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민(투수)

최근 편집일시 :

파일:SPOTV 로고.svg[[파일:SPOTV 로고 화이트.svg 파일:KBO 리그 로고(영문).svg[[파일:KBO 리그 로고(영문/다크모드).svg 중계진

[ 펼치기 · 접기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colbgcolor=#000000><width=10%> 캐스터 ||<width=10%> 김민수 ||<width=10%> 최두영 ||<width=10%> 조주영 ||<width=10%> 이승현 ||<width=10%> 김민준 ||<width=10%> 정세현 ||
|| 해설자 || 민훈기 || 양상문 || 이대형 || 이성우 || 윤석민 ||




윤석민 관련 틀
[ 펼치기 · 접기 ]



윤석민의 수상 경력
[ 펼치기 · 접기 ]

파일:external/oi63.tinypic.com/244s6lk.pn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2009

파일:2008 베이징 올림픽 로고.svg
2008 베이징 올림픽 야구 종목
금메달

2008

파일: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 로고.svg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 야구 종목
금메달

2010

파일:일구상 로고.jpg 2011 일구상 최고 투수상



파일:KBO 리그 로고(엠블럼/영문, 2013~2021).svg
2011 KBO 리그 MVP

파일:KBO 리그 로고(엠블럼/영문, 2013~2021).svg
2011 KBO 리그 다승왕

파일:KBO 리그 로고(엠블럼/영문, 2013~2021).svg
2008, 2011 KBO 리그 최우수 평균자책점

파일:KBO 리그 로고(엠블럼/영문, 2013~2021).svg
2011 KBO 리그 탈삼진왕

파일:KBO 리그 로고(엠블럼/영문, 2013~2021).svg
2011 KBO 리그 승률왕

파일:KBO 리그 로고(엠블럼/영문, 2013~2021).svg
2008 KBO 리그 페어플레이상






윤석민의 역대 등번호
[ 펼치기 · 접기 ]

KIA 타이거즈 등번호 20번
오봉옥
(2002~2003)

윤석민
(2005~2009)


조태수
(2010~2012)
KIA 타이거즈 등번호 28번
조태수
(2009)

윤석민
(2010)


고우석
(2011~2012)
KIA 타이거즈 등번호 21번
손영민
(2010)

윤석민
(2011~2013)


송은범
(2014)
KIA 타이거즈 등번호 20번
홍건희
(2015)

윤석민
(2015~2017)


이윤학
(2018)
KIA 타이거즈 등번호 24번
유재신
(2017)

윤석민
(2018~2019)


김민식
(2020~2022.5.8.)


A대표팀 참가 경력
[ 펼치기 · 접기 ]
















SPOTV 해설위원
윤석민
尹錫珉 | Yoon Suk-min

출생
1986년 7월 24일 (37세)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거주지
경기도 용인시[1]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학력
구리초등학교(구리리틀)[2] - 구리인창중 - 야탑고[3]
신체
185cm, 85kg, B형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2005년 2차 1라운드 전체 6번 (KIA)
소속팀
KIA 타이거즈 (2005~2013)
볼티모어 오리올스 산하 마이너 (2014)
[ 펼치기 · 접기 ]
노폭 타이즈 (2014) / AAA
KIA 타이거즈 (2015~2019)
해설위원
KBS / KBS N SPORTS WBC 특별해설 (2023)
SPOTV 해설위원 (2023~)
병역
예술체육요원
(2008 베이징 올림픽 야구 부문 금메달.)
소속사

파일:제이디비엔터테인먼트 로고.svg[[파일:제이디비엔터테인먼트 로고 화이트.svg

SNS
파일:트위터 아이콘.svg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파일:유튜브 아이콘.svg윤석민골프TV
정보 더 보기
[ 펼치기 · 접기 ]
배우자
김수현[1] (2017년 12월 9일 결혼 - 현재)
자녀
장남 윤여준(2016년생)
차남 윤여찬(2018년생)
가족
아버지[2][3], 어머니, 장모 김예령(1966년 3월 4일생)
본관
파평 윤씨
응원가
싸이 - 아버지[가사][듣기]
종교
무종교개신교[4]

1. 개요
3. 피칭 스타일
5. 연도별 성적
6. 양현종과의 반비례?
7. 은퇴 이후
7.1. 골프선수 활동
7.3. 모던남 윤석민
8. 여담
9. 관련 문서
10.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남들은 나보고 운이 없다고 하지만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입니다. KIA 타이거즈 같은 명문팀에서 1선발로 뛰고 있는 나는 정말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2007년 암울한 KIA 타선과 수비로 최다패를 기록했을 때




캡션


대한민국의 방송인이자 前 KIA 타이거즈 소속 우완 투수.

KIA 타이거즈의 암흑기에 데뷔하여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팀의 기둥이 되어 활약한, KIA로 팀명이 바뀐 후 탄생한 첫번째 투수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레전드[4]이다. 주축 투수로 팀의 12년만의 V10에 큰 기여를 하였고, 빼어난 속구, 슬라이더를 비롯하여 다양한 구종으로 국가대표에 여러 번 발탁되어 총 38⅔이닝 평균자책점 1.39라는 매우 뛰어난 성적 #을 거뒀다.

2000년대 중후반부터 2010년대 초반까지 '류윤김'으로 불리며 류현진, 김광현과 함께 리그를 대표하는 에이스였다.[5]

2000년대 중반까지 우완 트로이카로 불리던 배영수, 박명환, 손민한이 부상으로 부진하며, 프로야구에 뛰어난 우완 선발이 거의 없다시피하던 시점에 등장하였다. 이 때문에 선발 로테이션에서 꾸준히 던져주는 우완 투수들은 대부분 외국인 선수인 상황에서, 송은범과 함께 선발, 계투, 마무리를 가리지 않고 등판하여 정통파 우완의 자존심을 세우던 선수였다. 공교롭게도 두 투수 모두 전천후로 불펜 알바를 자주 뛰었다는 점과 높은 기대치에 비해 이를 만족시키지 못한 시즌이 많았다는 공통점이 있다.[6]

신인 시절 믿음직한 투구와 낙차 큰 슬라이더를 가지고 마무리투수을 맡아 '광주댐'이라는 별명이 생겼고, 어려 보이는 외모로 '석민 어린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2007년에는 꼴지를 하며 엘롯기로 조롱당하던 팀에서 소년가장 역할을 맡았는데, 이 때 윤석민상이라는 용어가 생기기도 했다. AAA리그에서 수준 이하의 기량을 보여준 2014년에는 '노폭전드' 내지는 '윤졸도'[7]라는 멸칭을 얻었다.

