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언/실존인물/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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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실존 인물 중 한국인의 유언을 정리한 문서다. 다만 한국사에 관련된 외국인의 유언, 북한인의 유언도 포함되어 있다.
2. 명단[편집]
2.1. 고조선[편집]
2.2. 삼국시대[편집]
2.3. 통일신라시대[31][편집]
2.4. 후삼국시대[편집]
2.5. 고려시대[편집]
2.6. 조선시대[편집]
2.7. 대한제국[편집]
2.8. 일제강점기[편집]
2.9. 미군정[편집]
2.10.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편집]
2.10.1. 20세기[편집]
2.10.1.1. 1940년대[편집]
2.10.1.2. 1950년대[편집]
2.10.1.3. 1960년대[편집]
2.10.1.4. 1970년대[편집]
2.10.1.5. 1980년대[편집]
2.10.1.6. 1990년대[편집]
2.10.1.7. 2000년대(2000년)[223][편집]
2.10.2. 21세기[편집]
2.10.2.1. 2000년대[편집]
2.10.2.2. 2010년대[편집]
2.10.2.3. 2020년대[편집]
[1] 원래는 '남북국시대'가 옳은 용어이지만 아래의 인물들이 모두 신라인이라는 사실을 감안하여 편의상 '통일신라시대'라는 용어를 사용한다.[2] 2000년은 20세기에 속하며 21세기는 2001년부터이다.[3] 니계상 삼, 한음, 장군 왕협과 항복을 모의할 때의 발언이다. 모의 직후 앞서 언급한 인물들과 함께 한나라에 항복하러 가는 도중 전사하였다.[4] 광개토대왕릉비의 기록. 홀본 동쪽 언덕에서 용의 머리를 디디고 서서 하늘로 올라가면서 세자 유류에게 전했다는 고명(顧命), 즉 유언이다.[5] 고구려 2대 유리명왕의 둘째 아들로, 첫째 도절을 이어 태자에 올랐다. 이웃 황룡국에서 선물한 강궁을 꺾어 이웃 나라와의 화친을 깼다는 이유로 자결을 명받았다. 이 말을 한 직후 나가 여진(礪津)의 동쪽 들판에 창을 꽂고 말을 타고 뛰어들어 자결했다.[6] 《삼국사기》 〈신라본기〉 탈해 이사금 즉위 기사에 기록된 유리 이사금의 유언에서 '선왕(先王)의 고명(顧命)'으로 언급되는 내용이다.[7] 죽기 1년 전인 47년 7월 민중원으로 사냥을 갔다가 석굴을 발견한 뒤 신하들에게 남긴 말이다.[8] 그러나 두 아들 모두 훗날 늦게나마 왕위에 오르니 각각 파사 이사금과 일성 이사금이다.[9] 《삼국사기》에서는 146년 12월 아들 수성에게 양위하며 한 말로 기록되어 있으나, 태조대왕 후기 기록의 신빙성이 의심받는 현재로서는 《후한서》의 기록에 따라 121년 사망 당시 수성에게 남긴 유언으로 보기도 한다.[10] 《후한서》의 기록으로, 《삼국사기》에서는 165년 3월에 승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11] 2세기 전반에 활동한 고구려의 인물로, 《삼국사기》에 따르면 123년 10월 우보(右輔)가 된 이후 좌보(左輔) 목도루, 왕의 아들 수성과 함께 정사에 참여하였다. 차대왕 즉위 직전인 146년 10월 태조대왕에게 수성의 숙청을 진언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이듬해 3월 차대왕에 의해 숙청되었다고 한다. 숙청 당시 멀고 가까운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애석해했다고 전해진다.[12] 패자(沛者)의 관직을 지녔던 고구려의 인물. 《삼국지》 및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 동천왕이 위나라를 공격하자 여러 차례 간언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이 말을 남기고는 스스로 굶어 죽었다고 한다.[13] 비류수 전투 당시 고구려를 상대로 승승장구하던 위나라의 군대를 혼란스럽게 만들기 위해 계책을 꾸며, 위군에게 거짓으로 항복하는 척하며 장수를 죽인 뒤 본인도 같이 죽은 충신이다.[14] 나해 이사금의 아들로 이 시기 신라의 명장으로 유명하다. 왜국 사신이 왔을 때 그의 무용을 띄워주자 술김에 "기회가 되면 너희 나라에 쳐들어가 너희 왕은 소금 만드는 노비로, 왕비는 부엌데기로 만들겠다"(…)라고 말한 것이 침공의 빌미가 되었다. 이 말을 남긴 직후 왜왕에 의해 화형에 처해졌다. 그의 아내는 이를 한으로 여겨 왜국 사신이 왔을 때 접대를 자청하고는 똑같은 방식으로 화형시켜 버린다. 이 결과 다시 대대적인 침공을 당하는데, 이번의 경우엔 격퇴할 수 있었다. 뒷날 우로의 아들은 흘해 이사금이 된다.[15] 《삼국사기》의 기록이다. 《해동고승전》에도 "나는 불법을 위해 형장에 나아가지만 부디 정의와 이익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부처님께서 만약 신통력이 있으시다면 내가 죽을 때에는 반드시 이상한 일이 있을 것입니다."라 하여 비슷한 유언을 전하고 있다.[16] 사망 연도인 528년은 《삼국사기》의 기록이다. 최치원의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에는 "양나라의 보살제가 동태사에 간 지(527년) 1년째, 법흥왕이 율령을 마련한 지(520년) 8년째에 존귀한 신하가 제 몸을 바쳐 불교가 널리 유행하기 시작했다"는 기록이 있어 이차돈이 528년에 죽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한다. 한편 출생 연도는 《삼국유사》에서 9세기 초의 〈촉향분예불결사문〉을 인용해 순교 당시 이차돈의 나이를 22세라고 한 기록을 바탕으로 역산한 것이다.[17] 《삼국유사》의 기록이다.[18] 얼마 후 고도(苦都)가 명왕(明王)을 사로잡아 두 번 절하고 "왕의 머리를 베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명왕이 "왕의 머리를 노비의 손에 줄 수 없다"고 하니, 고도가 "우리의 법에는 맹세한 것을 어기면 비록 국왕이라 하더라도 노비의 손에 죽습니다"라 하였다. (다른 책에는 "명왕이 호상(胡床)에 걸터 앉아 차고 있던 칼을 곡지(谷知)에게 풀어주어 베게 했다"고 하였다.) 명왕이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하고 눈물 흘리며 허락하기를 "과인이 생각할 때마다 늘 고통이 골수에 사무쳤다.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구차히 살 수는 없다"라 하고 머리를 내밀어 참수당했다. - 《일본서기》[19] 437년 출생한 지증왕의 증손이고, 580년 2월에 병부령에 임명되었으며 사망 당시 아들이 세 명 있었다고 한다. 이 기록들로 미루어 보아 김후직은 대략 580~590년대에 사망했을 것이라 짐작된다.[20] 지금의 충주 계립령로 하늘재길로 비정된다.[21] 신라 진평왕 때 가잠성 성주. 가잠성을 공격한 백제군과 싸웠으나 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이 말을 남기고 느티나무에 머리를 부딪혀 자결했다.[22] 찬덕의 아들. 아버지의 공덕으로 출세해서 가잠성을 탈환했다. 그러다가 다시 백제군이 성에 쳐들어오자 이들을 맞아 싸우다가 전사했다.[23] 7세기 신라의 인물로, 사량궁(沙梁宮)을 관리하는 사인이자 화랑 근랑(近郎)을 따르는 낭도였다. 백성들이 자식을 팔아먹을 정도로 나라에 큰 기근이 들어, 사량궁의 다른 사인들이 창예창(唱翳倉)이라는 창고에서 곡식을 훔쳐 나눌 때 검군만은 홀로 받지 않았다. 사인들이 "양이 부족해서 그러냐"며 묻자 낭도로서의 양심을 버릴 수 없다며 거절하고 근랑의 집에 찾아갔는데, 사인들이 입막음을 위해 자신을 암살할 것임을 예감한 검군은 근랑에게 작별을 고하며 몇 가지 질문에 대답했다. 표에 적힌 유언은 근랑의 마지막 질문인 "어찌 도망가지 않는가?"에 대한 답변이다. 이후 검군은 사량궁으로 돌아가 사인들이 베푼 술자리에 참석했는데, 예상대로 음식에 독약이 들어 있었다. 검군은 이 사실을 알면서도 스스로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음식을 억지로 먹은 뒤 죽었다.[24] 본래 신라의 실제사(實際寺)에 머물던 승려로, 법명은 도옥(道玉)이었다. 백제가 도비천성(刀比川城)을 점령했을 때 태종 무열왕이 직접 출전했음에도 승산이 없자, 동료들에게 이 말을 남기고는 승복을 군복으로 갈아입으며 환속했다. 이윽고 병부에 가서 중앙 군사조직인 삼천당(三千幢)에 속하기를 청하였고, 마침내 종군하여 전장에 도착했다. 창과 검을 가지고 적진에 돌격하여 적군 몇 명을 죽인 뒤 전사했다. [25] 도비천성 전투 도중 야음을 틈타 습격해온 백제군을 홀로 막아낼 때 대사 전지(詮知)가 "지금 적이 어둠 속에서 움직이니 지척에서도 분간할 수 없고, 공이 죽는다 하더라도 알아줄 사람도 없습니다. 하물며 공은 신라의 귀한 신분으로 대왕의 사위입니다. 만약 적군의 손에 죽는다면 백제의 자랑거리이자 우리들의 깊은 수치가 될 것입니다."라고 말리자 대답한 말이다. 이후 하인의 만류에도 개의치 않고 칼을 뽑아 휘두르며 적과 싸워 여러 명을 죽인 뒤 전사했다.[26] 도비천성 전투에 보기당주(步騎幢主)로 출전한 신라의 장수. 김흠운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적진에 달려가 서너 명을 죽인 뒤 똑같이 전사했다.[27] 옥사에서 굶어 죽어갈 때 쓴 상소문이다. 의자왕은 이 상소를 무시했고, 결국 백제가 생존할 수 있는 결정적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28] 아버지 김흠순이 반굴을 부른 뒤 "신하가 되어서는 충성보다 중요한 것이 없고 자식이 되어서는 효도보다 중요한 것이 없다. 위험을 보고 목숨을 바치면 충성과 효도가 모두 갖추어진다."라고 하자 이 말을 남기고는 적진에 뛰어들어 힘껏 싸우다가 전사했다.[29] 백제 부흥군의 장군. 풍왕과 갈등하던 끝에 결국 제거되었는데, 복신의 처형을 망설이던 부여풍에게 달솔 덕집득이 반역자는 살려둬서는 안된다고 하자 덕집득에게 침을 뱉으며 한 말이다. 원문은 '腐狗癡奴'로, 《일본서기》에 기록된 일화다.[30] 연개소문 사후 고구려는 연개소문 아들들의 권력 투쟁으로 멸망한다. 이 유언 역시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다.