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고슬라비아 (r20220720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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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국기.svg 구 유고슬라비아 구성 공화국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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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베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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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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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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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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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테네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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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마케도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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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소보
(미승인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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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슬라비아
Југославија
Jugoslavija


파일:유고슬라비아 위치.svg

1918 ~ 2006[1]
위치
남유럽
수도
베오그라드
언어
세르보크로아트어, 슬로베니아어, 마케도니아어
면적
255,804km²(1989), 102,350km²(2003)
인구
2365만 7623명(1990), 1065만 6929명(2002)
통화
유고슬라비아 디나르
성립 이전
세르비아 왕국 | 몬테네그로 왕국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멸망 이후[2]
세르비아 | 몬테네그로 | 슬로베니아 | 북마케도니아 | 크로아티아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 코소보

1. 개요
2. 역대 국가(國家)
3. 국가(國歌)
4. 유산
5. 분열이 예정되었던 인공 국가였는가?
5.1. 구성 집단 사이의 합의와 이질성
5.2. 다른 가능성
5.3. 문제점
5.3.1. 내부적 요인
5.3.2. 외부적 요인
5.4. 결론
6. 현대
7. 유고슬라브인
8. 대체역사
8.1. 유고슬라비아가 유지되었더라면?
8.2. 대유고슬라비아?
9. 매체



1. 개요[편집]



유고슬라비아를 직역하면 "슬라브인의 땅". 한국에서는 보통 줄여서 '유고'라고 불렀다.

1918년부터 2006년까지 동유럽 발칸 반도 서부에 위치했으며 지중해(좀 더 정확하게는 아드리아해)에 접해 있던 국가[3]. 수도는 현재 세르비아의 수도인 베오그라드.


2. 역대 국가(國家)[편집]



2.1.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 → 유고슬라비아 왕국[편집]



2.2.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구 유고 연방)[편집]






2.3.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신 유고 연방) →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국가 연합[편집]



3. 국가(國歌)[편집]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국가는 세르비아의 국가인 《정의의 하느님(Боже правде)》, 크로아티아의 국가인 《아름다운 우리 조국(Lijepa naša domovino)》, 슬로베니아의 국가였던 《전진하라, 영광의 깃발을 향해(Naprej, zastava slave)》, 그리고 마지막에 다시 세르비아의 국가인 《정의의 하느님》을 각 4행씩 조합한 것이었다.

한편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구 유고)과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신 유고), 세르비아-몬테네그로의 국가는 《슬라브족이여(Hej, Sloveni)》였다.

나라가 분리된 지 얼마 안 되는 경우 개별 대표팀을 만들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 분리 전 같은 나라였던 나라들이 단일 팀을 구성하기도 하는데[4] 보통 단일 팀 국기나 국가는 임시로 만들어 쓴다.[5] 하지만 2006 독일 월드컵에서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단일 팀(대회 도중 분리)은 구 세르비아-몬테네그로 국기와 국가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4. 유산[편집]


역사 속으로 사라진 유고슬라비아지만 유고슬라비아의 승계국가 자리를 놓고 구 유고 국가 사이에 논쟁도 만만치 않다. 일단 세르비아의 경우, 유고슬라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가 세르비아 땅에 있어서 붕괴 전 유고 연방의 정치적, 외교적 주도권을 잡고 있었고 유고 구성국 중 인구도 가장 많은데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성립된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수립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잡은 나라가 바로 세르비아라면서 유고의 승계국은 세르비아라고 주장하고 있다. 명분적인 부분을 제외하고 실질적으로는 유고슬라비아의 유산을 가장 많이 물려받은 것은 세르비아라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세르비아는 구 유고 연방 해체과정에서 일어난 유고슬라비아 전쟁 당시 제노사이드 인종학살 등 세르비아가 주도한 전쟁 범죄 과오 등으로 인해 국제사회로부터 구 유고 연방의 정상적인 승계국으로 인정받지는 못하고 있다. 예를 들면 UN에서 현대 세르비아 공화국의 전신이 되는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회원 자격을 계승하지 못하고 2000년에야 신생국과 동일한 자격으로 가입할 수 있었다.

내부적으로도 사실 티토 시절 전반적인 국력 상승과 이에 따른 국격의 상승 때문에 존속 기간에는 통제 가능했던 민심이지만, 사실 체트니크의 경우만 보더라도 전통적인 정교회 기반 세르비아 민족주의와 티토가 상징했고 주장했던 사회주의적 범유고 민족주의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집권 기간 중에도 내내 티토는 세르비아 민족주의의 부상을 크게 경계했고, 세르비아 내에서도 연방 시절 국력 신장의 공은 인정해도 티토 시절을 뿌리 없는 좌파 국제주의자들이 민족 국가를 집어 삼켰던, 러시아 우익이 볼셰비키 소련 정권을 보는 시각으로 부정하는 목소리들도 적지 않다. 그리고 유고슬라비아의 승계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유고 연방이 해체된 이후에 세르비아에서도 유고슬라비아가 현실적으로 실패한 국가임을 인정하고 유고 연방의 잔재를 청산하거나 독자적인 자국의 정체성을 갖추려고 하고 있는 중이다. 실제로 유고 시절의 국적 항공사였던 자트 항공을 에어 세르비아로 바꾸었고, 유고가 들어가 있던 회사 사명이나 자국산 상품들의 명칭도 변경하고 있다.