마무리로 뛰게 된 2015 시즌 한정 별명은 석센시오. 그리고 2017 시즌 이후 재활이 더디게 진행되어 복귀가 몇 년간 계속 미뤄지자 '사이버투수'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생겼다. 윤규진, 안영명보다 부위가 더 깊숙한 안쪽을 다쳐서 우리나라에선 수술이 불가하여 일본에 가서 수술을 했으나 재기에 실패했다. 자세한 내용은 스톡킹 참고.

2019 시즌 종료 후 은퇴를 선언하고, 2년 후인 2021년 5월 30일 광주 kt전에서 'UNTOUCHA21E'이라는 이름으로 뒤늦게 은퇴식을 가졌다.

2. 선수 경력[편집]




3. 피칭 스타일[편집]



주력 구종은 시속 155km/h 까지 나오는 포심 패스트볼과 복수의 슬라이더이며 간간이 서클 체인지업을 곁들인다. 선발 투수임에도 불구하고 구속이 매우 빠른 투수였는데, 평균 구속 140대 중후반에 최고 구속이 155km였으므로 전성기의 배영수와 비슷한 수준이었으며 당연히 리그에서 가장 빠른 공을 던지는 토종 선발투수였다. 커브도 궤적이나 제구 모두 좋은 편이지만 2011년을 기점으로 사용 빈도가 낮아졌다. 팜볼, 슬러브 같은 온갖 변화구는 물론 투심, 싱커 같은 변형 패스트볼까지 실전에서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심지어 그걸로도 재미를 보던 투수였지만, 마찬가지로 2011년을 기점으로 사용 빈도가 확 낮아졌다. 2011년을 기점으로는 높은 아웃 코스에서 주로 사용하여 직구처럼 보이게 하다가 살짝 떨어져서 루킹으로 스트라이크를 잡는데 주로 사용하는 130km 중후반대의 낙폭이 큰 슬라이더와 스트라이크 존에서 뚝 떨어져서 헛스윙을 유도하는 낙폭이 작은 140km/h 대의 고속 슬라이더[8] 두 개를 주로 사용한다.

사실 윤석민의 패스트볼 구위는 A급은 아니나[9] 워낙 위력적인 슬라이더가 다른 구종을 커버가 가능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양준혁 등 일부 전문가들[10]은 윤석민의 서클 체인지업을 더 높게 평가하기도 했으며, 실제로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베네수엘라전에서는 파워피처가 아닌 팔색조 투구로 미겔 카브레라, 바비 아브레우를 비롯한 올스타급 라인업의 베네수엘라 타자들을 농락했지만, 그중에서도 서클 체인지업이 독보적으로 위력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2009년 WBC 당시 윤석민에 대한 평가 및 포심, 체인지업, 슬라이더 구종 분석) 그러나 '윤석민은 슬라이더'라는 세간의 평가와, 2011년을 기점으로 파워피쳐로 노선을 완전히 변경한 이후로부터는 더 이상 체인지업의 발전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를 미국에서의 실패의 원인으로 바라보는 이도 상당수 있다.[11]

KBO 기준에서야 구위와 무브먼트라는 상대적 약점을 빠른 구속과 제구로 커버하는 게 가능했지만, 미국 기준에서는 결코 빠른 구속이 아니였기에 구위와 무브먼트 문제만 부각되었기 때문. 미국 기준에서는 슬라이더만 노리고 들어가면 그만이었다. 자신의 최대 장점이었던 레퍼토리가 역으로 족쇄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2014시즌 류현진이 자신의 체인지업이 공략당하자 슬라이더[12]와 커브 조합으로 MLB의 타자들을 이겨낸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그나마도 노포크 시절 윤석민의 슬라이더는 2013년 부상으로 인해 위력이 국내에서의 전성기 시절과는 달리 낙폭이 적은 커터성 슬라이더가 되어버렸고, 이러한 구종의 무브먼트 감소는 가뜩이나 슬라이더를 노리고 들어오는 타자들에게 좋은 먹잇감이 되어 피홈런 증가라는 결과로 다가왔다.

여러 가지 구종을 잘 던지는 유형의 선수로 많이 알려져 있는데 그 예로 프로야구매니저의 윤석민 카드를 보면 각종 구종이 덕지덕지 붙어있다. 이런 이미지가 생긴 건 일단 본인이 구종을 배우는 데 열심이고 실전에서 한 번씩 사용해보긴 하기 때문.[13] 또 본인의 시그니쳐 구종인 슬라이더를 15분만에 익힐정도로 손감각 역시 좋기로 정평이 나있었다고 한다. 2008~10시즌 때는 그 류현진과 비견될 정도의 손감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평가도 있었을 정도. 일례로 광저우 아시안게임 훈련 중 임태훈에게 포크볼을 전수받기도 했으며, 2011 시즌에는 팀에 영입된 이범호를 통해 일본 투수들의 포크볼[14] 그립을 전해받아서, 자신만의 포크볼 그립을 만들어 활용해 보기도 했다. [15]

팜볼도 아주 가끔씩 던지곤 한다.그 일례로 2009년 한국시리즈 당시 6차전에서 이호준에게 팜볼[16]을 던지고 결승 홈런을 허용했다. 홈런 직후 카메라에 조범현 감독의 표정이 잡혔는데, 김현태 아나운서와 하일성 해설위원은 조범현 감독이 왜 이렇게 밋밋한 변화구를 던졌냐는 표정 같다고 해설했다. 이후 나주환에게 똑같은 변화구를 초구에 던졌는데 그 공으로 나주환을 유격수 땅볼로 잡아냈다. 이후 인터뷰에 따르면 "'또 쳐봐라'라는 심정으로 던졌는데 다 치더라"라고 인터뷰를 해서 한동안 까인 적이 있었다. 은퇴 후에 야신야덕에 나와서 밝히기를 자신은 포크볼을 던질 정도로 검지와 중지가 벌어지질 않아서 유일하게 포크볼만 못 던진다며 그 대신에 선택했던 게 비슷한 매커니즘의 팜볼이였다고 한다. 위의 포크볼 사용 경험과 합쳐보면 포크볼을 이래저래 던져보다가 영 아닌 거 같아서 선택했던 구질이였단 이야기. 실제로 자기 구질을 해당 영상에서 짚어주는데 포크볼은 말하지 않고 던지지도 않았다.

