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특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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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유제약 창업주
유특한
柳特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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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진주 류씨[1]
출생
1918년 9월 19일
중화민국 길림성 연길현 육도구 용정촌
(현 중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용정시)
사망
1999년 12월 6일 (향년 81세)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서울중앙병원
학력
와세다대학 (법학 / 학사)
종교
개신교
경력
유유제약 사장
가족관계
아버지 유기연, 어머니 김확실
유일한, 유중한[2], 유명한, 유동한[3]
누나 유선한[4], 유신한[5], 유순한[6]
장남 유승필[7]
차남 유승지[8]
3남 유승식[9]
딸 유승선[10]

1. 개요
2. 생애 및 사업가 시절
2.1. 유한무역주식회사
2.2. 독자적 제약 사업
3. 은퇴와 사망
4. 가계도
5. 유일한과의 관계 및 그 외의 이야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기업인이자 유한양행의 창업주 유일한 박사의 막내동생.[11] 아호는 '인호(仁湖)'이다.

2. 생애 및 사업가 시절[편집]


1918년 9월 19일 재봉틀 장사로 자수성가한 상인 유기연(柳基淵, 1861 ~ 1934. 8. 28)과 충주 김씨(忠州 金氏) 김확실(金確實, 1873. 5. 22 ~ 1958. 10. 4)[12] 사이의 5남 3녀 중 다섯째 아들, 막내로 태어났다. 큰형 유일한과는 23세 차이.

2.1. 유한무역주식회사[편집]


1941년, 큰형인 유일한을 따라 기업 경영에 참여해서 유한무역주식회사의 대표를 맡았다. 자본금 15만원에 수출입업으로 등록된 이 회사가 바로 훗날 유유제약의 모체가 되었다. 그는 이미 일본에서 국제 동향[13]을 살피고 귀국했었기 때문에 국내에서는 물론, 일본에서도 물품구입이 계속 어려워질 것을 예감했다. 그래서 그는 약품 및 원자재 구매가 가능한 구미지역과의 교역을 보다 활성화하기 위해 수출입업부터 착수하였다. 이때부터 유한양행의 수출입 업무도 담당하게 되었다. 당시 일제 치하의 조선 의약업계는 원·부자재를 구할 길이 없어 거의 생산활동을 중단하고 침체의 깊은 늪에 빠져 있던 상황이었다. 유한양행만은 생산활동을 멈추지 않았는데, 유한무역주식회사가 막대한 양의 원료를 조달하여 비축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유한무역주식회사와 유한양행도 서울 본사와 소사공장을 고스란히 놓아둔 채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다. 1952년, 유특한은 주식회사 유한양행의 제6대 대표이사 사장에 선임되었다. 범일동에 소규모 공장을 설립하여 의약품의 생산활동에 주력하였다. 그 후 국방부 등 관계 요로(要路)를 찾아 다니며 군납의 길을 열어 회사를 다시 재기시키는데 노력하였다. 이 무렵 전국의 제약인들이 거의 빈손으로 피난해 온 처지인 데다가, 군수약품과 구호약품 및 비공식적으로 수입해온 외제 약품까지 범람해 기존 제약업계는 발도 붙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처럼 제약 불모지와 같은 극한 상황이 전개되자 1952년 11월 한국제약협회의 전신인 대한약품공업협회는 제4대 회장으로 유특한을 선출하였다.

2.2. 독자적 제약 사업[편집]


1953년 6월, 유특한은 독자적인 제약 사업을 전개하기 위해 유한양행과 결별하고 상호를 ‘유한무역주식회사’에서 ‘유한산업주식회사’로 변경하고 본격적인 제약경영에 들어섰다. ‘창의개발(創意開發)을 사시(社是)로 정하고 국내 최초의 당의정(糖衣錠) ‘유비타’를 개발 하였다. 1956년, 대한민국 정부는 당의 기술의 국내정착이 가능해지자, 외제 완제품 비타민제에 대하여 전면 수입금지 조치를 단행했다. 두 번째로 개발품으로 결핵약을 생산해내고자 하였는데, 전란으로 많은 사람들이 영양실조에 걸려 결핵을 앓는 환자가 많은 상황이었다. 그는 1955년에 결핵약 ‘유파스짓’을 탄생시켰고 한국 내에서는 전혀 없었던 장용정(腸溶錠; 장에서 용출되는 정제) 기술을 선보였다. 그리고 영양부족으로 병약해진 이들에게 좀 더 편리하게 영양소를 공급해 줄 방법을 찾던 중, 한 알만 먹으면 하루에 필요한 영양소를 충족시킬 수 있는 종합영양제를 만들어내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개발된 것이 1957년 6월 당의정 ‘비타엠’을 탄생시킨 것이었다.

