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테쿰세 셔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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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테쿰세 셔먼
William Tecumseh Sherman


파일:제너럴 셔먼2.jpg

출생
1820년 2월 8일
미국 오하이오 주 랭커스터
사망
1891년 2월 14일 (향년 71세)
미국 뉴욕 주 뉴욕 시
국적
파일:미국 국기.svg


학력
미국육군사관학교 (학사)
정당


배우자
엘리노어 셔먼 (1824년 ~ 1888년, 1850년 결혼)
형제자매
찰스 테일러 셔먼, 존 셔먼, 호이트 셔먼
종교
가톨릭무종교 (추정)[1]
서명
파일:William_Tecumseh_Sherman_Signature.svg
군인 경력
복무
미합중국 육군
1840년 ~ 1853년
1861년 ~ 1884년
최종계급
육군 원수
주요참전
남북전쟁


윌리엄 테쿰세 셔먼의 초상화

1. 개요
2. 생애
2.1. 남북전쟁 이전
2.2. 남북전쟁 당시
2.3. 전후 행적
3. 비판
3.1. 비판에 대한 반론
4. 성격
5. 모순적인 인종관
5.1. 40에이커와 노새
5.2.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태도
6. 명언
7. 기타



1. 개요[편집]


미국 남북전쟁 당시 연방군 육군의 장군. 최종 계급은 육군 원수(General of the Army, GA).


2. 생애[편집]



2.1. 남북전쟁 이전[편집]


파일:William-Tecumseh-Sherman.jpg
[2]

1820년 2월 8일 오하이오 주 랭커스터 시에서 성공한 오하이오주 대법원 판사인 찰스 로버트 셔먼[3]의 아들로 태어났다. 보다시피 이름이 상당히 특이해서 평생 이름을 댈 때마다 이목을 끌었다고 하는데, 셔먼의 아버지가 그 유명한 원주민 족장처럼 강인해지라고 테쿰세의 이름을 붙였던 것이다.

9세에 아버지가 병으로 죽는 바람에 재혼한 어머니와 양부 토마스 어윙[4] 밑에서 자랐다.[5]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졸업하고 육군 장교로 임관해 미국-멕시코 전쟁에 참전했으나 병참 장교와 행정 역할이었기에 전투 경험이 없어 성과와 명성은 미미했다. 이후 소령으로 예편한 뒤 여러 직업을 전전했지만 제대로 되는게 없었다. 그러다가 루이지애나 군사학교[6]교장으로 1860년에 부임해서 일하다 1861년에 루이지애나가 미 연방에서 탈퇴하자 바로 그만두고 세인트루이스로 가서 잠시 철도회사일을 한다. 이후 남북전쟁이 발발하여 연방 육군에 여단장으로 복귀하면서 그의 삶은 빛나기 시작했다.


2.2. 남북전쟁 당시[편집]


이 때 셔먼의 연방 육군 재입대도 당시 미 의회 의원이었던 동생 존 셔먼의 입김이 작용했다. 당시 군에 대한 정치인들의 영향력은 대단했는데 그랜트 장군도 링컨 대통령의 도움이 있었기에 해임 위기를 면하고 무사히 진급했다.

전쟁 초기에는 동부전역에서 1차 불 런 전투에 참전, 그랜트보다 먼저 준장으로 승진하였다. 승진 이후 서부전역의 켄터키 주에 배치되었지만 이렇다 할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으며 적군에 비해 전력이 부족하다는 불평을 늘어놓을 정도였고, 잠시 전장을 떠났다가 그랜트의 포트 헨리, 포트 도널슨 공략전에서 보급을 맡아 그랜트와 안면을 트게 되었다. 1862년 이후로 셔먼은 그랜트 휘하에서 샤일로 전투, 빅스버그 포위전, 채터누가 전투 등 주요 전투들을 치렀으며 그랜트와 친분을 쌓고 그의 오른팔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그랜트 휘하에서의 그는 전반적으로 전술적 목표를 성공적으로 달성했지만 뛰어남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랜트가 연방군 총사령관이 되고 동부전역으로 이동한 후 셔먼은 그랜트와의 친분에 힘입어 서부전역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랜트가 리의 발목을 잡는 동안 셔먼이 남부를 휩쓴다는 대전략은 그랜트와 셔먼이 함께 마련했다고 여겨진다. 1864년 셔먼은 압도적인 병력으로 조지아로 남하하지만 남군의 조셉 존스턴의 공간으로 시간을 버는 전략을 마주하게 되었고, 애틀랜타 근처까지 진격하는 데는 성공하지만 전술적으로는 존스턴에 의해 상당한 피해를 강요받았다. 그러나 존스턴도 셔먼이 애틀랜타 코앞까지 도달하면서 심한 정치적 압박을 받게 되었고 결국 젊고 저돌적인 존 후드로 교체되었다. 후드는 셔먼의 보급선을 위협하고 여러 적극적인 공세와 기만을 시도했지만 셔먼은 이에 넘어가지 않았고, 후드가 애틀랜타를 포기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애틀랜타 함락 이후로도 후드는 테네시로부터 이어지는 셔먼의 보급을 끊임없이 방해했다. 후드는 셔먼을 직접 상대하는 대신 테네시를 침공해 셔먼의 후방을 위협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이에 셔먼은 후드를 끝장내는 대신 조지 H. 토머스를 테네시로 파견해 후드를 상대하도록 한 후 대군을 이끌고 조지아 주를 가로지르는 '바다로의 진군'을 시작했다. 방해를 받지 않게 된 셔먼은 마주치는 소규모 남군을 박살내며 보급을 현지조달, 조지아 주를 초토화시키며 대서양 연안의 서배너에 도달해 충분한 해상 보급을 받을 수 있었다. 그랜트는 셔먼의 대군이 바다를 통해 북쪽으로 올라와 포토맥군을 지원하기를 원했지만 셔먼은 대신 육상으로 북진, 사우스 캐롤라이나와 노스 캐롤라이나를 초토화시키고 리의 후방을 위협했다. 이는 피터스버그와 리치먼드의 함락, 애퍼매톡스에서의 리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나는 데 공헌했다고 평가된다.

