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명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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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綎
(1558 ~ 1619년)
1. 개요[편집]
명나라의 장수. 자는 성오(省吾).
임진왜란과 명청전쟁에서 활약했다. 사르후 전투에서 전사했다.
2. 생애[편집]
2.1. 초기이력[편집]
강서성 남창 사람이다. 13세부터 아버지 유현도 명나라 장수로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병법을 배웠다. 개인적 무술이 뛰어나 마상에서 120근의 빈철도를 휘둘러 천하의 유대도로 불렸고, 흑호장군이라고도 불렸다. 또한 그는 기마궁술에도 능하였다.
명나라는 16세기에 여러 방면에서 외적과 내란이 발발하여 위기에 처했는데, 유정은 아버지를 따라 사천성의 남방민족인 구사만(九絲蛮)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워 주목을 끌었다. 1582년에는 아버지가 사망하자 그가 이끌던 병마를 물려받아 사천성에서 주둔하게 된다. 이때 총병이 되었으니, 이는 명나라군의 계급으로는 위에서 두번째 계급이며, 실전부대를 이끄는 계급으로는 가장 높은 자리였다.
바인나웅이 지휘하는 버마군이 운남성을 침입하자, 나중에 임진왜란 때도 참전하는 등자룡과 함께 버마군을 물리쳤다. 이후 운남에서 발생한 반란도 진압했다.
2.2. 임진왜란[편집]
선조 실록에서의 유정의 말에 따르면 왜구들과도 싸운 경험이 있었다고 하고, 임진왜란 때 참전하여 정유재란 때 이여송이 병부 상서 석성에 의해 탄핵당한 후 명군의 지휘권을 인계받아 총병이 되었다.[1]
부총병일 때는 이총병이 싸우려고 하지 않는다며 비난한 기록이 있으나, 본인도 2차 진주성 전투에 자신과 서로군을 보내어 지원한다고 말만 하고서 병력을 보내지 않았다. 다만 당시 조선 관군인 권율이나 이순신도 진주성의 구원 요청을 씹고 버로우탔던 상황인데 굳이 동맹군인 그가 나서겠냐만은.. 실제로 2차 진주성 전투에 참여한 것은 전라도의 의병들 뿐이다.[2] 정유재란 때는 이순신이 해전에 연전연승하고, 마귀와 양호의 조명 연합군이 직산 전투에서 승리하여 왜군의 진군을 막자 유정 본인은 제독으로서 남해안의 왜군을 소탕하는 전략으로 사로 병진 작전을 세웠다.
강화협상이 한창 진행 중이던 선조 27년(1594년), 명나라 조정에서 유정의 군대에 귀환할 것을 명하였으나 남원으로 남하해 주둔하며 의도적으로 철수를 지체하며 강화협상의 정세를 관찰하기도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이번에 유 총병(劉摠兵)이 영남(嶺南) 백성들의 굶주림을 생각해서 쌀과 콩을 멀리서 운반해 와 진휼했는데, 그 뜻이 참으로 범연하지 않습니다. 비변사에서 문안관(問安官)을 시켜 치사(致謝)하려고 하는데 온당치 않을 것 같으니, 승문원으로 하여금 오늘 중에 게첩(揭帖)을 만들게 하여 내일 보내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따랐다.
선조실록 54권, 선조 27년 8월 1일 병오 2번째 기사
접대 도감(接待都監)이 아뢰기를,
"유 총병이 아랫사람 다루기를 매우 엄격하게 해서 부하 군사가 도성(都城)에 민폐를 끼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염장(鹽醬)도 스스로 사먹었습니다. 근래 시중(市中)에는 염장이 희귀해져서 많은 군사들이 바꾸어 먹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부 중군(傅中軍)이 접반사 김찬에게 말하기를 ‘군중(軍中)에서 소금을 구할 수가 없으니 구해서 공급하라.’ 하였습니다. 해사(該司)로 하여금 급속히 마련해서 제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선조실록 54권, 선조 27년 8월 17일 임술 6번째 기사
전술했듯 탐욕스럽고 교만하다는 명사의 평가와, 일본군으로부터 뇌물을 받아 챙겨 퇴로를 열어준 사실 등 부정적으로 비춰질 여지가 많은 인물이지만, 바로 위의 실록 기사에서 보듯 굶주림에 시달리는 영남(嶺南)지방의 백성들을 구휼하기 위해 쌀과 콩 등의 양곡을 멀리서부터 운반해 오기도 하였고, 조선의 백성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도록 휘하 제장들을 엄히 단속하는 등[3] , 덕장으로서의 면모도 어느 정도 갖추었다는 것을 보여준다.[4]
사로병진작전의 일환으로 조명 연합군 육군 수군이 순천 왜성에서 본인과 힘을 합쳐 고니시 유키나가를, 사천에서 명나라 장수 동일원이 시마즈 요시히로를, 명나라 장수 마귀가 울산성에서 가토 기요마사를 쓰러트리는 작전을 구상하고 실행에 옮긴다. 이 작전이 성공을 거둔다면 남해안의 왜군을 모두 박멸하고 전쟁을 완벽하게 승리하는 전략이 될 뻔했다.