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의 경우,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국부인 요시프 브로즈 티토크로아티아인 아버지와 슬로베니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것을 명분삼아 유고슬라비아의 승계국가는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라며 세르비아의 승계국 주장에 반발하고 있다. 이 밖에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등도 유고슬라비아의 정통성을 승계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붕괴되어 여러 나라로 갈라진 소련의 경우는 유고슬라비아에 비해 어느 정도 평화적으로 국가들이 분리 독립되었고소련의 승계권을 확실히 이어받은 러시아와 달리 유고슬라비아는 세르비아가 그나마 좀 더 크고 중추였다지만 연방 구성국들의 비중과 덩치가 비슷비슷한 편이라 확실하게 주도권을 가지는 나라가 없었고 전쟁과 학살 등 폭력적인 과정을 겪으며 해체되었기에 어느 나라가 계승국인지는 논란이 분분하며 구 유고 구성국들의 국력도 미약하여 그리 중요시되지도 않는다.


5. 분열이 예정되었던 인공 국가였는가?[편집]


분열이 예정되었던 인공 국가라는 정보가 널리 퍼져 있지만 사실 꼭 그렇게는 볼 수 없다.


5.1. 구성 집단 사이의 합의와 이질성[편집]


  • 구성 집단 사이의 차이가 지나치게 현격하였는가?
먼저 유고슬라비아의 건국은 1차대전 직전에 고조되었던 범슬라브주의에 따른 것이며, 훨씬 이질적인 요소가 섞였지만 그럭저럭 연방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국가들 (예를 들어 인도, 인도네시아, 아프리카 여러 국가들)에 비해 분열요소가 딱히 있었던 것도 아니다. 어쨌든 종교만 달랐고, 이들 국가들은 동로마 제국-오스만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틀안에 묶여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유고슬라비아가 내부적 다양성이 높았다고 하지만, 유럽만 해도 스페인, 벨기에, 스위스,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 러시아, 네덜란드 등 분열되기 이전의 유고슬라비아 정도의 다양성을 지니면서도 통합을 유지하는 나라들이 분명 적지는 않다.[6]

  • 구성 집단의 동의가 없었는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세르비아 주도로 통합한 것은 사실이지만,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역시 (지역 의회 결의 등으로) 이에 동의했다. 이 무렵 강대국인 영국, 프랑스에게 책임을 돌리기도 어렵다. 원래 영국과 프랑스는 '런던 밀약'으로 이탈리아에게 아드리아 해 해안 지대를 넘기기로 결의했고 실제로 1차대전 말기에 이탈리아는 이 지역을 점령하려 했다. 유고슬라비아 통합안은 이에 대한 카운터로서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민족주의자들이 주도적으로 주장한 결과 받아들여진 것이다. 따라서 유고슬라비아의 건국은 강대국들의 이해와 강요에 따른 '타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유고슬라비아 민족의 '자의에 의한' 것임이 분명하다.[7]

과정이야 어찌됐든 결과적으로 유고슬라비아인들의 합의가 성공하자 영국과 프랑스는 이탈리아를 버리고 유고슬라비아를 승인해 주었다. 그래서 중동전쟁을 부른 아랍 국가들이나, 아프리카의 식민지 출신 국가들이나 베트남과는 이런 측면에서 동일시할 수 없다. 문제로 볼 수 있는 것은 이 무렵에 이탈리아(미수복 이탈리아) 및 세르비아(대세르비아)의 야망 때문에 각 지역이 충분한 합의를 거치지 못하고 급히 통합되어야 했던 탓에 세르비아의 독선을 유발했다는 정도일 것이다.

이러한 주도 국가의 독선과 같은 경우에는 프로이센이 주도한 독일 통일사르데냐-피에몬테가 주도한 이탈리아 통일에서도 두드러진 문제이긴 하지만 위의 두가지 경우에는 유고슬라비아와 같이 끔찍하게 무너지지는 않았다. 특히 이탈리아의 통일과 같은 경우에는 이탈리아 민족주의가 강성했던 북부와 달리 남부에서는 이탈리아 통일의 경우 구성 집단의 동의가 없는, 북부에 의한 남부의 강제 합병으로 인식되어 골치를 썩혔음에도 이탈리아라는 국가는 무너지지 않고 유지되고 있다[8]. 그렇기에 유고슬라비아 통합에서 세르비아의 독선이 유고슬라비아를 무너질 수 밖에 없다 보거나 설령 구성 집단의 동의가 없었다 간주하더라도 유고슬라비아의 붕괴가 필연적이었다고 하기에는 하자가 많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전 당시 발칸 반도 지역에서 일어났던 남슬라브 통일 운동은 몇몇 현지 지식인들과 지도자들만 주장했고 대다수 일반 민중들에게는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사실 대부분의 민족주의 운동은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9] 그렇다고 일반 대중이 민족주의와 무관한 것도 아니다. 주장한 지식인이 소수였더라도 결국 동조하고 따라간 대중이 있으니까 민족주의가 힘을 얻은 것이다.

5.2. 다른 가능성[편집]


  • 별개의 국가로 독립했어야 했는가?
유고슬라비아 지역은 서로 다른 문화와 종교권 국가들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개별적으로 독립시켜야 했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이는 이탈리아와 세르비아의 야망으로 인해 애초에 불가능하다. 당시 강대국인 이탈리아에 대항하려면 민족자결주의를 명분으로서 유고슬라비아 민족이 단일국가로 독립하는 제안을 내세워서 연합국의 승인을 얻을 수밖에 없었다. 이 길을 가지 않는다면 단지 오스트리아의 영토에서 이탈리아의 영토가 되는 길밖에 남지 않는다.

