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제프 피우수트스키 (r20220720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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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제프 피우수트스키
Józef Piłsudski


파일:Jozef_Pilsudski1.jpg

본명
유제프 클레멘스 피우수트스키
Józef Klemens Piłsudski
출생
1867년 12월 5일
러시아 제국 빌나 현 잘라바스[1]
사망
1935년 5월 12일 (향년 67세)
폴란드 제2공화국 바르샤바
직업
독립운동가, 군인, 정치인
정당
사회당→무소속
경력
폴란드군 원수
폴란드 최고지도자(1918.11.22~1922.12.14)
폴란드 총리(1926.10.2~1928.6.27)

1. 소개
2. 생애
2.1. 독립운동가
2.2. 1차 대전과 폴란드 독립 직후
2.3. 인테르마리움 추진
2.4. 권력 장악과 말년
3. 평가


1. 소개[편집]


폴란드독립운동가, 군인, 정치가, 독재자이다.

2. 생애[편집]



2.1. 독립운동가[편집]


폴란드의 귀족 출신으로 지금의 리투아니아에 속하는 잘라바스 지방에서 출생했다. 잘라바스 지방은 폴란드-리투아니아에 위치했는데 폴란드 분할로 인해 러시아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의 가문은 원래 리투아니아 귀족 출신이었지만 대대로 폴란드-리투아니아인이라 생각했고[2] 자연히 유제프 역시 그런 영향을 받았다. 1885년 하르키우 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1887년 유제프는 형인 브로니스와프 피우수트스키(Bronisław Piłsudski)가 러시아의 차르 알렉산드르 3세를 암살하려고 한 모임에 연루되어 체포되었고 5년 형을 선고받아 시베리아로 유배를 떠났다.[3][4]

1892년 유배를 마친 유제프는 폴란드로 돌아와 폴란드 사회당에 가입한 후 폴란드의 주권회복을 위해 여러가지 비밀 활동을 했다. 1900년 결국 러시아 당국에 의해 활동이 들통나 다시 체포되어 수감되었지만 탈옥하는데 성공한다.

1904년 그는 러시아 제국과 싸우기 위해선 군대가 있어야 한다는 것과, 조만간 열강들이 식민지를 놓고 커다란 전쟁을 벌일 거라 예상하고 비밀 군사 조직을 만들었고, 1910년 적극적인 활동을 위해 당시 러시아 제국의 적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이동하여 오스트리아 당국의 허락을 받고[5] 비밀 군사조직을 적극 저항 연맹으로 재편했다.

2.2. 1차 대전과 폴란드 독립 직후[편집]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유제프는 폴란드 군단의 장군이 되어 그들을 이끌고 러시아와 싸워 다대한 성과를 냈다. 그러나 독일오스트리아러시아령 폴란드 지역을 차지한 후에도 폴란드 부활을 위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오히려 괴뢰국폴란드 섭정왕국을 수립하자 폴란드 군단은 오스트리아에 대한 충성 맹세 서약을 거부했다. 이에 오스트리아는 폴란드 군단을 해체한 후 유제프를 체포하여 마그데부르크 감옥에 수감했다.

1차대전이 협상국의 승리로 끝난 후 폴란드 제2공화국이 수립되었고 마그데부르크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유제프는 석방되어 1918년 11월 10일 폴란드로 돌아온 후 임시정부의 임시국가원수(Tymczasowy Naczelnik Państwa)[6]으로 선임되었다.

이 무렵 폴란드는 볼셰비키[7]와 국경문제로 잦은 교전이 있었는데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는 벨라루스우크라이나를 독립시켜 러시아와 폴란드의 완충지대로 만들려는 계획을 세우고 볼셰비키에 대대적인 공격을 가해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을 일으켰다.[8] 1920년 4월 피우수트스키는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과 동맹을 체결하고 5월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를 해방하는 등 승승장구했으나, 붉은 군대가 폴란드 북쪽 전선을 돌파하고 남부 전선으로 기병대를 보내 폴란드 후방에 역공을 가하자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에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폴란드군의 후퇴는 비스와 강에 이르러서야 멈출 수 있었다.