다양하게 구사하는 변화구 때문에 야구를 처음 접하는 라이트 팬들 중엔 다양한 구종과 제구력을 앞세운 피네스 피처로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정확히 말하면 그 윤석민은 2007~2010년까지의 윤석민이었고, 2005, 2006의 2년과 2011년 이후로는 패스트볼-슬라이더 투피치 위주의 파워 피쳐로 분류하는게 맞다. 물론 전자의 투구 스타일였어도 KBO 기준으로 패스트볼이 약했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변화구 비중, 그리고 코너웍 피칭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은데 막상 포심을 던져도 위력적이었던 것.

전반적인 스타일을 보면 일본 시절 데뷔 초의 다르빗슈 유와 비슷한 점이 많다. 다르빗슈 유 역시 그 강력한 패스트볼을 가지고도 뛰어난 손감각 덕에 다양한 구종의 변화구를 활용한 팔색조 투구를 선호했던 투수였던 데다[17]가 마침 시그니쳐도 슬라이더로 동일했다. 또 둘다 패스트볼을 중심으로 레퍼토리를 바꾸면서 엄청난 시즌을 보냈다는 점 역시 동일하다. 다만 다르빗슈 유는 뛰어난 피지컬에서 나오는 패스트볼의 구위와 솔리드함 덕분에 메이져에서도 통하고 롱런할 수 있었지만, 윤석민은 피지컬의 한계로[18] 인한 구위 및 내구성의 부족 때문에 미국에서는는 통하지 않았다.

변화구 위주로 삼진이 아니라 맞춰잡는 피칭도 곧 잘하는 투수다. 실제로, 2008년 숙취 상태[19]로도 온갖 아리랑볼을 뿌려대며 7이닝 1실점으로 막아내는게 가능했을 정도. 하지만 던지는 구종이 늘어날수록 내구성에는 문제가 발생했다.[20][21] 일례로 부상을 덜 당한 2008 시즌에는 다른 년도에 비해 패스트 볼의 비중을 비교적 높게 가져갔던 덕이 컸다.

다만 어디까지나 윤석민 치고 포심 비중이 높았던 것이지 파워 피쳐라고 하기에는 포심 비중이 확실히 낮았던 것은 사실이다. 2009, 2010 시즌에는 변화구 구사 비중이 눈에 띄게 높아졌고,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2008년에 비해 눈에 띄게 잔부상이 많았다. 이는 본인의 피지컬 변화에 따른 구종 선택의 변경일 가능성이 높다는 평. 실제 2008 시즌의 윤석민의 투구폼은 어깨상태가 절정이었기에 상체 위주의 부드러운 투구폼에 시속 140km 중후반대를 꾸준히 유지하는 패스트볼도 적당히 활용하는 피칭이었던 반면, 2009~10년의 윤석민은 이때보다 어깨 상태의 문제인지 포심의 위력이 떨어져 있었고, 이를 커버하기 위해 변화구 비중을 훨씬 높혔다.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 이후로 하체를 이용한 피칭을 시작하며 강력한 직구와 함께 안정적인 변화구 구사 방법을 터득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때문에 2011 시즌 초에는 그동안 상체위주로 던졌던 것과 달리 밸런스를 잡는데 애를 먹으며, 타자들이 아예 패스트 볼[22]은 버리고, 변화구에 타격 타이밍을 맞춰서 공략해 들어오곤 했다. 이 시기 구사비율이 높아진 서클 체인지업의 경우 장기인 고속 슬라이더과 패스트 볼과 비슷한 속도로 날아오다 속도를 유지한 채로 움직임에 변화를 일으켜 헛스윙을 유도하는 것과 달리 직구처럼 보이게 오다가 '속도가 느려지면서' 변화를 일으켜 헛스윙을 유도하는 구종이기 때문에 타격 리듬을 변화구 타이밍에 맞추고 있어야 공략이 가능한 공이고, 따라서 최소한의 패스트 볼 구위가 밑밥으로 깔려있어야 타자가 소위 직구-체인지업의 타이밍 이지선다에 걸려서 속아넘어가게 되는데, 지나치게 변화구 구사율이 높아지고 패스트 볼 비중이 줄어든 탓에 애초부터 타자들이 변화구에 배팅 타이밍을 맞춘 채 체인지업이 오기만을 기다리면서 족족 얻어맞게 된 것이다. 감독을 포함한 많은 전문가[23]들이 이 점을 지적했고 본인도 이를 인식했는지 패스트 볼과 슬라이더 위주로 피칭 내용을 바꿨고 커리어 하이를 맞았다.

전성기때 상체가 많이 흔들리는 투구폼으로 김성근이 체력 소모가 많고 롱런이 힘든 폼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24] 실제로 윤석민은 커리어 내내 내구성 문제를 노출했고, 5일 로테이션을 도는 다른 투수들과 달리 6일 로테이션을 돌아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럼에도 결국 롱런에 실패했다.[유리몸이라고 놀림받지만 선발과 마무리를 돌리며 애니콜의 계보를 잇게하는 정신나간 혹사인데 몇년동안 버텨준 것만 해도 대단한 것이다.] 한국 복귀 이후에는 체력 문제로 불펜투수로 2015년에는 중무리로 뛰었고, 2016년에는 선발 전환을 시도했으나 시즌 초반 부상 이후엔 다시 마무리로 돌아갔고 결국 선발 투수로 복귀하는 데엔 실패했다.

신인 시절에 마무리 투수로 뛴 적도 있기에[25] 팀 사정에 따라서는 불펜 투수로도 기용됐다. 이는 국가대표 차출 때도 해당되는 사항으로, 당시 윤석민은 선발과 불펜을 모두 잘하는 만능형 투수였기에 상황에 따라 중간계투, 마무리투수로도 나왔다. 실제로도 KIA의 중간이나 마무리가 헐거워졌다하면 가장 먼저 고려되던게 윤석민 불펜 전환 카드였다. 하지만 내구성이 좋지 않아 철저하게 관리받아야 하는 선수를 혹사시키게 된다는 점[26]에서 KIA 팬들은 양날의 검으로 생각했고, 이것은 윤석민의 커리어 전체에 아주 큰 악영향을 미쳤다.