그의 능력은 전략가에 치중되어 전술가로서의 능력만 따진다면 별로 보잘 것 없었다는 평가가 있다. 간단히 말해서 '싸우기 전에 이기는 조건을 조성, 확보해내는 능력'은 탁월했지만, '전장에서의 직접적인 싸움'에서는 평범한 수준이었다. 순수한 전술가로서의 기량은 '치카마우가의 바위'로 불리는 조지 H. 토머스 쪽이 셔먼보다 더 유능하다고도 하는데, 그는 치카마우가에서 몇 번이고 전군이 붕괴되는 상황에서도 부대를 유지하여 반격의 기회를 만들었고, 채터누가나 내슈빌에서도 뛰어난 전술적 역량을 선보였다. 남부 육군에 워낙 뛰어난 전술가들이 많다보니 남북군을 통틀어 평가하자면 셔먼은 평균보다 조금 더 나은 정도였다는 주장도 있으며, 애틀랜타 전역에서의 상대였던 조셉 존스턴에게 어려움을 겪은 것을 예로 들기도 한다. 그러나 조셉 존스턴은 유능한 장군이었고 로버트 E. 리보다 더 계급이 더 높았다.[7] 이런 존스턴의 뛰어난 방어진을 피하고 계속 전진한 셔먼이 유능한 편이라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8]

그러나 그의 전략가적 능력, 특히 전략적 식견은 남북군 전체를 통틀어 어떤 장군도 비견될 수 없을 정도로 넓고 선진적이었다. 이는 1864년의 대결로 셔먼의 숙적 취급을 받는 조셉 존스턴의 경우를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는데, 존스턴은 전략적 식견 측면에서 셔먼의 의도를 읽어낼 수는 있었고 실제로도 계속 우월한 교환비로 승리하여 1:3 정도 되던 남부 육군과 북부 육군의 비율을 거의 1:1.5까지 끌어내렸다. 그러나 셔먼은 계속 지면서도 꾸준히 애틀랜타까지 진격했고,[9] 셔먼이 애틀랜타의 코 앞까지 진격하자 남부의 가장 중요한 지역중 하나인 조지아 주에서 계속 밀린다는 전황에 정치적 부담이 가중되어[10]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남부연맹 정부는 존스턴을 해임했다. 존스턴은 지치고 규모가 줄어든 북부 육군을 애틀랜타 근처 유리한 지형에서 쳐부수려 준비하고 있었으나 이는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11] 애틀랜타를 무사히 함락시킨 이후 그의 전략은 더욱 빛을 발했는데, 후방에서 깔짝대던 후드를 쫓는 대신 토머스에게 병력을 맡겨 북부의 우월한 전력으로 후드를 끝장내는 한편, 바다로의 진군으로 조지아 주를 박살내며 전쟁 수행 의지를 꺾고 보급선에서 자유롭게 기동하며 해상보급을 활용할 수 있었다. 항구에 도착한 이후에도 단순히 북부로 귀환하는 대신 사우스 캐롤라이나, 노스 캐롤라이나를 휩쓸며 리의 후방을 압박하면서 남부군의 마지막 주전력인 리의 북버지니아군을 항복시키고 전쟁을 끝내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존스턴 해임 후 남부 정부는 좀 더 공격적인 성격의 후드 장군을 서부전역 사령관으로 임명했는데, 이런 도박은 어찌 보면 남부로서는 근거가 있는 선택이었다. 이전에 동부에서도 존스턴이 전투에서 계속 이겼음에도 북부 육군이 남부연맹의 수도인 리치먼드 코앞까지 진격한 상황이 벌어졌는데 이 때 존스턴을 해임하고 좀 더 공격적인 성향의 로버트 리를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재미를 본 전적이 있었다.[12] 어쨌든 전임자였던 존스턴이 야금야금 북군을 갉아먹어놓은 것도 있고, 남부 육군이 애틀랜타를 지키기 위해서 주위에서 병력을 닥닥 긁어모은 것도 있어 후드는 더 우세한 병력으로 애틀랜타 전투에 임할 수 있었으나,[13] 셔먼을 쫓아내기 위해서 무모한 공격을 계속 감행한 끝에 전술적, 전략적 양쪽 면에서 다 패했다. 어딜 가나 다 이긴 싸움 말아먹는건 높으신 분들 주특기 물론 북군 입장에선 땡큐였지만[14]


2.2.1. 바다로의 행진[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셔먼의 바다로의 행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셔먼의 능력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전역이다.