그러나 마귀가 울산성 전투에서 1차, 2차 전투 모두 열심히 싸웠으나 적의 원군으로 인하여 아쉽게도 울산성을 점령하지 못했고, 사천에서는 나름 영하의 난을 평정한 공이 있던 장수였던 동일원이 다수의 병력에도 불구하고 군량 창고 방비도 제대로 못해서 군량을 태워먹고, 병량 부족으로 조급하게 싸우다가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패했다.
유정 본인은 순천에서 육로로 진군하여 먼저 계책으로 회담을 진행한다고 속이고 고니시 유키나가를 사로잡으려 했으나 이를 눈치챈 고니시 유키나가 본인이 나타나지 않아서[5] 계책이 실패한 후 벌어진 전투에서는 공성병기를 거느리고 성을 공략했으나, 공성병기가 너무 무겁고 왜군이 조총을 쏘아대는 바람에 성에 접근도 하지 못했다. 이후 대장기를 내리고 아무런 지휘도 내리지 않고 병졸들은 공성병기에서 잠을 자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를 틈타 일본군이 명군을 공격하자 부총병 오광이 이끄는 군대가 놀라서 도망쳤고[6] 이방춘이 이끄는 군대가 이를 겨우 막아냈다. 이 날 명군의 전사자는 800명이었다. 게다가 유정은 그 와중 병사들에게 어떤 명령도 내리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조선 여인이 왜군이 조명연합 수군을 상대하느라 성 북쪽은 모두 비어 있다고 말하고 이에 조선 장수들이 성을 공격하자고 했는데도, 유정은 이를 무시했다. 심지어 명군의 장수들도 유정을 업신여겼다고 한다. 이후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뇌물을 받고서 남원에서 기생질이나 하고 남원에 관우 묘나 만들면서 전쟁을 회피한다.[7]
유 제독이 2일 왜적의 성을 공격할 때 모든 군사가 성 아래로 60보쯤 전진했는데, 왜적의 총탄이 비 오 듯하자 제독은 끝내 깃발을 내려놓고 독전하지 않았습니다. 부총병 오광의 군사들은 대장의 호령이 있기를 기다리다가 순거(楯車)에 들어가 잠자는 때도 있었습니다. 그때 조수는 차츰 빠지고 수군도 물러갔습니다. 왜노들은 육군이 일제히 진격하지 않는 것을 보고 밧줄을 타고 성을 내려와 오광의 군대를 공격하여 20여명을 죽이자 오광의 군대는 놀라서 100보쯤 후퇴하고 각 진영의 사기도 모두 떨어졌으니, 그날 한 짓은 아이들 장난과도 같았습니다. 독전하지도 않고 또 철수도 하지 않아 각 군으로 하여금 반나절을 서서 보내게 하고 다만 왜적의 탄환만 받게 했으니, 제독이 한 짓을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선조실록>권 105 31년 10월12일
유 제독이 2일 왜적의 성을 공격할 때 모든 군사가 성 아래로 60보쯤 전진했는데, 왜적의 총탄이 비오듯 하자, 제독은 끝내 깃발을 내려놓고 독전하지 않았습니다. 독전하지도 않고 또 철수도 하지 않아 각 군대로 하여금 반나절을 서서 보내게 하고 다만 왜적의 탄환만 받게 했으니, 제독이 한 짓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3일 수군이 조수를 타고 혈전하여 대총으로 소서행장(고니시 유키나가)의 막사를 맞추자 왜인들이 놀라고 당황하여 모두 동쪽으로 갔으니 만약 서쪽에서 공격하여 들어갔다면 성을 함락시킬 수 있었습니다. 김수가 문을 열어 젖히고 싸우자고 청하였지만, 제독은 노기를 띠고 끝내 군대를 출동시키지 않았습니다. 성 위에서 어떤 여자가 부르짖기를 ‘지금 왜적이 모두 도망갔으니 중국 군대는 속히 쳐들어오라’고 하였습니다. 기회가 이와 같은데도 팔짱만 끼고 지나쳤으니, 제독이 행한 일은 참으로 넋을 빼앗긴 사람과 같아서 장수와 군졸들이 모두 업신여기고 있습니다.
