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희(1944) (r20210301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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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희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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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주연상
제8회
(1971년)


제9회
(1972년)


제10회
(1973년)

윤여정
(화녀)

윤정희
(석화촌)


윤정희
(효녀 심청)

제9회
(1972년)


제10회
(1973년)


제11회
(1990년)
[1]
윤정희
(석화촌)

윤정희
(효녀 심청)


원미경
(단지 그대가 여자로만 이유만으로)

제30회
(2009년)


제31회
(2010년)


제32회
(2011년)

하지원
(내사랑 내곁에)

수애
(심야의 FM)
윤정희
()


김하늘
(블라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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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주연상
제7회
(1968년)


제10회
(1971년)


제11회
(1972년)

문희
(카인의 후예)

윤정희
(분례기)


고은아
(며느리)

제31회
(1993년)


제32회
(1994년)


제33회
(1995년)

심혜진
(결혼 이야기)

윤정희
(만무방)


최진실
(마누라 죽이기)

제46회
(2009년)


제47회
(2010년)


제48회
(2011년)

수애
(님은 먼 곳에)

윤정희
()


김하늘
(블라인드)


파일:백상예술대상_로고.png 영화부문 여자 최우수연기상
김지미
(1969년)

윤정희
(1970년)


윤정희
(1971년)
윤정희
(1970)

윤정희
(1971년)


고은아
(1972년)
고은아
(1972년)

윤정희
(1973년)


김지미
(1974년)



1세대 여배우 트로이카
윤정희
문희
남정임
2세대 여배우 신트로이카
정윤희
유지인
장미희
3세대 여배우 트로이카
원미경
이미숙
정애리[1]

윤정희
尹靜姬 | Yoon Jung-hee


파일:윤정희.jpg

본명
손미자 (孫美子)
출생
1944년 7월 30일 (77세)
경상남도 부산부[2]
국적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신체
160cm
직업
배우
배우자
백건우
자녀
딸 백진희[3]
학력
전남여자고등학교 (졸업)
우석대학교 (사학과 / 학사)
파리 대학교 대학원[4] (예술학 / 석사)
종교
천주교 (세례명: 데레사)
활동
1967년 ~ 현재

1. 개요
2. 활동
2.1. 1960년대
2.2. 1970년대
2.3. 1980년대 이후
3. 알츠하이머 투병, 방치 주장과 반박
4. 여담
5. 출연 작품
5.1. 영화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여성 배우. 피아니스트 백건우의 부인이며, 1976년에 결혼했다. 본명은 손미자.[5][6] 1944년 7월 30일에 출생하였고, 부산에서 태어나 광주에서 성장, 전남여고우석대(고려대학교로 통합)를 졸업하였다. 대종상 여우주연상 3회,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 3회, 백상예술대상 여자 최우수연기상 3회에 빛나는 전설적인 대배우이다.


2. 활동[편집]



2.1. 1960년대[편집]


1967년, 영화 청춘극장(1967)의 오유경 역할로 화려하게 데뷔했다.[7] 이후 남정임·문희와 함께 1960년대1970년대 대한민국 여자 영화배우 트로이카로 큰 인기를 얻었다. 청춘극장은 1967년 팔도극장 다음의 관객을 동원했다. 1968년에는 내시, 천하장사 임꺽정, 일본인 등으로, 1969년에는 독짓는 늙은이, 팔도 사나이로 큰 인기를 끌었다. 물론 이는 일부분일 뿐 흥행한 영화는 이보다 많다.

사실 그녀는 단순하게 인기가 많은 데에 그치지 않고 폭 넓은 배역폭을 보여줌으로써 영화사에 굵직한 기여를 했다. 한 블로거의 말에 의하면, 당시 젊은 여배우가 맡는 통상적인 역할은 청순가련형과 요부형 이 두 가지 역할이 대부분이었는데, 윤정희의 경우에는 이 두 역은 물론이고 백치미까지 능숙하게 연기했다고. 단순히 트로이카들과 비교해도 이 차이가 두드러지는데, 하이틴 스타와 같은 통통 튀는 발랄한 역을 연기한 남정임, 우수에 빠진 눈매로 비련의 여인을 연기했던 문희에 비해 폭 넓은 역을 맡았다. 또 그녀의 이미지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지적인 세련미이다.


2.2. 1970년대[편집]


그러나 문희미워도 다시한번의 흥행 이후 1969년에는 벽속의 여자, 꼬마신랑 등을 대거 흥행시키며 1970년대부터 윤정희를 능가하여 조금 위축된 감을 보여줬다. 1971년 문희, 남정임이 은퇴한 반면 윤정희는 결혼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활동했다. 1976년에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결혼했다. 부부 금슬은 굉장히 좋은 편이었다고 한다. 1977년에는 야행이 그 해 흥행 영화 5위권 안에 들어가며 저력을 보여줬다. 당시에는 영화 말고 드라마가 크게 성장했는데, 윤정희는 드라마에서도 활약을 한 적이 있다.

