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준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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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60년 12월 18일
충청남도 보령군 대천면 내항리
사망
1920년 8월 5일
충청남도 보령군
본관
전주 류씨

순경(舜卿)

벽서(碧棲)·우록(友鹿)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유준근은 1860년 12월 18일 충청남도 보령군 대천면 내항리에서 진사 유형중(柳馨仲)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뒤 세금을 받으러 온 관리들에게 "전곡 갑병이 모두 저 오랑캐의 것이 되었는데 너희는 세금을 누구에게 바치려는 것이냐."고 말하여 납세를 거부했다가 몇달간 투옥되었다.

1906년 5월 민종식이 의병을 일으켜 비인, 판교를 거쳐 남포에 이르자, 유준근은 민종식을 찾아가 구국 방안을 논의했고, 병에 걸린 상태에서도 민종식의 초청을 수락하여 종군했다. 그는 의병대와 함께 보령을 지나 결성에서 하룻밤을 지냈고, 5월 19일 홍주성 공략전에 참가했다. 입성 후 부서가 정해졌을 때, 그는 유병장(儒兵將)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공세가 갈수록 심해졌고, 5월 31일 새벽 3시 홍주성이 함락되었다. 이후 유준근은 남규진(南奎振)·이식(李侙)·신현두(申鉉斗)·이상구(李相龜)·문석환·신보균·최상집·안항식 등과 함께 일본의 대마도로 압송되어 억류생활을 했다. 그는 '마도일기(馬島日記)'에서 유배되는 날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병오년 6월 18일(양력 8월 7일) 음산한 비가 내렸다. 우리 일행 9명은 흐느끼며 대궐을 나와 기차를 타기 위해 일본 병정을 따라서 남대문 밖으로 갔다. 전송하러 나온 벗들이 나라를 떠나는 회포와 더욱이 어디에 머무를 것인지 몰라 눈물을 흘리는 사이 기차는 출발했다. 눈앞에 펼쳐진 금수강산을 바라보니 또한 비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저녁 늦게 초량에 도착, 저녁밥을 먹은 후 세차게 내리는 비를 무릅쓰고 배에 오르니, 끝없이 밀려오는 풍랑은 사람으로 하여금 현기증을 일으키게 한다.


대마도에 유배된 후인 음력 7월 2일(양력 8월 21일), 통사가 와서 "집안에서 갓을 쓰고 있는 자에게는 밥을 주지 않아야 마땅하다."하고는 욕하고 구타했다. 이에 유준근이 항의했다.

"비록 이 땅에 감금을 당했지만 우리는 한국 사람이니 한국 예속을 지키는 것이 당연하다. 집 안에서 갓을 쓰는 것은 한국의 전해 오는 법도이니 차라리 굶어죽을망정 갓은 잠깐이라도 벗을 수는 없다."


이에 통사는 그에게 강제로 풀을 뽑게 했다. 그러다 오후 6시경에 통사 중에 한 사람이 와서 위로하고 밥을 권하면서 '아까 통사가 한국의 예속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한 망언이 있게 된 것이니 행여 개의하지 말기를 바란다' 하며, 누누이 밥을 들라고 권했다.

8월 28일 최익현임병찬이 대마도에 도착했다. 그날 오후 대마도 경비대장이 방문하자, 안내자가 갓을 벗고 경례하라고 했다. 그러자 유준근은 언성을 높여 꾸짖었다.

"한국 사람이 한국 제도를 지켜 갓을 벗지 아니하는데 무엇이 일본에 해가 되기에 이와 같이 곤욕을 주느냐? 이것은 바로 우리 의복을 변경하고 머리를 깎으려는 수단이 아니겠는가? 대의에 관계되는 바이니 나는 죽기로 결정했다. 다시 여러 말을 하지 말라."


이후 그는 최익현, 남규진 등과 함께 단식에 들어갔다. 이틀 후 대마도 경비대장이 죽과 밥을 가져와서 "머리를 깎고 옷을 변경하는 일은 강요하는 것이 아니니 안심하고 밥을 먹고 나라를 위해서 몸조심하오"라고 말하자 비로소 두 번째 단식을 중지했다. 유준근은 최익현과 시를 나누어 서로 위로했는데, 이때 지은 시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고국에선 아무도 이 길 와 본 일이 없으니

일변 기쁘고 일변 슬픈 마음을 가눌 길이 없네.

다 함께 대의(大義)를 붙들기 위해 조용히 나갔던 것이니

깊은 수치 쾌히 푸른 바다 소리에 씻어나 보세.


1907년 1월 최익현이 단식 끝에 사망한 후, 임병찬과 최익현의 두 아들 최영조, 최영학, 제자 노병희 등은 최익현의 유해를 모시고 귀국했다. 하지만 유준근은 대마도에 남아있다 한일병합 후 귀국했다. 그는 대마도에서의 경험담을 다룬 '마도일기(馬島日記)'를 집필했다.'대(對)' 소릿값이 같은 '大'로 들리는 것조차 싫었기 때문에, 제목을 '대마도일기'가 아닌 '마도일기'로 정했다.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하자, 유준근은 백관형(白觀亨), 송주헌 등 10여 명과 함께 경성 수창동 여관에 모여 순종 황제를 복위시켜 민심을 수렴하고 독립을 성취할 것을 결의했다. "강산도 전과 같고 궁실도 전과 같고 인민도 전과 같으니 다시 황제의 위에 좌정하여 일국을 호령하고 각국에 통보하십시오" 라는 내용의 글을 지어 가지고 3월 5일 청량리로 나가 융희황제가 우제(虞祭)에 나가는 도중에 글을 올리다가 일경의 제지를 받았다.