만약에 아예 오헝제국을 무너뜨릴 때처럼 민족 구성별로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 등이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세르비아에 흡수되어 유고슬라비아로 묶이지 않고 별개의 국가들로 독립했다면 발칸 반도, 동유럽 현대사는 참혹한 전쟁, 학살의 역사가 아닌 평화로운 역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1, 2차 대전의 물결에서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 같은 소국이 평화롭게 살아남을 방법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당장 아돌프 히틀러유고슬라비아 침공을 한 역사와 베니토 무솔리니가 알바니아를 병탄하고 그리스를 침공한 그리고 처발린 역사를 보면 구 유고 각국의 운명은 뻔했다.[10] 물론 중부유럽의 폴란드나 체코슬로바키아처럼 슬라브 민족 계열의 나라들이었으면서도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별개의 국가로 독립한 나라들이 동유럽에도 있었지만 불행히도 이들은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와는 사정이 많이 달랐다.

  • 이탈리아에게 일부의 땅을 주고 세르비아를 토사구팽했다면?
유고슬라비아가 있기 때문에 이탈리아를 유고슬라비아에서 몰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유고슬라비아가 없었다면 미리 맺어진 '런던 밀약'에 따라서 이탈리아가 이 땅을 차지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미국 대통령인 우드로 윌슨민족자결주의의 신봉자였고 비밀 외교를 혐오했다. 런던 밀약이라는 비밀외교에 의해 민족자결주의에 반하는 이탈리아에의 달마티아 할양이라는 결과를 이끌어 낼 마음이 전혀 없었다.

5.3. 문제점[편집]



5.3.1. 내부적 요인[편집]


유고슬라비아는 전후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지배를 받던 크로아티아인슬로베니아인, 보슈냐크인합스부르크 왕조의 지배를 거부하고 기존부터 세르비아 왕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마케도니아인, 세르비아에 통수맞고 흡수당한 몬테네그로인과 함께 세르비아에 합류하면서 형성되었다.

이들 민족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지배로부터 자결권을 쟁취하는 것이 근본적인 목적이었다. 이를 위해 세르비아가 유고의 리더임을 인정할지언정, 세르비아를 오헝제국을 대신한 새로운 주인으로 모실 생각 따위는 전혀 없었다. 하지만 유고슬라비아 왕국이 성립된 이후 세르비아는 주인 노릇을 하기 시작했고, 점차 비 세르비아계, 특히 크로아티아계는 "이거 남슬라브주의라길래 합류했더니만 그냥 대세르비아주의에 합류한 거 아니냐"는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다양한 인구 집단을 통합시키기 위해 종교와 문화를 초월한 남슬라브주의를 도입하고, 여러 차례 행정구역을 조정하는 등 노력을 했다. 게다가 스스로 자립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민족인 세르비아는 마찬가지로 독립한 지 얼마 안되는 다른 민족까지 포괄한 크고 아름다운 연합왕국을 경영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시행착오가 뒤따르는 것은 필연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를 수행하기에는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정치체제가 너무도 불안정하고 미숙했다. 특히 유고슬라비아가 성립된 지 10년 정도 지난 1928년에는 대표적인 민족주의 계열 정당인 크로아티아 농민당의 당수 스테판 라디치가 백주대낮에 의사당에서 의정활동 중에 다른 의원이 쏜 권총에 피살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이 사태로 유고 정국은 즉각 대혼란에 빠졌다.

더욱이 이를 기점으로 국왕 알렉산다르 1세의회를 해산함으로써 사실상의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권위주의 체제를 구축하는 등 시대를 역행하는 모습을 보였다. 어쩌면 분열된 국론을 극복하기 위해 강력한 리더쉽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 나온 행동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세르비아계는 물론 비 세르비아계 민족들에게 실망과 분노를 주기 충분했고, 곧 국왕 암살과 왕국 곳곳에서의 사보타주와 소요 사태라는 최악의 형태로 분출되었다. 그래서 안타깝게도 남슬라브의 해방과 자결을 부르짖었던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간데 없고 그저 작은 오헝제국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오히려 슐람페라이적 관행을 통해서 국가체제에 정면도전하지 않으면 다른 문화와 다른 민족들의 다양성을 너그럽게 존중하고 차별도 최소화 하려던 오헝제국보다 못한 세르비아의 독선은 세르비아가 아닌 다른 남슬라브계통에 불만만 주었다.

유고 왕국을 멸망시킨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세운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은 대세르비아주의, 대크로아티아주의 등 유고 내 각 민족의 민족주의를 평등하게 탄압하는 한편, 소련에 굴하지 않고 제3세계로써 서방 국가와도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 국가 위상을 드높이고 독자적인 경제노선을 택해 높은 경제성장률을 이룩하는 방식으로 각 민족 간의 화합을 형성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티토의 민족 화합 정책은 티토의 파르티잔으로서의 명성과 성공적인 외교 및 경제정책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뿐 유고 내 각 민족의 자발적인 의사와 협력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티토가 죽은 후 유고슬라비아에서는 대크로아티아 등 각 민족의 민족주의와 대세르비아주의가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 유고 내 각 민족의 대표자들은 티토와는 달리 각 민족의 민족주의와 타 민족에 대한 반감을 부추겼고, 결국 티토 사후 15년도 못 가 유고는 분열하여 해체됐다.

5.3.2. 외부적 요인[편집]


2차대전과 그 이후에 유고슬라비아가 분열되는 원인이 내부적 모순 뿐 아니라, 외부적 요인 또한 강하게 작용했음을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외부적 요인이란 당시 유고슬라비아를 위협하던 외세인 나치 독일파시스트 이탈리아이다.

