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홍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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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육홍균.jpg

본관
옥천 육씨
출생
1900년 10월 1일
경상북도 선산군 주아면 주아동
(현 경상북도 구미시 옥성면 주아리)
사망
1983년 7월 5일 (향년 82세)
서울특별시 강남구 대치동 자택
묘소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 신세계공원묘원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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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독립유공자, 정치인.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육홍균은 1900년 10월 1일 경상북도 선산군 주아면 주아동(현 구미시 옥성면 주아리)에서 아버지 육병형(陸炳亨)과 어머니 예천 임씨(醴泉 林氏)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슬하에 육철(陸轍), 육종서(陸鍾瑞), 육종국(陸鍾局) 3형제를 두었다. 수원고등농림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니혼대학 법문학부 문학과를 다니다가 중퇴하였다.

1922년 무정부주의를 표방한 비밀결사 흑우회(黑友會)에 가입해, 회지 『흑우』및 『소작농』의 발간을 주도하였다. 1923년에는 박열·서동성·김중한(金重漢) 등과 함께 불령사(不逞社)를 조직했다가 그해 9월 투옥되기도 했다. 출옥 후인 1926년 10월 흑우회가 흑색청년연맹으로 이름을 바꾸고 활동할 때에도 계속 참여하였다.

1927년 고향 선산군으로 돌아와 협동조합 '우리살림사'를 조직하였고, 옥성농우회(玉城農友會)를 통해 1928년부터 지역 농민운동을 주도하였다가, 1939년 4월 선산경찰서에 검거, 투옥되어 1년 3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체류하던 중 8.15 광복을 맞았다.

8.15 광복 이후 귀국하여 우익 정치인으로 정계에 입문,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선산군 지부장에 취임하여 활약하였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후보로 경상북도 선산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제헌국회에서 그는 농지개혁법, 양곡매입법의 제정 때 농민의 대변자로서 소작 농민들의 억울함을 해결하는 데 힘썼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국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며, 1952년 부산정치파동 때 고초를 겪기도 했다. 이후 민주국민당 중앙상무위원을 역임하였다. 1953년에는 자유당에 입당하여, 이듬해인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김우동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신준원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5.16 군사정변 이후 1963년 강상욱·오치성 등 5.16 군사정변에 가담한 군인 출신 정치인으로서 반 김종필 세력들이 결성한 5월 동지회의 지도위원에 선임되었으며 1969년 토지개량조합연합회 고문으로도 활동하였다.

1972년 제헌동지회 소속 전직 국회의원들과 10월 유신을 지지하였다.

1983년 7월 5일 서울특별시 강남구 대치동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하였으며, 사후 199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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