2.3. 전후 행적[편집]


파일:말년의 셔먼.jpg
말년의 셔먼

남북전쟁 이후 셔먼은 중장으로 진급했다. 대통령에 당선된 율리시스 S. 그랜트는 그를 미국 역사상 두 번째 육군대장으로 진급시키고 총사령관의 자리에 올렸으며, 셔먼은 그 후 64세에 은퇴할 때까지 15년간 그 자리를 유지했다. 이후 남북전쟁에 관해 그가 쓴 회고록은 명저로 평가받아 문인으로 명성을 얻기도 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편지 쓰기를 좋아해 거의 평생, 전쟁중에도 매일 편지 여러 장을 쓰고 받았기에 필력이 상당한 수준이었다.

은퇴 후 셔먼은 정계 진출을 권유받았으나 모두 거절하고 조용히 살았다. 188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제임스 G. 블레인 국무장관에게 대선에 출마하는게 어떠냐는 제안도 받았는데 스스로 거절했고, 대신 블레인이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15] 만약 이때 출마해 당선되었다면 율리시스 S. 그랜트 이후 또다시 나온 남북전쟁 전쟁영웅 대통령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은퇴한지 7년이 되던 1891년에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그의 장례식 때는 남북전쟁 당시 적수였던 남부 육군의 조셉 존스턴도 참석했는데, 비가 오는 추운 날인데도 경의를 표하기 위해 모자를 벗고 있었다.[16] 존스턴의 친구가 감기에 걸릴 수 있으니 모자를 쓰라고 권유하자 존스턴은 '만약 내가 관 속에 있고 빌리(윌리엄의 애칭으로 셔먼을 말한다)가 자리에 있었다면 빌리 역시 모자를 벗고 있었을 것'이라고 답하였다.[17] 그 때문에 존스턴은 폐렴에 걸려서 10일 후에 사망했다는 설도 있으나, 실제로 당시 조셉 존스턴이 폐렴을 투병하긴 했어도 사인은 심장마비였다. 존스턴은 팔순을 넘긴 고령이었다.

가족으로는 아내 엘레노어와 8명의 자녀, 11명의 형제들이 있다.

리델 하트와 같은 전사가에게 '최초의 현대적 장군'이라는 평을 받았다. 총력전(Total War)의 선구자로 칭송받기도 한다.

휘하 육군 장병들은 그를 '빌리 아저씨'라 불렀다고 한다. 빌리는 셔먼의 이름인 '윌리엄'의 애칭.


3. 비판[편집]


셔먼의 초토화 전술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역사학자들은 셔먼이 '바다로의 행진'을 개시하기 이전부터 전세는 북부 쪽으로 기울어 있었으며 공업생산력이 북부에 비해 크게 뒤떨어진 상태에서 대부분의 군수물자를 수입에 의존하던 남부의 실질적 전쟁지속능력이 해군의 패배로 인한 제해권 상실과 뒤이은 오랜 해상봉쇄로 이미 한계에 달해 있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식량의 경우도 이미 전시체제 하에서 노동가능 인구의 대부분과 흑인 노동력의 감소[18]농업이 황폐화되어 가고 있었던 점을 생각하면 애초에 파괴를 하든 말든 북군 점령지역에서 남군으로 군량미 송출이 제대로 될 수 없었다.

민간인 피해도 대대적인 학살만 없었다 뿐이지 사상자 수는 결코 적지 않고, 초토화 전술이라는 명목 아래 수없는 약탈, 방화 등 거의 전쟁 범죄에 준하는 폭력이 가해졌다는 점을 생각하면 아래에 인용된 명언들처럼 그저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한 필요악이 아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3.1. 비판에 대한 반론[편집]


J. 맥퍼슨(J. MacPherson)의 "Battle Cry of Freedom"을 읽어보면 이 주장이 틀렸다는 걸 알 수가 있다. 공업생산력 및 제해권 문제는 개전 초기 이후부터 지속적으로 남부의 골칫거리였지만, 지상에서 남군은 잘만 싸웠고 거의 링컨을 실각시키는데 성공할 뻔 했다.[19] 그러나 서부로의 진격의 예고편격인 애틀랜타 전투를 통해 남부주의 교통 및 물류의 거점으로서 보급을 책임지던 대도시 애틀랜타를 점령했고, 덕택에 북부주들에서 전쟁에 대한 지지가 매우 높아졌다. 이후 재선에 성공한걸 상기하면 이건 정치적으로 필요한 진격이었다. 특히, 서배너같은 경우 사실상 남부의 몇 안 되는 마지막 항구였고, 남군이 철도를 파괴하는 통에 보급이 부족했던 셔먼의 군대 입장에서는 항구로의 진격은 군사적으로도 필수적이었다. 물론, 여기에 남부의 후방을 휘저으면서 그랜트와 리가 대치하고 있는 동부전선을 흔들겠다는 계산도 깔려있었다.[20][21] 또한 셔먼 입장에서는 지금까지 뒤쫓고 있었던 존스턴/후드 군대를 거꾸로 자신을 쫓게 만들어서 유리한 지형에서 승부를 보겠다는 생각도 있었을 것이다.

