의 소유자라고 평가했다. 헨체의 동년배였던 피에르 불레즈가 기성 작곡가들을 백안시하며 괜한 트러블을 만들고 다녔던 것과 비교되는 대목.


4. 주요 작품[편집]


기본적으로 월튼은 완벽주의 성향을 가진 작곡가로 비발디모차르트 등 속필로 유명한 작곡가와는 정 반대로 작곡 속도가 느리기로 악명이 높았다. 그래서 10대 후반부터 작곡을 시작했고 81살까지 장수했음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작품 수가 그리 많지 않으며, 기존에 완성된 곡을 수정하거나 개작하여 다시 발표하는 경우도 상당히 많았다.

호소력 있는 합창과 월튼의 트레이드 마크인 엄청난 금관을 즐길 수 있는 곡으로, 혹자는 헨델의 '메시아', 멘델스존의 '엘리야', 엘가의 '제론티우스의 꿈'을 이어가는 영국 최고의 오라토리오라고 평가한다.
  • 교향곡 제1번
1935년 초연된 그의 교향곡 1번 역시 엄청난 금관과 4악장의 화려한 푸가 기법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월튼 자신은 이전까지 푸가 기법을 몰라서 옥스퍼드 음악사전을 보면서 4악장을 작곡했다고 한다(...)
1939년 작곡된 바이올린 협주곡 역시 유명한 곡으로, 매우 현란한 테크닉의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의 마찰이 매력적인 작품이다.
  • 오페라 '트로일러스와 크레시다(Troilus and Cressida)'
1954년 초연된 오페라로 영문학의 아버지 제프리 초서의 동명의 서사시를 각색한 작품이다. 착수부터 완성까지 7년이나 걸린 노작이지만 현재에는 별로 연주되지 않는다. 이 작품은 공연을 준비할 때부터 문제가 많았는데, 이 작품의 연출과 의상/배경을 담당하기로 했던 로런스 올리비에와 미술가 헨리 무어 등이 참여를 포기했으며 여주인공인 크레시다 역을 맡기로 한 소프라노 엘리자베트 슈바르츠코프도 출연을 거부했다. 이런 대규모 사퇴의 배경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으나 월튼의 독단적인 태도와 더불어 기대에 못 미치는 작품성이 원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 작품은 영국의 코벤트 가든 초연 때부터 극적인 요소가 부족해서 지루하고 음악도 진부하다는 혹평을 받았으며[7] 이후 뉴욕의 메트로폴리탄이나 밀라노의 라 스칼라 등의 유명한 오페라 극장에서도 공연됐을 때에도 흥행과 비평에서 모두 실패하였다. 그의 사후 현재까지도 이런 평가는 바뀌지 않고 있는데, 흥행을 위해 실험 대신 안정을 택한 것이 결론적으로 잘못된 선택이었던 셈. 한편 이 작품은 1976년에 개작되었는데, 크레시다의 음역을 소프라노에서 메조 소프라노로 낮추는 등 상당한 변화를 주었지만 결과적으로 이 개작도 원작을 크게 뛰어넘지는 못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야심만만하게 도전했던 오페라의 실패를 딛고 작곡한 일종의 재기작으로, 당대의 명 첼리스트였던 그리고리 피아티고르스키를 위해 작곡하였다. 실제로 이 작품으로 작곡가로서의 자신감을 어느 정도나마 회복할 수 있었다.
  • 비올라 협주곡
이 외에도 파르티타, 포츠머스 서곡, 요하네스버그 서곡 등 여러 서곡과 교향곡 2번 등이 유명하다. 후기의 작품 중에서는 힌데미트 변주곡과 파르티타가 자주 연주된다.
  • 기타를 위한 5개의 바가텔
지휘자 말콤 아놀드의 탄생 50주년을 기념하여 줄리안 브림에게 헌정한 작품이다. 1972년 브림이 초연을 했고 1975년에 월튼이 한데 묶어서 출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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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Order of Merit. 국위선양을 한 사람에게 수여하며, 최대정원이 24명으로 한정되어 있다.[2] 오페라의 실패는 그가 런던을 떠난 원인 중 하나이기도 했다. 다만 월튼은 이 오페라 이후 첼로 협주곡 등으로 재기에 성공한다.[3] 3악장까지 작곡했을 때 그 미망인과 헤어지면서 스트레스로 작곡을 계속하는 데 애로가 있었다고 한다.[4] 그래서 그런지 비평가들은 3악장까지의 음악은 4악장과는 느낌이 다르다고 평하기도 한다.[5] 월튼은 매일같이 비가 내리거나 흐린 중부 영국의 고향을 싫어했다.[6] 1939년 인터뷰에서 월튼은 젊었을 때 재능이나 인기는 시들기 마련이라는 식의 일종의 자기 실현적 예언을 했다고 한다.[7] 다만 이와 같은 평가는 다소 가혹한 측면도 있다. 오페라가 초연된 1950년대에는 12음 기법과 같은 전위음악이 유럽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었기 때문에 주류 음악가 대부분이 월튼식의 낭만주의적 작법을 청산해야 할 구시대의 유물로 간주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