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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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유관흥(劉寬興)
생몰
1895년 1월 20일 ~ 1938년 4월
출생지
함경남도 고원군 수동면 미둔리
사망지
함경남도 고원군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유관흥은 1895년 1월 20일 함경남도 고원군 수동면 미둔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개신교 신자로, 1919년 3월 중순 천도교 신자 김명국(金明國)·을 만나 고원군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권유해 찬성을 얻어낸 뒤 거사일을 3월 19일로, 장소를 하시장으로 결정했다. 이후 그는 고원경찰서 고등게 형사 보조원인 이양화(李陽化)를 설복시키고 엄치인(嚴致仁)·김중생(金重生)·맹태유(孟泰裕)·김한수(金翰洙)·오창옥(吳昌玉)·김대복(金大福) 등을 동지로 삼은 뒤 하고읍리의 소나무 숲에서 300여 매의 태극기를 제작했다.

3월 19일, 약속한 하시장에 5백여명의 시위군중이 모이자, 그는 이들의 선두에 나아가 독립만세를 선창한 후, 이들과 함께 석연리 덕지장(石淵里德池場)으로 행진하였는데, 이때 1백여명의 기독교인들이 가세하여 시위군중의 사기는 더욱 높아졌다. 그러나 출동한 일본 경찰·헌병의 무력저지를 받고 시위군중은 해산되고 말았다. 이후 체포된 그는 5월 1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고원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38년 4월경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유관흥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