4. 성격[편집]


남북전쟁 당시 양군 장성들 중에서는 독특한 캐릭터를 가진 인물들이 많은데, 셔먼도 마찬가지였다. 문서 내 사진에서 하나같이 미간을 찡그린 표정으로 일관하는 것을 보면 알겠지만 생전엔 꽤나 괴팍하고 다혈질에 사나운 성격이었다.

한편 의외로 꽤나 우울한 정신 상태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전쟁 전에 캘리포니아 시절에는 잔뜩 긴장한 상태와 현실 도피성 우울증세에 번갈아 가며 시달렸다. 그리고 1861년에 준장이 되어 켄터키와 테네시군 사령관에 임명되자, 그 직책의 부담감을 이기지 못하고 '50만명쯤은 있어야 남부 놈들을 이기겠다'는 비관적인 생각을 공식 석상에서 내뱉거나, 대통령 링컨에게 자신을 해임시켜달라는 편지를 여러 차례 보내기도 했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그가 양극성 장애(조울증) 환자였다고 보기도 한다. 그의 조증 삽화가 지휘에 있어서 발현된 것이 바로 그의 파괴적인 초토화 전술이라는 것. 또한 그의 시니컬한 어록들에도 양극성 장애의 삽화들이 일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물론 생전에 셔먼 본인이 공식적으로 정신과적 진료를 받거나 양극성장애를 판정받은 적은 없으며, 이는 그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그의 행동양식과 남겨진 기록들을 바탕으로 추정한 것이다. 가령 보스턴 터프츠 대학교 의대의 나시르 가에미 교수는 저서 "광기의 리더십(A First-rated Madness)"에서 셔먼을 양극성 장애가 발현된 케이스 중 하나로 뽑았다.


5. 모순적인 인종관[편집]


거기에 더해 당대 기준으로 봐도 지독한 인종차별가였다. 다른 장군들과는 달리 자신의 부대에 흑인 병사들은 일절 받지 않았다고 하며, 흑인 노예들을 해방하는 것에 찬성한 이유도 촌부 놈들의 방아쇠를 당겨줄 손가락을 하나라도 더 줄이기 위해서였다. 이는 그가 보낸 서면들에 잘 나와있다. 일설에는 개인적으로는 밑의 어록에도 있듯 노예찬성파였는데 미국이 분리되는 것은 용납 못한다고 북군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도 있다.[22]

난 깜둥이들의 해방을 위해 참전한 게 아니다. 난 조국의 시민으로서 책임감을 느꼈기에 전쟁에 참여한 것이다.


깜둥이들은 친구로 두기엔 좋은 녀석들이다. 하지만 그 녀석들이 나랑 함께 투표소에 가서 내가 찍은 후보를 찍을 정도로 좋은 녀석들이라 보진 않는다.


이러한 차별은 유대인과 원주민(인디언)에게도 통용되어서, 병사들을 소집하던 중에 이런 대화를 했을 정도.

동료 장교: 유태인들과 인디언을 소집할 생각은 없소? 그 친구들도 총알 막는덴 백인들 만큼이나 쓸모있소만.

셔먼: 모래주머니가 더 효과적이오.


그런데 괴팍한 그 성격 만큼이나 인종관마저도 배배 꼬여 있어서, 인종차별주의자면서도 인종차별적인 법안엔 반대하는 등[23] 여러모로 모순되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노예제에 대해서는 그리 반대하지는 않으면서도, 동시에 흑인 가족을 분리하는 정책이나 흑인들을 문맹으로 만들자는 법규조항엔 강력하게 반대했다.

상관이었던 율리시스 그랜트와 성격은 상극이었지만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상술했듯이 셔먼은 매우 거칠고 다혈질이지만 그에 반해 그랜트는 전쟁터에서 울만큼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그리고 극심한 인종차별주의자 였던 셔먼과 달리 그랜트는 부관으로 아메리카 원주민 출신을 둘 만큼 인종 차별과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정작 그랜트가 총사령관이 되자 셔먼에게 서부지역 사령관을 맡겼으며, 대통령이 되었을 때는 셔먼을 군 장성에 앉혔다. 셔먼도 이에 화답하듯 전쟁기간 동안 그랜트와 긴밀히 협력하여 북군을 승리로 이끌었고, 그랜트가 임명한 직책에 충실히 임했다.


