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지역별 현황/수도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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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울특별시[편집]


서울특별시 최초의 유치원은, 1900년에 설립된 경성공립유치원이다. 지금의 중구에 설립되었으며, 일본인 전용 유치원이었다.

서울이 아직 경성부이던 시절인 1910년에는 정동유치원이 세워졌다. 1913년에는 백인기에 의해 경성유치원[1]이 세워졌는데, 한국 땅에서 최초로 한국인이 설립한 유치원이며 한국인 아이들을 위한 유치원이었다. 소재지는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재동이며, 종로구 최초의 유치원이기도 하다.

1914년에는 이화학당에 이화유치원이 설립되었다(최초의 개신교계 유치원). 이화학당은 1886년 미국인 감리교 선교사 메리 스크랜튼이 중구 정동에 세운 한국 최초의 여학교로, 차츰 학년과 학제가 정비되면서 유치원도 개설된 것. 첫 원생은 1908년~1910년생이었다.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는 정동에 그대로 남았으나, 이화유치원은 1935년 이화여자전문학교와 함께 서대문구 신촌으로 이전되었고, 오늘날까지 신촌에 있다(이화여자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유치원). 이화유치원이 세워진 후로 용산유치원, 혜라유치원 등의 유치원들도 설립되었다.

불교계 유치원은 1925년에 설립된 화광유치원이, 가톨릭계 유치원은 1937년 종로구 혜화동에 천주교 서울대교구 혜화동 성당 부설로 설립된 혜화유치원이 최초이다. 또한 일제 강점기일본어를 중점적으로 가르쳤던 애국유치원[2]도 주로 서울에 설립됐다. 이화유치원 첫 졸업생은 거의 사망했고, 살아 있더라도 113~116세의 어르신이 됐다. 현재 설립 110주년을 맞을 만큼 역사가 매우 깊다. 이런 이유로 조부모나 증조부모가 다녔던 유치원에 그 자손들이 다니는 등 3~4대가 한 유치원을 다녔던 보기 드문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3] 일본인 자녀의 경우는 1894년~1896년생이 최초의 원생이었다. 물론 현재는 모두 사망.

과거 1950~60년대 서울의 유치원 취원율은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았는데[4], 이는 부유층들이 서울의 사대문안 등에 대거 거주했고[5], 당시 유치원들이 특수초등학교 입시 대비를 해 주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부유층 학부모들이 몰린 것이다. 그냥 시대적인 배경 탓에 연세 70이 넘은 어르신들 중 대학교는 나왔지만 유치원은 못 다녀 본 사람이 많았을 뿐이다.[6]

1908년생부터 1940년생까지는 유치원생 시기에 서울이 경기도 소속이었으나, 1941년, 1942년생은 유치원 재학 도중에 서울이 경기도에서 분리됐으며 1943년생부터는 유치원 입학 이전에 서울이 경기도에서 분리됐다.

한강 이남 지역에 설립된 최초의 유치원은 1927년 영등포구(당시 시흥군 영등포읍)에 개원한 흥화유치원이다. 이 곳 최초의 원생은 1921년~1923년생으로 현재 살아 있다면 100~103세가 되었다. 당시 원생은 주로 현재의 영등포구에 살았고, 드물게는 구로구 구로동, 동작구 노량진동, 양천구 목동(!!!) 등지에서도 왔다고 한다.

서울의 유치원 확장은 서울의 시가지 확장과 대체로 일치한다. 버스 권역으로 보면 0권역[7]-6권역[8]-5권역[9]-3권역[10]-1권역[11]-2권역[12]-7권역[13]-4권역[14] 순인데, 처음에는 시내에 많은 사람이 모여 살다가 점차 외곽으로 거주지를 옮기면서 유치원들도 자연히 그에 맞춰 지은 것이다.

또한 시가지 팽창에 따라 기존에 시내에 있던 유치원들이 외곽으로 이전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로 중앙유치원이 있는데, 1916년 설립 당시에는 중구 정동에 있었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50년 가까이 그 위치를 유지하다가 1998년 동작구 흑석동으로 이전했다.[15] 운경유치원은 1959년부터 1977년까지는 용산구 동자동, 1978년부터 1990년까지는 강남구 청담동, 1991년부터 2006년까지는 송파구 가락동에 있었다가 끝내 폐원되었다. 1999년생들이 이 곳의 마지막 졸업생이 됐고, 2000년, 2001년, 2002년생들은 다른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으로 분산 배치됐다. 관내 866곳의 유치원 중 국공립은 138곳이었으나, 국공립은 226곳으로 늘어났고, 사립유치원의 잇따른 폐원으로 822곳으로 줄었다. 다만, 2019년에는 관악구의 구암유치원이 국내 최초의 매입형 유치원이자 협동조합 유치원으로 개원했다. 또한 현행법상 불법인 임대유치원이 서울에만 50곳 넘게 운영 중이다. 유치원이 많지 않던 시절에는 시흥군 서면→소하읍, 양주군 구리면→구리읍, 고양군 신도면→신도읍 등 서울과 인접한 읍이나 면 지역에 사는 아이들이 버스나 기차를 타고 서울에 있는 유치원으로 원정 통학을 하기도 했다. 역으로 서울의 대규모 확장 이전에는 창동, 도봉동, 방학동, 독산동, 시흥동, 오류동, 온수동 등 현재의 서울 외곽 지역에 살던 아이들이 자신이 사는 리를 관할하는 군 소재지[16]나 서울에 있는 유치원으로 원정 통학을 하기도 했다. 이는 서울의 지형만 봐도 답이 나온다. 서울에서 산이라고 명함을 내밀 수 있는 산북한산, 도봉산, 수락산, 관악산 정도만 있는데, 북한산과 도봉산, 수락산은 강북에 있고, 강남 지역에서 산이라고 명함을 내밀 수 있는 산이라고는 관악산 정도밖에 없어서 (그나마 정상은 경기도 과천시에 있다. 우면산, 대모산, 아차산, 용마산은 브리태니커 기준 (해발 2,000피트 이상) 산이라고 하기에는 높이가 너무 낮다. 거의 네덜란드, 벨라루스, 세네갈 수준이다.) 개발이 용이해[17] 인구가 몰리면서 강남 지역에 유치원이 많이 들어서고, 강북에서도 강남으로 명문 고등학교들이 옮겨 가면서[18] 유치원도 옮겨 가는 것이다.

1950~60년대에 시도별로 유치원 취원율을 계산하면 서울이 꼭 가장 높았다[19]고 한다. 시골에서 5,000명에 1명, 중소도시에서 1,000명에 1명, 지방 중견도시에서 500명에 1명 꼴로 유치원을 다닐 때 서울은 200~300명에 1명 꼴로 유치원 다닌 아이들이 있을 정도. 이 시기 유치원 취원율이 1%에 불과했던 것도 시골 지역의 유치원 취원율이 낮아서 평균을 깎아먹어 생긴 것이다.

서울은 생활권이 구별로 나뉘지 않아 다른 구의 유치원 버스가 지나다니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송파구 풍납동이 있는데, 풍납동에는 우일유치원, 동화나라유치원, 한가람유치원, 현대유치원 등 사립유치원이 있지만, 그 곳의 정원이 다 차거나, 그 지역 유치원 추첨에서 다 떨어졌거나 하는 이유로 강동구에 있는 유치원으로 보내는 경우가 있어, 풍납동의 주요 도로인 풍성로토성로에서 유정유치원[20], 준현유치원[21], 천호유치원[22] 등 강동구의 유치원 버스를 볼 수 있다. 이런 경우는 송파구 잠실동-강남구 삼성동[23], 송파구 방이동-강동구 둔촌동, 성북구 장위동-노원구 월계동, 강남구 신사동-서초구 잠원동, 성동구 성수동-광진구 화양동 등에서 더 볼 수 있다. 같은 동에 사는 아이라도 어느 아파트에 사느냐에 따라 유치원이 갈리기도 한다.

사립유치원은 684군데가 있는데, 전국에서 가장 많은 수준이다. 전세난으로 경기도충청남도[24]로 빠져나가는 인구와 공공기관공기업 이전으로 인한 이주자, 은퇴자의 수도권 인접 비수도권 이주, 제주도 이주 열풍으로 충청남도, 충청북도, 강원도, 제주특별자치도로 빠져나가는 인구가 많아지고 해외로 이민 등을 가는 사람들 대부분의 이전 거주지가 서울인데도 이 정도다.[25]

구별로는 종로구 14곳, 중구 10곳, 용산구 13곳, 성동구 19곳, 광진구 30곳, 동대문구 24곳, 중랑구 27곳, 성북구 39곳, 강북구 20곳, 도봉구 26곳, 노원구 58곳, 마포구 18곳, 서대문구 22곳, 은평구 38곳, 강서구 45곳, 양천구 39곳, 영등포구 33곳, 구로구 26곳, 금천구 13곳, 동작구 29곳, 관악구 26곳, 서초구 19곳, 강남구 25곳, 송파구 45곳, 강동구 26곳이다. 강북 지역에 358곳, 강남 지역에 326곳이다. 강북 지역이 52.3%, 강남 지역이 47.7%로, 강북 지역에 사립유치원이 더 많다. 이렇게 된 이유는, 강남에 영어학원 유치부(영어유치원[26])가 많이 들어섰고, 강남에 사는 사람들이 자녀를 일반 유치원보다는 영어학원 유치부[27]에 더 많이 보내기 때문이다.

참고로 서울의 신당동 근화유치원은 박근혜 前 대통령이 졸업한 곳[28]이며, 혜화유치원은 장영신[29]이, 서대문유치원은 연예인 구봉서[30]가, 밀알유치원은 연예인 문희준[31], 리라초등학교 부설유치원은 스케이트 선수 이승훈[32]이 졸업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강남구의 초이유치원은 최순실이 설립했고, 아란유치원은 우병우의 아들이 다녔다[33]고 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1964~1966년에 유치원을 다녔다.[34] 축구선수 이강인[35]의 어머니[36]는 결혼 전 서울에서 유아교사로 근무했다. 시인 김수영은 1925~1927년에[37], 원로배우이자 전직 중랑구 갑 국회의원이었던 이순재는 1938~1940년에[38], 코미디언 김수용은 1970~1972년에[39], 유재석은 1976~1978년에[40], 용준형은 1992~1995년에[41], 김현수는 1991~1993년[42]에, 류수영은 1983~1985년 사이에[43], 장나라는 1985~1987년 사이에[44], 국내에서 최초로 수영에서 금메달을 딴 박태환은 1992~1995년 사이에[45], 국내 최초로 NBA에 진출한 농구선수 하승진은 1989년~1991년 사이에 서울에서 유치원을 다녔다.[46] 이다지도 1989-1991년 사이에 서울에서 유치원을 다녔다[47]고 한다.

1950년대 이후 서울에 개성시, 평안도, 황해도 등지에서 실향민이 몰려 오면서 강북 지역을 중심으로 조부모, 증조부모, 고조부모 중 실향민 출신인 원아가 있는 곳도 있을 정도이다. 또한 산업화로 인해 다양한 지역에서 아이들이 몰려 오면서[48] 1970~80년대 서울에 있는 유치원에서는 여러 지역에서 온 원아들의 다양한 사투리를 들어 볼 수 있을 정도이다. 심지어는 유아교사들도 고향 사투리 억양이 섞인 표준어를 쓰거나 아예 자기 고향의 사투리를 쓸 정도.

2022년에는 이태원 압사 사고의 여파로 전국적으로 유치원의 할로윈 행사를 취소하는 분위기였는데 서울은 그 트라우마가 강하게 남아 있어 할로윈 행사를 취소한 유치원이 많았다.

과거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49]이나 강동구 성내동, 마포구 망원동의 유치원들은 여름•가을철 홍수로 인한 휴원이 잦았으나, 현재는 홍수로 인한 휴원이 줄고, 태풍으로 인한 휴원이 늘었다. 겨울에 건조한 탓에 폭설로 인한 휴원은 더 적다.[50] 2016년 89세[51]의 나이로 퇴임한 국내 최고령 유치원 교사 역시 서울에서 근무했는데, 남한 출신도 아니고 무려 황해북도 사리원시 출신의 실향민이다. 1970년대에는 데모가 엄청나게 많아 강북 지역의 유치원들이 휴원 혹은 단축수업을 했고[52], 1988년 9월 17일부터 10월 2일 사이에는[53] 1988 서울 올림픽으로 인해 서울에 있는 유치원들이 단축수업을 했다. 2010년대 이후로는 가을부터 이듬해 까지 미세먼지로 인한 휴원이 잦아지고 있다.

서울에는 아파트가 매우 많아서, 아파트 단지 하나에 유치원이 2곳 이상 있거나[54], 공립유치원과 사립유치원이 모두 있는 아파트 단지도 있을 정도이다. 인구도 많아서[55] 가톨릭, 개신교, 불교 계통 유치원이 모두 있는 도시 중 하나이다.[56] 1960년대 379만 3,280명이던 인구가 1990년 1,061만 2,577명으로 정점을 찍은 뒤 계속 감소해서 2021년 966만 8,465명으로 줄어드는 등 증감을 반복하는데도[57], 유치원도 같이 늘었다.

원생과 교사의 성씨 분포는 전국적인 성씨 분포와 유사한 편이다. 서울의 상위 10개 성씨는 김-이-박-최-정-조-강-윤-장-임 순서인데 구에 따라 장씨가 윤씨보다 많다거나, 조씨가 강씨보다 많다는 등의 세세한 변화까지 따지면 원생의 성씨 분포가 달라질 수도 있다. 다른 지역에 비해 희귀 성씨를 가진 원생도 상대적으로 많은 편.

2021년 서울에서는 공립유치원 비율이 처음으로 30%를 넘겼는데 저출산과 코로나19 사태로 사립유치원이 잇따라 폐원되고 대신 공립이 늘어나면서 생긴 결과이다.

서울에 방송국이 많이 있다는 특성상 서울에 사는 유아들은 유치원 시절 방송국 소풍을 갈 수 있으며, 서울 동북부에서는 어린이대공원으로, 서울 강남4구에서는 올림픽공원이나 롯데월드 어드벤처로 많이 간다. 이는 인근의 하남, 성남, 구리, 의정부, 도농, 덕소, 팔당, 퇴계원, 사릉, 평내, 마석, 퇴촌, 남종, 양수리 일대는 물론 멀리는 포천, 연천, 철원에 있는 유치원에서도 서울로 소풍을 많이 온다.

1999년에는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화재사고로 서울 소망유치원 원생들이 사망했고[58], 2020년 9월 14일에는 대왕초등학교 병설유치원 원생 1명이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기도 했다. 같은 해에는 해당 유치원에서 근무하는 28세 여교사가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2번 (3월 12일, 5월 13일) 받기도 했다. 또 같은 해 9월 5일에는 성동구 아이들세상유치원 원생 1명이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았으나 교사와 다른 아이들은 모두 음성이었다. 2020년 12월 서울의 유치원들은 모두 원격수업으로 전환되었다. 2021년 2월 17일부터 20일까지 서울 양천구의 유치원에서 원생과 가족 등 18명이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았고 같은 해 4월 25일과 27일에도 유치원생 1명, 5월 9일, 12일, 21일에는 동대문구의 병설유치원 유치원 교사 4명, 6월 28일과 7월 15일에는 유치원생 3명이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았다.

2022년 12월 15일 서울의 한 유치원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1.1. 중구[편집]


해방 전 서울의 유치원은 종로구, 중구, 용산구 등 주로 시내에 있었다. 이 시기에 설립된 유치원은 대략 다음과 같다. 중구 최초의 유치원은 1900년 경성공립유치원. 일본인 전용이었다. 이후 한국인을 위한 유치원으로 1910년 정동유치원, 1914년 이화유치원이 설립됐는데 경성공립유치원은 한성부 시절에, 나머지 2곳은 경성부 시절에 설립되었다. 첫 입학생은 1894년~1896년생이고, 첫 졸업생은 모두 사망했다. 당시 원생들은 모두 을지로회현동, 명동 등 중구의 도심 지역에서 살았다.

1.2. 종로구[편집]


1913년 경성유치원. 한국 땅에서 최초로 한국인이 설립했다. 1937년 천주교 서울대교구 혜화동 성당 부설로 설립된 혜화유치원[59]도 이곳에 있다. 당시 경성부 관할. 당시 원생들은 종로구 도심 지역에서 살았다. 첫 입학생은 1907년~1909년생이고, 첫 졸업생이 현재 살아 있다면 116~117세이다.

1.3. 용산구[편집]


용산구[60] 최초의 유치원은 1915년 용산유치원. 당시 경성부 관할. 당시 원생들은 용산동, 이촌동, 후암동에 살았다고 한다. 한창 때에는 성동구, 강남구에서도 버스 등을 타고 오기도 했다. 첫 입학생은 1909년~1911년생이고, 첫 졸업생이 현재 살아 있다면 114~115세이다.

1.4. 영등포구[편집]


그러다가 1920년대 이후 서울의 시가지 확장에 따라, 점차 외곽 지역에도 유치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 무렵 생겨난 유치원들은 다음과 같다. 영등포구 최초의 유치원은 1927년 흥화유치원, 당시 경기도 시흥군 영등포읍 관할. 1950년대 이전에 한강 이남에서 가장 큰 동네는 영등포였는데 이미 1927년에 흥화유치원, 1929년에 영등포유치원이 설립될 정도였다. 당시 원생들은 지금의 영등포구 영등포동, 신길동, 당산동동작구 노량진동, 대방동, 흑석동에서 살았다고 한다. 노량진[61]에 유치원이 설립되는 1955년까지 강남 지역에 유치원이 새로 들어오지 못했고, 여의도는 1970년대까지 제대로 된 유치원 교육의 혜택을 누리지 못했다. 첫 입학생은 1921년~1923년생이고, 첫 졸업생이 현재 살아 있다면 102~103세이다.

1.5. 동작구[편집]


1955년 노량진교회 부설 유치원, 당시 영등포구 관할.[62] 첫 입학생은 1949년~1951년생이고, 첫 졸업생이 현재 74~75세이다.

1.6. 강동구[편집]


1956년 성애유치원, 당시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 관할, 천호동교회 부설로 설립됐다 1959년 폐원. 천호동은 강남 8학군 지역 중 가장 먼저 유치원이 설립됐는데, 이는 일제강점기까지 천호동이 한강 이남에서 영등포 다음으로 큰 동네였기 때문이다. 다만, 1960년대에 천호동을 제외한 강동구의 나머지 동[63]들은 모두 시골이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유치원은 1972년 설립된 천호유치원이다. 당시 원생은 지금의 강동구 천호동, 성내동, 암사동송파구 풍납동[64], 방이동[65]에 살았다고 한다. 이후 1961년 천호제일감리교회 부설 낙원유치원이 설립되었는데, 역시 원생들 대부분이 현재의 강동구 천호동성내동암사동명일동길동송파구 풍납동[66]에 살고 있었다. 첫 입학생은 1950년~1952년생이고, 첫 졸업생이 현재 73~74세이다.

1.7. 성동구[편집]


1957년 성호교회 부설 유치원. 당시 원생들은 현재의 금호동, 옥수동, 응봉동과 용산구 한남동[67]에 살고 있었다. 현재는 어린이집으로 용도가 변경되었고 현존하는 곳 중 최고는 1966년 성심유치원이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왕십리 성당 부설이다. 1950년대 이전에는 성동구 왕십리동에 사는 아이들이 경원선 기차나 서울전차를 타고 용산구의 유치원으로 원정 통학을 하기도 했고, 강남구 압구정동, 신사동, 청담동, 삼성동, 강동구 천호동, 성내동, 송파구 풍납동, 신천동[68], 잠실동에서 버스로 원정 통학을 하기도 했다.[69] 첫 입학생은 1951년~1953년생이고, 첫 졸업생이 현재 72~73세이다.

1.8. 노원구[편집]


1959년 공능교회 부설 신공덕유치원, 당시 양주군 노해면 관할.[70] 신공덕유치원은 양주군 노해면 신공덕리가 서울특별시 성북구로 편입되면서 공릉유치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당시 원생은 지금의 노원구 공릉동, 하계동, 중랑구 묵동, 성북구 월곡동, 장위동, 경기도 구리시 갈매동에 살고 있었다. 첫 입학생은 1953년~1955년생이고, 첫 졸업생이 현재 70~71세이다.

1.9. 동대문구[편집]


1961년 경희유치원. 경희대학교와 같은 재단이다. 이전에는 버스, 전차, 기차 (경원선)를 타고 원정 통학을 해야 했고, 그 이후에는 중랑구는 물론 경기도 구리시, 남양주시[71]에서 원정 통학을 왔다. 당시 원생들은 동대문구 청량리동, 전농동, 회기동, 휘경동, 이문동과 중랑구 중화동, 상봉동에 살았다고 한다. 첫 입학생은 1955년~1957년생이고, 첫 졸업생이 현재 68~69세이다.

1.10. 마포구[편집]


1961년 배영유치원. 당시 원생들은 마포구 동교동, 서교동, 합정동, 상수동에 살았다고 한다. 이전에는 버스, 전차, 기차 (용산선)를 타고 원정 통학을 해야 했고, 마포구 서부의 상암동성산동은 1970~80년대까지도 은평구로 원정 통학을 해야 했다. 첫 입학생은 1955년~1957년생이고, 첫 졸업생이 현재 68~69세이다. 참고로 한국 유일의 일본인 유치원도 이 곳에 있다.

1.11. 은평구[편집]


1962년 성온유치원, 당시 서대문구 관할. 원생들은 은평구 구산동, 응암동, 역촌동, 대조동, 신사동에 살았다고 한다. 이전에는 버스기차 (경의선)를 타고 원정 통학을 해야 했다. 심지어 마포구 상암동, 성산동[72]에 살던 아이들도 은평구 수색동의 유치원으로 오기도 했다. 첫 입학생은 1956년~1958년생이고, 첫 졸업생이 현재 67~68세이다.

1.12. 서대문구[편집]


1963년 신촌유치원.[73] 이전에는 버스, 전차, 기차를 타고 도심으로 원정 통학을 해야 했다. 당시 원생들은 현재의 서대문구 신촌동, 가좌동, 대현동과 마포구 아현동에서 살았다고 한다. 첫 입학생은 1957년~1959년생이고, 첫 졸업생이 현재 66~67세이다. 한성화교유치원도 이 곳에 있다.

1.13. 성북구[편집]


성북구[74] 최초의 유치원은 1964년 새싹유치원. 이전에는 버스, 전차, 기차 (경춘선[75])를 타고 다른 구로 원정 통학을 해야 했다. 당시 원생들은 정릉동, 돈암동, 동선동, 안암동에 살았다고 한다. 첫 입학생은 1958년~1960년생이고, 첫 졸업생이 현재 65~66세이다.

1.14. 송파구[편집]


1965년 거암교회 부속유치원, 당시 성동구 송파출장소 관할.[76] 당시 원생들은 거여동, 마천동, 오금동에 살았다고 한다. 첫 입학생은 1959년~1961년생이고, 첫 졸업생이 현재 64~65세이다.

1.15. 광진구[편집]


1966년 자양유치원[77]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유치원은 1968년 선경유치원이며 두 곳 모두 당시 성동구 관할. 당시 원생은 지금의 광진구 자양동과 송파구 잠실동에 살았다고 한다. 이전에는 버스를 타고 원정 통학을 해야 했다. 개원 초기에는 광진교 너머의 강동구 천호동송파구 풍납동[78]에서 오는 아이들도 있었다. 게다가 광진구 자양동에 사는데 풍납동 우일유치원으로 오기도 한다. 첫 입학생은 1960년~1962년생이고, 첫 졸업생이 현재 63~64세이다.

1.16. 관악구[편집]


서울에 편입된 이후에도 한동안 시골이었던 지역들은, 1970년대에 대규모로 개발한 이후에야 겨우 유치원이 생겨났다.[79] 대표적인 예는 대략 다음과 같다. 관악구 최초의 유치원은 1972년 성도유치원, 당시 영등포구 관할.[80] 당시 원생들은 관악구 신림동에 주로 살았고 봉천동이나 동작구 신대방동 등지에서 오기도 했으며 현재는 폐원되었다. 첫 입학생은 1966년~1968년생이고, 첫 졸업생이 현재 57~58세이다.

1.17. 강남구[편집]


1972년 성요셉유치원. 당시 성동구 영동출장소 관할. 청담동 소재이며, 까리따스 수녀회에서 운영한다. 당시 원생들은 청담동, 삼성동, 압구정동, 논현동에 주로 살았고 송파구나 성동구에서 오기도 했다. 1956년 지금의 강동구 천호동에 설립됐다 3년 만에 폐원된 성애유치원을 제외하면, 강남 8학군 지역에서 최초로 설립된 유치원이다.[81] 첫 입학생은 1966년~1968년생이고, 첫 졸업생이 현재 57~58세이다.

1.18. 강서구[편집]


1973년 새싹유치원, 당시 영등포구 관할.[82] 당시 원생들은 강서구 화곡동, 발산동과 양천구 신정동, 목동에 살았다. 첫 입학생은 1967년~1969년생이고, 첫 졸업생이 현재 56~57세이다.

1.19. 강북구[편집]


1973년 성체유치원.[A] 가톨릭 인보성체수녀회에서 운영. 인보성체수녀회 서울 분원과 한 담장 안에 있고, 바로 옆에는 천주교 서울대교구 수유동 성당이 이웃해 있다. 당시 도봉구 관할. 원생들은 보통 강북구 수유동, 번동이나 도봉구 쌍문동에서 살았고 드물게 창동에서도 왔다. 그 전에는 버스를 타고 성북구로 원정을 가야 했다. 첫 입학생은 1967년~1969년생이고, 첫 졸업생이 현재 56~57세이다.

1.20. 구로구[편집]


1974년 은별유치원, 당시 영등포구 관할.[83] 당시 원생들은 구로구 개봉동, 오류동, 고척동과 경기도 광명시 광명동에서 살았다. 첫 입학생은 1968년~1970년생이고, 첫 졸업생이 현재 55~56세이다.

1.21. 양천구[편집]


1976년 성보유치원. 당시 영등포구 관할.[84] 당시 원생들은 양천구 목동, 신월동, 신정동과 강서구 화곡동, 염창동, 영등포구 양평동에 살았다고 한다. 첫 입학생은 1970년~1972년생이고, 첫 졸업생이 현재 53~54세이다.

1.22. 금천구[편집]


금천구[85] 최초의 유치원은 1977년 독산유치원, 당시 영등포구 관할.[86] 첫 입학생은 1971년~1973년생이고, 첫 졸업생이 현재 52~53세이다.

1.23. 서초구[편집]


1978년 새성민유치원, 당시 강남구 관할.[87] 당시 원생들은 서초구 서초동, 방배동과 동작구 사당동에서 살았다. 첫 입학생은 1972년~1974년생이고, 첫 졸업생이 현재 51~52세이다.

1.24. 도봉구[편집]


1972년 2월에 도봉구 도봉동에 사설유치원인 도봉유치원이 설립되었으며, 1966년~1967년생이 입학하여 1973년2월에 1회 졸업생이 배출되었다.
1980년 정의유치원. 한신초등학교, 정의여자중학교, 정의여자고등학교와 함께 학교법인 삼산학원에 속해 있으며 개신교 계열이다.[88] 당시 원생들은 도봉구 쌍문동, 창동, 방학동과 강북구 우이동에서 살았다고 한다. 첫 입학생은 1974년~1976년생이고, 첫 졸업생이 현재 49~50세이다.

1.25. 중랑구[편집]


1982년 색동유치원, 당시 동대문구 관할.[89] 당시 원생들은 현재의 중랑구 중화동, 면목동, 상봉동과 동대문구 휘경동에서 살았다고 한다 첫 입학생은 1976년~1978년생이고, 첫 졸업생이 현재 47~48세이다.

2. 인천광역시[편집]


1900년 지금의 인천광역시 중구에 설립된 인천유치원이 최초이다. 그러나 이 유치원은 일본인 전용이었다. 인천에서 최초로 한국인을 위해 설립된 유치원은, 1917년 현재의 인천광역시 동구에 설립된 영화유치원이다. 인천에서 유치원을 다닌 최초의 한국인 원생들은 1911년~1913년생으로, 첫 졸업생은 생존해 있을 경우 현재 112~113세이다. 일본인의 경우는 1894년~1896년생들이 최초의 원생이었고 1894~1910년생인데 인천에서 유치원에 다닌 적이 있었다면 일본인이다. 당시 원생들은 지금의 인천시 중구 본토부와 동구 일대에서 살았다고 한다.