4. 평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윤석민(투수)/평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연도별 성적[편집]



5.1. KBO[편집]


  • 푸른 글씨는 KBO 최다, 붉은 글씨는 1위 입상 성적. 진한 글씨는 리그 5위 내 입상 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05
KIA
53
84
3
4
7
0
.429
4.29
92
8
38
49
47
40
1.48
2006
63
(5위)
94⅔
5
6
19
(5위)
9
.455
2.28
81
5
31
75
26
24
1.14
2007
28
162
7
18
(1위)
0
0
.280
3.78
161
10
74
104
76
68
1.36
2008
24
154⅔
14
(2위)
5
0
1
.737
(5위)
2.33
(1위)
121
10
46
119
(5위)
45
40
1.05
(1위)
2009
27
119⅔
9
4
7
0
.692
3.46
110
9
52
117
52
46
1.29
2010
23
101
6
3
3
0
.667
3.83
95
5
39
94
48
43
1.30
2011
27
172⅓
(5위)
17
(1위)
5
1
0
.773
(1위)
2.45
(1위)
137
10
50
178
(1위)
53
47
1.05
(1위)
2012
28
153
9
8
0
0
.529
3.12
120
9
41
137
(4위)
60
53
1.00
(1위)
2013
30
87⅔
3
6
7
2
.333
4.00
91
9
29
76
41
39
1.36
2015
51
70
2
6
30
(3위)
0
.250
2.96
69
4
26
68
23
23
1.33
2016
16
31
2
2
1
6
.500
3.19
36
1
13
26
14
11
1.42
2017
1군 기록 없음
2018
28
40
0
8
11
0
.000
6.75
55
9
10
29
32
30
1.63
2019
1군 기록 없음
KBO 통산
(12시즌)
398
1270
77
75
86
18
.507
3.29
1168
89
449
1072
517
464
1.21

완투, 완봉 기록
연도
완투
완봉
2005년
0완투
0완봉
2006년
0완투
0완봉
2007년
2완투
(3위)
1완봉
(2위)
2008년
1완투
0완봉
2010년
1완투
0완봉
2011년
3완투
(1위)
3완봉
(1위)
2012년
3완투
(2위)
2완봉
(1위)
2013년
1완투
0완봉
2016년
1완투
(3위)
0완봉
KBO 통산
12완투
6완봉

5.2. MiLB[편집]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14
노폭 타이즈(AAA)
23
95⅔
4
8
0
0
.333
5.74
125
15
31
67
69
61
1.58
MiLB 통산
(1시즌)
23
95⅔
4
8
0
0
.333
5.74
125
15
31
67
69
61
1.58


6. 양현종과의 반비례?[편집]


같은 소속팀 KIA의 에이스인 양현종과의 엇갈리는 행보가 눈에 띈다. 2년 선후배로 거의 같은 동년배에 둘 모두 전성기 때는 리그에서 손꼽히는 에이스 투수였지만 공교롭게도 둘이 동시에 좋은 성적을 찍은 해가 없다시피하다.

07~08년까지 양현종은 포텐을 터트리지 못한 유망주였지만, 윤석민은 07년은 불운의 에이스, 08년은 평균 자책점 1위를 하며 에이스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09~10년은 양현종이 드디어 터지면서 좋은 성적을 찍었지만, 윤석민은 부진과 불펜기용, 부상 등으로 인해 2년 모두 규정이닝을 채우지 못하며 상대적으로 부진했다.

11~12년은 말이 필요없는 양붕괴 시즌. 2년 합쳐 WAR가 0.46이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반면 윤석민은 11시즌 투수 4관왕으로 MVP. 12시즌은 전년도보단 못하지만 준수한 1선발 성적을 찍어주며 주가를 올렸다. 덧붙여 이때 양현종은 부진한 자신과 달리 MVP를 찍으며 잘나가는 윤석민을 보고 이미 자신과는 비교할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다고.

13시즌은 양현종이 드디어 부활을 시작했다. 단, 그게 전반기라는 게 함정. 후반기는 부상으로 거의 못 나왔다. 그래도 비율 성적은 좋은 편이어서 충분히 희망을 보여준 시즌. 하지만 윤석민은 부진과 어깨 부상으로 불펜으로 보직 변경하였으나 비율 성적 또한 좋지 않아 FA 직전 해로썬 최악의 시즌을 보내고 말았다.

14시즌은 양현종이 완벽히 부활한 시즌. 윤석민은 노폭전드. 미국에서 완벽하게 말아먹고 이듬해 한국으로 복귀했다.

15시즌은 양현종이 무려 WAR 8을 넘게 찍으며 압도적인 리그 투수 1위, 윤석민도 마무리 투수로서 30세이브에 리그 구원투수 WAR 1위를 찍으며 둘 다 성공한 시즌이라고 볼 수 있겠다. 다만 윤석민이 본업인 선발투수가 아니었던 게 옥의 티. 따지고 보면 이때만큼 두 선수가 함께 잘한 적이 없었다.

16~17시즌은 양현종이 각각 200이닝, 20승을 찍어주며 이제는 KIA의 토종 에이스로서 완전히 자리매김했지만, 윤석민은 16시즌은 잠깐 보이더니 17시즌은 통째로 사라졌다.[27]

18시즌은 역시 꾸준한 양현종이 sWAR 리그 5위, 국내 선수중에선 2위를 찍으며 여전히 리그 탑급 에이스의 실력을 보여줬지만, 윤석민은 0승 8패 11세이브, 40이닝, 평균자책점 6.75 라는 재앙급 성적을 내면서 역시 무너졌다. 선발로나 불펜으로나 예전의 위용은 완전히 사라졌다.

19시즌, 양현종은 비록 초반에 부진한 모습을 보이며 규정 이닝 투수 최하위 평균자책점을 기록하기도 했으나 이후 미친 페이스로 평균자책점을 2점대로 끌어내리며 결국 리그 평균자책점 1위로 시즌을 마쳤고 WAR도 리그에서 투타 종합 1위를 기록했다.[28] 반면 윤석민은 등번호도 바꾸고 연봉도 대폭 줄였지만 이해 아예 1군 무대를 밟지조차 못 했으며 이젠 팬들 사이에서 관심조차 없을 정도. 결국 소리소문 없이 은퇴했다.

두 선수가 선발로 동시에 활약하는 것은 기아팬들의 소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윤석민까지 완벽 부활을 한다면, 혹은 둘의 전성기가 겹쳤다면 기아는 리그 탑급, 아니 KBO 역사상 최고의 국산 원투펀치를 보유 할 수 있었다. 다만 이제 윤석민의 부진기간이 너무 길어지고 몸 상태가 안 좋다는 소식이 계속 들려오면서 거의 포기 상태. 그리고 2019년 12월 13일자로 윤석민이 은퇴를 선언하면서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2021년 양현종은 MLB 도전을 선언하며 미국행을 택했고, 하필 이 해 윤석민이 뒤늦은 은퇴식을 치르면서 은퇴 자리에도 두 사람이 함께하지 못하게 되며 많은 KIA 팬들을 슬프게 했다.


