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상철/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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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선수 경력
1.1. 클럽 경력
1.2. 국가대표 경력 (1994~2005)
2. 지도자 경력
2.2. 대전 시티즌 감독 (2011~2012)
2.2.1. 2011년
2.2.2. 2012년
2.3. 울산대학교 감독 (2014~2017)
2.4. 전남 드래곤즈 감독 (2018)
3. 행정가 경력
4. 췌장암 투병 생활
5. 사망
5.1. 각계의 추모
5.1.1. 축구계
5.1.2. 그 외



1. 선수 경력[편집]



1.1. 클럽 경력[편집]



1.1.1. 현대 호랑이/울산 현대 호랑이 (1994~1998)[편집]


응암초등학교 시절 축구부 지도교사의 눈에 띄어 축구를 시작했다. 경신중학교, 경신고등학교를 거쳐 건국대학교를 졸업하고 1994년 현대 호랑이에 입단해 입단 첫해 수비수 부문 K리그 베스트11에 선정되었다. 입단 후 2년차인 1996년에 울산의 첫 리그 우승에 공헌했으며, 특히 수원 삼성 블루윙즈와의 챔피언 결정전에서 멋진 중거리 슛으로 결승골을 넣기도 했다.

당시 현대의 감독은 다름 아닌 차범근. 유상철을 눈여겨 보고 있던 차범근은 잘 다듬어서 자신이 선수 시절 뛰었던 분데스리가로 진출시킬 계획을 갖고 있었으나, 하필 입단 첫 해였던 1994년 시즌 후 차범근이 경질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그의 포지션은 스트라이커, 중앙 미드필더, 공격형 미드필더, 수비형 미드필더, 양쪽 윙백, 센터백이었다. 한마디로 골키퍼 빼고는 안 뛰어 본 포지션이 없다. 골키퍼를 제외한 모든 포지션을 A매치 경기에서 소화한 경험이 있으며,[1] K리그 역사를 통틀어 공격수, 미드필더, 수비수 부문에서 모두 베스트 11에 선정된 2명 중 하나다. 심지어 공격수로는 득점왕까지 차지해봤다. 다른 한 명은 삼손 김주성.[2] 탁월한 하드웨어와 그를 바탕으로 한 강력한 킥력, 거기에 덧붙여 경기의 맥을 짚는 능력과 위치 선정 등이 모두 국내 최고 수준이었다. 이러한 능력을 바탕으로 다양한 포지션에서 언제나 자기 몫을 해내는, 대한민국 축구 역사상 최고의 멀티 플레이어가 바로 유상철이었다.

1998 시즌 울산에서 23경기 15골이라는 경이적인 득점력을 과시했으며, 득점왕을 수상하고 베스트 11에는 미드필더로 들어갔다.[3]

1.1.2. 요코하마 F. 마리노스 (1999~2000)[편집]


파일:유상철 요코하마 2000.jpg
1999년부터는 J리그 요코하마 F. 마리노스로 이적, 여기서도 역시 팀 형편에 따라서 포지션 안 가리고 뛰었다. 2000년에는 김현석과 함께 J리그 득점왕 레이스를 벌였을 정도다. 이 때 FC 바르셀로나에서 오퍼가 오기도 했다.

2시즌 동안 리그 통산 44경기 24골로 공격수도 아닌 미드필더로가 득점률을 0.5를 넘겨버리는 경악할만한 스텟을 찍었다. 특히나 2000 시즌에는 리그 22경기 17골로 득점 3위에 오르며 미친 활약을 보여줬으나 정작 공격수들이 다 합쳐 10골 밖에 못 넣어 버리면서 준우승에 머물렀다. 2시즌 동안 통산 59경기 29골을 기록하였다.


1.1.3. 가시와 레이솔 (2001~2002)[편집]


파일:유상철 레이솔 2001.jpg
2001년에는 가시와 레이솔로 이적해 황선홍, 홍명보와 함께 코리안 삼총사로 불리며 대활약했다.


1.1.4. 2002년 이후[편집]


파일:02 ulsan away.jpg

2002년 한일 월드컵 이후 울산 현대로 돌아왔다가[4] 2003년 6월 다시 요코하마로 이적하여 이듬해 리그 우승을 경험, 2005년에 다시 울산으로 돌아와 울산의 두 번째 리그 우승을 함께했다. 그러나 후기리그부터 왼쪽 무릎 부상으로 경기를 거의 뛰지 못하고 재활 치료에 매진했으나 부상 회복이 더뎌지면서 결국 2006년 3월 현역 은퇴를 선언하였다.# K리그 한정으로 울산 현대에서만 뛴 원클럽맨으로 남게 되었다.


1.2. 국가대표 경력 (1994~2005)[편집]


1 이운재 · 2 현영민 · 3 최성용 · 4 최진철 · 5 김남일 · 6 유상철

VC
· 7 김태영 · 8 최태욱
9 설기현 · 10 이영표 · 11 최용수 · 12 김병지 · 13 이을용 · 14 이천수 · 15 이민성 · 16 차두리
17 윤정환 · 18 황선홍 · 19 안정환 · 20 홍명보

C
· 21 박지성 · 22 송종국 · 23 최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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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거스 히딩크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박항서
스태프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핌 베어벡 ·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정해성 ·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김현태 · 파일:미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압신 고트비





파일:유상철 2000~2001.jpg
1994년 3월 5일 미국과의 친선 경기를 통해 A매치 데뷔전을 치렀다. 그 해 월드컵에는 나가지 못했지만, 이 때부터 국가대표팀을 이끌 차세대 주자로 각광받게 되면서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부터 국가대표로 출전했다. 8강전인 한일전 당시, 전반전에 미우라 카즈요시에게 실점하며 끌려가던 대한민국에 동점골을 안겼다. 이후 2골을 넣은 황선홍과 함께 난타전 끝에 한일전 승리를 합작, 대한민국은 지난해에 도하에서 일본에 당한 패배를 설욕했다.

타고난 파이터 기질과 뛰어난 제공권 장악 능력을 가졌으며, 내구성도 좋아 꾸준히 국가대표팀의 한 자리를 도맡았다. 당시 국대급 미드필더로 거론되던 윤정환 등은 부상이나 전술 상의 문제 탓에 대표팀의 핵심 주전으로 중용되기는 드물었다. 더군다나 그의 투지는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수준이었는데, 히딩크호 시절 2001년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 당시 컨페드 디펜딩챔피언 멕시코전에서[5] 전반전에 코뼈가 부러졌는데도 후반전을 계속 뛰었고, 그 상태로 선수들이 밀집되어 몸싸움이 격렬한 코너킥 상황에서 헤딩으로 결승골을 넣어 2-1 승리를 이끌었다. 히딩크의 자서전에 의하면 하프 타임 때 코가 부러진 유상철을 교체하려고 했는데 그가 계속 뛰겠다고 했다고 한다.[6] 하지만 부러진 코를 한 번 더 맞을 경우 코뼈 조각이 자칫 뇌로 갈 수 있기 때문에 매우 위험했고, 그래서 그의 요청을 묵살했다. 그런데도 유상철이 박항서 코치와 함께 찾아와 계속 괜찮다는 의사를 적극적으로 표현했고, 의료진 역시 코 아래쪽 뼈가 부러졌으니 괜찮을 것 같다는 소견을 내서 계속 뛰게 했다는 것이다. 이후 경기가 끝나고 코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그 외에도 갑작스런 부상으로 국대 라인업에 문제가 생기면 어김없이 최우선으로 땜빵이 가능한 고마운 자원이었다. 98월드컵 32강 본선 조별리그 3경기 모두 풀타임 출전했으며 네덜란드전 5-0 대패로 차범근 감독이 대회 도중 경질당하고 김평석 감독 대행이 지휘하던 마지막 경기인 벨기에전에서 팀의 주장이지만 결장했던 최영일 대신 주장 완장을 차고 왼쪽 윙백으로 선발 출전, 악으로 깡으로 뛰다가 기어이 하석주의 크로스를 받아 1-1 동점을 만드는 골을 넣기도 했다. 그리고 이 골로 벨기에는 한국에게 무승부 탈락당하여 98월드컵 최종 19위로 16강 진출에 실패했다.