유치원이 드물었던 시절에는 부천시시흥시, 멀리는 안산시에서 버스나 기차를 타고 인천에 있는 유치원으로 원정 통학을 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현재는 오히려 김포시 북부에서 인천으로 오는 경우가 늘고, 부천과 안산, 시흥에서는 자기 지역에 있는 유치원을 다니는 경우가 늘어났다.[90]

1911년생부터 1975년생까지는 유치원생 시기에 인천이 경기도 소속이었으나, 1976년, 1977년생은 유치원 재학 도중에 인천이 경기도에서 분리됐으며 1978년생부터는 유치원 입학 이전에 인천이 경기도에서 분리됐다.

또한 시가지 팽창에 따라 기존에 중구, 동구에 있던 유치원들이 다른 구로 이전하기도 했다. 강화군옹진군을 제외한 나머지 인천 지역에 있는 사립유치원 수는 총 258곳인데 중구 9곳, 동구 7곳, 미추홀구 36곳, 부평구 43곳, 남동구 61곳, 서구 46곳, 계양구 26곳, 연수구 30곳이 있다. 1960년대 52만 5,827명이던 인구가 2019년 286만 5,345명으로 늘면서[91] 같이 늘었다. 인천에도 아파트가 매우 많아 아파트 단지 내에 유치원이 여러 곳 있는 경우도 있다.

인천에는 황해도에서 내려온 실향민들이 많아 인천의 유치원에서는 조부모, 증조부모, 고조부모 대에 황해도 실향민인 원아들도 있을 정도이다. 이런 이유로 1990년대까지도 황해도 사투리 억양이 들어간 표준어를 쓰거나 아예 황해도 사투리를 쓰는 원생과 교사가 있었고, 지금도 이런 사람이 드물게나마 있다. 2010년대 이후 가을부터 사이에 미세먼지로 인한 휴원이 서울만큼 잦아지고 있다.

이름만 봐서는 경상북도 청송군에 있다는 오해를 사기 딱 좋은 청송유치원이 인천에만 2곳(연수구 1곳, 부평구 1곳) 있다. 참고로 모두 사립이다.[92] 2017년 박근혜 탄핵 사건 이후 유명세를 탄 '근혜유치원'이 인천 남동구에 있다.

야구선수 류현진1991년~1993년 사이에 이 곳에서 유치원을 다녔다[93]고 한다. 축구선수 이강인2006년~2007년 사이에 YMCA 아기스포츠단에 다녔다.[94]

원생과 교사의 성씨 분포는 전국 대부분의 지역과 유사하나, 한씨가 임씨보다 더 많다고 한다. 실제로 인천의 상위 10개 성씨는 김-이-박-최-정-조-강-윤-장-인데 동구는 윤씨가 강씨보다 많은 등의 세세한 변화까지 따지면 원마다 성씨 분포는 달라질 수도 있다.

사립유치원에 대한 불신이 높아지면서 계양테크노밸리에 설립되는 모든 유치원은 공립으로 세워지게 된다. 이는 다른 3기 신도시교산신도시 등도 동일.

2020년 6월 14일에는 명헌초등학교 병설유치원 원생 1명이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았다. 또 2021년 10월에는 인천에서 유치원발 집단감염이 발생했다.

2.1. 중구[편집]


해방 전 인천의 유치원은 중구 (영종도 제외)와 동구 지역을 중심으로 설립되었다. 중구 본토는 경인선이 개통하고 얼마 안 돼 유치원이 설립돼 현재는 모두 사망한 19세기 출생자들까지 유치원에 다닐 수 있었다. 그러나 영종도는 경기도 옹진군 용유면 관할이었던 1981년 용유초등학교 병설유치원. 첫 입학생은 1975년~1977년생이고, 첫 졸업생이 현재 48~49세이다.

2.2. 동구[편집]


동구의 경우 인천 시가지가 형성된 지 얼마 되지 않은 1917년에 유치원이 설립돼 현재 112~113세인 어르신들도 유치원을 다녔을 정도이다.

2.3. 미추홀구[편집]


1960년대 이후부터 미추홀구[95] 등 인근에도 유치원이 많이 생겨났다. 미추홀구 최초의 유치원은 1968년 영천유치원, 당시 경기도 인천시 남구. 첫 입학생은 1962년~1964년생이고, 첫 졸업생이 현재 61~62세이다.

2.4. 부평구[편집]


1970년 성심유치원, 당시 경기도 인천시 북구. 천주교 인천교구 부평4동 성당 부설. 첫 입학생은 1964년~1966년생이고, 첫 졸업생이 현재 59~60세이다.

2.5. 남동구[편집]


1976년 선미유치원, 당시 경기도 인천시 남구. 첫 입학생은 1970년~1972년생이고, 첫 졸업생이 현재 53~54세이다.

2.6. 계양구[편집]


1981년 계양초등학교 병설유치원, 당시 경기도 김포군 계양면 관할. 첫 입학생은 1975년~1977년생이고, 첫 졸업생이 현재 48~49세이다.

2.7. 서구[편집]


1981년 검단초등학교 병설유치원, 당시 경기도 김포군 검단면 관할. 첫 입학생은 1975년~1977년생이고, 첫 졸업생이 현재 48~49세이다. 검단 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서구는 인천직할시 북구 관할이었던 1984년 설립된 예일유치원이 최초이다. 첫 입학생은 1978년~1980년생이고 첫 졸업생이 현재 45~46세이다.

2.8. 연수구[편집]


1982년 청학유치원, 당시 인천직할시 남구. 첫 입학생은 1976년~1978년생이고, 첫 졸업생이 현재 47~48세이다.

2.9. 강화군[편집]


1926년 설립된 강화유치원이 최초이다. 강화유치원은 강화군이 아직 경기도이던 시절에 개원되었다. 당시 원생들은 지금의 강화읍에 살았다고 한다. 강화도에서 유치원을 다닌 최초의 원생들은 1920년~1922년생으로, 첫 졸업생은 현재 생존해 있을 경우 103~104세이다.

강화도에 유치원이 설립된 역사는 매우 깊다. 수도권에 남아 있는 5개의 군들 가운데 가장 먼저 유치원이 세워진 동네이자, 국내에서 3번째로 유치원이 세워진 섬이다. 실제로 국내에서 영도, 제주도 다음으로 유치원이 생겨난 섬이 강화도일 정도다. 거제도, 울릉도, 영종도, 대부도 등 웬만한 섬들은 강화도보다 최소 30년 늦게 유치원이 들어왔다.

또한 경기도청 소재지인 수원시는 물론, 지금은 광역시가 된 울산시나, 포항시, 구미시, 용인시 등 어지간한 도시들보다도 강화도에 유치원이 먼저 생겨났다.

사립유치원은 4곳이다. 1960년대 11만 8,482명이던 인구가 2021년 6만 9,203명으로 줄면서[96], 유치원도 같이 줄었다. 이런 이유로 강화도에 사는 유아들이 경기도 김포시로 원정 통학을 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97] 서도초등학교 병설유치원은 수도권에서 단 둘밖에 없는 전체 원생 1명인 유치원으로 등극했다.

군부대가 산재한 지역 특성상 원생의 대부분이 해당 지역에서 근무하는 해병대 장교 또는 부사관의 자녀들이다. 또한 강화군 거주 청년들은 상근예비역에 선발되기 쉬워 유치원 동창이나 선후배가 같은 부대에서 복무하는 경우도 생긴다.[98]

강화군은 성씨 분포상 한씨최씨보다 많아[99] 유치원 중 한씨가 최씨보다 많은 곳이 많다. 실제로 강화도 상위 10개 성씨는 김, 이, 박, 한, 최, 정, 황, 고, 조, 유씨로 수도권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강, 윤, 장씨가 10위 안에 못 드는 지역이다.

축구선수 황재원이 이 곳에서 유치원을 다녔다.

아직까지 유치원생인 코로나19 확진자는 없다.

2.10. 옹진군[편집]


1963년 설립된 진촌유치원이 최초이다. 옹진군이 아직 경기도이던 시절에 개원되었다. 지금은 인천광역시 중구 관할로 넘어간 용유초등학교 병설유치원[100]도, 1981년 옹진군에서 개원되었다. 옹진에서 유치원을 다닌 최초의 원생들은 1957년~1959년생으로, 첫 졸업생은 현재 66~67세이다.

사립유치원은 2곳 있다. 1960년대 1만 7,817명이던 인구가[101] 1973년 부천군이 폐지되면서 북도면, 영종면, 용유면, 영흥면, 덕적면, 대부면을 넘겨 받고 5만 1,237명까지 늘어난 뒤 영종도 (영종면)와 용유도 (용유면)를 인천광역시 중구로, 대부도 (대부면)를 경기도 안산시로 넘겨 주면서[102] 그만큼 인구가 빠져 나가 2021년 2만 455명으로 줄었는데도[103] 거의 그대로다. 두 사립유치원은 모두 백령면에만 있어서, 원생 대부분은 백령도에서 복무하는 직업군인의 자녀들이다. 향후 인구 감소로 옹진군이 수도권 최초의 사립유치원 없는 군이 될 수도 있다. 현재 옹진군에 사는 유아들은 대부분 자신이 거주하는 섬에 있는 병설유치원을 다니고, 영흥면 등 일부 지역에서만 사립유치원 교육의 혜택을 받을 정도이다. 심지어 인천용현남초등학교 자월분교장 병설유치원은 원생이 단 1명밖에 없다.

원생과 교사의 성씨 중 윤씨가 임씨보다 적다고 한다. 실제로 옹진군의 10대 성씨는 김, 이, 박, 최, 정, 강, 장, 조, 임, 윤 순서인데 유치원마다 성씨 분포가 달라서 김씨 다음에 바로 박씨로 넘어가는 곳도 있다고 한다.

아이돌 정아가 이 곳에서 유치원을 다녔다고 한다.

아직까지 유치원생인 코로나19 확진자는 없는데 이는 옹진군의 코로나19 확진자가 매우 적기 때문이다.

3. 경기도[편집]



3.1. 여주시[편집]


1924년 설립된 여주유치원이 최초로, 여주시가 아직 여주군이었던 시절에 개원되었다. 여주시 인구의 10배나 되는 용인시고양시보다 41년, 4배나 되는 파주시보다 42년, 9배나 되는 성남시보다 46년, 바로 옆 동네인 이천시보다 1년, 광역시가 된 울산시보다 6년, 도청 소재지인 수원시보다 4년이나 먼저 유치원이 설립된 것이다. 같은 시기 유치원이 설립된 지역으로는 제주도 (정확히는 제주시)가 있다. 여주에서 유치원을 다닌 최초의 원생들은 1918년~1920년생으로, 첫 졸업생은 현재 생존해 있다면 105~106세이다.

2007년생까지는 유치원생 시기에 여주가 군이었으나, 2008년, 2009년, 2010년생은 유치원 재학 도중에 여주가 시로 승격됐으며 2011년생부터는 유치원 입학 이전에 여주군이 시로 승격됐다.

서울시인천시는 현재 각각 특별시광역시이고, 개성시, 개풍군, 장단군은 북한 치하[104]이므로, 여주시대한민국이 실효지배 중인 경기도 지역 중에서 제일 먼저 유치원이 설립된 지역이 된다. (2위는 이천시, 3위는 안성시, 4위는 수원시) 개성시 최초의 유치원은 1916년 개신교 미션스쿨호수돈여학교에 설립된 부설유치원이지만[105], 호수돈여학교는 1950년 한국전쟁 중에 남쪽으로 피난하여 대전광역시에 새로이 정착했다. 현재는 호수돈여자중학교호수돈여자고등학교만 있고, 유치원은 없다.

여주시에 있는 10곳의 사립유치원 중 2곳은 가남읍 태평리에 있고, 8곳은 시내에 있다. 특히 가남읍의 중앙유치원은 태평리 버스정류장에서 가까운 위치에 있다. 1960년대 11만 820명이었던 인구가 1985년 9만 3,347명으로 줄어든 뒤 11만 1,897명까지 늘어났는데[106], 인구 대비 사립유치원 개수는 적다.

여주는 전국에서 간씨[107] 인구가 많아서 그나마 간씨 성인 원생을 보기는 쉬운 동네이다. 다만, 여주 상위 10개 성씨는 김-이-박-최-정-조-윤-장-한-임 순서라 이들 성씨에 비해서는 매우 드문 편이다.

웹툰 작가 기안84가 여주에서 유치원을 다니다가 수원으로 이사를 갔다.[108]

아직까지 유치원생인 코로나19 확진자는 없다.

3.2. 이천시[편집]


1925년 이천시 창전동에 설립된 이천읍교회 부설유치원이 최초로, 이천시가 아직 이천군이었던 시절에[109] 개원했다. 이천시 관고동 소재로, 1973년 설립된 이천중앙유치원과는 다른 곳이며, 현존하는 최고의 유치원은 1972년 설립된 장호원유치원이다. 이천에서 유치원을 다닌 최초의 원생들은 1919년~1921년생으로, 첫 졸업생은 현재 생존해 있다면 104~105세이다.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아이들 중 일부는 이천시 장호원읍으로 원정 통학을 할 정도로 충청북도에서 수도권으로 원정 올 때 가장 많이 가는 동네가 이천[110]이다. 낮에는 이천 시민, 밤에는 음성 군민

1989년생까지는 이천군 시절에 유치원을 다녔으나 1990~1992년생은 유치원 입학 이후 이천군이 시로 승격, 1993년생부터는 시 승격 이후에 유치원을 다녔다.

사립유치원은 23곳 있는데, 시내, 부발읍, 장호원읍, 백사면, 호법면 등 다양한 지역에 분산되어 있다. 1930~40년대에는 용인시 (당시 용인군)에서 수려선 기차를 타고 이천의 유치원에 오는 경우도 있었다.[111] 1960년대 11만 9,115명이었던 인구가 1970년 10만 6,253명으로 최저점을 찍은 뒤 21만 8,388명으로 늘면서[112], 사립유치원 숫자도 같이 늘어났다. 다만, 대월초등학교 병설유치원은 원생이 딱 1명밖에 없다.

이천시의 유치원에서는 한씨가 장씨보다 많아 한씨 성을 가진 원생이 장씨보다 상대적으로 많은 편이다. 실제 이천의 10대 성씨는 김, 이, 박, 최, 정, 조, 윤, 강, 한, 장 순서다.

축구선수 정승현이 이 곳에서 유치원을 다녔다.

아직까지 유치원생인 코로나19 확진자는 없다.

3.3. 안성시[편집]


1925년 안성유치원이 사립으로 설립됐으나 현재 상태는 불명이고 현존하는 곳 중에서는 1963년 설립된 천주교계 안법유치원이 가장 오래됐으며, 모두 안성시가 아직 안성군이었던 시절에 개원했다. 안성시 구포동에 천주교 수원교구 안성성당 및 안법고등학교와 이웃하여 있는데, 안법고 역시 천주교 미션스쿨이다. 안성에서 유치원을 다닌 최초의 원생들은 1919년~1921년생으로, 첫 졸업생은 현재 생존해 있다면 104~105세이다.

1991년생까지는 안성군 시절에 유치원을 다녔으나 1992~1994년생은 유치원 입학 이후 안성군이 시로 승격, 1995년생부터는 시 승격 이후에 유치원을 다녔다.

과거 유치원이 드물었던 시절에는 안성에 살던 유아들이 안성선 열차[113]나 버스를 타고 천안의 유치원으로 가기도 했으며, 지금도 간간히 평택이나 천안으로 가는 경우가 있다. 특히 공도읍[114], 원곡면[115]은 평택으로 많이 가는 편. 이런 이유로 공도읍에서 평택의 유치원 버스를, 미양면에서 천안의 유치원 버스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사립유치원은 18곳 있는데, 대부분 시내, 공도읍, 미양면, 대덕면 등 옛 안성군・양성군 지역에 몰려 있다. 옛 죽산군 지역은 어지간한 비수도권 군 지역처럼 사립은 매산유치원 1곳뿐이고, 나머지는 공립 병설유치원만 있다. 1960년대에 14만 4,274명이었던 인구가 1990년에 11만 8,260명까지 줄었다가 2021년 18만 7,012명으로 늘었으며[116], 인구 10,237명당 사립유치원이 하나씩 있다.

원생과 교사의 성씨 분포를 보면 오씨가 강씨보다 상대적으로 많은 편인데, 안성의 상위 10개 성씨가 김, 이, 박, 최, 정, 윤, 장, 조, 오, 강 순서이기 때문이다.

정치인 정혜연이 이 곳에서 유치원을 다녔다.

2021년 12월 9일 첫 확진자가 보고된 이후 유치원생인 코로나19 확진자는 22명 생겼다. 12월 하순에도 유치원발 집단감염이 발생해 크리스마스 이브와 크리스마스까지 이어졌다.

3.4. 수원시[편집]


1928년 설립된 진명유치원이 최초로, 수원시가 아직 수원군이었던 시절에 팔달구 교동[117]에서 개원했다. 당시 원생들은 주로 현재의 수원시 팔달구에서 살았고 드물게 수원시 장안구에서 살았거나 화성시, 오산시에서 기차를 타고 오는 경우도 있었다. 수원에서 유치원을 다닌 최초의 원생들은 1922년~1924년생으로, 첫 졸업생은 현재 생존해 있다면 101~102세이다. 해방 이후 1970년대까지 수원의 유치원은 주로 팔달구에 설립됐으며, 수원시 편입 이후에도 한동안 시골인 지역이 남아 있는 나머지 3개 구에는 1970년대 후반 이후의 대규모 개발과 함께 유치원이 들어왔다. 수원 역시 시가지 팽창에 따라, 기존 팔달구에 있던 유치원들이 다른 구로 이전하기도 했다.

  • 권선구: 1977년 수원복자유치원. 천주교 수원교구 서둔동 성당 부설. 첫 입학생은 1971년~1973년생이고, 첫 졸업생이 현재 52~53세이다.
  • 장안구: 1982년 수도유치원. 첫 입학생은 1976년~1978년생이고, 첫 졸업생이 현재 47~48세이다.
  • 영통구: 1985년 새싹유치원. 당시 화성군 태안읍[118] 관할. 첫 입학생은 1979년~1981년생이고, 첫 졸업생이 현재 44~45세이다.

유치원이 많지 않던 시절에는 화성군, 용인군에 살던 아이들이 버스나 기차를 타고 수원에 있는 유치원으로 원정 통학하기도 했다. 화성군의 경우는 주로 매송면태안읍, 용인군은 주로 기흥면에 살던 아이들이 그랬다.[119] 현재는 의왕시화성시 봉담읍에 사는 아이들이 수원으로 오거나, 용인시 기흥구 영덕동에 사는 아이들이 수원시 영통구 영통동의 유치원으로, 용인시 수지구 상현동에 사는 아이들이 수원시 광교신도시의 유치원으로 통학하는 경우 말고는 타 지역에서 오거나 타 지역으로 가는 경우가 드물다.

1960년대 12만 7,733명이었던 수원시의 인구가 119만 6,074명으로 늘었다가 118만 6,078명으로 감소하는 등 인구 증감이 반복되지만[120], 사립유치원 숫자도 같이 늘어났다. 수원시는 경기도 남부에서 사립유치원이 가장 많은 지역이다. 접경지역특별법에 규정된 접경지역을 제외한 지역 중에서 가장 많은 106곳이나 있다. 이렇게 되어 만약 수원시가 화성시와 통합하면 인구는 204만 1,326명으로 늘고 사립유치원이 166곳으로 늘며 화성시, 오산시와 통합하면 인구가 227만 1,051명[121]까지 늘어남과 동시에 사립유치원도 192곳까지 늘어나, 고양시를 제치고 가장 많은 사립유치원을 보유한 기초자치단체가 된다. (덤으로 200곳을 넘볼 가능성도 있다.)

또한 만약 경기도경기남도경기북도로 분도되면, 수원시경기남도에서, 고양시는 경기북도에서 사립유치원이 가장 많은 동네가 될 것이다.

원생과 교사의 성씨 분포를 보면 한씨가 임씨보다 상대적으로 많은 편인데, 수원의 상위 10개 성씨가 김이박최정조윤강장한 순서이기 때문이다.

영통구 이의동의 큰나래유치원은 전직 야구선수 박범열사회복무요원 시절 근무했던 곳이기도 하다. 실제로 박범열은 고향이 수원이다.

테니스 선수 정현이 1999~2002년 사이에 이 곳에서 유치원을 다녔다[122]고 한다. 또한 UFC 선수 김동현은 1985~1987년 사이에[123], 수학강사 현우진은 1991~1993년 사이에 유치원을 다녔을 것이다.[124]

2020년 6월 1일에는 유치원 버스 운전기사가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았고, 같은 해 7월에는 수원의 진아유치원[125]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왔다.

3.5. 김포시[편집]


1944년 설립된 김포읍교회 부설유치원이 최초이다. 김포시가 아직 김포군이고 서울 강서구양천구, 인천 서구 검단지구까지 관할하던 시절에 개원했고, 소재지는 지금의 김포시 북변동이다. 4년간 운영하다 1차 폐원, 김포중앙교회로 이름을 바꾼 1988년에 재개원했으나, 최종 폐원되었다. 김포에서 유치원을 다닌 최초의 원생들은 1938년~1940년생으로, 첫 졸업생은 현재 85~86세이다.

김포시에 현존하는 유치원들 중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곳은, 1980년 개원한 고촌초등학교 병설유치원이다. 사립유치원은 47곳 있는데 시내, 고촌읍, 양촌읍, 통진읍, 월곶면 등 다양한 지역에 분산되어 있다. 1960년대 8만 4,990명이었던 인구가 1970년 7만 6,379명까지 줄었다가 2021년 47만 3,970명으로 늘어[126] 사립유치원 숫자도 같이 늘어났다.

과거에는 원생의 대부분이 해당 지역에서 근무하는 장교 또는 부사관의 자녀들이었으나, 현재는 학부모들의 직업이 다양해졌다. 다만, 이는 외지인의 유입이 많은 시내와 고촌읍, 양촌읍 정도이고, 통진읍을 시작으로 해서 북부 지역[127]의 유치원에는 아직도 해병대 장교부사관의 자녀가 많이 다니고 있다고 한다. 이는 김포시 남부에 한강신도시 등이 개발되면서 전방 색이 많이 희석됐으나, 북부 지역은 한강만 건너면 북한이라 아직도 전방 색이 강하기 때문이다.

원생과 교사의 성씨 분포를 보면 한씨가 임씨보다 상대적으로 많은 편인데, 김포의 상위 10개 성씨가 김-이-박-최-정-조-강-윤-장-한 순서이기 때문이다.

연예인 최상학과 개그맨 이종훈이 이 곳에서 유치원을 다녔다.

2020년 9월에는 김포시 걸포동의 예지유치원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9명 발생했고 2021년 6월 15일에도 5명의 확진자가 발생했다.

3.6. 의정부시[편집]


1954년 천주교 의정부교구 주교좌 의정부성당 부설로 설립된 성모유치원이 최초로, 의정부시가 아직 경기도 양주군 의정부읍이던 시절에 개원한 것이었다. 의정부시 의정부동 소재. 당시 원생들은 경기도 의정부시 의정부동, 가능동 호원동과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에 많이 살았다. 설립 당시에는 서울 창동에서 기차를 타고 통학하는 경우까지 있었다(!). 의정부에서 유치원을 다닌 최초의 원생들은 1948년~1950년생으로, 첫 졸업생은 현재 75~76세이다. 의정부 성모유치원은 경기도 북부에서 최초로 설립된 유치원이다.[128]

지리적 특성상 양주시, 포천시, 연천군에서 오는 유아들도 있고, 서울특별시에서 오는 경우도 있는데, 서울에서 오는 경우는 수락리버시티 3, 4단지 거주 유아를 제외하고는 잘 없다. 양주시는 주로 백석읍이나 장흥면, 포천시는 소흘읍 서부, 연천군은 거의 군 전체에서 많이 오는 듯.

1980년대까지 의정부시의 유치원들은 대부분 시가지가 개발된 의정부동 일대를 중심으로 설립됐으나 시가지 확장으로 녹양동, 가능동, 호원동, 장암동 등지에도 유치원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심지어 장암동의 유치원에는 서울특별시 노원구 상계동[129]에서도 원아가 오는 경우가 있다. 반면, 의정부에서도 아직도 시골인 고산동, 산곡동, 자일동에는 유치원이 잘 없다.

사립유치원은 32곳 있다. 1960년대 7만 4,842명이었던 인구가 46만 1,710명으로 늘면서, 사립유치원도 늘어났다. 과거에는 전방 지역답게 원생의 대부분이 장교부사관의 자녀였으나, 현재는 학부모의 직업이 다양해졌다.

전국에서 동씨[130]을 가진 원생을 보기 쉬운 곳이라고 한다. 다만 의정부시 상위 10개 성씨는 김-이-박-최-정-조-윤-강-장-한 순서로 동씨는 20위 밖이다.

팀 킴의 컬링선수 중 김초희가 이 곳에서 유치원을 다녔다. 나머지 4명은 의성에서 유치원을 다녔으므로 김초희는 사립유치원을 다녔을 가능성이 높지만 나머지 넷은 공립 병설유치원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131]

아직까지 유치원생인 코로나19 확진자는 없다.

3.7. 안양시[편집]


1956년 설립된 안양유치원이 최초이다. 안양시가 아직 경기도 시흥군 안양읍이던 시절에 지금의 안양시 만안구 안양동에 개원했다. 안양에서 유치원을 다닌 최초의 원생들은 1950년~1952년생으로, 첫 졸업생은 현재 73~74세이다.

한편, 안양시 독립 후에도 오랫동안 시골이었던 동안구에는 1980년대에야 제대로 된 유치원이 들어왔고 평촌신도시 개발 이후에 사립을 포함해서 본격적으로 유치원이 설립되었다.

  • 동안구: 1981년 비산초등학교 병설유치원. 안양시에 일반구가 설치되기 전에 설립되었다. 첫 입학생은 1975년~1977년생이고, 첫 졸업생이 현재 48~49세이다.

과천과 가까운 지리적 특성상 안양시의 유치원에서는 서울대공원으로 소풍을 가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많다.

안양유치원 설립 초기에는 서울 시흥동(당시 경기도 시흥군 동면)과 군포시, 의왕시에서 기차로 통학하기도 했다(!). 이들 중 군포시와 의왕시는 1970년대까지도 제대로 된 유치원이 없어서 당시 시흥군 남면→군포읍, 시흥군 의왕면→의왕읍에 살던 유아들이 기차나 전철을 타고 안양에 있는 유치원으로 원정 통학하는 경우도 많이 있었다. 시흥군 시기 과천면, 서면→소하읍도 안양에 접하기는 했지만 이들 지역에서 안양으로 향하는 교통편이 미비해 과천에서 안양으로 원정 통학을 하는 경우는 잘 없었다. 물론 현재는 더 좋은 교육환경 등을 위해 과천시, 군포시, 의왕시 주민들이 자녀들을 자신의 지역에 있는 유치원으로 보내지 않고 안양시의 유치원으로 보내는 경우도 드물게 있다.[132]

사립유치원은 53곳 있다. 1960년대 5만 9,871명이던 인구가 2010년 62만 8,831명을 찍은 뒤 55만 27명으로 감소했는데도[133] 인구 대비 사립유치원 숫자는 적다.

원생과 교사의 성씨 분포는 전국 순위와 상당히 유사한데 안양시 상위 10개 성씨가 김이박최정조강윤장임 순서이기 때문. 다만, 조씨가 강씨보다 약간 많아 강씨가 없는 반이 있을 정도이다.

양궁선수 기보배가 1991~1993년 사이에 안양에서 유치원을 다녔다.[134] 출생지는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이지만, 유년기에 안양으로 이사를 와서 그런 것. 스케이트 선수 황대헌은 2002~2005년 사이에 유치원을 다녔다.[135]

아직까지 유치원생인 코로나19 확진자는 없다.