그러나 붉은 군대는 보급 문제가 심각해지기 시작했고 민족주의로 똘똘 뭉친 폴란드 노동자와 농민들은 볼셰비키에 협조하기는커녕 그들을 침략자로 인식하여 맹렬히 저항했다. 여기에 대(對)폴란드 전선의 서부전선군을 지휘한 미하일 투하쳅스키가 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민스크에서 졸렬한 지휘를 펼치는 바람에 전장의 변화에 즉각적으로 대처할 수도 없었다.[9] 결국 폴란드군은 바르샤바 전투에서 서부전선군에게 바르샤바 북쪽을 내주고 지연전을 펼치는 사이 남쪽에서 새롭게 조직한 군대로 서부전선군의 약점을 돌파하여 전멸시키는 대승을 거둔다.

바르샤바 목전에서 붉은 군대를 전멸시킨 폴란드군은 이후 동진하면서 네만 강 전투 등에서 붉은 군대를 연파, 승승장구한다. 그러나 폴란드 역시 전쟁을 계속 끌고 가기에는 한계가 있었고[10] 결국 양측은 1921년 맺어진 리가 조약으로 벨라루스를 분할하여 3분의 2는 폴란드에게, 민스크를 비롯한 3분의 1은 러시아가 분할하는 강화 조약을 맺었다. 한편 폴란드는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에 폴란드인이 많다는 것을 빌미로 군대를 보내 괴뢰국 중앙리투아니아 공화국을 수립하고 후에 합병한다. 이 일로 리투아니아는 한때 폴란드와 한 나라를 구성했음에도 폴란드에 대한 감정이 매우 악화되었고 전운이 드리우는 1930년대 후반에 가서야 리투아니아 제1공화국은 폴란드와 수교하게 된다.[11]

2.3. 인테르마리움 추진[편집]


파일:pilsudski_on_horseback_1928.jpg
말 위에서 폴란드군을 지휘하고 있는 피우수트스키. 그가 폴란드군 총사령관을 맡았던 1928년에 그려진 선전화다. #

폴란드 제2공화국은 반유대주의, 반독일 정서가 매우 강했다. 피우수트스키는 폴란드어를 사용하는 리투아니아 주민 출신이었다. 그리고 폴란드 제2공화국에는 유대인, 독일인,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 리투아니아인 등 다양한 소수민족이 있었다. 그래서 피우수트스키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애초에 다문화주의적인 폴란드-리투아니아인으로 규정했지, 폴란드 민족주의 그 자체에 대해서는 매우 경계했다. 그는 다양한 민족이 폴란드라는 그릇에 어울려 사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제2의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완성할 수 있다고 끊임없이 주장했다. 개인적으로도 혁명 동지로 만나서 결혼생활이 엉망이 된 다음에도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 결혼을 유지해야 했던 첫번째 부인 마리아 코프레프스카와 이혼하기 위해 개신교로 개종했다가 다른 젊은 여성과 재혼한 이후에야 다시 가톨릭으로 재개종하고, 그 이후로도 딱히 신앙 생활에 충실한 모습은 보이지 않는 등 독실한 가톨릭 신자들로 대변되는 전형적인 폴란드 민족주의자들의 모습과는 차이가 있다.

