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삼국지)

최근 편집일시 :

파일:다른 뜻 아이콘.svg
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손오의 인물에 대한 내용은 유기(손오) 문서
유기(손오)번 문단을
유기(손오)# 부분을
, 서진의 인물에 대한 내용은 유기(서진) 문서
유기(서진)번 문단을
#s-번 문단을
유기(서진)#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劉琦
?~209
1. 개요
2. 생애
3. 미디어 믹스



1. 개요[편집]


후한 말의 군벌인 유표의 장남이자 유종유수의 형으로[1] 어머니는 진씨(陳氏). 연주 산양군 고평현 사람.


2. 생애[편집]


유표와 닮은 풍모가 있어 평소 큰 총애를 받았지만 유종을 후계자로 지지하는 채씨 일가에게 미움을 받아서 유종이 하는 것은 다 감싸준 반면, 유기의 공적은 아무리 커도 묻혀졌고 작은 잘못이 있어도 반드시 소문이 났다고 한다. 안에서는 채부인이 밖에서는 채모가 선전에 열을 올리니 유표도 더 이상 유기를 신뢰하지 않게 되어 결국 강하태수로 내쫓기게 된다.

유기가 외지로 나가자 그나마 있던 유기의 지지세력도 자연 약해졌고 채씨 일족의 비방도 한층 계속되어 결국 유표가 유종을 공식적 후계자[2]로 삼음으로써 후계자 레이스에서 완전히 리타이어 당하고 만다.

유기는 그래서 제갈량을 데리고 후원을 걸으며 구경하고는 함께 높은 누각에 올라가 잔치를 베푸는 동안 사람을 시켜 사다리를 치우게 했다. 곧이어 제갈량에게 말했다.

“오늘 위로는 하늘에 닿지 않고 아래로는 땅에 닿지 않습니다. 말이 그대 입에서 나오면 제 귀로 들어갈 뿐이니 말씀해주시지 않겠습니까?”

제갈량이 대답했다. “그대는 신생(申生)이 나라 안에 있다가 위험해지고 중이(重耳)가 나라 밖에 있어서 안전한 것을 보지 못했습니까?” 유기가 마음으로 크게 깨닫고는 몰래 외지(外地)로 나갈 계획을 꾸몄다. 때마침 황조(黃祖)가 죽어서 외지로 나가 강하태수가 될 수 있었다. 얼마 뒤에 유표가 죽었다.

- 촉서 제갈량전


다만 제갈량전의 묘사에 의하면 유기가 강하 태수로 나가게 된 것은 유기 스스로도 줄곧 신변의 위협을 느꼈기에 중앙에서 유종과 후계를 다투다가 살해당하느니 차라리 변경으로 나가 자발적으로 퇴진함으로써 목숨이라도 건지려는 의도였던 모양.[3] 제갈량전에는 제갈량이 춘추오패 중 하나인 진문공(晉文公) 중이(重耳)의 고사를 들어 유기에게 알려주고[4] 유기가 깨달은 바가 있어 황조가 죽어 공석인 강하 태수로 자임해서 나간 것으로 나온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이런 제갈량의 조언을 더 극적으로 각색함으로써 등장한 지 얼마 안 된 제갈량을 띄워주는 데 사용된다. 연의에서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유기는 이런저런 시련을 당하고 있었는데, 유비가 유표를 보러 왔을 때 유비에게 제발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유비는 제갈량을 얻기 이전에 비육지탄 사건으로 유표의 의심을 산 적이 있었던지라 망설였지만, 생각 끝에 "내일 작별인사를 공명에게 맡기겠다. 그러니 그에게 부탁해 보라"며 달랬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유비는 복통을 핑계로 공명을 유기에게 보내 자기 대신 작별인사를 하게 했다.
유기는 그가 오자 어제 유비에게 말을 들었던 터라 그를 보내주지 않고 보신책을 물었지만 공명은 남의 집안싸움에 끼어들 수 없다며 입을 열지 않았다. 이에 유기는 공명이 공부를 좋아하는 것을 이용하여 "저한테 오래된 서적이 있는데 감정 좀 해주시겠습니까?"라며 미끼를 던졌고, 공명이 말려들자[5] 그를 높은 누각으로 불러냈다. 공명이 책을 찾자 유기는 무릎을 꿇고 울며 매달렸다. 이에 공명이 화를 내며 가려고 했지만 사닥다리가 치워지고 없었다. 그럼에도 공명이 끝까지 말하지 않자 유기는 칼을 빼어 자기 목을 찌르는 시늉을 했고, 공명이 황급히 그를 말리면서 계책을 말해 주었다. 말해준 계책은 대략적으론 정사와 비슷하고 이후 강하태수로 가라고 조언해 준다. 이후 공명이 유기와 헤어져 돌아오자 유비는 시치미를 떼고 좋은 계책을 내었다고 칭찬했다.[6]
한편 유표는 유기가 공명에게 들은 대로 자진해서 최전방으로 나가겠다고 하자 마침 들어온 유비에게 그 까닭이 뭔지 알겠냐고 물었고, 유비는 자기가 꾸민 일이기에 "첫째 아드님께서 손권을 막겠다는데 그 의기가 가상하지 않습니까."라며 유기를 띄워주면서 허락하게 했다. 덕분에 유비와 유기의 사이가 가까워지고 유기는 채부인을 비롯한 채씨 일족의 음모를 피했다고 한다.