K리그 시절 이장관, 김대수 등과 폭력 사태, 그리고 대표팀에서 득점력이 있는 선수에게 으레 따라붙는 별명 홈런왕[7] 등 그다지 이미지가 좋지 않았으나, 자신의 월드컵 첫 골이자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에서 승점 1점을 가져오는 벨기에전 후반전 동점골로 한국의 구겨진 체면을 회복시켰고,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을 계기로 일약 재조명받게 되었다.

거스 히딩크 부임 전 대한민국 축구인들과 팬은 큰 착각을 하고 있었는데, "대한민국 축구는 체력과 정신력은 좋지만 기술이 별로"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때문에 브라질 유학이나 게임 메이커[8] 같은 단어에 목을 맸다. 반면 히딩크는 부임 후 "한국 선수들은 기술이 수준급인데[9], 체력과 정신력이 완전 개판이다"는 정반대의 평가를 했다.[10]

사실 유상철은 현재 국가대표 선수들에 비하자면 낯이 뜨거울 정도로 볼 터치[11] 및 드리블 능력이 떨어졌다. 그러나 그런 단점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한 장점들 - 앞서 언급했던 탁월한 하드웨어[12]와 시야, 위치 선정 능력으로 중원을 장악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국가대표 선수들 중에서는 김남일, 박지성, 송종국 등과 함께 히딩크 축구에 가장 최적화된 선수 중 하나였다. 결국 "유럽의 힘에 대항하기 위해 기술을 연마하자"는 고정관념을 깨고 "대등한 힘으로 맞서싸운다"는 히딩크 축구의 핵심 멤버로 맹활약했다.


2002 한일 월드컵에서 중앙 미드필더로 출전하여 첫경기인 폴란드전에서 황선홍의 전반 선제골에 이어 후반 중거리 슈팅으로 승리에 쐐기를 박는 추가골을 성공시켜 대한민국의 월드컵 역사상 첫승리에 큰 기여를 하는 등의 활약으로 대회 BEST 11에 선발되었다. [13]당시 영국의 축구 평론가 앤드류 워쇼는 유럽 축구 연맹 홈페이지에 기고한 글에서 "유상철은 이번 월드컵에 참여한 수비형 미드필더 중 최고다. 그의 침착성과 탁월한 볼 배급 능력은 경이로운 수준"이라 평가했다. 그것도 모자라 "세계 축구팬들은 그의 등 번호(6)를 영원히 기억할 것"이라는 최고의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월드컵을 마감한 후 홍명보, 황선홍이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하고 움베르투 코엘류가 부임하자, 국가대표팀 주장이 되었다. K리그에서 공격수로 좋은 활약을 보여줬는데 당시 득점난에 시달리던 코엘류호안정환과 같이 투톱으로 기용되기도 했다.

2004 아테네 올림픽 대표팀 와일드카드로 선발되어 8강 6위에 올랐고, 2005년 독일 월드컵 최종예선까지 출장했다. 내심 독일 월드컵 출전도 기대했으나, 2005년 후반기부터 이어진 왼쪽 무릎 부상이 회복되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2006년에 은퇴하게 된다.

2. 지도자 경력[편집]



2.1. 춘천기계공업고등학교 감독 (2009~2011)[편집]


은퇴한 이후 유상철 축구교실을 운영하면서 KBS 날아라 슛돌이 감독으로 활동하는 등 지도자 생활을 이어가던 유상철은 2009년 새로 창단한 춘천기계공업고등학교 축구부의 초대 감독으로 부임하였다.


2.2. 대전 시티즌 감독 (2011~2012)[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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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 2011년[편집]


2011년 7월 17일, 지난 7월 3일 사임한 왕선재의 후임으로 사령탑으로 선임되면서 프로팀 감독으로 데뷔하게 되었다. 승부조작 파문으로 선수단이 대거 제명당하고 유상철 부임 이전 신진원 대행 체제에서 치러진 2경기서 각 7골, 총 14골을 헌납하는 등 만신창이가 된 팀을 어떻게 추스릴지가 관건이었다.

7월 23일 강원 FC와의 리그 경기를 통해 프로팀 감독 데뷔전을 치렀고, 이날 경기서 유상철은 빠른 템포에 속도감 있는 축구를 펼쳤으며, 또한 기존과는 다른 전술적 변화를 주었다. 일단 평소 고립되는 경우가 많았던 원톱 박성호를 보안하고자 활동량이 많은 평소 볼란치(수비형 미드필더) 주로 기용되던 김성준을 공격형 미드필더로 끌어 올렸다. 또한 후반 투입하는 조커도 기존의 백자건이 아닌 고대우를 투입하며 전술적 변화를 꾀했고, 이런 변화가 통한 듯 유상철은 자신의 데뷔전에서 1:0 승리를 거두며 대전의 15경기만의 리그 승리를 이끌었다. 이후 유상철은 과감한 전술 변화 등으로 승부조작으로 어수선했던 선수단 분위기를 빠르게 추스렸고, 대전 시티즌은 가까스로 리그 꼴찌를 면했다.


2.2.2. 2012년[편집]


하지만 2012 시즌에도 또다른 위기가 찾아왔다. 2012 시즌을 앞두고 대전 구단이 레전드 최은성과의 불화로 최은성을 방출하며 대전 구단이 발칵 뒤집혔는데, 최은성과 대전의 계약 결렬과 관련해, 감독으로써 최은성을 붙잡아달라 어필하기는커녕 최은성이 떠난 뒤 연봉 문제였다고 언급하는 모습은 팬들의 의심을 사기도 하였다.[14]

한편 이번 사태로 대전 선수단 분위기는 또다시 어수선해지며 유상철은 애를 먹었으며, 대전은 리그 개막 후 리그 6연패의 수령에 빠졌고, 경질 위기에까지 몰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유상철은 케빈과 김형범 등을 앞세워 4월 11일 당시 선두였던 수원 삼성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후 반등했으며, 이후 유상철은 장신 스트라이커 케빈에게 포스트 플레이를 맡기고 정경호 등 발 빠른 측면 공격수의 문전 침투를 주 루트로 모든 필드플레이어들이 강한 체력을 바탕으로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상대를 압박하고 패스를 주고받는 축구인 벌떼 축구를 선보이며 16팀중 13위를 기록, 간신히 2부리그 강등을 면했다.

2012년 11월 30일, 대전 시티즌이 언론을 통해 다음 시즌 재계약 불가를 천명하면서 사실상 쫓겨나듯이 구단을 떠나게 되었다. 문제는 지금껏 대전을 거쳐간 많은 이들이 그랬지만 특히 유상철은 온갖 더러운 꼴 다보고 나가야 했다는 거다.

앞서 적은 바와 같이 대전은 언플을 통해 유상철 재계약 건을 흘렸는데, 덕분에 유상철 본인은 재계약 불발 사실을 사전에 정식으로 통보받은 적이 없고 인터넷 기사를 보고 처음 알았다고 한다. 더구나 그날은 12월 1일은 시즌 마지막 경기가 있는 날이었다.

즉 프런트는 시즌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후임 감독 선임 언플부터 해댄 것으로서 한술 더 떠서 끝까지 전화연락 한통 받지 못했고 프런트 직원이 통지서 한장 달랑 들고 온 것으로 끝냈다고 하며, 이번 일로 감독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 않고 개념없이 내쫓은 대전 시티즌 프런트는 큰 비난을 받아야만 했다.