사실 이렇게 가톨릭 신앙에 강하게 집착하고, 부정적인 면으론 반유대주의를 비롯한 타민족에 대한 배타성으로 유명한 현대 폴란드 민족주의의 사상적 소프트웨어가 자리잡은 것은 훗날 냉전시절 소련이 강제로 이식한 폴란드 인민공화국 시절을 겪으며 피우수트스키가 아니라 그의 정적인 로만 드모프스키가 이끌던 민족민주주의당 계열의 영향력이 훨씬 더 강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쪽 민족민주주의자들은 민족, 역사관도 옛 폴리투 연방 자체를 그 다민족, 다종교적 다양성으로 인해 망한 실패한 체제로 인식했고, 정치 파벌상으로도 피우수트스키가 이끄는 군부가 아니라 민간 정치인들 중심이었으며, 기본적으로 폴란드 민족주의를 훨씬 더 강조하며 유대인, 우크라이나인, 독일인 등 소수민족의 강제동화 아님 국외 추방을 주장했다.

정치적 계보 상으로도 피우수트스키 중심의 연방부활주의 군부는 19세기 낭만주의적 폴란드 민족주의 봉기를 주도한 국외 망명 군사 엘리트 구 연방시절 슐라흐타 출신 혁명가들을 계승했던 반면, 드모프스키가 이끄는 민족민주주의 진영은 분할통치기 말 산업혁명을 급격히 겪은 우치, 바르샤바의 노동자들과 이들 사이 각종 복지, 자선활동을 주도하던 가톨릭 사제들을 기반으로 성장했다.

피우수트스키는 죽는 그 날까지 제2의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부르짖으며 카우나스부터 키예프, 민스크까지 차지해야 한다고 역설했고, 폴란드가 중심이 되어 발트해와 흑해를 잇는 국가들이 뭉쳐야 독일과 소련에 맞설 수 있다고 여겨 인테르마리움(미엥지모제) 계획을 추진했다. 민족과 국내 사회 문제에 있어서도 이에 따라 피우수트스키 정권은 유대인, 우크라이나인 등 소수 민족에 대해 유화적이고 점진적 동화를 추진하여 국경 너머 소련 내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들을 친폴성향으로 돌리고, 다른 이웃 주변국들이 폴란드 중심으로 뭉치게 유도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던 반면 반대 민족민주주의자들은 일단 지도자인 드모프스키 본인부터 베르사유 회담에서 폴란드 대표로 참석 당시 교섭상대였던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를 포함한 영국 대표단을 질리게 했을 만큼 악명 높은 반유대주의자였다. 그래서 피우수트스키가 죽었을 때 폴란드 유대인들은 친구를 잃었다, 좋은 시절 다 갔다며 큰 슬픔을 표했다.

그러나 피우수트스키가 독재를 했어도 폴란드 정치권의 커져가는 폴란드 민족주의를 막지는 못했다. 결국 피우수트스키가 열심히 독재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영토 확장 노력은 멈추게 됐고, 폴란드에는 가면 갈수록 폴란드인 민족주의가 강성해져[12] 각종 테러폭력사태가 빈발했다. 인테르마리움에 포함될 계획이던 중유럽 국가들도 권위주의 반공 정권이 집권했다는 공통점을 제외하면 서로 사이가 나빴기 때문에,[13] 피우수트스키 사후 인테르마리움은 흐지부지된다.

피우수트스키의 라이벌이었던 드모프스키의 민족민주주의 진영은 팽창주의적인 면을 제외하고 소수민족 정책 같은 면을 보면 여러모로 피우수트스키의 비전이 더 현대적으로 보이나, 현대에 와서 폴란드 민족주의의 사상적 조류는 막상 독립 폴란드 공화국이란 하드웨어를 보존한 피우수트스키가 아니라 역사의 '패자'였던 드모프스키의 영향력이 더 강해졌는데 이에는 이유가 있다. 대외관, 대외정책 관련해서 드모프스키 일파는 구 폴리투 연방 영토에 대해선 재건이 불가능하다는 훨씬 더 현실적인 면이 있었던 반면[14] 피우수트스키가 구상한 폴리투 연방 부활은 현대의 평가에서나 당대의 시각에서나 여러모로 무리가 많았다.