3.8. 포천시[편집]


1957년 포천 시내에 포천유치원이 개원했으나, 현재는 폐원됐다. 당시 원생들은 지금의 포천 시내 (주로 신읍동, 자작동, 어룡동)와 군내면에 살았고 드물게는 소흘읍, 신북면에서 오기도 한다. 현재 영업 중인 곳 가운데는 1977년 설립된 운천유치원이 최초였으며[136], 2곳 모두 포천시가 아직 포천군이었던 시절에 개원했다. 포천에서 유치원을 다닌 최초의 원생들은 1951년~1953년생으로, 첫 졸업생은 현재 72~73세이다. 특이하게 포천 시내보다 영북면에 있는 유치원이 더 오랫동안 영업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 포천 시내보다 영북면이 더 발전됐기 때문이다.[137] 포천 시내에 처음 들어온 유치원은 1981년 선단동에 설립된 선단초등학교 병설유치원이다. 이곳의 첫 원생은 1975년~1977년생, 첫 졸업생은 48~49세이다. 여기에 관인면은 철원과 지리적으로 가까워서 철원에 있는 유치원으로 가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철원에 사는 아이가 포천의 유치원으로 오는 경우도 있다.[138] 포천에 사는 유아들 중 일부는 세종포천고속도로 등을 타고 의정부나, 아예 서울[139]로 가서 유치원을 다니지만, 매우 드문 케이스이다.

1996년생까지는 포천군 시절에 유치원을 다녔고, 1997년~1999년생은 유치원 시기에 포천이 시로 승격, 이후 2000년생부터는 포천이 시로 승격된 이후 유치원에 다녔다.

남북분단만 아니었으면 영중면[140], 영북면[141], 관인면 등 포천시 북부가 (이미 시가 되었을) 강원도 철원군의 베드타운 역할을 하게 되면서 포천의 인구가 20만 명 수준까지 늘고, 이로 인해 포천에 유치원이 10년은 일찍 들어왔을 지도 모른다.

사립유치원은 10곳 있는데, 시내에 6곳, 소흘읍에 3곳, 영북면에 1곳 있다. 1960년대 13만 9,498명이었던 인구가 1985년 10만 8,581명으로 최저점을 찍고, 그 후로 계속 늘어 2008년 16만 176명으로 정점을 찍은 뒤 2021년 14만 7,274명으로 줄어드는 등 인구 증감을 반복하는데도[142] 인구 대비 사립유치원 숫자가 적다. 포천시 군내면의 늘푸른유치원은 원생이 단 1명밖에 없다.

포천시의 지역적 특성상 포천시의 유치원에서는 신북면 기지리의 포천아트밸리와 포천 시내에 있는 한탄강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중 한 곳으로 소풍을 가는 경우가 매우 많다. 멀리는 남양주시의 광릉수목원, 서울의 북서울 꿈의 숲으로, 더 멀리는 어린이대공원이나 롯데월드로 가기도 한다.

군부대가 산재한 지역 특성상 원생의 대부분이 해당 지역에서 근무하는 육군 장교 또는 부사관의 자녀들이다.

원생과 교사의 성씨 분포를 보면 윤씨가 강씨보다 상대적으로 많은 편인데, 포천의 상위 10개 성씨가 김이박최정조윤강장한 순서이기 때문이다.

트로트 가수 임영웅이 이 곳에서 유치원을 다녔다.[143]

2020년 10월 29일에는 포천에 사는 유치원생 2명이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기도 했다.

3.9. 평택시[편집]


1960년 평택군 송탄면[144]에 설립된 신흥유치원이 최초이다. 평택시가 아직 평택군이던 시절에 개원했다. 평택에서 유치원을 다닌 최초의 원생들은 1954년~1956년생으로, 첫 졸업생은 현재 69~70세이다. 그 전에는 천안 등지로 원정을 가야 했다.[145] 현재는 안성시 공도읍, 화성시 양감면, 용인시 처인구 남사읍에서 평택으로 원정 오는 경우가 드물게 있다. 당시 원생들은 지금의 평택시 서정동, 지산동, 신장동, 이충동, 장당동 일대에서 살았다고 한다.

평택시 자체가 주한미군의 영향을 깊이 받아, 다른 지역에서 할로윈이 무엇인지도 모르던 시절에 평택시의 유치원생들 중에는 할로윈을 알고 있는 경우가 있었다. 심지어 충청도와 가깝다는 지역적 특성상 평택시의 유치원생들의 말에 충청도 사투리 억양이 들어간 경우도 있다.

사립유치원은 51곳 있는데, 옛 송탄시, 평택시 지역 외에 평택군 지역이었던 안중읍, 포승읍, 청북읍, 진위면 등지에도 분산되어 있다. 1960년대 신흥유치원이 송탄면 서정리에 설립된 이후 1990년대까지 유치원은 주로 옛 송탄시와 평택시 지역에 설립됐으며, 2000년대 이후 옛 평택군 지역에도 사립유치원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는 과거 송탄읍이 평택읍보다 인구가 많았기 때문[146]이다.


1960년대 18만 8,863명이었던 인구가 53만 7,307명까지 늘면서[147], 사립유치원 숫자도 같이 증가했다. 다만 진위면, 서탄면의 경우 오산시로 많이 가는데, 실제로 아침 시간대에 평택시 진위면, 서탄면 일대를 가면 오산의 유치원 버스들이 오고 시내 남부에서는 충청남도 천안(!!!)의 유치원 버스가 오기도 한다.

전국에서 견씨 성을 가진 사람이 가장 많아[148] 그나마 견씨 성의 유치원생을 보기 쉽다. 어디까지나 상대적일 뿐, 평택시 상위 10개 성씨는 김, 이, 박, 최, 정, 조, 강, 장, 윤, 한 순서이다.

프로게이머 손찬웅이 이 곳에서 유치원을 다녔다.

아직까지 유치원생인 코로나19 확진자는 없다.

3.10. 동두천시[편집]


1962년 지금의 동두천시 중앙동에서 천주교 의정부교구 동두천 성당 부설로 설립된 효성(曉星)[149] 유치원이 최초로, 동두천시가 아직 경기도 양주군 이담면이던 시절에 개원한 것이다. 의정부시가 분리된 1963년부터 1981년까지는 양주군 최초의 유치원이었다. 동두천에서 유치원을 다닌 최초의 원생들은 1956년~1958년생으로, 첫 졸업생은 현재 67~68세이다.

1956년생부터 1975년생까지는 양주군 동두천읍 시기에 유치원에 입학했으나, 1976년생부터는 동두천시 분리 승격 이후에 유치원에 입학했다.

사립유치원은 아랫동네 양주시의 절반 정도인 8곳만 있다. 이는 동두천시 곳곳에 주한미군 부대들이 주둔하고 있어서 시가지가 동두천중앙역[150]이 있는 시 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개발됐기 때문이다. 역시 남북분단만 아니었으면 (이미 시가 되었을) 강원도 철원군 시가지가 여기까지 확장되어 사립유치원이 10곳을 넘어갈 수도 있었다. 1960년대 5만 6,804명이었던 인구가 2020년 9만 4,353명으로 늘었는데도 인구 대비 사립유치원 개수는 적다. 유치원이 많지 않던 과거에는 양주시 은현면[151], 남면, 연천군 청산면, 전곡읍 등지에서 원정 오는 경우도 있었으며, 현재는 교통망의 발달로 군남면, 연천읍, 백학면 등지에서도 오는 경우가 생겼다.

연천, 포천에 인접한 지리적인 특성상 동두천의 유치원에서는 포천아트밸리전곡리 유적 등 포천, 연천에 있는 곳으로 소풍을 가는 경우가 많다.

군부대가 산재한 지역 특성상 원생의 대부분이 해당 지역에서 근무하는 장교 또는 부사관의 자녀들이다.

원생과 교사의 성씨 분포를 보면 홍씨가 장씨보다 상대적으로 많은 편인데, 동두천의 상위 10개 성씨가 김, 이, 박, 최, 정, 조, 강, 윤, 홍, 장씨 순서이기 때문이다.

배우 정주리가 이 곳에서 유치원을 다녔다.

아직까지 유치원생인 코로나19 확진자는 없다.

3.11. 부천시[편집]


1962년 지금의 부천시 심곡본동에 설립된 소사유치원이 최초이다. 당시 부천시는 부천군이었고, 인천광역시 계양구 일부+시흥시 북부까지 관할했으며, 산하에 2개의 읍면(소사읍, 오정면)을 두고 있었다. 당시 소사읍은 인구가 4만 명이 넘었고, 서울특별시 구로구 천왕동, 오류동, 궁동, 항동, 온수동, 개봉동, 고척동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그래서 소사유치원 개원 초기에는 오류동에서 기차를 타고, 혹은 온수동에서 걸어서 통학하는 원아도 있었다. 부천에서 유치원을 다닌 최초의 원생들은 1956년~1958년생으로, 첫 졸업생은 현재 67~68세이다. 그 전에는 유치원에 가기 위해 서울이나 인천으로 가야 했다. 현재도 아침 시간대에 부천시 작동, 고강동 일대를 가 보면 윤서유치원, 새서울유치원, 빛나유치원 등 서울의 유치원 버스를 볼 수 있고, 상동에서는 인천의 유치원 버스를 볼 수 있다.

사립유치원은 78곳 있다. 1960년대 13만 1,961명이었던 인구가 1973년 옹진군에 도서 지역[152]을, 시흥군에 소래면[153]을 넘겨주면서[154] 10만 9,093명까지 감소했다가 계속 늘어 2010년 89만 875명을 찍은 뒤 81만 8,383명으로 감소하는 등 증감을 반복하는데도[155], 인구 대비 사립유치원 숫자는 적다.

사립유치원에 대한 불신이 높아지면서 대장신도시에 설립되는 모든 유치원은 공립으로 운영된다.

원생과 교사의 성씨 분포를 보면 한씨가 임씨보다 상대적으로 많은 편인데, 부천의 상위 10개 성씨가 김, 이, 박, 최, 정, 조, 강, 장, 윤, 한씨 순서이기 때문이다.

탁구선수 유승민[156]이 이 곳에서 유치원을 다녔다. 2022 카타르 월드컵 포르투갈전에서 역전골을 넣은 황희찬은 1998~2001년 사이에 유치원을 다녔다.

아직까지 유치원생인 코로나19 확진자는 없다.

3.12. 용인시[편집]


1930년대에 백암면 석천리의 근영학원에서 유치부가 운영된 적은 있었으나, 정식 유치원은 아니다. 용인 최초의 유치원은 1965년 설립된 경남[157]유치원이며, 용인시가 아직 용인군이었던 시절에 처인구 김량장동 (예전의 용인면→용인읍)에 개원되었다. 수려선이 있던 시절에는 신갈(당시 기흥면), 양지면에 거주하는 원아들이 기차를 타고 경남유치원에 통학하기도 했다. 현재 경남유치원의 상태는 불명이며, 경남유치원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최소 50대 후반이다. 용인에서 유치원을 다닌 최초의 원생들은 1959년~1961년생으로, 첫 졸업생은 현재 64~65세이다. 따라서 용인이 고향인 60대 이상은 수원이나 이천 등지로 원정 통학을 해야 했다. 지금도 모현읍 오산리, 능원리, 동림리에 사는 아이들은 광주시 오포읍이나 수지구 죽전동으로 원정 가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이들 동네를 가 보면 희소유치원, 유정유치원 버스가 오기도 하는데, 이들 동네가 죽전동과 가깝기 때문이다. 또한 신갈동, 영덕동 일대를 가면 수원의 유치원 버스가, 수지구 죽전동[158]에서는 분당의 유치원 버스가 오기도 하고, 용인의 유치원 버스들이 분당이나 수원에 가기도 한다. 심지어는 동탄신도시에서 용인으로 원정 오는 유아들도 있는데 이들은 거리상 주로 가까운 기흥구 기흥동, 신갈동, 구갈동 일대로 간다.

용인군 시절 유치원은 주로 옛 용인읍, 기흥읍 지역에 설립됐으나 시 승격 이후 사립유치원들이 수지, 구성, 죽전, 동백 등지에도 설립되었다. 1989년생까지는 용인군 시절에 유치원을 다녔으나 1990~1992년생은 유치원 입학 이후 용인군이 시로 승격, 1993년생부터는 시 승격 이후에 유치원을 다녔다.

용인 최초의 공립유치원은 1980년에 세워진 남사읍 봉무리의 남사초등학교 병설유치원이며, 현재는 폐원되었다. 한편, 서울공항 등으로 개발제한이 걸려 제대로 된 인구 유입이 이루어지지 못해[159] 오랫동안 시골로 남아 있던 수지구와 기흥구에는 1980년대에야 겨우 유치원이 설립됐다.

  • 수지구: 1981년 수지초등학교 병설유치원. 당시 용인군 수지면. 첫 입학생은 1975년~1977년생이고, 첫 졸업생이 현재 48~49세이다.
  • 기흥구: 1982년 기흥초등학교 병설유치원. 당시 용인군 기흥면. 첫 입학생은 1976년~1978년생이고, 첫 졸업생이 현재 47~48세이다.
  • 구성구 (분구 이전 기흥구 보정동•구성동•동백동•마북동•상하동): 1982년 구성초등학교 병설유치원. 당시 용인군 구성면. 첫 입학생은 1976년~1978년생이고, 첫 졸업생이 현재 47~48세이다.

용인에 현존하는 유치원 중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곳은, 1978년 처인구 포곡읍 삼계리[160]에 세워진 성체유치원[A]이다. 가톨릭 인보성체수녀회에서 운영하고 있으며, 매우 넓은 부지에 수녀원, 양로원, 장애인 시설 등과 함께 있다. 1972년~1974년생을 첫 원생으로 모집했고, 첫 졸업생들은 현재 51~52세이다.

용인시의 지리적 특성상 용인의 유치원에서는 보통 에버랜드로 소풍을 간다. 에버랜드가 전국적 인지도를 가지고 있는 테마파크이지만, 유치원 단계에서는 원거리 소풍을 가는 경우가 사실상 없으므로[161] 보통은 용인시와 인근 경기도 지역에서 에버랜드로 소풍을 오는데, 수원, 이천, 분당[162], 광주, 동탄 등지의 유치원에서도 이 곳으로 소풍을 온다.

사립유치원은 77곳 있는데, 시내에만 몰려 있지 않고 수지구 풍덕천1동[163], 수지구 죽전동[164], 구성, 신갈, 보정동, 포곡읍[165], 모현읍, 이동읍 등 다양한 지역에 분산되어 있다. 하지만 1979년에 용인면, 1985년에 기흥면, 1996년에 수지면, 2000년에 구성면, 2005년에 포곡면, 2017년 12월 11일에 모현면과 이동면, 2021년 2월 19일에 남사면이 읍으로 승격되고 1996년에 용인읍이, 2001년에 수지읍이, 2005년에는 구성읍과 기흥읍이 분동되면서 면에는 사립유치원이 없다.[166] 기흥구 영덕동[167]수원시 영통구 영통동과 가까워 영덕동에 사는 아이가 수원의 유치원을 다니거나, 영통에 사는 아이가 기흥구에 있는 유치원을 다니는 경우가 있다.[168] 때문에 백암면, 원삼면에 사는 아이들은 대부분 병설유치원 출신이며 아주 가끔 시내나 양지면으로 원정 가기도 한다. 또한 남사읍은 용인의 읍 가운데 유일하게 사립유치원이 없다.[169]

미래에 인구가 늘게 되면 사립유치원이 80곳, 더 나아가 100곳을 넘어갈 수도 있다. 심지어 아파트 단지 하나에 유치원이 2곳 이상인 곳도 있다. 1960년대에 10만 5,179명이었던 인구가 1970년에 9만 4,848명까지 추락했다가 다시 늘어 2002년 인구 50만 명을 넘긴 뒤 2021년 107만 4,176명으로 고양시를 거의 따라잡을 정도[171]인데도 인구 대비 사립유치원 숫자가 적은데, 용인시에는 인구 13,728명당 사립유치원이 하나씩 있다. 심지어 처인구 이동읍의 화산성민유치원은 원생이 무려 687명이나 된다.

원생과 교사의 성씨 분포를 보면 조씨가 강씨보다 상대적으로 많은 편인데, 용인의 상위 10개 성씨가 김, 이, 박, 최, 정, 조, 윤, 강, 장, 한 순서이기 때문이다.

박형식이 이 곳에서 유치원을 나왔다고 한다.[172] 체조선수 여서정도 이곳에서 유치원 생활을 했다고 한다. 전설의 에버랜드 캐스트 소울리스좌도 용인에서 유치원 생활을 했다.[173]

2021년 3월 20일 용인시의 한 유치원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와, 3월 20~21일 양일에 걸쳐 유치원생과 교사들이 코로나 검사를 받기도 했다. 같은 해 7월 10일과 11일에도 유치원생 9명이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기도 했다.

3.13. 고양시[편집]


1965년 천주교 의정부교구 일산성당 부설로 설립된 성모유치원이 최초로, 고양시가 아직 고양군이었던 시절에 개원했다. 과거 군청 소재지이던 원당읍에서 설립되었고 시 승격 후에도 한동안 그 위치를 유지하다가 2000년 덕양구 (분구 이후에는 덕양북구)에서 일산서구 일산동으로 이전했다. 유치원이 많지 않았던 과거에는 덕양구 분구 이후 덕양남구가 되는 신도읍, 화전읍에 살았던 아이들이 버스나 기차를 타고 서울에 있는 유치원으로 원정 통학하기도 했다.[174] 성모유치원 최초의 원생은 1959년~1961년생으로, 첫 졸업생이 현재는 64~65세이다. 당시 원생들은 고양시 원당동, 원흥동, 주교동 일대에서 살았다고 한다.

고양군 시절에는 주로 군청이 있던 원당읍 혹은 인구가 밀집한 신도읍 지역을 중심으로 유치원이 설립됐으나, 화전읍[175], 벽제읍, 일산읍, 지도읍[176] 등이 설립되고 시로 승격되면서 본격적인 사립유치원 설립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고양군 당시에는 시골이었다가 고양시 승격 이후에야 겨우 시가지 개발이 시작된 일산신도시 지역에는 1980년대에 들어서야 겨우 유치원이 들어왔다.

  • 일산동구: 1981년 이포초등학교 병설유치원. 당시 고양군 일산읍. 첫 입학생은 1975년~1977년생이고, 첫 졸업생이 현재 48~49세이다.
  • 일산서구: 1981년 송포초등학교 병설유치원. 당시 고양군 송포면. 첫 입학생은 1975년~1977년생이고, 첫 졸업생이 현재 48~49세이다.
  • 덕양구 (미래의 덕양남구, 대부분의 고양시 을 선거구 지역): 1981년 삼송초등학교 병설유치원. 당시 고양군 신도읍. 첫 입학생은 1975년~1977년생이고, 첫 졸업생이 현재 48~49세이다.

또한 국내 최초의 유치원인 이화유치원(이화여자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유치원)이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잠시 고양군 산하였던 적이 있었다. (당시 신촌 일대는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이 시기 원생은 현재 사망했거나, 생존해 있더라도 80대를 넘은[177] 어르신들이다.

여담으로 깜놀 유치원을 촬영한 이튼유치원이 고양시 일산동구 백석동에 있다.

사립유치원은 경기도에서 가장 많은데[178] 111곳이나 있다. 이는 일반시들 중 가장 많은 것이며, 접경지역특별법에 의한 접경지역에서도 가장 많은 것이다. (2위 수원이 106곳, 3위 창원이 101곳. 이 3곳을 제외하면 사립유치원 개수가 100곳을 넘는 곳이 없다. 특별시와 광역시도 여러 개의 자치구를 합쳐야 겨우 100곳이 넘는 지역이 나올 정도.) 고양시 일산서구는 파주시와 아주 가까워, 파주의 유치원 버스가 일산으로 오거나, 일산의 유치원 버스가 파주로 가기도 한다. 반면, 덕양구 서부에서는 서울로 많이 가는 편이다.

고양군 시절에는 여름만 되면 홍수로 인한 휴원이 잦았으나[179], 현재는 홍수보다 황사나 전염병에 의한 휴원이 더 많아졌다.

아파트가 많은 지역 특성상, 아파트 단지 하나에 유치원이 2곳 이상 있는 경우도 있다. 인구가 1960년대의 9만 3,741명에서 107만 9,216명으로 급증해서[180] 사립유치원이 엄청나게 늘어났으며 인구 대비 사립유치원 숫자도 많아서 9,587명당 사립유치원이 하나씩 있다. 다만, 사립유치원에 대한 불신이 높아지면서 창릉신도시에 설립되는 모든 유치원은 공립으로 운영된다.

과거에는 고양시의 유치원생 대부분이 장교부사관의 자녀였으나, 인구 급증으로 전방 이미지가 희석되면서 학부모의 직업이 다양해졌다. 또한 고양시의 지리적 특성상 고양시의 유치원에서는 서오릉이나 일산호수공원으로 소풍을 많이 가며, 멀리 가면 서울경복궁으로 가기도 한다.

원생과 교사의 성씨 분포를 보면 조씨가 강씨보다 상대적으로 많은 편인데, 고양의 상위 10개 성씨가 김, 이, 박, 최, 정, 조, 강, 윤, 장, 한씨 순서이기 때문이다.

연예인 전소민[181]과 야구선수 김강률[182], 연극배우 판유걸[183]이 이 곳에서 유치원을 다녔다.

아직까지 유치원생인 코로나19 확진자는 없다.

3.14. 가평군[편집]


1965년 가평읍 읍내리에 가평교회 부설로 설립된 샛별유치원이 최초였으나 2010년 무기한 휴원에 들어갔고, 이후 1981년 가평목동초등학교, 대성초등학교, 미원초등학교, 상면초등학교, 상색초등학교, 상천초등학교, 연하초등학교, 조종초등학교에 병설유치원이 설립되었다. 가평에서 유치원을 다닌 최초의 원생들은 1959년~1961년생으로, 첫 졸업생은 현재 64~65세이다. 그 전에는 경춘선 열차를 타고 춘천에 있는 유치원으로 가야 했는데, 당시 남양주시 역시 시골이라 유치원이 들어오기 전이었고, 그렇다고 서울로 가자니 너무 멀기 때문이다.[184] 당시 원생들은 주로 가평읍에서 왔고, 현재 군내 유일한 사립유치원인 청평면의 사립유치원에는 상면 임초리, 덕현리에서 오는 유아들도 있다. 현재 사립유치원은 설악면 미사리의 청심유치원 하나뿐인데, 이 곳이 폐원된다면 수도권 최초의 사립유치원 없는 군이 될 수도 있다.

가평군은 10월과 4, 5월에 일교차가 매우 큰 데다 경기도에서 가장 추운 지역이라 9월 말이나 5월 초에 후리스, 4월과 10월에는 아예 패딩을 입고 다니는 원생이 있을 정도이다.

사립유치원은 3곳 있지만, 가평읍에는 없고[185] 청평면에 2곳, 설악면에 1곳 있다. 가평읍이 이 두 면보다 인구가 많은데도[186] 말이다. 때문에 가평읍에 사는 유아들은 초등학교 병설유치원을 다니거나 아예 춘천까지 넘어가서 사립유치원을 다녀야 한다. 남북분단만 아니었으면 시가지가 더 많이 확장되고 인구가 7~8만 명까지 늘어나 유치원이 20년은 일찍 들어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1960년대 7만 4,708명이었던 인구가 2005년 4만 9,059명까지 줄었다가 6만 2,377명으로 회복[187]했는데 이 모양이다. 가평군에는 대학교가 없어[188] 가평에서 근무하는 유아교사들은 서울이나 춘천 등지에서 대학을 다니고 가평으로 돌아온 케이스이다.

군부대가 산재한 지역 특성상 원생의 대부분이 해당 지역에서 근무하는 장교 또는 부사관의 자녀들이다.

원생과 교사의 성씨 분포를 보면 신씨가 강씨보다 상대적으로 많은 편인데, 가평의 상위 10개 성씨가 김, 이, 박, 최, 정, 장, 신, 조, 윤, 한 순서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경기도에서 신씨 순위가 가장 높은 곳이 가평이다.

야구선수 정우영이 이 곳에서 유치원을 다녔다.

아직까지 유치원생인 코로나19 확진자는 없다.

3.15. 파주시[편집]


1966년 천주교 의정부교구 법원리 성당 부설로 설립된 소화(小花)[189] 유치원이 최초이다. 파주시가 아직 파주군이던 시절에 지금의 파주시 법원읍 법원리 43번지에서 개원했다. 특이하게 파주 시내보다 법원읍 (당시 천현면)에 먼저 설립되었다. 파주에서 유치원을 다닌 최초의 원생들은 1960년~1962년생으로, 첫 졸업생은 현재 63~64세이다.

시내에 최초로 설립된 유치원은, 1984년에 설립된 샛별유치원이다. 한편 오랫동안 유치원이 없었던 대성동 자유의 마을에는 2011년이 되어서야 겨우 유치원이 들어왔다. 남북분단만 아니었으면 개성시의 영향을 깊숙이 받은 문산읍[190] 등지에 유치원이 더 일찍 들어왔을 수도 있었다. 교육기관이 없는 진동면[191]에서는 원정 통학을 할 수밖에 없다.

지역 특성상 파주시의 유치원에서는 임진각으로 소풍을 가는 경우가 많다.

파주군 시절에는 여름홍수로 인한 휴원이 잦았으나[192] 현재는 여름의 홍수보다 가을~ 사이의 미세먼지로 인한 휴원이 더 잦아졌다.

사립유치원은 42곳 있으며, 시내 외에 교하지구, 운정지구, 문산읍 등 다양한 지역에 분산되어 있다. 하지만 관내 면들의 잇따른 읍 승격 및 동으로의 전환[193]으로 면에는 사립유치원이 없다. 이런 이유로 면에 사는 아이들은 초등학교 병설유치원이나 인근 읍, 또는 동 지역으로 가서 유치원을 다니는 실정이며 적성면[194]은 아예 양주시 등 다른 지역으로 넘어가서 다닌다. 인구가 1960년대의 19만 4,441명에서 1985년 16만 4,724명으로 추락했다가 1990년 18만 4,982명으로 늘고, 1995년 16만 2,973명으로 추락해 최저치를 기록한 뒤 46만 5,617명으로 인구가 늘었는데도[195] 이 모양이다.

군부대가 많은 지역 특성상 원생의 대부분이 해당 지역에서 근무하는 장교 또는 부사관의 자녀들이다. 이웃한 고양시의 유치원들은 인구의 증가로 전방 색이 옅어지면서 대부분이 직업군인이던 학부모의 직업이 다양해졌고, 파주시도 향후 10~20년 내에 고양시와 같이 학부모의 직업이 다양해질 전망이다. 또한 개성시 출신 실향민 3~4세인 원생들도 있다.

원생과 교사의 성씨 분포를 보면 윤씨가 강씨보다 상대적으로 많은 편인데, 파주의 상위 10개 성씨가 김, 이, 박, 최, 정, 윤, 조, 강, 장, 한 순서이기 때문이다. 이는 윤씨의 대종이 파평 윤씨인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배우 김다미가 이 곳에서 유치원을 다녔다.

아직까지 유치원생인 코로나19 확진자는 없다.

3.16. 연천군[편집]


1966년 연천읍 차탄리에 연천읍교회 부설 유치원이 설립됐으나, 현재 무기한 휴원 중이고, 현존하는 최고의 유치원은 1981년 군남초등학교, 궁평초등학교, 대광초등학교, 백학초등학교, 상리초등학교, 연천노곡초등학교, 연천왕산초등학교, 연천초등학교에 병설유치원이 설립되었다. 사립유치원은 본원유치원과 한여울유치원 2곳이 있으며, 2곳 모두 전곡읍 전곡리에 있다. 다만 1930~40년대에는 연천읍, 신서면[196]에 사는 아이들이 경원선 기차를 타고 철원군의 철원유치원으로, 1960~70년대에는 청산면[197], 전곡읍에 사는 아이들이 동두천의 효성유치원 등으로 원정 통학을 하기도 했다. 연천에서 유치원을 다닌 최초의 원생들은 1960년~1962년생으로, 첫 졸업생은 현재 63~64세이다.

이렇게 된 것은 연천읍보다 전곡읍의 인구가 더 많은[198] 도시 구조 때문이다. 남북분단만 아니었으면 연천읍이 철원의 베드타운이 되어 (이미 시가 되었을) 강원도 철원군의 영향을 받아 연천군 인구가 8만 명을 찍는 것은 물론, 유치원이 더 일찍 들어왔을지도, 그리고 연천읍교회 부설 유치원이 무기한 휴원을 하지 않고 연천읍에도 사립유치원이 추가로 설립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현재는 왕징면[199], 중면[200], 장남면[201]에 교육기관이 없어 이 동네에서도 원정 통학 건수가 늘고 있다. 이들 동네에서는 주로 연천읍이나 전곡읍으로 간다고 한다.