2.3. 1980년대 이후[편집]


그러다가 1981년, 자유부인 '81이 그해 흥행 1위 영화가 되면서 남정임, 문희가 이미 이룬 영화 1위 흥행 여배우 자리에 뒤늦게나마 올랐다. 1987년에는 위기의 여자로 흥행을 했다. 1994년에는 만무방으로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만 66세인 2010년 영화 ""로 청룡영화상과 대종상의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본인의 진가를 다시 한 번 입증했다.

다만 후술하겠지만 알츠하이머 투병 때문에 사실상 은퇴한 상태. 시 당시에도 알츠하이머 초기 증상으로 대사를 적어놓고 촬영에 임했다고 한다.


3. 알츠하이머 투병, 방치 주장과 반박[편집]


2019년 11월 중앙일보의 백건우 인터뷰를 통해 윤정희가 10여년째 알츠하이머 투병 중이라는 기사가 나왔다. # 현재 심각한 상태라고 전했다. 현재 그녀를 돌보고 있는 친딸 백진희 씨에 따르면 현재 친딸인 자신도 알아보지 못하며, 왜 자신을 엄마라고 부르냐고 한다고 한다...

2021년 2월 5일, 청와대 국민청원에 '외부와 단절된 채 하루하루 스러져가는 영화배우 윤정희를 구해주세요'라는 제목의 청원글이 올라왔다. 노컷뉴스, 머니투데이. 해당 청원에는 관리자에 의해 실명이 가려진 상태지만, 언론 기사의 설명을 보면 윤정희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청원자는 "2019년 4월에 남편 백건우와 딸이 서울에서 치료를 받던 윤정희를 파리로 끌고 갔다.", "현재 윤정희는 본인의 집에서 쫓겨나 파리 외곽의 아파트에서 홀로 알츠하이머 및 당뇨병 투병 중이다."라며 "백건우는 아내를 만나지 않은 지가 2년이 훨씬 넘었고, 아내의 병 간호도 못 하겠다면서 형제들한테 떠넘긴 지가 오래다."라고 주장했다.

다만 이 소식을 접한 네티즌들은 "프랑스에 살고 있는 개인 가정문제에 국가가 나서야 하나" 하는 반응이 다수이다. (파이낸셜뉴스), (한국경제), (MBN) 2018년 그랜드 캐니언 추락 사고 당시 사고 유학생의 치료와 이송을 도와 달라는 내용의 청원이 올라왔던 것과 비슷하다.

2월 7일, 백건우의 소속사인 빈체로는 "해당 청원의 내용은 거짓이며, 윤정희는 편안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내용의 반박 입장문을 발표했다. # 백건우 측에 따르면 윤정희의 알츠하이머가 심해져 2019년 초 윤정희가 모친상을 당하여 귀국했을 때 한국에서 요양원 등 머물 곳을 알아봤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에서 너무 유명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결국 프랑스 오케스트라 단원인 친딸 백진희 씨 파리 집 근처에 거처를 마련하여 간호사들과 함께 돌보고 있다고 전했다.

또한 지난 2019년 윤정희의 친동생 3인이 윤정희의 배우자인 백건우와 친딸 백진희 씨에 대한 재산, 신상 후견인 지위 이의 신청을 프랑스 법원에 제기하였다가 패소한 사실이 알려졌다. 2019년 9월 프랑스 1심에서 패소했고, 파리고등법원에 항소하여 2020년 11월 최종 패소했다. 파리고등법원은 "손미자(윤정희의 본명)가 배우자 및 딸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현재 그녀는 안전하고 친숙한 환경에서 안락한 조건을 누리고 있다."고 판단했고, "배우자와 딸이 그녀에게 애정을 보이지 않으며, 그녀가 적절한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있고 금전적 횡령이 의심된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판결로 인해 백건우와 백진희씨의 후견인 지위가 법적으로 유지되었다. #

2월 9일, 윤정희의 동생인 손병욱 씨는 중앙일보를 통해 백건우 측의 입장문을 반박했다.# 우선, 프랑스에서 진행된 윤정희의 후견인 선정 재판에 대해서는 "백진희는 프랑스 시민이지만, 같이 후견인 신청을 한 윤정희의 세 형제는 외국 국적이라서 불리하게 진행됐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리고 돈 때문에 이번 분쟁이 벌어졌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우리 형제들은 (스스로) 살아가는 데 문제가 전혀 없다"면서 "직계 가족이 있는 형제 명의의 재산을 어떻게 노릴 수가 있나. 가능하기나 한가"라고 반박했다.

일단 현재까지 상황을 정리해 보면 백건우와 윤정희의 친정 집안 사람들 간의 윤정희의 후견인 문제로 생각 이상으로 오랫동안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4. 여담[편집]


한때 일가족이 북한으로 납북될 뻔한 큰 위기도 겪었다. 자세한 내용은 백건우 항목 참고.

