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금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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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송 유씨 가문 출신 배향공신
태조
의종
충절공 유금필
공숙공 유필




고려 역대 태묘 배향공신
개국공(開國公) 충절공(忠節公)
유금필
庾黔弼

작위
개국공(開國公)
시호
충절(忠節)
본관
평산 유씨 / 무송 유씨
생몰년
? ~ 941년(태조 24)
가족
동양원부인(東陽院夫人)
아들 유긍(庾兢), 유관(庾官), 유유(庾儒), 유경(庾慶)
1. 개요
2. 약력, 지휘 부대
3. 생애
4. 기타
5. 대중매체



1. 개요[편집]


고려 초기의 장군이자 호족. 평산 유씨(平山 庾氏)[1]무송 유씨(茂松 庾氏)의 시조.[2] 태조의 여섯 배향공신 중 유일하게 후손도 태묘에 배향된 인물이다. 태조 왕건이 후삼국 통일을 할 수 있게끔 혁혁한 공을 세운 후삼국시대 고려 최고의 용장이다.


2. 약력, 지휘 부대[편집]


향직
대상(大相)
일리천 전투 시기의 품계
대광(大匡)
삼중대광(三重大匡)
유자우 묘지명 기록
직위
마군장군(馬軍將軍)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925)
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933)
우장군(右將軍)(934)
도통대장군(都統大將軍)(935)
삼한통합제오호기위(三韓統合第五虎騎尉)
유자우 묘지명 기록
태사(太師)
작위
개국공(開國公)
유자우 묘지명 기록
시호
개국충절공(開國忠節公)
고려사 예지 태묘조 기록

고려 북벌 군단
개정군
開定軍

지휘관
유금필
장병
기마병 & 보병 3,000명

고려 남정 군단
중군
中軍

지휘관
유금필
관무, 관헌 등
장병
기마병 9,500명
유금필은 후삼국시대를 끝낸 일리천 전투에 참가했다. 유금필은 자신이 복속시킨 북방 이민족을 전쟁에 참여시켜 총 9,500명의 정예 기마병을 끌고 내려온다.


3. 생애[편집]


유금필이 태어난 연도는 기록의 부재로 알 수 없다. 935년 나주 탈환에 앞서 자신이 이제 늙었다고 말한 바가 있는데, 이 때 장수로서 늙은 나이인 50세가 넘었다고 본다면 880년대 이전에 태어났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918년 고려 건국 당시에는 30대 중후반 이상 정도로 예상할 수 있겠다.

유금필의 출신지인 평산은 신라 북부에서 대곡성(大谷城), 대곡진(大谷鎭) 등이 설치된 군사 거점이었다. 신라 말 지방 통제력이 무너지고 평주 토호인 박씨가 궁예에게 귀부 할 때쯤 유금필도 편입되어 태봉의 마군장군까지 오르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왕건의 역성혁명 당시 어떤 역할을 맡았는지는 기록의 부재 탓에 알 수 없지만 역성혁명 이후 홍유와 함께 궁예의 지지 세력들이 남아 있던 청주반란을 진압하는 공을 세웠다.

유금필의 맹활약이 본격적으로 기록상에 나타나는 시점은 923년으로, 골암진[3]에 북번[4][5]이 자꾸 쳐들어와 위협을 가하자 왕건이 유금필을 골암성(鶻巖城)으로 보내 북쪽 변방을 지키도록 했다. 유금필은 북번의 추장 300여 명을 불러 성대한 연회를 연 뒤 이들이 거하게 취하자 “이제 그만 복종하라!”라고 위협하여 단숨에 그들을 복종시키는 데 성공하였고 북번의 각 촌락들마다 사람을 보내 “너희 추장들이 복종했으니 이제 그만하고 너희들도 숙여라.”고 하여 무려 1,500여 명이 항복해 왔고 포로로 잡힌 고려인 3,000여 명을 귀환시키는데 성공해 왕건이 큰 상을 내렸다고 한다.