유상철은 이 때 분노한 나머지 최종전을 불참할까 생각도 했는데 그나마 서포터즈의 위로 전화를 받고서 마음을 돌렸다고 하며, 이 때문에 날 경기서 선수들은 골을 성공시킨 후 유상철을 향해 절을 하기도 하였다.#

대전 구단은 유상철을 내쫓으면서까지 후임 감독으로 김인완을 내정했으며, 이는 대전 시티즌 구단 역사상 최악의 실수 중 하나이자 2차 암흑기의 시발점이 되었다. 그리고 대전은 2014년을 제외하면 기업구단으로 전환되기 전까지 매 시즌마다 암흑기를 만들었다.


2.3. 울산대학교 감독 (2014~2017)[편집]


다행히 2013년 12월 31일, 울산 현대를 운영하는 현대중공업그룹이 재단인 울산대학교 축구부 감독을 맡는다는 보도가 나왔다.

울산대학교에 부임하자마자 2014년, 2015년 1,2학년 대학축구대회에서 2년 연속 준우승을 하는 쾌거를 이룬다. 하지만 2015년 전국체육대회 남자 축구 대학부에서 준우승, 2년 뒤 제48회 추계대학축구연맹전에서 단국대학교를 상대로 또 다시 준우승을 거뒀다. 유상철이 울산대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총 4번준우승을 맛보게 됐다. 유상철은 결국 대한민국 축구계의 콩라인에 가입했다.[15] 특히 추계대학축구연맹전 결승전 직후 인터뷰에서 '굿이라도 해야 하나'라고 말할 정도였다.

전남의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김현석에게 감독직을 넘겼다.


2.4. 전남 드래곤즈 감독 (2018)[편집]


파일:유상철 전남.jpg

2018 시즌을 앞두고 14경기 연속 무승으로 겨우 클래식에 잔류한 전남이 노상래 감독을 경질하고 유상철을 새로운 감독으로 선임하면서 대략 6년만에 프로팀 감독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한편 대전 시티즌 7대 감독 김인완이 전력강화실장으로 전남에 소속이 되어 있어 아이러니하게도 한 팀의 전임 감독과 후임 감독이 같은 한 팀에 소속되어 있는 상황이 되었다.[16]

수원 삼성 블루윙즈와의 리그 개막전에서 2:1 승리를 거두며 화려한 시작을 알렸다.

3월 11일 경기에서 포항 스틸러스에 3:2로 패하기는 했지만, 작년과는 확연히 다른 경기력을 보였다.

하지만 그 후로는 8경기에서 겨우 5점, 특히 처음 수원과의 개막전을 승리한 이후 같은 강등권인 인천, 대구에 무승부를 거두며 상황이 매우 심각하며, 전술도 단조롭고 이미 파훼되어있음에도 새로운 대책을 들고 나오지 않아 비난이 커졌다. 급기야 7월 말에는 최하위였던 인천한테까지 지며 강등권까지 떨어지자 8월 16일 결국 구단에 사임 의사를 밝혀 감독직에서 내려왔다.

사임 이후에는 동정적인 분위기가 꽤 생성되고 김인완에 대한 불신을 보내는 이들로 인해 여론이 좋았지만, 김인완이 대행으로 부임 후 6경기 동안 리그에서만 4승[17] 1무[18] 1패[19]라는 돌풍에 가까운 성적을 내고 있어 오히려 유상철은 안타깝게도 '이런 팀으로 어떤 싸움을 하고 있었느냐', '유상철 감독이 억제기였다.'는 식의 조롱받는 등 여론이 싸늘하게 식어버리고 만다.

그러나 선수 시절 얻은 부상으로 수술이 필요한 것도 모자라 목발을 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임에도 팀 분위기를 해치지 않기 위해 목발을 하지 않고 경기에 임하는 등, 열정 하나만큼은 매우 강렬했던 감독이기에 기대에 미치지 못한 성적 부진이 더욱 아쉽다는 축구팬들의 평가가 지배적이다. 결국 감독 사임 후 반전하는 듯했던 김인완 체제 하의 전남은 성적을 반등시키지 못하고 강등되는 수모를 당하고 말았다.


2.5.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 (2019)[편집]


파일:인천 유나이티드 FC 감독 유상철.jpg

2019년 5월 14일 인천 유나이티드 9대 감독으로 선임되어 구단과 취임 인터뷰를 했다. #

계약 기간은 1년 6개월, 2020 시즌까지 맺었다.

선임 직전 언론 인터뷰에서 "실패한 감독으로 사람들에게 기억되는게 두렵다"는 말로 뭔가 현장 복귀를 암시하는 듯한 얘기를 꺼내더니, 얼마 후 인천 계약이 떴다.

하지만 전남에서의 중도 경질과 이후 전남의 2부리그 강등 때문에 인천이나 여러 K리그 팬들 사이에서도 부정적인 여론이 강했고, 유상철 본인이 이번에 인천에서도 성과를 내서 명예회복을 하지 못한다면 프로팀 감독 커리어는 끝날 확률이 높기 때문에 뭔 짓을 해서든 강등은 막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일단 전임 감독인 욘 안데르센이 감독직에서 짤렸던 제일 큰 이유가 고집스러운 전술 및 선수단 운영과 이로 인한 부진의 장기화였는데, 유상철은 그 전까지 굉장히 다양한 변화를 시도한 감독이라 이런 면에서는 충분히 선임할 만한 스타일이기는 하다. 다만 유상철은 전남에서 포지션 파괴를 일으키는 등 오히려 과도한 실험이 문제가 되었고,[20] 전술 철학 등 몇몇 부분에서는 유상철도 변화보다는 자신의 이상을 추구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 편이라 우려가 남는 편이었다. 그래도 대전에서는 괜찮은 지도력을 보여줬고, 본인에게는 정말 절박한 기회인데다, 인천 이적 후 계속 부진한 허용준을 전남에서 지도해 본 적이 있어서 허용준을 살려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받고 있다.[21] 초반 몇 경기에서 내는 성적에 따라 유상철에 대한 불확실한 여론의 방향이 정해질 듯하다.

인천 사령탑 첫 경기인 DGB대구은행 파크 원정에서 1:2로 패해 쓰라린 신고식을 치렀고, 이어 홈에서 상주 상무에게 또 다시 1:2로 패하였다. 첫 경기에서는 그래도 팀이 무언가 하려는 모습을 보여줘서 유상철 호의론이 생겼지만, 두 번째 경기는 일부 선수의 치명적인 부진이 두드러진 경기. 물론 유상철이 부임한 지 얼마 안 된 만큼 전술이 큰 폭으로 바뀌기는 힘들어서 상황을 이해하는 팬도 많지만, 팀의 부진이 장기화되는 점이 문제다.

그러다가 바로 다음 경기인 제주 원정에서 2:1 승리를 거두며 유상철의 인천 첫 승이 이루어졌다. 이 경기는 유상철이 시도한 전략적 카드가 모두 먹혀들어갔으며, 유상철의 과감한 실험을 하는 모습이 빛을 발한 경기이기도 하다. 지언학, 이우혁, 김동민, 정훈성, 이준석 등 주전급으로는 보기 힘든 선수들을 한번에 선발에 넣으며 기존 주전 선수들을 대거 벤치로 보냈고, 투입된 선수들이 멋진 활약을 보여주면서 승점을 따냈다. 특히 지언학과 이우혁은 이 경기가 2019년 첫 리그 출전이었는데, 유상철의 기대에 부응했다. 선수들의 활동량이 살아나면서 '인천다운 모습'이 다시 보인 점도 긍정적이다.

위기에서 한 차례 벗어난 인천이었지만, 유상철호의 핵심인 이우혁이 부상으로 빠지고 중원 파트너 임은수까지 시즌아웃을 당하면서 중원이 무너지고 말았다. 이로 인해 6월 말부터 7월 중순까지는 최악의 부진을 면치 못했고, 중원의 공백을 채우려고 기용한 최범경박세직의 부진으로 인해 신인 김강국-이제호를 주전으로 올리는 선택까지 하게 되었다. 이 와중에 남준재-김호남 이적 파동으로 마음고생을 하기도 했다.

