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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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3. 선발
4. 교육과정
5. 폐단
6. 기타 과정
7. 최후
8. 출신자
8.1. 조선인
8.2. 중국인


1. 개요[편집]


일본 제국 육군의 보수교육 기관으로 약칭은 육대(陸大)였다. 우수한 참모장교 양성을 목적으로 1883년 설립되어 1945년까지 존속했다. 육군사관학교와는 다르다.

이곳의 성적은 일본 육군에서의 출세를 좌우하는 중대한 요소였으며, 이는 좌관급 장교에서 장군의 진급에까지 해당했다. 실제 성과보다도 교육기관에서의 성적을 중시하는 이 비합리적인 엘리트주의로 인해 교육 성적만 좋은 책상물림 졸장이 고위직까지 많이 올라갔다. 이렇게 육군대학교의 중요도가 막대했던 터라 육대에 얼마나 많은 장교를 진학시켰느냐도 각 부대 지휘관들의 실적이 되었고, 그로 인해 이들은 위관급 장교들에게 무지막지하게 공부를 시켰다. 육대 졸업을 못 하면 아예 장성 진급이 불가했기에 재수 삼수는 당연시되었으며, 입학 경쟁도 치열해서 합격률은 10% 내외였다.

예를 들어, 일본 육사 제26기생 742명 중 육군대학교를 졸업한 사람은 66명에 불과하여 아무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님을 보여준다. 이처럼 육군의 최고 엘리트 코스에 해당했고 A급 전범 28명 중 대다수가 육대를 졸업했던 것만 봐도 최고위급까지의 진급의 전제조건에 해당했다. 육대를 나오면 진급도 빨랐다. 당시 일본군의 중위, 대위 진급의 최소 근속 기간은 각 2년이고, 소좌 진급은 4년이 필요했는데, 육대 출신은 최소 근속 기간이 지나면 반드시 진급을 시켜주었다. 10년 인사라는 말도 있었는데 육대 졸업 후 10년이면 대좌는 기본이고, 소장 이상의 진급은 각자에게 달렸다는 뜻이다.

육대 졸업 장교들은 대개 참모 직책 위주로 근무하였다. 러일전쟁 당시의 모습을 보면 육대 졸업생 중 중위였던 8~12기는 사단, 여단, 연대, 대대부관으로 근무했고, 대위였던 5~7기는 사단 또는 군의 참모로 근무, 소좌였던 1~4기는 대본영 참모[1] 군 작전주임참모, 군 후방주임참모, 군 병참부 참모장, 사단 참모 등으로 근무하여 일선 지휘관으로 있던 인물은 거의 없이 대개 군 중추의 참모 직책에 앉아 있었다.


2. 역사[편집]


육대는 참모의 필요성 때문에 생겼다. 지휘관은 이미 생긴 육군사관학교에서 배출하고 있었다. 성적이 우수한 몇명은 유럽으로 유학을 보내기도 했다. 이후 참모본부가 생기기는 했는데 참모를 길러내기 위해 육대의 필요성이 대두된 것이다. 이당시 참모학을 전공하고 참모증서를 획득한 사람은 프랑스 육군대학교 출신의 고사카 지히로 육군 중위 단 1명 뿐이였다. 1883년 창설기에는 잠시 프랑스인 교관을 썼다. 이후 육대의 모델은 프랑스와 프로이센을 저울질 하다가 보불전쟁의 결과를 보고 프로이센을 선택하였다. 이에 1885년 야콥 멕켈(Jacob Meckel) 독일 육군 소령을 초빙하여 육대를 창설했다. 멕켈 소령의 도상 훈련 중심의 교육 방식은 이후 육대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시와라 간지도조 히데노리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일본인으로 알려져 있는데, 정작 육대의 창설 교관이였던 멕켈 소령은 전쟁론을 이해 못해서 딱히 아는 척 안 하고 그냥 얼렁뚱땅 넘어갔다고 한다.