925년에는 연산진과 임존군[6]을 공격하여 후백제의 장군 길환과 군사 3,000명을 전사시키는 큰 공을 세우며 본격적으로 장수로서 이름을 떨치게 된다. 왕건과 견훤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대치 중이었던 조물성 전투에서도 유금필이 전장에 모습을 드러내자 한창 우세하던 견훤이 유금필을 두려워한 나머지 왕건의 화친 제의를 받아들일 정도.[7] 당시 유금필은 오늘날 충청남도 지역에서 후백제 영토를 돌파하여 경상북도 내륙 깊숙한 곳에 있던 조물성에 도달하였는데 견훤으로써는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 분명하다.[8]

이후 왕건이 공산 전투에서 참패함에 따라 후백제의 기세가 치솟았던 928년 탕정군(湯井郡)에서 축성 작업을 감독하고 있던 유금필은 왕건이 삼년산성[9]에서 패배하고 후백제 장군 김훤, 애식, 한장의 3천 군마에 쫓기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는 신속하게 후백제군을 물리쳐 왕건을 구출해 냈다.

고려와 후백제의 운명을 가른 930년 고창 전투 때는 왕건을 비롯한 제장들이 전투에 소극적인 가운데[10] 무기가 흉악한 도구이며 전쟁이 위험한 것은 자명한 것이니,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야 겨우 승리할 판인데 어찌 적을 앞에 두고도 지는 것을 겁내는 겁니까?”라는 폭풍간지스러운 명언을 남기며 홀로 결전을 주장하는 동시에 직접 선봉에 서서 돌격하였다. 이에 고려군이 힘을 다해 싸워 후백제군 8천여 명을 전사시키는 대승을 거두었으며 유금필은 고려가 후삼국의 패권을 쥐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11]

전투에서 맹활약하며 공을 이어갔지만 931년 참소를 받고 곡도(鵠島)유배를 떠나게 되는데 왜 유배길에 올랐는지는《삼국사기》나《고려사》등 사서에 이유가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왕건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 유금필을 견제하려는 다른 공신이나 패서 호족들의 움직임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유금필은 여러 차례 전공을 세우며 명실상부한 고려의 영웅으로 자리매김한 상황이었고 고창 전투에서의 맹활약으로 왕건의 최측근 위치에 이르게 되었다. 왕건이 무고함을 알면서도 엄청난 공을 세운 유금필을 유배 보내게 만들 정도로 막강한 세력은 고려 초기 당시에는 개국 집단인 패서계 호족들밖에 없었다. 외척인 나주 집단은 태생적인 한계 탓에 권력이 약할 수밖에 없었고, 나중에 고려에서 큰 권력을 쥐게 되어 후일 문벌귀족에 이르는 삼남 지방의 호족 가문들도 아직 고려에 편입되기 전의 시점이었다. 다만 왕건 본인 역시 유금필을 견제하는 차원에서 그랬을 가능성도 높은데 군사적 능력에 정치력까지 겸비한 무장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군주에게 경계 대상 1호일 수밖에 없다. 당장 왕건부터가 궁예의 휘하 무장이었다가 그를 몰아내고 역성혁명을 이룬 장본인이다. 태조 왕건에서는 유금필을 경계한 패서 호족들과 공신들이 연계하여 유금필을 참소한 것으로 나오는데 이는 충분히 일리 있는 설정이다. 하지만 유금필은 곡도에서 지낸 유배 생활 중에도 태조와 나라를 걱정하며 상소를 올리는 등 충의를 꺾지 않았다.

932년 후백제 수군 장군인 상귀상애가 지휘하는 특별 함대가 각각 송악대우도를 습격하는 사건이 일어났다.(예성강 전투) 상귀가 고려 수군을 불사르는 등 대승을 거두었고 이에 고려군의 함대는 큰 타격을 입게 되는데 왕건은 장수 만세를 보내 대우도를 약탈하려는 상애를 막도록 하였으나 이를 막아내지 못했다. 그런데 이 위험한 상황에서 유금필은 곡도에서 유배 중인 몸임에도 불구하고 몸소 함선을 모은 뒤 의병을 일으켜 대우도에서 송악을 넘보려던 상애를 몰아내는 공을 세웠다.[12] 이 공로 덕분인지 유배 생활을 마치고 조정으로 복귀하게 되었으며 유배를 떠난지 2년 후인 933년 정남대장군에 임명되었다는 기록으로 보면 그 사이에 유배형이 풀린 듯하다.