[31] 원래는 '남북국시대'가 옳은 용어이지만 아래의 인물들이 모두 신라인이라는 사실을 감안하여 편의상 '통일신라시대'라는 용어를 사용한다.[32] 673년 6월 병석에 있을 때 문병을 온 문무왕에게 한 말.[33] 말갈족이 아달성을 노략질하자 칼을 휘두르며 적을 향해 외친 말이다. 이후 분노하여 적진을 향해 돌진하자, 말갈인들도 감히 접근하지 못하고 멀찍이서 화살만 쏘아대는 바람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전투가 이어졌다. 끝내 고슴도치마냥 온몸에 화살이 박힌 채로 쓰러져 전사하였다.[34] 《삼국유사》 〈기이〉의 기록으로, 지의법사(智義法師)에게 앞의 문장을 말한 뒤 법사가 "용이란 축생보(畜生報)가 되는데 어찌합니까?"라고 묻자 왕이 뒤의 문장으로 대답했다고 한다.[35] '목동들이 그 위에서 노래를 부르고 여우와 토끼는 그 옆에 굴을 팔 것이다.'의 대목은 현재 부분적으로만 남아있는 〈문무왕릉비(682)〉에도 등장하여 1차 사료와 교차 검증이 가능하다.[36]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기록이다.[37] 핍실의 첫째 형 부과(夫果)는 671년 1월 백제부흥군과 싸우다 전사했으며, 둘째 형 취도(驟徒) 역시 655년 9월 도비천성 전투에서 백제군과 싸우다 전사했다.[38] 실복(悉伏)을 비롯한 보덕국의 고구려 유민들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러 떠나기 직전 아내에게 남긴 말이다. 핍실은 자신의 유언대로 적진에서 수십 명의 목을 벤 뒤 전사했다.[39] 《삼국유사》에 기록된 유언으로, 장보고의 반란을 진압하러 청해진에 들어간 염장에게 용건을 물으니 "제가 임금을 배반해버렸기에 해를 피하기 위해 공의 막하에 몸을 의탁하려 합니다"라고 밝히자 기뻐하며 한 말이다. 이후 장보고는 염장에게 연회를 베풀어 함께 술을 마셨는데, 염장은 장보고가 거나하게 취한 틈을 타 장검을 빼앗아 그의 목을 벴다.[40] 884년 건립된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의 기록으로, 죽기 한 달 전인 880년 음력 3월 9일 의지사들에게 남긴 유언이다.[41] 《고려사》에 기록된 유언으로, 죽기 이틀 전인 918년 음력 6월 14일 왕건이 역성혁명을 일으키자 깜짝 놀라며 도망치기 직전 한 말이다.[42] 최남선이 1924년 매일신보에 연재한 〈풍악기유〉에 기록된 유언으로, 이는 당시 철원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 전해지던 설화를 인용한 것이다. 궁예가 삼방 골짜기로 도망갔을 때 우연히 만난 어느 스님이 "더 이상 도망칠 곳도 없는 이런 협곡에 들어와 살아남겠다는 것이 어리석다"고 말하자, 궁예는 절망하여 "드디어 하늘이 나를 버렸다"고 말하고 높은 곳에서 의연히 투신했다는 내용이다. 다만 사서에서 확인되지 않는 사실이라 궁예가 정말 그런 유언을 남겼는지는 확실하지 않다.[43] 죽기 직전 신덕전에서 학사 김악(金岳)에게 유조를 적도록 한 뒤 아무 말이 없자 신하들이 통곡했는데, 왕건이 "이게 무슨 소리냐?"라고 묻자 신하들은 "성상께서 백성의 부모로 계시다가 오늘 여러 신하를 버리고자 하시니, 저희는 애통함을 스스로 참을 수 없을 뿐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왕건은 웃으면서 "뜬구름처럼 덧없는 인생은 예로부터 그러한 것이니라.(浮生 自古然矣)"라는 말을 남기고는 잠시 뒤 세상을 떠났다.[44] 죽기 직전 대사면령을 내리자는 신하 왕융의 상소에 내린 대답.[45] 통주에서 패하여 거란군에게 사로잡혔는데, 요 성종의 회유를 받자 고문을 받으면서도 이를 거절했다. 그러나 함께 잡힌 부장 이현운이 "두 눈은 이미 새로운 해와 달을 보았습니다. 일심으로 섬길 뿐 어찌 옛 산천을 기억하겠습니까?"라며 거란에 충성을 맹세하자 그를 걷어차며 일갈한 말이다.[46] 요나라에 볼모로 잡혀있을 때 자신이 구매한 말들을 몰래 고려로 가는 길에 배치해 귀국을 꾀했는데, 이 사실이 발각되어 요 성종의 국문을 받자 한 말이다. 하공진의 의리를 가상히 여긴 요 성종은 그를 풀어주며 요나라에 충성을 다할 것을 설득했으나, 하공진이 더욱 강경하고 모욕적인 말투로 완강히 거절하자 결국 그를 살해했다. 이때 한 말이 "나는 고려 사람이며 감히 두 마음을 갖지 않는다.(我是高麗人, 不敢有二心.)"라는 이야기도 있으나 그 출처를 알 수 없다.[47] 고려 중기의 문신. 이자겸의 난 당시 숙직하다가 궁궐이 불타는 것을 보고 한탄하며 한 말이다. 말을 마친 직후 시종에게 문을 닫게 한 뒤 그대로 불에 타 죽었다.[48] 고려 중기의 귀족 여인으로, 남편은 아버지를 해친 호랑이를 죽여 복수한 일화로 유명한 문신 최루백(崔婁伯, ?~1205)이다. 묘지명에 따르면 1145년 봄에 최루백이 정7품 사직(司直)에서 종6품 우정언(右正言)으로 승진하자 "우리의 가난이 그치려나 봅니다."라며 기뻐했는데, 최루백이 간관은 녹봉을 지키는 자리가 아니라고 하자 이렇게 대답했다고 전한다. 그녀는 같은 해 9월 병에 걸렸고, 결국 소원을 이루지 못한 채 이듬해인 1146년 1월 28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49] 고려시대의 문신. 동북 9성으로 유명한 윤관의 아들로 김부식과 대립했다. 말년에 은거하여 '관승'이라는 승려와 함께 풀을 엮어서 만든 암자에서 지냈는데, 관승은 윤언이에게 "먼저 가는 사람이 여기 앉아 죽으면 죽어서 변전한다"고 말했다. 죽던 날 식사를 마치고 관승에게 "내가 갈 때가 되었으니 작별을 고하오"라고 말했고 관승이 전송하자 이 말을 남기고 암자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암자 벽에 사세구를 써 놓고 앉은 채로 죽었다고 한다. 윤언이의 사세구는 사세구/한국 항목 참고.[50] 고려시대의 문신. 의종과 김부식, 한뢰와 함께 무신정변의 원흉이기도 하다. "유시의 변"이란 1167년 김돈중의 말이 실수로 한 무신의 화살통을 들이받아 화살이 의종의 수레 옆에 떨어졌는데, 이를 암살 미수로 오해한 의종이 범인을 찾으려 하자 김돈중이 급하게 무신들에게 누명을 뒤집어씌워 유배보낸 사건을 일컫는다.[51] 고려 무신정권 초기 김보당의 난을 주모한 문신. 이의방 등에 의해 개경으로 압송되어 저잣거리에서 처형당하기 직전 자신만 죽을 수 없다며 내뱉은 말로, 이 한 마디 때문에 무신정변을 가까스로 살아남았던 문신들이 모조리 살해당했다.[52] 자신이 죽으면 누군가 자신의 가문에 반기를 들 것을 우려하여 내린 명령이다. 과연 최충헌의 예상대로 그런 이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최충헌이 부른다고 거짓말을 하여 최우를 유인하려 했다. 그러나 이미 최충헌이 문병을 끊으라고 말한 뒤라 먹히지 않았고 이내 진압당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60년에 달하는 최씨정권의 시작을 연 인물답다면 인물다운 유언.[53] 고려 후기의 무신. 일찍이 최우의 심복이었는데, 최우가 죽자 왕정 복고를 노리다가 주변인들이 최항의 편에 붙는 것을 보고 같이 귀부하였다. 이후 최항의 신임을 얻어 후한 대우를 받았으나, 최항이 견자산(見子山)의 저택으로 이사가면서 이를 주숙에게 알리지 않자 최항을 의심하고 꺼리게 되었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최항은 낭장 임경(林庚)을 보내 주숙을 압송하여 섬으로 유배보낸 뒤, 웅천에서 물에 빠뜨려 살해했다. 주숙은 장군 김효정(金孝精)이 이 일을 꾸몄다고 생각하여 죽기 직전 이 말을 남긴 것이다. 이후 김효정 역시 최항에 의해 섬으로 유배당해 죽었다.[54] 고려 후기의 문신. 공정하고 청렴하기로 유명했으나 동시에 지독한 술꾼이기도 했는데, 죽기 직전 아내가 술을 내놓자 이 말을 남기고는 술을 바로 다 마신 뒤 죽었다고 한다.[55] 증손자 김무(金務)가 1429년 12월 작성한 노비 상속 문서에서 언급되는 유서의 내용이다. #[56] 뒤에 나오는 최영 장군의 아버지.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가사에서 보이듯 이를 최영이 한 말로 잘못 아는 경우가 많다. 다만 최영 자신은 이 유언을 받아들여 검소하게 살긴 했다.[57] 《고려사》 원문은 아지(阿只)인데, 전근대 한국에서는 한자 只가 '기'로 읽히기도 했으며 기사 본문에서도 "우리말로 어린아이를 지칭한다"라고 명시했기 때문에 한국어의 단어 '아기'를 표기한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서의 아기란 신돈의 시녀 반야가 낳은 아들 모니노(당시 만 5세)를 일컫는 것이다.[58] 처형당하기 직전 손이 묶인 채로 옆에 있던 임박(林樸, 1327~1376)에게 애걸하며 남긴 말이다.[59] 그러나 최만생은 홍륜 일행에게 공민왕의 계획을 알려주고 같이 공민왕을 살해했다. 그후 홍륜과 최만생은 이인임에게 처형을 당했다.[60] 죽기 전날 밤 우왕의 손을 잡고 남긴 유언이다.[61] 무덤에는 정말로 풀이 나지 않았지만 후세에 풀을 심었다고 한다.[62] 이는 무인정사 당시 무사히 도망쳤다가 자수하고자 할 때 주위에서 말리자 한 말로 실제로도 남은은 정도전과는 달리 별로 미움을 사지 않는 사람이었고 남은을 죽인 태종 이방원도 후에는 남은이 살아있었다면 좋았을 거라며 남은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허나 어쨌든 당시에는 제거대상이었는지 결국 죽었다.[63] 이방원의 습격을 받자 아들 정담이 "오늘 일은 정안군께 빌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라고 묻자 그에 대한 대답. 이보다는 절명시로 알려진 <자조(自嘲: 스스로를 비웃다)>가 유명하다. 사세구/한국 참고. 사실 기록상으로는 이보다 뒤에 정안군 앞에서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하는것이 나중이지만 이 부분은 의심을 받기도 한다.[64] 조선 초기의 무신. 태종 이방원을 도와 공신의 반열에 올랐으나 세종이 즉위하고 태종이 상왕으로 있을 때 세종의 장인 심온을 제거하려는 태종의 옥사에 휘말려 거열형으로 죽었다. 거열형을 당하기 직전에 한 말이다.[65] 야사에서 나오는 유언으로 태종과 붙어 자신을 죽이는데 일조한 박은을 두고 겨냥한 말이라는 얘기도 있다.