당시 독일은 유고슬라비아를 점령하는 동안 오늘날의 크로아티아 공화국과 보스니아 일대에 우스타샤가 주도하는 괴뢰국 크로아티아 독립국을 세웠다. 중요한 점은, 당시 우스타샤는 이전부터 이탈리아로부터 암암리에 지원을 받아 유고슬라비아에서 사보타주를 일으켜 오다가 탄압을 받아 해외로 쫓겨나고, 지도자 안테 파벨리치는 이탈리아에서 신변보호를 명목으로 사실상 감금 상태였다.[11] 이로 인해 크로아티아 독립국이 성립될 당시에 우스타샤는 유고내 크로아티아 주민들 사이에서 정치적 기반이 거의 없었다.[12]

유고슬라비아 왕국 내에서 크로아티아계 민족주의 운동의 대표는 원내 정당인 크로아티아 농민당이었다. 이미 크로아티아 농민당은 섭정 파블레 왕자와의 타협을 통해 왕국 내 크로아티아 자치지역인 크로아티아 바노비나의 설립을 이끌어 낸 바 있었다(1939).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가 크로아티아 독립국의 지도세력으로 주민들의 지지를 받는 종전의 크로아티아 농민당이 아니라, 자생적 기반이 없는, 과격 테러단체인 우스타샤를 고른 이유는 간단했다. 추축국이 원한건, 크로아티아계 주민의 이익과 권리를 대변하는 단체가 아니라, (자생적 기반이 빈약함으로) 외세에 의존하고, 추축국의 전쟁수행을 지원하는 꼭두각시 괴뢰정권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우스타샤는 잘 알려진 대로 보슈냐크계 무장조직인 한트샤르와 함께 세르비아계 주민을 대상으로 인종 청소에 나서 수십만을 나치조차 기겁할 만큼 잔혹하게 학살했다. 세르비아 민족주의 왕당파인 체트니크 역시 이에 맞서 크로아티아계와 보슈냐크계를 대상으로 수십 만을 학살했고 이후 사이좋게 티토의 파르티잔에 박살난다.

사실 2차대전 이전의 유고 및 보스니아에 사는 세 민족(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보스니아인)은 주도권을 차지하려 서로간에 불편한 감정과 갈등이 있을지언정, 적어도 서로를 말살해야 할 원수로 보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치 정권에 의해 괴뢰 정권이 세워진 후 자행된 인종청소가 모든 것을 바꿔놓았고, 크로아티아계, 보슈냐크계, 세르비아계의 트라우마로 깊이 각인되었다. 티토의 연방공화국 시절에는 '우애와 단결'(Bratstvo i jedinstvo)이라는 구호 아래 이러한 트라우마는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는 듯 했다. 하지만 티토 사후에 점차 세르비아계는 크로아티아계와 보슈냐크계의 자치 운동에서 우스타샤와 한트샤르의 그림자를, 크로아티아계와 보슈냐크계는 세르비아계의 주도권 확대 노력에서 체트니크의 그림자를 보면서 민족 갈등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달리 말하자면, 당시의 외세의 영향과 간섭을 극복할 만큼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내부가 충분한 결속력을 가지지 못했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다. 다만 2차 대전 당시 외세의 개입과 영향이 유고슬라비아 국민들에 악몽과도 같은 경험과 기억을 남겼고 이 트라우마는 유고슬라비아 각 민족들의 기저에서 끈질기게 살아남아 내전과 인종청소가 재현되었다.

5.4. 결론[편집]


여러모로 따져볼 때 유고슬라비아는 내부의 문제가 많이 있기는 했으나 실상을 들여다보면 이 내분 요소들이 내전으로 인한 국가 붕괴를 필연적으로 부를 만큼 중대한 사안이었다고 보기 어렵다. 왜냐면 유고슬라비아 정도의 내부 문제를 가지고도, 내전과 학살 같은 폭력 충돌 없이 국가를 유지하는 나라들이 매우 많이 있다.

따라서 유고슬라비아가 결코 처음 시작부터 잘못된 나라였다고는 볼 수 없다. 유고슬라비아는 평화로운 통일 민족국가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충분히 얻었으며 오히려 많은 나라없는 민족들에 비하면 강대국들의 승인을 받아서 상당한 규모의 인구와 영토를 가지고 독립국의 지위를 얻었으니 운이 매우 좋고 외부의 대우도 좋게 받은 편이다. 실제로 티토의 지도력과 공산주의를 고려해도, 유고슬라비아는 수십년 동안 평화롭게 국가 체계를 갖추었으며 동서 냉전 사이에서 단독 노선을 걸으면서 독자성을 유지했고, 제3세계 비동맹 운동의 주축을 맡을 정도로 외교적으로 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유고슬라비아가 냉전 붕괴 후 통합에 실패하고 국가들끼리 전쟁이 일어나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여러 개의 소국들로 쪼개진데에는 통일 전 너무나 깊었던 각 공화국 간의 차이로 인한 분리주의, 티토 사후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프라뇨 투지만,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 밀란 쿠찬, 키로 글리고로프 등 민족주의, 지역주의를 앞세워 정권을 쟁취하려던 정치 지도자들의 잘못이 크다. 충분히 대화로 해결하여 통합을 유지할수 있었던 사안들을 극단적인 정책과 전쟁, 분리독립 이탈로 날려버린게 한 둘이 아니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보면 유고슬라비아의 비참한 종말은 그 어떤 외부 요인보다도, 다양성을 인정하고 이웃과 더불어 함께 살기보다는 사소한 차이를 빌미로 삼아 증오와 폭력을 강화시켜서 극단주의를 추종한 유고슬라비아인들 스스로의 잘못이 가장 크다. 어쩌면 지역감정이 초 극대화되어 생긴 비극이라고도 볼수있다.

이를 비꼬며 유럽에서 흔히 하는 이야기가 "1914년 여름,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고 나서 유럽은 모든 게 바뀌었지만, 100년이 지나도 (전쟁의 발단이었던) 보스니아가 세르비아 땅이 아니라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았다."라는 농담을 하기도 한다.