김창숙이 기술한 <벽옹일대기(躄翁一代記)>에 따르면, 유준근은 파리장서 운동에 가담하여 전라남북도에서 서명을 받아내는 임무를 맡고 간재(艮齋) 전우를 찾아가 다음과 같이 설득했다고 한다.

"이번 독립선언이 이미 전 세계를 경악하게 만들었으나 그 선언서에 연서한 사람 중에는 유감스럽지만 우리 유림이 일인도 참가치 못했다는 것은 천고에 있을 수 없는 수치가 아닙니까. 이 치욕을 씻으려면 유림의 중망(重望)을 갖춘 선생이 지도하여 지금 서울에 있는 경향사우(京鄕士友)가 중심 되어 전국을 망라한 대유림단을 조직해서 파리강화회의에 유림단 대표를 파견하여 한국 독립의 국제 승인을 요청하려는 계획이 비밀리에 준비중에 있으므로 선생의 지도를 바라고 내려와 간청합니다."


그러나 전우는 거부했다.

"이제 독립 운동을 전개한 33인이 자칭 민족의 대표라 이들은 모두 이단에 속한 천도교·예수교·경교·불교인만으로 연서되었으니 어찌 우리 민족의 대표로 인정하겠는가. 우리 유림단이 그러한 이교인을 따라 종사하려 함은 도리어 큰 치욕이 될 줄 안다. 우리 유자에게는 오직 '國難亡道可亡萬也不昻'의 법문이 있으니 마땅히 그 법문을 따라 수사선도(守死善道)할 뿐이오, 독립운동이라는 미명에 빠져 이교인의 뒤를 따라서는 안된다."


이에 분개한 유준근이 거세게 반박했다.

"선생이 유림 영수라 하여 안자존대(安自尊大)한 생각을 품어 민족 대표 33인을 오히려 이단이라 배척하고 국가 독립운동에도 참여치 않겠다고 하는 것이야말로 민족의 반역자이며 우리 유림단의 반역자요. 선생의 소위 수사선도(守死善道)는 무엇을 가리켜 하는 말입니까.

국가를 사랑함이란 천리(天理) 당연의 도가 아니고 무엇이며, 독립운동에 몸을 바쳤다면 죽음이 도가 아니고 무엇이며, 국가와 민족을 모르는 도가 과연 유림법문(儒林法門)의 어디에 있으며 70년이나 공맹서(孔孟書)를 읽은 선생이 오히려 공맹법문(孔孟法門)을 버린 죄인이 되려는 것입니까.

선생과 같은 유림이 있어서 우리 나라가 오랑캐의 발아래 난장판이 된 것이 아니오! 오랑캐의 사슬에서 벗어나려는 독립운동을 반대함은 스스로 오랑캐 됨을 감수하라는 것이니 인지무량호불서사(人之無良胡不瑞死)란 옛말이 선생과 같은 기세도명배(欺世盜名輩)를 가리킨 말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전우는 뉘우치는 빛이 없고 오히려 극도의 노여움에 서슬이 퍼래져서 유준근을 보고 무례폐한(無禮悖漢)이라고 말하며 문하인들을 불러 빨리 쫓아내라고 명령했기에, 결국 유준근은 성과없이 물러가야 했다고 한다. 또한 김창숙이 지은 '김정호 묘갈명'에 따르면, 김정호(金丁鎬)[1]는 전우가 유준근의 제안을 거부했다는 소식을 듣고 격분하여 "전우가 말하는 도란 무슨 도인가? 전우의 머리를 베어야 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2]

이후 체포된 유준근은 11월 6일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 1920년 초 석방되었다. 1920년 여름 콜레라가 창궐하자, 조선 총독부는 행인들에게 예방 접종을 실시했다. 그러나 유준근은 오랑캐에게 예방 접종을 맞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 여겨 이를 거부하다 그해 8월 5일 콜레라에 걸려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유준근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1] 1871~1919. 1905년 을사조약 이후 해외 독립군기지 건설 운동에 가담했으며, 1919년 3월 1일 경성에서 발발한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한 뒤 파리장서 운동을 이끌었다. 그러나 동지 규합을 위해 경남으로 내려갔다가 1919년 3월 18일 성주 가천에서 강도의 피습을 받고 사망했다.[2] 이에 대해 전우의 제자들은 당시 교통 여건상 경성에 있던 유준근이 며칠 만에 교통이 불편한 부안의 외딴섬 계화도를 왕래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설사 가능하다 하더라도 유준근은 이미 3월 5일경 순종에게 상소를 공동 제출한 일로 경찰에 체포되어 있어 지방을 왕래할 상황이 아니었다고 반박했다. 이후 김창숙은 자신이 기술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며 재반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