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영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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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조선 중기의 문관이며 탁소북의 영수.정종의 4남인 선성군의 외5대손이다.[3]
2. 생애[편집]
1550년 종9품 참봉을 지낸 아버지 류의(柳儀)와 어머니 교하 노씨 노첨(盧僉)의 딸 사이의 3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572년(선조 5) 춘당대시 문과에 병과 8위로 급제하였다.
임진왜란이 터질 때 황해도 순찰사가 되어서 황해도 해주에서 왜적을 물리쳤다. 이때 가족들은 모두 피난시켜서 주상에게 욕 좀 먹었다. 또, 정유재란이 터졌을 때 중책을 맡고도 가족부터 안전하게 빼돌리는 등 상당히 보신주의적 행태를 보여 처벌당하기도 했다. 그래도 왜적의 목 6급을 베어서 칭찬을 듣기도 했다. 게다가 줄을 잘 서서 왜란 이후 병조참판을 거쳐 대사헌, 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까지 쾌속 승진했으며 자신의 파벌을 형성해내갔다.
처음에는 동인이었으나 남북 분당 당시 북인으로 옮겼다. 그리고 홍여순이 대사헌으로 천거되자 남이공과 김신국이 반대했다. 류영경은 정인홍과 같이 홍여순의 대사헌 천거 문제에 대해 토론 배틀을 벌였다. 그러나 정인홍과 류영경은 열띤 논쟁을 펼쳐서 서로 합의를 보지 못했다. 그래서 류영경은 자신을 따르는 박홍구, 박승종, 류희분과 같이 소북을 구성했으며, 정인홍도 마찬가지로 자신을 따르는 기자헌, 유몽인, 이이첨과 대북을 구성했다. 이렇게 해서 북인이 홍여순 대사헌 천거 문제로 다시 대소 분당을 하며, 정인홍 계통의 대북과 류영경 계통의 소북으로 분열되었다.
류영경은 소북의 영수가 되었지만 이후에 세자였던 광해군과 인목왕후의 아들인 영창대군 간의 후계자 문제로 다툼에 시달리자 영창대군 쪽으로 갈아탔다. 이에 광해군을 지지하는 소북 인물들이 반발해서 그 안에서도 불화가 빚어져 탁소북으로 옮겨가 영수가 되었다. 한편 선조의 후계자 논의가 가속화되자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걸고 영창대군의 줄에 서서 그를 밀었으며 이를 이루기 위해 선조의 곁에서 갖은 언플을 시도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영창대군을 세자로 세울 생각까진 안 했던(자세한 건 영창대군 항목 참조) 선조는 광해군을 왕으로 삼으라는 교지를 내리고 승하했다. 어차피 살아남기 힘들다고 본 그는 일부러 자신의 집에 교지를 감춘 채 시간을 지연시키려고 필사적으로 농간을 부렸다.
그러나 인목왕후의 지원을 받은 광해군은 수순대로 즉위했고, 이내 기자헌, 유몽인, 이이첨의 대북이 류영경의 죄상을 짚으며 탄핵에 나섰다. 처음에는 광해군이 그를 두둔했지만(아마도 형식적이었겠지만), 차차 처벌 수위를 높여 영의정 자리에서 내쫓고 파직, 삭직을 거쳐 유배한 다음 자결 명령을 내렸다. 심지어 죽은 다음 시신마저 뒤에 도로 끄집어내어져 부관참시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이후에 소북은 박홍구, 박승종, 류희분을 중심으로 광해군을 지지했으나 류영경이 선조의 후계자로 영창대군을 택하며, 광해군과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바람에 영향력이 약해지고 광해군과 대북에게 상당한 눈치를 보게 되었다.