1945년 종전 후 일본 육해군 해체와 함께 폐지되었다. 육상자위대 간부학교가 현재 육상자위대의 대위에서 좌관급 간부들을 대상으로 보수교육을 실시하는데, 육군대학교를 그 전신으로 삼고 있지는 않아 별개다. 단 육상자위대 간부학교장(중장) 2대부터 10대까지의 인원들이 일본 육대 출신이긴 했다.


3. 선발[편집]


학생들은 2년 이상 복무한 28세 이하의 보병/기병 소위, 1년 이상 복무한 30세 이하의 포병/공병 중위가 대상이였다. 이러한 제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헌병, 통신, 경리, 치중(수송) 등 비전투 병과는 아예 모집을 안했다는 것이다. 그나마 치중 병과는 근무 특성상 승마 병과라는 이유로 입학시키긴 했으나, 기병 병과 과정으로 입교해 졸업 후 기병으로 전과해 근무하였다. 이는 이후 일본군이 병참 때문에 망하는 단초가 된다. 같은 전투 병과라도 항공도 지원할 수 없었다.

또한 60기까지 졸업생 3,016명중에서 1기 도조 히데노리, 2기 다니다 후미이에(헌병 중장) 딱 2명을 제외하고는 전원 육사, 그것도 거의 대부분이 육군에서 운영하는 육군유년학교 출신으로, 그 이외 루트로 임관한 장교는 육대 입학 자체가 거의 불가능했다.

일본 육군은 평시에 분대-소대가 없고 중대-내무반으로 이어지는 체제이며 신병 교육을 각 중대에서 자체적으로 시켰다. 그렇기 때문에 소위, 중위들은 소대장으로 근무할 필요가 없고, 당직 근무를 서거나 신병 교육을 시키는 한편 육대 입학을 위해 공부하는 것이 주요 일과였다. 아예 똘똘한 장교의 경우 지휘관이 각종 근무에서 열외하게 하고 육대 입시 공부만 시켰다. 육대 합격자를 배출하면 그 지휘관의 인사에도 가점이 되기 때문이다. 통상 3년정도 공부하고 합격하였다고 한다.

4. 교육과정[편집]


초기에는 보병/기병은 3년, 포병과 공병은 2년이었는데, 포병/공병은 수학을 잘 하니 한과목 덜 공부해도 된다는 이유로 이런 차이를 두었다. 이후 둘다 3년으로 통일된다. 수업은 크게 보통학과 군사학이 있었다. 보통학은 '교통, 역사, 수학, 통계, 국제공법, 법률, 외국어(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 중국어)'등 608시간이였다. 군사학은 학과와 술과가 있는데 학과는 '마학, 위생, 회계, 병기, 건축, 참모학 요강, 전사, 전술, 해전술, 지형, 모형, 요새전술'등 1,796시간이였다. 술과는 '참관, 야외측량, 현지전술, 참모연습 야영, 전사여행, 기층근무, 추계연습, 특별대연습 참가'등 304시간이며 여기에 술과에 해당하는 마(馬)술 806시간이 추가되었다.

이러한 교육과정은 전술에 비해 전사와 참모요강 교육시간이 매우 적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여단/사단급 부지휘관의 양성에는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상급부대인 군/방면군에 이르게 되면 늘 상호견제와 동맥경화의 형태를 보여주었다. 이는 육군대학의 교육 방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전시에 초급 장교들의 소모가 엄청난데, 그것도 가장 뛰어난 인재만 골라 3년씩 육대에 묶어두는 것은 너무 부담이 커 1938년 2년 반으로 줄었고 그 이후 계속 줄다가, 태평양 전쟁 시기에는 일시적으로 모집 정지 되기도 하고, 막판에는 교육기간이 1년여까지 단축되었다.