전략과 후한서에 따르면 이후 중병에 걸린 유표를 문병가지만, 혹시나 유표가 후계자 선택 과정에서 마음이 바뀔까봐 우려한 채모와 장윤에게 방해를 받아 병문안은 커녕 들어가지도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임지로 돌아가서 사람들이 이를 듣고 가슴아파 했다고 한다. 하지만 들어갔다간 채모와 장윤, 채부인이 무슨 술수를 꾸며서 죽일지도 모르는 일이니 결과적으론 다행.[7] 유표가 죽고 유종이 조조에게 항복하자 주전파의 대표인 유비와 연합하여 조조에게 저항한다.

원래 후계에서 점점 밀려날 때부터 유종과 사이가 나빠졌는데 유표가 죽는 시점에서는 둘 다 서로를 원수로 여겼다고 한다. 후한서 유표열전에 따르면 이후 유기가 유종과 채모 일당에게 후의 인수를 받자 분노하여 땅에 내던지고 군사를 일으켜 공격하려 했는데 조조의 침공으로 강하로 회군했다. 그 후 유비가 장판파에서 쫓겨 도망칠 때 배를 끌고 나타나서 협동체제를 굳혔다. 적벽대전 때는 유비군의 병사로 1만 명을 지원한 것으로 보인다.[8] 정사 삼국지 선주전 주석 한위춘추에 따르면 어떤 이는 유종과 형주의 관원을 위협해 남쪽 강릉으로 데려가 농성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유비는 '유형주(劉荊州, 형주목 유표)가 죽을 때 내게 고아를 맡겼으니, 신의를 저버리고 스스로를 구하는 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니오. 죽은 뒤 무슨 면목으로 유형주를 만나겠소'라고 거절한다. 기록으로 보면 유표는 유비를 아들들의 후견인 격으로 삼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후일 유기와의 합류는 유기 입장에서도 유비의 합세로 더 버틸힘이 생겼던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후한서에 따르면 조조가 이후에 적벽(赤壁)에서 패하고 유비는 표를 올려 유기를 형주자사로 삼았는데 다음해(209년)에 죽었다. 유기의 세력은 자연스레 유비가 흡수한다.

연의에서는 남군을 오가 빌려준 것이 아닌 유비가 뒤통수로 얻은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노숙이 형주 돌려달라고 징징대러 왔을 때 제갈량에 의해 협상카드로 사용되기도 했다.[9] 그런데 형주자사가 된 지 얼마 안 되어 병사한 것에서 따왔는지 이때는 분명 적벽대전까지만 해도 직접 군대를 지휘할 정도로 건강하던 사람이 어느 새 오늘 내일을 장담하기 힘들 정도로 골골거리면서 나온다. 그리고 결국 얼마 안 돼 진짜 죽는다.[10]