6. 현대[편집]


2004년 슬로베니아, 2013년크로아티아가 EU에 가입했고, 세르비아가 가입을 신청했으며, 그 밖에 마케도니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의 가입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2017년 7월 12일에 세르비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 알바니아, 마케도니아, 코소보는 트리에스테에서 열린 제4차 발칸 회의에서 지역 경제 공동체의 창설을 채택하고 교통망을 통합하는 조약에도 서명했다.#

2016년 여론조사에 따르면 "유고 연방의 해체가 나라에 해를 끼쳤는가?"라는 질문에 세르비아에서 81%, 보스니아에서 77%, 몬테네그로에서 65%, 마케도니아에서 61%가 그렇다고 대답했으며, 심지어 유고 연방 해체를 불러온 분리독립의 선봉이었던 슬로베니아에서도 그렇다는 대답이 약간 많았다(45:41). 나라에 유익했다는 대답이 더 많았던 곳은 코소보(75%)와 크로아티아(55%)뿐이었다.#

2019년 11월 14일에 크로아티아는 세르비아 측에 옛 유고연방 승계금 1억4천850만 달러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2020년 12월 22일에 질병관리청에서 발표한 보도자료에 추정유입국가로 유고슬라비아가 있었다. 이후에 북마케도니아로 수정되었지만 영어판으로는 유고슬라비아로 남아있다.# 아마 북마케도니아의 옛 표기명인 "The former Yugoslav Republic of Macedonia"를 보고 혼동을 일으킨 듯. 2018년에 외교부 SNS에서 체코를 체코슬로바키아로 표기한 데 이어 또 이런 일이 발생한 데 대해서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7. 유고슬라브인[편집]


세르보크로아트어: Jugoslaveni/Југославени

스스로의 민족 정체성을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이 아니라 유고슬라비아인, 유고슬라브인이라고 칭하는 사람들을 말하며, 유고슬라비아를 이루는 서로 다른 민족 사이에 태어난 사람이거나 무신론자, 통합주의자들이 많았다.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성립 이후 유고슬라브인을 칭하는 사람의 수는 계속 늘어나 1981년에는 전체 인구의 5.4%에 이르렀으나, 현재는 대부분 각 독립 공화국의 국민으로 개별화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유고슬라브인을 자칭하는 사람들이 남아 있다. 주로 미국, 캐나다, 호주 등 해외로 이민간 유고계들이지만 2010년대 초반 기준으로 세르비아에 2만, 그 외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 등 구유고 국가들에서 수백~수천명 정도가 본인을 유고슬라브인이라고 칭했다. #

실존인물로는 요시프 브로즈 티토, 이비차 오심[13], 레파 브레나[14] 등을 들 수 있으며, 가상인물로는 일본 소설 안녕 요정의 등장인물 마야[15]를 들 수 있다.

비슷한 예로 소련인 정체성을 들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 박노자가 있다.

8. 대체역사[편집]



8.1. 유고슬라비아가 유지되었더라면?[편집]


만약 구 유고 나라들이 티토 사후에 연방이 붕괴되는 과정에서 독립하지 않고 그대로 유고슬라비아로 지속되었더라면, 그리고 유고슬라비아 내전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궁금증은 역사 매니아 팬덤 사이에서 오랜 논쟁이 되고 있다.

스포츠팬들 특히 축구팬들에게도 흥미로운 주제인데 유고 연방에 속하는 국가들에서 그야말로 엄청난, 1980~1990년대를 화려하게 수놓았던 선수들이 쏟아져 나왔었기 때문이다. 선수 목록을 살펴보자면,

라이코 미티치(Rajko Mitić) - 세르비아[16]

[17]

드라간 자이치(Драган Џајић) - 세르비아[18]

사페트 수시치(Safet Sušić) - 보스니아 [19]

흐리스토 비다코비치 사비치(Hristo Vidaković Savić) - 보스니아

하산 살리하미지치(Hasan Salihamidžić) - 보스니아

다르코 판체프 (Дарко Панчев) - 마케도니아

네나드 마슬로바르(Nenad Maslovar) - 몬테네그로

데얀 사비체비치(Dejan Savićević) - 몬테네그로

프레드라그 미야토비치(Predrag Mijatović) - 몬테네그로

드라간 스토이코비치(Драган Стојковић) - 세르비아

고란 부네브체비치(Горан Буњевчевић) - 세르비아

고란 조로비치(Горан Ђоровић) - 세르비아

슬라비샤 요카노비치(Славиша Јокановић) - 세르비아

시니샤 미하일로비치(Синиша Михајловић) - 세르비아

블라디미르 유고비치(Владимир Југовић) - 세르비아

드라간 판텔리치(Драган Пантелић) - 세르비아[20]

보라 밀루티노비치(Бора Милутиновић) - 세르비아[21]

밀린코 판티치(Милинко Пантић) - 세르비아

사보 밀로셰비치(Savo Milošević) - 세르비아

즐라트코 자호비치(Zlatko Zahovič) - 슬로베니아

알렌 보크시치(Alen Bokšić) - 크로아티아

다보르 슈케르(Davor Šuker) - 크로아티아

즈보니미르 보반(Zvonimir Boban) - 크로아티아

로베르트 야르니(Robert Jarni) - 크로아티아

로베르트 프로시네츠키(Robert Prosinečki) - 크로아티아

이고르 슈티마츠(Igor Štimac) - 크로아티아

드라잔 예르코비치(Dražan Jerković) - 크로아티아


등등... 이외에도 많다. 이들이 유고슬라비아라는 한 국가 아래에서 뛸 수 있었다면 적어도 유로컵이나 월드컵 등 주요대회 우승은 한 번 차지할 수 있었겠지 않았겠느냐는 이야기다. 실제로 당시 이들이 활약했던 1980년대~1990년대 초반 유고 대표팀 및 유고 청소년 대표팀은 공포의 대명사였다.[22]

