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제술

덤프버전 :

파일:국회휘장.svg
대한민국 국회부의장

[ 펼치기 · 접기 ]
제헌
신익희 김약수 윤치영
김동원
[[제2대 국회|{{{-2 {{{#fff 제2대

]]
[[제2대 국회|{{{-2 {{{#fff 제2대

]]
장택상 김동성
조봉암
조봉암
윤치영
[[제3대 국회|{{{-2 {{{#fff 제3대

]]
[[제3대 국회|{{{-2 {{{#fff 제3대

]]
최순주 조경규
곽상훈
조경규
황성수 이재학
[[제4대 국회|{{{-2 {{{#fff 제4대

]]
[[제4대 국회|{{{-2 {{{#fff 제4대

]]
이재학
한희석 임철호
김도연
이재형
[[제5대 국회|{{{-2 {{{#fff 제5대

]]
[[제5대 국회|{{{-2 {{{#fff 제5대

]]
이영준
서민호
소선규
[[제6대 국회|{{{-2 {{{#fff 제6대

]]
[[제6대 국회|{{{-2 {{{#fff 제6대

]]
나용균
장경순
이상철
[[제7대 국회|{{{-2 {{{#fff 제7대

]]
[[제7대 국회|{{{-2 {{{#fff 제7대

]]
윤제술
장경순
정성태
제8대
장경순
정해영
[[제9대 국회|{{{-2 {{{#fff 제9대

]]
[[제9대 국회|{{{-2 {{{#fff 제9대

]]
김진만
이철승
구태회
이민우
제10대
민관식
고흥문
[[제11대 국회|{{{-2 {{{#fff 제11대

]]
[[제11대 국회|{{{-2 {{{#fff 제11대

]]
채문식
김은하
윤길중
고재청
[[제12대 국회|{{{-2 {{{#fff 제12대

]]
[[제12대 국회|{{{-2 {{{#fff 제12대

]]
최영철
김녹영 조연하
공석
장성만
[[제13대 국회|{{{-2 {{{#fff 제13대

]]
[[제13대 국회|{{{-2 {{{#fff 제13대

]]
노승환
김재광
김재광
조윤형
[[제14대 국회|{{{-2 {{{#fff 제14대

]]
[[제14대 국회|{{{-2 {{{#fff 제14대

]]
황낙주
허경만
이춘구 이한동
홍영기
[[제15대 국회|{{{-2 {{{#fff 제15대

]]
[[제15대 국회|{{{-2 {{{#fff 제15대

]]
오세응
김영배
신상우
김봉호
[[제16대 국회|{{{-2 {{{#fff 제16대

]]
[[제16대 국회|{{{-2 {{{#fff 제16대

]]
홍사덕 김종하
김종호
김태식
조부영
[[제17대 국회|{{{-2 {{{#000 제17대

]]
[[제17대 국회|{{{-2 {{{#000 제17대

]]
김덕규
박희태
이용희
이상득
[[제18대 국회|{{{-2 {{{#fff 제18대

]]
[[제18대 국회|{{{-2 {{{#fff 제18대

]]
이윤성
문희상
정의화
홍재형
[[제19대 국회|{{{-2 {{{#fff 제19대

]]
[[제19대 국회|{{{-2 {{{#fff 제19대

]]
이병석
박병석
정갑윤
이석현
[[제20대 국회|{{{-2 {{{#fff 제20대

]]
[[제20대 국회|{{{-2 {{{#fff 제20대

]]
심재철
박주선
이주영
주승용
[[제21대 국회|{{{-2 {{{#fff 제21대

]]
[[제21대 국회|{{{-2 {{{#fff 제21대

]]
김상희
정진석
김영주
정진석 정우택

역대 국회의장




대한민국 제7대 전반기 국회부의장
윤제술
尹濟述 | Yun Je-sul


파일:윤제술.jpg

출생
1904년 1월 29일
전라북도 김제군 백산면 석교리 양청마을#
(現 전라북도 김제시 백산면 양청1길 54-3)
사망
1986년 7월 24일 (향년 82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누상동 자택
묘소
전라북도 김제시 백산면 석교리 양청마을
본관
파평 윤씨