일단 기본적으로 피우수트스키 본인부터 시작해서 폴란드 제2공화국의 권역 밖에서도 옛 폴리투인으로서 정체성을 유지했던 사람들도 꽤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시대는 17세기가 아닌 20세기고,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벨라루스인, 우크라이나인, 리투아니아인이란 제각각의 민족주의적 정체성이 확산되었던 시점이다. 게다가 정책수행 과정에서도 한편으론 피우수트스키 일파는 주변국에게 '이대로 가단 또다시 독일과 러시아 사이에서 모두 다 같이 짜부러진다! 우리 폴란드가 상전질하려는 게 아니니까 우리끼리 뭉치자!'라며 호소하는 반면 막상 실제로 하는 짓거리는 빌뉴스 사태, 르부프 사태가 보여주듯 폴란드 민족주의자 본인들만의 논리야 어쨌든 간에 그 대상인 리투아니아, 우크라이나 입장에선 날강도짓도 이만한 날강도짓이 없는 군사적 폭거를 통한 침략으로 받아들여졌다. 한쪽으론 독일-소련 사이 베르사유 체제 아래 신생 독립 민족국가들의 안전을 보장할 독자적 지정학적 블록으로서 중부 유럽 국가들간의 수평적 연대, 동맹을 주장하면서도 막상 하는 짓거리는 특히 우크라이나, 리투아니아인들 관점에선 자기들도 불과 10년 전만 해도 똑같이 독일과 러시아를 상전으로 모시던 주제에 독립한 후 자기가 다시 그 자리를 차지하려 든다는 인상을 심어 주었다.

결국 피우수트스키 사후에 그가 추구하던 중부 유럽 국가 간 동맹 정책을 휴지조각마냥 버리고 체코슬로바키아 분할에 참가한 지 고작 일년 뒤, 히틀러가 배빵을 때리고 스탈린이 동시에 뒷통수를 깔 때 누가 봐도 건성인 머나먼 영국 프랑스 빼고 주변국은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최악의 결과로 파국을 맞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 이후로 전간기 신생 독립 폴란드의 국체 하드웨어를 보존한 피우수트스키 개인에 대한 존경심은 종전 이후에도 존재하지만 팽창주의는 일부 극우 단체를 제외하면 일반적인 폴란드 정치판에서는 내놓지 않는다.

2.4. 권력 장악과 말년[편집]


1922년 유제프는 총통자리에서 물러났지만 그와 그의 지지세력은 의회와 대통령의 통치에 불만을 가졌다. 원래 피우수트스키는 대통령을 꿈꾸었으나 1921년 제정된 3월 헌법으로 대통령의 권한이 매우 약화되자 정계를 은퇴하였다. 폴란드의 초대 대통령은 피우수트스키의 친구이자 공학자로 이름을 날렸던 가브리엘 나루토비치(Gabriel Narutowicz)였으나 당선된 지 5일만에 극우파에게 암살되었으며, 이후 인민당 피아스트[15]의 스타니스와프 보이치에호프스키(Stanisław Wojciechowski)가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전임 대통령이 극우파에게 암살된 것을 볼 수 있듯이 폴란드는 좌우 대립이 극심하였으며, 독일과의 대립과 1차 대전의 후유증으로 인해 경제적으로도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폴란드의 민주정이 혼란하여 국가를 제대로 이끌지 못한다고 판단한 피우수트스키는 결국 1926년 5월 12일 쿠데타를 일으켜 바르샤바를 장악한 후 국정을 좌지우지했다. 물론 이것은 친위 쿠데타였고 군부의 친피우수트스키 파벌인 사나치아(Sanacja)가 정부를 좌지우지하게 된다. 피우수트스키는 쿠데타 직후 1926년부터 1928년까지 수상[16] 또한 1926년부터 죽을 때까지 폴란드군 총사령관[17]을 맡았다.

