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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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致眞
1905년 11월 19일 ~ 1974년 2월 10일

1. 개요
2. 상세
3. 희곡집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극작가. 본관은 진주(晉州)[1], 아호는 동랑(東郞 또는 東朗). 극작가 외에도 연출가, 연극비평가, 연극행정가, 소설가 등 문학계에서 다양하게 활동했다. 시인 유치환은 그의 동생이다. 부인이 대한제국 참정대신과 중추원 의장을 지낸 심상훈의 손녀 심재순인데, 을사조약 때 참정대신으로서 끝까지 조약 체결에 반대한 한규설이 처외조부이다.


2. 상세[편집]


유치진은 1905년 11월 19일 경상남도 거제군 둔덕면 방하리[2]#에서 한의사였던 아버지 유준수(柳焌秀)와 어머니 밀양 박씨 박순석(朴珣碩)의 딸 사이의 5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4년 통영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18년 졸업하였으며, 1921년 일본으로 유학하여 도쿄 토요야마(豊山)중학교에 편입, 1925년 졸업하였다. 이듬해인 1926년 릿쿄대학 예과에서 수학하고, 1927년 영문과에 입학하여 1931년 졸업하였다.

그는 대학교 시절부터 연극 활동에 참여하였다. 일본에서는 근대극장, 해방극장에 참여하여 연극을 배워 나갔고, 고향인 통영에서도 방학을 이용하여 연극 공연을 하기도 했다.

1931년 릿쿄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귀국한 그는 윤백남, 홍해성 등 선배 연극인과 함께 극예술연구회에 참여하면서 국내 연극계에 입문한다. 극예술연구회에서 유치진은 극작 활동을 본격화하는데, 첫 작품 <토막>(1931년)에서 시작하여 <버드나무 선 동리의 풍경>, <> 등 일제강점기 암울했던 농촌 현실을 묘사한 작품들을 잇따라 발표하여 극작가로서의 위치를 굳혔다.

1935년 이후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자 사회 현실의 묘사보다 인간의 애정 문제 등을 다룬 <당나귀>, <자매>, <제사> 등으로 작품 방향을 선회하였고, 특히 춘향전 각색 이후에는 마의태자 등 역사극에 큰 관심을 가지고 발표하였다.

하지만 1940년 12월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조종으로 설립된 조선연극협회 이사에 취임하면서 친일 협력으로 노선을 전환하였으며, 1941년에는 현대극장을 새롭게 조직하고 그 대표가 되어 1945년에 해방될 때까지 운영하였다. 현대극장은 일제 말기의 친일 연극을 주도한 극단으로 유치진은 이 극단을 통해 <흑룡강>, <북진대>, <대추나무> 등 친일 선전 희곡을 두루 상연했다. 이 가운데 친일성이 가장 농후한 것으로 알려진 <북진대>는 현재에는 그 작품이 전하지 않는다.

또한 1941년 2월 부여신궁 조영공사에 근로봉사하였으며, 같은 해 3월 조선연극협회 산하 극작가동호회 회장에 선출되었다. 7월에는 조선연극협회와 조선연예협회로 양분된 공연예술단체를 통합하여 결성한 '조선연극문화협회'에서 상임평의원에 임명되었고, 12월에는 영화기획심의회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43년 4월 친일단체인 조선문인보국회 이사로 임명되었고, 6월 조선문인보국회 소설희곡부 회장이 되었으며, 10월 조선문인보국회이 주최한 결전소설과 희곡 공모 심사원으로 위촉되었다. 1944년 6월 조선문인보국회 극문학부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인 1944년 11월과 1945년 2월 조선연극문화협회 주최 일어극 각본 공모 심사원으로 위촉되기도 했다.

해방이 되자 유치진은 몇 년 간 참회의 시간을 갖는다.[3] 그 후 극단 극예술협회를 조직하여 과거 극예술연구회, 현대극장으로 이어지는 활동의 흐름을 재건했다. 1950년에는 초대 국립극장장에 취임함으로써 대한민국 연극계를 대표하게 된다.