5. 폐단[편집]


개개인의 능력을 제쳐두고, 육대 출신이 군의 요직을 전부 차지하는 것만으로도 요지경인데, 한술 더 떠서 군도조(軍刀組. 군토구미)라는 것도 있었다. 성적 상위 6등 까지만 덴노가 직접 은사의 군도를 하사하기 때문에 군도조라고 한다. 그런데 이것만으로 부족한지 1~5등까지의 군도조만 쳐주고 6등은 군도조로 안쳐주는 희한한 폐습도 있었다. 이는 육군대학 정원이 대략 50명 내외로 정해졌기에 정원의 수에 따라 군도를 하사하는 인원도 조금씩 바뀌어서, 평균 숫자인 50명의 딱 10%가 5명이었기에 그렇게 친 것이다. 즉 군도조가 6명일 경우, 6등을 "넌 동기 수 많아서 운 좋게 군도조가 된 거고 원래라면 권외니까 군도조 취급 안 함."이라는 해괴한 논리로 배척한 것이었으니, 폐습이라는건 변함없다. 이들 군도조가 일본 육군의 주요 보직을 독점한다. 거기다 상위 12~13등까지 해외 유학의 기회가 주어졌는데, 군도조는 스스로 선택한 나라의 유학을 보장하고 나머지는 육군에서 (지망을 받기는 해도)강제 배정했다. 그나마 6등 군도조는 서류상으론 군도조였기에 희망국 유학은 보장됐다.

만주사변을 일으킨 이시와라 간지(차석 졸업), 자칭 '작전의 신' 츠지 마사노부 등이 전부 군도조 출신이다. 특이한 예외라면 도조 히데키의 아버지 도조 히데노리는 육사를 졸업 안 하고도 육대를 가서 1기 수석으로 졸업했다. 이후 러일전쟁 당시 8여단장으로 근무하다가 작전 실패의 책임을 지고 소장에서 중장으로 명예 진급 후 퇴역했다. 육대 수석 출신이 대장을 못 단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도조 히데노리 본인은 이것이 초슈번 출신들이 육군 요직을 독점하던 시절, 메이지 정부에 저항했던 모리오카 번 출신으로 별다른 뒷배가 없던 자신이 차별받은 탓이라고 여겼다. 그럼에도 육대의 체면을 위해 퇴역 직전 진급이라는 꼼수를 쓴 것이니, 군 내 파벌의 체면이 인사 원칙에 관여하는 폐혜를 이중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다.

한창 소대장과 참모 등으로 근무하며 실무 경험을 풍부하게 쌓아야 할 위관급 장교들 상당수가, 업무는 뒷전이고 육대 입시에만 매달리게 만들어 장교의 평균 질을 떨어뜨리는 문제도 있었다. 현대에도 비웃음거리가 되고 있는 무타구치 렌야 장군조차 육대 졸업자다.

육사에 이어 육대라는 중간 과정이 있다는 사실은, 일본해군병학교 졸업 성적이 복무 기간 내내 절대적인 인사 기준이 되었던 해군에 비하면 도중에 무능한 이들을 한 번 더 걸러내는 장점이 될 수도 있었다. 해군의 기준대로면 해병에서 공부만 잘 했고 막상 실무에선 무능한 사관을 도중에 거를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단, 일본 육사의 교육 자체가 유교 경전이나 서예 같은 거나 가르치는 등 현대적인 전술과 항해술 같이 실용적인 기술, 외국어, 상류층의 교양 등을 가르치는 해병에 비해 교육의 질이 매우 떨어지는 후진적인 체계였고, 육대 또한 결국 공부만 잘 하고 실무에선 무능한 이를 가려내진 못했기에 그게 그거였다.


6. 기타 과정[편집]


위에서 언급한 과정은 '본과'이며 그외 다음과 같은 과정이 일시적으로 있었다.

  • 전공과(1924~1932)
학생이 특별한 수업을 받는 경우를 제외하면, 시간에 구애됨이 없이 각자가 관심을 가진 분야를 1년간 자유롭게 연구하여 1년 후에는 논문을 제출하게 되는 과정이다. 학생을 헌병을 제외한 각 병과중좌, 소좌 중에서 고등용병에 관한 학술의 심후한 연구를 하기에 적당한자가 선정된다. 1924년에 시작되어 매년 10명씩 선발하였다. 연구주제는 '정략과 전략'. '연합군작전과 대연합군작전', '클라우제비츠와 손자를 비교연구' 같은 것이었다.
전공과제도는 장군이 될 인재의 양성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교육을 받기에 적합한 자질과 능력의 소유자들은 대부분 중앙부와 부대의 요직에 있었으므로, 그 상관들의 동의를 얻어 빠져나오기가 어려웠다. 또한 학생을 지도할 만한 수준의 교관을 배치하는 것도 어려웠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전공과는 그 설립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채, 8기생 10명의 입교를 끝으로 1932년 폐지되고 학생들은 중도에 퇴학하게 된다.