그러나 1990년대 유고슬라비아 내전으로 1992년 유로컵이나 1994년 월드컵을 비롯해 1990년대의 주요대회에 유고 팀이 참가하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마케도니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등이 차례로 독립하고 결국 나중엔 몬테네그로도 떨어져나가면서 유고 축구 팀은 완벽히 해체되었다. 결정적 계기는 보스니아 내전. 내전이 시작하자마자 미국, 영국 등 서방세계의 NATO 가입국들의 주도로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계에게 무기와 자금을 지원하는 신 유고 연방에 대한 경제 재제와 무역 금수 조치가 단행되었고, 신 유고는 UN 회원자격도 박탈되었다. 가장 큰 타격을 입은 부분은 스포츠 부분이었다. 올림픽이나 FIFA 월드컵, 유니버시아드 대회 등 각종 국제 스포츠 경기에서도 경기 출전 금지령까지 내려졌던 것.

그렇게 벌어진 1992년 유로컵은 안습의 극치였다. 당시 유고슬라비아는 1991년 조별 예선에서 7승1패 승점 14점으로 1위를 차지했으나 이듬해 유고슬라비아 내전으로 모든 국제활동이 금지되면서 유로 출전권을 박탈당했다. 당시 같은 조 2위는 6승1무1패 승점 13점[23]이던 덴마크였는데, 대회개막 1주일을 앞두고 잉글랜드와 친선전을 가지려던 덴마크는 갑작스런 통보를 받고 본선에 출전하여 프랑스, 스웨덴, 네덜란드, 독일을 차례로 따돌리고 동화같은 우승을 차지했다. 그나마 1998년 월드컵 때는 세르비아-몬테네그로로 구성된 신 유고 연방과 크로아티아가 각각 월드컵에 진출했고, 이 대회에서는 크로아티아가 4강에 오르는 돌풍을 일으키긴 했다. 하지만 그 크로아티아도 2002년부터는 조별리그에서 1승만 딴 채 16강도 못 가는 안타까운 신세로 전락했다. 세르비아는 세르비아-몬테네그로로 출전한 마지막 월드컵인 2006년 대회에서 3전 전패를 당하면서 일찌감치 짐을 쌌고, 2010년 대회에서는 독일을 이겼지만 호주, 가나에 지면서 조 최하위로 탈락했다. 그리고 2018년, 크로아티아가 조별리그 전승으로 조 1위로 토너먼트에 진출해 16강에서 덴마크를, 8강에서 개최국 러시아를, 4강에서 잉글랜드를 모두 연장혈투 끝에 격파하고 결승 진출에 성공한다.

만약 구 유고 연방이 붕괴되지 않고 이 대회에 출전하여 크로아티아의 멤버 외에 다른 유고 연방 계열 국가의 멤버들이 함께 뛰었더라면 더 좋은 성적을 올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이건 2010년대 들어서도 마찬가지라서, 한다노비치,일리치치,오블락의 슬로베니아를 필두로 네마냐 비디치, 수보티치, 이바노비치, 마티치, 알렉산다르 콜라로프 등을 배출한 세르비아나, 스르나, 모드리치, 라키티치, 만주키치를 보유한 크로아티아, 피아니치, 에딘 제코를 보유한 보스니아와 요베티치, 사비치를 보유한 몬테네그로 선수들을 조합해보면 유럽 내 어느 강호팀을 상대로도 꿀리지 않는 막강한 스쿼드를 구축할 수 있다. 또한, 제르단 샤치리 역시 2살 때 부모님을 따라 유고 내전을 피해 스위스로 피난간 걸 생각하면 들어갈 수 있다.물론 2010년 프랑스 대표팀처럼 파벌만들고 싸우다가 망했을 가능성도 크지만

세계최강 브라질을 상대로 8골이나 득점한 유일한 나라였다는 나름 자랑할만한 기록(1934년 스코어 8:4)이 있었다.#

축구 이외에도 농구나 테니스, 수구[24]같은 다른 스포츠 분야에서도 유고슬라비아는 공포의 실력을 자랑했는데. 만약에 유고 연방이 붕괴되지 않았다면 축구말고도 수구나 농구, 테니스 등에서도 좋은 성적을 더욱 거두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농구도 유고 연방 분열 당시 시점에서 비미국인 최고의 선수로 여겨지던 블라디 디박(세르비아)와 드라젠 페트로비치(크로아티아)[25], 토니 쿠코치(크로아티아) 등이 함께 국가대표로 활약하고 있었다. 이들은 1988 서울 올림픽에서 유고슬라비아의 농구 은메달을 이끈 핵심 멤버들이었다.