말년에는 평생의 원수 넘버2인 옆나라 독일에서 바이마르 공화국이 멸망하고 나치 독일이 들어서는 것까지 봤는데, 폴란드 침공을 고려하면 아이러니하지만 독폴관계가 가장 좋았던 시절은 히틀러와 피우수트스키가 집권한 시절이었다. 1차대전 끝나면서 상실한 영토 회복 욕구야 히틀러나 옛 제정 시절 사회정치적 주류였던 프로이센 융커 군사귀족 기성 우익이나 마찬가지였지만, 후자는 직접적으로 1차대전 전만 하더라도 독립 폴란드의 땅이 된 구 프로이센 폴란드 땅에 남겨두고 온 영지, 재산 등이 걸려 있었던 반면 히틀러는 이 시절만 해도 폴란드 회랑보단 라인란트, 주데텐란트, 그리고 고향 오스트리아에 더 관심이 많았다. 히틀러 본인도 전면적으로 전쟁을 일으키기엔 아직 독일의 군사력도 준비가 한창 부족하고, 전쟁 없이 영토를 다시 뜯어오는 정치적 성과를 이루려면 주변국 모두 동시에 자극해선 안된다는 최소한 현실감각은 여전히 있었던 시기. 게다가 히틀러도 당연히 이 당시 독일 전반에 팽배했던 혐폴란드 정서 자체야 공유했지만, 피우수트스키 개인에 관해선 존경심을 갖고 있었다. 피우수트스키는 히틀러 입장에서는 전문 정치가들이 입씨름하는 의회 민주주의를 군대를 동원해 때려잡고 개인의 강력한 카리스마에 의존하는 독재정을 설립한 정치적 선배였기 때문이다.

반면 피우수트스키 또한 당연히 히틀러와 나치 정권을 미심쩍은 눈으로 보고, 나치가 집권했을 땐 전통적 우방이었던 영국, 프랑스 측에 저거 어찌 해야되는 거 아니냐며 경각심을 호소했지만 막상 영불이 미지근하게 나오자 지금까지 유지해왔으며 양면전쟁이 너무나도 뻔한 폴란드의 반소반독 대외정책은 유지가 힘들다는 걸 인식하기 시작했다. 양쪽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자 신생 나치 정권과 폴란드는 어울리지 않게 1934년 독일-폴란드 불가침조약을 맺으며 독일-폴란드 무역 전쟁에 종지부를 찍고, 나중에 뮌헨 협정땐 폴란드도 독일을 견제하기는 커녕 오히려 본인들도 끼어들어 한입 뜯어먹는 등 뒤돌아보면 아이러니의 극치인 한동안 화기애애한 세월을 보냈다. 반대방향으로 대소련 관계에선 본인이 젊은 혁명가 시절부터 주로 맞서 싸운 평생의 불구대천의 원쑤임에도 불구하고 1932년에 이미 상호 불가침조약을 체결하는 등 최전선에서 폴란드의 적들과 직접 총칼을 맞대고 싸우며 경력을 쌓은 전형적인 무투파 정치인임에도 불구하고 대외감각은 상당히 예리했다고 볼 수 있다. 상술한 대로 무려 그 히틀러도 막상 폴란드라는 나라, 폴란드 민족에게 가한 악행과 안 어울리게 피우수트스키 개인에 대한 존경심은 끝까지 유지했는지 1935년 피우수트스키가 죽자 베를린 한 가톨릭 성당에서 열린 추모 미사에 참석한게 무려 독일 총통으로서 유일하게 직접 참여한 종교적 공식행사[18]였을 정도고, 훗날 독폴 불가침조약을 한순간에 뒤집고 폴란드를 침략, 정복한 이후 그 많은 수탈을 저지르면서도 막상 크라쿠프 파벨 성에 있는 피우수트스키 영묘엔 직접 국방군 의장대를 경호로 배치하며 "피우수트스키가 살아있었다면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파일:Hitler attending memorial service of Jozef Pilsudski in Berlin_1935.jpg
피우수트스키 추모 미사에 참석한 히틀러와 나치 고위 간부들.