힘든 여름을 보내고 있었지만, 이적시장 막판에 폭풍 영입이 이뤄지면서 풀백 이지훈, 센터백 여성해, 윙어 김호남, 명준재, 서재민, 미드필더 장윤호, 라시드 마하지, 스트라이커 란레 케힌데까지 전 포지션에 걸쳐서 보강에 성공했다. 그리고 그 시점부터 전술을 바꾸고 중원 조합이 탄탄해지면서 성적도 한결 나아졌다. 잠시 개선되다가 수비진의 집중력이 붕괴되는 바람에 다시 부진하기도 했지만, 그 기간동안 같이 강등권 생존경쟁중인 제주는 더욱 더 헤매면서 최하위까지 추락하고, 경남도 선수들의 집단 부상과 20경기 무승행진을 기록했기에 상대적으로 인천은 이들을 지속적으로 쫓아갈 수 있었다. 거기에 부상에서 돌아온 지언학을 중심으로 다시 전술 변화를 주면서 무패 행진으로 접어들기도 했다. 결국 10월 19일 파이널 라운드 B 1차전에서 성남을 1:0으로 잡는 데 성공, 마침내 10위에 올라 간만에 강등권에서 탈출했다.

경기 후에 인천 선수들, 프런트 직원들이 모두 오열하는 모습이 포착되었고, 전력강화실장 이천수마저 눈물을 흘렸으며, 선수들은 인터뷰를 거절하거나 운 이유에 대해서 돌려 말하는 등 안 좋은 낌새가 감지되었다. 그리고 이게 강등권 이탈로 인한 것이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란 추측이 축구 커뮤니티들에서 돌았고, 유상철이 황달 증상을 앓고 있는 모습이 포착되면서, 유상철의 건강 이상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많아졌다. 모두 쉬쉬하며 걱정하는 분위기 속에서 경남도민일보 정성인 기자가 독단적으로 개인 블로그에 병에 걸렸다는 글을 올리고 한 술 더 떠서 태그에 췌장암을 달아 올려 공개적으로 알려졌다.[22] 경기 이후부터 다음날까지 '유상철'이 실시간 검색어 5위 이내로 계속 유지되었다.

10월 20일, 인천 구단은 공식 홈페이지에서 유상철이 건강이 악화되어서 입원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 공식 발표 전문 】
안녕하십니까? 인천 유나이티드 대표이사 전달수입니다.
먼저, 늘 인천 유나이티드를 아껴 주시고 사랑해 주시는 팬 여러분 및 미디어 관계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최근 불거진 유상철 감독 사안에 대해 사실관계를 말씀드리고자 이렇게 여러분께 인사를 올리게 되었습니다.
유상철 감독은 2019년 5월 14일 처음 인천의 지휘봉을 잡은 후 5개월간 '덕장'으로서 감독직을 훌륭히 수행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 19일 성남과의 원정 경기가 끝난 직후, 다양한 소셜미디어 채널과 언론을 통해 유상철 감독의 건강 악화와 이에 따른 감독직 수행 여부에 대한 소문이 퍼지고 있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유상철 감독의 건강 상태가 악화된 것은 사실입니다. 황달 증세를 보임에 따라 성남전이 끝난 후 병원에 입원했으며, 현재 정밀 검사를 앞둔 상태입니다.
저는 구단의 대표이사로서 유상철 감독이 이번 시즌을 건강하게 마무리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구단을 사랑하는 팬 여러분도 저와 함께 감독님의 쾌유를 간절히 기도해주시길 간곡하게 부탁드립니다.
구단은 이후 발생하는 모든 소식을 가감 없이 사랑하는 팬 여러분과 미디어 관계자 여러분께 공유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부디 미디어 관계자 여러분께서는 그릇된 소문과 추측성 보도 등으로 유상철 감독님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것을 자제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다시 한 번 인천 구단을 믿고 응원해 주시는 팬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선수단과 임직원 모두 남은 파이널 라운드 일정 간 최선을 다해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팬 여러분의 건강과 행운이 항상 함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이후 시술로 독소를 제거했으며 퇴원 후 10월 27일 경기에 벤치에 앉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수원전은 막판 동점골로 간신히 무승부를 기록하면서 10위를 유지했다.[23] 경기 후에는 "대표이사님, 구단 모두 성적은 중요하지 않으니 신경쓰지 말고 쉬라고 만류했지만, 내가 제일 중요한 때라 경기에 나오겠다고 밀어붙였다. 누워서 쉬는 것보다 나와서 경기를 지휘하는게 더 병이 가라앉는 기분이다. 난 인천과 끝까지 갈것이다"며 책임감과 의지를 보였다.

그러나 결국 2019년 11월 19일, 췌장암 4기 진단을 받았다는 사실을 구단 SNS을 통해 밝혔다. 이전부터 췌장암 투병 중이라는 설이 나왔는데, 결국 구단 공식 발표로 이것이 사실이었음이 밝혀졌다.[24] 거기다 스포츠조선에서는 기자가 유상철에게 전화를 건 내용을 토대로 암이 이미 다른 장기로 전이가 되어 버렸다고 보도했다.[25] #
【 공식 발표 전문 】
사랑하는 인천 팬 여러분, 한국 축구를 사랑해 주시는 모든 축구 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인천유나이티드 감독 유상철입니다.
먼저, 항상 저희 인천 유나이티드를 아껴 주시고 선수들에게 크나큰 성원을 보내주시는 팬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해 올립니다.
제가 이렇게 팬 여러분께 인사를 올리게 된 이유는, 여러 말과 소문이 무성한 저의 건강 상태에 대해 이제는 제가 직접 팬 여러분께 말씀을 드려야겠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난 10월 중순경 몸에 황달 증상이 나타나는 등 이상 징후가 발생하였고, 곧바로 병원을 찾아 정밀 검사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검사 결과 췌장암 4기라는 진단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는 분명 저에게 있어 받아들이기 힘든 진단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를 받아들여야만 했습니다. 저 때문에 선수들과 팀에게 피해가 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처음 이곳 인천의 감독으로 부임할 때 저는 인천 팬 여러분께 ‘반드시 K리그 1 무대에 잔류하겠다’라는 약속을 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성남원정을 마치고 병원으로 향하기 전 선수들에게 ‘빨리 치료를 마치고서 그라운드에 다시 돌아오겠다’라는 약속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후에 저는 1차 치료를 마치고 다시 그라운드에 돌아와 선수들에게 ‘나는 약속을 지켰다’고 말했습니다. 병원에 있으면서 역시 현장에 있을 때가 가장 좋았다는 걸 느꼈던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저는 계속해서 치료를 병행해야 합니다. 제가 맡은 바 임무를 다함과 동시에 우리 선수들, 스태프들과 함께 그라운드 안에서 어울리며 저 자신도 긍정의 힘을 받고자 합니다.
그리고 팬 여러분과 했던 약속을 지키고자 합니다. 남은 2경기에 사활을 걸어 팬 여러분이 보내주신 성원과 관심에 보답하고자 감독으로서 최선을 다할 것을 다시 한번 약속드립니다.
축구인으로서의 자존심을 걸고 우리 인천의 올 시즌 K리그 1 잔류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또한, 팬 여러분께서 끝까지 우리 인천을 믿고 응원해주시듯이 저 또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버티고 또 버티겠습니다. ‘할 수 있다’는 긍정의 힘으로 병마와 싸워 이겨내겠습니다.
저를 걱정해주시고 응원해주시는 모든 팬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하며 이만 인사말을 줄이겠습니다. 팬 여러분의 건강과 행운이 항상 함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팬들은 2002년의 그 기적처럼, 유상철의 인생에 또 한 번의 기적이 찾아오기를 간절히 바랐다.[26]

유상철은 췌장암 4기 판정을 받은 당일에 이임생을 만나서 “임생아, 나 이 나이에 지금 가야 되냐?”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 말을 듣고 이임생은 유상철을 안아주면서 울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박항서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김도훈 울산 현대 감독, 김기동 포항 스틸러스 감독, 최용수 FC 서울 감독, 이임생 수원 삼성 감독, 조제 모라이스 전북 현대 감독, 김학범 올림픽 대표팀 감독, 파울루 벤투 국가대표팀 감독 등이 위로의 메시지를 전했다.