7. 은퇴 이후[편집]



7.1. 골프선수 활동[편집]


파일:SU5GCILAJFB2EVOIKXLXTJ2Y7A.jpg

은퇴 후 취미로 즐기던 골프 훈련에 매진하면서 완전히 골프에 맛들렸고 KPGA 2부 투어 예선에 나간 적이 있다. 실력은 70타대 정도라는 증언이 있는데 이 정도면 아마추어는 평정한 레벨. 골프 관련 인터넷 방송이나 유튜브에 종종 출연하고 있어서 은퇴 이후로는 야구보다 골프계에서 얼굴을 자주 볼 수 있다. 2020년 12월에 정식 골프 선수가 되었다. 하지만 골프 선수가 되려는 것은 아니며,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이고 언젠가는 타이거즈로 돌아오고 싶다고 답했다.#

2020년 2월 재활 중에 골프를 치고 다녔다는 의혹에 대해 자신은 절대 아픈 채로 골프를 친 적이 없다며 부인했다. 하지만 반응들은 그다지 좋지 않은 게 스크린 골프에 빠졌다는 글이 2017년 해당 골프장 인스타에 올라왔고 당해년도 윤석민은 재활을 한다며 단 한 경기도 출전하지 않았다. 윤석민이 은퇴 이후에도 여론이 좋지 않은 큰 대목이다. 스톡킹 19-1회 영상에 게스트로 출연하여 겨울 시즌 때 사람들을 몰아서 만나고 오버스로에서 사용하는 어깨 근육과 골프 스윙 자세에서 사용하는 어깨 근육은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에 사실 야구 하는 데에 지장이 있는 부상이지만 골프 하는 데에는 지장이 없다는 식으로 발언한 것이 논란이 되었다. 사실 대부분의 프로야구 선수들이 시즌을 치르면 개인적 대인 관계가 허락되는 기간이 겨울에 한정되기 때문에 이해가 되지만 윤석민은 시즌 중에 1군도 2군도 제대로 뛰지 않았고 심지어 감독과 코치도 터치하지 않는 말년병장과 같은 포지션에서 고작 겨울에만 골프 쳤다고 하는 핑계가 먹힐 리가 없다. 이미 시즌 중에 스크린 골프장에 자주 드나든다는 썰이 돌 정도였으니...


7.2. 방송인 경력[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윤석민(투수)/활동 내역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3. 모던남 윤석민[편집]


소속사인 JDB엔터테인먼트를 통해 2022년 4월 6일부터 유튜브 '모던남 윤석민' 채널을 오픈했다.

'모든 걸 던지는 남자'의 준말로, 야구공 뿐만 아니라 다양한 물건들을 던저 표적에 맞추는 콘텐츠를 선보인다.

개설 초기 이후로는 상술된 물건을 던지는 콘텐츠나 야구관련보다는 골프 위주로 가고 있다. 그래도 2022년 10월 기준 업로드는 활발히 하는 편.

윤석민의 유명세에 비해서는 구독자 증가수가 높지 않은 편이다.

8. 여담[편집]


  • 원래 등번호는 20번이었으나 2010년에는 28번을 달았다. 그러나 2010년 성적도 부진했고 안 좋은 일에 휘말려서 28번을 반납하고 21번을 달았다.[29] 국제대회에서는 이승호(작은승호)와 진갑용이 쓰고 있는 번호다 보니 28번을 달았지만 좋은 의미로 남았다. 해외 진출 후 복귀 때에는 7년 만에 다시 20번을 달았다가 2018년부터는 본인과 아내, 아들의 생일일자와 동일한 24번으로 변경했다.

  • 광주댐, 석민어린이 등 별명이 상당히 많은데 대표적인 별명은 석개. 연패 기간내내 KIA 갤러리에서 윤석민 개새끼 해봐라는 꾸준글이 올라왔고 그것이 별명화돼버렸다. 윤석민 본인도 윤석개라는 말을 사용하는 게 트위터에서 밝혀졌다... 본래 뜻을 알고 쓰는 건지 아니면 2011년 최고의 시즌을 보내면서 석개가 윤석민 개쩔어로 변형되면서 그 뜻인줄 아는 건지는 본인만 알듯... 나중에 나쁜 뜻인줄 알았다고 트위터에 올렸다. 야구 갤러리 한정으로 타팀 팬들에게는 윤복서,[30] 윤공황[31] 등으로 불린다. 이후 ~개 가문은 '호투하는 KIA 토종 선발'로 용어가 바뀌면서 양현종의 붕개[32]로 이어지고, 한승혁, 이민우도 잠시 슝개, 식개라고 불린 적이 있었다.

파일:gsao9OL.jpg
  • 가끔 가다 윤섹서이라고도 불린다. 싸이에 올린 위 글 때문에... 덕분에 어린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했다는 이야기도 돌았지만, 박동희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쓴 글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다. PC방에서 싸이월드 로그아웃하지 않은 상태로 나가버렸다가 생긴 해프닝인 듯.

  • 동명이인 야구선수였던 타자 윤석민과 같은 초등학교, 중학교를 나왔던 사이이다. 심지어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같은 동네에 살아서 어릴 때부터 같이 놀던 사이였다. 그런데 서로 같이 놀면서도 이름을 몰랐고, 같이 리틀 야구단에 입단하면서 이름이 두 번 호명되어 그제서야 알게 되었다고 한다. 두 번 이름이 호명되자 둘 다 당황했는데, 그 대상이 같이 놀던 형/동생이었다는 것을 알고 더 놀랐다고. 투수 윤석민은 어릴 적 타자 윤석민에 대해 "그 형은 어릴 때부터 덩치가 워낙 크고 힘도 세서 동네 골목대장이었고, 놀다가 동생들이 말을 안 들으면 많이 때리기도 해서 같이 놀면서도 우리들끼리는 무서워하던 형이었다. 특히 지금은 내가 키가 좀 더 크지만 아직도 그 형만 보면 옛날 모습이 생각나서 무서울 때가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 예로 동네에서 같이 야구할 때 내 방망이를 빼앗아가기도 하고, 이것 때문에 슬슬 피한 적도 많다고 한다. 투수 윤석민은 프로야구 선수가 되고 나서도 어릴 적 이야기를 주변 선수들에게도 많이 해서 소문이 났는데, 타자 윤석민은 "내가 애들 괴롭히고 그랬다는 건 잘 기억이 안 난다."고 했다고. 타자 윤석민은 지금의 투수 윤석민을 "어릴 때부터 체격도 작고 말라서 항상 약해보였다."고 기억하며 지금의 위치에 오를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특이 사항은 구리 리틀야구단 시절에는 타자 윤석민이 투수, 투수 윤석민이 배터리를 맞추던 포수였다고 한다. 사실 중학교 뿐만 아니라 고등학교 때도 둘의 인연은 있었다. 많이 야탑고등학교 졸업으로 나와있어 둘의 인연이 중학교 때까지라고 알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투수 윤석민은 인창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던 투수 윤석민은 야탑고등학교로 전학가게 되면서 둘은 헤어지게 되었다. 이후 계속 다른 팀에서 활동하여 운명적인 인연(이름+동네+학교+야구)인 것 치고는 절친 급은 아닌 듯 하지만, 모 스포츠 신문 동명이인 특집에서 함께 인터뷰를 하면서 서로 더 잘 되기를 응원한다고 하는 등 친한 사이는 아니더라도 사이가 나쁜 건 전혀 아니다. 최근 슈퍼소닉 이대형에 타자 윤석민과 같이 출연하여서 말하길 프로와선 가끔 연락은 주고 받았다고 한다.