-이덕형의 장계
결국 이순신과 진린의 수군만이 단독으로 군대를 움직이고 장도 해전(왜교성 전투)이 일어났는데, 이순신은 아군이 뒷통수를 친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왜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다.[8] 이후 동일원의 패전 소식을 듣고 유정 자신도 병사를 이끌고 물러난다.[9] 사로병진 작전이 실패하고 왜군은 전력을 거의 온존한 채로 노량 해전이 일어나는데, 임진왜란 종결 이후에는 본국으로 귀국하여 사천에서 양응룡이 반란을 일으키자 양응룡의 군대를 무찌르고 양응룡의 난을 진압한다.
명나라군은 왜군을 한반도에서 몰아내는게 목적이라 굳이 철수하는 왜군을 추격할 필요는 없다는 입장인데 반해, 조선군은 돌아가는 왜군을 모두 섬멸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이 작전상 이견이 있었고, 이 때문에 철수하는 일본군 추격에 소극적인 유정이 이순신의 전사에 책임이 있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이런 대립에도 불구하고 유정은 이순신을 좋게 평가했으며, 종전 명나라로 철수하기 전, 후 선조가 송별회를 열어주자 “감사합니다. 재차 나와서 아무 것도 이룬 것이 없습니다. 이순신(李舜臣) 같은 자들은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쳤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입니다."라고 말한 기록이 남아있다.(<선조실록> 1599년(선조 32년) 1월 29일)
2.3. 사르후 전투[편집]
이후 발호하는 후금군을 막다가 마귀의 아들도 후금군에 의해 분사하고 요동이 위협당하는 상황에서 명은 양호를 총대장으로 하고 10만의 군대를 60만이라고 뻥치면서 후금을 무찌르기 위한 사르후 전투를 준비하는데, 문제는 징비록에서 적을 경시하는 성향이 있다던 양호가 크게 많지도 않은 병력을 4개로 쪼갰다.[10] 그 중 한 부대인 이여백의 군대는 이여백이 누르하치의 일족이었기 때문에 내통 의혹이 있었으며, 특히나 유정은 양호가 유정을 죽이려 했기 때문에 꼴랑 수천명의 병력[11] 만을 편제받아 가장 험지에 보내 이 때문에 4로군인데 전쟁하기도 전에 벌써 2개 부대의 상태가 엉망진창이었다.
특히나 유정의 명군이 조선군과 거의 함께 편제되어 있었기에 강홍립과 유정의 대화 내용이 광해군 일기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때 강홍립이 유정에게 병력이 얼마냐고 묻자 유정은 서남 방면은 수만인데 이 쪽은 수천밖에 없다고 말하는데, 내가 이끌던 사천 지역의 강병을 요청했는데 양호와 사이가 나빠 거절당했다. 아마 양호는 나와 사이가 나쁘니 내가 죽기를 바랄 것이다. 나야 나라로 부터 받은 은혜가 있으니 나는 죽기를 각오했지만, 내 아들들은 아직 국가의 녹을 먹지 않았으니 데리고 오지 않았다.며 오로지 조선군을 의지할 뿐이라고 말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12]
그런데 대체 왜 이리 빨리 진군하냐고 강홍립이 묻자. 양호가 천시를 얻었다며 군령이라는데 어쩌겠냐.라고 유정이 대답했으며, 심지어 강홍립의 보고에 따르면 중국 측 병력에 대포와 대기도 없었던데다가, 지형 상태도 안 좋았다고 한다. 이에 광해군도 패배를 예측하고는 "조선의 군사들이 죽을테고 패배하면 저기서 끝나는게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변란이 닥칠텐데 어쩌냐"며 비밀리에 비변사에 전교한 내용이 조선 왕조 실록에 기록되어 있을 정도다.