1957년 10월, 비타엠의 탄생과 때를 맞춰 유특한은 회사 상호를 ‘유유산업주식회사’로 개명했다. 이는 유한양행에서 유유라는 상호를 최초로 사용했으며 유한양행으로 부터의 완전한 분사를 의미하기도 했다. 이어 비타엠의 시리즈제품인 비타엠분말 1962년 발매됐다. 1962년 비타엠 분말을 발매하면서 비타엠은 1억 원 가까운 매상을 기록했는데 이는 한국 비타민 생산액의 40% 가까운 실적이었다. 비타엠, 그리고 후술할 비나폴로는 유일한 박사의 조언으로 개발한 것이라고 한다. 이미 회사와 결별했음에도 유특한과 유일한 박사와는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1959년 5월, 시흥군 동면 안양리(현 안양시 석수동)에 안양공장을 준공했다. 안양공장은 김중업의 설계로 준공됐다.[14] 1963년에는 한국 최초로 파스 원료를 생산했다. 1965년 9월에는 한국 최초로 연질캅셀제인 종합비타민 비나폴로를 개발했다.

1969년 7월 19일, 미국 업죤과 50대 50의 지분으로 합작관계를 맺었다. 회사명은 한국업죤으로 명명했으며 유특한 회장이 공동대표를 맡았다. 유유산업 투자금액은 145,000달러였으며 테포푸로베라외 11개 의약품을 공동생산해 국내에 의약품을 공급했다. 유유는 1974년 3월에 수출입업을 등록했다. 유특한 회장은 과거 유한양행 자회사인 유한무역 시절 닦은 수출입 특기를 살려 활발한 수출을 추진했고, 1975년 11월 수출의 날을 맞아 보건사회부장관상 표창을 수여 받았다.

1973년, 유특한은 사재를 출연하여 유유문화재단을 설립했다. 재단에서는 매년 장학생을 선발하여 학비를 지원하고 있다. 설립아래 지금까지 1,087명의 학생에게 약 7억 7천만원의 장학금을 지원하였다. 1975년 5월, 노동조합 설립을 계기로 노사 화합 경영을 시작됐다. 노사는 설립 이래 현재까지 무 분규 노사 화합 경영을 이어갔다. 11월에는 기업공개를 하기 이른다. 70년대 10억원 이상 거대품목은 1976년 17개, 77년에는 25개 품목이었는데 비나폴로는 10억원 판매 의약품군에 들어갔고, 매년 성장세를 이어갔다.

3. 은퇴와 사망[편집]


1981년, 유특한은 경영에서 은퇴하며 후임 사장에 고광수(高光洙) 당시 전무를 사장으로 임명하였다. 이후 아들 유승필이 아버지를 따라 경영을 이어갔다. 이제는 유승필 본인도 고령으로 인하여 3세 경영을 준비하고 있다. 유특한은 유일한 박사와 더불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몇 안 되는 경영인으로, 그도 형처럼 재산을 모두 사회에 기증하고 1999년 12월 6일에 부인과 3남 1녀를 남기고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만 81세.

아들 유승필, 유승지, 유승식과 딸 유승선이 있다.

4. 가계도[편집]


유일한 항목 참조.

5. 유일한과의 관계 및 그 외의 이야기[편집]


유일한은 경영에서 은퇴하기 전 자신의 혈연, 친척들을 전원 회사에서 해고했다. 가족들 때문에 회사에 파벌이나 알력 다툼이 일어나면 안 된다는 이유였다. 그런데 이 때 막내동생 유특한과 아들인 유일선이 유일한 박사를 상대로 한 소송을 걸었는데, 소송의 내용이 '퇴직금 반환 소송'이었다. 이게 뭔 소리냐면 퇴직금이 너무 많은 것 같아 전액을 반환하려고 소송을 건 거다. 이 때문에 이 소송을 맡은 판사가 "세상에 이런 집안이 있나?"라고 경악했다고 한다. 다만 이 내용은 사실이 아닌 후대에 창작된 일화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참고