파일:994911_562501067150629.jpg
  • 윤희상과도 어린 시절 동네 야구를 같이 했던 친한 사이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두 윤석민과 윤희상 3명 다 리틀야구단에 지원을 했고, 200명 중 25명이 뽑혀서 구성됐었는데, 3명 다 리틀야구단에 뽑혔었다고 한다. 구리 리틀야구단의 경우 이 3명의 선수 외에 삼성 오재일도 구리 리틀야구단 출신이다.[33]
파일:attachment/1001132_407651466007481_892291847_n.png
  • 워낙 어린이 이미지도 강하고 강민호, 양준혁 등이 워낙 머리가 큰 것으로 유명해서 묻히는 감도 있지만, 의외로 대두의 소유자. 실제로 덕아웃에 있는 사진이나 다른 선수들과 어울려서 찍은 사진을 보면 유난히 머리가 큰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본래 아주 멀리서 줌으로 당긴 화면은 원근법이 사실상 무시되는 것이 맞다. 근데 뒤에 있는 사람이 앞에 있는 사람보다 커질 순 없다. 비교 대상자는 김원섭. 윤석민이 스톡킹에서 말하길 본인도 위에 사진을 봤다고 하며 차이가 나는 건 김원섭이 머리가 작아서 유독 그래보였다고.

  • 윤석민의 어머니는 아들을 훌륭한 야구선수로 키우고자 열심히 뒷바라지 했었다고 하는데, 기상 직후, 취침 직전 우유 500ml씩 매일 1L의 우유를 중고등학교 생활 내내 마셨다고 한다. 또한 등산이 취미였던 부모님이 더덕등을 캐와서 종종 먹기도 했는데, 어느 날은 감정가 700만원짜리 산삼을 캐오셔서 그 산삼의 열매까지 씹어 먹기도 했다고. 부모님의 이런 노력덕분인지, 부모님 키가 큰 편이 아닌데도 185cm라는 좋은 피지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

  • 2012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어 한국 축구 사상 첫 올림픽 메달을 기록한 풀백 윤석영이 윤석민의 6촌지간이다.# 어렸을 때에는 숨바꼭질도 하고 축구도 했던 사이였다고. 또한 2009년 신인드래프트에서 SK 와이번스의 3라운드 지명을 받은 윤석주도 투수 윤석민의 사촌 동생으로 알려졌었으나, 윤석민 본인이 사실이 아니라고 말했다. 위에 언급한 윤석영의 동생으로 윤석주라는 친척이 있는것은 사실이나, SK에 입단한 윤석주와는 동명이인이라고 한다.

  • 리틀야구 시절 홈런을 27개 쳤었다고 한다. 후에 회고하기로는 거의 매경기 홈런을 때렸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정확하지는 않지만 27개보다는 더 쳤을것 같아서 적당히 줄여서 말했다고. 타자가 아닌 투수로도 괜찮았는데, 당시 키가 작아서 고등학교 2학년 당시 윤석민 본인 피셜 최고 구속이 125km였다고 한다. 다만, 2학년 ~ 3학년 넘어가는 시기 키가 급속도로 성장[34]하여 구속이 15~20km 상승했다고 한다. 키가 늦게 커서 프로 이후에도 3cm가 성장했다고...

  • 2008 시즌 10승을 달성한 7월 15일 경기 2회말때 강민호에게 아리랑볼을 던지는 일이 있었는데, 당시 술에 취한 상태였다고 한다. 윤석민 팜볼 연습 본인 썰에 따르면, 올림픽 최종엔트리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 결정된 월요일에 소식을 듣고선, 불펜 포수와 함께 다음날 새벽 5시부터 오후 2시까지 술을 마셨는데 문제는 그게 선발 등판일인 화요일. 6시 30분에 경기가 시작되는데 6시 7분까지 술에 취해서 뻗어있었다고. 취기가 남아있는 정도가 아니라 그냥 취해있어서 실실 웃으면서 던졌었다고 한다. 문제는 그날 7이닝 1실점으로 승리투수가 되었다는 것... 2020년 10월 스톡킹에서는 이에 대한 이야기가 추가로 보완되었는데, 발표가 난 이후 이대진이 먼저 한 잔 하자고 했다가 이대진이 던지고 마셔. 라고 해서 그런 일을 저질렀다고.

  • 마구마구를 아주 잘한다고 한다. 2009년 올스타전에서 김현수와 마구마구 대결을 해서 이겼다. 임창용을 가지고 있다고. 기사에 의하면 마구마구에서 닉네임을 실명으로 쓴다고 한다. 자기 소개를 하고 게임을 시작한다고 하는데 믿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어느 날도 마구마구를 하면서 자기소개를 했는데, 니가 윤석민이면 난 이종범이다, 선배한테 인사해야지? 라는 드립을 들었던 것이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라 꼽은 바 있다. 2009년 8월 18일에는 자기 싸이월드 다이어리에 s.m이라는 마구마구 클럽을 만들어서 가입 신청을 받고 있다고 한다. 물론 초딩은 제외하고. 참고로 다이어리가 올라온 것은 16시. 즉 등판하기 2시간 전에도 마구마구 생각을... 마구마구에서는 자기 자신을 선발로 사용하는 타이거즈 올스타 덱을 사용하다가 중후반 쯤에 3엘리트를 비롯 괴악한 카드를 교체하는 잡덱으로 변모한다고 한다. 4월에는 이병규 엘리트를 획득(3이닝 10실점한 그날)하여 엘리트카드를 4장째 보유중. 휴식일에 마구마구에 출몰하여 이벤트성으로 유저들과 플레이한다고 한다. 이 마구마구를 좋아하고 잘하는 점으로 인해서 올스타전 시기에 김현수와 함께 켠김에 왕까지출연했다.

