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 콘드라추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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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바실로비치 콘드라추크
Юрий Васильевич Кондратюк[1]
Yuri Vasilyevich Kondratyuk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D0%9A%D0%BE%D0%BD%D0%B4%D1%80%D0%B0%D1%82%D1%8E%D0%BA%2C_%D0%AE%D1%80%D0%B8%D0%B9.jpg

본명
한국어: 알렉산드르 이그나티예비치 샤르게이
러시아어: Алекса́ндр Игна́тьевич Шарге́й[2]
로마자: Aleksandr Ignatyevich Shargei
출생
1897년 6월 21일
러시아 제국 폴타바주 폴타바
(現 우크라이나 폴타바주 폴타바)
사망
1942년 2월 25일 (향년 44세)
소련 러시아 SFSR 칼루가주
직업
우주공학자, 물리학자, 수학자
군사 경력
복무
러시아 제국군 (1916 ~ 1918년)
소련 육군 (1941 ~ 1942년)
주요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You ever hear of a Russian rocket guy named Yuri Kondratyuk? - 톰 돌런(Tom Dolan)[3]

, 지구에서 달까지 5화 中.


1. 개요
2. 생애
3. 사후



1. 개요[편집]


우크라이나 출생의 우주공학자이자, 수학자로, 독학으로 익힌 우주공학으로 에 우주선을 착륙 시키고 귀환시키기 위한 달궤도 랑데부를 최초로 고안한 인물이다. 사실상 아폴로 계획의 숨은 공로자이기도 하다. 유리 콘드라튜크는 본명이 아니며, 러시아 혁명 이후로 도피 생활을 위해 타인의 이름을 도용한 것이다. 본명은 올렉산드르 그나토비치 샤르게이다[4].


2. 생애[편집]


러시아 혁명 이후로 소련 공산당의 탄압과 감시를 피해 달아나야 했으므로, 그의 생애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확실한 것은 1897년 6월 21일에 러시아 제국의 폴타바[5]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의 아버지인 이그나트 베네딕토비치 샤르게이는 키이우 공과대학교수학과 교수였고, 어머니 류드밀라 르보브나 실리펜바흐는 키예프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치던 교사였다. 수학자였던 아버지 덕택에 콘드라추크는 어린 시절부터 수학과 물리학에 비상한 관심을 보였고, 이는 그가 우주공학의 발전의 숨은 공로자가 되는 밑거름이 된다[6].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 상트페테르부르크 기술대학에 입학했으나, 1914년에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러시아가 이에 연합국 소속으로 참전하면서 그는 러시아 제국 육군에 입대했다. 여기서 장교로 임관하는 등으로 승승장구하는 듯 했으나, 러시아가 독일 제국에게 지속적으로 패배하면서 불리해진 전황과 극심한 빈부격차로 인해 반전 여론이 고조됨에 따라, 1917년에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면서 그의 인생은 꼬이기 시작했다. 3월에 있었던 첫번째 혁명 때는 별 일이 없었지만, 11월에 재차 혁명이 일어나서 러시아에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자, 제정 시대의 장교였다는 사실이 발목을 잡아버린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어머니가 블라디미르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 세력에 반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콘드라추크 일가는 반정부 인사로 찍혀서 이리저리 도망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흔히 알려진 본명인 '유리 콘드라추크'도 이때 처음 사용한 이름이다[7].

한때는 소련을 탈출해서 폴란드로 가려는 시도도 했으나[8], 실패하면서 강제노역에 처해지는 신세가 되었다. 이 시기에 레닌이 급사하고 이오시프 스탈린이 집권하였는데, 콘드라추크는 이때 NKVD의 명령으로 곡물 창고에 설치할 곡물 엘리베이터를 설계하는 임무를 맡았고, 여기서 못을 전혀 쓰지않고 설치하는 설계도를 완성하여 당국에 제출하였다. 이후에는 풍력 발전기의 설치를 감독하는 일도 했다. 그리고 1929년에는 달 탐사를 위한 우주선의 발사와 그 랑데부 방법을 연구한 논문을 집필하여 책으로 출판했는데, 이 책을 흥미있게 읽은 세르게이 코롤료프[9]가 당국에 그를 추천하려고 했지만, 과거 반정부인사로 찍혔던 자신의 정체가 소련 당국에게 탄로날 것이 두려워서 이를 거절하기도 했다.

그 이후에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소련 육군에 입대해서 나치 독일의 침략에 맞서서 싸웠다고 전해지는데, 1942년에 모스크바 주칼루가 인근에서 전사했으리라는 추정만 있을 뿐, 관련 기록이 전무해서 그의 최후가 어땠는지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3. 사후[편집]


비록 모국인 우크라이나소련에서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스러져간 비운의 과학자였지만, 영어로 번역된 콘드라추크의 책이 미국에 소개되면서 미국의 우주개발에 일대 혁신을 가져왔다. 아폴로 11호 계획 당시에 채택된 탐사 계획은 콘드라추크가 제안한 이론을 약간만 손본 것이며, 이렇게 수립된 계획이 멋들어지게 성공하면서 미국은 물론 세계적으로도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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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크라이나어 표기는 Юрій Васильович Кондратюк[2] 우크라이나어 표기는 Олександр Гнатович Шаргей (올렉산드르 그나토비치 샤르게이)[3] 아폴로 달 궤도상 도킹의 아이디어를 처음 떠올린 엔지니어. 처음엔 너무 허무맹랑하다고 거절당했으나 NASA의 실무자인 존 허볼트(John Houbolt)가 이 아이디어를 접하고 "그럴싸한데?"라는 생각에 밀어붙어 NASA가 베르너 폰 브라운의 지구 궤도상 랑데부 복안을 누르고 채택받았다.[4] 그의 모국어인 우크라이나어로 된 이름이며, 러시아어로는 알렉산드르 이그나티예비치 샤르게이다.[5] 오늘날 우크라이나의 폴타바.[6] 미국천문학자닐 디그래스 타이슨이 호스트를 맡은 다큐멘터리 코스모스에서 그의 일생을 소개하고 있는데, 여기서 콘드라추크의 가족들이 낡은 통나무집에서 빈한하게 지내는 것으로 묘사되는 고증오류가 나온다. 콘드라추크의 아버지는 전술했듯이 대학의 교수였고, 어머니는 독일계 러시아인 귀족의 후손이었다. 객관적으로 봐도 최소 중산층 이상의 삶을 살았던 셈인데, 코스모스는 아무래도 과학 다큐멘터리지 역사 다큐멘터리가 아니라서, 이 정도의 고증오류는 제작진들이 별 신경도 안 쓴 모양이다.[7] 상술한대로 타인의 이름을 도용한 것이지만, 이게 원래 누구의 것이었는지는 2021년 현재까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과학 다큐멘터리인 코스모스에서는 죽은 사람의 이름을 도용한 것이라고 추정한 바는 있다.[8]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전까지만해도 폴란드는 공산국가가 아니었다.[9] 소련의 우주개발의 일등공신이었던 그 사람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