5.1. 40에이커와 노새[편집]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1865년 1월, 셔먼은 군정장관 자격으로서 특별행정명령을 통해 조지아 주와 연안 섬들에서 해방된 흑인 자유민이 40에이커의 땅과 노새 한마리씩을 받을 수 있도록 선포했는데 이는 흑인들이 앞으로 정치적 자유뿐만 아니라 경제적 자립기반이 필요함을 깨달은 바에 의한 매우 전향적인 조치였다. 이로인해 약 4만여명의 흑인들이 자신의 경작지와 경작 수단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러한 조치는 링컨의 암살 이후 대통령직을 승계한 앤드류 존슨에 의해 없던 일로 되었고 땅은 백인 원소유주들에게 돌아갔다. 토지가 없어 생계가 막막했던 흑인들은 다시 옛 주인인 백인 농장주들의 소작농으로 돌아간다. 이후 "40에이커와 노새"는 좌절된 미국 흑인들의 꿈을 상징하는 단어가 되었다[24].

5.2.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태도[편집]


같은 미국인들끼리의 남북전쟁에서는 그나마 자비를 베풀어주었지만, 아메리카 원주민들과의 전쟁에서는 그런 거 없고 더 심했다. 그의 미들네임인 테쿰세가 아메리카 원주민 저항운동가 테쿰세에서 따온 것을 생각해보면 아이러니해진다.

"we must act with vindictive earnestness against the Sioux, even to their extermination, men, women and children."

"우린 수족에 대해서 진지한 복수심을 지니고 행동해야 합니다. 남자건, 여자건, 애들이건 모조리 씨를 말리는 한이 있더라도."


"hostile savages like Sitting Bull and his band of outlaw Sioux...must feel the superior power of the Government."

"시팅 불과 그의 무법자 수족 같은 적대적인 야만인들에게는 정부의 우월한 힘을 느끼게 해줘야합니다."

보다시피 수족에 대해서는 그 역시 전쟁광 같은 태도로 나오고 있다. 다만 토벌이 끝나자 나바호족에게는 안정적으로 살 수 있는 땅(원래 영토의 알짜배기는 뺏었지만)을 확보해 주고 남은 땅에서는 정말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지원해 주었고 그 덕에 나바호족은 지금 최대 부족 중 하나가 되었다.[25] 그렇다고 해도 매우 호전적인 발언이었던 건 사실이지만... 어쩌면 그 당시 미국인이 할 수 있는 생각과 관점의 한계였을지도 모른다.

사실 저 발언은 일종의 기선제압과 블러핑도 겸하고 있기 때문에 표현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긴 무리인 것도 있다. 당장 링컨도 남북전쟁에서 원주민들이 남쪽을 돕자 전략적 차원에서 쓸어버리기도 했다. 사실 당시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흑인 노예를 부리면서 노예제와 남부를 지지했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이들도 아메리카 연합국의 동맹, 또는 일부였다고도 할 수 있었다.

6. 명언[편집]


"Its glory is all moonshine. It is only those who have neither fired a shot nor heard the shrieks and groans of the wounded who cry aloud for blood, for vengeance, for desolation. War is hell."

"전쟁의 영광이란 건 완전히 헛소리다. 오직 총 한 번 쏴본 적 없거나 부상병의 비명과 신음소리를 듣지 않은 사람들만이 큰 소리로 더 많은 피와 복수, 파괴를 외친다. 전쟁은 지옥이다."


"War is cruelty. There's no use trying to reform it, the crueler it is the sooner it will be over."

"전쟁은 잔악행위이다. 그걸 바꿀 필요는 없다. 잔인하면 잔인할수록 더 빨리 끝나니까."


"You cannot qualify war in harsher terms than I will. War is cruelty, and you cannot refine it."

"나보다 더 가혹하게 전쟁을 정의할 수는 없을 겁니다. 전쟁은 잔학행위이며 아무도 그걸 개선할 수 없습니다."


This war differs from other wars, in this particular. We are not fighting armies but a hostile people, and must make old and young, rich and poor, feel the hard hand of war.

"특히 이 전쟁은 다른 전쟁과 다릅니다. 우리는 군대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적대적인 국민과 싸우고 있으며, 늙건 젊건, 부자건 가난하건 전쟁의 고통스런 손길을 느끼게 해 주어야만 합니다."

같은 오하이오 주 출신인 미 공군대장 커티스 르메이 장군의 "무고한 민간인 따위는 없다(There are no innocent civilians)."와 맞먹는 후덜덜한 발언. 다만 셔먼은 말은 저렇게 해도 민간인을 공격하지는 않은 반면에 르메이는 일본 본토 민간인들을 다수 학살했는데, 르메이가 비뚤어져서 그렇다기보다는 셔먼은 상대해야했던 적군이 자국민이였던만큼 민간인 공격을 피할 수 밖에 없었던 반면에, 르메이는 타국민을 적군으로 상대해야 했던 만큼 민간인 공격에 망설일 요소가 비교적 적었다. 실제로 상기한대로 자국민으로 보지 않았던 아메리칸 원주민들에 대해서는 셔먼도 르메이 못지 않게 과격한 주장을 내세웠다.

그의 전쟁에 대한 생각이 어땠는지 그가 죽기 전에 남긴 말이 잘 묘사하고있다.

There is many a boy here today who looks on war as all glory, but, boys, it is all hell.