[66] 그런데 사실 세종도 세종이지만 전대인 태종 역시도 허조에게는 은인이다. 그 허조를 직접 잘 쓰라고 세종에게 지시한 사람이 태종이기 때문. 물론 세종은 어차피 태종이 말 안 해줘도 알아서 잘 썼겠지만 그래도 아버지가 직접 골라준 인재라는 점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67] 세종실록 127권, 세종 32년 2월 14일 기축 3번째 기사 - 임금이 동부승지 정이한(鄭而漢)에게 이르기를, "왜인·야인을 접대하는 것은 관계되는 것이 가볍지 않은데, 평안한 것이 몸에 배어, 해가 오래고 날이 깊어, 모든 일에 게으르고 늦어질까 두려우니, 마땅히 삼가 조심하기를 항상 하루같이 하여, 혹시라도 조금도 허술함이 없도록 하라." 하고, 즉시 예조와 병조에 명하여, 해당되는 관리를 경계하여 신칙하라 하였다. 이 앞서 임금의 몸이 완전하게 평복되지 못하여서, 승정원(承政院)에서 사건을 아뢰지 않았으므로, 일이 지체되는 것이 많았는데, 이에 이르러 비로소 사건을 아뢰매, 모든 사무를 재결하는 데 처리하기를 물흐르듯 하되, 모두 끝까지 정밀하게 하기를 평일과 다름이 없었다. 밤 2고(鼓)에 이르러 도로 편치 않았다.(2월 14일은 음력 기준이며 세종이 숨을 거둔 것은 17일이지만 실록에 기록된 세종 본인의 발언으로서는 마지막 기록이다.)[68] 약 140년 뒤 조선은 왜인에게 침략을 당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왕이 야인에게 머리를 조아리게 되었다.[69] 수양대군에게 철퇴로 얻어맞은 다음 기적적으로 살아나자, 다시 살해하러 찾아온 수양대군의 부하들에게 자신이 투옥되리라 생각했는지 친 호통. 이 직후 살해되었다. 두 번 죽은 셈.[70] 석물을 세우지 말라는 유언에도 불구하고 그의 7대손 참판 만(曼)과 8대손 성항(性恒)이 상의하여 단출한 상석을 놓고 짤막한 묘비를 세웠다. 그러나 1910년 한일병탄 전야인 8월 26일 밤 갑자기 파괴되었다.[71] 그리고 다음 날 바로 세상을 떠났다.[72] 이 유언 때문에 기존의 석곽묘를 쓰지 않고 석회를 다져 넣었는데, 오히려 공기의 유입을 막는 이런 구조가 시체가 부패하는 것을 막는다고 한다. 이따금씩 발견되는 사대부 미라도 바로 그것.[73] 남이에게 왜 무고했냐고 따지고 남이가 대답한 일화의 뒤에 기록된 강순의 마지막 발언.[74] 징비록에 기록된 유언. 허나 약 약 120년 후 조선은 임진왜란의 전화에 휩쓸리게 된다.[75] 실록에 기록된 공식적인 유언. 평소에 책을 좋아하던 것으로 많은 일화를 남긴 신숙주다운 유언이라 할 수 있겠다.[76]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한 말이라고 한다.[77] 죽기 직전에 성종에게 올린 말. 이 말을 마치고 죽었다고 한다.[78] 사사 당시 자신의 어머니에게 남긴 말. 다만 이는 실록에 기록되지는 않은 야사의 기록이다.[79] 그후 3년 뒤에 사람들이 무덤을 파 보니 시체가 전혀 썩지 않고 살아있는 것 같았다고 한다. 이에 사람들은 김시습이 죽어 부처가 되었다고 여기고 화장을 해 사리를 봉안했다.[80] 그러나 겨우 10여 년 만에 그의 아들 연산군이 이 일에 대해 희대의 복수극을 펼치게 된다.[81] 세조~연산군 대의 문관. 글에 뛰어난 문사였다. 사림파에 강경한 태도를 취해 미움을 많이 샀으나, 무오사화 때는 "청론하는 선비는 조정에 있어야 한다"면서 한 사람이라도 살리려는 모습을 보여 후일 사림에게 욕을 먹지는 않았다. 연산군은 그를 무척 총애했으나, 그의 말을 듣지 않고 결국엔….[82] 연산군의 어머니인 폐비 윤씨의 사형 집행을 담당했었다는 이유로 자결을 명령받았는데, 죽을 상황에서도 '은혜가 지극히 중하다' 고 하는 것은 '몸과 머리가 나누어짐을 면하게 되었기' 때문. 조선 시대에는 그나마 시신을 온전하게 보전할 수 있는 사약형이 가장 명예로운 처형법이었고, 그 다음이 교수형, 그리고 다음이 참수나 능지처참 등이었다. 연산군이 이세좌를 숙청한 내용은 갑자사화 항목을 참고 바람. 참고로 연산군은 후에 죽은 이세좌의 머리와 몸을 나누는 것도 모자라 머리를 효수하고 그 효수한 머리가 썩어버리자 뼈를 으깨어 바람에 날려보낸다...[83] 실록 졸기에서의 전양필의 보고.[84] 이세좌를 위해 온건한 의견을 올렸으며, 연산군에게 검소와 절약을 권하는 이유로 죽음을 당했다. 금부도사에게 이 유언을 전해듣고 대노한 연산군은 이극균과 가까웠던 무사들을 변방으로 유배 보냈다.[85] 연산군의 학정에 간언하다가 전신에 화살을 맞았다. 그리고 광기에 휩싸인 연산군이 칼로 팔다리를 자른 후 걸어보라고 명하자 처선이 조롱한 말. 그리고 이 말을 들은 연산군은 처선의 혀를 잘라버렸다.[86] 연산의 대표적 총신. 2012년 한국 영화 간신의 주인공이 바로 이 사람이다. 연산에게 수많은 미인을 바치며 그의 타락을 도왔으며 죽는 유언까지도 연산에 대한 아부였고 연산은 그를 매우 총애하여 그의 집으로 직통되는 길을 민가 수십채를 헐어 놓고 했으며 그가 죽자 매우 상심했다 한다. 바로 위의 사람과 참 대비된다.[87] 연산군은 중전 신씨와 같은 곳으로 유배되지 못했다. 신씨는 일찍이 연산군의 학정을 말리려 눈물을 흘리며 간했으나 연산군은 그 말을 듣지도, 그렇다고 그를 내치지도 않았다. 장녹수를 비롯한 난잡한 생활 속에도 황금에 중전의 덕을 기려 새기라고 명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외에도 연산군일기를 보면 연산군이 중전 신씨를 유달리 챙긴 일화가 꽤 있다. 심지어 아예 없는 예법과 절차를 만들면서까지 직접 옥책을 내리려 한 적도 있다.[88] 왕은 비록 미치고 포학하였지만, 매우 소중히 여김을 받았다.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에 기록된 문장이다. 미쳐 날뛰던 갑자사화 때조차 유일한 브레이크 역할을 한 것이 폐비 신씨이다. 연산군이 폐위 후 유배를 갈 때도 같은 유배지로 보내달라고 울부짖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89] 중종반정의 공신. 의정부 소속 종이었던 정막개의 고변으로 인해 역모 혐의를 받게 되었고 결국 매를 이기지 못한 끝에 혐의를 인정하고 능지처참당했다. 집행 직전에 대간이었던 집의 김협을 보며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하며 김협은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정막개는 이 불분명한 역모 고변으로 노비 신분을 벗어나 정3품 당상관 자리에 올랐다.[90] 공식적인 유언.[91] 사약을 받고 나서 절명하지 않자 집행을 빨리 끝내기 위해 나졸들이 조광조의 목을 줄로 얽으려고 하자 이런 말로 일갈했다. 곧 독한 술을 가져다가 잔뜩 마시고 나서 절명했다고 한다.[92] 초기에는 역시 촉망받는 신진 관료였으나 조광조 일파가 수구세력으로 몰아가면서 돌변하여 결국 기묘사화에 앞장선 인물. 이후 국정도 나름대로 무난하게 이끌고, 외교문서는 사실상 전담했으며 영의정 자리에도 올랐다. 하지만 조광조를 죽인 일을 후회하여, 자신의 글을 자식들에게 모두 불태우게 했다. 이로서 당대의 명필이자 뛰어난 문사였던 남곤의 글은 고작 시 한 수만 전해온다. 다른 기묘사화의 주도자들이 후에 조광조와 똑같은 방식으로 사약을 받고 죽은 반면, 남곤은 천수를 누렸는데 아마도 이런 반성이 원인이 아니었을까.[93] 몸의 상태를 뜻하는 표현으로 쓰였다.[94] 그 전에 유조로 조광조의 억울함을 신원하고 이복 동생 경원대군에게 전위한다는 명을 내렸다.[95] 그냥 평범한 유언같지만 사실은 사약 마시기 직전에 사약을 가지고 온 의금부 서리에게 농담으로 건넨 말이다. 다만 이게 실질적 유언은 아니다. 그 이후에도 말한 내용은 있는데 내용이 정확히 알려지지는 않았다.[96] 이황은 매화 사랑으로도 유명했는데 매화를 '매형(梅兄)', '매군(梅君)이라고 부를 정도였다.[97] 권율의 아버지. 40이 넘도록 벼슬살이를 하지 않던 아들 권율에게 이 말을 남기고 죽었는데 이 말에 권율이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벼슬길을 위한 행보를 시작했다고 한다.[98] 죽기 이틀 전에 남긴 말. 북쪽 변경으로 부임가는 서익을 만나려 했는데 가족들이 이를 말리자 한 말이다. 서익에게 <시무 6조>를 써 주고 이틀 뒤에 사망했다.[99] 북향사배를 끝내고 다시 전투에 임하면서.[100] 금산에서 1400여명의 의병으로 열 배의 적에 포위당했을 때 피신하라는 부하의 말에 대답.[101] 임진왜란 때 의병장.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수세에 몰리자 남강에 뛰어들어 자결했다. 왜병 두 명을 양팔에 끼고 강물에 뛰어들며 한 말. 이것은 선조수정실록의 기록이고 선조실록에서는 진주성 촉석루에서 분전하다가 이마에 탄환을 맞고 전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102] 숨이 끊어지기 직전 아들이 손가락에 피를 내어 그의 입에 넣어주자 한 말.[103] 1604년판 《징비록》의 기록이다.[104] 한국사에 있어서 가장 유명한 유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충무공행록》의 1712년과 1795년 판본에도 《징비록》 버전의 유언이 실려 있는데, 일각에서는 같은 책의 1643년 이전 판본에서 해당 유언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해 이순신의 유언이 후대에 임의로 붙여넣어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결국 《충무공행록》의 후대 판본에서 《징비록》을 인용한 것이라면 널리 알려진 유언의 출처는 《징비록》이 유일하며, 이 역시 류성룡이 당시 전황에 대한 정보를 제대로 접근할 수 없는 상태였으므로 믿을 수 없다는 논지이다. # 그러나 표에도 나와있듯 비슷한 내용의 유언이 《징비록》뿐만 아니라 17세기 당대의 문헌인 《동국신속삼강행실도》와 《승정원일기》에도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여전히 교차 검증이 되므로 이순신이 직접 남긴 유언이라는 사실이 최종적으로 확인된다.[105] 한편 여기서 한 번 더 와전되어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마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이 있는데, 이는 위인전의 창작이다. 