  • 2011년도의 화려한 성적을 재증명이라도 하듯, 각종 야구게임에서 매우 놀라운 성적으로 구현되고 있다. 마구마구에선 상급 레어에다가 후에 엘리트 카드가 추가됐으며, 프로야구 매니저에서는 1년에 투타 한장씩만 만든다는 EX 카드로 등장했다. 2014년 미국 진출로 인해 마구마구2014에서는 '박규환'이라는 가명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국내복귀로 최근 업데이트 이후 다시 본명으로 돌아왔다.

  • 2011 시즌 화려한 성적에 대한 비하인드로 나는 가수다 임재범의 모습을 보고 겸손한 마음에서 거만한 마음으로 마음을 바꿨었다고 한다. 그 뒤로 성적이 좋아졌는데 2011년 승수인 17승 중 5월~9월 사이 기록한 승이 16승에 이룰 정도라고 한다.

  • 2011 시즌 중 트위터를 개설했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고 비교적 트위터를 늦게 시작했음에도 글 올리는 속도가 무섭다. 비시즌 기간에 글이 많이 올라온다.


  • 2013 시즌 이후 FA 선언을 했었을 때 2월 이후까지 계약이 안 되다보니 국내 5개 구단이 컨택을 했었다고 한다. 당시 계약 규모도 100억 이상이었다고.


파일:0004411579_001_20210524074505206.jpg
  • 2016년 9월 지인의 소개로 만나 2년여간 교제해온 신인 탤런트 김시온[35]과 약혼식을 했다는 뉴스가 떴다. 시즌 후 결혼할 예정이라고.# 2009년 영화 여고괴담5에서 여고생 강민주 역으로 출연한 배우. 이후 집으로 가는 길에도 출연했으며, 영화 뿐아니라 2014년 연극 이바노프를 통해 대학로 무대에 서기도 했다.# 당초 2016년 11월 결혼 예정이었으나 아내가 12월에 첫째 아들을 출산하면서 결혼식이 늦춰졌고, 이른바 과속 스캔들이 되었다.# 여담으로 김시온의 모친은 중견배우 김예령이다. 동년 12월에 득남했으며, 2년 뒤 2018년에 다시 득남하면서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

  • 2017년 충남 소재 모 대학교[36] 야구부 감독이었던 정 모씨가 선수를 폭행한 혐의로 조사에 들어간 가운데, 10여년 전 정 씨가 야탑고등학교 야구부 투수코치였던 시절 현 KIA 선수인 제자에 폭행과 폭언을 일삼았던 사실이 밝혀졌다. KIA 선수단에서 야탑고 출신은 윤석민과 박정수 둘 뿐이고, 정 씨가 코치로 있었던 시기를 추론하면 윤석민이 피해자였던 것으로 나온다.[37]

  • 2020년 10월 스톡킹에서 오랜만에 근황을 알렸다. 갑자기 야구가 하고 싶어져서 공을 한 번 던져봤는데 직구가 108km/h가 나올 정도로 어깨가 많이 망가져 있었다고 한다. 그가 돈값을 못했다고 비난하던 이들이 많던 야구 커뮤니티에서도 안타깝다는 반응을 보였다.

  • 2021년 1월 28일에는 김준호, 김준현, 박나래, 유민상 등이 소속된 연예기획사인 JDB 엔터테인먼트와 전속계약을 체결하며 방송인으로서의 새출발을 알렸다.#

  • 2022년 4월 2일 MBC 지상파 2022년 프로야구 개막전 KIA vs LG 경기에서 해설위원을 맡았다.

  • 2022년 4월 광주MBC 유튜브 채널인 전설의 타이거즈 박재용-박지훈 편에 전화로 출연했다. 박지훈이 선수생활 당시 존경하는 선배로 윤석민을 말했으며 즉석에서 전화연결하였다. 윤석민은 정작 "박지훈이 왜 전설이에요?"[38], "저는 이 채널(전설의 타이거즈)을 잘 모르는데.."[39]로 답변했다.

  • 2022년 9월 현대건설광주광역시 광산구 첨단지구에 조성중인 고급 아파트 현대건설 라펜트힐의 가장 큰 평수인 302.36㎡(91평)을 계약했다고 한다. 분양가는 무려 30억원 정도라고 알려졌다.

9. 관련 문서[편집]



10. 둘러보기[편집]


파일:KBO 리그 로고(1982~2012).svg 2011년 7월 KBO 리그 월간 MVP
가르시아
(한화 이글스)

윤석민
(KIA 타이거즈)