운재(芸齋)
재임기간
제7대 전반기 국회부의장
1967년 7월 10일 ~ 1969년 7월 9일

[ 펼치기 · 접기 ]
부모
아버지 윤영삼, 어머니 나금영
형제자매
3남 3녀 중 첫째
배우자
송이순
자녀
슬하 3남 3녀
학력
남성중학교 (졸업)
서울중동중학교 (졸업)
도쿄고등사범학교 (영문과 / 졸업)
의원 선수
6
의원 대수
3, 4, 5, 6, 7, 8
경력
남성중학교 교장
남성고등학교 교장
제3~5대 국회의원 (김제군 을)
제6~8대 국회의원 (서울 서대문구 갑)
제7대 전반기 국회부의장

1. 개요
2. 생애
3. 선거 이력
4. 여담
5.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정치인.


2. 생애[편집]


1904년 전라북도 김제군 백산면 석교리에서 아버지 윤영삼(尹永三)과 어머니 나주 나씨 사이에서 3남 3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서울중동중학교일본 도쿄고등사범학교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이후 일선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으며, 익산시 남성중학교, 남성고등학교 교장을 역임하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김제군 을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제4대,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주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서 당선되었다. 당시 민주당 구파에 속하였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정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을 지역구에서 당선되었다. 그러나 1965년 한일기본조약 체결에 반대하여 의원직을 사퇴하였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서 당선되었다. 1968년부터 1970년까지 국회부의장을 역임하였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대문구 병 지역구에서 당선되었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유진산의 노선에 반발하여 신민당을 탈당하고 민주통일당에 입당하였다.

그러나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대문구 지역구에 출마하였다가 친야 무소속 김재광 후보와 민주공화당 오유방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서예에 전념하였다.

1986년 7월 24일에 서울 종로구 누상동의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향년 82세.


3.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54
제3대 국회의원 선거
전북 19[A]

[[무소속|
무소속
]]

8,028 (20.81%)
당선 (1위)
초선
1958
제4대 국회의원 선거
전북 21[*A ]


22,144 (56.50%)
재선
1960
제5대 국회의원 선거
전북 22[*A ]
24,444 (62.67%)
3선[1]
1963
제6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10[B]

[[민정당|
]]

27,404 (41.02%)
4선[2]
1967
제7대 국회의원 선거

[[신민당(1967년)|
파일:신민당 벽보글씨.svg
]]

54,416 (56.15%)
5선
1971
제8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13[C]
48,083 (65.72%)
6선[3]
1973
제9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5[D]

파일:민주통일당.svg

50,351 (19.81%)
낙선 (3위)


역대 선거 벽보[4]

[ 펼치기 · 접기 ]

파일:윤제술5.jpg


파일:윤제술7.png

제5대 국회의원 선거 (전북 22)[A]
제7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10)[B]

파일:윤제술8.png


파일:윤제술9.png

제8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13)[C]
제9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5)[D]


4. 여담[편집]


서예와 관련해서 1968년 콘크리트 광화문 현판식 때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이름난 서예 전문가답게 현판을 보고는 냅다 "아니 어느 놈이 저걸 글씨라고 썼냐!"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는데 옆에 있던 동료 정치인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박정희 대통령을 가리키자 또 큰 소리로 "아, 그래도 뼈대 하나는 살아 있는 글이구먼!"이라고 했다고. 실제 사진으로도 확인 가능한 현판식 당시의 현판은 한글 정자체였는데 글씨가 상당히 조악한 편으로, 현판식 후 얼마 뒤에 소리소문없이 한글 반흘림체로 바뀌어 2000년대까지 걸려있었다. 둘다 박정희 대통령 글씨로, 박 대통령 자신도 첫 번째 현판이 그닥 마음에 들진 않았던 듯 하다.

5. 둘러보기[편집]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2 15:01:34에 나무위키 윤제술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A] 김제시 을[1] 1961.5.16 자격정지(5.16 군사정변)[B] 서대문구 을[2] 1965.8.12 의원직 사퇴[C] 서대문구 병[3] 1972.10.17 자격박탈(10월 유신)[D] 서대문구[4] 제3~6대 국회의원 선거벽보는 확인 되지 않고 있다. 이는 당시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선거벽보 보존의 필요성을 못 느껴 선거벽보를 보존하지 않은 것이 그 원인으로,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을 비롯한 1950년대 부터 정치를 시작한 원로 정치인들의 선거벽보 상당수를 확인할 수 없게 되었다.