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현목

덤프버전 :


유현목 감독의 주요 수훈 및 수상 이력

[ 펼치기 · 접기 ]

대한민국 문화훈장 수훈자
파일:문화금관.jpg
연도
2009년
이름
유현목
분야
영화
금관문화훈장(1등급)
파일:문화옥관.jpg
연도
1988년
이름
유현목
분야
영화
옥관문화훈장(4등급)

{{{#white 역대}}} 파일:bluedragonfilmawards_logo.png
파일:bluedragonawards3.png
감독상
제1회
(1963년)


제2회
(1964년)


제3회
(1965년)

이만희
(돌아오지 않는 해병)

유현목
(잉여인간)


김수용
(저 하늘에도 슬픔이)
제5회
(1967년)


제6회
(1969년)


제7회
(1970년)

김수용
(사격장의 아이들)

유현목
(카인의 후예)


최하원
(독 짓는 늙은이)

역대 파일:daejongfilmawards_logo.png
파일:daejongawards.png
우수국산영화상 감독상
1959년

1960년

1961년
조긍하
()

유현목
(구름은 흘러도)


김기영
(하녀)
감독상
제1회
(1962년)


제2회
(1963년)


제3회
(1964년)

신상옥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유현목
(아낌없이 주련다)


이만희
(돌아오지 않는 해병)

제4회
(1965년)


제5회
(1964년)


제6회
(1967년)

신상옥
(벙어리 삼룡)

유현목
(순교자)


김수용
(토지)

제7회
(1968년)


제10회
(1971년)


제11회
(1972년)

신상옥
(대원군)

유현목
(분례기)


신상옥
(평양폭격대)




유현목
兪賢穆

이름
유현목
출생
1925년 7월 2일
국적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황해도 사리원
사망
2009년 6월 28일 (향년 83세)
데뷔
1956년 영화 '교차로' 연출
경력
2006.07 한국영화인복지재단 선정 영화인 명예의 전당 헌액
대구대학교 석좌교수

1. 소개
2. 생애
3. 성향
4. 가족사
5. 작품
6. 여담
7. 수상



1. 소개[편집]


대한민국영화감독이자 영화제작자이다. 본관은 기계(杞溪)[1]. 한국영화 초창기에 리얼리즘을 이끌었던 거장으로 통한다.


2. 생애[편집]


1925년 7월 2일 황해도 봉산군 사원면(現 황해북도 사리원시)에서 9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위로는 어릴 때 모두 죽고 5남매만 남게 되었으며, 어린 시절부터 내성적인 성격으로 자랐다. 덕성공립보통학교와 휘문중학교를 다녔다.

어린 시절부터 발명가화가, 바이올리니스트, 무용가, 건축가 등의 다양한 장래희망을 꿈꾸었던 그는 어느날 도스토예프스키죄와 벌[2]을 읽고 희곡 작가가 되기로 결심, 서울의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했다. 영화에도 관심이 많았던 그는 대학에서 '극예술연구회'를 만들고 김기림[3]의 지도하에 대학 최초로 가난한 어촌을 무대로 한 해풍이란 45분짜리 영화를 만들기도 했으며, 이후에도 꾸준히 극장을 드나들어 영화를 외우면서 영화를 공부했다.

동국대 재학 중인 1947년에 이규환의 조감독이 되어 영화계에 입문하였으며 이후 1956년 발표한 영화 교차로라는 작품으로 정식 영화감독 데뷔하였다. 이 시기엔 테크닉에 대한 탐구에 열중했으며, 평단에서도 '정열적인 테크니션'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이후 1957년에 발표한 잃어버린 청춘으로 영평상·부일영화상·국제영화잡지상 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하면서 충무로에서 주목받는 감독이 된다.

이후 이범선의 원작을 영화화한 대표작인 오발탄(1961)을 통해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부상했다. 자유당 정권 말기의 암울했던 시대상을 보여주는 이 영화는, 촬영기간만 13개월이 되고, 배우들도 거의 무보수로 출연하는등 열악한 환경에서 제작되었으며, 군사 정권의 위협에 상영 중단을 겪게 되는등 우여곡절이 많은 작품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봉 이후 현재까지 한국 영화의 중흥기를 불러온 의미 있는 작품으로 꼽힌다. 오발탄은 사회고발적인 비판의식이 포함된 영화로 해방촌에 살고 있는 월남 피난민 가족을 소재로 삼고 있었으며, 4.19 혁명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에도 잉여인간 등의 작품을 통해 사회현실을 비판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했으며, 1976년부터는 동국대학교 연극영화학과 교수로 부임해 1990년 정년퇴임할 때까지 후진 양성에 힘썼고 영화계 발전을 위해 여러 협회를 만들기도 했다. 제작자로도 활동하여 로보트 태권V를 제작하기도 했다.

2007년 뇌경색을 앓은 이후 당뇨병 합병증까지 겹치면서 병세가 악화되었고, 결국 2009년 6월 28일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식사동 동국대학교 일산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3세.

3. 성향[편집]


1966년에 파리에 본부를 두고 있는 세계문화자유회의의 세미나에서 '은막의 자유'를 발표를 한 경험이 있는 만큼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은 인물이었으며, 작품에서 사회현실을 고발하고 비판하려 노력을 한 인물이다. 60년대 이후에는 사회문제와 종교를 결합시킨 작품들을 만들기도 했으며 이는 순교자와 사람의 아들에서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주제들을 표현주의 등 다양한 형식으로 보여주었으며, 춘몽에서는 독일 표현주의의 형식으로 사디즘과 마조히즘을 다루는 등 파격적인 시도를 한다. 1967년에 발표한 단편 <손>은 김구림의 <1/24초의 의미(1969년작)>과 함께 한국 초기 실험영화로 통한다. 70년대에는 로보트 태권 V의 제작도 맡아 애니메이션의 영역에도 발을 들여놓았으며, 후기 인터뷰에선 탐미주의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또한 김수용 등과 함께 1960대 문예영화 붐을 이끈 주역이기도 하다.