최형우
(삼성 라이온즈)
[1] 최근 광주광역시 광산구 첨단지구에 들어설 아파트에 입주 계약을 했다고 한다.# [2] 교문초등학교에서 전학[3] 인창고에서 전학[4] 첫번째 타자 프랜차이즈 스타론 이적해 왔음에도 간판 스타이자 국가대표로 성장한 이용규가 있다.[5] 세 투수는 각각 한살씩 차이가 난다. 세 투수 모두 어린 나이에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 맹활약하여 일찌감치 군면제를 받고 리그에서 활약했으며 미국까지 진출했다.[6] 또한 하일성 해설위원은 김현태 아나운서와 함께 중계한 2009년 한국시리즈 6차전 경기를 시작하기 앞서 두 투수는 국내 선발진 가운데 가장 기술적으로 완성도가 높은 투수이며 경기 운용을 하는 방식이 비슷하다고 평했다.[7] 별명의 어원은 참조.[8] 특히, 마무리로 뛰던 2006년에는 최대 148km/h까지 나오는 탈 KBO급의 슬라이더로 유명했다.[9] 물론, 당시 패스트볼 구위 A급의 기준은 배영수부터 시작해서 류현진, 김광현, 오승환같은 2000년대 들어서도 손 꼽히는 수준의 패스트볼을 던지는 특급투수였다는 사실을 감안해야 한다.[10] 같은 시기를 뛰었던 심수창 해설위원이 윤석민은 당시 우완투수 중 독보적으로 서클 체인지업을 잘던졌다고 평가했었다. 다른 투수들은 서클 체인지업을 던질 때 중지까지 사용하는 게 고작인데 윤석민은 약지, 새끼손가락까지 다 활용했기에 회전 먹는 게 차원이 달랐다고.[11] 특히 2007년부터 2010시즌까지의 윤석민을 기억하는 팬들이 이런 의견을 많이 냈다. 이 때도 윤석민은 내구성이 문제였지 기량 자체는 2007년 극한의 팀운 때문에 17패를 하고도 3.78라는 방어율을 찍고, 2008년에는 평균자책점 1위를 기록할 정도 뛰어난 투수였기 때문. KBO 수준에서는 자신의 역량을 포심과 슬라이더에 몰빵하면서 자기 자신의 능력을 완벽하게 발휘할 수 있어도, 장기적으로는 자기의 최대 장점 중 하나인 구종 활용 능력을 깎아버렸다는 의견 역시 많다.[12] 다만, 이 슬라이더가 원인이 되어, 류현진은 기나긴 부상의 터널을 지나야만 했다. 부상 복귀 이후에는 이 때문에 커터로 선회했다.[13] 본인의 성격 자체가 일단 뭘 하나를 배우면 어떻게든 해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다. 그래서인지 방송에서 배우기만 하고 이런저런 핑계로 실전에서 배운 바를 써보지 않는 선수들을 답답해했다.[14] 특히, 자기처럼 손이 작았던 스기우치 토시야의 포크볼을 눈여겨봤었다고 한다. 그러나 비시즌 동안 계속 시도해봤지만 이 그립만큼은 도저히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해서 때려 치웠다고 한다. 관련기사[15] 결론적으로 손가락 길이의 문제로 포크볼만큼은 못던지는걸 후일 고백했다[16] 써클 체인지업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17] 지명 당시에 자기는 8구종을 던질수 있는 변화구 투수라고 표현했다. 엄청난 피지컬에서 나오는 강력한 패스트볼에 매료되어 스카우트한 니혼햄 입장에서는 뒷목을 잡을 지경.[18] 물론 이는 다르빗슈 유가 일본-이란 혼혈이기에 아시아에서 나오기 힘든 사기적인 피지컬을 타고났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윤석민도 아시아인 기준으로 나쁘지 않은 피지컬이었다.[19] 당시 다승 1위를 포함해 리그 정상급 성적을 찍고 있었음에도 베이징 올림픽 차출명단에서 탈락했다. 그 때문에 멘탈이 박살나버려서 선발 등판 전날이었음에도 술을 진탕 마셨다고 한다. 실제로 당시 윤석민 인터뷰를 보면 분명 정상적 상태라고 보긴 힘들다.[20] 물론 윤석민의 내구성은 커리어 내내 약점으로 지목되었던 것이기 때문에, 변화구 구사가 많아진다는 것 하나만 원인으로 볼 순 없다.[21] 사실 인간의 신체에 가장 좋지 않은 영향을 주는 구종은 구속이 가장 빠른 패스트볼이다. 인간의 신체로 정지 상태에서 130km/h 이상의 물체를 꾸준히 던지는 게 업인 투수는 누구든 서서히 노쇠화가 올 수밖에 없다.[22] 포심 제구가 이전과는 달리 불안정했던것도 있지만, 반대급부로 시즌 초반 부진했을때에도 구위 자체는 당시 KBO 기준 최상급이었다. 굳이 다른 비중이 높은 먹잇감을 놔두고 무리해서 포심을 공략할 필요가 없던 셈.[23] 특히, 이순철은 패스트볼만 던지더라도 타자들이 못치는데 왜 변화구를 던지냐며 윤석민이 잘던져서 데일리 MVP를 탄 날 인터뷰(3시간 13분 지점부터 인터뷰 시작)에서 청문회를 열기도 했다.[24] 다만, 이 때는 윤석민이 부진하고 있었던 2013년 이야기로, 최전성기였던 2011년의 투구폼이 상체가 많이 흔들렸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2008년부터 윤석민의 투구폼은 부드럽고 유연하기로 정평이 나있었다.[25] 2006년에 특유의 낙차 큰 슬라이더로 붙은 '광주댐'이라는 별명에서 윤석민이 얼마나 믿음직한 마무리였는지 알 수 있다.[26] 불펜 혹사도 혹사고, 선발과 불펜을 오가면서 나타나는 루틴의 변화 문제도 생각보다 적지 않다.[27] 특히나 이 해 양현종은 팀의 통합 우승과 20년 만의 토종 20승, 한국시리즈 MVP, 정규시즌 MVP까지 다 싹 쓸어갔다. 다만 정규시즌 MVP는 20승 및 팀 우승 등을 제외한 개인 성적만 보면 최정이 받았어야됐다는게 중론.[28] 오히려 이 시즌에 MVP를 받았어야했던 성적. 그러나 2017년과 비슷한 이유로 이번엔 본인이 조쉬 린드블럼에게 밀렸다.[29] 20번은 선배 조태수가 가져가서 다시 가져가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팀 후배 손영민은 자신이 달던 배번 21번을 선배에게 빼앗겼다.[30] 문에 주먹질하다가 부상당해 팀 16연패의 단초.[31] 공황장애 기사.[32] 이 쪽도 마찬가지로 2011, 2012시즌 당시 양현종이 크게 부진했을 때 마운드 붕괴 + 개새끼라는 뜻이 합쳐진 부정적인 별명이었지만 에이스로 각성한 지금은 애칭으로 쓰이고 있다.[33] 다만 오재일은 리틀 야구단 테스트에 한 번 떨어진 적이 있다고 한다. 처음 오재일이 테스트를 볼 때 너무 소심했던 나머지 왼손잡이라 말을 못하고 오른손으로 테스트를 본 바람에 떨어졌다고. 나중에 다시 왼손으로 테스트를 봐서 뽑혔다고 한다.[34] 12cm 컸다고 한다.[35] 이후 김수현으로 개명했다.[36] 현재 학교는 폐교되었다.[37] 배명고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으며 경동고 감독을 맡으면서 문제를 일으켰다. 금품 및 향응 수수와 관련 감사에 걸렸으며 2009년 야구부 입학예정자 12명의 학부모로부터 스카웃 명목으로 600만원을 수수했다.[38] 이 채널은 해태 타이거즈에서 활약한 은퇴선수들을 모두 전설로 호칭하며 KIA 타이거즈에서 은퇴한 선수들도 전설로 칭한다. 신종길이 출연하여 이건열과 전화통화를 하다가 "종길아? 니가 거기 왜 있냐? 니가 전설이냐? XX야"라고 일갈한 건 덤.[39] 2021년 초에 런칭한 채널로 구독자는 약 3만명이며 해태-KIA 팬들이 주요 시청자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2 12:28:38에 나무위키 윤석민(투수)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