이 외에도 제자 김진야, 개그맨 조윤호, 감스트 등이 위로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리고 K리그 연맹과 전 구단이 쾌유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는데 뜻을 모으고, 11월 23~24일 열린 K리그 1 37라운드 전 경기와 K리그2 준PO 때 경기 전 입장곡을 생략하는 대신 30초간 쾌유를 기원하는 박수를 보내기로 했고, 실제 전 경기장에서 유상철의 이름이 연호되었다.

J리그에서도 응원이 이어졌다. 유상철이 현역 시절 몸담았던 가시와 레이솔, 요코하마 F. 마리노스가 응원 메시지를 보냈다. 유상철과 선수 시절 리그 2연패를 함께한 요코하마 F. 마리노스의 팬들은 경기 중 응원 걸개를 걸었다. 요코하마 시절 유상철의 별명은 상철아니키(형). 이걸 그대로 한글로 할 수 있다, 유상철형이라고 걸개에 써서 올리며 그의 이름을 연호하였다. 2019년 12월 18일 한일전이 열린 2019년 동아시안컵 결승전에서도 일본 관중들이 이 유상철을 응원하는 걸개를 걸었다.

경남 FC와의 리그 폐막전에서 비기기만 해도 될 경기임에도 라인을 내리지 않는 과감한 전술을 구사했고, 0:0 무승부를 거두며 인천의 극적인 1부 리그 잔류를 이끌어냈다. 또한 인천 서포터스의 마지막 약속도 꼭 지켜 줘라는 걸개가 여러 사람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시즌 종료 후 구단 오피셜로 2020 시즌에도 유상철 체제를 그대로 유지한다고 발표했지만 이 결정이 축구계 안팎과 인천 팬들 사이에서도 지나친 무리수라는 비판을 받았다. 아무리 선수단에서 감독을 따르고, 프런트가 유상철의 의지를 존중해도 사람의 목숨이 걸려 있고 구단도 타격을 받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2019년 12월 28일, 유상철 본인이 구단에 치료를 위한 사의를 표명하면서 유상철 체제는 2020 시즌부터 종료되었다. 구단은 2020년의 잔여 연봉을 지급하는 한편, 명예 감독으로 선임하기로 결정했다. #

3. 행정가 경력[편집]


2019년 2월 26일 대한축구협회의 국가대표 전력강화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으나, 5월 14일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대략 3개월 정도 근무했다.


4. 췌장암 투병 생활[편집]




그러던 어느 날, 인천의 스태프 이천수가 인터뷰를 거절하며 눈물을 흘렸는데 그러고는 "유상철의 안색이 안 좋아진것 같다. 건강에 문제가 생긴 것 같다."라고 말했는데 이후 췌장암 4기를 진단 받고 암이 다른 장기까지 전이 됐다는 소식까지 전달 받았다.

췌장암으로 투병하는 도중 2020년 2월 23일 자신의 쾌유를 응원해 준 요코하마 F. 마리노스의 홈경기를 방문했다. 췌장암 말기로 고생하는데도 처음보다 건강을 많이 회복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포기하지 않고 힘을 내겠다."며 자신을 응원한 요코하마 팬들에게 응답하였다. 사실상 이때 이후로는 코로나 19로 인해 전세계 어디든지 상관없이 많은 관중들이 모이기 힘든 상황이 된 걸 감안하면 유상철 본인에게 있어서는 많은 관중들이 모인 것 자체가 큰 선물이 된 셈이다.

총 13차로 예정된 항암치료를 모두 마친 상황이 언론에 보도되었는데 이 시점까지는 경과가 매우 좋았다고 한다. 확실히 감독직에서 있을 때보다 안색도 밝아지고 아픈 기운도 덜했다. 그러다 2020년 6월 29일, 인천 감독 복귀 단독 기사가 올라왔다. 팬들은 인천과 타팀 할 것 없이 전부 만류하는 입장이었다.[27] 결국 인천 구단 측은 유상철을 감독으로 재선임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

그러다 11월 10일 공개된 근황 기사에서 암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희소식을 전해, 팬들에게 약속했고 모두가 바라던 기적이 현실화되어가는가 생각될 정도로 많은 팬들은 놀라움과 회복을 바랐다.

2021년 3월 28일, 스포츠니어스의 김현회가 기사를 통해 이미 암이 뇌까지 전이되어 한쪽 눈의 시력을 잃었고 사경을 헤맨다고 하며, 가족 이외에는 면회조차 불가능하다는 기사[28]를 투고해 많은 축구팬들이 안타까워하며 기적을 바랐다. 하지만 이후 해당 기사의 내용을 본인이 직접 부인하며 이는 오보로 밝혀졌다. 본인의 얘기에 따르면 그 때는 상황이 안 좋기도 했지만 목소리도 안 나오고 치료로 인해 발음도 힘들어 그 누구에게도 통화를 하지 않았으며, 지금은 식사와 TV 시청 등의 일상생활을 모두 하고 있음을 밝혔다. 또한 실명설에 대해서는 항암 치료 당시 눈에 피로가 온 게 실명으로 와전된 것 같다고 설명했다. 무엇보다 유상철은 원래부터 왼쪽 눈이 실명된 상태임을 진작에 밝힌 바 있다. 김현회는 기사를 삭제한 이후 본인의 실책을 인정하고 사과 방송을 진행했다.[29]

하지만 이러한 해프닝과는 별개로 유상철의 건강 상태가 낙관할 수 없는 상태는 맞다고 한다. 11월에는 췌장에 암세포가 거의 사라졌으나, 12월에 뇌로 전이된 사실이 발견되어 항암과 방사선 치료를 추가적으로 하였다고 한다. 이 과정에 1월에 몸 상태가 안 좋아져 입원하였고 뇌 방사선 치료 중에 안구도 극도의 피로감을 느꼈다고 한다. 다행히 치료가 끝난 2월부터는 몸 상태가 나아져 다시 일상생활을 하고 있다고 하며 계속 투병을 이어나가고 있다. 유상철은 KBS 취재진에 “건강하게 잘 버티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 나와 같은 병을 겪는 환우들에게 조금 힘들더라도 이겨내면 좋아진다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고 밝혔다.


5. 사망[편집]



파일:유상철 1971년 10월 18일 ~ 2021년 6월 7일.jpg




그러나 이후 급격히 병세가 악화되어 통원치료 대신 병원에 입원해 집중적인 치료를 받은 것으로 전해졌고, 끝내 갑작스럽게 2021년 6월 7일 오후 7시 20분 서울아산병원에서 향년 49세라는 너무 이른 나이에 # 2002년 4강 신화 당시 선수들 중에서 가장 먼저 세상을 떠났다.[30] 2002년 월드컵의 4강 주역인 그의 이른 사망은 많은 축구 팬들과 국민들에게 슬픔과 안타까움을 남기고 있다.[31] 이로서 유상철이 히딩크호에서 가장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람이 되었다.

이후 사망 소식을 처음 알린 스포츠조선 박찬준 기자가 고인의 생전 투병 상황에 대해 추가적으로 알리는 기사를 썼는데, # '4월부터 다시금 연락이 되질 않았습니다. 지인으로부터 "상황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라는 부분으로 미뤄보면, 김현회가 보도했던 위독설은 어느 정도 사실이었고 유상철 본인이 주변에 걱정을 끼치지 않기 위해 마지막으로 힘을 짜내 괜찮다는 메시지를 전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사실 여부를 떠나 유상철 본인이나 가족의 의사와 관계없이 보도해버린 건 명백하게 잘못한 게 맞다.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빈소가 마련되었으며, 장지는 경기도 용인평온의숲에서 화장 이후 충청북도 충주시 앙성면에 위치한 진달래메모리얼파크이다. 맹호장 수훈자인 만큼 심의를 거쳐 국립묘지로 갈 수도 있었으나 자신의 어머니 곁으로 가는 것이 유상철 본인과 유족의 뜻인 듯하다. 인천축구전용경기장, 대전월드컵경기장, 울산문수축구경기장에도 임시 분향소가 마련되었다.