회퇴변척소[4] → 봉산옥사 → 계축옥사로 대북이 서인과 남인계 신하들을 조정에서 몰아낼 때, 소북은 그저 방관하거나 소극적으로 동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렇게 해서 대북의 정치적인 전횡과 이를 막지 못하고 소북의 동조와 무능으로 인해 정계에서 밀려난 서인과 남인은 많은 실망을 하였다. 그래서 서인과 남인은 인조반정을 일으켜서 이후 인조가 즉위하는 것으로 성공했고, 그리고 즉시 바로 북인 처벌 문제에 들어갔다. 광해군 시기에 정책에 반대해서 유배를 간 북인 인물은 살렸지만, 북인 정권 시절 권신이었거나 광해군의 총애를 받은 측근 세력들은 냉혹하게 처벌했다.
이때 이이첨, 류희분 목숨을 잃었고, 박승종은 처벌받기 직전에 자결했다. 유몽인과 박홍구는 서인과 남인의 가혹한 북인 처벌에 반발하여 광해군을 태상왕으로 복권시키고, 흥안군과 인성군을 왕으로 옹립시키려는 거사를 준비했지만, 발각이 되어서 처형당했다. 이러한 일들이 벌어질 동안에 류영경은 반대로 그의 신원이 복권되었다. 인조와 서인, 남인은 대북에게 탄압받은 인물들은 이유 불문하고 죄다 복권시켜주긴 했다. 류영경의 복권에 대해서는 이유가 제시되었다. '그렇게 괜찮은 신하는 아니라서 관직까지 복권시키는건 좀 후하긴 한데 너무 심하게 화를 입었으니까 불쌍해서 복권시켜 준다'는 내용이었는데, 류영경이 질 나쁜 신료라는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대북에게 피해를 입었답시고 복권시켜주는데 사소한 명분을 건 셈이었다.
대북파에 대한 인조와 서인들의 크나큰 반감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그것 때문에 류영경같은 간신까지 신원해주는 부조리성을 드러내기도 하는 셈이었다. 한편 이이첨, 기자헌, 류희분, 박승종, 유몽인, 박홍구를 비롯한 북인 영수의 죽음과 끊임없는 반역 시도로 인해 북인은 완전히 멸망했으며, 남이공과 김신국이 북인을 이끌다가 남인에게 흡수가 되어서 조정에서는 자취를 감쳤다.
인조 때 종2품 강원도관찰사를 지낸 류항은 그의 조카이다.
3. 대중매체[편집]
- 1999년 MBC 드라마 <허준>에서는 배우 박영지가 연기했다. 극 중에서는 '정성필'의 모티브인 듯한데 선조가 승하할 때 어의 허준을 포섭해서 유언을 조작하려다가 실패한 이후 탄핵되고 유배를 거쳐 사형에 처해진다.
- 2012년 개봉한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에서는 조선 각지에서 올라온 유생들이 류영경은 사문난적으로 목을 치라고 한다.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광해군일기에서 등장한다. 인목왕후가 아들 영창대군을 낳았을 때 선조의 후계를 두고 광해군파인 대북과 영창대군파인 소북으로 나뉘어 소북의 일원으로 소개시킬 때 나온다. 20년 넘게 주목받지 못하다가 선조 말기에 이조 판서에 중용되더니 2년만에 영의정에 오른다. 이후 영창대군이 태어나자 류영경은 영창대군에게 올인할 것을 다짐한다. 그리고 선조가 죽기 직전에 선조가 “…이러한데도 왕위에 있을수록 있겠는가? 세자가 이미 장성했으니 옛 일에 따라 전위해야 할 것이다. 전위가 어렵다면 섭정도 가하다.”라고 답하자 류영경은 영창대군이 너무 어리다며[5] 거절했다. 그러나 선조가 곧 회복하면서 괜찮아 지는 듯했지만 선조 41년 2월 1일에 약밥을 먹고 갑자기 승하하면서 류영경은 매우 긴장한다. 결국 광해군의 즉위 이후 대북의 공격으로 목을 매어 자살하여 생을 마감하면서 등장 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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