1960년대 6만 9,859명이었던 인구가 4만 3,516명으로 줄었지만[202], 사립유치원 개수는 늘었다. 그마저도 모두 전곡읍 전곡리 소재인 데다 전곡읍은 조선시대 양주 관할이었으므로 오리지널 연천군과 마전군, 삭녕군 지역에서는 사립유치원을 볼 수 없는 셈. 연천군에는 대학이 없기 때문에 연천군에서 근무하는 유치원 교사들은 거의 서울 등 다른 지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연천으로 발령받은 케이스이다. 게다가 연천군 지역에서 근무하는 유치원 교사 중에는 동두천에 살면서 연천으로 출퇴근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이다.

군부대가 산재한 지역 특성상 원생의 대부분이 해당 지역에서 근무하는 장교 또는 부사관의 자녀들이다. 또한 연천군은 전방 지역이라 해당 지역에 거주하는 청년들은 상근예비역에 선발되기 쉬워 유치원 동창이나 선후배가 같은 부대에서 복무하는 일이 서울이나 기타 후방 도시들[203]보다 많다.

원생과 교사의 성씨 분포를 보면 한씨가 강씨보다 상대적으로 많은 편인데, 연천의 상위 10개 성씨가 김, 이, 박, 최, 정, 조, 윤, 한, 강, 장 순서이기 때문이다.

축구선수 박호진이 이 곳에서 유치원을 다녔다.

아직까지 유치원생인 코로나19 확진자는 없다.

3.17. 성남시[편집]


1970년 가톨릭 인보성체수녀회에 의해 설립된 성체유치원[A]이 최초이다. 개원 당시에는 성남시가 아직 경기도 광주군 산하 4개 면[204]이었고, 소재지는 광주군 중부면 수진리였다. 현재 주소는 수정구 수진동이며, 천주교 수원교구 수진동 성당 및 인보의 집(양로원)[205]과 이웃해 있다. 1964년~1966년생을 첫 원생으로 모집했고, 첫 졸업생은 현재 59~60세가 됐다. 그 전에는 성남에 사는 아이들이 버스를 타고 서울에 있는 유치원으로 가야 했다. 이 때문에 성남시는 일반구가 3개 이상 있는 도시들 중 유치원 설립이 가장 늦은 도시가 됐다. 당시 원생들은 지금의 성남시 수정구 수진동, 태평동, 신흥동, 양지동, 중원구 성남동, 상대원동, 하대원동에 살았다고 한다.

한편 중원구분당구는 성남시 성립 이후에야 뒤늦게 유치원을 설립했고, 사립유치원은 분당신도시판교신도시 개발 이후 본격적으로 증가했다. 성남시 성립 당시 중원구는 도시의 형태를 제법 갖추고 있었으나 분당구는 성남시 독립 이후로도 한동안 시골이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판교신도시는 분당구 설립 이후에도 그린벨트에 묶여 오랫동안 시골이라 21세기가 다 되도록 제대로 된 유치원이 없었다.[206]

  • 중원구: 1981년 예원유치원. 성남시에 일반구가 설치되기 전에 설립되었다. 첫 입학생은 1975년~1977년생이고, 첫 졸업생이 현재 48~49세이다.
  • 분당구: 1992년 서현유치원. 성남시에 아직 철도가 없을 때 설립되었다. 첫 입학생은 1986년~1989년생이고, 첫 졸업생이 현재 37~38세이다.
  • 판교신도시: 2009년 낙생초등학교 병설유치원. 첫 입학생은 2003년~2006년생이고, 첫 졸업생이 현재 20~21세이다.

참고로 성남시 분당구의 유치원에는 용인시 수지구 동천동, 죽전동, 풍덕천동광주시 거주 유치원생도 있다. 반대로 수정구 신촌동, 오야동, 심곡동, 고등동, 상적동, 금토동, 창곡동, 복정동[207]에 사는 유아들은 서울특별시[208] 원정 통학을 가기도 한다. 아침 시간대에 성남시 분당구 구미동을 가 보면 용인시 수지구 죽전동의 희소유치원, 유정유치원 버스가 오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서울과 용인 사이에 끼어 있는 지리적 특성상 성남시 수정구, 중원구의 유치원들은 서울 헌인릉이나 롯데월드로, 성남시 분당구의 유치원들은 한국잡월드나 에버랜드로 소풍을 많이 간다.

분당구에는 아파트가 많아서 아파트 단지 하나에 유치원이 2곳 이상인 경우도 있다. 사립유치원은 80곳 있다. 1960년대 1만 9,821명에 불과했던[209] 인구가 2010년 99만 6,524명을 찍은 뒤 94만 64명으로 감소하면서[210], 사립유치원 수도 같이 늘어났다.

원생과 교사의 성씨 분포를 보면 조씨가 강씨보다 상대적으로 많은 편인데, 성남의 상위 10개 성씨가 김, 이, 박, 최, 정, 조, 강, 윤, 장, 임 순서이기 때문이다.

골프선수 박인비1992년~1994년 사이에 이 곳에서 유치원을 다녔다[211]고 한다. 이는 트랜스젠더 연예인 하리수[212], 축구선수 황의조[213]도 마찬가지.

아직까지 유치원생인 코로나19 확진자는 없다.

3.18. 하남시[편집]


1970년 교회 부설로 설립된 중앙유치원이 최초이다. 하남시가 아직 경기도 광주군 산하 2개 면[214]이던 시절 지금의 하남시 덕풍동인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 덕풍리에 개원한 것으로, 서울특별시 강남구, 송파구, 강동구보다 빨리 유치원이 설립되었다. 하남에서 유치원을 다닌 최초의 원생들은 1964년~1966년생으로, 첫 졸업생은 현재 59~60세이다. 그 이전에는 버스를 타고[215] 서울까지 가야 했다. 당시 원생은 주로 현재의 하남시 신장동, 덕풍동, 풍산동, 미사동에 살았다고 한다.

중앙유치원은 소재지인 동부면 덕풍리가 동부읍을 거쳐 하남시로 승격[216]된 뒤에도 한동안 ‘중앙유치원’이라는 이름을 유지하다가, 2000년대 들어서 ‘써니힐유치원’으로 이름을 바꾼 것으로 추정된다. 하남시 중 감북동, 감일동, 초이동 등 아직도 시골이나 다름없는 지역에 사는 아이들은 서울특별시 강동구, 송파구로 원정 가는 경우도 있고, 서울특별시 강동구 강일동에서 하남시로 원정 가는 경우도 있다. 마침 하남시 감북동에서 차를 타고 달리다 보면 강동구 둔촌동이 나오고, 조금 더 가면 성내동이, 거기서 더 가면 송파구 풍납동이 나오며, 감일동에서는 송파구 마천동, 거여동이 나오니 그 곳의 유치원으로 가는 경우가 많다. 실제 하남시 감일동 등지를 가 보면 서울 올림픽유치원[217], 리아유치원[218], 유정유치원[219] 등 서울의 유치원 버스가 오기도 한다. 하남시 선동[220]의 경우는 강동구 고덕동, 상일동, 강일동의 유치원 버스들이 주로 다닌다. 이런 지리적 특성상 하남시의 유치원들은 서울특별시 송파구롯데월드올림픽공원으로 소풍을 가는 경우가 있다.

최순실이 설립했다고 알려진 초이유치원은 하남시 초이동이 아닌 서울특별시 강남구 압구정동에 있다. 애초에 하남시 초이동은 인구가 3,735명에 불과한[221] 사실상 시골이라 사립유치원이 들어올 수가 없다. 하남시에는 대학이 없기 때문에 하남시에서 근무하는 유치원 교사들은 다른 지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하남시와 발령받은 케이스이다.

현재 하남시에는 사립유치원이 10곳 있지만, 인구 증가로 인해 추가로 사립유치원이 더 설립될 수도 있다. 1960년대 1만 6,389명에 불과했던[222] 인구가 29만 3,452명으로 늘면서[223], 사립유치원 숫자도 같이 늘어났다. 향후 교산신도시[224]가 개발되면 유치원 숫자는 더 늘어날 예정이다. 다만, 사립유치원에 대한 불신이 높아지면서 교산신도시에 설립되는 모든 유치원은 공립으로 세워지게 된다.

원생과 교사의 성씨 분포를 보면 한씨가 임씨보다 상대적으로 많은 편인데, 하남의 상위 10개 성씨가 김, 이, 박, 최, 정, 조, 강, 윤, 장, 한 순서이기 때문이다.

야구선수 김인범박주홍이 이 곳에서 유치원을 다녔다고 한다.

아직까지 유치원생인 코로나19 확진자는 없다.

3.19. 양평군[편집]


1972년 설립된 동산유치원이 최초로, 경기도에서는 제법 오랜 역사의 유치원이다. 양평읍 양근리 소재이며, 양평보다 늦게 유치원이 들어온 지역이 경기도에만 15개나 있다. 하지만 사립유치원은 동산유치원을 포함해서 3곳밖에 없다(양평읍 양근리에 2곳, 창대리에 1곳). 양평군에 무궁화호가 정차하는 역의 개수가 8개[225]나 되는 것을 감안하면 양평군은 봉화군, 정선군, 보성군, 화순군, 영동군, 예천군, 의성군, 영덕군, 하동군, 함평군, 곡성군, 서천군, 군위군, 단양군, 태백시[226]과 함께 무궁화호 정차역이 사립유치원 개수보다 많은 특이한 지역이 되었으며 2022년 11월 5일 이후에는 양평군에 ITX-새마을 정차역이 8개(양평역, 용문역, 지평역, 석불역, 일신역, 매곡역, 양동역, 삼산역.)나 되면서 양평군이 유일하게 ITX-새마을 정차역이 사립유치원보다 많은 지역이 되었다. 원생들은 주로 양평군 양평읍 양근리, 공흥리, 오빈리, 창대리, 원덕리에서 오지만 옥천면 국수리, 아신리, 용문면 다문리, 지평면 지평리 등 원거리에서 오는 유아도 있다. 양평에서 유치원을 다닌 최초의 원생들은 1966년~1968년생으로, 첫 졸업생은 현재 57~58세이다.

이렇게 된 원인은 과거 양평군, 가평군 등 수도권 동부 지역이 상수도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공장 건설이 제한되면서 인구가 유출된 점이 크다.[227] 인구도 1960년대의 11만 8,697명에서 1990년 7만 7,166명으로 추락했다가 2021년 11만 8,810명으로 회복되었는데도[228], 인구 대비 사립유치원 숫자가 적다. 지방에도 양평군보다 사립유치원이 많이 있는 군이 있을 정도. 유치원이 드물었던 과거에는 양평에 사는 유아들이 서울, 원주 등지로 유치원을 찾아 원정 통학을 가기도 했는데[229], 서울로 가는 경우는 주로 양서면 등 양평군 서부 (옛 양근군 지역)에 살던 아이들이, 원주로 가는 경우는 양동면 등 양평군 동부 (옛 지평군 지역)에 살던 아이들이었다. 현재는 교통의 발달과 양평읍에만 사립유치원이 있는 지역 특성상 면 지역에서 양평읍으로 원정 오는 아이들도 있고 홍천군 서면 굴업리에서 원정 오는 유아들도 있다.

면에 사는 아이들이 사립유치원을 가고 싶으면 원정을 가야 한다. 양서면, 서종면에 사는 아이들은 남양주시로, 옥천면, 용문면, 강하면, 강상면, 개군면, 지평면에 사는 아이들은 양평읍으로, 단월면, 청운면, 양동면에 사는 아이들은 아예 강원도[230] 가는 경우가 많다. 서종면에서 서울, 남양주 등 인근 도시로 원정 통학을 하는 건수는 서울양양고속도로 개통 이후 늘어나고 있다.

원생과 교사의 성씨 분포를 보면 장씨가 강씨보다 상대적으로 많은 편인데, 양평의 상위 10개 성씨가 김, 이, 박, 최, 정, 조, 윤, 장, 강, 한 순서이기 때문이다.

축구선수 이규성이 이 곳에서 유치원을 다녔다고 한다.

아직까지 유치원생인 코로나19 확진자는 없다.

3.20. 광명시[편집]


1976년 광명시 광명동에 설립된 경기유치원이 최초로, 광명시가 아직 경기도 시흥군 서면이었던 시절에 개원한 것이다. 당시 시흥군 서면의 인구는 10만 명을 넘었는데[231], 이 지경이 되도록 유치원 설립이 늦어진 것은 이 지역의 서울특별시 편입이 도통 결론이 나지 않았던 탓이다.[232] 때문에 시흥군 서면 시절 해당 지역에 살던 아이들이 버스를 타고 안양천 건너 서울 (주로 영등포구)에 있는 유치원으로 원정 통학을 하기도 했다. 주로 광명리철산리에 살았던 아이들이 이랬다고 한다. 2020년 현재는 서울 지하철 7호선으로 원정 통학을 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 경우는 주로 광명동, 철산동, 하안동에 사는 유아들이 많이 쓰며[233] 서울특별시 구로구금천구의 유치원으로 간다.[234] 광명에서 유치원을 다닌 최초의 원생들은 1970년~1972년생으로, 첫 졸업생은 현재 53~54세이다.

사립유치원은 26곳 있다. 1960년대 1만 5,985명이었던 인구가 2012년 35만 5,560명을 찍은 뒤 감소해서 2021년 29만 8,599명이 됐는데도[235] 이 모양이다.

원생과 교사의 성씨 분포를 보면 장씨가 윤씨보다 상대적으로 많은 편인데, 광명의 상위 10개 성씨가 김, 이, 박, 최, 정, 강, 조, 장, 윤, 한 순서이기 때문이다.

야구선수 이학주가 이 곳에서 유치원을 다녔다고 한다.[236]

2021년 7월 17일 광명시의 유치원생 3명이 코로나19에 확진되는 사태가 일어났다.

3.21. 오산시[편집]


1977년 설립된 노틀담 유치원이 최초로, 천주교 수원교구 오산성당과 이웃해 있다. 오산시가 아직 경기도 화성군 오산읍이었던 시절, 현재의 오산시 청학동에서 노틀담 수녀회[237]가 가난한 농촌 지역 어린이들을 가르치겠다는 뜻을 품고 설립했다. 1977년부터 1989년까지는 노틀담 유치원이 화성군 최초의 유치원이었다. 그 이전에는 오산에 사는 아이들이 오산역에서 기차를 타고 수원이나 송탄에 있는 유치원으로 원정 통학을 하기도 했다. 오산에서 유치원을 다닌 최초의 원생들은 1971년~1973년생으로, 첫 졸업생은 현재 52~53세이다. 현재는 화성시 정남면과 평택시 진위면에서 오산으로 가는 경우가 많아 오산의 유치원 버스들이 화성시 정남면, 평택시 진위면 거주 유아들을 태우고 가기도 한다.

사립유치원은 26곳 있다. 1960년대 2만 1,162명이었던 인구가 22만 9,725명으로 늘면서 같이 늘어났다.

이 곳의 '근혜유치원'[238] 역시 2017년 박근혜 탄핵 사건 이후 유명세를 탔다.

원생과 교사의 성씨 분포를 보면 전국 순위와 같으면서도 11위 이하로는 좀 다른데, 오산의 상위 10개 성씨가 김, 이, 박, 최, 정, 강, 조, 윤, 장, 임 순서이기 때문이다.

배구선수 한유미한송이가 이 곳에서 유치원을 다녔다.

2020년 11월 15일 원일초등학교 병설유치원 재원생이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았고 2021년 12월 2일에는 유치원생들이 집단으로 확진 판정을 받은 적이 있었다.

3.22. 광주시[편집]


1978년 설립된 곤지암초등학교 병설유치원이 최초로, 광주시가 아직 광주군이었던 시절에 개원한 것이었다. 경안[239]에서 유치원을 다닌 최초의 원생들은 1972년~1974년생으로, 첫 졸업생은 현재 51~52세이다.

특이하게 시내보다 곤지암읍에 먼저 유치원이 들어왔다. 시내 최초의 유치원은 1981년에 설립된 광주초등학교 병설유치원이다. 광주군의 범위가 지금보다 더 넓었던 시절까지 범위를 넓히면, 1956년에 구천면 곡교리(현 서울특별시 강동구 천호동), 1970년에 중부면 수진리와 동부면 덕풍리에 유치원이 설립되었다.

그러나 광주군 최초의 유치원이었던 성애유치원(구천면 곡교리 소재)은 1959년에 폐원되었고[240], 1960~80년대를 거치면서 서울로 3개 면[241]이 편입되었고, 5개 읍면[242]성남시하남시로 독립했다. 행정구역 개편의 최대 피해자. 행정구역 개편만 아니었으면 광주시의 인구가 312만 7,840명까지 늘어나고[243] 광주군 최초의 유치원은 1950년대까지 그 기록이 올라갔을 것이다. 또한 1950년~1952년생이 광주군 최초의 유치원생으로 기록에 남고 첫 졸업생의 나이가 73~74세까지 올라갔을 것이다.

사립유치원은 14곳 있다. 시내, 오포읍, 초월읍, 곤지암읍 등 다양한 지역에 분산되어 있으나 면에는 없다. 이는 남양주시, 용인시, 파주시 등과 비슷하게 유치원이 설립될 당시에는 면이었다가 행정단위가 '읍' 또는 '동'으로 승격되었기 때문이다. 인구가 1960년대의 10만 3,217명[244]에서 38만 2,054명[245]으로 늘어났는데도 이 모양이다. 이 곳 주민들이 영어학원 유치부에 보낼 경우에는 성남시 분당구 등지로 원정을 보내는 경우가 많아 현재 이 곳은 영어학원 유치부가 없는 지역 중 인구가 가장 많다. 오포읍의 경우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246]에서 원정 오는 수요도 있다. 초월초등학교 병설유치원은 원생이 단 1명밖에 없다. 인구는 30만 넘는 도시에 원생이 1명뿐인 유치원이라니

원생과 교사의 성씨 분포를 보면 10위까지는 전국 순위와 같아도 11위부터는 다른 부분이 있는데, 광주의 상위 10개 성씨가 김이박최정강조윤장임 순서이기 때문이다.

더보이즈의 아이돌 주연과 배우 김민교[247], 축구선수 정성룡이 이 곳에서 유치원을 다녔다고 한다.

아직까지 유치원생인 코로나19 확진자는 없다.

3.23. 안산시[편집]


1978년 상록수샘골교회[248] 부설로 설립된 해당화유치원이 최초이다. 안산시가 아직 경기도 시흥군 및 화성군 산하 3개 면[249]이었던 시절에 개원했다. 안산에서 유치원을 다닌 최초의 원생들은 1972년~1974년생으로, 첫 졸업생은 현재 51~52세이다. 한편, 반월출장소 설립 이후에도 시골로 남아 있던 단원구에는 1982년에야 뒤늦게 유치원이 들어왔다. 이로써 안산시는 일반구가 있는 도시들 중 유치원이 가장 늦게 들어온 곳이 되었다.[250]

유치원이 드물었던 시절에는 안산에 사는 아이들이 유치원을 다니기 위해 수원이나 인천으로 가는 경우가 많았으나[251], 현재는 역으로 인천광역시 옹진군 영흥면[252]화성시 매송면 어천리, 야목리, 원리, 시흥시 정왕동, 군포시 대야미동에서 안산으로 오는 경우가 늘고 있다.


사립유치원은 58곳 있다(대부도에는 없다). 1960년대 1만 9,624명[253]이었던 인구가 2011년 71만 6,423명을 찍은 뒤 계속 감소해 65만 1,211명으로 감소했다가 2021년 65만 4,219명으로 반등했는데도[254], 유치원도 같이 늘어났다. 외국인 비율이 높은 지역 특성상 안산의 유치원에는 중국, 베트남, 캄보디아, 태국, 파키스탄 등지에서 건너온 노동자의 자녀들도 있을 정도이다.

2004년 안산시의 유치원을 졸업한 사람들[255]은 자신의 유치원 친구 중 죽은 사람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하는데, 이들은 대부분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의 피해자들이었다.

원생과 교사의 성씨 분포를 보면 한씨가 임씨보다 상대적으로 많은 편인데, 안산의 상위 10개 성씨가 김, 이, 박, 최, 정, 강, 조, 윤, 장, 한 순서이기 때문이다. 사실 수도권 서부에서 한씨가 임씨보다 많기는 하지만(...).

배구선수 김연경이 이 곳에서 유치원을 다녔다고 한다.[256] 또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최초로 월드컵 멀티골을 넣은 축구선수 조규성[257]도 안산에서 유치원을 다녔다.

2020년에 안산의 한 유치원에서 집단 식중독 사건이 발생했다. 참고로 해당 유치원은 비리 감사에도 적발된 전적이 있다.

아직까지 유치원생인 코로나19 확진자는 없다.

3.24. 화성시[편집]


1980년 송산초등학교 병설유치원이 최초로, 화성시가 아직 화성군이었던 시절에 개원했다. 오산시가 화성군 관할이었던 시절까지 범위를 넓히면 1977년 화성군 오산읍에 개원한 노틀담유치원이 최초이나, 오산읍은 1989년 오산시로 독립했다. 유치원이 많지 않던 시절에는 화성군 매송면, 태안읍에 살던 아이들이 기차를 타고 수원에 있는 유치원으로, 동탄면에서는 농어촌버스를 타고 오산에 있는 유치원으로 원정 통학하기도 했다. 화성에서 유치원을 다닌 최초의 원생들은 1974년~1976년생으로, 첫 졸업생은 현재 49~50세이다. 그래서 화성시가 고향인 50대 이상인 어른들 중 유치원을 다닌 사람들은 대체로 병점역에서 경부선 기차를 타고 수원까지 가야 했다. 서신면[258], 마도면 등지에 사는 경우는 안산이나 인천으로도 갔다고 한다.

특이하게 시내보다 송산면에 유치원이 먼저 들어왔으며, 시청이 있는 남양읍에는 1981년 설립된 남양초등학교 병설유치원이 최초이다. 수원시 영통구 최초의 유치원인 새싹유치원도 화성군 시절인 1985년에 태안읍 영통리에서 개원했다. 참고로 유치원 원장이 원비로 백화점에서 초고가 명품 브랜드인 루이비통 가방을 구매하고 벤츠 차량 유지비와 아파트 관리비 등을 납부했으며, 성인용품점, 숙박업소, 노래방 등에서 쓴 돈 등 총 7억 여원을 부정하게 사용하다가 적발된 환희유치원이 화성시 동탄신도시에 있다.[259]

급속 성장을 보여 주듯, 30년 만에 사립유치원이 우후죽순으로 설립되었다. 현재 사립유치원은 60곳 있는데 동탄신도시, 병점지구, 남양읍, 향남읍, 우정읍 등 다양한 지역에 분산되어 있다. 1960년대[260]에 20만 4,254명이었던 인구가 1995년 15만 8,247명까지 감소했다가 계속 증가해서 2021년 85만 5,248명으로 늘었는데도[261] 이 모양이다. 이런 이유로 동탄에 사는 아이들이 지역 내 유치원 추첨에 다 떨어지면 수원, 용인, 오산이나 멀리는 서울, 성남 등 다른 도시에 있는 유치원을 다니는 수밖에 없다. 화성시 매송면 어천리, 야목리, 원리에서는 안산으로, 양감면은 평택으로 원정 보내는 경우도 많다.

1998년생까지는 단 하루라도 화성시가 화성군이었던 시절에 유치원을 다녔으나 1999년생부터는 화성시로 승격된 후에 유치원을 다닌다.

원생과 교사의 성씨 분포를 보면 조씨가 강씨보다 상대적으로 많은 편인데, 화성의 상위 10개 성씨가 김, 이, 박, 최, 정, 조, 윤, 강, 장, 한 순서이기 때문이다.

전국에서 그나마 해풍 김씨 성을 가진 유치원생을 보기 쉬운 지역 중 하나이다. 또한 배우 서신애로스앤젤레스 FC의 축구선수 김문환[262]이 곳에서 유치원을 다녔다.

아직까지 유치원생인 코로나19 확진자는 없다.

3.25. 남양주시[편집]


1981년 설립된 퇴계원초등학교 병설유치원이 최초로, 남양주시가 아직 남양주군이던 시절에 설립되었다. (울릉도보다 늦게 유치원이 들어온 시이다.) 특이하게 시내 (옛 미금시)보다 퇴계원읍에 유치원이 먼저 설립되었다. 남양주에서 유치원을 다닌 최초의 원생들은 1975년~1977년생으로, 첫 졸업생은 현재 48~49세이다. 옛 미금시 지역은 이보다 1년 늦게 들어왔다. 또한 이 곳은 국회의원 선거구가 3개 이상인 지역들 중 유치원이 가장 늦게 들어왔다.

  • 미금시: 1982년 남양주양정초등학교 병설유치원. 첫 입학생은 1976년~1978년생이고, 첫 졸업생이 현재 47~48세이다.

남북분단만 아니었으면 서울 시가지가 남양주로도 확장되어, 1960년대에 이미 진건읍, 진접읍, 퇴계원읍 등지에 유치원이 들어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과거 유치원이 많지 않던 시절에는 별내면[263]에 살던 아이들이 경춘선 기차를 타고 서울에 있는 유치원으로 원정 통학하기도 했다. 1950년대에 노원구 공릉동에 유치원이 있었으니 남양주시 퇴계원읍에서 그 곳으로 가는 원생이 있었을 것이다. 현재 그러는 경우는 드물어졌으나, 좀 더 나은 환경에서 교육을 시키기 위해 팔당대교를 건너 하남시로 가거나, 아예 구리서울로 가는 경우가 드물게나마 있다.

사립유치원은 49곳 있다. 중심지가 딱히 없고[264] 이리저리 찢어진 도시 구조 덕분에, 시내 외에 퇴계원읍, 진건읍, 진접읍, 오남읍, 화도읍, 와부읍 등 여러 개의 읍면동에 분산되어 있다.[265] 1960년대에 7만 8,547명[266]이었던 인구가 71만 3,321명으로 늘면서[267], 사립유치원도 같이 늘었다. 다만, 최초로 유치원이 들어온 시기가 많이 늦어서 인구 50만 명 이상인 도시들 가운데는 유치원이 가장 늦게 들어온 곳이 되었다.[268]

서울과 가깝다는 남양주시의 지리적 특성상 남양주시의 유치원에서는 광릉수목원이나 어린이대공원으로 소풍을 가는 경우가 많으며 드물게는 올림픽공원, 롯데월드 등으로 빠지기도 한다.

과거에는 전방 지역답게 원생의 대부분이 직업군인의 자녀였으나, 현재는 직업군인 자녀가 아닌 원생들이 많아졌는데, 주로 서울의 비싼 집값을 견디지 못하고 이사 온 사람들의 자녀이거나 농어촌특별전형을 노리고 서울에서 관내 읍면 지역[269]으로 이사 온 사람들의 형제자매이다. 현재는 제주도보다 많은 인구[270] 덕에 원생이 많아지고 교육 여건도 좋아지면서 포천시 내촌면, 화현면이나 가평군 청평면 대성리, 양평군 양서면, 서종면에 사는 유아들도 오는데, 실제로 이 동네에서는 자차나 유치원 버스, 혹은 경춘선 열차[271]로 남양주의 유치원에 간다.

원생과 교사의 성씨 분포를 보면 한씨가 임씨보다 상대적으로 많은 편인데, 남양주의 상위 10개 성씨가 김이박최정조윤강장한 순서이기 때문이다.

사립유치원에 대한 불신이 높아지면서, 왕숙신도시에 설립되는 모든 유치원은 공립으로 세워지게 된다.

배우 김소은이 이 곳에서 유치원을 다녔다.

아직까지 유치원생인 코로나19 확진자는 없다.

3.26. 양주시[편집]


1981년 설립된 송추초등학교 병설유치원이 최초이다. 양주시 자체로만 보면 울릉도보다 유치원이 늦게 생겨났으나, 송추초등학교 병설유치원은 양주시가 아직 양주군이었던 시절에 개원되었다. 특이하게 시내보다 장흥면 교현리[272]에 유치원이 먼저 들어왔다. 양주에서 유치원을 다닌 최초의 원생들은 1975년~1977년생으로, 첫 졸업생은 현재 48~49세이다. 시내 최초의 유치원은 같은 해 3월 10일에 설립된 유양초등학교 병설유치원이다. 그 전에는 양주에 사는 아이들이 경원선 기차를 타고 의정부나 동두천의 유치원으로 가야 했다.

