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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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유한선
劉漢先, 劉漢鮮

출생
1876년 7월 17일
전라남도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
(현재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
사망
1950년 10월 19일
전라남도 광주군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유한선은 1876년 7월 17일 전라남도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현재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전라남도 광주의 사립숭일학교 교사로 재직중이던 1919년 음력 6월, 평양의 국민회 회원인 장공섭(張公燮)으로부터 국민회 취지서(趣旨書) 및 규약서(規約書)를 전달받고 그 취지에 찬동하여 전라남도 각 지역에 국민회를 조직하고자 결의하였다.

이어 자신의 집에 모인 이주상(李周庠), 허원삼(許元三), 최종렬(崔鍾烈), 김양숙(金良淑) 등 8명에게 국민회 취지서 및 규약서를 설명하고 그 취지에 찬동하는 사람을 국민회에 입회시키고 다시 새로운 회원을 가입시키고 입회비를 모금하도록 권유하여 승락을 받았다.

이후 1919년 음력 7월 최종렬의 안내에 따라 나주군 산포면(山浦面)에서 서금덕(徐今德) 외 3명에 대하여 국민회 취지를 설명하고 가입시켰으며, 산포면의 김황규(金黃奎)를 만나서 역시 국민회의 취지를 설명하고 회원으로 가입시켰다. 그리고 윤 7월 이주상(李周庠)의 집에서 이동섭(李東燮) 외 7명에 대하여 조선의 독립을 도모하기 위해 국민회가 조직되었으니 이에 가입하고 각자 1원의 입회비를 납부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후원할 것을 설득하였다.

또 음력 7월 말경 나주군 다도면(茶道面) 신동리(新同里) 예수교회에 모인 사람들과 나주군 남평읍(南平邑) 예수교회에서도 임시정부를 후원하기 위하여 보조금을 납부해 줄 것을 권유하였다.

이처럼 유한선은 1919년 7월경부터 10월경까지 이주상, 허원삼, 최종열 등 주요 기독교 신도들을 설득하여 회원으로 가입시키고 입회금 및 임시정부 구조금(救助金)이라는 명목으로 모금하고 이들로 하여금 회원모집과 입회금 모집에 노력하도록 독려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또한 1920년 10월 27일 최양옥, 신덕영 등 대동단 인사들을 자신의 집에 들여서 그들이 독립운동자금 모집에 착수하도록 도와줬다.

그러나 1919년 12월 22일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며, 1920년 6월 2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광주에서 조용히 지내다 1950년 10월 19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유한선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