5.1. 각계의 추모[편집]



5.1.1. 축구계[편집]










한국 축구의 큰 별이 졌다는 비보에 많은 축구인들이 애도를 표했다. 2002년 월드컵 멤버인 홍명보, 김병지, 이천수, 황선홍, 최용수, 안정환 등은 6월 9일 진행된 발인날까지 동행했으며, 2002년 당시 대표팀을 이끈 거스 히딩크 감독은 거스히딩크재단을 통해 추모 메시지를 남기고 유족을 위로했다. #

또한 당시 대표팀 수석코치로 재직했던 박항서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도 애도의 뜻을 표했으며, 마찬가지로 2002년 대표팀 동료였던 윤정환 제프 유나이티드 이치하라 지바 감독은 자가격리 문제로 조문이 불가능한 아쉬움을 담은 추모 메시지를 남겼다. # 2003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을 맡아 고인과 잠시 인연을 맺었던 움베르토 코엘류 전 감독은 포르투갈에서 근조화환을 보내 애도를 표했다. 동갑내기이자 국가대표 시절 룸메이트였던 박건하 수원 삼성 블루윙즈 감독은 고인과 항암 치료 중에도 수차례 만남을 가졌음을 이야기하며, 자신이 수원의 감독이 되었을 때 누구보다도 기뻐해준 유상철 감독의 사망을 슬퍼했다. #[32]

후배 선수들인 기성용, 구자철, 김민재, 정우영, 김진야 등도 개인 SNS를 통해 애도의 메시지를 남기거나 빈소 및 분향소에 화환을 보내 유상철을 추모했다. 날아라 슛돌이에서 유상철의 지도를 받았던 제자 이강인[33]이태석도 SNS를 통해 추모글을 남겼으며, 스테판 무고샤, 고르단 부노자, 란레 케힌데 등 고인이 인천에 재직하던 시절 지도받은 외국인 선수들과, 고인이 대전 시티즌에 재직하던 시절 만난 지경득, 이웅희, 바바 유타 등의 프로팀 감독으로 처음 지도한 선수들, 2005년 울산에서 같이 뛴 마차도도 추모 메시지를 남겼다. 무고사는 직접 빈소에 조문을 가기도 했다. 지난 해까지 전북 현대 모터스를 이끌던 주제 모라이스 감독도 개인 SNS를 통해 애도의 메시지를 남겼다.

FIFA 월드컵 공식 트위터도 추모글을 남겼다.

Once a World Cup hero, always a World Cup hero.

Former Korea Republic midfielder Yoo Sangchul, who was vital in the Taegeuk Warriors' run to the 2002 semi-finals on home soil, has passed away. Our thoughts are with his family, friends and the South Korean football community.

한번 월드컵 영웅은 영원한 월드컵 영웅입니다.

2002년 4강까지 가는 한국에서의 태극전사의 경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전 대한민국 미드필더 유상철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우리는 그의 가족, 친구, 그리고 한국 축구계와 같이 애도할 것입니다.

FIFA World Cup 공식 트위터 계정(@FIFAWorldCup) 추모글

유상철이 생전에 뛰었던 구단에서도 유상철을 추모했다. 유상철이 마지막으로 감독을 역임한 인천 유나이티드는 추모 메시지를 남기고 홈 경기장인 인천축구전용경기장에 팬들을 위한 추도 공간을 마련했으며, 발인이 있기 전까지 400여 명의 팬이 분향소를 방문했다. # 유상철이 현역 시절 가장 오래 뛰고 전성기를 누렸으며 현역 마지막 소속 팀이기도 했던 울산 현대와 프로팀 감독으로의 데뷔팀인 대전 하나 시티즌도 고인에 대한 추모 메시지를 남겼고, 각각의 홈 경기장인 울산문수축구경기장대전월드컵경기장에 팬들이 올 수 있도록 추모 공간을 마련했다. 이후 울산 현대는 6월 20일 성남 FC와의 홈경기를 유상철 추모 경기[34]로 진행했으며, 인천 유나이티드는 유가족과 협의하여 유상철 메모리얼 유니폼을 출시했다.[35]

非常に悲しいお知らせとなります。元韓国代表でJリーグでも活躍されたユ サンチョル氏が逝去されました。柏レイソルでは2001から2002シーズン途中までリーグ戦33試合で14得点と大きく貢献、近年は闘病中であることを公表し、最後まで戦い続けられました。心よりご冥福をお祈りいたします。

매우 슬픈 소식입니다. 前 한국 국가대표이자 J리그에서도 활약한 유상철씨가 별세하셨습니다. 가시와 레이솔에서는 2001년부터 2002년 시즌 도중까지 리그 33경기 14득점으로 크게 활약하였으며, 최근엔 투병중인 사실을 알리고 끝까지 싸워왔습니다. 진심으로 명복을 빕니다.

가시와 레이솔 공식 트위터 계정(@REYSOL_Official) 추모글


ユ サンチョルさん (1971-2021)

#fmarinos では、4シーズンでリーグ戦80試合出場(30ゴール)を記録し、リーグ2連覇に貢献されました。

昨年のホーム開幕戦で日産スタジアムに凱旋した際の「また皆さんとお会いしたい」という約束を実現できず残念です。

ご冥福をお祈りいたします。

F.마리노스에서 4시즌 만에 리그 80경기 출장(30골)을 기록하며, 리그 2연패에 기여하셨습니다.

작년의 닛산 스타디움 홈 개막전 방문 당시 "다시 여러분들과 만나고 싶습니다"라고 약속하셨던 것이 실현되지 못해서 안타깝습니다.

삼가 명복을 빕니다.

요코하마 F.마리노스 공식 트위터 계정(@pormpt_fmarinos) 추모글

유상철이 현역 시절 뛰었던 J리그 소속 가시와 레이솔요코하마 F. 마리노스 역시 위와 같이 SNS를 통해 추모 메시지를 남겼다. 요코하마 F. 마리노스는 6월 9일에 열린 천황배 혼다 FC전에서 상장(喪章)을 달고 뛰었으며, 이어 6월 13일 열린 르방컵 콘사도레 삿포로 전에서도 경기 전 묵념 시간을 가지며 고인을 추모하였다. ##

고양에서 월드컵 2차 예선을 치르는 벤투호제주에서 올림픽 평가전을 치르는 김학범호 소집 선수들은 훈련 일정과 버블 규정에 따라 직접 조문을 가는 것이 제한되면서 SNS에 추모글을 남기고 빈소에 근조화환을 보내며, 경기장에서 훈련 전 다 같이 모여 묵념을 하는 시간을 가졌다. 특히나 슛돌이 시절의 인연으로 제2의 아버지와도 같았던 은사를 떠나보낸 이강인은 인스타그램을 통해 장문의 추모 메시지를 남기고 추모 화환을 보냈다. # 파울루 벤투 국가대표팀 감독은 6월 8일 대표팀 기자회견에서 2002년 당시 포르투갈전에서 그와 선수로서 맞대결을 펼쳤던 기억을 떠올리며 추모했으며, 스리랑카전 종료 후 인터뷰에서도 고인에 대한 추모 메시지를 재차 남겼다. #

대한축구협회의 주도로 6월 9일 스리랑카와의 월드컵 아시아 지역 2차 예선 경기에서 유상철에 대한 추모 행사를 가졌다. 경기 당일 킥오프 전 전광판에 헌정 영상을 내보낸 후 묵념을 진행하고, 경기에 출전하는 선수들은 검정 암밴드를 착용하고 벤치에 있는 코칭스태프도 검정 리본을 달았다. 또한 붉은 악마와 협의해 경기장에 추모 현수막을 걸었고, 그의 현역 시절 대표팀 백넘버인 6번을 기려 킥오프 이후 전반 6분까지 육성 응원을 실시하지 않았다. # 또한 이 날 김신욱이 선제골을 넣자 선발 출전한 대표팀 멤버들이 다 같이 모여 유상철의 이름과 현역 시절 백넘버 6번이 마킹된 현재 대표팀 홈 유니폼을 들고 고인을 기리는 세리머니를 했다. #

그리고 한국을 다시 방문한 거스 히딩크도 사망 1주기에 맞춰 와서 유상철 무덤을 헌배했다.