파일:Pilsudski and Goebbels_1934 German Polish nonaggression pact_Bundesarchiv_Bild_183-B0527-0001-293.jpg
독폴 불가침협정 당시 대사로 파견된 괴벨스와 피우수트스키. 양쪽으론 각각 당시 주폴란드 독일 대사 한스 아돌프 폰 몰트케와 폴란드 외무상 유제프 베크. 옆에 서 있는 괴벨스가 장애로 인해 왜소한 걸 고려해도 평생 기병대장으로 살아온 피우수트스키의 무인다운 말벅지가 인상적이다.

1935년 5월 12일 향년 68세로 세상을 떠났다.

3. 평가[편집]


폴란드 독립의 구국 영웅 vs 폴란드 제2공화국 몰락의 씨앗을 뿌린 인물로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가 갈린다.

폴란드 독립에 있어서 피우수트스키는 없어서는 안될 인물이었다. 폴란드의 독립운동이 끊임없이 수포로 돌아갔음에도 포기하지 않고 폴란드 군단을 조직하고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서 불리한 전세를 뒤엎은 것은 그가 아니면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독립이 된 후 피우수트스키는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잡은 후 독재자가 되어 유제프 할레르, 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19]와 같은 정적들을 탄압했다.

특히 폴란드군의 기계화에 부정적이었던 것은 그의 사후 나치 독일폴란드 침공 당시 폴란드군의 치명적인 약점이 되었다. 폴란드군은 군 장비는 나름 손색이 없었으나[20] 정작 그것을 대량생산하기 위한 시설은 전쟁 발발 불과 1년 전인 1938년에야 생겨났다.[21]

외교적인 면에서도 실책이 있었는데 1932년에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맺은데 이어 1934년에는 나치 독일과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 나치 독일과 불가침 조약을 맺은 건 독일과의 국경분쟁, 폴란드의 국제적 고립 타개, 독일-폴란드 무역 전쟁 때문이었다. 독일은 폴란드 회랑단치히 반환을 계속 요구하여 폴란드와 끊임없이 충돌해왔는데, 그 와중에 아돌프 히틀러가 불가침조약을 제의하자 피우수트스키가 받아들인 것이다.

피우수트스키는 독일과 소련 사이에서의 나름 중립 추구를 주요 외교적 노선으로 잡았지만 결과는 독소 불가침조약독소 폴란드 점령이었다.