불멸의 이순신에도 나와 유명해졌다. 상식적으로 적한테는 총사령관의 죽음을 당연히 알리지 말아야 하는 것이고, 잘 알다시피 여기서의 대상은 바로 아군이다. 전투 중 총사령관이 전사한 사실을 알면 병사들이 얼마나 사기가 떨어지고 당황하겠는가?[106] 1617년 편찬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기록이다.[107] 《승정원일기》 인조 9년(1631년) 4월 5일자 기사에 이원익이 이순신의 아들 이예로부터 전해들은 내용을 보고하는 대목에서 언급된다.[108] 사망 직전 자신을 그린 영정을 보고 한 말.[109] 죽기 직전 광해군에게 남긴 말. 그러나 그의 유언은 지켜지지 않았다. [110] 그는 죽을 때까지 자신이 반란(혹은 혁명)을 일으키려고 했다는 것을 부정했다.[111] 첫번째는 반정의 주모자인 이귀에게 처지를 하소연했으나 무시당하고 한탄에 차서 한 말. 당시 같이 참형당한 이위경이 아래처럼 반발했다고 전한다.[112] 두 번째는 이이첨의 유언으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이것을 이위경이 했다는 설도 있다.[113] 처형 직전 이이첨에게 반발하며 내지른 말. 그러나 이해득실에 따라 요리조리 편을 바꾼 이위경이 이렇게 몹몰이 할 자격이 있을지는….[114] 한음 이덕형과는 동명이인이다.[115]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인조반정 때 반정군에게 잡혀 왔는데 인조가 군사에게 그를 묶으라고 하자 저 말을 하면서 애걸 했지만 군사가 발로 그의 입을 차며 네가 그래도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가라고 말한 후 박홍도를 살해하였다.#[116] 광해군 때의 조도사로 인조반정 이후 처형되었다.#[117] 조선 인조 때의 무신. 이괄의 난 진압 때에도 활약했으나 정묘호란 때 안주성을 지키다가 성이 함락되자 화약에 불을 지르고 자결했다. 자결 직전에 남긴 말.[118] 김상용은 지독한 혐연가였으나, 강화도가 청군에 의해 함락되자 화약고에 불을 질러 자폭하기 위해 불씨를 찾았는데도 없자 거짓으로 담배를 피우겠다며 불씨를 달라고 한 말이다. 이것 때문에 후일 조정에서 김상용이 자살이 맞네 아니네 논란이 일었다...만 자살이 아니라고 생각한건 인조 뿐이었고 대다수 신하들은 자살이 맞다고 주장했다. 결국 김상용의 손자 등의 증언이 뒤따르자 자살로 인정했다.[119] 유언대로 광해군은 어머니 공빈 김씨의 무덤 밑에 묻혔다.[120] 자신을 산채로 5토막 내서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한 김자점에게 한 말. 이후 김자점은 효종 즉위 후 반역을 꾀하다 처형되었지만, 심기원처럼 처형되지는 않았다.[121] 허나 이 유언은 실로 어이없는 것이었다. 물론 당시에 남명이 죽지않고 남아있었다만 그 남명이 임경업이 죽기 불과 1년 전, 수도인 남경을 빼앗겨 시한부 신세가 되어버렸다.[122] 小叔, 당시 봉림대군. 즉, 효종. 혹은 인평대군으로 보는 설도 있다.[123] 인조, 효종조의 강직한 신료로 김자점을 맨 처음 탄핵한 사람이기도 했다. 민회빈 강씨의 죽음의 억울함을 지목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형신을 받고 죽었다. 심지어 구언의 기간이었는데도! 김홍욱은 조정의 신료들에게 말하는 자를 죽여놓고 무사한 나라가 있었소? 라면서 왕을 설득해줄 것을 청했으나 죽게 될 것이 자명해지자 평소때 성격이 살아나서 나오는 오자서의 유언을 본뜬 말을 남기고 죽었다. 참고로 영조비 정순왕후 김씨의 5대조이자 추사 김정희의 7대조.[124] 김자점은 효종의 눈밖에 나있었기에 신속히 제거되었으나 이시백은 영의정까지 올라가며 중용되었고, 귀인 조씨의 자녀들(숭선군, 낙선군, 효명옹주)도 조씨와 효명옹주의 남편 김세룡(김자점 손자)이 역모에 연루되어 사사되는 와중에도 효종의 지극한 보호를 받아 귀양만 갔다가 숭선군과 낙선군은 1656년, 효명옹주는 1658년 해배되었다. 효종의 뒤를 이은 현종과 숙종도 이들을 배려해주어서 다들 천수를 누렸다.[125] 어의 신가귀[126] 머리 위에 있던 종기를 어의 신가귀가 따서 피가 쏟아지자 한 말. 그러나 이 직후 과다출혈로 목숨을 잃었다.[127] 송시열의 전 친구이자 라이벌. 주자에 대한 해석을 두고 대립하여 송시열에 의해 사문난적으로 몰린 것으로 유명하다. 숙종 때 환국으로 인해 사약을 받았는데 사약을 받기 전 남긴 말.[128] 뒤주에 갇힌 지 7일째 되는 날 뒤주를 지키던 군사들이 세자가 살아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뒤주를 흔들자, 뒤주 속에서 세자가 한 말. 영화 사도에도 이 일이 재현되어 있다. 세자는 뒤주에 갇힌지 8일째에 사망했다고 발표되었는데, 실제로는 이날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129] 정조가 의식을 잃으며 되뇌었다는 말. 수정전은 당시 대비 정순왕후 김씨가 있던 곳이다. 정조 24년(1800) 6월 28일, "상이 무슨 분부가 있는 것 같아 자세히 들어보니 ‘수정전(壽靜殿)’ 세 자였는데 수정전은 왕대비(王大妃)가 거처하는 곳이다."란 기록이 있다. 독살설 떡밥과는 별개의 문제. 참고로 정순왕후 김씨는 정조가 승하하기 직전까지 정조의 병간호를 했다.[130] 정약용의 셋째 형. 이 말을 남기고 하늘을 바라본 채 참수형을 당했다.[131] 여기서부터는 그레고리력이다.[132] 정수동, 혹은 정만서로 알려진 조선 후기의 해학가. 죽기 직전 친구들이 그 기분을 묻자 이렇게 답했다고 하는데 그를 소개한 어떤 책에는 아내에게 질문으로 한 말인 "저승에서도 외상 술을 마실 수 있을까?" 라 소개되어 있다.[133] 폭탄으로 인한 암살 사건 당시 남긴 말. 운현궁은 당시 흥선대원군이 거주하던 곳이었다. 여러가지 정황으로 흥선대원군이 암살의 배후라는 설이 있으나 굳이 흥선대원군이 민승호를 죽여서 얻는 실익이 없다는 주장 또한 있다. 암살 사건의 범인과 배후는 결국 오리무중으로 남았다.[134] 홍영식의 아버지로,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이 말을 한 뒤 손자를 죽이고 자신도 자살했다.[135] 조선 말기의 대표적인 간신. 임오군란때 구식군인에게 처참히 난자당하기 직전에 흥선대원군을 보자 한 말.[136] 이후 순검이 휘두른 칼에 맞아 사망 혹은 고종이 불러들인 보부상들에 의해 정병하와 함께 구타, 사망하고 갈갈이 찢겨져 종로-광화문을 돌아다니게 된다.[137] 구한말 의병장으로 일본군에게 참패를 당한 후 폭우가 쏟아질 때 물에 빠져 순국하였다.[138] 대원군은 죽기 직전까지도 연신 고종을 찾았다고 한다. 하지만 고종은 끝내 부친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아 불효자란 오명을 쓰게 되었다.[139] 다만 이는 야사에서 나와서 신뢰성이 낮다.[140] 죽기 전 남긴 마지막 말. 안 의사의 인품을 잘 알고 있던 간수들은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도록 허락해주었다.[141] 가족들에게 남긴 실질적 유언. 안타깝게도 안 의사의 유해는 현재까지도 행방을 찾지 못한 상황이며 효창원에 있는 묘는 가묘이다.[142] 경술국치로 나라가 망하자 절명시를 남기고 아편덩어리를 삼켜 음독자살하였다. 아편을 삼킨 직후에 한 말.[143] 이위종의 아버지이자 외교관.[144] 이걸 들은 우치다 료헤이는 "뒷날 모든 것이 명백해질 것입니다. 오늘은 어리석은 자이지만 뒷날 반드시 현자가 될 것입니다." 이라고 말했다 한다.[145] 그래서 이상설의 시신은 불태워지고 재가 바다에 날려졌다.[146] 일본군에 의해 처형되기 직전에 남긴 최후 진술[147] 독립운동가로 신해혁명에 참가한 유일한 한국인.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중추적인 역할과 함께 쑨원의 국민당 정부로부터 정부 승인받도록 이끄는 데 커다란 활약을 했다.[148] 의열단 단원으로 1000명의 일본 경찰과 맞서싸우다 총알이 한 발밖에 남지않아 그 마지막 총알을 자신의 머리에 쏘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말.[149] 출처[150] 실제로는 아닐 가능성이 높다. 전해지기로는 순종은 이 유언을 이준구에게 남겼다고 하는데 이준구는 순종보다 한 달 정도 빨리 사망했다.[151] 사망 하루 전 병문안을 온 두 제자들에게 한 유언. 이 말을 하고 돌아누워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152] 도박으로 망하고 사망한다. 개명 전 동명이인인 이용구도 유사한 유언을 남김.[153] 일제의 방해로 지켜지지 않았다는 하나 성리학적 윤리가 남아있던 당시에는 시신을 해부하는 것이 금기로 여겨지던 터라 지켜지 않았을 수도 있다.[154] 그러나 그의 시신은 주변인들의 중론을 따라 국내로 들어와 안장되었다.하라고 한 사람은 못해주는데 하지 말라고 한 사람이 그렇게 됐다[155] 본래에는 "레몬 향기가 맡고 싶소"로 알려져 있었으나 후에 이상의 아내 변동림이 유언을 정정했다.[156] 독립운동가이자 외과의사로 안창호의 비서이자 제자이기도 했다.[157] 이 유언을 남기기 며칠 전에는 목인(睦仁)아! 목인아! 네놈이 큰 죄를 지었구나! 라고 외쳤다고 한다.[158] 한국의 장로교회 목사이자 순교자이다. 1907년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 7인 중의 한 사람이다. 한국인 최초의 목사가 되어 제주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1938년 일제의 신사참배(神社參拜)에 완강히 거부하며 호남지방 교회지도자들과 연대, 반대투쟁을 하다가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고 그 후유증으로 죽었다.[159] 독립운동가로 간도에서 교육 활동과 개신교 보급에 힘썼다. 제자들이 임종 직전 남길 말이 있냐는 말에 대한 질문. 김약연은 윤동주의 외숙부이기도 하다. 김약연은 간도 교육사업의 일환으로 명동학교를 세웠는데 윤동주, 문익환 등이 여기서 수학했다.[160] 평양 형무소에서 아내와의 마지막 면회 중 남긴 말.[161] 출처[162] 평생을 노름꾼이자 가문을 말아먹은 파락호인 척 하고 주변 사람들 몰래 임시정부에 독립군자금을 송금한 걸 사람들에게 알리자는 친구의 말에 한 대답이다. 