Look into the world, my friend, as you did before. Grateful to have worked with you, I enjoyed. Your commitment. You were a brave man, thank you.

세상을 보게, 친구.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자네와 함께해서 너무 감사했네, 즐겼어. 자네의 헌신. 자네는 용감한 사람이었어, 고마워.

거스 히딩크의 헌배사


그리고 2022년 10월 16일 강원 FC울산 현대에 37라운드에서도 울산의 우승 확정 후 유상철을 애도하는 문구가 있었는데 그는 영원히 함께 한다는 문구가 있었고 울산 현대가 17년 만에 우승을 하여 그 문구는 더욱 빛나게 되었고 울산 인스타, 울산팬들의 인스타에도 유상철의 애도 및 영원히 함께한다는 말이 나오게 되어 울산의 더욱 빛나는 우승이 되었다.

5.1.2. 그 외[편집]


정치권에서도 유상철에 대한 애도의 메시지가 이어졌다. 문재인 대통령은 고인의 빈소에 근조 화환을 보냈고, 더불어민주당 이낙연, 김두관 의원, 국민의힘 배현진, 하태경 의원 등도 SNS를 통해 애도를 표했으며, 박지원 現 국가정보원장[36]박남춘 現 인천광역시장[37], 송영길더불어민주당 대표[38]가 손수 조문을 오기도 했다.

특히 여당 대표와 국정원장은 국가의전서열 7위와 12위의 초고위인사로 이들이 체육인의 장례식에 직접 조문을 간 것 자체가 생전 유상철의 위상이 어떤지 보여주는 지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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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상철이 생전 감독을 역임한 구단같은 연고지인 프로야구단 SSG 랜더스는 6월 8일, kt wiz와 홈구장에서 맞대결이 펼쳐지기 전에 추모 묵념 시간을 가졌다. # 김원형 現 SSG 감독 역시 인터뷰를 통해 명복을 빌었다. #

넥슨의 축구 게임 피파 온라인 4는 추모의 의미로 홈페이지 배경색을 무채색으로 변경했다.

유상철이 인천축구전용경기장에서 마지막으로 진행한 인터뷰의 진행자인 정순주도 자신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그를 추모했다. #

SBS 예능 프로그램 골 때리는 그녀들은 6월 9일 특집 '골 때리는 그녀들 워밍업' 방송 시작 전 유상철을 추모하는 영상을 내보냈다.

MBC 예능 프로그램 놀면 뭐하니?는 6월 12일 엔딩 영상에 네버 엔딩 스토리 떼창 음성과 함께 2002년 폴란드전에서 득점 후 세레머니하는 모습을 띄우면서 그를 추모했다. #

JTBC 예능 프로그램 뭉쳐야 쏜다 - 전설들의 농구대잔치 역시 6월 13일 엔딩에서 2020년 뭉쳐야 찬다 - 전설들의 조기축구 시절 게스트로 나왔을 당시의 장면들과 그 당시 엔딩에서 유상철에게 힘을 넣어주는 모습을 보여주며 그에게 작별을 고하며 추모했다.[39] #

8월 21일에 방영한 KBS2 예능 프로그램 불후의 명곡 전설을 노래하다 스포츠스타 특집에서 김병지가 유상철을 추모하며 안재욱의 친구를 불렀다.[40] #

2023년 8월 25일에 업로드된 슈취타에서 슈가가 유상철 감독을 언급하며 이강인도 여전히 그를 그리워하며 추모하는 모습을 보였다.