광해군이 비변사에 전교하고 바로 다음 날에 이여백이 유정에게 보낸 사로군의 마림 군과 두송 군이 이미 전멸했으니 유정 군은 퇴각하라는 퇴각 신호까지 험한 지형이라 유정 군에게 전달되지 않으면서 아부다리 전투가 시작된다. 후금군의 병력 규모는 이전 전투와는 다르게 기록되지 않았으나 참전한 장수진이 아이신기오로 다이샨과 아이신기오로 홍타이지, 아이신기오로 망굴타이로 각기 팔기 중 한 기씩을 거느리고 있는 장수였던 것으로 보았을 때[13] 병력 규모는 2만 내외, 다만 조선의 이민환의 책중일기에는 3만으로 기록되어있다.
이 전투에 누르하치 본인이 참전하지 않았던 것만해도 후금군은 이미 승리를 자신했던 것으로 보이며, 심지어 유정 군은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조선의 군대와도 따로 떨어져서 행군하다가 기습당해 격파당했다. 패색이 짙어지자 유정은 남아 있는 화약과 장작을 쌓고 휘하 제장들과 함께 자폭했다고 하며, 만주족 기록에는 잡아죽였다고 되어있어 분전하다 사망했다는 등의 이설은 있지만 어쨌든 처참하게 전사했다.[14]
명군이 전멸한 후 광해군의 예측대로 조선 군 역시 9000명과 부원수 김응하가 전사하는 큰 피해를 입고 후금 군에게 항복. 다만 청나라 기록에는 조선 군과 명군이 함께 싸웠다고 되어 있으나 이민환의 책중일기나 명측 기록을 보면 명군이 전멸 후 조선군이 격파당한 것으로 보인다.
3. 평가[편집]
명나라에서는 탐욕스럽고 교만하나 명나라의 모든 제장 중 가장 굳세고 용맹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명사明史 권247.) 정유재란을 예측한 것이나 평소 언행, 그리고 그의 전략 전술들을 볼 때 실제로는 맹보다는 지장에 가깝다.
한국인들이 보기에는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게 되는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한 장수이지만 이는 명나라와 조선의 전략 목표가 달랐기 때문이고, 딱히 유정을 탓할 수는 없다. 어쨌든 명군은 나름 열심히 싸워 일본을 조선에서 몰아내는데 한몫했기 때문이다.
청의 건륭제는 자신들의 만주족에 맞서 싸운 유정이 항복하지 않고 전사한 것을 높이 평가하여 충장이라는 시호를 추증했다.
이후 중일전쟁 시기 일본군이 안후이 성 리신 현에 있는 유정의 사당을 보고, 유정의 묘지와 사당을 폭파했다. 유정의 사당 앞에 왜구를 평정했다는 대목이 일본군은 기분이 나빠서 사당을 부순 것이다. 하지만 중일전쟁 후 이 사당은 재건되었다.
4. 대중매체에서의 모습[편집]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손호균[15] 이 연기했다. 양호/진린과 회의하면서 사로병진을 위해 수군을 투입해야 한다는 것을 납득하면서도 수군을 이끌고 합류하려는 진린에게 이순신이 다시 통제사가 됐으니 우리 수군을 굳이 투입할 필요가 없다고 하며 이순신을 높이 평가했다. 유정은 내가 이순신을 좀 아는데 이순신은 탁발한 장수라서 명나라 수군 장수 10을 들이대도 당해내기가 어렵다면서 조선 함대가 한번 궤멸된 걸 이미 아는 상황이었는데도 어차피 이순신이 이길 건데 굳이 우리 군사들을 죽게 할 필요가 있냐는 논리를 펼쳤다. 진린이 이를 불쾌해하자 이순신은 너와는 다른 종류의 사람이라 니가 이순신과 견주어져서 너한테 좋을 게 없다고 우려인지 욕인지 모를 언사를 했고 진린은 분노한다. 결과적으로 양호는 이순신이 아무리 잘났어도 이순신 함대만으로 일본 수군을 전멸시킬 수는 없으니 그냥 투입한다고 결정했다. 이후 왜교성에서 자기가 먼저 제안하여 연합작전을 펼치기로 해놓고 고니시의 요청대로 진린에게 너무 깊숙이 들어오지 말라고 알린 후 성을 공격하는 척만 했다. 그런데 진린은 유정이 자기 혼자 공을 세우려는 걸로 착각하여 이순신의 신호를 무시하고 개돌했다가 큰 피해를 냈고, 이걸 숨기기 위해 조선 조정에 이순신을 모함한다. 이후 진린마저 이순신에게 감복하여 파이팅 넘치는 모습으로 바뀌자 또 다시 이순신을 모함하여 선전관이 내려오게 만든다.
노량: 죽음의 바다에서는 왜교성 전투 때 짤막하게 등장할 예정이다. 배우는 불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