"전쟁을 명예로운 일처럼 생각하는 많은 젊은이들이 있다. 그러나 젊은이들이여, 그것은 모두 지옥이었다."


Ive been where you are now and I know just how you feel. Its entirely natural that there should beat in the breast of every one of you a hope and desire that some day you can use the skill you have acquired here.

Suppress it! You dont know the horrible aspects of war. Ive been through two wars and I know. Ive seen cities and homes in ashes. Ive seen thousands of men lying on the ground, their dead faces looking up at the skies. I tell you, war is Hell!

"나 또한 자네들 자리에 있던 적이 있고 지금 자네들 기분이 어떤지 정확히 알고 있네. 자네들 가슴 속에 언젠가 여기서 배운 것들을 바깥에서 써먹을 수 있으리란 희망 내지는 소망이 두근거리고 있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야.

집어치우게! 자네들은 전쟁의 끔찍한 면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네. 전쟁을 두 번 겪어보니 확실히 알겠더군. 난 잿더미가 된 도시와 집들을 보았네. 죽어버린 얼굴로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는 수천의 시체도 보았지. 똑똑히 말해두는데, 전쟁은 지옥이야!"

-1879 미시건 주방위군 육군사관학교 졸업반 연설의 출판시의 변형-


In our Country...one class of men makes war and leaves another to fight it out.

"우리나라에서, 한 계층의 인간들은 전쟁을 벌이고 다른 계층의 인간들을 끄집어내서 싸우게 한다."

군사 관계자들에게는 금과옥조라 할 만하다. 특히 군주국끼리의 전쟁이 아니라 민주 공화국끼리의 전쟁[26]을 처음으로 드러낸 발언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편 이에 대해 군사연구가 데이브 그로스먼(D.Grossman)은 자신의 저서 "전투의 심리학"에서, 셔먼이 틀렸다는 것은 아니지만 진심으로 전투 자체를 원하고 즐기는 군인들[27]도 있을 수 있으며 그들을 이상한 사람 내지는 뭔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처럼 취급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물론, 평화로울 때도 그러면 그건 진짜로 문제다

한편 셔먼은 정치인들에게 러브콜을 받았을 때도, 이렇게 말하며 거절했다.

"If nominated I will not run; if elected I will not serve."

"만약 후보로 지명된다면, 난 유세를 안할거요. 만약 당선되면, 일을 안할 거고."


선정적 보도를 일삼는 언론에 대한 반감도 숨기지 않았다.

"I hate newspapermen. They come into camp and pick up their camp rumors and print them as facts. I regard them as spies, which, in truth, they are. If I killed them all there would be news from Hell before breakfast."

"나는 신문기자들을 증오한다. 그들은 막사로 쳐들어와 뜬소문을 모아서 사실인 양 기사를 낸다. 나는 그들을 스파이로 간주했고, 실제로 그러했다. 만약 내가 그 작자들을 다 잡아 죽인다고 해도 그들은 아침식사를 먹기 전에 지옥에서 기사를 내보낼 것이다."



7. 기타[편집]


  • 그의 동생인 존 셔먼도 아주 유명한 인물인데 형과는 달리 정치가로 활동했다. 남북전쟁 때 행적 때문에 윌리엄 테쿰세 셔먼이 더 유명하긴 하지만, 존 셔먼 역시 6선 상원의원이자 국무장관으로서 미국사에 여러 족적을 남겼는데, 1873년 은화 제조 중단, 1878년 블랜드-엘리슨법, 1883년 잡종관세법, 1890년 셔먼 은매입법, 그리고 반독점법의 시초가 되는 1890년 셔먼 반독점법[28] 등 19세기 후반 굵직한 미국의 입법 활동을 주도했다. 제임스 G. 블레인, 러더퍼드 B. 헤이스와 함께 공화당 개혁파[29]를 이끌면서 공화당 계파정치에 크게 이름을 남기기도 했다. 두명은 형제간 우애가 아주 돈독했다고 한다. 존 셔먼 뿐만 아니라 셔먼의 형제들은 모두 정계, 법조계, 은행가의 거물들이었다. 형인 찰스는 연방법원 판사였고, 동생 존은 언급되었다시피 상원의원, 그리고 또 다른 동생인 호이트는 성공한 은행가였다. 또한 의붓형제인 어윙 가문 사람들도 다들 한가락했고, 남북전쟁 당시 연방군으로 참전했다.

  • 의외로 미국 전역의 철도 궤간을 통일하는데 기여했다. 전쟁중 남부를 초토화시키는 과정에서 셔먼의 지시로 남부의 철도를 죄다 때려 부숴 못쓰게 만들었다. 그래서 전후 복구과정에서 철도를 새로 깔아야 했는데 전쟁 전까지 남부의 철도는 표준궤, 광궤[30] 등 여러가지 궤간이 혼용되었으나 표준궤로만 다시 깔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셔먼이 남부에 피해를 극대화시키기 위해 내린 지시가 철도를 표준궤 통합이라는 긍정적인 효과를 낳았다.