총체적으로는 과실이 있다 할지라도, 어쨌든 소비에트 혁명의 예봉을 결정적인 곳에서 꺾어 소련이 동유럽으로 세력을 넓히는 시기를 늦추었다. 피우수트스키가 세운 폴란드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폴란드가 결국 공산화되었어도, 그는 역사의 흐름을 영원히 바꾸어놓은 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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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리투아니아 빌뉴스 주 잘라바스.[2] 피우수트스키의 정체성은 폴란드인보다는 폴란드-리투아니아인에 가까웠다. 1569년 루블린 조약 이래 폴란드와 리투아니아가 한나라로 지낸 역사가 200년이 넘었으며, 빌뉴스 시민들은 이미 야기에우워 왕조 시절부터 폴란드인 사제들이 들어온 것을 계기로 폴란드어를 사용하며 폴란드인들과 통혼하기 시작했다. 피우수트스키의 유년기(19세기 후반)는 오늘날의 민족의식(폴란드인, 리투아니아인, 우크라이나인 등)이 소위 '변경지대'에서 확고해지기 전이었으므로, 이 '변경지대'의 귀족들은 폴란드-리투아니아인에 강한 귀속의식을 갖고 있었다.[3] 이 모임의 창립자는 다름아닌 알렉산드르 울리야노프, 즉 블라디미르 레닌의 형이다.[4] 마찬가지로 시베리아로 유형당한 브로니스와프는 그곳에서 아이누 연구자가 되어 사할린 섬의 한 아이누 마을에 정착해 아이누 여자와 결혼해 가정을 꾸리고 살았다. 오늘날도 일본에 그의 후손이 살고 있다고 한다.[5] 폴란드와 지리적으로 가깝기도 하고 당시 오스트리아는 당대 유럽 국가들 중에서 검열과 통제가 제일 느슨했던 것으로 유명했다.[6] 1920년 이후 국가원수(Naczelnik Państwa)으로 명칭 변경.[7] 이때는 아직 소련이 수립되기 전이었다.[8] 폴란드를 중심으로 하여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등을 포함한 다민족 연방국가(제2의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만들고자 한 피우수트스키의 바람도 원인이기는 하였다.[9] 이 패배의 원인은 이오시프 스탈린의 책임이 가장 크다고 알려져 있으나 사실 그 책임을 살펴보면 투하쳅스키의 책임이 더 크다. 전략적으로는 소련이 가진 역량의 한계를 무시하고 독일 혁명 원조를 이유로 폴란드 영내로 진군을 명령한 블라디미르 레닌 등 소비에트 정치가들의 판단이 더 큰 문제였다.[10] 1920년 당시 폴란드는 국가예산의 60%를 대소 전선에 투입했다.[11] 폴란드는 리투아니아에게 수교 안 하면 전쟁이라는 협박을 날렸고, 이 최후통첩을 받은 리투아니아는 어쩔 수 없이 폴란드와 수교를 맺었다. 그 전까지 리투아니아는 폴란드와의 재수교는 빌뉴스가 폴란드 영토임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이유로 수교를 거부하고 있었다.[12] 전간기 폴란드의 유력 정치인이자 피우수트스키의 경쟁자였던 로만 드모프스키는 피우수트스키와 달리, 소수민족들이 폴란드에 동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드모프스키가 주장한 폴란드 확장안).[13] 폴란드vs리투아니아(빌뉴스), 폴란드vs체코슬로바키아(치에신), 헝가리vs루마니아(트란실바니아), 헝가리vs체코슬로바키아(남슬로바키아 및 카르파티아 우크라이나), 헝가리vs유고슬라비아(보이보디나) 등.[14] 당연한 말이지만 폴리투 연방 자체에 대한 역사관에 있어서도 피우수트스키 같은 연방부활론자들은 '되살아나야 할 폴란드의 오래된 미래'란 식으로 긍정적으로 본 반면, 드모프스키는 특정 계층에 제한된 민주정 연방이었다는 폴리투 연방의 특징 자체를 '나약함'으로 보고 반면교사가 되어야 할 나라로 취급했다. 동시대 각 유럽의 다민족 왕국에 대한 민족주의적 공화주의자들의 관점과 비슷한 셈.[15] 1931년에 인민당으로 통합됨.[16] 중간에 물론 몇 달 안가 피우수트스키가 수상이 되었지만.[17] Generalny Inspektor Sił Zbrojnych. 직역하면 군부총감. 의회가 아니라 대통령 앞에서만 책임을 졌다. 물론 대통령인 이그나치 모시치츠키가 피우수트스키의 꼭두각시인 이상, 사실상 피우수트스키가 전권을 가진 것이나 다름없었다.[18] 히틀러는 1933년 집권 이후 교회, 성당 등 종교시설을 단 한 차례도 방문하지 않았는데, 딱 한 번 성당에 참석한 것이 피우수트스키 추모 미사였다.[19] 쿠데타 이전 1차대전 시절 폴란드의 영토 회복을 위해 싸웠던 시절이나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당시에도 갈등이 있었음에도 시코르스키를 추천하여 정부 각료로써 중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쿠데타를 즈음하여 완전히 돌아서게 된다.[20] 가령 7TP 경전차는 독일군의 1호, 2호 전차를 상대하는 데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수가 적었을 뿐...[21] 이건 피우수트스키 개인의 책임으로만 돌리기 어렵다. 전간기 시절 폴란드군의 미진한 현대화 및 기계화는 폴란드의 경제가 그만큼 어려웠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