양주군이 서울 도봉구노원구, 중랑구 묵동, 신내동, 망우동, 상봉동, 중화동까지 관할하던 시절에 최초로 개원된 의정부성당 부설 성모유치원은 개원 9년 만에 양주군 의정부읍이 의정부시로 독립하면서 의정부시 관할로 넘어갔고, 동두천성당 부설 효성유치원은 소재지인 양주군 동두천읍이 1981년 동두천시로 독립했다.

사립유치원은 17곳 있는데 시내, 백석읍, 남면 등 다양한 지역에 분산되어 있다. 역시 남북분단만 아니었으면 (이미 시가 되었을) 강원도 철원군 시가지가 연천군, 동두천시를 넘어 여기까지 확장되어, 유치원이 10년은 일찍 들어왔을 수도 있었다. 1960년대 6만 4,410명[273]이었던 인구가 23만 359명으로 늘면서[274] 사립유치원도 같이 늘었다.

행정구역 개편의 피해자. 행정구역 개편만 아니었으면 양주시 인구가 279만 9,235명 (남면 제외 시 279만 2,231명)까지 늘어나고[275] 양주 최초의 유치원은 1950년대까지 기록이 남아 있었을 것이다.

원생과 교사의 성씨 분포를 보면 조씨가 강씨보다 상대적으로 많은 편인데, 양주의 상위 10개 성씨가 김이박최정조윤강장한 순서이기 때문이다.

피아니스트 소예은이 이 곳에서 유치원을 다녔다.

아직까지 유치원생인 코로나19 확진자는 없다.

3.27. 시흥시[편집]


1981년 설립된 소래초등학교 병설유치원이 최초로, 시흥시가 아직 시흥군이었던 시절에 개원했다. 시흥에서 유치원을 다닌 최초의 원생들은 1975년~1977년생으로, 첫 졸업생은 현재 48~49세이다. 이 때문에 시흥시는 국회의원 선거구가 2개 이상인 지역들 중 유치원이 가장 늦게 설립된 지역으로 남게 되었다. 이전에는 지금의 시흥시에 사는 아이들이 유치원을 가기 위해서는 버스나 기차를 타고 인천, 부천 등 주변 도시까지 가야 했다. 지금도 정왕동에 가 보면 안산의 유치원 버스를 볼 수 있고, 월곶동 등 인천과 가까운 동네에서는 인천으로 가는 유아들이 드물게나마 있다.

시흥군이 서울시 영등포구, 동작구, 금천구, 관악구, 서초구까지 관할하던 시절까지 올라가면, 1927년 영등포읍(현재 서울 영등포구)에 개원한 흥화유치원이 최초이다. 그러나 흥화유치원은 영등포읍이 경성부로 편입되는 1936년에 서울 관할로 넘어갔다. (시흥군 시절에 흥화유치원을 다닌 것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현재 살아 있을 경우 최소 80대 후반이다.) 역시 행정구역 개편의 피해자. 행정구역 개편만 아니었으면 시흥시의 인구가 406만 2,028명[276]까지 늘고 시흥 최초의 유치원은 1950년대를 넘어 1920년대까지 기록이 남아 있었을 것이다.

사립유치원은 30곳 있다. 1960년대 12만 8,254명[277]이었던 인구가 50만 895명[278]으로 늘면서 사립유치원도 같이 늘었다.

2010년대 후반 목감지구의 인구가 늘었을 때 유치원 부족으로 관내 거주 원아들이 안양시, 안산시, 광명시 등지로 원거리 통학을 하기도 했다.

원생과 교사의 성씨 분포를 보면 장씨가 윤씨보다 상대적으로 많은 편인데, 시흥의 상위 10개 성씨가 김, 이, 박, 최, 정, 강, 조, 장, 윤, 임 순서이기 때문이다.

배우 경수진과 피아니스트 임윤찬, 아마존 익스프레스 랩의 원조 윤쭈꾸가 이 곳에서 유치원을 다녔다고 한다.

아직까지 유치원생인 코로나19 확진자는 없다.

3.28. 군포시[편집]


1981년 설립된 군포초등학교 병설유치원이 최초로, 군포시가 아직 경기도 시흥군 군포읍이었던 시절에 개원했다. 군포에서 유치원을 다닌 최초의 원생들은 1975년~1977년생으로, 첫 졸업생은 현재 48~49세이다. 그 전에는 군포에 사는 아이들이 유치원에 가려면 안양까지 가야 했다.[279]

사립유치원은 27곳 있는데, 시흥군 군포읍이 군포시로 승격된 이후 산본신도시를 중심으로 해서 개원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9,086명이었던 인구가 2015년 28만 7,487명을 찍은 뒤[280] 2021년 27만 3,791명으로 줄어드는 등 인구 증감을 반복하는 수준이 되면서[281] 사립유치원 숫자도 늘었다.

군포시의 지리적 특성상 군포의 유치원 중에는 서울대공원으로 소풍을 가는 유치원들이 많다고 한다.

원생과 교사의 성씨 분포를 보면 한씨가 임씨보다 상대적으로 많은 편인데, 군포의 상위 10개 성씨가 김이박최정강조윤장한 순서이기 때문이다.

여담으로, 김연아1994년~1996년[282] 이 곳에서 유치원을 다녔다고 한다. 태어난 곳은 부천시 도당동이지만, 어린 시절에 이사를 와서 그런 것이다.

아직까지 유치원생인 코로나19 확진자는 없다.

3.29. 의왕시[편집]


1981년 설립된 의왕부곡초등학교 병설유치원이 최초로, 의왕시가 아직 경기도 시흥군 의왕읍이었던 시절에 개원한 것이었다.[283] 의왕에서 유치원을 다닌 최초의 원생들은 1975년~1977년생으로, 첫 졸업생은 현재 48~49세이다.

사립유치원은 13곳 있는데, 시흥군 의왕읍이 의왕시로 승격된 이후 개원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1만 815명이었던 인구가 16만 3,795명으로 늘면서, 사립유치원도 같이 늘었다. 의왕에 유치원이 생기기 전에는 의왕에 살던 아이들이 기차를 타고 안양시[284]수원시[285]로 원정 통학을 해야 했다. 지금도 더 나은 교육여건을 만들어 주려는 부모와 유치원 추첨에서 다 떨어진 경우는 안양시 등지로 원정을 가며, 수도권제1순환고속도로 (구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개통 이후 성남시로 가는 경우도 드물게 있다.

의왕시의 해나라유치원은 과거 원장이 여호와의 증인 신자였다고 한다.

원생과 교사의 성씨 분포를 보면 조씨가 강씨보다 상대적으로 많은 편인데, 의왕의 상위 10개 성씨가 김이박최정조윤강장한 순서이기 때문이다.

의왕에서 유치원을 다녔던 유명인으로는 야구선수 김주가 있다.

아직까지 유치원생인 코로나19 확진자는 없다.

3.30. 과천시[편집]


1981년 과천초등학교에 설립된 병설유치원이 최초로, 과천시가 아직 경기도 시흥군 과천면이었던 시절에 개원되었다. 과천에서 유치원을 다닌 최초의 원생들은 1975년~1977년생으로, 첫 졸업생은 현재 48~49세이다. 그 전에는 과천에 사는 아이들이 유치원을 다니기 위해서는 버스를 타고 서울이나 안양으로 가야 했다.[286] 과천에서 서울로 원정을 보낼 경우 거의 대부분이 지리적으로 교류가 잦은 서초구에 있는 유치원으로 보낸다.

사립유치원은 어지간한 군 수준인 4곳밖에 없는데, 이는 과천시 자체의 적은 인구 때문이다.[287] 심지어 과천시보다 사립유치원을 더 많이 가지고 있는 도 7곳이나 있을 정도이다. 1960년대 7,945명이었던 인구[288]가 1990년 7만 2,325명까지 늘었다가 2020년 5만 8,253명으로 줄어들었으나, 2021년 6만 3,231명으로 회복하는 등 증감을 반복하는데도 유치원은 늘어났다.

과천시의 지역적 특성상 이 지역 유치원에서는 서울대공원이나 서울랜드로 소풍을 가기도 한다.

사립유치원에 대한 불신이 높아지면서 과천지구에 설립되는 모든 유치원은 공립으로 세워지게 된다.

원생과 교사의 성씨 분포를 보면 조씨가 강씨보다 상대적으로 많은 편인데, 과천의 상위 10개 성씨가 김, 이, 박, 최, 정, 조, 윤, 강, 장, 임 순서이기 때문이다.

과천에서 유치원을 다녔던 유명인으로는 축구선수 김신욱[289]이 있다.

아직까지 유치원생인 코로나19 확진자는 없다.

3.31. 구리시[편집]


1982년 설립된 토평초등학교 병설유치원이 최초이다. 구리시는 이것 때문에 전국에서 가장 늦게 유치원이 들어온 동네가 되었다. 역시 구리시가 아직 남양주군 구리읍이던 시절에 설립되었다. 구리에서 유치원을 다닌 최초의 원생들은 1976년~1978년생으로, 첫 졸업생은 현재 47~48세이다. 양주군 구리면→구리읍 시절에는 버스나 기차를 타고 서울 동대문구중랑구에 있는 유치원으로 원정 통학을 하기도 했고, 구리암사대교 개통 이후에는 강동구 암사동의 예슬유치원 등지로 원정 통학을 하는 경우도 늘고 있으며 서울 지하철 8호선구리역을 넘어 별내까지 연장되면 서울로 가는 경우가 더 늘어날 예정이다. 아침 시간대에 구리시를 가 보면 서울의 유치원 버스가 와서 구리시 거주 원생을 태우고 가는 경우도 있을 정도. 주로 교문동이나 아천동에 사는 원생들이 이렇게 하는 듯. 드물게 남양주시에서 오는 경우도 있다.[290]

구리시보다 유치원이 늦게 설립된 지역은 도시화가 상대적으로 늦은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291], 수원시 영통구[292], 인천광역시 서구 중 검단지구를 제외한 지역[293]등이 있다. 하지만 시와 군으로 한정하면 구리시가 전국에서 가장 늦게 유치원이 설립된 지역이다. 다만, 구리시 자체는 의외로 유치원 교육의 혜택을 일찍 받은 지역인데, 1950~60년대에 이미 구리시 갈매동에 살던 아이들이 경춘선 열차를 타고 노원구 공릉동의 공릉유치원에 다닌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구리시의 유치원 추첨에 다 떨어지면 서울특별시 등 다른 지역의 유치원으로 보내는데, 주로 강동구[294]중랑구, 광진구[295]의 유치원으로 보낸다고 한다.

구리시의 지리적 특성상 해당 지역의 유치원에서는 어린이대공원으로 소풍을 많이 간다.

사립유치원은 17곳 있다. 1960년대 1만 1,765명[296]이던 인구가 2018년 20만 2,121명까지 늘었다가 2021년 19만 7,454명으로 줄어드는 등 증감을 반복하지만, 사립유치원 숫자는 늘었다.

원생과 교사의 성씨 분포를 보면 조씨가 강씨보다 상대적으로 많은 편인데, 구리의 상위 10개 성씨가 김, 이, 박, 최, 정, 조, 강, 장, 윤, 한 순서이기 때문이다.

야구선수 안치홍이 이 곳에서 유치원을 다녔다.