이 시기에는 <조국> 등 일제 강점기를 민족주의 입장에서 재조명하는 희곡과 <장벽> 등 분단 상황을 묘사한 작품들, 그리고 <별>, <자명고> 등 역사, 설화 소재 희곡들을 발표한다. 특히 <원술랑>은 국립극장 개관 공연으로 올려짐으로써 후기 희곡 가운데 대표작으로 자리잡게 된다.

6.25 전쟁 중에는 고향으로 내려가 칩거하면서 <조국은 부른다>, <처용의 노래> 등의 작품 활동을 했고, 전후에는 황폐화된 현실을 다룬 <자매2>, <한강은 흐른다> 등을 발표하였다. 서울예술대학교의 설립자로도 알려져 있는데, 그 전신이 되었던 드라마센터를 불법적으로 사유화한 것으로 상당한 논란을 유발한 장본인이다. 본래 조선총독부가 있었던 부지에 한국 최초의 현대극장인 '드라마센터'를 세우기 위해 미국 록펠러센터와 박정희 정부에게서 받은 지원을 교묘하게 사유화하였고, 이를 예장동 남산자락에 이전 설립하며 스스로 극장장에 올랐다. 이에 몇번 유치진의 극장 사유화가 당시에 논란이 된 적이 있지만, "그 건물이 사복을 채울만한 건더기가 됩니까?" 라는 황당한 말을 남겼다. 분명히 한미 합작으로 자본이 투입된 공공시설임에도 드라마센터는 마치 유 씨의 사설극단 거점처럼 운영되었고, 1974년 유 씨의 작고 후에는 그의 추종자들이 극단 드라마센터의 이름을 극단 동랑레퍼토리로 바꾸기까지 하였다. 드라마센터의 부속학교인 서울예전 설립 이후에는 그 후에도 자신의 아들인 유덕형을 총장 자리에 앉히고 2018년까지 유덕형 총장과 그의 친일가가 학교를 독재적으로 운영한 사실들이 적발되었다. 그 예시로는 학생들의 학비 23억원 가량을 방배동의 아파트를 구매하는 데에 사용했다는 것, 인도네시아로 그의 친일가가 몇번 출장을 다녀오더니 실용음악전공 수업에 인도네시아 전통 악기 수업이 필수강의가 된 점, 올해까지도 공공연하게 학교 교직원들에게 설립자에 대한 참배를 반강요적으로 요구한 점 등이 있다. 이 외에도 셀 수 없이 많다. 학생들과 교직원들의 고충이 말이 아니다.

이광수와 서정주는 문학사에 절대 빼놓을수 없는 발자취를 남겼음은 인정하되 친일반민족행위라는 죄업도 분명히 짚고 넘어가는 반면, 이쪽은 연극과 무대공연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이 현저히 낮고 대내외적으로 학교 홍보와 입지를 출신 동문들을 활용하면서 그 이면에 있는 '치졸한 흔적'들이 잘 부각이 안된다. 여전히 드라마센터(남산예술센터)와 서울예술대학교 본부동 앞엔 유치진의 흉상이 버젓이 세워져있다.


3. 희곡집[편집]


  • 토막』(1931)
  • 』(1934),
  • 『유치진역사극집』(1947)
  • 『흔들리는 지축』(1949)
  • 원술랑』(1952)
  • 『나도 인간이 되련다』(1953)
  • 『자매』(1955), 『유치진희곡선집』(1959)
  • 『유치진희곡전집』(전2권)(1971)
  • 『동랑유치진전집』(전9권)(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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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토류계 대사성공파 26세 치(致) 해(海) 항렬.[2] 진주 류씨 집성촌이다.[3] 참회라고 하여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었으며, 당시의 여타 친일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도둑처럼 찾아온 해방에 놀라 그저 잠적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