자세한 사항은 해당 항목 참조.[163] 시편 51편 1절만 옮겨보면 이렇다. "하느님, 선한 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어지신 분이여, 내 죄를 없애주소서."[164] 이 때문에 수덕사에서 다비식을 진행하는 경우 사리를 수습하지 않는 것이 덕숭산 수덕사의 가풍이자 문도들이 지켜야 할 불문율이 되었다.[165] 백범일지의 후기에 쓴 글.[166] 독립운동가, 노동운동가, 교사, 정치인.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으로 사망하였다.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의 대표적 학살 가해자인 헌병 중위 심용현이 "어이, 이관술. 죽는 마당에 대한민국 만세 부를 수 없나?"고 조롱하자 이에 응수한 대답이다. 그리고 바로 학살되었기 때문에 실제로 조선민족 만세란 말은 부르지 못했다고 전해진다.[167] 이 문장은 편지를 쓸 당시 상황을 영화화한 포화 속으로 포스터에서 인용되었다.[168] 천주교 서울대교구 이문근 사도 요한 신부의 동생으로, 동성중학교에 재학하다 한국전쟁 발발로 학도병으로 입대하여 1950년 8월 10일 71명의 학도병만으로 인민군의 진격을 막은 포항여중 앞 전투에서 전사했다. 전사하기 직전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의 마지막 부분이다. 그리고 이 편지는 전해지지 못하고 사후 수습할 때 몸에서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169] 이 편지 부분은 당시 포항여중 전투를 영화화한 포화 속으로에서도 나온다. 극 중에서는 최승현(빅뱅의 T.O.P)이 쓴다. 근데 배역과 실제와는 나이와 학력 등 전혀 맞지 않는 아쉬움이 있다.[170] 이문근 신부는 여러 성가를 작곡한 작곡가이다. 이우근도 가톨릭계 동성중학교에 재학하는 천주교 신자였으며, 피난 와중에도 김대건 신부의 무덤이 있는 미리내 성지를 들렀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171] 석주명의 고향인 평안도 사투리는 구개음화가 일어나지 않아 'ㅈ'를 'ㄷ'로 발음한다.[172] '나비 박사'로 유명한 나비연구가. 한반도의 나비를 깊이 연구하고 모든 종류를 정리했다. 그러나 6.25 전쟁을 만나 그가 평생을 기울여 채집한 나비 75만 마리로 만들어진 표본들이 불타버리고 말았다. 서울이 수복되고 국립과학관 재건회의에 가던 중 늦다고 빨리 가다가 대낮에 총 매고 술 먹던 청년과 스쳤는데 부딪힘을 당한 청년이 술김에 미쳐버렸는지 석주명을 향해 "저기 인민군 소좌(장교)가 간다!"라고 하며 붙잡는다. 이에 석주명은 이와 같은 말을 남겼으나 술 먹은 청년들은 말을 무시하고 "평안도 사투리를 쓰는 장교다! 나비나 인민군들이나 똑같은 버러지들이지."하며 석주명을 총으로 쏴죽이고 히히 웃고는 거적에 말아 개천 옆에 유기했다. 결국 그의 해명이 유언이 되어버린 참으로 안타까운 죽음.[173] 자결하기 남긴 유서. 당시 아군의 인명피해도 엄청나서 소대원 중 70명이 전사하고 단 4명만 살아남은 모습에 큰 충격과 더불어 극심한 자책감을 느낀후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길을 택하고 말았다.[174] 6.25 전쟁때 경기도 장단지구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군인. 당시 소위계급으로 임관하여 경기도 북부 장단지구 방어 임무를 수행 중이던 해병 제1전투단 11중대 3소대장으로 지휘 하였으며 중공군이 2개 중대 병력을 동원해 포격을 앞세우며 33진지를 공격했다. 이때 그는 '나가자 해병대' 군가를 부르게 하는 등 대원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틀간의 전투 끝에 김 소위가 이끄는 3소대는 결국 중공군의 33진지 장악 시도를 성공적으로 무산시키고 병력 및 화력의 열세로 적이 끝내 진지에 난입하자 죽음을 무릅쓰고 아군에 진지 내 사격을 요청하는 등 사투를 벌인 끝에 중공군을 격멸하는 전과를 거뒀다.[175] 이 전공으로 인해서 중위로의 1계급 특진과 더불어 충무무공훈장을 추서했다. 국가보훈부에서는 2021년 4월 김 소위를 이달의 전쟁영웅으로 선정하였고 전쟁기념관에서는 2023년 11월의 호국인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176] 1956년 처형 직전 남긴 말.[177] 그러나 마지막 약속이자 유언은 이루어지지 않았는지 사망 이후 처와 두 아이는 소식이 없다.[178] 교수형 직전 남긴 말이다. 이 말에 간수들은 막걸리는 주지 않고 대신 담배는 허락하여 조봉암은 마지막으로 담배 한 개비를 피운 후 처형대로 올라갔다고 한다. 이승만 정권 하 대표적인 조작된 사건이자 사법살인. 자세한 내용은 진보당 사건을 참고.[179] 죽기 직전에 벼를 한번 보고 싶다고 제자들에게 말했고 제자들이 한국농업연구소에서 벼를 가져와 병상의 박사에게 쥐어주자 한 말. 왜 최후에 흔하디 흔한 벼를 보고 싶어했는지 의아해할 사람도 있을텐데, 당시 박사는 한 번 심어 두 번 거두는 이기작이 가능한 벼 품종을 개발하고 있었다. 쌀이 남아도는 지금과는 달리 당시에는 후에 통일벼까지 만들 정도로 먹고 사는 문제가 컸기 때문에 벼의 생산량이 중요했다. 벼의 이기작은 원산지에선 충분히 가능하지만 최소한 당시 한국 기후에선 겨울의 존재로 인해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지며, 2010년대에 들어 전라남도 등지에서 이 방법이 시범적으로 시행되고 있다. 하지만 역시 추위때문에 성과가 나지 않고 있다.[180] 1960년 4월 19일 데모를 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어머니에게 남긴 편지. 미아리 고개에서 총상을 입고 사망. 당시 한성여중 2학년.[181] 1960년 4월 19일, 경무대 앞에서 경찰의 발포로 중상을 입었지만 같이 총상을 당한 고등학생들에게 응급처치를 양보하고 사망했다. 당시 서울대학교 수학물리과 3학년.[182] 대표적으로 임화수.[183] 1961년 사형 집행 전에 남긴 말.[184] 옥중편지 중에서[185] 재일 한국인. 여고생을 강간 살해했다는 혐의로 학급 내 무기명 투표로 용의자로 지목되었다(당시 18세). 미성년자로서는 이례적으로 사형당했다.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2010년 12월 12일자 방송에서도 그를 다루었다.[186] 화랑세기의 저자로 유명한 떡밥왕. 아들에게 이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187] 점자책을 쌓아두면 책의 무게에 눌려 나중에 점자를 읽기 힘들어진다.[188] 한글점자인 훈맹정음의 창안자.[189] 아침에는 밥, 저녁에는 죽을 먹는 몸시 가난한 살림을 의미한다.[190] 심장마비로 사망하기 3개월전에 작성한 유서로 입궁할때부터 무려 60여년간이나 끝까지 믿고 의지했던 김명길 상궁에게 맡겼다. 그후 순정효황후가 승하하자 김명길 상궁은 해당 유서를 장례식때 낭독했고 이 유서가 1966년 2월 4일자 중앙일보에 공개됨에 따라서 세상에 알려졌다.[191] 북한에서 온 남파 간첩이 이승복 어린이에게 '남조선(남한)이 좋으냐, 북조선(북한)이 좋으냐'고 질문하자 이승복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했고, 격분한 공비들은 대검으로 이승복의 입을 찢어 살해했다.[192] 실제로 이 말을 했는지는 논란이 있다. 자세한 것은 이승복 항목 참조.[193] 수습 조종사로서 대한항공 F27기 납북 미수 사건때 납치범이 갖고 있던 점화 된 폭탄을 몸으로 막아 큰 부상을 입어 사망했다. 후에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으며, 일등 보국훈장을 받았다.[194] 이 말은 모친 이소선 여사를 평생 노동운동가로 활동하게 만든 유언이 된다. 이 여사는 이 이야기를 듣고 "내 몸이 가루가 되어도 네가 원하는 거 끝까지 할 거다!" 라고 오열하며 대답했다고 한다.[195] 처음은 분신을 하면서 외친 말, 2번째는 분신 이후 쓰러지면서 남긴 말이고, 마지막 둘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남긴 말이다. 배고프다는 말 그대로 전태일은 분신을 감행하던 날 이틀 전에 라면 하나 먹은 이후로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고 한다.[196] 유한중학교는 중학교가 있으면 좋겠다는 지역 주민들의 희망사항 때문에 설립되었다가 점차 중학교가 늘어나면서 1978년에 폐교되고 대신 유한공업전문학교가 설립되어 지금의 유한대학교로 이어지고 있다. 유한공업고등학교는 지금도 건재.[197] 그런데 놀라운 점으로, 유일링의 아버지이자 유일한의 아들인 유일선은 그 1만 달러조차 안 받으려고 했다! (유일링은 당시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유일선이 그 1만 달러의 실질적 상속자였다.) 마지못해 받긴 했으나, 반만 쓰고 남은 돈은 사회에 돌려주었다. 그리고 이 유언에 따라 유일한 박사의 전 재산은 유한양행에서 설립한 재단에 증여되었으며, 유일한 박사의 딸 유재라 여사도 유언을 그대로 이행한 것을 넘어 1991년 타계하면서 아버지의 길을 따라 자신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였다.[198] 이 내용은 실질적으로 공개된 유언이고, 사망 2일 전인 1973년 11월 20일 장남인 김상문 전 삼천리자전거 대표(당시 기아산업 부사장)에게 한 말은 다음과 같다. "나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맨주먹으로 사업을 시작해 오늘의 기아산업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도 생각해보면 모두가 나라의 덕이다. 나라가 독립되고 국력이 신장하지 않으면 아무 사업도 할 수 없다. 부강한 조국을 건설하는 데 힘이 되기 바란다. 기업하는 사람들에게는 기업윤리라는 것이 있어야 한다. 종업원들은 남이 아니라 내 식구요, 동기간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항상 따뜻하게 보살피는 데 정성을 다하여라. 우리 회사에는 고생을 많이 한 임원들이 있다. 