  • 전과(1933~1943)
본과의 입학 시험 당시 부대업무나 기타 사정으로 시험에 응시할 수 없었거나, 본과의 선발시험에 불합격한 사람 중에서 우수한 사람을 시험으로 선발하여 입교시키는 제도였다. 따라서 전과학생은 본과학생보다 나이가 많고 계급도 대위~소좌였으며, 수학기간은 1년이었다.
이는 군비확장에 수반된 막료요원의 보충을 목표로 한 것으로 사단급 부대의 막료 양성이 주된 목적이었다. 전과학생은 졸업증서는 수여 받지만, 이른바 '천보전'은 받지 못했다. 한편 본과졸업생이 받던 천보전은 1937년 폐지된다.
1933년 전과에 입교한 1기생은 9명이었지만, 만주사변 이후의 군비확장으로 막료요원의 주된 보충원이 되었다. 이에 1937년에는 일거에 44명으로 늘어났고, 다음 해 1938년에는 70명으로까지 급증한다. 하지만 1943년 12기 6명의 졸업을 최후로 이 제도는 폐지된다. 폐지 이유는 전황악화로 장교들을 입교시킬 여유가 없어서.

  • 항공학생(1937~1938)
1937년에 만들어져 항공관계 전공과로 만들어진 제도였다. 그러나 중일전쟁으로 항공병과 장교의 소모가 격심하게 되어 항공간부가 부족하게 되자, 1938년 입교의 2기생까지 합계 8명을 졸업시키고 폐지되었다.


7. 최후[편집]


태평양전쟁 중 육대에 재학하던 58기생(2년차)은 1943년 12월에 수학기간이 1년 8개월로 단축되었고, 나아가 59기생(1년차)은 1년 3개월로 단축되었다. 1944년 12월 부터는 당분간 교육이 정지되어 59기생은 이때 졸업하게 된다. 다만 59기생은 교육 기간이 너무 짧아 참모본부가 재소집후 1~2개월 더 추가 교육하여 '특수참모요원'이라는 이름으로 각 사단 참모로 부임 시켰다.

1944년은 사단이 단번에 몇십개씩 생기는 와중이었는데 육대까지 폐지되니 참모요원 보충이 어려워져 관동군을 시작으로 현지군은 주로 사단참모를 보충하기 위해 3개월을 한도로 직접 교육하여 군의 참모를 보충하였다.

결국 극심한 참모요원 부족으로 1945년 2월 다시 교육이 재개되어 60기 본과학생이 육대에 입교 하였고 8월 종전 직전에 졸업 했다. 일본육사 55기인 유재흥 대위의 경우 1945년 5월에 육대 시험을 보았고, 8월에 하는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8. 출신자[편집]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 조선인은 꽤 많았던 것에 비해 육대는 영친왕 이은(중장, 35기), 이건(중좌, 51기, 일본명 모모야마 켄이치), 이우(중좌, 원폭 사망 후 대좌추서, 54기)등 왕공족 외에는 홍사익(중장, 35기) 단 1명 뿐이다.[2] 중국인의 경우에도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은 흔하게 찾아볼 수 있지만 육군대학교 출신은 성스차이, 슝스후이 정도나 보인다.


8.1. 조선인[편집]




8.2. 중국인[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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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조 히데키의 부친으로 육대 1기 수석 출신인 도조 히데노리가 이에 해당했다.[2] 채병덕도 입교 직전까지 갔지만 오사카 조병창 근무 시절 상관 폭행(!)죄로 인해 입교가 취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