  • 생전에 Marching Through Georgia[31]라는 자신의 서부로의 진군을 기념하는 노래를 매우 싫어했다. 셔먼이 전쟁을 매우 싫어했다는 걸 상기하면 그답다고 할 수 있겠다. 어찌나 싫어했는지, 이 군가에 대해서 셔먼은 내가 조지아로 진군한 것 때문에 이 노래가 만들어진다는 걸 미리 알았다면, 조지아를 피해서 갔을 것이라고 투덜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셔먼이 질색하는 것과는 별개로 해당 곡이 셔먼의 전공을 아주 잘 묘사한 노래여서 대중들 사이에서 널리 퍼져있었기 때문에 셔먼에겐 불쾌했겠지만 그가 공식 석상에 참석할 때마다 이 노래가 나왔고 후일 셔먼이 사망한 뒤의 장례식에서도 이 노래를 연주했다. 그래서 생전에 셔먼이 이 노래를 싫어한 이유로, 자신과 관련해서 너무 자주 연주하다 보니 질렸을 가능성도 있다. 한 예로 1890년 참전용사 모임 때 셔먼도 참석해서 퍼레이드를 참관했는데, 퍼레이드에서 밴드들이 연주한 곡이 죄다 이 곡이었다고.

  • 적들이 항복할 경우 무조건 항복만을 수용한다하여 무조건 장군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 이 사람의 이름을 딴 것이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SS 제너럴 셔먼과 M4 셔먼 중형전차의 별칭이다. M4 셔먼의 경우 미군이 아닌 영국군이 붙인 별칭이지만 거의 그대로 사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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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북 전쟁 이전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가족원 모두 가톨릭 신자이나, 전쟁 이후 참상을 보고 종교에 대한 회의가 들어 말년에 종종 무종교적인 입장을 취했다고 한다.[2] 이 사진은 남북전쟁 이후 찍은 사진이고 팔에 단 검은 리본은 링컨 대통령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달았다.[3] 이 사람의 조상이 로저 셔먼이라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중 한 사람이다. 게다가 이 사람의 아들들, 즉 셔먼의 형제들도 성인이 돼서 다들 한 자리씩 해먹는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을뿐 집안 자체는 굉장히 좋았다.[4] 미국 상원의원에 미국독립전쟁 배터랑인 조지 어윙의 자손으로 역시 정치적으로 대단한 가문이었다.[5] 양부에게는 딸 엘리노어가 있었는데, 셔먼은 엘리노어를 사랑하게 되어 양부가 죽고나서 결혼하게 된다. 참고로 엘리노어는 셔먼보다 4살 연하였고 집안이 좋아서 교육도 많이 받았으며, 이 때문에 여성인권운동가이자 링컨의 열렬한 지지자였으며 또한 연방 지지자이기도 했다. 셔먼은 아내와의 금슬이 매우 좋았고 아내도 남편이자 남매와 다름없던 셔먼을 끔찍하게 아껴서, 셔먼이 파면당하게 생기자 직접 링컨을 만나서 셔먼의 파면을 철회시키고 오히려 다시 전쟁터의 요직에 앉게 해줬다.[6] 지금의 루이지애나 주립대학교의 전신.[7] 조셉 존스턴은 웨스트 포인트 1829년 졸업생들중에서 최초로 별을 딴 인물로 로버트 리보다 최종 계급이 더 높았다. 즉, 훨씬 뒤에 졸업했고, 최종계급도 대위급이었던 "셔먼"은 존스턴에 비하면 그야말로 애송이였다.[8] 여기에 셔먼이 계속 불리한 교환비 결과를 냈다는 점에서 셔먼의 능력을 깎아내리는 사람들도 있으나, 셔먼은 어디까지나 적진에서 유리한 지형을 끼고 방어진을 치고 있는 적을 돌파한다고 생긴 어쩔 수 없는 피해였다. 조셉 존스턴조차도 야금야금 셔먼의 병력을 갉아 먹었으나 애틀랜타 코앞까지 와서 병력상 우위를 점하게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승부를 망설였을 정도로 셔먼의 진군은 뛰어난 성과를 거둔 것이었다.[9] 사실 이것만 봐도 셔먼이 전술적으로도 바보가 아님을 알 수가 있다. 불리한 교환비를 내면서도 어쨌든 목표로 삼은 지역을 점령하여 존스턴의 군대를 물러나게 했으므로.[10] 명령 제227호에도 있듯 전쟁중인 정치인에게 적국 군대가 자국 영토를 휘젓고 다니는걸 참고 견디는건 어마어마한 여론 압박이며 정치적 부담이다. 설사 어떻게든 막았어도 국민들의 원망을 피할 수 없을 정도.[11] 그래도 예상보다 셔먼이 많은 병력을 온존하여 존스턴은 이 승부를 망설였다. 실제로 존스턴은 동부에서도 이렇게 이기고 있었는데도 계속 후퇴를 거듭하여, 남부 수도인 리치먼드 코앞까지 몰린 적이 있었다.[12] 다만 로버트 E. 리는 존스턴급 고참이었지만, 후드는 원래 용감하기만 하지 짬밥은 겨우 중대장급으로 나이도 비교적 어려서 경험도 전술적 실적도 매우 부족했다. 