아직까지 유치원생인 코로나19 확진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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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황인범이 나왔던 경성유치원과는 다른 곳이다. 이 쪽은 대전광역시 소재.[2] 백남준이 대표적인 ‘애국유치원’ 출신이었다. 백남준은 1932년 7월 20일 서울에서 태어나 1936~1938년 사이에 유치원을 다녔으며 (이 때 아내인 이경희 여사도 같은 유치원에 다녀 부부가 같은 유치원 출신인 보기 드문 사례가 되었다. 가장 최근에는 야구선수 추신수가 아내와 같은 유치원을 다녔다.), 2006년 1월 29일 (설날)에 미국에서 사망. 현재 살았으면 89세이다.[3] 부모가 다닌 유치원에 자녀가 다니는 경우는 있지만 조부모나 증조부모가 다닌 유치원에 그 자손들이 다닌 경우가 드문 것은 현재 유치원생들의 조부모 세대까지는 유치원이 부유층 아이들만 다닐 수 있는 귀족학교 정도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가끔씩 보이는 유치원 다닌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대다수가 고향이 도시 혹은 읍내이고, 당시에 매우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다고 볼 수 있다. 2021년 현재 유치원생의 조부모는 1940년대 후반~1960년대 중반 출생자가 대부분이라 1980~1990년대생이 조부모가 되는 2040년대 이후부터 조부모와 같은 유치원을 다닌 원생이 크게 늘 것이다.[4] 그래도 10%는 못 넘겼다. 1964년 전국 초등학교 신입생 중 유치원에 다녀 본 사람은 1.3%에 불과했다. 즉, 신입생 100명 중 유치원 다닌 아이들이 1명 있을까 말까 하는 수준. 76학번(1957년생)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이 정도였으니 60년대 학번인 어르신들은 이보다 더 낮았을 것이다. 참고로 박근혜, 윤석열이 유치원을 다니던 시절 유치원 취원율은 1%대였다.[5] 그 시절 서울에 살던 사람들은 사대문안성저십리 정도만이 진짜 서울이라고 생각했고, 강남은 그냥 깡촌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서울에서 유년기를 보냈던 어르신들의 증언에 따르면, 자신은 서대문구에 살고 친척이 송파나루 (지금의 석촌동, 송파동 일대)에 살았다고 하면 친척을 보기 위해 용산구나 성동구까지 가서 배를 타고 거기서 1~2시간에 1대 오는 버스를 타고 가야 했다고 한다. 이런 상황이니 지금의 강남 지역이 고향인 어르신들은 유치원에 다녀 볼 기회를 사실상 박탈당했던 셈이다.[6] 이는 대령급 이상인 장교, 상사급 이상인 부사관, 3급 이상인 공무원 (7급으로 시작한 5급 이상과 9급으로 시작한 7급 이상도 대부분 포함된다.), 총경급 이상인 경찰관 (순경에서 시작한 경우는 경위 이상), 소방정급 이상인 소방관, 교정관급 이상인 교도관, 20년 이상 근무한 교수, 시장, 군수, 도지사, 구청장, 국회의원, 차관, 대기업 회장, 나이가 많은 의사, 치과의사, 한의사, 스포츠 감독으로 가도 마찬가지. 특히 대통령은 단 2명(박근혜, 윤석열)만 유치원을 다녀 봤다고 한다.[7] 종로구중구용산구.[8] 강서구양천구영등포구구로구.[9] 동작구관악구금천구.[10] 강동구송파구.[11] 도봉구강북구성북구노원구.[12] 동대문구중랑구성동구광진구.[13] 마포구서대문구은평구.[14] 서초구강남구.[15] 1910년~1991년생까지는 중앙유치원이 시내에 있을 때 졸업했으나, 1992년생부터는 흑석동으로 이사 간 후 졸업했다.[16] 양주군: 창동, 도봉동, 방학동, 쌍문동 월계동, 상계동, 중계동, 하계동, 공릉동, 묵동, 중화동, 상봉동, 망우동, 신내동, 시흥군: 잠원동, 양재동, 반포동, 서초동, 방배동, 사당동, 남현동, 신림동, 봉천동, 가산동, 독산동, 시흥동, 김포군: 목동, 신월동, 신정동, 방화동, 개화동, 공항동, 과해동, 가양동, 등촌동, 염창동, 발산동, 화곡동, 부천군: 오쇠동, 오곡동, 오류동, 온수동, 천왕동, 궁동, 항동, 고척동, 개봉동, 광주군: 내곡동, 염곡동, 원지동, 개포동, 논현동, 학동, 삼성동, 역삼동, 청담동, 대치동, 신사동, 압구정동, 일원동, 수서동, 자곡동, 율현동, 세곡동, 장지동, 문정동, 가락동, 송파동, 삼전동, 석촌동, 방이동, 오금동, 거여동, 마천동, 문정동, 장지동, 풍납동, 천호동, 암사동, 길동, 명일동, 고덕동, 상일동, 강일동, 둔촌동, 성내동, 고양군: 진관동. 이들 중 유치원이 있었던 곳은 천호동 정도가 거의 유일했다. 이렇게 되어 이들 지역 중 유치원 교육의 혜택을 받은 동은 강동구 천호동, 성내동, 암사동, 길동, 명일동과 송파구 풍납동 정도에 불과했다.[17] 이 과정에서 이름만 남고 사라져 버린 산도 많다. 조계사의 말사 중 하나로 강남 지역에서 가장 큰 사찰인 봉은사가 있는 수도산이 대표적.[18] 대표적으로 경기고등학교, 서울고등학교, 경기여자고등학교, 숙명여자고등학교 등이 있다.[19] 도 단위로 내려가도 부산, 대구, 광주 등 그 도의 최대도시에서 취원율이 가장 높았다.[20] 강동구 성내동 소재.[21] 강동구 성내동 소재.[22] 강동구 천호동 소재.[23] 아침 시간대에 봉은사에 기도를 드리러 가면 봉은사 진여문 근처에서 잠실의 유치원 버스를 볼 수 있다.[24] 주로 천안시. 실제로 천안에서 서울로 통근하는 사람들도 있다.[25] 해외에 이민 등을 가서 거주하는 재외국민의 상당수가 한국 주소를 서울이나 수도권에 두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주한 미국대사 성 김 (1960년생(64세), 1964~1966년에 유치원을 다녔다.)인데, 한국에서 유치원국민학교를 다니고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짐 팩은 아예 캐나다로 이민을 가서 그 곳에서 유치원을 다녔다.[26] 엄밀히 말하면 '영어유치원'이라는 명칭은 불법이다.[27] 현행법상 이들은 ‘유치원’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못한다.[28] 출생지는 대구이지만, 동남 방언의 억양은 남아 있지 않고 표준어 억양으로 구사한다. 박근혜는 1952년 2월 2일생(72세)이므로 1956년~1957년경 유치원을 다녔을 것으로 추측된다. 다른 대통령들이 가난으로 유치원을 다녀 보지 못하거나 (최규하, 문재인), 자신의 고향에서 유치원이 너무 멀거나 (노태우, 노무현), 자신의 고향에 유치원이 설립되기 이전에 태어났기 때문에 (이승만, 윤보선, 박정희, 전두환, 김영삼, 김대중, 이명박) 박근혜는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 중 최초로 유치원을 다녀 본 대통령이기도 하다. 두 번째는 윤석열.[29] 장영신은 1936년 7월 22일생(87세)이므로 1940~1942년 사이에 유치원을 다녔다. 이순재 (1934년 11월 16일생)보다 겨우 2살 어린데도 유치원을 다닌 것은 그녀가 매우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셈이다. 현재 대부분의 기업인들이 유치원을 다녀 보지 못한 것으로 보면 엄청난 부유층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1940년 장영신이 4세이던 해에 창씨개명이 실시돼 일본식 이름으로 유치원을 다녔는데, 그녀의 일본식 이름은 불명.[30] 구봉서는 1926년 11월 5일생이고 2016년 8월 27일에 사망했으므로 1930~1932년 사이에 유치원을 다녔는데, 1931~1932년 사이에 다녔다. 1930년대면 일본어한국어보다 우위이던 시절로, 그 시절은 유치원이 매우 드물던 시절이라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을 것이다. 게다가 그 시절이면 크리스마스도 평일이었다.[31] 1978년 3월 14일생( 46세)이므로 1982~1984년에 유치원을 다녔을 것이다. 1978년생들은 버스에서 담배 피우던 시절에 유치원을 다녔고, 대부분 유치원 시절에 전무후무한 음력 윤10월 (1984년 11월 23일~12월 21일)을 경험한 셈. 그는 유치원 시절 풍납동이 침수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32] 1988년 3월 6일생(36세)이므로 1992~1994년에 유치원을 다녔을 것이다. 악명높은 풍납동 침수와 1994년 폭염은 이들이 유치원 시절에 겪었다. 그 시절에는 해외여행이 막 자유화된 시점이라 유치원생 중 해외여행을 가 본 사람의 비율이 한 자릿수였다.[33] 초이유치원에 다녔다는 의혹이 있었으나, 우병우 본인이 그런 의혹을 일축했다. 물론 우병우 본인은 시골 (경상북도 봉화군 상운면 가곡리)에서 태어나는 바람에 유치원 교육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했다.[34] 윤석열은 1960년 12월 18일생(63세, 음력 11월 1일)이라 1964~1966년 사이에 유치원을 다녔다. 윤석열이 유치원을 다니던 1960년대에는 유치원 취원율이 1%대에 불과했으므로 상당히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을 것이다. 그 당시에는 서울에 전차가 있고, 문맹이 현재보다 더 많아서 장년층 (대부분 여성)에서도 문맹을 볼 수 있었으며, 버스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이 매우 당연하게 여겨졌다. 다만, 의과대학 건물 내부는 그 당시에도 금연 구역이었다. 여담으로, 그의 유치원 시절 장래희망은 목사였다. 윤석열이 자신의 이름을 '윤성녈'로 발음하는 이유는 어린 시절부터 집안에서 그렇게 불러 왔기 때문에 그 발음이 익숙해서 그런 것이다.[35] 인천 출생이다. 초등학교 4학년이던 2011년 스페인으로 이민을 갔다.[36] 전라남도 강진군 출생이다.[37] 시인 김수영은 1921년 11월 27일생이고, 1968년 6월 16일에 사망했다. (살아 있었다면 아마 102세가 됐을 것이다.) 그의 세대에는 유치원이 매우 드물었던 것으로 보아 당시 매우 부유한 집안에서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 시절 서울은 매우 작았고, 강남 지역은 아직 시골이었으며, 아직 분단 이전이라 북한도 자유롭게 오고갈 수 있었다. 거기에 현재의 초등학교 격인 보통학교시험을 치러서 들어갔다.[38] 이순재는 1934년 11월 16일생(89세)이므로 또래인 1934년생들은 주로 1938~1940년 사이에 유치원을 다녔다. 당시에는 유치원이 매우 드물었기 때문에 (게다가 보내더라도 거의 남자만 보냈다.) 상당히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크리스마스가 평일이었던 시절에 유치원을 다녔으므로 크리스마스 행사를 당일에 할 수 있었다. (1934년생들은 국민학교 5학년 때까지 (간이학교 졸업생은 간이학교 졸업 후에도) 크리스마스에 쉬지 못했을 정도.) 엄밀히 말하면 이순재의 고향은 함경북도 회령군이지만 (이 때문에 이순재는 실향민이 됐다.) 유치원은 서울에서 다녔으며, 유치원 말미인 1940년에는 히로키 준사이(廣城順載; ひろきじゅんさい)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까지 했다. 아마 그의 유치원 졸업앨범에는 본명인 '이순재'가 아니라 '히로키 준사이'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적혀 있을 것이다. 그 시절에는 높은 영아사망률로 출생신고 자체를 몇 년 늦게 해서 7세 이상인 유치원생이 현재보다 더 많았던 시절이었다. 1934년생이 유치원을 다니던 당시에는 민주당이 남부에서 지지율을 높이고 있었으나 한반도에는 아직 정당이 없었다.[39] 김수용은 1966년 10월 18일생이라 1970~1972년 사이에 유치원을 다녔다. 이들은 100원짜리 지폐가 있고 풍납동, 잠실동, 암사동 등이 시골이며 서울의 대중교통이 버스뿐이던 시절에 유치원을 다닌 셈. 참고로 김수용이 유치원을 다니던 시절에 전한길 (1970년 8월 21일)과 이기상 (1971년 6월 25일)이 태어났다.[40] 유재석은 1972년 8월 14일생(51세)이므로 1976~1978년 사이에 유치원을 다녔다. 말 그대로 교련 수업과 미니스커트 단속이 있던 시기에 유치원을 다닌 셈이며, 그 시절이면 용인대학교의 전신인 대한유도학교가 송파구 풍납동에 있었고, 버스에서 담배를 피우던 시절이었다.[41] 용준형은 1989년 12월 19일생(34세)이므로 또래인 1989년생들은 주로 1992~1995년에 유치원을 다녔다. 용준형은 초등학교 6학년이던 2002년에 현재의 이름으로 개명했으므로 유치원은 개명하기 전에 쓰던 '용재순'이라는 이름으로 다녔다.[42] 김현수는 1988년 1월 12일생(36세)이므로 1987년생들과 같은 1991~1993년에 유치원을 다녔다. 사실상 이들은 황영조가 금메달을 따고 처음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치러졌을 때 유치원을 다녔던 셈. 그와 같은 시기에 유치원을 다닌 사람으로는 류현진, 최다은, 손고운, 강정호, 차우찬, 기보배, 최주환 등이 있다.[43] 당시 유치원은 4세부터 입학이 가능했으므로 류수영(1979년 9월 5일생, 44세)은 1983년에 유치원 입학 대상이 됐다. 이들은 전무후무한 음력 윤10월 (1984년 11월 23일~12월 21일)과 가장 늦은 설날 (1985년 2월 20일)을 유치원 시절에 겪었다. '류수영'이라는 이름은 연예인이 된 후 예명으로 지은 이름이므로 유치원은 본명인 '어남선'이라는 이름으로 다녔다.[44] 당시 유치원은 4세부터 입학이 가능했으므로 장나라 (1981년 3월 18일생, 43세)는 1985년부터 유치원 입학이 가능했다. 장나라의 또래인 1981년생은 보통 1985~1987년 사이에 유치원을 다녔으나 1981년 1월, 2월생들은 1984~1986년 사이에 다녔다. 빠른 1981년생들은 유치원 시절 전무후무한 음력 윤10월 (1984년 11월 23일~12월 21일)을, 1981년생들은 20세기 마지막 음력 윤6월 (1987년 7월 25일~8월 22일)을 경험한 셈. 이들은 유치원 때 여름만 되면 풍납동, 성내동, 망원동 등이 물에 잠겼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장나라가 유치원을 다니던 시절은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한 시절이라 유치원생 중 해외여행을 다녀온 경험이 있는 사람이 1% 미만이었고 대학생들이 9급 공무원 시험을 무시하던 시절이었다.[45] 박태환은 1989년 9월 27일생이라 1992~1995년 사이에 유치원을 다녔다. 이들은 유치원 시절 풍납동 침수를 겪은 셈. 그 시절이면 4년제 대학 졸업자들이 9급 공무원 시험고졸들이나 보는 시험이라며 무시하고 (게다가 당시 9급 공무원 시험 과목은 국어, 영어, 한국사, 사회, 수학, 국민윤리, 전자계산일반 등 7과목이었고 행정학, 행정법은 아직 시험 과목이 아니었다.) 거들떠도 보지 않던 시절이었고, 상위권 대학생들은 7급 공무원 시험도 무시했다고 한다.[46] 하승진은 1985년 8월 4일생(38세)이며, 그의 또래인 1985년생들은 4세부터 유치원에 다닐 수 있었으므로 1989년부터 1991년까지 유치원에 다녔다. 다만 1985년 1~2월생들은 1988년부터 1990년까지 유치원에 다녔는데, 1985년 1~2월생들은 1988 서울 올림픽을 유치원 시절에 봤고, 나머지 1985년생들은 롯데월드 어드벤처 개장 (1989년 7월 12일)을 유치원 시절에 경험했다. 심지어 그 시절이면 일본은 월드컵조차 못 나갈 때였을 정도였다. (당시 일본은 홍콩과 2번, 인도네시아와 1번 비기고 (그것도 다 0:0) 북한에 2:0으로 지는 등 졸전을 거듭해 월드컵에서 탈락) 그야말로 하승진과 이다지 (1985년 3월 11일생)는 같은 시기에 유치원을 다닌 셈. 2020년 하승진의 유치원 시절 사진이 공개됐는데, 유치원 시절에 초등학생 수준으로 키가 컸다고 한다. 실제로 하승진은 본인이 유치원 시절에 키 160cm (이는 유치원생 평균보다 40cm 이상 더 큰 것이며, 거의 베트남, 라오스, 인도네시아, 필리핀, 미얀마, 캄보디아 등 동남아 국가의 성인 남성 평균 키에 가깝다. 통계상으로 동남아 국가의 평균 키가 하승진의 유치원 시절 키 (160cm)와 비슷한데, 베트남은 164cm, 라오스는 160cm, 인도네시아는 163cm, 태국은 168cm, 필리핀은 163cm, 캄보디아는 163cm, 미얀마는 165cm로 평균키가 대부분 170cm 미만이다. 유치원 아이들 중 0.1% 미만이 키가 이 정도이다.), 현재 221cm를 찍은 것으로도 모자라 할아버지가 190cm, 아버지와 누나가 200cm를 넘는 등 가족 모두가 키가 크다.[47] 이다지는 1985년 3월 11일생(39세)이므로 1989~1991년 사이에 유치원을 다녔다. 그야말로 1985년생들은 유치원 시절에 국군의 날이 공휴일에서 제외된 셈이며, 1985년생인 농구선수 하승진과 같은 유치원을 다닌 셈이지만, 키는 하승진이 40~50cm는 더 컸다. 게다가 그 시절이면 일본은 아직 월드컵에 못 나갔고 경기도 북부에 고속도로가 없었던 시절이다. 오빠 (1979년생), 언니 (1982년생)와 같은 유치원 출신인지는 불명.[48] 심지어 지방 소재 대학의 유아교육과를 졸업한 교사들도 서울로 오는 경우가 있다.[49] 풍납토성으로 인해 재개발이 제한된 것은 물론, 잦은 수해로 ‘물납동’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까지 받게 되었다.[50] 2004년 3월 5일 폭설, 2010년 1월 4일 폭설 당시에는 진짜로 휴원한 적이 있다. 2010년 중부권 폭설 사태 당시 서울에서만 25.8cm라는 엄청난 눈이 내려 유치원들이 모두 휴원할 수밖에 없었다. 그 때 풍납토성은 엄청난 종이박스 천지[51] 1927년생(현재 97세). 그 시절이면 유치원이 매우 드물었던 시절이고, 시인 김수영 (1921.11.27 출생~1968.6.16 사망)이 유치원에 다니던 시절이다. 이 시점에는 아직 분단되지 않아 한국인들은 북한에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었던 데다 풍납토성몽촌토성은 서울이 아닌 경기도의 문화재였고, 봉은사 역시 경기도의 절이었다.[52] 그 시절이면 대학교 캠퍼스에 경찰이 배치될 정도로 살벌했다. (물론 데모 진압만이 아닌 장발, 미니스커트 단속도 담당했다.) 이 시기 유치원을 다닌 사람은 서경석, 박성호, 유재석, 신현준 등이 있었는데 당시 유치원 취원율은 10% 미만이었다.[53] 이 기간 중 실제 등원한 날 수는 10일이었는데, 9월 17일은 올림픽 개막식, 9월 25일9월 26일추석 연휴 (당시 추석은 2일 연휴였다.), 10월 1일국군의 날로 공휴일이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 유치원을 다닌 사람은 1982~1984년생이다.[54] 이런 경우 같은 아파트에 살아도 몇 동에 사는지에 따라 유치원이 갈릴 정도.[55] 한국의 도시 중 인구가 가장 많고, 미국의 어지간한 주들도 서울보다 인구가 적다.[56] 다만, 서울불교계 유치원은 대개 소규모 에서 관리하고, 조계사봉은사 등 대규모 사찰이 관리하는 곳은 없다시피 하다. 게다가 노원구의 삼육대학교 부속 유치원은 무려 재림교 미션스쿨이다.[57] 종로구 14만 9,384명 (1.6%), 중구 12만 5,240명 (1.3%), 용산구 23만 40명 (2.3%), 성동구 29만 3,556명 (3.1%), 광진구 34만 6,682명 (3.6%), 동대문구 34만 2,837명 (3.6%), 중랑구 39만 4,702명 (4.1%), 성북구 43만 7,153명 (4.5%), 강북구 30만 8,055명 (3.2%), 도봉구 32만 5,257명 (3.4%), 노원구 52만 3,037명 (5.5%), 마포구 37만 1,890명 (3.8%), 서대문구 31만 2,173명 (3.2%), 은평구 47만 9,835명 (4.9%), 강서구 58만 185명 (6.1%), 양천구 45만 4,251명 (4.7%), 영등포구 37만 9,480명 (3.8%), 구로구 40만 4,408명 (4.2%), 금천구 23만 1,733명 (2.4%), 동작구 39만 1,220명 (4.1%), 관악구 49만 5,060명 (5.1%), 서초구 42만 5,126명 (4.4%), 강남구 53만 9,231명 (5.6%), 송파구 66만 7,960명 (6.9%), 강동구 45만 9,970명 (4.4%)로 강북 지역에 468만 4,802명 (48.3%), 강남 지역에 505만 2,160명 (51.7%)가 살고 있다. (옛날 군(郡) 관할대로 조립해 보면 광주군 153만 6,528명 (대왕면 11만 6,754명, 언주면 44만 559명, 중대면 47만 9,736명, 구천면 49만 9,389명), 양주군 110만 2,038명 (구리면 25만 3,744명, 노해면 84만 8,274명), 시흥군 199만 9,134명 (동면 84만 4,685명, 신동면 52만 9,883명, 북면 62만 4,566명), 부천군 27만 5,748명, 김포군 104만 4,436명 (양동면 83만 5,439명, 양서면 20만 8,997명), 경성부+고양군 371만 581명 (경성부 39만 1,166명, 용강면 21만 5,957명, 한지면 34만 7,631명, 뚝도면 76만 5,965명, 숭인면 101만 6,296명, 연희면 39만 7,042명, 은평면 51만 9,502명, 신도면 5만 7,022명)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유치원은 강북 지역에 더 많다. 이는 강남에 사는 사람들이 자녀를 영어학원 유치부에 많이 보내고, 해외로 이민 등을 가서 거주하는 사람들의 이전 주소지가 대부분 서울 강남 지역이기 때문이다.[58] 희생자들은 대부분 1993년생이었으므로 살아 있었다면 28세이다. 김순덕은 이 사고의 여파로 큰아들을 잃고 뉴질랜드 이민을 떠났다.[59] 초대 원장은 제2공화국 시기에 국무총리 (정부수반. 국가원수는 윤보선이었다.)까지 오른 장면. 장영신이 이 곳을 졸업했다. 또한 멀지 않은 거리에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캠퍼스도 있다.[60] 2020년 늦봄에 코로나19 사태를 또다시 키운 이태원 클럽이 이 곳에 있다. 그 여파로 여름까지 코로나 확산세가 진정되지 않았다. 게다가 2022년 10월29일에는 이태원 압사 사고가 발생해 서울은 물론, 전국의 모든 유치원이 할로윈 행사를 취소하게 만들었다.[61] 지금이야 공무원의 추악한 현실들이 밝혀지면서 많이 줄어들었지만 세간의 인식상 공무원 시험 학원, 고시원, 독서실들로 즐비한 동네인데 당시에는 유치원이 먼저 들어올 정도로 인구가 많았다. 당시에는 인근의 대방동, 상도동, 흑석동도 노량진 생활권이었다.[62] 1930~40년대에도 노량진역에서 기차를 타고 영등포유치원 등으로 원정 통학을 하기도 했다. 개원 초기에는 동작구 노량진동, 대방동, 상도동은 물론 저 멀리 영등포구 여의도동관악구 신림동, 봉천동에서도 오는 경우가 있었다.[63] 길동, 둔촌동, 명일동, 고덕동, 상일동, 강일동, 성내동, 암사동. 이들 중 강일동은 가장 오랫동안 시골로 남아 있었다.[64] 지금이야 풍납토성으로 인해 재개발이 제한돼 버려 풍납동이 송파구에서 가장 낙후된 동네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동네이지만, 과거에는 천호동에 가까워 송파구에서 문명의 혜택을 가장 일찍 받은 동네였다. (게다가 여름에는 수해가 잦아서 ‘물납동’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도 받을 정도이다.) 송파구의 다른 동네들이 1970년대 이후에야 겨우 유치원 교육의 혜택을 받은 (심지어 엄청난 부촌, 롯데월드 등으로 유명한 잠실동마저도 1970년대에 유치원이 처음 들어왔지만 현재는 아파트 단지에 공•사립 유치원이 모두 있는 곳도 있을 정도.) 반면 풍납동에는 1950년대에 이미 유치원에 다닌 아이들이 있었을 정도. 다만 이들은 극소수로, 현재 풍납동에 사는 풍납동 출신 어르신들은 거의 유치원에 다니지 못했다고 한다. 당시 송파구 풍납동에서 성애유치원으로 통학하던 아이들은 주로 현재의 씨티극동아파트 및 풍납시장 근처에서 살았으며, 경당역사공원 이남의 풍납1동이나, 풍납2동에 살던 아이들은 거리로 인해 상대적으로 드물었다. (풍납동 토박이들은 풍납1동을 윗마을, 풍납2동을 아랫마을이라고 불렀다. 1950년대에 풍납동에 살던 사람들 중 유치원 교육의 혜택을 받은 이들은 풍납1동 (윗마을) 거주자가 대부분이었고 아랫마을 거주자는 거의 현재의 갑을아파트나 미성아파트 일대 거주자였다.) 이들은 대체로 어려서부터 풍납동에 살던 원주민들로, 풍납토성이 아직 문화재라는 인식이 없던 시절에 태어나 어린 시절 겨울에 눈이 오면 자루포대를 가지고 풍납토성에서 눈썰매를 타거나 서울아산병원 근처의 한강에서 얼음썰매를 타고 놀았고 초등학교는 구서국민학교 (현 천호초등학교), 중학교는 강 건너 성동구의 한양여중, 무학여중, 배명중 등지로, 고등학교는 경기고, 한양여고, 배명고 등으로 갔으나 (풍납동에는 버스가 없어 천호동까지 가야 했다.), 현재는 토성 뒤편의 빌라다세대주택, 혹은 토성 근방의 아파트에 살거나, 살던 곳이 문화재에 수용되어 고향을 버리고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가는 경우가 많다. 이런 영향으로 지금도 천호동이나 성내동의 유치원에는 송파구 풍납동 거주 원생도 있고, 풍성로에도 강동구의 유치원 (주로 천호동 천호유치원이나 성내동 유정유치원, 준현유치원.) 버스가 운행할 정도이다. 반대로 강동구에도 우일유치원 등 풍납동의 유치원 버스가 운행하기도 한다. 현재는 더 멀리 경기도 하남시, 구리시에서도 온다.[65] 당시 방이동에서 성애유치원으로 온 유아들은 현재의 올림픽공원 일대에 살았다가 올림픽공원 조성으로 인해 고향이 철거되면서 실향민이 된 사람들이다. 이들은 성내천을 건너고 풍납동, 성내동을 거쳐서 가야 했기 때문에 풍납동 또는 성내동 거주자들보다는 드물었다.[66] 대부분 풍납시장 근처의 풍납1동 거주.[67] 지금이야 엄청난 부촌으로 인정받지만, 당시 한남동에는 단국대학교가 있었던 대학가였다.[68] 주로 현재의 장미아파트, 파크리오아파트 일대에 거주했던 유아들이 이 테크를 썼다.[69] 과거 풍납동에서 공부를 잘 하는 여학생들은 천호초-한양여중-한양여고 테크를 탄 경우도 있고, 성동구의 유치원으로 가는 강남, 송파구 출신 유아는 주로 성수동으로 간다.[70] 1960년대에 지금의 노원구 월계동, 공릉동에 사는 아이들이 광운대역이나 신공덕역, 화랑대역에서 기차를 타고 동대문구의 유치원으로 원정 통학을 하기도 했다. 현재는 상계동 수락리버시티 3, 4단지 거주 아동이 경기도 의정부시로 가는 경우가 있고, 반대로 남양주시 진접읍, 오남읍에서 오는 경우도 있다.[71] 주로 기차로 연결되는 별내면, 퇴계원읍, 구 미금시 지역. 사릉역 또는 덕소역 이후에 사는 아이들은 동대문구로 원정 오는 경우가 드물다.[72] 성산동은 서울월드컵경기장이 있는 그 동네다.[73] 이화유치원은 중구에서 서대문구로 이전했다.[74] 2020년 늦여름부터 가을까지 코로나19 사태를 엄청나게 키운 사랑제일교회가 이 곳에 있다.[75] 1970년 성동~성북 (현 광운대) 구간 폐선.[76] 송파구 거여동 소재. 당시 송파출장소는 지금의 송파구 장지동, 문정동, 가락동, 오금동, 방이동, 송파동, 삼전동, 석촌동, 거여동, 마천동을 관할했다. (잠실동은 성동구 본청 관할, 풍납동은 천호출장소 관할) 잠실지구의 경우 1970년대에 잠실 4단지에 유치원이 설립됐으나 이름은 불명이고, 1976년에는 신천초등학교 병설유치원이 설립됐다. (1982~1985년 휴원). 또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유치원은 1984년 개원한 석촌유치원이다. 강남3구 중 유치원이 가장 일찍 들어온 곳이 송파구인 셈. 아이러니하게도 송파구에서 유치원 교육의 혜택을 먼저 받은 동은 풍납토성으로 인해 재개발이 제한돼 송파구에서 낙후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동네인 풍납동인데, 1950년대에 이미 풍납동 거주 아동이 천호동에 있는 유치원을 다닌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풍납동에 살던 아이들은 풍납동 일대에 펼쳐진 논밭과 풍납토성을 가로질러 유치원을 통학했다고 한다. 1950년대에 송파구에서 유치원 교육의 혜택을 받은 동은 풍납동방이동 (구 이동. 구 방이동 지역은 유치원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했다.) 단 둘뿐이고 나머지 잠실동, 신천동, 송파동, 석촌동, 가락동, 삼전동, 문정동, 장지동, 오금동, 거여동, 마천동은 유치원 교육의 혜택에서 열외였을 정도이니 말 다 했다. (그 방이동 거주 유아들도 현재의 올림픽공원 내부에 살다가 1980년대에 실향민이 된 사람들이다.) 심지어 풍납토성 바로 옆에도 유치원이 두 곳 있다. 해당 유치원은 우일유치원 (유치원 창문으로 풍납토성을 볼 수 있을 정도이다. 겨울에 눈이 오면 일부 원생들이 플라스틱 눈썰매나 비닐포대, 종이박스 등을 가지고 풍납토성에서 눈썰매를 탈 정도. 그러다가 사회복무요원 등 관리인들이 달려온다)과 동화나라유치원으로, 한강극동아파트나 현대리버빌아파트, 풍납현대아파트, 풍납극동아파트, 풍납쌍용아파트, 연지토성아파트, 송파해모로아파트, 송파힐스테이트아파트, 토성현대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이 주로 이 곳에 다닌다고 한다. (다만, 풍납현대아파트, 풍납쌍용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은 현대유치원으로 가기도 한다.) 잠실올림픽아이파크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의 경우는 우일유치원으로 많이 가지만, 드물게 파크리오아파트에 있는 햇빛유치원으로 가는 경우도 있다. 동아한가람아파트, 미성아파트, 갑을아파트, 풍납강변현대아파트, 풍납신동아아파트 등에 사는 아이들은 한가람유치원 (풍납백제문화공원에서 매우 가깝다.)으로, 신성노바빌아파트나 씨티극동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은 거의 강동구 천호동의 유치원으로 가는데, 풍납동을 가로지르는 풍성로에도 천호유치원 (천호동), 유정유치원 (성내동), 준현유치원 (성내동) 등 강동구의 유치원에서 오가는 버스가 있을 정도면 말 다 한 거다. 빌라나 다세대주택에 살아도 인근 아파트와 비슷하게 유치원을 다닌다고 한다. 심지어 과거의 대한유도학교 부지에 세워진 잠실올림픽아이파크 아파트에서 성내동 준현유치원, 유정유치원으로 가는 아이들도 있다. 또한 강동구 둔촌동에도 송파구 방이동의 올림픽유치원, 리아유치원 버스가 운행하기도 한다. 