애비를 대하듯 그분들을 잘 모셔야 한다."[199]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자동차 회사인 기아자동차와 국내 최대의 자전거 제조사인 삼천리자전거의 창업주. 박정희가 주도해서 일으킨 5.16 군사정변 후, 부정축재자들에게 막대한 벌금을 물게 했을 당시 기아도 5천만원이라는 엄청난 벌금을 물었음에도 불구하고도 새마을운동에 적극 참여할 것을 지시했다. 평생을 기술자로 살아온 인물의 유언이었다.[200] 참고로 출생년도가 서적마다 다르다. 1905년이라 기록한 책도 있고 1906년이라 기록한 책도 있다. 일단 여기서는 1905년이라 기록했다.[201] 당시 합창단원으로서 광복절 기념식에 참가했던, 성동여자실업고등학교 2학년생 장봉화(1957-1974) 양.[202] 실제 진술은 일본어로 했다.[203] 실제로 그가 범인이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발견되지 않아 뻔뻔하게 잡아떼기보단 진짜 억울해서 남긴 말일 수도 있다.[204] 김재규에게 총을 맞고 주변에서 "각하! 괜찮으십니까!"라고 묻자 이 말을 했다고 한다. 흔히 박정희의 마지막 말로 알려져 있다.[205] 총격을 당하기 직전에 한 말.[206] 김재규의 부하이자 10.26 사건의 가담자. 군사재판으로 1심 사형 확정후 집행장에서 최후진술[207] 하지만 그의 유언과는 다르게 그의 최후진술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10.26 사건과 관련한 다른 진술들과 기록들이 있으며 이에 대한 해석이 다르고, 10.26 사건의 원인이 아직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208] 김재규의 최후진술을 듣고 싶은 이는https://www.youtube.com/watch?v=ftjlJ-kt_Dw&t=685s 이곳에서 들으면 된다.[209] 1980년 5월 26일 외신기자들과의 회견에서.[210] 박경석에게 남겼다는 말.[211]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전남대 총학생회장으로 민주화운동에 헌신했으며, 5.18 민주화운동이 끝난 뒤에 지명 수배되었다가 1982년 4월에 체포되었다. 이후 광주교도소에서 5.18 진상규명과 교도소 재소자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옥중 단식투쟁을 하다가 사망하였다.[212] 이 말을 형에게 하고 동창회에 나갔는데,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로 사망하면서 결국 이 말이 유언이 되었다.[213] 88년도에 일어난 지강헌 일당 인질 탈주극 사건에서 지강헌이 했던말. 그 후에 비 지스의 홀리데이를 틀어달라고 하고서 그 음악을 들으며 그 후 유리파편을 목에 찔러 자살을 시도하다 경찰특공대의 총에 맞아 병원으로 이송되어 치료를 받던 도중 사망했다. 이 사건을 자세히 다룬 홀리데이라는 영화를 참고할 것. 다만, 영화다운 허구도 섞여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214] 1989년 2월 3일 서울 남대문의 한 6층 빌딩 옥상에 올라가서 투신하기전에 쓴 글로 이 유서를 바지 주머니에 넣은 채 뛰어내렸다.[215] 대한민국의 권투선수로 전 WBC 라이트 플라이급의 챔피언. 소매치기에서 세계챔피언으로 성공했으나 은퇴후에는 사업실패등의 굴곡진 삶을 살아가다가 투신자살로 생애를 마감했다.[216] 사실 글 자체는 1983년 이전에 쓴 것으로 추정된다. 1983년에 KBS 뉴스파노라마 취재팀이 낙선재를 찾아 낙서에 가까운 친필 메모를 공개하면서 세상에 알려진 것이기 때문.[217] 그는 끝까지 폭행치사를 주장하고 실제로 논란이 많았지만 끝내 사형이 집행되자 이렇게 말했다. 해당 보안과장은 그날 잠을 못 이뤘다 한다.[218] 그러나 김정일은 우상숭배를 위해 유언을 무시하고 아버지를 엠버밍해서 주석궁에 박제했다. 김일성의 빨치산 출신 동지들이 수령의 유언을 지켜줄 것에 대한 공동명의로 된 제의서를 김정일에게 바쳤지만 묵살되고 말았다. 유언이 무시당하는 것은 한국사 태조들의 전통 게다가 김정일 본인은 아예 자신을 박제하게 했다.[219] 11월 19일 성공적으로 지상파 라이브 공연을 끝낸 다음 어머니에게 한 말. 저 말을 하고 난 뒤 다음 날 김성재는 의문사로 생을 마감했다.[220] 라이브를 마치고 대기실에 들어가기 직전에 팬들에게 말한 마지막 메시지. 결국에는 이것이 바로 그의 생전 마지막 인터뷰가 되고 말았다.[221] 사망 7시간 전 마지막으로 출연한 '박상원의 겨울나기'에서 부른 노래의 마지막 가사.[222] 시신 화장은 이루어졌으나 화장시설에 관한 사항은 님비현상과 대기업이 장묘사업에 나서냐는 등의 부정적 여론으로 답보 상태였다가 세종특별자치시 은하수공원에 화장터를 지어 기증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223] 2000년은 20세기에 속하며 21세기는 2001년부터이다.[224] 2000년 6월 10일 감기몸살로 입원, 걱정하는 팬들을 위해 사망 3일 전 음성사서함을 통해 남긴 말로 사실상 유언이 되었다. 놀란 팬들의 마음을 위로해주기 위해 평소 김환성이 팬들에게 자주 말하던 말투와 내용으로 음성메시지를 남겼다고 한다. 이 메시지를 남기고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상태가 악화되어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3일 후 사망했다.[225] 이 날은 또한 6.15 남북공동선언이 진행되고 있던 날이었다.[226] 사지절단수술을 마치고 일반병실로 옮긴 뒤 모친에게 남긴 유언. 얼마 안가 다시 상태가 악화되어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결국 9월 20일 해전 발생 3개월만에 순국했다.[227] 대구 지하철 참사 사고 발생 7분 전(오전 9시 46분) 예비 신부 송혜정 씨가 예비 신랑 이호용 씨에게 보낸 문자메시지.[DG] A B C D E F G H I J 대구 지하철 참사 희생자.[228] 대구 지하철 참사 3분 전 오전 9시 50분, 서동민씨가 선배 송두수 씨에게 한 통화기록 중.[229] 대구 지하철 사고 발생 4분 전(오전 9시 49분) 김인옥 씨가 남편 이홍원 씨에게 한 통화기록 중.[230] 개신교 모임 강사 허현 씨가 강사 강지현 씨에게.[231] 오전 9시 54분(사고 발생 1분 후), 대학생 딸이 어머니 김귀순 씨에게 한 통화기록 중.[232] 오전 9시 58분(대구 지하철 사고 발생 5분 후), 어머니에게.[233] 부인에게 한 마지막 말.[234] 장계순 씨와 딸 이선영 씨의 마지막 휴대전화 통화 내용.[235] 노모 황점자 씨에게. 이날 그는 직장을 얻으러 가는 중이었다.[236] 아들에게 남긴 말.[237] 청소년 동성애자이고 천주교 신자이다. 이 내용은 유서 중 일부분.[238] 전자는 김윤규 현대아산 사장에게, 후자는 가족에게 쓴 글이다.[239] 현대그룹 계동 사옥에서 투신하기 전에 쓴 글.[240] 스스로 목숨을 끊기 한달 전 구치소에서 부인에게 보낸 서신이다.[241] 죽으면서 자신이 운영하던 마작 하우스 벽에 남긴 글.[242] 실제 진술은 영어로 했다. 항목 참조[243]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의 전신인 유일신과 성전에게 납치되어 피살된 한국인 희생자.[244] 아내가 차려준 장어 덮밥을 먹으며 마지막으로 남긴 말.[245] 사망하기 하루 전 자신의 미니홈피에 남긴 글이다.[246] 네이버 지식iN 자살 사건의 사망자. 이 글은 자살 당일 블로그에 올린 인성검사라는 제목의 마지막 글이다.[247] 기사원문[248] 고인이 부모에게 2006년 9월 29일 보낸 편지 내용의 일부. 안타깝게도 이 편지를 보낸 지 1년도 채 안되어서 고인이 되었다.[249] 고인의 미니홈피 상단의 마지막 자기소개문구.[250] 유서를 찾을 수 없어서 이 둘로 대체함.[251] 탈레반 연관 무장테러단체의 자폭테러에 휘말린 한국 군인. 2006년 9월에 다산부대 8진 소속으로 통역병으로 아프가니스탄에 파병, 2007년 2월 27일 바그람 기지에서 자살폭탄테러로 인해 전사하였다. 향년 27세. 통역병인 터라 현지인 기술교육 통역을 위해 기지 정문 앞에 나가 있던 중에 변을 당했다. 미군 1명과 현지인 20명 등이 사망한 테러였다. 사망 당시 병장 계급이었고 사후 하사 추서.[252] 해당 발언은 유언의 일부이다. 전체를 보고 싶다면 항목 참조[253] 사고나기 몇달전 미니홈피에 남긴글.[254] 사저의 컴퓨터에 저장돼 있던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의 고통이 너무 크다" 란 이름의 HWP 파일의 내용.[255] 경호원과 함께 부엉이바위 위에 서서 봉하마을을 내려다보다 경호원에게 '담배 있나?'라고 물었고, 경호원이 '없습니다. 구해 올까요?'라고 답하자 '됐다. 그럴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어 노 대통령이 마을 쪽을 가리키며 '저기 사람이 지나가네'라 말해 경호원의 시선을 그쪽으로 돌리게 했고, 그 순간 바위 아래로 투신해 사망했다.[256] 일기장의 마지막 문구.[257] 탤런트 이광기의 둘째 아들. 사망 이틀 전 신종플루 판정을 받고 상태가 나아지지 않자 대학병원 중환자실로 옮겼는데, 인공호흡기를 끼고도 이광기와 정상적으로 소통을 했다고 한다. 대화 내용은 그저 퇴원하면 장난감을 사준다는, 흔히 부자가 나누는 대화를 했다고. 얼마 안 가 곧 의식을 잃었고, 의사들이 심폐소생술을 하려했지만 이광기가 석규 군의 얼굴이 너무나 평안해 보여서 편하게 보내주기 위해 그만하라고 했다고 한다. 글로는 저리 적었지만, 심폐소생술은 한 시간 동안 이루어졌다. 아마, 아버지로서 마지막만큼은 편히 보내고 싶은 심정에 나온 말로 보인다.[258] 자살 직전 노트에 남긴 메모. 이외에 별다른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다.기사 참조[259] 사망 직전에 남겼다는 말로서, 특이하게 영어로 유언을 남겼다. 의미는 "모든 일은 잘 될 것이다."혹은 "모든 것이 다 좋다.", "다 괜찮다."로 해석된다. 이 유언을 끝으로 손을 들어 모여있던 살레시오회 수도자들에게 강복을 준 후 사망했다.[260] 사망 전날 남긴 말. 유언장에는 '절대로 다비식 같은 것을 하지 말라. 