특히 테니스.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과거 유고슬라비아도 축구 못지 않게 테니스도 강국이었다. 모니카 셀레스나 슬로보단 지보이노비치 등등이 당시 대표적인 국가대표급 테니스 선수들이었는데, 출전 금지령 조치로 이들이 미국 등 국외로 망명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유고슬라비아가 분열되지 않고 지금까지 남아있었다면 세르비아의 노바크 조코비치나 아나 이바노비치, 크로아티아의 고란 이바니셰비치같은 국가대표급 테니스 선수들도 세르비아나 크로아티아가 아닌 유고 연방 국가 대표로 하계 올림픽 등 국제대회에 출전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26]

그리고 현재 각 국의 일원들을 봐도 여전히 대단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루카 모드리치 - 크로아티아

이반 라키티치 - 크로아티아

마리오 만주키치 - 크로아티아

마테오 코바치치 - 크로아티아

마르첼로 브로조비치 - 크로아티아

이반 페리시치 - 크로아티아

데얀 로브렌 - 크로아티아

얀 오블락 - 슬로베니아

사미르 한다노비치 - 슬로베니아

케빈 캄플 - 슬로베니아

요십 일리치치 - 슬로베니아

그라니트 자카 - 코소보[A]

제르단 샤치리 - 코소보[*A ]

스테반 요베티치 - 몬테네그로

스테판 사비치 - 몬테네그로

브라니슬라브 이바노비치 - 세르비아

네마냐 마티치 - 세르비아

알렉산다르 콜라로프 - 세르비아

세르게이 밀린코비치사비치 - 세르비아

두산 타디치 - 세르비아

알렉산다르 미트로비치 - 세르비아

두샨 블라호비치 - 세르비아

에딘 제코 - 보스니아

미랄렘 퍄니치 - 보스니아


그리고 농구도 마찬가지. 미국의 드림팀을 상대로도 오버롤이 밀리지 않을만한 막강한 라인업이다.

다리오 샤리치 - 크로아티아

보얀 보그다노비치 - 크로아티아

마리오 헤조냐 - 크로아티아

고란 드라기치 - 슬로베니아

루카 돈치치 - 슬로베니아

니콜라 부체비치 - 몬테네그로

니콜라 페코비치 - 몬테네그로

보그단 보그다노비치 - 세르비아

네마냐 비엘리차 - 세르비아

밀로스 테오도시치 - 세르비아

니콜라 요키치 - 세르비아

보반 마르야노비치 - 세르비아

유수프 누르키치 - 보스니아

미르자 텔레토비치 - 보스니아


만약에 유고슬라비아가 현재까지 통합된 상태로 남아 있었다면 상당한 경제력과 군사력, 높은 국제적인 지위 등 유럽에서 꽤 강력한 국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8.2. 대유고슬라비아?[편집]


원래 유고슬라비아는 불가리아알바니아까지 통합 목표로 두고 있었다. 불가리아인도 마케도니아인과 가까운 남슬라브족이였는데다가, 절대 다수는 아니지만 알바니아인들도 유고슬라비아 지역에서 꽤 퍼져 살았기 때문이다.[27]

초반 유고슬라비아에서 불가리아는 제외되었으나 냉전 시대 유고슬라비아와 불가리아가 모두 공산주의 국가가 되자 발칸 연방의 일환으로 티토와 불가리아 인민공화국의 서기장 게오르기 디미트로프 간에 유고슬라비아에 같은 남슬라브인인 불가리아까지 합치는 대유고연방이 거론되기도 하였다. 허나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유고에 붙으려는 디미트로프는 스탈린에게 밉보여 소련에 소환된 후 독살이라 의심되는 죽음을 맞이하고 대유고연방 구상은 불발된다. 알바니아도 마찬가지로, 티토가 알바니아를 자국 유고에 포함시키려는 의도를 다분히 보이자 알바니아에서 반발하여 사이가 틀어지기도 했다.

9. 매체[편집]