현재는 하남시 감북동, 감일동, 학암동과 성남시 수정구 창곡동, 복정동에서도 온다.[77] 1968년 폐원.[78] 주로 풍납시장 이북의 풍납1동. 이들은 풍납토성을 가로질러 천호동으로 가서 버스를 타고 유치원에 갔다.[79] 의외로 송파구는 1965년에 유치원이 들어왔다. 해당 유치원의 첫 번째 졸업생들은 현재 50대 후반이 됐다.[80] 1950년대 이전에도 간간히 봉천동에 살던 아이들이 걸어서 영등포유치원이나 노량진교회 부설 유치원으로 원정 통학을 하기도 했다.[81] 그 시절이면 대학교에서 데모가 끊이지 않고, 무려 대치동(!!!)에 초가집이 있던 시절이었다. 당시 대치동에 있던 초가집은 하이스턴 아파트 부지에 있었다고 한다. 그 정도로 당시 서울 사람들에게 강남에 대한 인식은 그저 ‘말만 서울이고 실제로는 어디 경기도에 있는 깡촌’이었다. 그 이전에는 압구정동, 신사동 등 일명 '테북' 지역에서 버스를 타고 한남대교를 건너 용산구의 유치원으로 원정 가는 아이들이 간간히 있었으나, 2000년대 들어 그런 경우는 없어졌고 오히려 송파구 잠실동, 삼전동, 가락동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신촌동, 오야동, 심곡동, 고등동에서 원정 오는 경우가 늘었다. 송파구 잠실동, 삼전동에 사는 경우는 테북, 송파구 가락동과 성남시 수정구 신촌동, 오야동, 심곡동, 고등동은 테남 지역으로 많이 간다.[82] 1972년 이전에는 염창동, 등촌동에 사는 아이들이 영등포유치원 등으로 걷거나 버스를 타고 등하원을 하는 경우가 간간히 있었을 뿐, 강서구에 살던 유아 대부분은 유치원에 다녀 보지 못했다. 당시 서울 사람들에게 강서구에 대한 인식은 그저 ‘공항 있는 어디 경기도 깡촌’ 정도였다. 현재는 역으로 김포시, 부천시, 인천광역시 계양구에서까지 올 정도면 인구가 많이 늘었다.[A] A B C '성체'란 가톨릭성체성사를 의미한다. 인보성체수녀회서울시, 성남시, 용인시에서 성체유치원을 운영하고 있다.[83] 다만, 1950~60년대에도 구로구 거주 아동이 다른 지역으로 유치원 원정 통학을 한 적은 있었다. 1950년대 이전에는 주로 영등포유치원 등지로 원정 통학을 했고, 1960년대에는 구로구 오류동 등지에 사는 아이들이 부천의 소사유치원으로 원정 통학을 한 적이 있었다. 현재는 역으로 광명시 거주 유아들이 구로구의 유치원으로 오기도 한다.[84] 1940~60년대에도 양천구 목동에 살던 아이들이 안양천 너머의 영등포유치원 등으로 원정 통학을 한 적이 있었다. 현재는 오히려 부천시에서 역으로 원정 오기도 한다.[85] 유치원 교사 급식 이물질 혼입 사건이 이 곳에서 발생했다.[86] 다만, 금천구에서 유치원 교육의 혜택을 먼저 받은 동네는 금천구청역 (구 시흥역)이 있는 시흥동인데, 1950년대에 이미 시흥동 거주 아동이 안양의 유치원으로 원정 통학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원생들은 금천구 독산동시흥동에 주로 살았고 드물게 경기도 광명시 하안동,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에 살던 유아들도 있었다. 1970년대에는 시흥군 소하읍에 살던 아이들도 왔다고 한다.[87] 이전에는 잠원동 아이들이 버스를 타고 한남대교를 건너 용산구의 유치원으로 원정 가는 아이들이 간간히 있었으나, 1990년대 이후 그런 경우는 줄었고, 오히려 경기도 과천시성남시 수정구 상적동, 금토동에서 원정 오는 경우가 늘었다.[88] 다만, 도봉구에서 유치원 교육의 혜택을 먼저 받은 동네는 창동역이 있는 창동과 의정부에서 가까운 도봉동인데, 1950년대에 이미 창동, 도봉동 거주 아동이 의정부의 유치원으로 원정 통학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89] 1960년대에 지금의 중랑구 신내동, 상봉동에 사는 아이들이 망우역에서 기차를 타고 (당시에 중랑역, 상봉역, 양원역, 신내역은 없었다. 상봉역은 1996년 (중앙선 2010년), 중랑, 양원역은 2005년, 신내역은 2013년에 와서야 개통했다.), 중화동에 사는 아이들이 걸어서 동대문구의 유치원으로 원정 통학을 하기도 했다. 현재는 경기도 구리시에서 중랑구로 오는 경우가 많아졌다.[90] 부천의 경우는 서울로 가는 경우도 있는데, 이 경우는 주로 강서구, 양천구, 구로구로 간다.[91] 중구 13만 9,729명 (4.6%), 동구 6만 2,542명 (2.3%), 미추홀구 40만 4,343명 (14.3%), 부평구 49만 4,962명 (18%), 남동구 52만 5,354명 (18.6%), 연수구 38만 7,450명 (12.6%), 계양구 29만 6,750명 (10.7%), 서구 54만 2,040명(18.9%)이다. 강화군 인구 6만 9,203명과 옹진군 인구 2만 455명을 포함해서 계산한 인천시 전체 인구인 294만 2,828명 대비 각 지자체의 비율을 구하면 중구 4.5%, 동구 2.2%, 미추홀구 13.9%, 부평구 17.4%, 남동구 18%, 연수구 12.3%, 계양구 10.3%, 서구 18.4%, 강화군 2.3%, 옹진군 0.1%이다. 또한 옛날 군(郡) 관할대로 조립해 보면 인천부 10만 8,220명, 김포군 15만 6,727명, 부천군 258만 8,213명이다. 옛날 면대로 조합하면 인천부 10만 8,220명, 부천군 부내면 67만 3,316명, 다주면 57만 5,440명, 남동면 31만 1,253명, 서곶면 38만 5,313명, 문학면 46만 6,939명, 계양면 8만 1,901명, 영종면 8만 9,947명, 용유면 4,104명, 김포군 검단면 15만 6,727명이다. 전체적으로 인구가 많은 부평구, 서구, 연수구에 사립유치원 숫자가 늘고 있다. 이는 인천 자체의 지형 때문인데, 아파트 건설로 인해 사라진 산들이 여럿 생겨 산지 비율이 낮아진 점도 있지만, 원래 인천 자체에 산이라고 명함을 내밀 수 있을 만한 산이 없어서 (거의 네덜란드 수준이다.) 인구가 모든 지역에 고루 퍼질 수 있는 것. 심지어 인천국제공항은 항공기 이착륙에 용이하도록 (김해국제공항만 봐도 알 수 있다. 돗대산 항공기 추락사고가 여기서 발생했을 정도.) 영종도용유도 사이를 간척해서 지었기 때문에 인천공항 근처와 공항 내부에서는 산을 아예 볼 수 없다.[92] 청송군에는 사립유치원이 없고, 심지어 공립 단설유치원도 없다. 이유는 당연히 인구 감소. 2005년에 이미 인구 3만 명 선이 무너졌다.[93] 류현진은 1987년 3월 25일생(37세)이며, 당시에는 유치원 입학 대상이 4~5세였다. 류현진의 또래인 1987년생들은 1991년부터 1993년 사이에 유치원을 다녔고, 1987년 1~ 2월생들은 1990~1992년 사이에 1986년생과 함께 유치원을 다녔다. 그래서 ‘다니유치원’의 최다은 (1988년 1월 25일생)은 야구선수 류현진과 같은 시기에 유치원을 다닌 것이다.[94] 이강인은 2001년 2월 19일생(23세)이므로 원칙대로라면 2003~2006년 사이에 유치원을 다녔어야 하나, 빠른 년생인데도 제 기수에 맞춰 2006년부터 유치원에 다녔다. (그 때문인지 이강인과 최윤서가 같은 시기에 유치원을 다녔다.) 참고로 당시 이강인은 사자반이었다.[95] 2002 한일 월드컵 당시 대표팀은 이 곳의 인천문학경기장에서 포르투갈을 1:0으로 이겼다. 참고로 파울루 벤투 감독이 선수로 뛴 그 경기였다.[96] 강화군의 읍면별 인구는 강화읍 2만 2,707명, 선원면 7,850명, 길상면 7,043명, 불은면 4,903명, 화도면 4,507명, 양도면 4,243명, 하점면 4,037명, 송해면 3,215명, 내가면 3,069명, 교동면 2,901명, 삼산면 2,223명, 양사면 1,861명, 서도면 644명인데, 서도면은 인천에서 가장 인구가 적은 읍면동이다. 그 인구가 가장 많다는 서구 청라2동 (인구 4만 8,770명)의 74분의 1 수준이다.[97] 인천 본토는 너무 멀고, 그나마 가까운 도시가 김포시이기 때문이다. 사실 길상면 (전등사가 있는 곳이다.)과 강화읍은 다리 하나만 건너면 김포시이며, 강화군이 경기도였을 때는 국회의원도 김포와 함께 뽑았다.[98] 이건 전방 어느 지역을 가더라도 마찬가지. 전방 지역은 후방보다 상근예비역에 뽑히기 쉽다.[99] 한씨 2,787명, 최씨 2,630명.[100] 영종도 최초의 유치원.[101] 경상북도 울릉군보다도 적었다. 다만, 그 시기는 경기도의 신도시들이 인구가 매우 적은 시절이었다.[102] 만약 영종면, 용유면, 대부면이 넘어가지 않았다면 옹진군의 인구는 12만 3,306명까지 늘어나 연천군, 가평군, 양평군동두천시, 과천시, 여주시를 제쳤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영종면이 읍으로 승격해서 영종읍 8만 9,947명, 대부면 8,800명, 영흥면 6,377명, 백령면 5,238명, 용유면 4,104명, 북도면 2,152명, 연평면 2,020명, 덕적면 1,892명, 대청면 1,465명, 자월면 1,311명이 된다.[103] 심지어 이 동네는 군청이 관외에 있고, 가장 인구가 많은 영흥면조차 인구가 6,377명밖에 안 된다. 옹진군의 읍면별 인구는 영흥면 6,377명, 백령면 5,238명, 북도면 2,152명, 연평면 2,020명, 덕적면 1,892명, 대청면 1,465명, 자월면 1,311명으로 그 어떤 곳도 인구 1만 명을 넘는 곳이 없다.[104] 장단군 중 남한에 남은 지역은 파주시연천군에 편입. 정확히는 장남면연천군에 편입되고, 장단면, 군내면, 진동면, 진서면파주시로 편입됐다.[105] 독립운동가 권애라가 이 곳에서 교사로 근무했다.[106] 시내 인구는 1960년대의 1만 7,910명에서 2021년 4만 422명으로 늘어 시내 비중이 16.2%에서 36.7% (오학동 포함 시 51.8%)로 높아졌다. 여주시의 읍면동별 인구는 시내 4만 422명, 오학동 1만 7,989명, 가남읍 1만 5,607명, 대신면 7,075명, 능서면 6,400명, 흥천면 5,121명, 북내면 4,896명, 점동면 4,664명, 강천면 4,184명, 금사면 2,995명, 산북면 2,544명으로 높은 시내 집중도를 보여 준다. 만약 개군면이 여주시 관할이었으면 여주의 인구는 11만 6,994명이었을 것이다.[107] 간씨는 인구 2,920명의 희귀 성인데 그 중 235명이 여주에 살고 있다.[108] 기안84는 1984년 10월 22일생(39세)이므로 유치원은 1988~1990년 사이에 다녔다. 사실상 이들은 롯데월드 어드벤처가 개장하던 시기에 유치원생이었고 국군의 날이 마지막으로 공휴일이었던 시기, KTX가 없고 (심지어 착공조차도 안 했다.) 한국 철도가 새마을-무궁화-통일-비둘기 4등급 체계였던 시기, 고졸들이 주로 9급 공무원 시험을 보던 (게다가 당시 9급 공무원 시험 과목은 국어, 한국사, 영어, 사회, 수학, 국민윤리 등 6과목이었고 전문과목인 행정학, 행정법 등은 아직 시험과목이 아니었다.) 시기가 유치원생이었던 셈. (이 때 한글날도 같이 공휴일에서 제외됐으나, 한글날은 1984년생이 성인이 된 후인 2013년에 공휴일로 복귀) 기안84라는 이름은 엄밀히 말해서 성인이 된 이후에 만든 필명이므로 유치원은 본명인 '김희민'이라는 이름으로 다녔다.[109] 이천군의 시 승격은 1996년.[110] 야간통행금지가 있던 시절, 이천군 장호원읍에 살던 아저씨들이 을 마시다가 자정이 되면 다리 건너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으로 가서 술을 마셨을 정도이다. 이런 현상은 2020년 연말 코로나19 사태로 경기도와 충청북도의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가 달라지면서 재현되었다.[111] 그 시절 용인과 이천을 잇던 철도인 수려선은 폐선됐고, 그 때의 아이들은 2021년까지 생존해 있더라도 팔순 넘긴 어르신들이다.[112] 시내 인구는 1960년대 1만 8,906명에서 2021년 9만 6,201명으로 늘어 시내 집중도가 15.9%에서 44.5%로 높아졌다. 이천시의 읍면동별 인구는 시내 9만 6,201명, 부발읍 3만 6,065명, 장호원읍 1만 4,699명, 대월면 1만 4,431명, 마장면 1만 4,265명, 신둔면 1만 3,723명, 백사면 1만 1,268명, 호법면 5,900명, 설성면 4,752명, 모가면 4,417명, 율면 2,667명으로 교통의 요충지인 북부의 인구가 더 많다. 심지어 율면은 수도권 지역 중 경상도와 가장 가깝다.[113] 1989년 안성선 폐선.[114] 소사리를 평택에 뺏기고, 진사리는 거의 평택이나 다름없다.[115] 용이리, 죽백리, 청용리, 월곡리를 평택에 뺏겼다.[116] 시내 인구는 1960년대 2만 3,698명에서 2021년 5만 8,840명으로 늘어, 시내 비중은 16.4%에서 30.8%까지 높아졌다. 다만, 시내 인구는 공도읍보다 적다. (2020년 들어 격차가 좁아질 조짐은 보이고 있다.) 안성시의 읍면동별 인구는 공도읍 5만 9,273명, 시내 5만 8,840명, 대덕면 1만 5,332명, 일죽면 7,589명, 금광면 7,540명, 죽산면 6,850명, 원곡면 6,300명, 미양면 5,834명, 보개면 5,368명, 양성면 5,281명, 삼죽면 3,545명, 서운면 3,383명, 고삼면 1,967명으로 면 지역의 인구가 처참하리만큼 적다.[117] 당시 수원군 수원면 교리. 수원면은 1931년 읍으로 승격된다.[118] 충청남도의 태안읍은 '클 태(泰)'자를 쓰고, 경기도의 폐지된 태안읍은 '별 태(台)'자를 썼다.[119] 물론 과거 용인군 수지면, 화성군 반월면, 시흥군 의왕면 등도 수원에 접하기는 했지만 시흥군 의왕면에 살던 아이들은 주로 안양의 유치원으로 원정 통학을 했고, 용인군 수지면은 수원으로 향하는 교통편이 부실했고, 화성군 반월면도 수인선이 지나가는 서부는 수원으로 가는 교통 상황이 나았으나 동부 지역은 수원보다 안양이 더 가까운 탓에 수원으로 가는 교통편이 부실했기 때문이다.[120] 권선구 36만 8,645명, 영통구 36만 8,842명, 장안구 27만 3,661명, 팔달구 17만 4,930명. 이는 수원 자체의 지형 때문인데, 광교산 정도를 빼면 산이라고 명함을 내밀 수 있을 만한 산이 없어서 인구가 고루 퍼질 수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일본에는 수원보다 인구가 적은 현이 16개 (이시카와현, 오이타, 미야자키, 야마가타, 도야마, 아키타, 가가와, 와카야마, 사가, 야마나시, 후쿠이, 도쿠시마, 고치, 시마네, 돗토리)나 있고, 미국에도 수원보다 인구가 적은 주가 8개 (몬태나, 로드아일랜드, 델라웨어, 노스다코타, 사우스다코타, 알래스카, 버몬트, 와이오밍)나 있다.[121] 이 정도면 광주광역시대전광역시는 그냥 제치고, 미국의 15개 주 (뉴멕시코, 네브래스카, 웨스트버지니아, 아이다호, 하와이, 뉴햄프셔, 메인, 몬태나, 로드아일랜드, 델라웨어, 사우스다코타, 노스다코타, 알래스카, 버몬트, 와이오밍)보다 인구가 많아지게 된다. 일제강점기 인구대로 조합하면 271만 829명으로 대구광역시보다 많다.[122] 정현은 1996년 5월 19일생(27세)이다. 정현의 또래인 1996년생들은 1999~2002년에 유치원을 다녔고, 1996년 1~2월생들은 1995년생들과 같은 시기인 1998~2001년에 유치원을 다녔다. 즉, 정현황인범이 같은 시기에 유치원을 다닌 것이다. (황인범은 1996년 9월 20일생, 27세) 이들은 양평군, 가평군에 고속도로가 없고, KTX가 없던 시절에 유치원을 다녔고, 2002 한일 월드컵을 유치원생 신분으로 봤다. 형 정홍과 같은 유치원을 다녔는지는 불명.[123] 김동현은 1981년 11월 17일생이므로 1985~1987년 사이에 유치원을 다녔다. 사실상 1981년생들은 경기도 북부에 고속도로가 없고 (심지어 당시 경기도 북부에는 의정부시 단 1곳을 제외한 나머지 (고양군, 남양주군, 구리시, 동두천시, 양주군, 파주군, 포천군, 연천군, 양평군, 가평군)는 모두 인구 20만 미만이었다.) 일본이 월드컵에 한 번도 나가지 못하던 시절에 유치원을 다닌 셈. 엄밀히 말해서 김동현이라는 이름은 중학교 3학년 때 개명한 이름이므로 유치원은 개명 전 이름인 ‘김봉’으로 다녔을 것이다. 그러나 김동현은 초등학교부터 대전으로 이사해서 그 곳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124] 현우진은 1988년 2월 10일생(36세)이므로 본래 1992~1994년 사이에 유치원을 다녔어야 하나, 빠른 년생을 적용받아 1991~1993년으로 조정되었다. 1987년생과 빠른 1988년생은 황영조의 금메달 획득과 빌 클린턴의 당선을 유치원생 시절에 봤던 셈. 현우진에게는 형이 있었는데 형과 같은 유치원을 다녔는지는 불명.[125] 이태원 압사 사고 당시 사람을 5명이나 구한 의인 유아교사 배지터 (본명 채경민)가 근무하는 유치원이기도 하다 [126] 1995년 검단면을 인천에 넘기면서 일시적으로 인구가 줄어든 적이 있었다. 이 때 검단초등학교 병설유치원 등 김포의 유치원 몇 곳이 함께 인천으로 넘어갔으며, 만약 김포시가 검단면을 넘기지 않았다면 김포시의 인구는 63만 657명, 양동면과 양서면까지 넘기지 않았다면 166만 5,093명까지 늘었을 지도 모른다. 김포시의 읍면동별 인구는 시내 27만 6,860명, 구래지구 7만 3,661명, 고촌읍 4만 4,389명, 양촌읍 2만 8,880명, 통진읍 2만 6,681명, 대곶면 9,776명, 하성면 8,201명, 월곶면 5,512명으로 최전방인 북부 지역의 인구가 적다.[127] 월곶면, 대곶면, 하성면.[128] 만약 경기북도가 분도되면 1946~1953년까지는 제주도가 유치원이 가장 늦게 설립된 광역자치단체이지만, 1954년~2012년까지 유치원이 가장 늦게 설립된 광역자치단체는 경기북도가 된다.[129] 수락리버시티 3, 4단지 거주 아동.[130] 동씨 자체는 북한에 더 많지만, 남한 동씨들은 의정부에 모여 사는 경우가 많다. 아마 양주에 살던 광천 동씨들이 의정부로 이사를 갔기 때문으로 추정된다.[131] 김초희는 1996년 9월 7일생(27세)이라 1999~2002년 사이에 유치원을 다녔는데, 김초희의 고향인 경기도 의정부시는 도시 지역이라 사립유치원이 많지만 나머지 4명 (김영미, 김경애, 김선영, 김은정)의 고향인 경상북도 의성군은 농촌 지역이라 현재 사립유치원이 의성읍 에덴유치원 하나밖에 남지 않은 데다 단설유치원도 없고, 그나마 그 사립유치원은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상황이라 병설유치원 출신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김초희는 KTX가 없고 전한길이 수능 강사였던 시절에 유치원을 다닌 셈이다.[132] 이들 지역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싶다면 안양시로 가서 타는 경우가 많고, 서울특별시까지 가기도 한다.[133] 동안구 31만 614명 (56.8%), 만안구 23만 9,413명 (43.2%).[134] 기보배1988년 2월 20일생(36세)이므로 1987년생들과 같은 시기에 유치원을 다녔다. (때문에 기보배는 손고운, 김현수, 류현진, 최다은과 유치원 동기가 된다.) 이들은 황영조의 금메달과 20세기 마지막 윤3월 (1993년 4월 22일~5월 20일)을 유치원 시기에 경험한 셈.[135] 황대헌은 1999년 7월 5일생이라 2002~2005년 사이에 유치원을 다녔다. 황대헌이 유치원을 다니던 시절에는 공휴일이 주말에 많이 겹쳐 등원 일수가 많았으며 전한길이 수능 강의를 했던 시절이었다. 동생 황대윤과 같은 유치원을 다녔는지는 불명.[136] 1971년~1973년생이 첫 원생이고, 첫 졸업생은 현재 52~53세가 됐다.[137] 1960년대 당시 포천면의 인구는 1만 6,056명, 영북면의 인구는 2만 3,935명이었다.[138] 포천시는 화천군과도 접해 있지만 화천으로 가는 길은 상태가 나빠 화천에서 유치원 원정 통학을 하는 아이들은 99% 이상이 춘천으로 간다.[139] 주로 노원구, 중랑구.[140] 흔히 '영평'이라고 하면 여기를 뜻한다. 실제로 영중면에 영평리가 있다.[141] 흔히 이 곳을 '운천'이라고 부른다. 산정호수가 영북면 산정리에 있다.[142] 시내 인구는 1960년대 1만 6,056명 (당시에는 영북면의 인구가 2만 3,935명이었다.)에서 2021년 3만 3,317명으로 늘어 시내 집중도가 11.5%에서 22.2%로 높아졌다. 이렇게 시내 집중도가 낮은 데에는 소흘읍의 인구가 4만 4,768명으로 포천시 전체 인구의 30,1%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포천시의 읍면동별 인구는 소흘읍 4만 3,812명, 시내 3만 3,317명, 신북면 1만 2,507명, 일동면 9,403명, 군내면 8,661명, 영북면 8,465명, 가산면 7,715명, 이동면 6,222명, 영중면 4,860명, 내촌면 4,588명, 관인면 2,803명, 화현면 2,753명, 창수면 2,168명으로 시내보다 소흘읍의 인구가 더 많다. 소흘읍 송우리에서 잠실역 가는 버스가 있을 정도면 말 다 했다.[143] 임영웅은 1991년 6월 16일생(32세)이므로 1994~1997년 사이에 유치원을 다녔다. 이들은 유치원 입학 이후 Windows 95 발매와 IMF 사태를 겪고, 초등학교를 졸업할 즈음에 와서야 포천군이 시로 승격했다.[144] 현재는 동으로 전환.[145] 참고로 지금도 평택에 사는 유아들 중 일부는 천안에 있는 유치원으로 원정 통학을 하기도 한다. 천안으로 간 경우는 주로 평택읍에 살던 아이들이었고, 송탄읍, 진위면 등지에서는 수원으로 갔다고 한다.[146] 1970년 당시 평택읍은 4만 1,510명, 송탄읍은 5만 1,527명이었다. 1975년에는 평택읍 5만 1,375명, 송탄읍 5만 7,356명, 1980년 평택읍 6만 815명, 송탄읍 6만 3,911명이었다.[147] 옛 송탄시 13만 7,276명, 옛 평택시 22만 7,968명, 옛 평택군 17만 2,243명. 옛 송탄시 지역은 1960년대 4만 3,916명에서 2021년 13만 7,276명으로, 옛 평택시 지역은 1960년대 3만 2,104명에서 2021년 22만 7,968명으로 늘면서 옛 송탄시 지역이 차지하는 비중은 23.3%에서 26.4%로, 옛 평택시 지역이 차지하는 비중은 17%에서 41.8%로 늘었으나 옛 평택군 지역이 차지하는 비중은 59.7%에서 31.8%로 떨어졌다. (옛 송탄시 지역: 중앙동, 서정동, 송탄동, 지산동, 송북동, 신장1동, 신장2동) 현재 평택시에는 평균 해발 고도가 낮아 개발에 용이하다는 점을 들어 고덕면 등지에 신도시를 개발하고 있어 인구가 더 증가할 가능성이 높다. 평택시의 읍면별 인구는 (舊) 평택시 지역 22만 7,968명, (舊) 송탄시 지역 13만 7,276명, 안중읍 4만 3,668명, 팽성읍 2만 7,696명, 청북읍 2만 6,705명, 포승읍 2만 4,010명, 고덕면(고덕동) 2만 3,052명, 진위면 1만 1,401명, 오성면 6,717명, 현덕면 5,311명, 서탄면 3,683명으로 산이라고 명함을 내밀 수 있을 만한 산이 없어서 (평택에서 가장 높은 지점은 무봉산 정상으로 해발 208m밖에 안 된다. 산 없는 나라로 알려진 네덜란드 (팔제르베르크 정상이 해발 322m이다.), (람람 산 정상이 해발 406m이다.), 벨라루스 (드쟈르즌스카야 언덕의 정상이 해발 346m이다.)조차도 이 곳보다 높은 곳이 있을 정도이며, 그나마 일본도쿄 23구오사카시보다는 높은 곳이 있다.) 인구가 퍼질 수 있는 것이다.[148] 견씨 자체도 1,251명만 있는 희성인데 평택에 106명, 안성에 105명이 살고 있다.[149] 샛별(금성). 가톨릭에서 성모 마리아를 의미한다.[150] 구 동두천역.[151] 동두천시 상패동이 과거 은현면 상패리였다.[152] 북도면, 영종면, 용유면, 영흥면, 덕적면, 대부면. 이후 영종면과 용유면은 인천으로, 대부면은 안산으로 넘어간다.[153]시흥시 대야동, 은행동, 신천동, 미산동, 방산동, 포동, 안현동, 매화동, 도창동, 금이동, 무지내동, 과림동, 계수동, 부천시 계수동, 옥길동, 광명시 옥길동[154] 이 때 오정면과 계양면이 김포군으로 함께 넘어갔다. 다만, 오정면은 1975년 부천시로 환원된다.[155]오정구 지역 (오정동, 성곡동) 16만 8,548명 (20.9%), 옛 원미구 지역 (부천동, 신중동, 중동, 상동, 심곡동) 41만 4,337명 (50.5%), 옛 소사구 지역 (소사본동, 대산동, 범안동) 23만 5,498명 (28.6%). 경기도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읍면동인 신중동 (인구 13만 1,641명)이 이 곳에 있다. 2위는 남양주시 화도읍 (인구 11만 4,733명), 3위는 광주시 오포읍 (10만 8,027명). 다만, 인구 밀도는 가장 높은데, 부천시의 지형만 봐도 답이 나온다. 부천에서 가장 높은 산은 고강동의 지향산 (높이 125.7m)이고 (성주산도 있기는 하지만 그건 가장 높은 곳이 시흥시에 있다.) 그나마도 산이라고 명함을 못 내밀 정도로 심하게 낮다. 거기다 시 전체적으로 산지 비율이 낮게 나오니 (특히 중동, 상동 지역은 산지 비율이 0%에 수렴한다. 부천 아인스월드를 가 보면 그 곳에서는 산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사실상 이 동네가 국내에서 산을 하나도 볼 수 없는 거의 유일한 동네이다.) 개발이 용이해서 건설사들이 아파트를 많이 지으니 인구 밀도가 높을 수밖에 없는 것. 그냥 경인선 라인은 산 없는 동네다[156] 유승민1982년 8월 5일생(41세)이라 1986~1988년 사이에 유치원을 다녔다. 1982년생은 1988 서울 올림픽 당시 유치원생이었고, 그 시절이면 국군의 날이 공휴일이었고 버스와 지하철에서 담배 피우는 것과 대학교 졸업생 중 전과 1~2범 정도는 쉽게 보던 시절이었다. 그와 같은 시기에 유치원을 다닌 사람은 조정식, 가애란, 판유걸 등이며, 무려 이지영과도 동갑이다. 여담으로 유승민의 결승전 상대였던 왕하오1983년 12월 15일생이라 유승민보다 1년 늦게 유치원에 입학했다.[157] 경상남도를 의미하는 慶南이 아니라, 경기도 남부를 의미하는 京南이다. (경상남도는 '축하할 경' 자를 쓰고, 경기도는 '서울 경' 자를 쓴다.) 버스회사 경남여객도 이 한자를 쓴다.[158] 수지벽산3단지아파트, 죽전동성아파트 등 주로 죽전동 북부.[159] 1960년대 당시 수지면에는 7,407명, 구성면에는 7,057명, 기흥면에는 8,502명이 거주했다. 현재의 일반구에 대입하면 수지구에는 7,407명, 기흥구에는 1만 5,559명, 처인구에는 8만 2,243명이 살았던 셈이다. 이런 이유로 경부고속도로 개업 당시 죽전휴게소가 들어설 수 있었던 것이다.[160] 멀지 않은 거리에 에버랜드캐리비안 베이가 있다.[161]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경기도 포천시, 남양주시강원도 철원군의 유치원에서 서울 롯데월드로 소풍을 오거나 영천시, 포항시의 유치원에서 경주로 소풍을 가는 등 원거리 소풍의 사례가 있기는 있었으나 워낙에 드물어 사실상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162] 성남시수정구중원구는 오히려 롯데월드 어드벤처로 소풍을 더 많이 간다.[163] 흔히 '수지'라고 부르는 동네이다.[164] 흔히 '죽전'이라고 불린다.[165] 외지인들에게는 에버랜드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에버랜드가 포곡읍 가실리, 유운리, 전대리에 걸쳐 있는데 대부분이 유운리이고 매직랜드는 아예 가실리에 있다.[166] 이는 남양주시도 비슷하다. 남양주시양주군에서 분리될 당시 미금읍, 구리읍, 진건면, 진접면, 화도면, 와부면, 수동면, 별내면 등 2읍 6면이었으나 1986년 와부읍에서 조안면이, 1989년 별내면에서 퇴계원면 (2019년 읍으로 승격)이, 1995년 진접읍에서 오남면이 (2001년 읍으로 승격) 분리되고, 1983년 별내면 고산리, 산곡리가 의정부시로 넘어가고, 1986년에 구리읍이 구리시로 독립, 1989년에는 미금읍이 미금시로 독립했지만 미금시는 1995년 남양주시로 통합돼 남양주 시내의 동으로 전환됐다. 1980년 와부면을 시작으로 1989년 진접면, 1991년 화도면, 2001년 진건면과 오남면, 2019년 퇴계원면이 읍으로 승격된 것으로 모자라 2012년 별내면 덕송리와 화접리가 별내동으로 승격되면서 면에는 사립유치원이 없게 되었다.[167] 멀지 않은 거리에 한국민속촌이 있다.[168] 이는 시군구 경계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서울특별시의 경우 강동구 성내동천호동의 유치원에 송파구 풍납동 거주 원생이 있는 경우가 대표적이며, 비수도권 지역은 경상북도 구미시 오태동 거주 아동이 칠곡군 북삼읍의 유치원을 다니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심지어 평택시, 안성시, 천안시, 포천시, 철원군, 가평군, 춘천시 등 수도권과 비수도권을 가르는 지역에서는 수도권-비수도권 간 원정 통학이 이뤄지는 경우도 있다.[169] 이것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역시 비슷한데, 유가읍은 달성군의 읍 가운데 유일하게 사립유치원이 없다.[170] 구성·마북·동백1·동백2·동백3·상하·보정동[171] 수지구 37만 5,843명 (34.7%), 기흥구 44만 835명 (41.1%), 처인구 25만 7,498명 (24.2%). 구성구[170]까지 반영한다면 수지구 37만 1,857명, 구성구 21만 5,994명, 기흥구 22만 1,817명, 처인구 25만 3,982명이 된다. 용인시의 읍면동별 인구는 (舊) 수지읍 지역 37만 5,843명, (舊) 기흥읍 지역 22만 3,697명, (舊) 구성읍 지역 21만 7,138명, 시내 11만 8,387명, 포곡읍 3만 3,300명, 모현읍 2만 6,202명, 남사읍 2만 3,547명, 이동읍 2만 265명, 양지면 1만 9,084명, 백암면 8,461명, 원삼면 8,252명으로 전체적으로 동 지역에 인구가 퍼져 있다. 그만큼 산도 엄청나게 깎여 나갔다. 70년대에는 에버랜드 때문에 산이 한 번 깎여 나가고 (에버랜드가 개장한 시기가 1976년이다.) 90년대 이후에는 수지, 구성 쪽 산이 엄청나게 깎여 나갔고 골프장 때문에 산이 깎여 나가고 또한 2019년에는 진짜로 고양시에 앞선 적도 있다. 만약 광교신도시와 고삼면이 아직도 용인이었다면 용인시의 인구는 115만 8,405명으로 늘고 광교신도시는 수지구에, 고삼면은 처인구에 편제돼 수지구 인구는 45만 8,105명, 처인구 인구는 25만 5,949명으로 늘었을 것이다.[172] 박형식은 1991년 11월 16일생(32세)이므로 1994~1997년 사이에 유치원을 다녔다. 1991년생들은 악명높은 1994년 폭염과 IMF 사태를 유치원 시절에 겪었고 그 시절 유치원에 Windows 95를 탑재한 컴퓨터가 설치되는 것, 그리고 캐리비안 베이의 개장을 유치원 시절에 볼 수 있었으며, 무려 에당 아자르 (1991년 1월 7일생)와 비슷한 시기에 유치원을 다닌 셈이다.[173] 김한나는 2000년 4월 4일생이므로 2003~2006년 사이에 유치원을 다녔다. 2000년생들은 유치원 시절 KTX 개통을 경험한 셈이며, 양평군, 가평군, 포천시에 고속도로가 없는 것은 기본에, T 익스프레스, 썬더폴스가 없던 시절에 유치원을 다녔다.