TV로 생중계 되었던 2006년 제27회 청룡영화상 시상식으로 오랜만에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는데, 등장과 동시에 울먹거리더니 당시 수감되어 있던 절친한 동료 배우 신성일을 선처해달라는 매우 적절치 못한 망언 발언으로 엄청나게 비난 받았다. 이를 본 시청자들은 어리둥절.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요즘 영화배우가 있느냐'면서 영화와 TV를 오가며 활동하는 배우들을 비판하였는데, 정작 그 자신도 1972년 TBC드라마 사모곡에 출연한 적이 있다. 그러게 그냥 가만히 계시지!

중학교 동창인 어느 어르신의 회고에 따르면, 마의 16세 소녀 시절에도 복도에서 마주치면 뒤돌아서 다시 볼 정도로 예뻤다고 한다.

인기 절정이던 20대 시절, 의외의 부업을 한 적이 있다. 다름아닌 통닭집. 워낙 바쁜 일정 탓에 경영은 어머니가 맡아서 하셨으나 엄연히 '사장'은 윤정희였다. 가게의 주인이 톱스타 윤정희인 데다 음식의 맛도 좋아서 한동안 성황리에 운영되었다고.

국내외의 각종 영화상,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만 무려 24번이나 수상한 대배우이다.[8][9]

파일:20100812000861_0.jpg
앙드레 김과 함께 사진을 찍은 적이 있다.


5. 출연 작품[편집]




5.1. 영화[편집]


제목
상영일자
관객수(명)
배역
청춘극장
1967.07.01
206,000
오유경 역
강명화
1967
100,000
강명화 역
안개
1967.10.19
136,000
하인숙 역
내시
1968
320,400
자옥 역
천하장사 임꺽정
1968
152,000

일본인
1968
118,000

장군의 수염
1968
102,000

독짓는 늙은이
1969
136,627
옥수 역
야행
1977.04.23
135,047
현주 역
자유부인 '81
1981.06.13
287,919
선영 역
만무방
1994.10.22
14,502
주인여자 역

2010
218,898
양미자 역

[1] 최근에는 정애리 대신 이보희가 3세대 트로이카의 일원으로 대체되었지만 당대 인기도를 봤을 때 이는 바람직하지 않다. 정애리는 드라마를 중심으로 활약하고 이보희는 영화를 중심으로 활약했는데, 80년대에는 드라마의 지명도가 영화보다 압도적으로 높았다. 당연히 정애리의 인기는 이보희를 까마득히 앞섰으며, 남녀노소가 다 아는 여배우였지만 이보희는 영화관을 찾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지명도가 적은 편이었다. 그러나 80년대에도 이보희를 원미경, 이미숙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트로이카의 일원으로 보던 전례가 있었으므로 이보희 항목에는 정애리 대신 이보희를 트로이카 표에다 넣었으니 자세한 내용은 이보희 문서 참고.[2] 현재 부산광역시.[3] 1977년생으로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4] 불어로는 Université de la Sorbonne Nouvelle.[5] 배우 금보라와 본명이 같다.[6] 이창동 감독의 영화 에서 맡은 배역 이름(양미자)과도 같다.[7] 지금 이 영화는 원본이 소실되었으나 중국어 더빙이 남아 있다.[8] 최근 언론에 언급되는 원로 배우 그 누구도 윤정희의 발 끝에 못 미친다. 사실 원로 배우들 중에서는 단순히 상 몇 번 타거나 광고 몇 번 출연한 것 가지고 연기의 화신처럼 대접 받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원로 배우들 상당수가 젊은 시절에 무명인 경우가 많다. 그도 그럴 것이 윤정희는 젊은 시절에 무명이었던 이들과 달리 젊은 시절에도 연기력, 흥행력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했기 때문이다. 이는 오늘날 원로 여배우의 최정상에 오른 김혜자도 예외가 아니다. 김혜자의 경우는 영화보다는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두각을 드러냈고, 30대부터 본격적으로 활동하느라 만추 같은 예외를 제외하면 주부 역을 주로 맡은 경우가 많다. 다만 연기력만큼은 이미 활동 초반부터 인정 받은 실력파 배우다. 그런데 이런 경우는 남배우의 경우도 마찬가지라서, 오늘날 원로 남배우의 대명사로 손꼽히는 이순재의 경우 물론 젊은 시절에도 주연급으로 종종 활약하기는 했으나 당대의 남궁원, 최무룡, 신성일 등과 비교하면 한 급수 아래로 취급받았었다.[9] 반대로 젊은 시절에 정점을 찍은 배우들 상당수는 말년에 잘 활동을 하지 않거나, 아예 은퇴를 해서 대중에 잊혀지는 경우가 많다. 이미 인기에서 정점을 찍어 더 이상 연예계에 미련이 없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