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비(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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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1. 개요[편집]
劉肥[1]
현대 중국어: 류페이(liúfèi), 한대 중국어: 르우부이(lɨu.bʉi)
(? ~ 기원전 189년)
전한의 황족으로 고제 유방의 서장자다. 유방이 여후와 만나기 전에 교제하던 조씨(曹氏)의 아들이며, 오왕 유비와는 사촌지간이다.
2. 생애[편집]
초한전쟁이 종결되고 한신이 초나라로 전봉되자 제왕에 봉해졌고 상국으로 조참과 우승상으로 부관이 봉해져 모시게 하였다. 영포가 난을 일으킬 때, 참전하기도 했다. 16살에 아버지인 유방과 함께 동행한 혜제와 달리 직접 군을 이끈 것으로 보아 동생들과 나이 차이가 제법 나는 것으로 추측된다.
유비가 입궁하여 이복 아우인 혜제를 뵐 때 혜제가 형이라는 이유로 상석을 양보해주는 파격적인 대우를 해 주었다. 이걸 보고 노한 여후는 유비를 독살하려고 유비의 앞에 짐주를 따른 뒤 유비에게 원샷하면서 자신의 만수무강을 빌라고 했는데, 이를 눈치챈 혜제가[2]
그냥 혜제가 정말 모르고 짐주를 들었다는 얘기도 있다.
여후보다 먼저 죽어서 '도혜왕'(悼惠王)이란 시호를 받았고, 장남 애왕(哀王) 유양이 제나라를 계승했다. 여후가 죽자 유양은 동생인 유장, 유흥거 등과 함께 난을 일으켜 여씨 일족을 제거하고, 고제의 넷째 아들 유항(劉恆)을 새 황제로 세웠다. 사실 유양은 고제의 장남의 장남이었므로 황제 후보에 가장 유력해 먼저 이름을 올리긴 했는데, 그의 외가인 사씨(駟氏)의 위세가 커 제2의 여씨 정권이 탄생할 것이라는 이유로 기각되고, 다른 인물이 황제가 되었다.[3]
유양과 유장은 현실을 조용히 받아들였지만, 내심 원통했던 건지 몇 년 지나지 않아 사망한다. 이 과정에는 유양의 업보도 좀 있는데, 거병하는 과정에서 이웃 제후인 낭야왕(琅邪王) 유택(劉澤)을 속여서 억류하고, 낭야의 군대를 탈취했다. 낭야는 원래 제나라의 영토였는데, 여후가 여씨들을 왕으로 세우는 데 찬동한 유택에게 준 것이었다. 유택은 유양에게 '나도 유씨인데 당신을 방해하겠는가? 나를 장안으로 보내주면 당신을 황제로 추대하겠다'고 해서 풀려났으나 장안에 가서는 유양이 황제가 되지 못하도록 뒷공작을 펼쳤다. 나중에 한 문제는 낭야를 제나라에 도로 넘겨주고, 유택은 연왕(燕王)으로 봉했다.
오래 산 것 같지는 않으나 아들을 무려 13명이나 두었다. 그러나 대부분 후손을 오래 전하지는 못했다. 장남인 애왕 유양의 혈통은 아들 제 문왕(齊文王) 유칙(劉則)이 후사 없이 죽어 끝났고, 3남인 제북왕(濟北王) 유흥거(劉興居)가 기원전 178년의 모반으로 망했으며, 무려 일곱 아들의 집안이 오초칠국의 난에 연루돼 아작났다. 그리고 유칙 대신 제왕이 된 8남 효왕(孝王) 유장려(劉將閭)는 난에 가담하려다가 후회하고 음독 자살했다. 이리하여 아들 13명 중 9명의 후손이 일찍 폐문됐음에도 불구하고, 10남인 치천 의왕(菑川懿王) 유지(劉志)와 2남인 성양경왕 유장의 아들인 성양 공왕(城陽共王) 유희(劉喜)는 아들을 14명이나 두었으며, 전한이 끝날 때까지 왕위를 후손에게 전했다. 제 효왕 유장려에게도 아들이 12명이나 있었는데, 장남은 일찍 절손되었으나 10남인 모평 공후(牟平共侯) 유설(劉渫)의 후손으로 유총(劉寵)과 《삼국지》에도 나오는 조카 유대(劉岱)·유요(劉繇) 형제가 있었다.
3.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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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대 중국어: 류페이(liúfèi), 한대 중국어: 르우부이(lɨu.bʉi)[2] 그냥 혜제가 정말 모르고 짐주를 들었다는 얘기도 있다.[3] 유양과 유장은 현실을 조용히 받아들였지만, 내심 원통했던 건지 몇 년 지나지 않아 사망한다. 이 과정에는 유양의 업보도 좀 있는데, 거병하는 과정에서 이웃 제후인 낭야왕(琅邪王) 유택(劉澤)을 속여서 억류하고, 낭야의 군대를 탈취했다. 낭야는 원래 제나라의 영토였는데, 여후가 여씨들을 왕으로 세우는 데 찬동한 유택에게 준 것이었다. 유택은 유양에게 '나도 유씨인데 당신을 방해하겠는가? 나를 장안으로 보내주면 당신을 황제로 추대하겠다'고 해서 풀려났으나 장안에 가서는 유양이 황제가 되지 못하도록 뒷공작을 펼쳤다. 나중에 한 문제는 낭야를 제나라에 도로 넘겨주고, 유택은 연왕(燕王)으로 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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