북이나 남이나 현장을 지휘했던 1선급 장군들은 로버트 E. 리나 존스턴같은 장성급 고참들을 제외하고 대부분 10~20년대 생들이었는데 후드는 30년대 생이었다.[13] 애틀랜타 전투에서는 5천명, 즉 15% 가량 더 많은 병력으로 셔먼을 상대했다. 단, 이 전투에서 상대한 것은 셔먼의 주력인 테네시군뿐이었고, 스코필드의 오하이오군과 토머스의 컴벌랜드군은 애틀랜타 포위를 위해 분산된 상태였기에 전체 전력은 연방군이 훨씬 우세했다.[14] 역전의 노장 존스턴이 원했던대로 셔먼의 휘하 병력을 많이 줄여 놨는데도 함부로 공격하지 않은게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참고로 존스턴은 데이비스의 닥돌 명령을 거부하면서, 지구전을 끌고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당시에 리 장군이 동부전역에서 그랜트에게 큰 피해를 강요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되면 급한 결과를 내야 하는 쪽은 셔먼이고, 급해진 그를 자연스럽게 유리한 지형으로 유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15] 블레인은 계파 싸움의 영향 때문에 유력 후보였음에도 대통령 후보 지명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그래서 당 계파를 초월해 지지를 받을 수 있는 테쿰세 셔먼을 추천한 것이었다.[16] 참고로 존스턴이 10살 이상 나이가 더 많은 삼촌뻘이었다. 웨스트포인트 졸업 기준으로 하면 10기 이상 차이 나는 대선배인 것이다.[17] 전쟁 이후 자주 서신을 주고 받았고, 존스턴이 워싱턴 D.C.로 여행 올 때마다 저녁 식사를 통해 서로 만날 정도로 친했다고 한다. 남북전쟁이 한 식구끼리 갈라져 싸웠다가 다시 합쳐진 전쟁이라 적이지만 우정을 나눈 사례가 꽤 있다. 존스턴과 셔먼 못지 않게 유명한 일화가 게티즈버그에서 피켓의 돌격을 지휘한 여단장 중 한명이었던 루이스 아미스테드 준장과 그 돌격을 저지한 북군 2군단장 윈필드 핸콕 소장의 우정.[18] 북부로의 이탈뿐 아니라 주인들이 전쟁터에 데려간 흑인노예들이 군대에서 일을 했다.[19] 1864년 대선에서 남부주들이 대부분 다 빠진 상태였는데도, 전체 득표수에서 40만표밖에 차이가 없었다. 선거인단 수로 보면 링컨의 압승이었지만, 북부 일부 주들을 제외하고 대부분 아슬아슬한 경합주들이 되어 링컨도 진땀을 흘려야 했다.[20] 이 때문에 탈영병이 없는 것으로 유명했던 리의 군대에서 자신으로 고향으로 돌아가는 탈영병이 속출한다.[21] 이건 쓸 수 있는 병력과 자원이 한정되어 있던 남군이 실행했어야 했던 전략이다. 그런데 빅스버그 전투에서 패함으로써 미시시피 강에 대한 통제권을 완벽히 상실했기 때문에 서부전선에서 뒤치기가 불가능해졌고, 리는 그랜트에 발이 잡혀있었다.[22] 사실 이는 지금 우리가 인종차별 반대자로 기억하는 당대 미국인들 상당수가 가지고 있는 스탠스였다. 링컨마저도 연방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북부를 제외한 남부의 노예제를 찬성하겠다고까지 할 정도였다.[23] 상술했듯이 흑인의 경제적 자립을 위해 40에이커와 노새 정책을 시도하기도 했다.[24] 이런 이유로 미국의 흑인 영화 감독 스파이크 리가 만든 영화사 이름이 "40에이커와 노새"(...)이다.[25] 원주민과의 전쟁사를 살펴보면 아메리카 원주민과의 전쟁에 앞장선 연방 육군 장교들이 전시 상황이 아닐 때는 오히려 원주민에게 우호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사례가 꽤 있다. 어떤 식으로든 자주 접하다 보니 자연스레 원주민들의 사정에 밝아졌고, 지역 민병대와 달리 원주민들과 직접적인 이해, 원한관계로 얽혀있지 않았기 때문이다.[26] 이게 문제가 되는 게, 범국민적인 전쟁수행 의지에 기반한 국민군끼리의 전쟁총력전의 양상으로 진행된 것은 남북전쟁이 처음이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국민들이 먼저 전쟁을 요구하고 정부가 이에 질질 끌려간 사례는 거의 없었다.[27] 조지 S. 패튼같은 장군을 예로 들 수 있다.[28] 다만 자신이 주도해 작성한 것은 아니고 법안을 가다듬는 역할만 했으며, 초당적 법안 통과에 상징적 차원에서 이름만 올린 것에 가깝다. 셔먼은 반독점법의 취지에 다소 반대하는 보수적 입장을 취했다.[29] "혼혈파"(Half-breed)라 불린 엽관제 개혁파[30] 광궤는 러시아 광궤였다.[31] 이 곡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신독립군가의 곡조로 채용되어 사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