유일한이 동생인 유특한에게 "너도 나처럼 전문 경영인을 들이는 게 어떻겠느냐?"라고 권유하자 꽤나 망설인 유특한이 "형님, 죄송합니다. 저는 그릇이 작아서..."라고 대답했다. 유일한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하긴 피는 물보다 진한 법이지. 적어도 친일파만 안 된다면 말이지..." 여기서 뜬금없이 친일파 얘기가 왜 나오냐 하면, 유특한에게는 형이 되는 사람 중 한 명인 유명한일제강점기 때 친일 행위를 하였다. 저런 말을 꺼낸 것으로 보아서 유일한에게 평생 한이 되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계몽사에서 발행한 위인전에는 1954년에 유특한이 유한양행을 아예 "유한그룹"으로 기업 집단화를 해 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해 보았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유일한은 쓸데없이 확장해서 공연히 기업의 세를 과시하는 것도 좋은 게 아니라며 유특한의 제안을 거절했다고 한다. 다만 유한양행에서 분리된 후에도 유일한과 유특한은 가까운 사이를 유지했다. 유유그룹이 만든 비타엠과 비나폴로도 유일한의 조언을 듣고 지은 약품명이다.

이 너무 뛰어나서 그렇지, 동생인 유특한도 성공했고 존경받을 만한 기업가이다. 유특한은 형이 잠시 기업을 떠나 있을 때(독립운동이나 미국 유학 등등) 형을 대신해서 유한양행을 맡아 경영했으며, 유일한이 친족, 혈연을 전부 퇴사시킬 때 유한양행에서 유한무역의 분리를 선언하고, 1957년에 유한무역을 제약 업체인 유유제약으로 변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전문 경영인에게 완전히 넘긴 유한양행과는 다르게 유유제약은 유특한의 후손들이 운영하고 있지만, 여전히 성실하게 기업을 꾸리고 있다.

형님을 따라서 유한양행만큼은 아니지만 모범 경영을 원칙으로 유유그룹을 발전시켰으며, 그 때문인지 유유제약은 창업 후 단 한 번도 노사분규가 없었다고 한다. 그도 전두환과 관련된 일화가 있는데, 정치 자금을 안 냈다. 동명이나 국제처럼 적게 낸 것도 아니라 아예 한 푼도 안 냈다. 이러니 전두환이 열받은 나머지 동명그룹, 국제그룹처럼 무너뜨려버리겠다고 불시에 세무조사를 했지만, 유한양행처럼 너무 깨끗해서 당황하고 말았다. 결국 당국이 제 풀에 지쳐서 포기하고 말았다.[15] 그리고 삼풍백화점과 관련해서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이 있는데, 사실 삼풍백화점이 지어진 부지를 두고 그의 유유그룹이 이준의 삼풍그룹과 경쟁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만약은 없지만 유유그룹이 선정됐다면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거나 다른 곳에서 일어났을 것이다.

[1] 토류계 진천군파 27세 형(馨) 항렬. 맏형 유일한의 원래 이름이 유일형(柳一馨)이었다.[2] 柳仲韓. 1899. 10. 17 ~ 요절[3] 柳東韓. 1918. 11. 6 ~ 1979. 7. 18.[4] 柳善韓.[5] 柳信韓.[6] 柳順韓.[7] 柳承弼. 1946년 9월 23일생. 컬럼비아 대학교 졸업. 유유제약 대표이사 회장[8] 홈텍스타일코리아 회장, 용문학원 이사장 [9] 柳承植. 1960년 2월 29일생. 고려대학교 경영대학 경영학과 졸업. 유유칼믹 회장[10] 柳承善. 1956년 4월 25일생. 이화여자대학교 졸업.[11] 이들 사이에는 그들 앞에서 언급하면 분노를 표할 사람이 있으니 바로 친일반민족행위자유명한이라는 사람이다.[12] 김경우(金景禹)의 딸이다. 이후 김기복(金基福)으로 개명했다.[13] 태평양 전쟁/배경 참조.[14] 현재는 2006년에 제천에 지은 신공장으로 이사했으며, 구 안양공장 부지는 시에서 인수해서 시민을 위한 공간으로 조성하려는 취지에서 안양예술공원 부지로 편입되었고 이 부지에 있던 구 공장 본관은 김중업박물관으로 리모델링되었다.[15] 형인 유일한도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이런 일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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