933년 5월 후백제군 사령관이자 견훤의 장남 견신검이 다시 신라 국경을 침공한 탓에 서라벌이 6년만에 다시 후백제 손에 떨어질 위기에 처하자 왕건은 다급히 유금필에게 구원 명령을 내렸다. 유금필은 군사들을 모을 시간도 없어 겨우 80기의 부하만 이끌고 급히 서라벌로 달려가던 도중 후백제군과 조우하게 되었지만 필사의 각오로 후백제군을 물리쳤다. 이 때의 이야기도 멋지기 그지없는데, 강을 건너기 직전 부하들에게 "이 전투에서 나는 죽음을 피할 수 없겠지만 너희들까지 희생되선 안 된다."며 각자 살 길을 도모하라 말하였으나, 부하들은 "장군님과 같이 죽으면 죽었지 절대 그럴 수는 없다."며 유금필과 함께 강을 건넜다. 후백제군은 그 기세에 눌려 싸워보지도 않고 후퇴하였다. 이후 서라벌에 입성해 서라벌을 안정시키고 7일간 환대를 받은 다음 돌아오는 길에 다시 후백제군과 맞붙어 적장 환궁과 금달을 사로잡는 등 큰 승리를 거두었는데 왕건이 눈물까지 흘리며 좋아한 건 당연지사.

이후 운주성 전투에서는 직접 선봉에 서서 야간의 기습을 감행해 견훤의 군대를 크게 무너뜨리고 적장 상달과 최필, 술사 종훈, 의사 훈겸 등을 사로잡는 등 큰 공을 세웠다. 나주 탈환 작전[13]의 총사령관을 맡아 왕만세, 충질, 오담, 능선, 향예 등과 함께 참여하여 역시 으뜸가는 공을 세웠고 견신검에 의해 금산사감금당했던 견훤이 탈출하자 함대를 이끌고 견훤을 보호하여 고려에 오게 하였다. 후삼국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한 일리천 전투에서도 자신이 예전에 복속시킨 말갈 기병 9천 5백을 통솔해 공을 세웠고 6년 후인 941년에 세상을 떠났다.


4. 기타[편집]


  • 유검필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흔히 유금필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는 한자를 음독하는 과정에서 생긴 것으로 이라는 한자가 ‘검을 검’, ‘귀신이름 금’이라는 2가지 음으로 읽히기 때문이며[14] 오늘날에는 유금필이라는 명칭이 유명하지만 조야기문(朝野記聞) 같은 조선시대 사료에서는 유검필이라 표기되어 있다. 명칭이라는 것이 시간에 따라 변하기도 하기에 어느 쪽이라도 상관없으며 당대 기준을 중시한다면 유검필, 현대 기준을 중시한다면 유금필로 읽으면 된다.

  • 전쟁사 중심으로 후삼국시대를 서술할 경우 챕터 하나를 유금필이 독차지할 수 있을 정도로 전공이 말 그대로 미친 수준이다.[15] 비교적 빈약하게나마 전해져 오는 후삼국시대의 기록들만으로도 엄청난 전과를 올린 것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 말갈족기병들을 활용한 능숙한 기병대 지휘는 물론 수군까지 잘 다루며 일생 동안 패배를 모르는 장수로서 일선에서 맹활약했다. 북번의 여진족을 제압하여 복속시키는데 성공했고 급기야 그들에게 대추장이라는 말까지 듣게 되었다고 하니 통솔력 또한 군대를 이끄는 무장답게 출중했던 듯 싶다.