이 몸뚱아리 하나를 처리하기 위해 소중한 나무들을 베지 말라. 내가 죽으면 강원도 오두막 앞에 내가 늘 좌선하던 커다란 넙적바위가 있으니 남아 있는 땔감 가져다가 그 위에 얹어 놓고 화장해 달라. 수의는 절대 만들지 말고, 내가 입던 옷을 입혀서 태워 달라. 그리고 타고 남은 재는 봄마다 나에게 아름다운 꽃공양을 바치던 오두막 뜰의 철쭉나무 아래 뿌려달라. 그것이 내가 꽃에게 보답하는 길이다. 어떤 거창한 의식도 하지 말고,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지 말라.' 고 쓰여있다.[261] 천안함 피격 사건 구조작전 중 순직자[262] 부인에게 남겼다고 하는 말.[263] 사망 며칠 전, 중환자실에서 수첩에 이 말을 적었다. 출처[264] 연평도 포격전 전날 싸이월드에 쓴 글[265] 1964년 영화 《맨발의 청춘》의 조연으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던 배우이다.[266] 시나리오 작가이자 영화감독. 2006년 영화 <격정 소나타> 제작 이후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다가 이웃집 문 앞에 이 말을 쓴 쪽지를 놓았는데, 이를 본 이웃사람이 최씨의 집을 찾아갔지만 최씨는 이미 숨져 있었다. 사망 전에 췌장염과 갑상선 항진증을 앓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건으로 국내의 복지 수준과 민생의 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국민들의 분노를 일으켰다. 드라마의 제왕의 등장인물 이고은은 이 최고은 작가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267] 아시아나항공 991편 추락 사고 당시 부기장.[268] 가족들은 그가 의식을 잃을 때마다 야구공을 손에 쥐어줬는데, 혼수상태에 빠진 상태에서도 운명하는 순간까지 손에서 야구공을 꼭 쥐고 있었다고 한다.[269] 그의 아들이 KCTC에 참여한 동영상도 존재한다.참조[270] 한국 등산가로 8천미터 14좌 산을 최단시간으로 등정하고 북극과 남극도 등정하여 세계 최초 탐험가 그랜드슬램으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그러나 2011년 10월 20일 안나푸르나를 새로운 등정로로 올라가서 그 날 마지막으로 실종되어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기에 사망날짜가 정확하지 않다. [271] 그러나 이 유언 중 이루어진 것은 시신 영구보존을 제외하고는 단 하나도 없다. 미국한테 기싸움에서 눌려 빌빌 기고 있으며, 중국은 이미 북한을 이용해 먹었다. 또한, 김정남과 관련된 것은 전부가 간단히 씹혀버렸다. 그리고 김정남은 김정일이 사망한 지 6년 후 살해당했다.[272] 메이플스토리 [273] 2011년 대구 중학생 집단괴롭힘 자살사건의 피해자.[274] 한국계 첫 백악관 차관보이자 한국인 최초 시각장애인 박사.[275] 서울 신촌 대학생 살인사건의 피해자. 살해당하기 직전 카카오톡으로 친구에게 날린 메시지. 이걸 남기고 곧바로 연락이 두절되고 살해당했다.[276] KT 롤스터 소속의 게이머, 향년 만 23세. 사망 직전 어머님에게 남긴 말이라고 한다. 포모스에서 25세라고 한 것은 출생년도인 1988년을 1살로 보았기 때문.[277] 문맥상 '법적 분쟁을 피하기 위해'.[278] 임윤택이 아내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라고 한다. 당시 일어나지도 못할 몸상태였지만 아내를 불러 있는 힘껏 안아주며 말했다고. 본인의 어머니에게는 "엄마" 라고 한마디 하며 돈봉투를 건네드렸다고 한다.[279] 마포대교에서 투신하기 전 남긴 말이라고 한다.[280] 투신하기 전 트위터에 올린 글.[281] 푸른늑대회(당시에는 남성연대)의 대표였다.[282] 투신 2시간 전 페이스북에 올린 게시글.[283] 자살하기 직전에 자신의 승용차에서 작성한 유서.[284] 2013년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킨 육군 15사단 노승원 소령 성추행 사건의 피해자로 약혼자까지 있는 상태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하였다. 최종계급은 대위.[SE] A B C D E F G H I J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희생자.[285] 실제 유언은 아니고 마지막으로 루리웹에 올린 게시글. 사고 당일인 4월 16일에는 생사불명이었으나, 4월 20일 새벽, 결국 사망한 것이 확인되어 고인을 기리는 글로 가득 들어찼다.[286] 세월호 사고 1일 전이자 세월호 출항 날이었던 4월 15일은 현탁 학생의 생일이었다. 당시 현탁 학생은 자신의 주민등록증이 이제 나온다면서 뽐뿌 사이트에 글을 올렸다.링크[287] 사고 당일에는 생존자 확인조차 서두르는 중이라 생사불명으로 확인했으나, 사고로부터 2주 후인 5월 1일, 결국 사망한 것이 확인되어 고인을 기리는 글로 차올랐다.[288] 최성호 군이 마지막으로 자신의 트위터에 업로드한 글이며, 이 글 이후로 지금까지 아무런 트윗이 올라오지 않고 있다. 역시 사고 당일에는 생사불명이었으며, 4일 뒤인 4월 20일, 결국 사망한 것이 확인되어 고인을 기리는 글로 가득 차올랐다.[289] 사망 당시 향년 43세였으며 끝내 세월호에서 나오지 못하다가 2017년 5월 시신으로 발견되었다.[290] 사고직후 어머니와의 통화중.[291] 침몰하는 상황 가운데에서 보낸 남자친구와의 마지막 문자.[292] 사망 당시 25세였으며 기간제 교사인 이지혜 국어교사와 함께 아이들을 구하고 5월 19일에 발견되었다.[293] 마지막으로 며느리와 한 통화라고 한다.[294] 당시 세월호 사무장.[295] 사망 4일 전 트위터에 남긴 멘션.[296]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신해철이 의식을 잃기 직전의 말. 신해철의 매니저가 언급한 말로 이 말이 결국 사실상 유언이 돼버렸다.[297] 2014년 10월 의료사고로 사망. 유서 자체는 그가 생전에 썼던 유언장에 적힌 내용이다.[298] 장남의 결혼이 이듬해 3월에 예정되어 있었다. 죽기 전 아들의 결혼을 매우 기대했고, 며느리가 될 사람도 매우 마음에 들어해 주변에 자랑했었다는 지인들의 말이 있었다.[299] 이 부산시장이 당시 현임이던 서병수인지, 전임 허남식인지는 끝내 미제로 남았다.[300] 암 투병 중이었던 그의, 딸인 오소영 씨가 성우 갤러리에 글을 올리면서 그의 말을 대신해서 전했다. #[301] 죽기 전 차남 김현철 씨에게 필담으로 남긴 유언이다. 글을 넘기기 전에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 이라는 말을 남겼고, 이 글을 쓴 이후 건강이 악화되어 아무런 말과 글도 남기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302] 죽기 직전에 한 말은 아니고, 사망 전날, 6년간 집필해온 자서전의 원고 작업을 끝내고 사무실에서 나오면서 한 말이다.[303]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당시 시신을 수습한 민간 잠수사이다.[304] 박근혜 정부의 민정수석이었으나, 비서실장이었던 김기춘과의 갈등으로, 민정수석자리에서 내려왔다. 그 후 과음으로 간이 안 좋아져서 사망하였다. [305] 원문은 영어이다. (Very painful, very painful, I was sprayed liquid.)[306] 김일성의 장손이자, 김정일의 장남이다.[307] 맞춤법대로 수정하면 '긴급상황입니다. 본선 2번 포트에 물이 새고 있습니다. 포트 쪽으로 빠르게 기울고 있습니다.[308] 침몰사고 직후 선장이 선사 당직자에게 보낸 마지막 카카오톡 문자[309] 스스로 목숨을 끊기 9일 전 디어클라우드의 보컬 나인에게 유서를 전달했으며, 자신이 사망한 뒤에 공개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310] 실제 유서는 따로 존재하지만, 미공개 상태이다.[311] 자신의 행위를 후배를 위한 것이었다고 포장하며 잘못을 회피하는 듯한 내용을 보아 알 수 있듯이, 이 편지는 사망 직전은 아니고 2018. 2. 27의 공식 사과 입장을 밝히기 전인 26일에 보냈던 것으로 되어 있다. 네티즌의 여론은 반반이지만 대체로는 애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피해자들에게 제대로 된 사죄도 없이 이기적이고 비겁한 선택을 했으며 죄없는 피해자들에게 죄책감을 심기까지 했기 때문. 그외에도 언론의 과도한 여론몰이에 대해 성토하는 의견이 존재한다.[312] 임종 한시간 전에 가족들에게 한 말이다.[313] 대한민국의 한복 디자이너 겸 의상 예술가로 41살이던 1977년에 ‘이영희 한국의상’ 간판을 내걸어 뒤늦은 나이로 의상 디자인 일을 시작했고 47살에는 성신여대 대학원에서 염직공예학을 공부하여 한복의 대중화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사망후 국립서울현충원 사회공헌자 묘역에 안장되었다.[314] 자신의 외동딸인 예리 씨에게.[315] 투신 직전 자신의 수행 비서에게 마지막 격려를 한 마지막 말이다.[316] 유서에는 '어떤 청탁도 없었고 대가를 약속한 바도 없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다수 회원들의 자발적 모금이었기에 마땅히 정상적인 후원절차를 밟아야 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누굴 원망하랴. 참으로 어리석은 선택이었으며 부끄러운 판단이었다. 책임을 져야 한다. 무엇보다 어렵게 여기까지 온 당의 앞길에 큰 누를 끼쳤다. 이정미 대표와 사랑하는 당원들 앞에 얼굴을 들 수 없다. 정의당과 나를 아껴주신 많은 분들께도 죄송할 따름이다. 잘못이 크고 책임이 무겁다. 법정형으로도 당의 징계로도 부족하다. 사랑하는 당원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한다. 나는 여기서 멈추지만 당은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국민 여러분! 죄송합니다. 모든 허물은 제 탓이니 저를 벌하여 주시고, 정의당은 계속 아껴주시길 당부드립니다.'라고 썼다.