결국 후계자 싸움에서 발려서 쫓겨났다가, 유비와 협력해서 조조군을 몰아내고 형주자사가 되는 거까지는 좋았지만 그 덕도 보기 전에 죽은 셈. 어떻게 보면 삼국지 내에서 가장 기구하고 한 많은 인생을 살다 간 인물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결정적으로 조조가 '유표의 아들들은 개돼지와 같다'는 발언을 한 적이 있지만,[11] 비교 대상이 손권이다. 본래 유표에게 줄곧 총애를 받고 효성스러웠다며 평가되던 반면에, 당시 사람들이 유종을 도왔던 채씨 일가를 비웃고 경멸했다는 기록도 있는 걸 보면 딱히 능력이 특출나진 않았으나 그렇다고 특별한 결격 사유도 없었고 나름대로 평판도 좋았던 것 같다. 그리고 조조 입장에서 유기는 자기 숙적 유비를 도와주고 그게 나비효과가 되어 자기의 천하통일의 꿈을 박살내는데 일조한 괘씸한 놈이니 띄워줄 이유도 없으니 폄하했다고 볼 수 있다.


3. 미디어 믹스[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유기(삼국지)/기타 창작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 세 사람 모두 동복형제다. 유종이 채부인의 아들이라는 것은 연의의 창작이다. 유수는 연의에서 언급조차 안 되었고...[2] 사서의 표현을 빌리자면 적사(嫡嗣). 정부인의 소생으로 대를 이을 아들의 의미다.[3] 역사적으로 봤을 때에도 중앙에서의 위협을 피해 변방으로 스스로 떠나는 경우가 많았다.[4] 중이의 아버지인 헌공(獻公)의 애첩인 여희(驪姬)는 자신의 친아들인 해제(奚齊)를 후계자로 삼기 위해 헌공이 자식들을 의심하도록 음모를 꾸몄는데, 자신의 몸에 꿀을 발라 벌들이 달려들게 하고는 형인 신생(申生)이 벌을 쫓고 여희를 지키려는 걸 겁탈하려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이에 분노한 헌공이 신생을 베어버리자, 중이는 도망을 가서 살아남아 뒤에 즉위하여 패자가 되었다는 내용이다. 제갈량은 채부인을 여희에 비유하며 유기에게 중이처럼 도망가서 몸을 보존하라는 말을 한 것이다.[5] 연의에서 공명이 타인에게 낚이는 몇 안 되는 장면이다.[6] 이는 유비에게도 나중에 좋은 일이 되었는데, 나중에 장판 전투에서 조조군에게 쫓기다 도망친 곳이 강하였고 실제로 유기가 수군을 이끌고 마중을 나왔다.[7] 사실 채씨 일족입장에서도 그냥 성에 불러서 몰래 죽여버리면 간단한 일이긴 했다. 어찌되었건 유표가 제대로 골골해졌으니 몰래 죽이고 숨기면 알 턱이 없다.[8] 본인이 직접 참전했는지는 알 수 없다.[9] 노숙이 형주를 돌려달라 하자 제갈량은 "우리는 유표의 유지를 이어받아서 유기가 형주를 지키는 걸 도울 뿐이다."라고 주장했고, 노숙은 '유기는 강하에 있지 않나?'라고 따지자 몸져누웠던 유기를 불러내 인사를 시켜 노숙의 입을 다물게 한다. 이에 노숙은 유기가 죽으면 형주를 차지하겠다고 다짐했지만 죽은 후에도 유비와 제갈량은 계속 다른 핑계를 대면서 반환을 거부했고 이는 나중에 형주 공방전의 원인이 된다.[10] 굳이 갖다붙이자면 평생 후계자 싸움에서 위험한 위치에 있으면서 목숨을 위협받았으니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손권과의 연합, 조조와의 일전은 극도로 신경을 많이 썼을 것이고, 유표의 후계자면서 유비와 연합하면서 주도권이 유비에게 있는 것도 그다지 편하진 않았을 것이다.[11] "자식을 두려면 손중모(손권) 같은 아들을 두어야지, 유표의 아들들은 개돼지만도 못하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01-16 09:02:20에 나무위키 유기(삼국지)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1 17:40:59에 나무위키 유기(삼국지)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