  • 의외로 개국공신으로서의 등급은 낮아서 1, 2등 공신 목록에도 유금필의 이름은 눈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고 1번에 2,000여 명을 임명한 3등 공신일 것이라는 추측만 있을 뿐이다. 918년 왕건 즉위와 920년 골암진 파견 이전까지의 기록이 없다면 궁예의 위사 출신인 박술희처럼 무명의 장수를 파격적으로 중용했다고 추정해 볼 수도 있겠으나 왕건이 궁예를 몰아낸 직후인 918년 7월에 1등공신 홍유와 함께 궁예 친위 세력이 잔존해 있던 충청북도 진천으로 파견된 기록이 남아있다. 1등공신인 홍유를 보좌해 내려갈 위치라면 왕건 즉위 시점에 무명이었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다른 기록이 없으니 추정만 해볼 수 있을 뿐인데 무명은 있었으나 비밀스럽게 진행된 왕건의 역성혁명에는 기여한 바가 적어 자연스럽게 뒤로 밀렸을 가능성이 크고 되려 왕건이 직접 정치적으로 안배를 해준 것이 아니냐는 추측도 있다. 본래 이런 공신들을 책봉하는 건은 사건 이후의 혼란 및 터져나올 수 있는 반감을 수습하고 지지 기반을 얻기 위해 특별히 한 일도 없는 사람을 공신으로 책봉하여 우대해주거나 반대로 크게 공을 세운 인물을 일부러 낮은 등급에 책봉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공신 등급과는 별개로 유금필의 딸은 태조의 9번째 비인 동양원부인(東陽院夫人)이 되었고, 유금필 사후에는 태조의 배향공신에 오르는 영예를 누리게 된다.

  • 태조는 죽기 전에 따로 유언을 남겨서 “유금필의 자손이 를 짓더라도 따지지 말고 중용하라.”고 이를 정도였으니 그만큼 태조가 엄청나게 믿고 의지한 장수였음은 틀림없는 팩트라고 할 수 있다. 태조의 유언 덕분에 문종 때 유금필의 후손인 유공의가 아첨이 심하고 많은 불법 행위를 저질렀음에도 죄를 묻지 않고 숙주방어사에 제수했다. 유금필의 또다른 후손인 유중경은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삼촌과 조카 관계였다는 이유로 조정에서 벼슬을 주는 것을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유금필의 후손이라는 이유만으로 벼슬을 받았을 정도니[16] 그의 후손들은 조상 잘 둔 덕에 호의호식했다. 현존 개성 왕씨 90%를 차지하는 동양군파는《고려사》에 등장하는 효은태자[17]를 파조(派祖)로 삼고 있는데[18] 효은태자의 생모가 바로 유금필의 딸인 동양원부인 유씨로[19] 지금 남아있는 개성 왕씨는 모계 쪽으로 유금필의 핏줄을 잇고 있는 셈.

  • 사후 가림현[20]의 성황신으로 모셔졌고 가림성이라 불렸던 부여 성흥산성 안에 유금필의 사당이 세워졌다. 사당을 관리하는 무속인이 1명 있기는 하지만 사당 자체는 유금필의 후손을 자처한 무송 유씨가 관리하고 있으며 사당에 모셔져 있던 나무를 깎아 만든 유금필 부부와 아들, 딸의 목상이 2008년쯤에 도난당한 것이 뒤늦게 알려졌는데, 목상의 행방은 지금까지도 묘연하다고 한다. #


  • 유금필의 또 다른 후손인 유자우(庾自㥥)[21]의 묘지명이 현존한다. 유자우는 무송 유씨로 공숙공 유필의 5대손인데 스스로 유금필에게서 '계(系)'가 나왔다고 한다. 여기서 나온 유금필의 관작은:

  • 삼한통합제오호기위(三韓統合第五虎騎尉): 삼한통합은 후삼국 전쟁에 참여했다는 뜻일테고 제오호기위는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 호기위는 왕식렴도 가지고 있었는데 직위로 보는 것이 타당한 듯 하다. 왕식렴은 그냥 호기위지만 유금필은 제5호기위이다.
  • 태사(太師): 천자의 스승으로 삼사 중 최고위 직.
  • 개국공(開國公): 고려 개국공신에게 주어진 미칭. 왕식렴도 가지고 있었다.《고려사》에는 개국공이라고 떨어져 있는게 아니라 개국충절공처럼 시호에 덧붙어 있다.
  • 삼중대광(三重大匡): 1품 1등위 향직 품계로 가장 높은 향직 품계.
  • 장위익대광위협보좌성저정공신(壯威翼戴匡衛協輔佐聖底定功臣):《고려사》에 등장하지 않는 저정공신호.
  • 충절공(忠節公): 시호.《고려사》에도 등장.


