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회부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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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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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택상 → 김동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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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봉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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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순주 → 조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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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성수 → 이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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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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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녹영 → 조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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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승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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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재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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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낙주
| 허경만
| 이춘구 → 이한동
| 홍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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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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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사덕 → 김종하
| 김종호
| 김태식
| 조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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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덕규
| 박희태
| 이용희
| 이상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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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재철
| 박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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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승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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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희
| 정진석
| 김영주
| 정진석 → 정우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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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국회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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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정치인.
1904년
전라북도 김제군 백산면 석교리에서 아버지 윤영삼(尹永三)과 어머니 나주 나씨 사이에서 3남 3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 서울중동중학교와
일본 도쿄고등사범학교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이후 일선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으며,
익산시 남성중학교,
남성고등학교 교장을 역임하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김제군 을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제4대,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주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서 당선되었다. 당시 민주당 구파에 속하였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정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을 지역구에서 당선되었다. 그러나 1965년
한일기본조약 체결에 반대하여 의원직을 사퇴하였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서 당선되었다. 1968년부터 1970년까지 국회부의장을 역임하였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대문구 병 지역구에서 당선되었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유진산의 노선에 반발하여 신민당을 탈당하고
민주통일당에 입당하였다.
그러나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대문구 지역구에 출마하였다가 친야
무소속 김재광 후보와
민주공화당 오유방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서예에 전념하였다.
1986년 7월 24일에 서울 종로구 누상동의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향년 82세.
역대 선거 벽보[4] 제3~6대 국회의원 선거벽보는 확인 되지 않고 있다. 이는 당시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선거벽보 보존의 필요성을 못 느껴 선거벽보를 보존하지 않은 것이 그 원인으로,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을 비롯한 1950년대 부터 정치를 시작한 원로 정치인들의 선거벽보 상당수를 확인할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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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와 관련해서 1968년 콘크리트
광화문 현판식 때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이름난 서예 전문가답게 현판을 보고는 냅다
"아니 어느 놈이 저걸 글씨라고 썼냐!"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는데 옆에 있던 동료 정치인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박정희 대통령을 가리키자 또 큰 소리로 "
아, 그래도 뼈대 하나는 살아 있는 글이구먼!"이라고 했다고. 실제 사진으로도 확인 가능한 현판식 당시의 현판은 한글 정자체였는데 글씨가 상당히 조악한 편으로, 현판식 후 얼마 뒤에 소리소문없이 한글 반흘림체로 바뀌어 2000년대까지 걸려있었다. 둘다 박정희 대통령 글씨로, 박 대통령 자신도 첫 번째 현판이 그닥 마음에 들진 않았던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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