[174] 이런 형태의 유치원 원정 통학은 양주군 구리면→구리읍, 시흥군 서면→소하읍에서도 볼 수 있었다. 물론 김포군 고촌면, 김포군 계양면, 시흥군 과천면, 광주군 동부면→동부읍/서부면, 양주군→남양주군 별내면, 광주군 대왕면/중부면도 서울에 접하기는 했지만, 이들 지역에서는 서울로 향하는 교통편이 부실해 서울에 있는 유치원으로 원정 통학을 하는 경우가 잘 없었다. 특히 지금의 성남시인 광주군 중부면 일대에는 철거민들이 많이 이주해서 그렇다. 소수의 고양군 중면, 지도면 주민들도 경의선 열차 등을 이용해 원정 통학을 시켰고, 고양군 벽제면의 경우는 교외선의 영향으로 의정부로 가는 원정 통학이 많은 편.[175] 신도읍에서 분리되었고, 구역은 현재의 고양시 덕양구 화전동, 대덕동이다.[176] 신안군 지도읍과는 음만 같을 뿐 한자 표기는 다르다. 신안군 지도읍은 智島邑, 고양군 지도읍은 知道邑이다. 인구도 옛 고양군 지도읍이 더 많다.[177] 1920년대부터 1930년대 사이에 유치원을 다닌 사람들은 1914~1935년생인데, 현재 이들은 88~110세이다. 김수영과 이순재가 대표적이다.[178] 2위인 수원시를 5곳 차로 제쳤다.[179] 당시 수도권에는 이런 경우가 많았다. 서울만 해도 강동구 성내동, 천호동송파구 풍납동에서 이런 경우가 매우 잦았고, 특히 풍납동은 이런 침수 때문에 물납동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까지 붙게 되었다.[180] 덕양구 47만 6,962명 (43.7%), 일산동구 29만 9,715명 (27.9%), 일산서구 30만 2,538명 (28.5%). 분구까지 상정한 경우 덕양북구 24만 8,842명 (23.2%), 덕양남구 22만 829명 (20.6%), 일산동구 29만 8,445명 (27.9%), 일산서구 30만 2,886명 (28.5%)가 된다. 1960년대 신도면 2만 6,065명, 원당면 1만 1,341명, 지도면 1만 2,947명, 벽제면 1만 4,957명, 중면 1만 6,230명, 송포면 1만 2,186명으로 지금의 덕양구 (분구 이후 덕양북구+덕양남구) 지역에 6만 5,310명, 일산동구 지역에 1만 6,230명, 일산서구 지역에 1만 2,186명이 살았던 것에 비하면 일산지구의 성장이 엄청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옛 읍면으로 현재 인구를 계산하면 신도읍 (창릉동, 삼송동, 효자동) 5만 5,820명, 화전읍 (대덕동, 화전동) 2만 9,377명, 지도읍 (화정동, 능곡동, 행주동, 행신동) 20만 6,926명, 원당읍 (원신동, 주교동, 성사동, 흥도동, 식사동) 15만 2,777명, 벽제읍 (고양동, 관산동, 고봉동) 9만 246명, 일산읍 (장항동, 정발산동, 마두동, 백석동, 중산동, 풍산동, 탄현동, 일산동, 주엽동) 43만 2,999명, 송포면 (대화동, 송포동, 송산동) 11만 371명이다. 2019년에는 용인시에 뒤처진 적이 있었고 지금도 엎치락뒤치락하는 실정이다. 이런 이유로 덕양구를 덕양북구, 덕양남구로 분구할 계획도 있다. 분구된다면 덕양북구의 인구는 24만 8,842명, 덕양남구의 인구는 22만 829명이 된다. 대략 옛 지도읍, 벽제읍, 원당읍은 덕양북구, 신도읍과 화전읍은 덕양남구가 된다. 만약 진관동이 고양시 관할이었다면 고양시 인구는 113만 6,238명으로 늘고 진관동은 덕양구 (인구 53만 3,948명)에 편제되고, 분구 시 덕양남구 (인구 27만 7,851명)에 편제될 예정이다.[181] 전소민은 1986년 4월 7일생(38세)이라 1990~1992년 사이에 유치원을 다녔다. 정황상 병설유치원이나 좀 오래 된 사립유치원을 다녔을 것이다. 그야말로 전소민은 판유걸이 유치원을 다닐 시기에 태어난 셈.[182] 김강률은 1988년 8월 28일생(31세)이라 1992~1994년 사이에 유치원을 다녔다. 1988년생들은 고양시 승격 직후에 유치원을 다닌 셈이며 정황상 좀 오래된 유치원을 다녔을 것이다.[183] 판유걸은 1982년 11월 20일생(41세)이므로 1986~1988년 사이에 유치원을 다녔다. 판유걸을 비롯한 1982년생들은 1986 서울 아시안게임1988 서울 올림픽을 유치원 시절에 봤는데, 해당 대회들이 각각 1986년 9월 20일~10월 5일, 1988년 9월 17일~10월 2일 사이에 열렸으므로 해당 기간에는 유치원들이 단축수업을 했다. (해당 시기에 태어난 사람들은 각각 1990~1992년, 1992~1994년 사이에 유치원생이었다.) 참고로 판유걸이 유치원을 다닐 당시 고양시는 고양군이었고, 산하에 신도읍, 화전읍, 벽제읍, 원당읍, 지도읍, 일산읍, 송포면이 있었고, 정황상 병설유치원이나 좀 오래 된 사립유치원을 다녔을 것이다. 판씨가 인구 300명도 안 되는 매우 희귀한 성씨이기 때문에 판유걸의 유치원 시절 친구들은 유치원에서 ‘판’씨라는 성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게 된 셈이다. 사실 이건 판씨만이 아니라 희귀한 성씨를 가진 사람은 유치원 친구들이 자신의 성을 처음으로 들어 보게 되는 것이다[184] 당시 가평역에서 서울로 갈 때는 비둘기호를 타야 했는데, 경춘선은 단선인 데다 역마다 다 서는 탓에 2시간 이상 걸렸고 그마저도 서울 시내도 아닌 청량리역에서 종착했다. 이런 이유로 21세기가 돼서야 가평에서 서울에 있는 유치원으로 원정 통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춘천으로 가는 경우에 비해 그 빈도는 상당히 적다. 실제로 가평역에서 춘천역 방향으로는 굴봉산, 백양리, 강촌, 김유정, 남춘천 등 딱 5개 역만 거치면 되는데 서울로 가려면 청평, 마석 등 굵직한 역들을 거쳐야 한다. 다만, 청평면 대성리에 사는 유아들은 마석에 있는 유치원에 많이 간다.[185] 그나마 있던 샛별유치원은 현재 무기한 휴원 상태이다.[186] 가평읍 1만 9,632명, 청평면 1만 4,161명, 설악면 9,426명. 다만, 설악면은 인구 수 4위이고 3위 조종면은 9,718명, 5위 상면은 5,505명, 꼴찌 북면은 3,973명이다.[187] 가평군의 읍면별 인구는 가평읍 1만 9,496명, 청평면 1만 4,021명, 조종면 9,785명, 설악면 9,598명, 상면 5,586명, 북면 3,891명으로 인구가 대체로 경춘선 연선에 몰려 있다.[188] 그나마 있다는 호산나대학은 지적, 자폐성 장애인 전용 대학이며, 비장애인이 다닐 수 있는 대학은 없다.[189] 아기 예수의 성녀 소화(小花) 데레사에서 딴 명칭이다.[190] 매년 명절만 되면 실향민들이 많이 찾는 임진각이 이 곳에 있다. 주로 황해도평안도, 개성시 계통 실향민들이 이곳을 찾는다.[191] 한국전쟁 이후 모든 교육기관이 폐교되었다. 현재 거주하는 주민들도 1998년에 들어왔다.[192] 당시 수도권은 이런 경우가 많았다. 파주군, 고양군은 홍수에서 순위권을 차지했고 서울강동구 천호동, 성내동송파구 풍납동이 침수 순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특히 풍납동은 잦은 침수 때문에 물납동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까지 얻게 되었다.[193] 1973년 아동면과 임진면이 각각 금촌읍, 문산읍으로 승격, 1980년 주내면이 주내읍으로 승격 (1983년 파주읍으로 개칭), 1989년 천현면을 법원읍으로 승격, 1996년 파주시 승격 및 금촌읍의 분동, 2002년 교하면과 조리면이 각각 교하읍, 조리읍으로 승격, 2011년 교하읍을 4개 동으로 분동.[194] 분단 이전에는 연천군 산하였다.[195] 시내 인구는 1960년대 2만 964명에서 2021년 8만 2,795명으로 늘어 시내 인구의 비중은 10.8%에서 18.6%로, 교하지구의 인구는 같은 시기 1만 6,000명에서 23만 4,225명으로 늘어 교하지구 인구의 비중은 8.2%에서 48.1%로 높아졌다. 반면 예전의 장단군 지역은 민통선 등의 영향으로 인구가 725명밖에 안 된다. 파주시의 읍면동별 인구는 교하지구 23만 4,225명, 시내 8만 2,795명, 문산읍 4만 8,475명, 조리읍 3만 81명, 파주읍 1만 3,294명, 탄현면 1만 3,265명, 광탄면 1만 1,425명, 법원읍 1만 810명, 월롱면 9,045명, 적성면 7,567명, 파평면 3,910명, 장단출장소 565명, 진동면 160명이다. 진동면은 경기도에서 인구가 가장 적은 읍면동인데, 인구가 가장 많은 부천시 신중동 (인구 13만 619명)은 이 곳 인구의 842배나 된다. 만약 적성면이 계속 연천군 관할이었다면 파주시의 인구는 45만 8,049명, 장단군 지역마저 빠지면 45만 7,324명이 된다.[196] 당시 철원군 관할.[197] 당시 포천군 관할.[198] 연천읍 8,013명, 전곡읍 1만 9,066명으로, 전곡읍이 더블 스코어로 앞선다. 이건 옛날에도 그랬는데 1970년대 연천읍이 1만 2,502명일 때 전곡읍은 1만 5,236명이었고, 연천에서도 전곡읍 혼자만 인구 2만 명을 찍은 적이 있었다 (2만 758명).[199] 1991년 면내 마지막 교육기관인 왕산초등학교 동중분교, 군남초등학교 북삼분교가 폐교되었다.[200] 1990년대 면내 마지막 교육기관인 횡산분교가 폐교되었다.[201] 2002년 면내 마지막 교육기관인 백학초등학교 고랑포분교가 폐교되었다.[202] 그만큼 연천군에는 군부대만 많지 거주인구는 적다. 연천군의 읍면별 인구는 전곡읍 1만 9,358명, 연천읍 7,869명, 청산면 3,933명, 군남면 3,214명, 신서면 2,762명, 백학면 2,652명, 미산면 1,781명, 왕징면 1,028명, 장남면 719명, 중면 200명으로 면 지역의 인구가 5,000명도 못 넘는다. 만약 적성면과 남면이 넘어가지 않았다면 연천군의 인구는 5만 8,087명 (장남면 제외 시 5만 7,368명)이었을 것이다.[203] 부산, 대구 등.[204] 중부면 (창곡리, 복정리, 수진리, 탄리, 단대리, 상대원리), 대왕면, 돌마면, 낙생면.[205] 할머니들을 모시는 양로원으로, 역시 인보성체수녀회에서 운영하고 있다. 본래 병원에 가기 어려운 가난한 사람들의 출산을 위한 조산원이었다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양로원으로 바뀌었다.[206] 그러니까 Windows 98의 지원이 종료되고 Windows Me, Windows 2000이 아직 현역이며, Windows XP가 전성기를 누릴 때, 전한길, 이하영, 이지영, 이다지, 고아름EBSi를 거쳐 갈 때까지도 판교에 살던 아이들은 동네에 유치원이 없어 유치원 한 번 다니기 위해 버스를 타야 했던 셈이다. 그 시절의 유치원생이 지금은 최소 대학생이지만.[207] 이 동들은 성남시에서도 시골이나 다름없다. 이들 지역의 인구를 모두 합해도 인구가 군 1개 정도에 불과하다. 둔전동, 사송동, 시흥동의 경우는 분당으로 많이 가는 편.[208] 상적동과 금토동은 주로 서초구, 신촌동, 오야동, 심곡동, 고등동은 강남구, 창곡동과 복정동은 송파구.[209] 당시 성남시 일부를 관할했던 중부면은 인구가 9,052명이었다. 현재 성남시로 분리된 창곡리, 복정리, 수진리, 탄리, 단대리, 상대원리, 산성리 일부분을 합치면 1960년대 해당 지역 인구는 2만 4,000~5,000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래도 어지간한 군 지역보다 인구가 적었다.[210] 수정구 24만 1,701명 (24.9%), 중원구 21만 6,131명 (23.4%), 분당구 48만 2,232명 (51.7%). 성남시 성립 당시 지금의 분당구에는 서울공항으로 인한 개발제한이 걸려 인구가 2만 명도 안 됐다는 것을 감안하면 분당이 엄청나게 성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성남시 성립 이전의 읍면을 따라 인구를 재구성하면 옛 대왕면 지역 1만 6,653명, 옛 중부면 지역 39만 2,177명, 옛 돌마면 지역 35만 5,058명, 옛 낙생면 지역 17만 6,176명이다.[211] 박인비는 1988년 7월 12일생(35세)이며, 1988년생까지는 개정 전 교육법을 적용받아 4세부터 유치원에 다닐 수 있었으므로 박인비의 또래인 1988년생들은 1992년에 유치원 입학 대상이 되고, 1995년에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다만, 1988년 1월, 2월생들은 1987년생들과 함께 입학했으므로 1991년부터 1993년 사이에 유치원을 다녔다.[212] 하리수는 1975년 2월 17일생(49세)이므로 원래는 1979년부터 유치원을 다녀야 했지만, 빠른 년생이라 1978~1980년 사이에 유치원을 다녔다. 1975년생들은 유치원 시절에 미니스커트 단속, 박정희 사망, 국기하강식 등을 경험한 셈. 하리수는 성인이 된 이후에 여성이 되었으므로 유치원에 다닐 때는 남자아이였으며, 그 때 사용하던 이름은 이경엽이었다.[213] 황의조는 1992년 8월 28일생(31세)이므로 1995~1998년 사이에 유치원을 다녔다. 주예지, 손흥민과 같은 시기에 유치원을 다녔으며, 1992년생들은 IMF 사태, Windows 9598 발매, 국민학교에서 초등학교로의 명칭 변경 등을 유치원 시절에 겪은 셈. 황의조에게는 형 황의철이 있는데, 형과 같은 유치원을 다녔는지는 불명.[214] 동부면, 서부면, 중부면 상산곡리.[215] 하남시에 철도가 생긴 것은 2020년 8월이다.[216] 이 때 동부읍과 서부면이 폐지되고 덕풍리는 덕풍동이 된다.[217] 송파구 방이동 소재.[218] 송파구 방이동 소재.[219] 강동구 성내동 소재.[220] 서울에서 강원도 북부로 가는 차량들이 거의 반드시 거치는 곳이다. 종합운동장역이나 천호역에서 오션월드 (강원도 홍천군)로 가는 셔틀버스는 무조건 여기를 지나 미사 교차로에서 국도로 빠진다.[221] 이 정도 인구면 어지간한 면보다도 적고, 일본에서 인구가 가장 적은 도시인 우타시나이시(歌志内市)와 겨우 600명 차이다. 그나마 인구가 가장 적은 읍으로 알려진 강원도 영월군 상동읍보다 많다. 이런 상황에서는 사립유치원이 들어와도 원아 모집이 어렵다.[222] 지금의 경상북도 영양군보다도 인구가 적었다. 게다가 그 시절이면 잠실동이 섬이고, 강남구 대치동초가집이 있던 시대였다. 한국의 대학 진학률이 29% 정도였던 시절이고 유치원은 취원율이 고작 1%대에 머물렀다. 한마디로 당시 초등학교 한 반이 70명 정도였을 때 유치원 나온 사람이 1명 있을까말까 한 시절인 셈.[223] 옛 동부읍 지역 (미사동, 풍산동, 덕풍동, 신장동, 천현동) 25만 26명, 옛 서부면 지역 (춘궁동, 초이동, 감북동, 감일동, 위례동) 4만 3,426명. 이런 인구 분포의 영향으로 하남시에 오래 살았던 어르신들은 하남시 자체를 뭉뚱그려서 '신장리'라고 부르기도 한다. 미사조정경기장 근처는 아예 '미사리'라고 부른다.[224] 3기 신도시 중 하나. 역사학계에서는 무분별한 택지 개발로 이 곳이 제2의 풍납토성이 되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225] 양평역, 용문역, 지평역, 석불역, 일신역, 매곡역, 양동역, 삼산역. 과거에는 양수역, 신원역, 국수역, 아신역, 원덕역에도 무궁화호가 정차해 13개나 되었으나 수도권 전철 개업으로 인해 8개로 줄어들었다.[226] 그나마 양평군, 봉화군, 정선군, 보성군, 화순군, 영동군, 예천군, 의성군, 영덕군은 사립유치원이 있지만 태백시, 군위군, 서천군, 곡성군, 하동군, 함평군, 단양군은 사립유치원이 없다. 심지어 가평군ITX-청춘 정차역이 사립유치원보다 많고, 평창군, 단양군, 곡성군은 KTX, KTX-이음 정차역이 사립유치원보다 많다.[227] 게다가 양평군 동부는 매우 낙후해서 수도권 최후의 오지라고 불릴 정도이다. 오죽하면 이 동네에서는 중앙선 무궁화호를 타고 양평읍으로 가는 사람이 버스를 타고 가는 사람보다 많을 정도.[228] 양평군의 읍면별 인구는 양평읍 3만 635명, 용문면 1만 7,667명, 양서면 1만 3,600명, 강상면 1만 450명, 서종면 9,671명, 옥천면 7,920명, 지평면 6,838명, 개군면 5,097명, 강하면 4,719명, 양동면 4,608명, 단월면 3,853명, 청운면 3,752명인데 동부보다 서부의 인구가 많다는 특징이 있다.[229] 양평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인 남양주조차 당시에는 시골이라 유치원이 없었다.[230] 단월면과 청운면은 주로 홍천군으로 가고, 양동면은 원주시로 간다. 애초에 비발디 파크, 오션월드 방문객을 위한 펜션이 양평군 단월면과 홍천군 서면에 몰려 있어서 단월면 주민들은 자녀나 손자녀를 홍천의 유치원으로 보내기도 한다.[231] 시흥군 서면이 소하읍을 거쳐 광명시로 승격될 당시의 인구는 15만 명이었고 광명리는 무려 36개의 행정리를 거느리고 있을 정도였다.[232] 결국 서울시 편입 대신 광명시 승격으로 결론이 났다.[233] 나머지 일직동, 가학동, 소하동, 노온사동, 옥길동은 서울과 멀기 때문.[234] 하남시는 강동구나 송파구, 과천시는 서초구, 구리시는 중랑구나 광진구로 간다. 과거에는 의정부시, 고양시, 김포시에서도 원정 통학을 왔으나 현재 이들 지역에서는 오히려 자기 지역의 유치원을 다니는 유아들이 많다.[235] 이 추세라면 2024년 총선에서는 광명시도 국회의원 선거구가 하나로 줄어들 가능성이 있다.[236] 이학주는 1990년 11월 4일생(33세)이므로 1993~1996년 사이에 유치원을 다녔다. 이학주가 유치원을 다닐 당시에는 광명시에 철도가 없었고, 컴퓨터는 Windows 95가 막 발매됐을 시점이었다. 말 그대로 김연아와 같은 시기에 유치원을 다닌 셈.[237] 오산시 외에도 여러 지역에 어린이집유치원을 운영하고 있다. 또한 박문초등학교, 박문중학교, 박문여자고등학교, 대철중학교, 양업고등학교, 가톨릭관동대학교 등등 여러 가톨릭 미션스쿨에서도 교육 사도직을 수행하고 있다.[238] 근혜유치원은 전국에 2곳 있다.[239] 경기도 광주시의 별칭.[240] 당시 원생은 대체로 현재의 서울특별시 강동구 천호동, 성내동송파구 풍납동에 살았다고 한다. 뜬금없이 송파구 풍납동이 낀 이유는 당시 풍납동이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 풍납리였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풍납토성으로 인해 재개발이 제한돼 송파구에서 가장 낙후된 동네라고 평가받는 동네지만, 당시에는 풍납동이 천호동과의 거리 덕에 송파구에서 문명의 혜택을 가장 일찍 받은 동네였다.[241] 언주면 (현 서울 강남구 중 일원동, 수서동, 세곡동을 제외한 부분+서초구 내곡동), 중대면 (현 서울 송파구 중 잠실동과 풍납동을 제외한 부분), 구천면 (현 서울 강동구+송파구 풍납동), 대왕면 일원리, 수서리, 자곡리, 율현리, 세곡리[242] 동부읍, 서부면, 대왕면, 돌마면, 낙생면, 중부면 창곡리, 복정리, 수진리, 단대리, 상대원리, 탄리, 상산곡리[243] 무려 대구광역시, 인천광역시보다도 많다. 참고로 대구의 인구는 약 243만 명 (242만 8,228명), 인천의 인구는 약 294만 명 (294만 3,491명)이다. 심지어는 일본 도도부현 중 30개 이상이 그것보다 인구가 적다.[244] 성남시, 하남시로 분리된 부분 제외 시 6만 7,007명.[245] 광주시의 읍면동별 인구는 시내 17만 2,773명, 오포읍 11만 2,080명, 초월읍 4만 6,155명, 곤지암읍 2만 2,967명, 퇴촌면 1만 5,086명, 도척면 9,384명, 남한산성면 2,613명, 남종면 1,496명으로 상대적으로 교통이 발달한 시내-오포 권역으로 몰려 있다. 심지어 남종면의 경우는 서울에서 가까운데도 인구가 처참하리만큼 적은데, 이는 팔당댐의 영향이 크다.[246] 동림리, 오산리, 능원리는 실질월경지이다. 이들 지역에는 유치원이 없다시피한 탓에 오포읍이나 죽전동으로 가야 한다. 참고로 서울시장 오세훈의 본적이 이 곳에 있다.[247] 김민교는 1974년 4월 15일생(50세)이므로 1980~1982년 사이에 유치원을 다녔다. 김민교가 1970년대 출생인데도 유치원을 다닌 것은 아버지가 의사여서 매우 부유했기 때문이고, 당시 경기도 광주군은 사립유치원이 없어서 병설유치원을 다녔거나 사립유치원이 있는 도시로 이사 가서 거기서 다녔을 것으로 추정된다. 1974년생들이 유치원을 다닐 당시에는 한국은 월드컵 1회 진출에 일본은 월드컵 진출조차 하지 못했던 시절이며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던 시절이었다.[248] 심훈의 소설 상록수의 배경이 된 곳.[249] 화성군 반월면, 시흥군 군자면, 시흥군 수암면. 대부도는 옹진군 대부면.[250] 추후 남양주시가 일반구를 가지게 되면 이 타이틀이 넘어갈 수도 있다.[251] 지금도 안산의 유치원들은 지리적 특성상 수원이나 인천으로 소풍을 가는 경우가 있다.[252] 영흥면에 있는 유치원은 영흥초등학교 병설유치원 하나뿐이다.[253] 수암면은 1만 4,595명, 두 면을 합치면 3만 4,219명. 지금의 안산시만으로 계산하면 약 2만 명이었다.[254] 상록구 35만 1,888명 (53%), 단원구 30만 3,027명(47%). 단원구 중 본토 인구는 29만 4,227명(단원구 인구의 97.2%, 안산시 인구의 45.7%), 대부도 8,800명(단원구 인구의 2.8%, 안산시 인구의 1.3%)이다. 안산시는 사립유치원이 없는 22개 군 지역의 인구를 모두 합한 것 (65만 9,674명)과 가장 근접한 인구를 가진 도시이다. 옛날 면으로 조합하면 반월면 25만 5,401명, 수암면 9만 6,487명, 군자면 29만 4,227명, 대부면 8,800명이다.[255] 대부분 1997년생. 축구선수 조규성이 여기에 해당한다.[256] 김연경은 1988년 2월 26일생(36세)이므로 1991~1993년 사이에 유치원을 다녔다. 이들은 MS-DOS+Windows 3.x가 PC의 주류를 차지하고 아직 양평, 가평, 포천, 춘천에 고속도로가 없을 때 유치원을 다닌 셈이다. 김연경에게는 김혜경, 김희경이라는 두 언니들이 있는데, 언니들과 같은 유치원을 다녔는지는 불명.[257] 조규성은 1998년 1월 25일생(26세)이므로 1997년생들과 같이 유치원을 다녔는데 2000~2003년 사이에 유치원을 다녔다. 그는 2002 한일 월드컵을 유치원생 신분으로 봤고, 유치원 말미에는 SARS 소식도 들었다. 조규성은 안산에서 유치원을 다녔으므로 그의 유치원 시절 친구 중에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다행히 안양공업고등학교로 진학해서 참사를 피해 갔다[258] 제부도가 있는 그 동네이다.[259] 이 사건의 여파로 비리 유치원 명단 공개 사건이 일어난 것은 물론, 사립유치원에 대한 불신이 높아지면서 광역자치단체들이 사립유치원을 사들여 공립으로 전환하는 매입형 유치원까지 등장했고, 3기 신도시에 들어서는 모든 유치원은 국공립으로 설립된다.[260] 이때는 수원시 영통구 영통동 등도 화성군이었다.[261] 6월 기준 87만 341명. 무려 워싱턴 DC보다도 많은데, 이 동네 지형만 봐도 답이 나온다. 국내에서 산지 비율이 가장 낮은 권역이 수도권이고 (특히 서울과 인천은 산지 비율이 매우 낮으며, 그나마 수도권에서 산이라고 명함을 내밀 만한 산들은 거의 가평군, 양평군 등 동부 권역에 있다. 조만간 용인시도 산 없는 도시가 된다. 거기는 건설 회사들이 아파트 짓는다고 산 깎아내리니), 그것도 신도시 개발과 관광 시설 개발로 인해 점차 낮아지고 있다. 또 수도권 서부가 그렇듯이 (북한 황해남도 해주시에서 인천광역시를 거쳐 충청남도 태안군까지 바다로 이어지는 동네들은 산이라고 명함을 내밀 만한 산이 없어서 죄다 산 없는 도시들이다. 이외에는 전라북도 군산시익산시, 전라남도 목포시, 대구광역시 서구도 산이 아예 없거나, 있어도 산이라고 명함도 못 내미는 산들만 있어서 산 없는 도시다. 산을 싫어하는데 산 없는 나라로 이민 갈 여건이 안 되면 이런 동네들로 가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이 동네도 산이라고 명함도 못 내미는 낮은 산 투성이라 (아랫동네 평택시도 산이라고 할 만한 산이 없다. 거의 싱가포르네덜란드 수준.) 개발이 용이해서 인구가 퍼질 수 있는 것. 화성시의 읍면동별 인구는 동탄지구 36만 7,188명, 병점지구 16만 6,218명, 향남읍 8만 5,844명, 봉담읍 8만 1,760명, 남양읍 4만 1,654명, 새솔동 2만 1,561명, 우정읍 1만 7,382명, 정남면 1만 1,420명, 송산면 1만 908명, 장안면 1만 310명, 팔탄면 9,960명, 매송면 7,200명, 서신면 7,126명, 마도면 6,890명, 비봉면 5,854명, 양감면 3,973명으로 전체적으로 개발이 용이한 지역에 퍼져 있다.[262] 김문환은 1995년 8월 1일생(28세)이라 1998~2001년 사이에 유치원을 다녔다. 그가 유치원을 다닐 당시에는 화성시가 화성군이었다가 유치원생 말미에 시로 승격된 신생 도시이기 때문에 병설유치원이나 오래된 사립유치원을 다녔을 것으로 추정된다.[263] 당시에는 현재의 퇴계원읍이 별내면 퇴계원리였다.[264] 오히려 구리시가 남양주시의 중심지 역할을 할 정도이다. 이를 보여 주는 예로 남양주세무서가 구리시에 있다. 반면, 시외버스고속버스를 타고 싶으면 동서울터미널로 가야 한다.[265] 퇴계원면의 읍 승격으로 면에는 사립유치원이 없다.[266] 지금의 남양주시에 해당하는 별내면, 진건면, 진접면, 와부면, 수동면, 화도면, 미금면을 합한 인구. 당시 옛 미금시 인구는 1만 1,687명, 옛 남양주군 인구는 6만 6,860명으로 옛 남양주군 인구의 비중이 컸다. 1980년 분리 당시에는 19만 1,461명이었다.[267] 옛 미금시 지역의 인구는 1960년대 1만 1,687명에서 21만 8,590명으로, 옛 남양주군 지역의 인구는 1960년대 6만 6,860명에서 48만 8,836명으로 늘었다. 이로써 옛 미금시 지역의 비중은 14.9%에서 30.6%로 높아졌지만, 옛 남양주군 지역의 비중은 85.1%에서 69.4%로 낮아졌다. 남양주시의 읍면동별 인구는 시내 22만 4,485명, 화도읍 11만 8,521명, 진접읍 9만 3,126명, 별내동 7만 3,938명, 와부읍 6만 2,502명, 오남읍 5만 3,618명, 퇴계원읍 2만 9,764명, 진건읍 2만 4,330명, 별내면 1만 9,766명, 수동면 9,076명, 조안면 4,195명으로 개발이 용이한 서부에 인구 대부분이 몰려 있다. 거기도 용인처럼 건설사들이 산을 엄청나게 깎아 내리고 있다. 특히 다산신도시 주변의 산들은 완전히 사라지기 일보 직전이다[268] 심지어 옆 동네 가평군보다 16년 늦고, 제주도보다 57년, 울릉도보다 7년 늦다. 광역시들은 1930년대 이전에 모두 유치원이 들어왔고 (부산, 인천, 대구는 대한제국 시기에도 유치원이 있었고, 광주와 대전은 1920년대에, 울산은 1930년에 유치원이 설립됐다.), 전주, 경주 등 지방의 중견급 도시들이 일제강점기~해방 직후에는 유치원이 들어온 것을 감안하면 남양주시가 과거 매우 한적한 농촌이었다가 급성장한 점을 볼 수 있다.[269] 주로 서울에서 가까운 퇴계원읍, 진건읍, 와부읍.[270] 제주도 인구는 67만 2,524명, 남양주시의 인구는 71만 3,321명이다. 과거에는 제주도가 인구가 더 많았으나, 제주도의 인구가 정체되면서 남양주가 역전했다.[271] 대성리역에서 딱 1정거장만 가면 마석역이다.[272] 흔히 송추라고 부르는 그 곳이다. 과거 방위병이 있던 시절 가장 힘들었다는 '송추방위'가 여기에 있다.[273] 1980년 남양주와 분리된 직후에는 7만 3,780명.[274] 양주시의 읍면동별 인구는 회천지구 11만 2,819명, 시내 5만 5,746명, 백석읍 2만 6,431명, 광적면 1만 1,948명, 장흥면 1만 442명, 남면 7,004명, 은현면 5,969명으로 전방 지역인데도 인구가 증가하고 있다. 만약 남면이 연천군 관할이었다면 22만 3,355명이었을 것이다.[275] 무려 대구광역시보다도 인구가 많다. 참고로 대구광역시의 인구는 243만 2,883명이다. 일본도도부현 중 35개, 미국의 주 중 15개가 여기보다 인구가 적다.[276] 무려 부산광역시는 물론 서울 강북 지역 자치구 전체를 합친 것보다도 많다. 이 정도 인구면 우루과이 전체 인구보다 많고, 미국 켄터키주보다도 많은 수치다. 소래면까지 포함하면 422만 4명.[277] 지금의 시흥시 부분만을 합치면 2만 5,000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278] 옛 소래읍 15만 7,376명, 옛 수암면 8만 4,487명, 옛 군자면 25만 9,032명.[279] 안양시는 1956년에 유치원이 들어왔다. 1956~1973년 (1950년~1969년생까지)에는 경부선 열차를, 1974~1980년 (1968년~1976년생까지)에는 수도권 전철 1호선 전철을 타야 갈 수 있었다.[280] 때문에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잠깐 군포시 갑군포시 을로 선거구가 나뉘었다가 21대에 다시 합쳐졌다.[281] 옛 화성군 반월면 지역 (대야동) 2만 582명 (6.7%), 옛 시흥군 군포읍 지역 25만 3,209명(93.3%).[282] 김연아는 1990년 9월 5일생(33세)이다. 그녀의 또래인 1990년생들은 1993년부터 1996년 사이에 유치원을 다녔다. (1990년 1, 2월생은 1989년생과 같이 1992~1995년에 유치원을 다녔다.) 이들은 악명높은 1994년 폭염을 유치원 시절에 경험한 셈.[283] 서울구치소도 시흥군 의왕읍 시절에 서대문형무소 부지에서 현 위치로 이전했다. 이 시기에는 의왕시에 제대로 된 사립유치원이 없었던 시절이었다.[284] 과거 의왕시 수험생들이 안양에 가서 수능을 치렀을 정도로 안양과 의왕의 거리는 가깝다.[285] 의왕시 자체도 1962년까지는 수원의 영역이었다.[286] 당시 과천선은 개통되기 전이었다. 지금도 유치원 추첨에 다 떨어진 사람들은 유치원을 찾아 서울이나 안양으로 가기도 한다.[287] 때문에 서울의 위성도시임에도 불구하고 단독으로 국회의원을 뽑지 못하고 의왕시·과천시 선거구로 편성돼 있다.[288] 지금의 경상북도 울릉군보다 인구가 적었다.[289] 김신욱은 1988년 4월 14일생(36세)이므로 1992~1994년 사이에 유치원을 다녔다. 이들은 악명높은 1994년 폭염을 유치원 시절에 겪었던 셈. 김신욱과 최다은은 같은 1988년생이지만 최다은은 1월 25일, 김신욱은 4월 14일생이라 생일 차이로 최다은이 김신욱의 유치원 선배가 된 셈이다.[290] 구리시 자체가 과거 남양주군의 영역이었기 때문.[291] 1992년 서현유치원. 판교신도시 지역은 더 늦어서 2009년에야 유치원이 설립됐다.[292] 1985년 새싹유치원. 당시 화성군 태안읍.[293] 1984년 예일유치원. 당시 인천직할시 북구.[294] 구리암사대교 개통 이후 강동구로 가는 경우가 늘었다.[295] 구리 시민들이 시외버스를 타려면 동서울터미널로 가야 하기 때문에 광진구와 교류가 많아 그 곳으로 보내는 것이다.[296] 양주군 구리면 당시. 읍 승격 이후인 1970년대에는 4만 5,364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