[1] 2002년 월드컵 16강 이탈리아전을 복기해 보면 유상철이 실시간으로 포지션을 바꾸며 종횡무진 뛰어다니는 것을 볼 수 있다. 후반전 막판 히딩크 감독은 동점골을 위해 홍명보, 김태영을 빼고 공격수 5명을 세우는 극단적인 포진을 내세웠는데, 이영표-최진철-유상철-송종국으로 포백을 세워도 수비력은 버틸 만 하다는 판단을 했던 듯하다. 이게 말이 쉽지 아무리 멀티 플레이어라도 경기별로 다른 포지션을 뛰는 게 아니라 한 경기 내에서 포지션 한 번만 바꿔도 헷갈려서 경기력 떨어지는 일이 드문 것도 아닌데, 월드컵에서 이렇게 뛰었다는 건 축구 지능이 정말 뛰어났다는 소리다.[2] 김주성은 공격수-미드필더-수비수 순서로 베스트 11에 올랐고, 반면 유상철은 수비수-미드필더-공격수 순서로 베스트 11에 올랐다.[3] 본인 증언에 따르면 스트라이커였다기보다는 공격형 미드필더 위치에서 완전히 프리 롤로 뛰었다고 한다.[4] 이때 전반기 8위였던 울산이 후반기에만 8연승을 하면서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만약 성남이 포항에게 패했다면 역전 우승이 가능한 2위로 시즌을 마무리했는데 그 기간동안 8경기 9골이라는 괴력을 보여주며 시즌 베스트11 공격수 부문에 선정되었다.#[5] 이 대회에서는 특별히 전 대회 컨페더레이션스컵 우승팀인 멕시코가 참가했다.[6] 하프타임 때 코치진과 교체 논의를 하는 중에 유상철이 다가와 손짓 발짓 하며 뛸수 있다고 의견 피력을 했다고 한다. 당연히 히딩크 감독은 '정신나간 놈'이라는 생각부터 들었다고 한다.[7] 최용수, 황선홍의 경우는 월드컵에서의 치명적인 소수의 실수로 인해 이런 별명이 붙었지만, 유상철의 경우는 조금 케이스가 다르다.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가 끝나고 허정무 감독이 부임한 초기 각종 평가전에 스트라이커로 뛰면서 상당히 자주 득점 기회를 날려 먹었으며 그것도 수비진을 돌파해놓고 1:1 찬스에서 날려먹었다. 그 바람에 관중들의 뚜껑이 제대로 열리기 딱 좋은 상황을 많이 연출했다. 이 때문인지 2000년 이후에는 국가대표에서는 스트라이커 자리로 기용되는 횟수가 거의 없다시피했다.[8] 올바른 용어는 플레이 메이커. 당시 센터링, 사이드 어태커와 함께 널리 쓰이던 일본 출신 영어 용어가운데 하나.[9] 사실 부임 전인 1998 월드컵에서도 같은 말을 했다. 단순한 립서비스는 아니었고, 진지하게 평가했다는 것이다.[10] 히딩크는 특히 한국 선수들이 양발을 모두 사용하는 것에 놀라움을 표시했다. 국대나 K리그에 부임한 여타 외국인 감독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대체로 유럽 선수들은 한쪽 발만 집중적으로 쓰기 때문이다. 사실 이건 체력, 정신력에 비해서 그나마 기술이 세계 정상급에 상대적으로 비벼볼만하다는거지, 진짜로 수준급이란 평가는 아니다. 히딩크는 자서전 '마이 웨이'에서 프랑스, 이탈리아, 네덜란드 등의 세계 정상급 팀을 100%로 쳤을 때 힘과 지구력 50%, 기술 85%, 전술 60%, 스피드 80%, 자신감 60%, 경험과 불안 억제력 30%, 경기 중 의사소통과 책임감 20%, 성취 동기 100%, 국가와 축구에 대한 사명감 99% 등으로 평가하였다.[11] 이는 홍명보도 사실 비슷하다. 어린이 축구교실과 프로 산하 유스 팀부터 좋은 인프라에서 체계적으로 기술 교육을 받고 자라난 요즘 세대에 비해서 당시 세대들은 대체로 볼 키핑, 퍼스트 터치가 수준 이하였다.[12] 2002년에 출시한 축구 게임 위닝 일레븐 6에서 아시아 선수들 중 유일하게 슛파워 수치가 90이었다.[13] 여기에 스페인과의 8강전에서 A매치 100번째 경기에 출전해 센추리 클럽에도 가입했다.[14] 여담으로 유상철과 최은성은 1971년생 동갑이며, 동갑내기 감독과 선수로 서로 대하기 껄끄러웠을 것이라는 추측이 유력하다. 거기에 최은성이 유상철보다 생일이 7개월 가량 빠르다.[15] 울산 현대 선수 시절 리그 3회 준우승 , 리그컵 2회 준우승을 기록했다. J리그 시절에는 요코하마 F. 마리노스에서 리그 1회 준우승 , A3 챔피언스컵 1회 준우승을 기록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울산 현대도 프로축구계 콩라인으로 유명하다. 리그 총 7회 준우승이다. 게다가 울산 현대의 유스 팀들도 성인팀 못지 않게 준우승하기로 유명하다.[16] 유상철은 대전의 6대 감독이고, 김인완은 대전의 7대 감독이다.[17] 수원, 포항, 상주, 울산[18] 경남 상대 무승부인데, 간과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이 경기는 0:2로 끌려가는 상황에서 3골을 넣으며 역전한 상황에서 말컹의 극장골로 통한스럽게 비긴 아까운 승부였다.[19] 인천, 1:3 패배[20] 하지만 이건 득이 될 수 있다. 맨시티의 프리미어리그 2연패를 달성한 감독인 펩 과르디올라와 같은 경우에도 포지션에 연연하지 않고 상황에 따른 유연한 선수 운용으로 유명한 감독이다.[21] 임중용 감독대행이 이끌었을 때 허용준은 2군으로 강등당했기 때문이다.[22] 조현우 유럽 이적설에 대해서도 블로그에 올렸던 기잔데, 이번 건은 선을 넘어도 너무 많이 넘은지라 모든 축구 커뮤니티들에서 미친듯이 까였다. 심지어 팬들한테 그렇게 비판을 받는 김현회까지도 "기사로 이야기하자, 블로그로 떠들지 말고"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내면서 이번 사건에 대해 상당히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면서 강도 높게 공개적으로 저격할 정도였다. 그런데 이 지방지 기자, 자신은 그저 '국민의 알 권리'를 위했을 뿐이라며 되려 뻔뻔한 모습을 보이며 자신의 블로그에 '무식한 사람이 신념을 가지면 무섭다'는 방문자 댓글에 '그래 나무 식혜. 너는 무엇?'이라는 식의 대놓고 비꼬는 모습을 보이며 더더욱 까임거리를 제공했다.[23] 수원의 이임생 감독은 유상철 감독과 동갑내기로 절친한 사이다. 경기 전후 굳은 표정으로 유상철과 포옹하는 장면이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수원 선수들 역시 골 세레머니를 자제하는 등 힘든 일을 겪고 있는 유상철을 배려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24] 사실 발표되기 전부터 유상철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음에도 감독직을 내려놓지 않는다는 점에서 잠깐 휴식기를 가지는 것으로는 회복되지 않을 중병이라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짐작해왔었다.[25] 애초에 4기라는 것 자체가 이미 다른 장기에 전이가 되었다는 뜻이라, 기자가 알려지지 않은 내용을 새롭게 보도한 것은 아니다.[26] 췌장암 자체가 원래 발견하기 어렵기도 하고, 1기라고 해도 생존율이 그다지 높은 편이 아니다. 4기의 경우 수술은 어렵고, 담췌관이 막히지 않게 스탠트 시술을 하고 항암 치료를 하는 것 등의 방법이 있다. 이후 호전되고 있다는 기사가 속속 올라오고 유상철 감독 또한 다큐멘터리 및 유튜브에 출연하면서 밝은 모습을 보여주며 희망을 갖게 했지만, 암세포가 뇌로 전이되면서 2021년 6월 7일 팬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결국 세상을 떠났다.[27] 과거 백혈병으로 갑자기 올림픽 대표팀에서 하차했던 이광종 감독도 상태가 호전되었지만, 이후 갑자기 상태가 악화되어 세상을 떠났고, 선수와 팬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만큼 암은 쉽게 완치할 수 있는 병이 아니다. 그리고 프로스포츠팀 감독이라는 자리가 모양새만 보기 좋을 뿐 어디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 극한직업이라는 것이 현재 모든 사람들의 중론이다. 당장 같은 인천을 연고지로 두고 있는 야구팀 SK 와이번스염경엽 감독이 성적부진으로 인한 스트레스 등으로 실신해 쓰러진 것이 해당 주에 일어났던 일이다. 건강한 사람도 스트레스로 쓰러질 판국에 유상철은 4기 암환자이다. 유상철이 책임감에 총대를 매려고 했지만 전 스포츠 팬들과 관계자들이 극구 만류하는 건 당연지사다.[28] 현재 기사의 원본은 삭제되었고, 아카이브로 당시 기사를 확인할 수 있다.[29] 그리고 이 사과 방송 말미에 방송이 꺼진 줄 알고 욕설을 했다가 논란이 추가로 되었다. 이는 이후 SNS를 통해 자신에게 한 자책성 혼잣말이라고 해명했다.[30] 코칭스태프를 포함할 경우 핌 베어벡 전 감독이 2019년 암으로 세상을 떠난 바 있다.[31] 현역 선수 시절 뛰어난 실력을 선보였고, 국가대표 선수로 뛰면서도 감동적인 장면을 많이 선사했기에 국민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투병 중에도 "다시 돌아오겠다"라며 재기를 포기하지 않을 만큼 의지 역시 강해서 그만큼 슬픔과 안타까움을 많이 남겼다.[32] 특히 박건하는 2017년 이미 대학 동기인 조진호부산 아이파크 감독을 갑작스럽게 떠나보냈는데, 또 다시 친구이자 축구계 동료를 떠나보내면서 그 충격이 더 컸다.[33] 이강인의 경우 유상철이 사망하기 전날에 조모상을 당했다고 한다.[34] 울산 선수들이 입장할 때 유상철의 번호인 6번이 마킹된 유니폼을 입고 입장했다.[35] 판매 수익금은 모두 유가족에게 전달된다고 한다.[36] 현역 국가의전서열 12위의 초고위 인사(장관도 위로 2명뿐이다)이자 집중경호대상이고 동선노출이 보안사항이라 현역 국정원장이 조문을 직접 간 것 자체가 대단한 사건이다. 박지원 원장은 김대중 정부에서 월드컵 개최를 준비하던 1999-2000년에 월드컵 주무부처인 문화관광부장관을 지냈으며, 월드컵 4강 신화 당시에는 대통령비서실장으로 재직 중이었다.[37] 유상철이 감독을 맡았던 인천 유나이티드의 현 구단주이다.[38] 마찬가지로 과거 인천 유나이티드의 구단주인 인천광역시장을 지냈다.[39] 마지막 문구는 "Good bye 레전드. Good bye 유상철."이었다.[40] 시작하기 전에, 자막으로 우리의 영원한 멀티 플레이어, 故 유상철에게 이 무대를 바칩니다라고 띄워주었고, 안정환, 김남일, 이천수가 추모 메시지를 남겼다. 그리고 무대 중간에 김병지가 고인과 함께한 영상을 보여주면서 시청자들과 판정단들의 마음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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