부제는 '일곱 번째 희망'. 고전부 시리즈로 유명한 일본 소설가 요네자와 호노부의 소설로, 베루프 시리즈(다치아라이 마치 시리즈)의 1권이다. 일본에 두 달간 머물게 된 유고 소녀 마야와 평범한 고등학생 모리야 및 그 친구들의 이야기이다. 마야는 6개 공화국을 아우르는 7번째 문화를 만들어 유고의 통합을 이룬다는 큰 뜻을 가지고, 자신이 가게 된 국가의 문화 및 풍습을 기록하는 습관이 있다. 부제인 일곱 번째 희망은 마야의 이런 꿈을 나타낸다. 작중 배경은 유고 내전이 격화되는 1992년이며, 내전이 시작될 즈음 조국으로 돌아가곤 소식이 끊긴 마야의 행방을 모리야가 추리하는 것이 주 내용이다.
주인공인 니코 벨릭은 유고슬라비아 출생이다.[28] 이는 작중에서 큰 비중을 가지고 있는 사촌인 로만 벨릭도 마찬가지다. GTA 4 시점은 2008년이므로 작중 시점의 국적은 니코와 로만 모두 세르비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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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치 독일 점령기 제외. 다만 망명정부가 존재하긴 했었다. 또한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1929년까지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이라는 국명을 사용하였으며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은 2003년 국명을 '세르비아-몬테네그로 국가연합'으로 바꾸니 국체와 별개로 국명만 가지고 따지면 존속기간은 1929년 ~ 2003년이다. [2] 코소보가 미승인국이 된 시점을 기준으로 한다.[3] 사실 1991년유고슬라비아 내전 이후로는 몬테네그로 방면만 붙어 있었다.[4] 반대 사례도 있었는데 독일 통일 두 달 뒤에 열린 세계 여자 핸드볼 선수권 대회에서는 구 동독서독 팀이 별도 참가하였다.[5] 대표적으로 UEFA 유로 1992 당시 참가한 독립국가연합.[6] 영국,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 러시아에서도 이 때문인지 일부 지역에선 분리주의를 통한 분리독립 국가 건설 주장이 나오기도 하나 비교적 미미한 편이다.[7] 물론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내에서도 세르비아와의 합류를 반대하고 독립을 지지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하지만 1차대전이 채 마무리되기 전부터 이탈리아가 달마티아를 장악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할 움직임을 보이는 등, 상황이 너무도 급박하게 전개됐고 결국 민족과 언어와 문화가 남슬라브계로 좀 더 가까웠던 세르비아 합류 지지로 여론이 크게 기울었다.[8] 물론 남북간 격차에 의한 사회적 문제는 현재진행형이지만.[9] 이는 이탈리아 통일에서도 존재한 문제였고, "이제 이탈리아는 만들었다. 다음 차례는 이탈리아인들을 만드는 것이다.”라는 어록이 존재할 정도였다.[10] 베르사유 체제가 확립되는 동안, 협상국은 협상국의 일원이었던 루마니아 왕국과 신생국인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제2공화국, 유고 왕국 등에 최대한 힘을 실어주며 일명 '소협상국'을 만들었다. 이는 패전하고 영토를 빼앗긴 바이마르 공화국,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 불가리아 왕국, 헝가리 왕국 등 구 동맹국이 필연적으로 보복에 나설 수 있으니 여기에 맞서 전쟁을 억제할 수 있는 국력을 갖추게 하기 위함이었는데, 현실은 다들 아시다시피 죄다 파시즘의 물결에 쓸려나가 버렸다(...). 하물며 유고슬라비아 지역이 고만고만한 국가로 분열되어 있다면, 추축국에게 그저 만만한 먹이가 늘어날 뿐이다. 물론 유고 왕국도 개전 11일만에 광속으로 삭제당하기는 했다.[11] 우스타샤는 국왕 알렉산다르 1세의 암살사건의 배후였고 이후 대대적인 탄압을 받았다.[12] 물론 그것과는 별개로 크로아티아 독립국가의 염원이 이루어지자 수 많은 크로아티아계 주민들이 이에 열광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우스타샤가 급격하게 폭주하기 시작했다.[13] 아버지는 슬로베니아계, 어머니는 폴란드-체코계였고 고향은 사라예보다.[14] 보슈냐크인임에도 보스니아 전쟁 시기 스릅스카 공화국 군복 차림의 사진이 찍혀서 엄청나게 욕을 먹었다. 다만 스릅스카 공화국에 포위된 고향 브르치코에 안전하게 가기 위해서 이랬다는 이야기도 있다.[15] 아버지는 세르비아계, 어머니는 슬로베니아계다. 물론 세르비아계와 슬로베니아계의 혼혈이라는 이유만으로 유고슬라브인으로 규정된 것이 아니라, 작중 내용을 보면 자신을 명확히 유고슬라브인, 즉 통일 국가 유고슬라비아를 기반으로 탄생될 새로운 민족집단의 구성원으로 간주하고 유고슬라비아를 구성하는 여섯개 문화가 융합된 일곱번째 문화가 탄생하는데 기여하고 싶다는 꿈을 꾸는 인물이므로 아주 모범적인 유고슬라브인의 전형을 보여주는 캐릭터이다. 다만 고향이 사라예보. 전쟁 당시의 사라예보였기에 그로 인하여 굉장히 끔찍하고 슬픈 결말을 맞는다. 동시에 이는 통일된 유고슬라비아라는 꿈이 처참하게 실패하였음을 보여주는 메타포이기도 하다.[16] FK 츠르베나 즈베즈다의 창립 멤버이자 첫 번째 주장. FK 츠르베나 즈베즈다의 구장 이름은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17] 아래 언급된 선수들보다는 훨씬 대선배.[18] 정상급 윙어였지만 변방에서 활약해 저평가 당한다. 아래 언급된 선수들보다는 대선배.[19] 1955년생. 아래 언급된 선수들보다는 대선배.[20] 1951년생. 원조 골 넣는 골키퍼. 통산 A매치 19경기에 출장, 통산 2득점을 기록했다.[21] 1944년생. 선수로써의 커리어는 미미했지만, 은퇴 후 지도자로써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코스타리카, 1994 미국 월드컵에서는 미국을 16강에 올려놓는 등 약팀을 강팀으로 만드는 수완을 인정받았다.[22] 이는 1987년 20세 이하 칠레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한 것으로 증명된다. 보반, 야르니, 프로시네치키, 슈케르, 미야토비치 등이 출전했다. 당시 조별예선에서 칠레, 호주, 토고를 각각 4:2, 4:0, 4:1로 가볍게 제압하고, 8강, 4강에서는 브라질과 동독을 각각 2:1로 무찌르며 결승에 진출, 서독을 승부차기 끝에 이기고 우승을 차지했다.[23] 당시에는 승리시에 2점, 무승부시에는 1점을 주는 제도였다.[24] 특히 유고슬라비아 전쟁의 발발로 유고 연방이 분열되어가던 와중이던 1991년에 치뤄진 유럽수영선수권대회에서 11대 10으로 스페인을 이기고 우승하는 기염까지 토했다.[25] 이들은 절친한 친구였으나 연방 분열 과정에서 사이가 나빠져 페트로비치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1993년까지 이승에서 두 사람은 화해하지 못했다.[26] 그러나 테니스는 축구와 달리 개인 종목이라 유고슬라비아가 아닌 세르비아나 크로아티아등 연방에서 갈라져나온 국가들도 충분히 최강급이라서 유고슬라비아가 분열되지 않고 유지되었다 해도 현재와 비슷했을 가능성이 높다. 대신 국가대표 선발전 난이도 역시 크게 올랐을 것이다.[A] 스위스 대표팀에서 뛰고 있다.[27] 사실 알바니아는 남슬라브와 거리가 멀다. 인종적 구성이 남슬라브족이 아니라 그리스인에 가깝고 알바니아어 또한 슬라브어파에 속하지 않고 별개인 알바니아어파로 분류된다. 그렇지만 어찌 됐든 근접한 국가이니 역사적 교류를 통하여 영향을 많이 받았던만큼 연방국으로 포함시키려 한 연유가 되었는 듯. 뭉쳐야 산다[28] 정확히는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