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남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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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남호의 수상 경력 /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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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해태 타이거즈 우승 엠블럼 V1.svg파일:해태 타이거즈 우승 엠블럼 V6.svg파일:해태 타이거즈 우승 엠블럼 V7.svg파일:해태 타이거즈 우승 엠블럼 V8.svg파일:해태 타이거즈 우승 엠블럼 V9.svg파일:삼성 라이온즈 우승 엠블럼 V2.sv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코치

1983
1991
1993
1996
1997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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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남호
柳男鎬 | Nam-ho Yoo

출생
1951년 9월 3일 (72세)
충청남도 당진군[1]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학력
혜화초 - 이대부중 - 선린상고 - 연세대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소속팀
롯데 자이언트
지도자
롯데 자이언트 투수코치[2]
해태 타이거즈 1군 투수코치 (1982~1984)
청보 핀토스-태평양 돌핀스 1군 투수코치 (1986~1988)
해태 타이거즈 1군 수석·투수코치 (1990~2000)
삼성 라이온즈 1군 수석·투수코치 (2001~2003)[3]
KIA 타이거즈 2군 감독 (2004)[4]
KIA 타이거즈 1군 수석코치 (2004)[5]
KIA 타이거즈 감독대행 (2004)[6]
KIA 타이거즈 감독 (2005)

1. 개요
2. 선수 경력
3. 지도자 경력
4. 평가
5. 여담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전 야구선수, KIA 타이거즈 감독.


2. 선수 경력[편집]


선린상고의 에이스로 팀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투수였다. 연세대학교를 거쳐 실업야구 롯데 자이언트에서 선수로 활약하다가 코치를 역임했다. 1977년 니카라과 대륙간컵 야구 대회에서 주장으로 사상 첫 한국 야구의 세계 대회 우승에 한 몫했다. 이 때, 감독인 김응용과 처음으로 인연을 맺었다.


3. 지도자 경력[편집]


역대 감독 전적
연도
소속팀
경기수



정규리그
포스트시즌
1998
해태 타이거즈
1
0
1
0


1999
1
0
1
0


2000
5
1
4
0


2004[7]
KIA 타이거즈
45
26
18
1
4위
4위[8]
2005
84
34
49
1
8위[9]

통산
136
61
73
2



현역 막바지부터 실업팀 롯데 자이언트에서 플레잉코치를 맡았고, 그 뒤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하자 해태 타이거즈의 투수코치로 부임한다. 그러나 감독인 김동엽과 충돌을 빚게 된다.[10] 그 뒤 해태의 감독으로 부임한 김응용과 인연을 맺고 그의 휘하에서 해태의 전성기를 함께했다. 1983년 우승을 했지만, 1985년부터 청보 핀토스의 투수코치로 자리를 옮겨 태평양 돌핀스로 구단명이 바뀐 1988년까지 투수코치를 역임했다. 그러다가 김성근 감독 부임 후 해임되었고,[11] 이후 김인식 수석코치의 쌍방울 레이더스 감독 영전으로 인해 공석이 된 해태 타이거즈의 수석코치로 선임되며 1990년부터 해태 유니폼을 다시 입었다.

여담이지만 해태 수석코치 시절에는 투수 교체 임무를 일임하며 사실상 1군 투수코치를 겸했는데, 덕아웃에서 마운드까지 걸어가는 속도가 유독 느렸다. 지금 같으면 스피드업 규정 때문에 욕을 먹을 일이지만 그때는 그의 느린 걸음도 나름의 전략으로 해석되던 시절이었다. 실제로 그는 마운드를 향해 느릿느릿 걸어가면서 "저 놈한테 무슨 말을 해줘야 하나..." 내지는 "이 놈을 바꿔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생각을 했다고 전해진다.

한편 해태 수석코치 시절 선수단 통제의 일선에 있던 인물이었다. 1996년 초 하와이 스프링캠프에서 당시 팀 최고참이었던 이순철을 때리면서 시작된 해태 타이거즈 하와이 항명사건의 당사자기도 하다.[12] 특히 새로 부임한 김일권 주루코치를 못마땅해했는데 김응용이 없는 자리에서 김일권을 갈군다거나, 김응용과 김일권을 교묘히 이간질시켜 김응용이 김일권을 2군 코치으로 내려보내기도 하였다.[13]

해태 수석코치 당시 흑역사로 1999년 5월 29일 삼성전에서 장진범 심판[14]폭행하여 20경기 출장금지, 제재금 300만원을 부과받았다.[15]

2000년 시즌 종료 후 삼성 라이온즈 감독으로 부임한 김응용을 따라 삼성의 수석코치로 부임했다. 삼성에서도 수석코치와 투수코치를 겸직하며 2002년 한국시리즈 우승에도 기여했지만 2003년 시즌 중 김응용 감독과 팀 운영 측면에서 갈등을 빚었고,[16] 결국 시즌 중인 2003년 6월 17일 2군으로 내려갔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코치직에서 사퇴하며 삼성을 떠났다.