때문에 1960년대 중반부터는 극심한 검열때문에 슬럼프를 겪기도 했는데, 때문에 반공적인 영화를 만드는가 하면, 춘몽 땐 그 파격성 때문에 음화제조죄로 기소를 당하기도 했다.

이렇듯 리얼리즘 뿐만 아니라 다양한 영화 사조를 건드렸던 감독이다.


4. 가족사[편집]


6.25 때 부모님과 5남매, 모두 7명의 가족 중에서 아버지와 평양신학교에 다니던 바로 아랫동생은 피신해 있던 과수원에서 폭사 당했고, 둘째 동생은 해주예술전문학교를 졸업했는데 전쟁이 나면서 징집되어 조선인민군 군악대에서 복무했다는 소식 이후론 소식이 끊겼다고 한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어머니와 가족 즉 막내 동생 누이는 1.4 후퇴 때 월남했는데, 어머니는 막내동생을 중앙신학교(現 강남대학교)에 보낼 정도로 신앙심이 강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6.25로 인한 이런 아픈 가족사는 그의 작품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5. 작품[편집]



유현목 감독 장편 연출 작품



{{{#FFFFFF
[ 펼치기 · 접기 ]
파일:교차로(유현목).png
파일:유전의애수.png
파일:잃어버린청춘.png
교차로 (1956)
유전의 애수 (1956)
잃어버린 청춘 (1957)
파일:그대와영원히.png
파일:인생차압.png
파일:구름은흘러도.png
그대와 영원히 (1958)
인생차압 (1958)
구름은 흘러도 (1959)
파일:아름다운여인.png
파일:오발탄.png
파일:임꺽정.png
아름다운 여인 (1959)
오발탄 (1961)
임꺽정 (1961)
파일:아낌없이주련다.png
파일:성웅이순신.png
파일:김약국의딸들.png
아낌없이 주련다 (1962)
성웅 이순신 (1962)
김약국의 딸들 (1963)
파일:푸른꿈은빛나리.png
파일:잉여인간.png
파일:아내는고백한다.png
푸른 꿈은 빛나리 (1963)
잉여인간 (1964)
아내는 고백한다 (1964)
파일:춘몽.png
파일:순교자.png
파일:푸른별아래잠들게하라.png
춘몽 (1965)
순교자 (1965)
푸른 별 아래 잠들게 하라 (1965)
파일:태양은다시뜬다.png
파일:특급결혼작전.png
파일:막차로온손님들.png
태양은 다시 뜬다 (1965)
특급 결혼작전 (1966)
막차로 온 손님들 (1967)
파일:종야.png
파일:공처가삼대.png
파일:한(유현목).png
종야 (1967)
공처가 삼대 (1967)
한 (1967)
파일:수학여행(유현목).png
파일:악몽(유현목).png
파일:한(속).png
수학여행 (1968)
악몽 (1968)
한(속) (1968)
파일:아리랑(유현목).png
파일:여(김기영).png
파일:몽땅드릴까요.png
아리랑 (1968)
여 (1968)
몽땅 드릴까요 (1968)
파일:카인의후예.png
파일:나도인간이되련다.png
파일:여보(유현목).png
카인의 후예 (1968)
나도 인간이 되련다 (1969)
여보 (1970)
파일:분례기.png
파일:불꽃(유현목).png
파일:문(유현목).png
분례기 (1971)
불꽃 (1975)
문 (1977)
파일:옛날옛적에훠어이훠이.png
파일:장마(유현목).png
파일:다함께부르고싶은노래.png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 (1978)
장마 (1979)
다함께 부르고 싶은 노래 (1979)
파일:사람의아들.png
파일:상한갈대.png
파일:말미잘(유현목).png
사람의 아들 (1980)
상한 갈대 (1984)
말미잘 (1994)
상세정보 링크 열기





6. 여담[편집]


목공예의 대가인 박성삼(朴星三, Sung Sam Park, 1907 ~ 1987)[4]의 딸이자 화가인 박근자(1932 ~ )와 결혼했다. 아내가 상당한 미인으로 유명했다고. 공교롭게도 유현목 감독이 세상을 떠난 6월 28일은 박근자 여사의 생일이었다.

김기영 감독과 라이벌로 통하기도 했는데, 살아있었으면 하는 영화인이 있냐는 질문에 김기영이라고 답하는가 하면, 50~60년대 한국영화 걸작 중에서 김기영의 10대들의 반항을 꼽는 등 평소 그를 존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함께 여여여라는 옴니버스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7. 수상[편집]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2 08:11:48에 나무위키 유현목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37세 목(穆) 항렬.[2] 당시 이 작품의 굉장한 팬이었다고 전해지며, 해방 후, 피에르 슈날 감독의 죄와 벌을 여러번 보았을 정도였다고 한다.[3]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시인이자 평론가로, 모더니즘을 이끌었던 문학인으로 통한다. 초현실주의풍의 시들을 여러 편 남겼으며, 생전에 시인 이상과도 친한 사이였다.[4] 장인인 박성삼은 평안남도 평양부 김려대면(現 평안남도 대동군)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