[317] 정의당의 원내대표[318] 범인 김성수에게 기습당하기 1시간 전에 여자친구에게 보낸 카카오톡 메시지 내용.[319] #[320] #[321] 사망 6일 전 SNS에 마지막으로 남긴 글.[322] # 사망 직전 자신과 같은 사이클 선수를 희망하던 조카에게 남긴 유언.[323] 후배 성우 정재헌에게 보낸 생전 마지막 문자 메시지 내용. 이 문자를 보내고 난 뒤 심장마비로 급사하였다.[324] 박근혜의 동생인 박지만과 전인범의 육군사관학교 동기로 중장 예편.[325] 학생 본인은 현자의 손자를 읽고 있었다가 교사의 오해로 인해 얼차려를 받고 투신자살했다고 한다. 항목 참조[326] 이 유언은 지켜지지 않았다. 한진 그룹의 회장연임을 계속해서 희망하는 외아들 조원태가 사업에 다시한번 관여하려는 누나 조현아에게 으르렁 대기 시작했고 누나의 편을 들어준 여동생 에밀리 리 조에게까지 경영권 싸움을 시작하는 등 3남매가 졸지에 원수지간이 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뿐만 아니라 조원태는 이 문제로 인해서 어머니인 이명희 이사장의 집에서 꽃병을 깨뜨리고 난동까지 부린 것은 덤.[327] 하지만 차남 김홍업과 삼남 김홍걸이 동교동 사저와 노벨평화상 기금 상속/소유 문제로 다투고 있어 그녀의 유언은 지켜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김홍걸이 동교동 사저 부지를 국유화하겠다고 하면서 갈등이 깊어질 것으로 보이나 김홍걸이 더불어민주당에서 제명되면서 동교동 사저 부지 국유화는 무산되었다. 2021년 6월 9일 이희호의 2주기 전날에 김홍업과 김홍걸은 동교동 사저에서 만나서 극적인 화해를 했고 유언대로 동교동 사저를 대통령 사저 기념관으로 쓰기로 합의했다.[328] 문재인 대통령의 모친. 문재인이 트위터 계정에 남긴 글에서 유언 내용이 대략적으로 공개되었다.[329] 무지개 원리로 유명했던 가톨릭 사제.[330] 눈[雪\]의 결정 이모지[331] 실족사 하루 전 인스타그램에 올린 글.[332] 자살하기 하루 전인 2019년 11월 23일, 인스타그램에 올린 글.[333] 원주 아파트 일가족 살인사건의 피해자. 사망 몇 시간 전 유튜브에 업로드한 영상의 더보기란 내용이다.[334] 원문에 '되'요라고 써 있다.[335] 이후 올라온 자살기도문은 삭제되었으며, 사망 이전 트위터에 업로드된 해당 트윗이 마지막 트윗이다.[336] 장녀가 전한 두 가지 내용[337] 개인 컴퓨터에서 발견된 유서 전문[338] 입원 중 올린 마지막 트윗 내용. 트윗을 올린 지 3일만에 병세가 악화되어 사망하였다.[339] 9월 1일 인스타그램에 올린 유서 내용.[340] 여행에 미치다 대표[341] 심근경색으로 사망하기 3일 전 유튜브에 남긴 마지막 말과 자막.[342] 국내 최고령 현역의사.[343] 생전 유튜브 마지막 영상.[344] 생전 투병 중 마지막으로 쓴 글귀.[345] 2021년 4월 14일 마지막으로 올린 인스타그램 게시물의 글이다.[346] 야구선수 임찬규의 아버지[347] 림프종으로 투병하던 중 마지막으로 투고한 인스타그램 포스팅 내용이다.[348] 대한민국 예비역 해군 대령이자 최재형 국회의원(서울 종로구)의 부친.[349] 구조대가 전화기 배터리가 충분한지, 몸은 괜찮은지 물어본 것에 대한 답변. 남도일보[350] 사망 전 올라온 마지막 영상에서 박민규가 복불복에 걸려 강제 귀가하게 되자 한 말. 이 말이 영상 속 그의 마지막 말이다.[351] 더블비의 매니저 겸 카메라맨.[352] 정확한 나이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1994년생인 더블비 멤버인 장명준, 박민규에게 형님이라 부르고 진국이네 멤버인 1997년생 신일국, 1998년생 오진영이 형이라고 부르는 걸로 보아 김준성(자비스)는 1995~1996년생으로 보인다.[353] 생전 발간했던 회고록에 남긴 유서 내용. 회고록 이외에도 화장을 바란다는 의사를 표시한 적 있다. 최측근이 가장 최근에 만났을 때는 특별히 전한 말은 없었다고.[354] 사망 6일 전 남긴 그의 마지막 게시글.[355] 30년 지기 절친이었던 윤효상에게 남겼던 말.[356] 자살 직전에 휴대전화로 어머니에게 남긴 문자 메시지.[357] 호원 초등학교 학부모 갑질사건의 피해자로써 자살로 생애를 마감했다. 의정부 호원초 패트병 사건으로도 더 잘 알려져 있는데 최근 2023년에 발생한 서이초등학교 교사 자살 사건으로 인해서 전 국민의 공분을 사고 있는 가운데 2년전인 2021년 하반기에 경기도 의정부시의 호원 초등학교에서 교사 2명이 잇따라 극단적 선택을 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해당 사건이 재조명 되고있다.[358] 사망 추정일로부터 3일 전인 2022년 1월 21일의 방송 마무리 중.[359] 심규선의 노래 부디의 가사이다.[360] 사망하기 이틀전인 2022년 4월 28일에 SNS에 올린 글.[361] 대한민국의 발레리나로써 신장 157cm라는 단신을 극복하고 세계발레 계의 정상이 되었으나 2022년 3월 말부터 병가를 낸후 우울증으로 자살을 암시하는 글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362] 사망 6일 전 병상에서 스스로 남긴 마지막 유튜브 영상.[363] 2022년 5월 15일 방영된 전국 노래자랑(충남 당진시 스페셜로 스튜디오 녹화로 대체)에서 한 클로징 멘트이며, 그의 생애 마지막 멘트가 되었다.[364] 본 주소는 김옥길기념관으로 되어있으며, 도로명주소는 서울 서대문구 연대동문길 47-6 으로 되어있다.[365] 2011년 10월 2일, 당시 이철 세브란스병원 의료원장에게 보낸 편지.[366] 2011년 11월 21일, 위의 편지를 보내고 시신 기증인 유언서를 정식으로 작성할 때 '남기고 싶은 말씀'란에 적은 내용.[367] 사망 전 마지막 페이스북.[368] 병세가 악화하자 병상에서 유언처럼 남겼다.[369] 사고 14분 후 부인과의 통화 중.[370] 제2경인고속도로 갈현고가교 화재사고 희생자.[371] 2022년 11월 10일 '학교에서 친구와 부딪혀서 트러블이 생겼는데, 어떻게 현명하게 해결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마지막으로 남긴 네이버 지식iN 답변.[372] 엄마에게 마지막으로 남겼던 메시지 내용. 그러나 14분 후, 영영 돌아오지 못할 길을 건너고야 말았다.[373] 투신 직전의 라이브 방송에서 마지막으로 남긴 말.[374] 2023년 4월 11일 멤버 공용 트위터에 마지막으로 남긴 글이다. #[375] 민주노총 전국건설노동조합 강원건설지부 3지대장.[376] 어린이날 연휴에 고열로 응급실을 전전하다가 골든 타임을 놓쳐 숨진 만 4세 아이의 마지막 말. 이 말을 마지막으로 아이는 의식을 잃고 쓰러졌으며 병원에 도착한지 40여 분 만에 끝내 숨졌다.[377] 평소 연명치료를 거부하다가 사망하기 하루전에 부인에게 한 말.[378] 법조인이자 삼윤장학재단 이사장. 1963년 제 1회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13년간 판사로 재직했으며 시각장애를 겪던 큰 딸의 시력 치료를 위해 1978년에 변호사로 전직했다. 그후 1995년 삼풍백화점 참사당시 세딸을 모두 사고로 잃고 그 보상금으로 세 딸들의 이름을 딴 장학재단을 설립했다.[379] 2023년 3월 23일 인스타그램에 마지막으로 남긴 글.[380] 사망 당일 아내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381] 장례 후 장남의 감사 인사를 통해 밝혀진 사망하기 얼마 전 아내에게 했던 말이다.[382] 서울아산병원 심장혈관흉부외과 교수.[383] 이후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화장실 욕조에서 자살 시도를 했다. 29초 후 세면대 위에 세워져있던 스마트폰 잠금 화면에서 가로 대칭 화면으로 (6월 11일 밤) 10시 28분이 떴고, 23~24분이 지난 후 임블리의 지인과 구급 대원이 도착하고 유튜브 실시간 방송이 꺼졌다. 다음 날인 6월 12일부터 뇌사 소문이 퍼졌고(뇌사에 가까웠다는 말도 있었다.), 6월 18일 사망했다. [384] 임블리 사망 생중계 사건에서 마지막으로 남긴 말과 유서.[385] 사망 전 유튜브 커뮤니티에 남긴 글. 현재는 자살을 조장하는 글 신고로 삭제된 것으로 추정된다.[386] 사망 일주일 전 본인의 인스타그램에 남긴 마지막 글의 메시지로 유족들에 의해서 2023년 6월 26일 공개되었다.[387] 2023년 5월 30일 인스타그램에 마지막으로 남긴 글.[388] 해당 기사에서 24세의 여성인 안 모씨로 확인이 되었는데 첫 휴가를 나왔다가 변을 당했고 사고 이틀날 결국 숨진채로 발견되었다.[389] 사망하기 이틀 전에 집에서 어머니에게 하소연으로 했던 말. 해당 기사[390] 코스트코 하남점에서 발생한 온열질환 사고로 29세로 사망했다. 하지만 유족들은 코스트코 측으로부터 적반하장으로 병을 숨기고 입사했느냐는 등의 막말과 모욕을 들어야만 했다.[391] 연세대학교 응용통계학과 명예교수이자 윤석열 대통령의 부친.[392] 9월 9일 마지막 유튜브 라이브 도중 한말.[393] 사망하기 하루전에 지인들과 저녁을 먹으면서 남긴 말.[394] 난소암 판정을 받고나서 본인의 투병생활기를 올린 유투버 암환자 뽀삐의 운영자. 이 라이브를 마치고 7일후 운명을 달리했다. 그녀와 친한 유투버인 김쎄오는 사망하기 하루전날인 9월 15일 저녁에도 짜장면과 탕수육을 먹고나서 시청자 및 구독자들과 가족, 친구들에게 사랑한다는 인사를 남기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농담도 잊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9월 16일 새벽 2시 50분에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고 밝혔다.[395] 사망 당일 유튜브 채널에 올린 유서 영상 내용. 10월 11일 Youtube 약관에 의하여 삭제됐다.[396] 2023년 9월 마지막 항암치료를 받기전에 올린 영상. 하지만 이 영상이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397] 대한민국의 패션 사업가 겸 유투버. 2023년봄에 골육종 진단을 받고 투병하다가 건강 악화로 눈을 감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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