2003년 시즌 종료 후 KIA 타이거즈에 복귀해 2군 감독을 맡았으나 2004년 6월 21일 서정환과 보직을 교환하여 1군 수석코치로 이동했다. 2004년 7월 26일부로 김성한 감독이 경질되자 잔여 시즌 동안 감독대행을 맡았다. 나름 감독대행 시절에는 준수한 성적을 거두며 SK 와이번스를 제치고 4위에 오르며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다만 2004년 준플레이오프에서는 투수진의 집단 방화로 인해 김경문두산 베어스에게 밀리며 2연패로 광탈했다는 옥의 티를 남겼지만 그래도 감독대행으로 팀을 잘 수습했다는 공에 힘입어 시즌 후 2년 총 4억 5000만원에 계약을 맺고 KIA 타이거즈의 정식 감독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정식 감독에 오르자 그의 역량은 수준 미달이었던 것이 드러났다. 참모에서 벗어나 감독 역할을 수행한 첫 시즌인 2005년, 시즌 초반부터 최하위로 곤두박질쳤고, 결국 KIA는 전신인 해태를 포함해서 구단 사상 처음으로 최하위를 기록하는 수모를 맛보게 되자 팬들에게 돌남호라 불리며 당시 단장이던 정재공과 함께 엄청나게 까였다. 하물며 IMF로 인해 모기업이 부도나 선수들을 이리저리 팔며 버텼던 해태 말기 시절에도 해보지 않았던 최하위였다 보니 더욱 까일 만했고, 이는 엘롯기의 전설을 알리는 꼴찌였다.[17]

결국 전임자인 김성한과 마찬가지로 시즌 도중이던 2005년 7월 25일 전격 경질되면서 정식 감독으로 한 시즌도 못 버티고 불명예스럽게 내려오고 말았다. 경질 후 감독대행은 서정환 코치가 맡았는데 이변 없이 최하위로 시즌이 끝났다. 감독대행 시절까지 포함하면 감독 생활은 사실상 1년. 하지만 후임 서정환이 아예 투수진을 박살내버리는 등 막장 행보만 보였던 걸 생각하면 당시 신인 이용규윤석민을 꾸준히 출장시키면서 1군에 자리잡게끔 도와줬다는 점에서는 아주 민폐만 끼친 건 아닌 셈이다.

감독직에서 경질당한 후, KIA 타이거즈는 과거 LG 트윈스이광환 전 감독을 2군 감독으로 보내서 계약 기간을 채워주려고 한 선례를 본따 유남호에게도 잔여 계약기간 동안 2군 감독을 맡아달라고 제안했지만 본인이 스스로 고사하면서 팀을 떠났다.

그 뒤, KBO 국가대표 전력분석관과 경기감독관을 지내고 있다.

4. 평가[편집]



5. 여담[편집]


  • 해태 타이거즈 수석코치 시절 해태 구단의 재정이 시원찮다 보니 수석코치급 짬인데도 불구하고 연봉은 6,600만원 정도로 적었다. 하지만 삼성 라이온즈 코치로 옮긴 뒤에는 연봉 1억 이상을 수령했다고 한다.

  • 코치 생활을 상당히 오래 했고, 나름 해태-KIA 타이거즈 역사의 산 증인 중 하나인데도 감독 경력이 짧아서 그런지 존재감이 없다. 실제로 타이거즈 역대 감독들 중에선 초대 감독인 김동엽 감독과 함께 인지도가 가장 낮으며 라이트 팬들 사이에서는 아예 유남호가 감독을 했는지 모르는 경우도 가끔 있다. 당시 프로야구가 어지간히 인기가 없었던 데다 감독 시절 이미지가 그리 좋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반년만에 경질당한 여파도 한 몫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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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장은 서울특별시에서 했다.[2] 플레잉 코치[3] ~6월 16일[4] ~6월 20일[5] 6월 21일~7월 26일[6] 7월 27일~[7] 시즌 도중 경질된 김성한 감독대행[8] 준플레이오프 敗[9] 시즌 중 경질[10] 이는 조창수·유남호 코치 잠적사건을 참조.[11] 이때 김성근이 데려온 코치들은 신용균, 박상열, 이종도 이 셋이다.[12] 전설의 타이거즈에 출연한 김종모, 김일권, 최해식, 송유석, 정회열 등이 사건 당시 전말을 상세히 밝혔다. 공통적으로 알 수 있는 건 유남호 코치가 잘못했다는 것이다.[13] 실제로 김일권은 선수 시절부터 매우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유명했는데, 반대로 수직적이고 위계적인 질서를 주도한 유남호와는 성향이 매우 상극이었다.[14] 진흥고와 영남대를 졸업하고 양승호, 조종규, 송일섭과 같은 해에 해태에 입단했으나 프로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은퇴 후 KBO 심판으로 활동했다.[15] 김응용 감독은 12경기 출장금지 및 제재금 2백만원, 장진범은 10경기 출장금지 및 제재금 1백만원의 징계를 받았다. 장진범이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사건의 전말을 밝혔는데 유독 장진범이 속한 심판조에게 불이익을 당한다고 생각한 김응룡 감독이 계속해서 '심판 똑바로 봐!' 등 장진범 심판을 도발했다고 한다. 클리닝 타임 때 덕아웃 뒤에서 김응룡 감독이 장진범 심판의 허리를 잡아 들어올리자 '이거 놓으시죠?'라고 말하며 팔꿈치로 툭툭 치려고 하자 난데없이 유남호가 장진범의 얼굴을 강타했고 '나 오늘 게임 구심안해!'하면서 갈등이 커졌다. KBO 사무국에 이 사태에 대해 보고서가 올라갔고 결국 유남호를 포함한 당사자들은 모두 징계를 받았다.[16] 약 10년 뒤 한화 이글스에서 이 상황이 데쟈뷰되었다. 아이러니한건 이번 당사자는 삼성에서 나온 유남호 코치를 받아준 김성한 전 감독.[17] 2001년부터 2004년까지 꼴찌는 롯데 자이언츠. 롯데는 2001년부터 2007년까지 비밀번호를 찍던 암흑기였고 이 암흑기를 끝낸 건 제리 로이스터였다. 이듬해인 2006년에는 LG 트윈스가 창단 첫 최하위를 기록하며 엘롯기의 서막을 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