5. 대중매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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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평산은 평주(平州)라고도 부른다.[2] 정청주에 따르면 평주 유씨와 무송 유씨는 원래 다른 집안으로 고려 후기에 와서 평주 유씨의 세력이 약해지고 무송 유씨가 평주 유씨를 흡수하면서 평주 유씨의 시조였던 유금필을 자신들의 시조로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출처: 정청주 《신라말 고려초 호족 연구》 일조각, 1996년) [3] 오늘날의 강원도(1946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함경남도에서 강원도로 바뀌었다.) 안변군 신좌리[4] 기록에는 이들의 주체가 나와있지 않지만 학계에서는 대체로 말갈족 부락으로 보고 있다. 이 시기 발해가 점점 쇠퇴하는 탓에 주변 지역에 대한 통제력이 무너지면서 고려에 인접해 있던 말갈족들이 귀순하거나 약탈을 벌인 기록이 자주 등장하기 때문.[5] 실제로 왕건에게 항복한 윤선이라는 인물 역시 궁예의 폭정을 피해 골암진으로 무리를 이끌고 달아난 후 이민족들을 끌어들인 탓에 주변 고을이 해를 입게 되었다. 그리고 2년 전인 921년에도 말갈의 일파인 달고가 신라의 북방 지역을 공격하자 그 근처인 삭주에 주둔하고 있던 견권이라는 장수가 그들과 맞서싸워 격퇴시켰다는 기록이 전해져 온다.[6] 오늘날의 충청남도 예산군[7] 조물성에서 왕건과 견훤 중에 누가 먼저 화친을 정했는지는 기록마다 차이가 있다.[8] 태조 왕건에서도 유금필이 순식간에 연산진과 임존군을 함락했다는 소식에 마침 전염병으로 인해 걱정 중이던 후백제군이 경악하는 나온다.[9] 충청북도 보은군. 신라가 470년(자비왕 13년) 백제를 견제하기 위해 만든 요새로 동으로는 상주, 서북으로 청주, 북으로는 충주, 서남으로는 옥천, 남으로는 영동으로 이어지는 요충지.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다 보니 방어하는 후백제의 전력이 만만치 않았다.[10] 왕건과 다른 장군들 상당수가 거듭된 패배로 어느 정도 질려 있었다. 홍유와 강공훤은 후퇴할 길부터 닦아놓자고 말할 정도.[11] 물론 유금필의 용맹함뿐만 아니라 고창 지방의 호족들이 왕건을 지지했기 때문이기도 하다.[12] 태조 왕건에서는 지역 추장들의 고깃배를 모아다가 싸웠다는 묘사로 나오는데 실제로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고 해안 지역 호족이나 후삼국시대 당시 한반도 서해와 남해는 해외 기록에서 신라구로도 등장하는 해적이 들끓고 있었는데 친고려 성향 해적들을 규합하여 함대를 급조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13] 이런 공세가 있었는다는 것은 기록이 있으나 성패 여부는 기록이 없어 확인할 수 없다. 이후 견훤이 배를 타고 후백제를 탈출했으므로 탈환했을 수도 있고 나주 근방의 도서 같은 일부 거점 지역만 확보했다고 추측해볼 수도 있다.[14] 인천광역시 검단신도시의 검 자가 같은 한자를 쓴다.[15] 신성재, 2018, 《후삼국 통일 전쟁사 연구》, 혜안.[16]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890761 참조.[17] 다만 태조와 동양원부인의 아들인 효은태자는 광종 대에 역모에 연루되어 사사된다.[18] 정확히는 효은태자의 후손으로 조선 초기의 왕씨 숙청에서 살아남은 왕미(王亹).[19] 고려 초기 왕자들 호칭의 경우 생모의 출신지나 태어난 거처의 호칭을 따서 불리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태조의 제11비 천안부원부인 임씨 소생의 왕자는 천안부원낭군(천안낭군)으로 불렸다던가 하는 식.[20] 지금의 충청남도 부여군 성흥면[21] 유금필 → ... → 유필 → 유자량 → 유경현 → 유홍 → 유해(경원군부인(慶原郡夫人)과 결혼했는데 작호로 보아 인천 이씨로 보인다.) → 유자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